허겁지겁 산을 내려오니 반월봉의 산길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그러한 길을 모르고 나뭇가지를 헤치며 미끄러지듯 내려온 것이다. 예비군 훈련장이 있는 금산에 공주묘도 있다던데 말벌들 때문에 찾기를 다음으로 미루었다. 내삼미2동 죽미말 끄트머리 언덕 아래 계곡에는 양돈 축사들이 늘어서 있다. 분뇨의 냄새가 산골짜기로 올라온다. 멀리 필봉산의 모습은 정말 붓끝처럼 생겼는데 묵향이 아닌 이 냄새는 무엇인가.
발길을 화려한 외장의 모텔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빠져나왔다. 산 위에서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1번 국도를 타고 초전비 쉼터에서 음료수라도 마시고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도변에 승마클럽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달려들듯이 으르렁거린다. 승마장도 포기하고 뒷걸음치며 그 흰 개를 피하며 빠져나와 발길을 돌려 초천비로 향했다. 추석 명절이 가깝기 때문인지 오르내리는 차량들이 붐빈다.
예전부터 있었음직한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서너 그루가 있다. 주유소를 지나 UN 초전비 입구로 들어섰다. 유엔기와 태극기를 비롯하여 참전16개국의 외국국기가 나란히 게양되어 펄럭인다. 하얀 무궁화도 만발이다.
UN 참전 16개국은 미국(육/해/공/해병 302,483명), 영국(육/해/해병 14,198명, 캐나다(육/해/공군 6,146명), 터키(육군 5,455명), 오스트레일리아(육/해/공군 2,282명), 필리핀(육군 1,496명), 뉴질랜드(육/해군 1,389명), 타이(육/해/공군 1,294명), 이디오피아(육군 1,271명), 그리이스(육/공군 1,263명), 프랑스(육/해군 1,119명), 콜롬비아(육/해군 1,068명), 벨기에(육군 944명), 남아프리카 공화국(공군 900명), 네덜란드(육/해군 819명), 룩셈부르크(육군 100명)과 비UN회원국 일본이 비밀리에 연인원 1,204명의 해군을 파견하였다.
계단 위로 올라서니 그날의 전투하는 모습의 동상이 있고 19.5m의 하늘로 치솟은 조형기념탑이 우람하게 치솟아있다. 초전비의 상징탑은 본래 도로 건너편에 옹색하게 있었다. 그곳의 초전비 건립 당시의 비문이다.
1950년 7월 5일 이 자리에서 미 제24보병사단 소속 제21연대 및 제52야포대대 A중대로 구성된 스미스전투부대 406명의 장병이 미합중국 군대와 공산침략군 간의 최초의 전투를 개시했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우노라
1950년 7월 5일 아침 8시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여기 죽미령에서 동족상잔의 첫 전투는 시작되었다. 유엔군 스미스 특공대와 페리포병대는 인민군 전차와 접전 끝에 150명의 전사 또는 부상, 실종되었고, 72명이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것은 미군의 완전한 패배였다. 스미스부대는 겨우 6시간 동안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고, 은계(위포)를 통해 안성으로 후퇴하였다. 북한군의 전차는 오산을 지나 평택으로 물밀 듯이 공격하며 내려간 것이다. 물론 북한군도 42명이 죽고 85명이 부상했다고 한다. 동상의 전면과 측면에 새겨진 비문과 스미스 장군의 회고문을 옮겨본다.
북괴의 이리 떼 38 선을 넘으니 / 자유수호 위해 유엔은 일어나다. / 폭력엔 폭력을 다짐하고 / 급히 달려온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 / 앞장서 죽미고개에 서고 / 한국군 제 17 연대 이에 따르니 / 한,미 연합 작전의 서막은 열리다. / 혈전 6시간 15분 피바다 이루고 / 화선은 낙동강으로 이어지네. / 한 품은 고혼 이 곳에 잠드니 / 혈맹의 우의 어찌 잊으랴.
1982. 4. 6 준공
지금으로부터 30 여년전 북한공산 집단은 물밀듯한 기세로 38선을 넘어와 무자비한 공격을 감행하였읍니다.
그들은 공산주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을 전세계에 드러냈읍니다.
