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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許蘭雪軒
明宗 18년(1563)에 태어나서, 宣祖 22년(1589)에 27세의 나이에 요절한 조선 중기의 여류 시인..
본명은 초희(楚姬)..호는 난설헌(蘭雪軒).. 명문가에서 태어나 오빠와 동생 사이에서 어깨 너머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당시의 최고 詩人 이달(李達)에게서 詩를 배웠다.
허초희 ... 許楚姬... 난설헌의 삶은 매우 짧았다. 너무 짧았다 (1563~1589). 그녀는 스물일곱 아까운 나이에 꽃처럼 떨어졌다. 하지만 그에게는 詩가 있었다. 고독하여도 높다란 정신적 거처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허씨 형제의 긍지인 문향(文香)이 뿌듯이 서려 있었다.
난설헌은 강릉에서 초당 허엽의 3남 3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천부적인 재능 덕에 난설헌은 아버지와 오빠의 뜻에 따라 詩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스승은 손곡 이달(蓀谷 李達)로, 오빠 허봉의 친구이자 동생 허균의 스승이었다. "성당 3시인"으로 불리는 당대의 문장가이지만, 기녀(妓女)의 아들이라 뜻을 펼 수 없는 이달(李達)을 허씨 형제의 스승으로 모신 것이다. 여기서 허씨 집안의 진보적 면모가 드러나는데, 그러한 세계관이 선구적인 여성시인 난설헌과 "홍길동"의 저자 許筠을 낳았을 터이다.
그녀의 생애
1563년 : 강릉 초당 생가에서 당대의 석학, 초당 허엽의 셋째 딸로 태어난다. 1570년 : 8세 때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짓는다. 이에 대하여는 후술. 1577년 : 15세에 안동 김씨 가문의 김성립에게 출가를 하게 된다. 1580년 : 그녀 18세 때, 아버지 허엽이 상주에서 객사한다. 1582년 : 20세 때, 전 해 딸을 잃었고, 이 해에 아들 희윤을 잃는다. 1583년 : 21세 때, 둘째 오빠 허봉이 10만양병설을 주장한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가 오히려 귀양을 가게 된다. 1588년 : 둘째 오빠 허봉이 금강산에서 객사한다. 1587년 :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경기도 광주 초월면 지월리 경수산에 묻히게 된다. 1589년 : 남편 김성립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남양홍씨와 재혼하였다. 1590년 : 동생 허균이 친정에 남아 있던 난설헌의 시를 모아 <난설헌집> 초고를 만들고, 서애 유성룡에게서 발문을 받았다. 1592년 : 남편 김성립이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1598년 : 허균이 정유재란 때 원정 나온 명나라 오명제에게 난설헌의 시 200여 편을 전해주어, 이 시가 명나라에서 편찬한 <조선시선>에 수록되었다. 1606년 : 허균이 명나라 사신주지번, 양유년 등에게 난설헌의 시를 전해주어 <난설헌집>이 명나라에서 간행되었다. 1607년 : 허균이 <난설헌집>을 목판본으로 출판하였다. 1711년 : 난설헌집이 일본에서 간행되었다.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오다 상주 객관에서 객사하였으며, 오빠 허봉이 정치적인 이유로 귀양갔다가 유배가 풀린 후에도 서울에 돌아오지 못하고 방랑하다가 금강산 근처에서 죽었으며, 어머니는 전라도 진산에서 여행하다가 소화불량으로 객사하였다. 난설헌의 아들과 딸은 일찍 잃었고, 그녀가 죽기 얼마 전에는 뱃속의 아기까지 잃는 등 불행한 일도 많이 겪었다. 그 과거에 급제한 남편도 임진왜란에서 전사하였고, 동생 허균 역시 광해군 연간에 역모죄로 처형되었다. 가문의 몰락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난설헌과 허균에 대한 폄훼로 이어진다.