미 제 21 보병연대와 제52 야전포병대대의 장병들로 편성된, 나의 부대는 적의 공격을 불과 몇 시간밖에 지연시키지 못하였지만, 그러나 이 전투는「미합중국은 싸워보지도 않고 우방과 동맹국의 파멸을 방임하지는 결코 않는다」는 사실을 경고하는데에는 크게 기여하였읍니다.
회고컨대 오산전투와 그 이후에 벌어진 수 많은 타 전투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이 군사적 안정을 이루어 공산세력의 팽창으로부터 자유세계를 방위하는 보루로 발전할 수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음니다.
본인은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이「평화를 누리기위하여 계속 치루어야할 대가는 힘과 경제 그리고 헌신이라는 것」을 항상 가슴깊이 새겨두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바입니다.
1981년 12월 7일
미 육군 준장(예비역)
차알스,비,스미스
필자와 친구인 최창근 씨가 운영하는 초전비쉼터는 죽미령을 지나가던 많은 사람들이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들 수 있는 곳이다. 모처럼 만난 그는 자주 오라는 말을 거듭하며 손을 잡는다. 옛날에는 중미(中美) 혹은 죽밑, 죽밋, 죽담점(竹潭店)이라고 부르는 대나무가 많았다는 곳이다. 삼미(三美)라는 지명유래도 정조대왕이 능행차를 하실 때 필봉산 소나무, 문시 오동나무와 죽미령 대나무가 아름다워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건너편으로 건너가기 위해 횡단보도 신호등 앞에서 서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신호가 바뀌지 않는다. 보턴을 눌려야 되는 줄을 몰랐다.
새로 난 철로의 지하도를 건너 논둑길을 걷는다. 이곳도 내삼미2동이다. 유난히 밤나무가 많은 동네이다. 옛날 흙벽돌집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 뒷길 들깨밭길을 지나 검디산 아랫길로 들어섰다. 옛날에는 수렁논이 많았던 곳이다. 이노스빌 아파트 104동 뒤편이다. 양지바른 이곳은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받는 고려시대 충신 문헌공 최충(崔沖) 선생을 모시는 서원이다. 최충 선생은 갓 스무 살에 장원급제하여 목종, 현종, 덕종, 정종, 문종 다섯 임금님을 섬기고 문하시중(門下侍中, 지금의 총리)에 오른 분이다. 선생의 두 아들도 역시 재상을 역임하였다.
문헌서원은 황해도 해주에 있는데, 1985년 선생의 탄신 1000주년을 맞아 종산이 있는 이곳 오산에도 창건하게 된 것이다. 이동구 화가가 그린 벽화에는 출생, 장원급제, 출장입상, 집무광경, 구재, 기념비, 문헌서원 전경이 그려져 있다.
당시 교육기관은 국립 국자감이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교육 기관은 선생이 세운 구재학당으로부터 시작된다. 가정교육이 중요성을 일깨운 두 아들을 훈계하는 글‘계이자시’를 옮긴다.
우리 집안에는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좋은 물건은 없으나
오직 값진 보배로 간직해 내려오는 것이 있다.
문장을 비단으로 여겼고
덕행을 곧 옥으로 생각했다
오늘날 서로에게 이르는 말을
부디 뒷날에도 잊지를 말아라
그러면 나라를 위해 귀히 쓰이는 인재가 되고
대대로 더욱더 번영할 것이다.
문헌서원의 앞쪽으로는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예전에 논과 밭이었던 곳인데 요즘에는 변하여 위치 파악조차 어렵다. 수청동 원불교 교장을 지나 청수산 아래 선불사를 들렸다. 과거에 왔던 기억이 있다. 문 안을 들어서니 좁은 마당에 7m 높이의 미륵존불과 13층 연화탑이 있고 뒤편 구석에 산신당도 보인다. 스님께 여쭤보니 대운(大雲)스님에 의해 절을 세운 지 29년째라고 한다. 기억으로는 그보다 더 오래된 것 같았는데 필자가 군 생활 시절에 들렸던 것 같다.
금암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철거민 농성 임시 사무실이 있다. 붉게 혹은 검은 글씨의 현수막들이 철조망에 덕지덕지 붙어있다. 어찌되었든 내일 한가위만이라도 넉넉한 마음들로 보냈으면 한다.
산업도로와 국도가 분리되는 고가도로 바로 그 옆에 넓은 수목원이 자리 잡고 있다.‘경기도산림환경연구소’라는 현판이 정문의 오른쪽에 붙어있다. 잘 가꾸어진 나무들이 울창하다. 예전에 이곳에서 백일장과 사생대회를 개최하여 진행했던 기억도 있다. 나무마다 표찰이 있어 나무이름도 확인할 수 있었다. 요즘 산을 오르면서 나무와 풀이름을 몰라 답답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앞으로 여기에 와서 문의하면 궁금증이 풀리겠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수목원 뒷문을 통해 금암동 마을길로 올라갔다. 들녘의 벼들이 그야말로 황금빛이다.
내일은 민족의 명절 추석이다. 오늘은 대전에서 올라온 양재백 선생과 동행하고 있다. 필자는 어제도 사전 답사를 했다. 최소한 외지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위치 정도는 정확히 일러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어제는 금암동의 작은말이 있는 수목원 뒤편을 증산길을 둘러보았다. 얼마 전 도예가 김용문의 형인 김용석 씨를 만났을 때 가마를 새로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궐동 택지개발구역의 북서쪽 대형아파트 뒤편에 스레트지붕을 얹은 옹색한 가마터는 주인 없는 표시가 뚜렷하다. 오랜 기간 사람의 발길이 끊어졌는지 잡초들만 무성하다. 그 위로‘주안교회’라는 팻말이 붙은 비닐 천막교회도 보인다. 사람이 사는 민가는 건너편 하상철(73) 옹 댁 뿐이다. 서에서 동으로 내리뻗은 골짜기 논에는 잘 익은 벼들이 가로막은 고층아파트를 원망하고 있는 느낌이다. 시원스레 뚫렸던 앞길이 꽉 막혔으니 말이다. 뒤쪽 오강굴 산자락 밑에 소설 쓰는 강희백 이사장이 운영하는‘오산신경정신병원’과‘오산노인전문병원’건물이 큼직하다.
건너편에서 쇠를 자르는 듯한 소음이 들리기에 그곳으로 가보니‘미륵사’라는 절 아래에‘대경산업’이라는 내화벽돌공장이었다. 유리제품 공장 등에 납품하는 용광로용 내화벽돌을 제작하는 공장이다. 필자가 몇 차례 스쳐지나갔지만 공장주변에 널빤지들이 쌓여있어 건축용 자재 창고인 줄로 착각했었다.
금암동(錦岩洞)의 지명유래가 금바위라고 부르듯 아름다운 돌들이 많은 지역이다.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논 가운데에도 커다란 바위가 있다. 지석묘에 대한 설명과 함께 제3호 표석이 있다. 양재백 선생은 연신 이상하다는 표정이다. 아무리 보아도 지석묘는 아니라는 표정이다. 아직까지 지석묘에서 부장품이나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지는 않았으니 필자도 강력하게 주장할 입장은 되지 못했다.
마침 한가위 명절을 쇠러 집에 내려온 금암동에서 태어난 중학교 동창 한규남 씨를 만났다. 이 마을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지 않겠느냐며 안내까지 자원하고 나선다. 그의 집 앞마당 평상에서 송편과 정종을 대접받은 후 지석묘 탐사 길에 나섰다. 올해가 지나면 모두들 이 정든 마을을 떠날 것이다. 오늘 같은 정겨운 인정을 다시 찾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한규남 씨는 자신의 집 안에도 지석묘가 있다며 장독대 옆으로 안내했다. 분명히 모양은 다른 지석묘와 다를 바 없는 바위이다. 집의 기둥이 그 위에 맞물려있다. 시에 등록은 되지 않았지만 또 있다면서 최건영 씨 집으로 안내한다. 그 집의 앞마당과 뒤뜰에도 비슷한 바위가 있다. 특히 은행나무 고목이 있는 그의 집 뒷길에는 엄청나게 큰 바위 두 개가 있다. 어릴 적에는 그 바위 밑에서 놀기도 했다는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이다. 바위 밑 터줏자리에 정한수를 놓고 치성도 드렸다는 얘기도 들려준다.
지석묘 제1호는 은행나무집 흙담장 안에 있었다. 주인은 이게 무슨 지석묘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비웃는다. 그 집 뒷길에 있는 제2호까지 와서는 오산시사에 성혈이 3개 있다고 적혀있는데 이게 무슨 성혈이냐며 그 당시 조사했던 사람들이 전후 사정도 모르면서 그랬다는 것이다. 바위 위에 구멍은 예전에 자신의 외조부가 구들로 쓰기 위해 뚫었던 자국이라고 했다. 제4호는 과거 마을 공동우물터가 있는 왼편에 있었다. 그것도 사람들이 밭을 일구면서 밑으로 굴렀다고 한다. 제5호와 제6호도 마을 뒷산 아래에 있었으나 다른 바위들과 별로 다른 점이 없었다.
세마대까지 둘러보겠다는 우리들의 말에 한규남 씨는 자신의 차로 이동하자고 제안한다. 우리는 산 위로 넘어가기로 하고 그는 뒤편으로 차를 운전하고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여계산은 서랑동, 지곶동, 세교동에 걸쳐있는 해발 158.7m의 비교적 높은 산이다. 이괄 장군이 무술을 연마했다는 장군바위, 원님을 사모하는 여개라는 기생이 원님을 끌어안고 죽었다는 여계바위, 임진왜란 때 아기가 숨어있던 바위를 톱으로 잘라 애기를 죽였다는 애기바위 등 큼직한 바위들이 많다.
허우적거리며 당집이 있다는 도덕산(여계산) 산봉우리로 올라갔다. 기와를 올린 2평 남짓한 당집은 음침한 빈 기와집이다.‘1967. 7.26 준공’이라고 음각한 글씨에도 먼지가 뽀얗다. 하지만 매년 음력 시월 초하루와 사흘 사이에 날을 잡아 마을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지석묘 제7호는 석산골 저수답 산길 밭머리에 있었다. 동네에서는 거북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제8호는 산기슭에 있었고, 제9호는 서랑리 고갯길을 넘어가기 전의 동물농장 안에 있는 제법 큰 바위였다. 빙 둘러 철책으로 막고 지석묘에 대한 설명문 게시판을 세워놓았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난 한규남 씨의 친절한 안내까지 받으며 지석묘를 둘러보았지만 다른 곳에서 보았던 지석묘와 비교해도 도무지 지석묘라는 인식이 서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석묘는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다.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 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인 지석묘는,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것을 탁자식(卓子式) 또는 북방식이라 하고,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것을 바둑판식(碁盤式) 또는 남방식이라 하는데, 바둑판식에서 받침돌이 없는 것을 따로 개석식(蓋石式) 또는 무지석식(無支石式)이라고 구분한다. 우리는 북방식, 남방식, 개석식이니 하며 지석묘에 대한 논쟁을 했지만 속 시원한 결론을 얻을 수는 없었다.
앞으로 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결론이 내려지길 기대하고, 특히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것들이 고증을 받을 때까지 훼손되지 않고 보존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에는 모두 동의했다.
한규남 씨는 예전에 효자문이 있던 자리가 있다며 아랫말로 가자고 했다. 녹지원 농장 맞은편이었다. 효자문은 이미 없어지고 잡초들만 우거져 있다. 허탈한 마음으로 우리는 그의 자가용을 타고 손쉽게 금암동에서 세마대 정상까지 올라섰다. 며칠 지나면 추석이다.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 필자의 졸시 한 편으로 대신한다.
청솔잎 씹으며
등 굽은 산을 본다
맨손을 움켰다 펴면
꿈틀대는 강줄기
외발로
훌쩍 뛰어서
그대 품에 안기고파
보름달 반절로 접어
헛바람은
밀어내며
고단한 객고 이겨서
한줌 가득 채워 넣고
서러움 배재기될까
야무지게 다지는 송편
키 낮춰
어린 두 딸 머리 곱게 빗겨 주며
빔 없어도 내색 않는
솔잎 같은
아내 마음
없어도 없는 체 말고
어깨 펴고 살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