그녀의 일생
난설헌은 고려 말의 유명한 재상인 陽川 許氏 문경공 허공(許珙)의 혈통을 이어, 선조 때의 석학인 초당 허엽(草堂 許曄)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큰 오빠인 허성(許筬)과 두 언니는 허엽의 전처인 韓氏에게서 태어났으며, 허봉(許峯)과 허균(許筠) 그리고 허난설헌은 후처인 金氏에게서 태어났다. 그런데 후처인 김씨 소생의 3남매가 문학적인 감수성을 타고 났으며, 남다르게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부딪히다가 모두 일찍 죽었다.
난설헌의 이름은 초희(楚姬)이고, 자는 경번(景樊), 난설헌은 그의 호이다. 여자로서 남자처럼 이름과 字와 號를 가진 것은 매우 드문 경우이다. "경번"이라는 그녀의 字는 중국 초나라의 번희(樊姬)를 사모하여 지은 것이다.
1563년에 태어나 문장가이었던 아버지와 오빠들 사이에서 자라나 자연스럽게 글을 배웠다. 특히 아버지가 퇴계 이황 뿐 아니라 화담 서경덕(화담 서경덕)에게서도 글을 배웠으므로, 그의 집에는 道敎에 관한 서적들도 많았으며, 난설헌은 특히 "태평광기(太平廣記)"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 난설헌은 그런 책들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신선세계(神仙世界)에 접근할 수 있었다. 화담 서경덕의 제자 가운데 神仙術을 닦았던 문인들이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난설헌이 후기에 신선세계로 눈을 돌린 것은 자연스러운 변모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그는 신선세계를 상상하였으며, 여덟살에 지었다는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은 그의 독서와 상상이 만난 뛰어난 문학작품이다.
8세에, 상상 속의 하늘의 황제가 살고 있다는 백옥루(白玉樓)를 연상하며 그 궁전을 건축하는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 신동이란 말을 들었고, 우리나라 규방문학의 금자탑으로 일컬어지는 규원가(閨怨歌)를 지어 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족적을 남겼다.. 그리고 그 글씨는 한석봉이 썻고, 강릉의 기념관에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 15세에 안동 김씨 가문의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하였으나, 남편은 妓房를 드나들며 풍류를 일삼았으며, 시어머니는 시기와 질투로 그녀를 학대하였다.
게다가 어린 남매를 잃고, 뱃속의 아이마저 流産됬다. 친정집에는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허균(許筠)도 귀양가버리자 삶의 의욕을 잃고, 詩를 지으며 나날을 보내다가 27세에 요절했다. 詩 213首가 전해지고 있다. 난설헌의 작품 세계와 사상도 괄목할만 하지만, 특히 그의 여자로서의 파란만장한 一生이 신사임당과 대비되어 많이 이야기되고 있으며, 한편의 소설과도 같은 삶을 살다가 27세에 죽었다.
그러나 신혼 중의 아내가 남편을 그리워하며 지어 보낸 시가 "방탕스러운 데가 가까우므로 시집에 싣지 않는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난설헌이 살았던 시대는 비인간적인 시대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오지도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그의 시들은 지어졌다. 그러다가 이토록 비인간적인 현실을 떠나서 그녀는 신선세계로 눈을 돌렸던 것이다.
허난설헌의 奇異한 죽음
난설헌은 말년에 후원에다 별당을 지어놓고 화판을 쓰고 선녀처럼 살면서 늘 신선세계를 꿈꾸며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꿈 속에서 신선셰계에 올라갔다가 자기가 죽을 꿈을 꾸었다. 난설헌이 일찍이 월성(月星)이 운(韻)을 부르며 詩를 지으라 하므로, "아리따운 연꽃 스물 일곱 송이 분홍꽃 떨이지고 서릿발은 싸늘해라"라는 詩를 지었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그 경치가 하나하나 상상되므로 "몽유기(夢遊記)"를 지었다. 그 뒤에 그녀의 나이 27세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 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 금년이 바로 3과 9의 수( 3×9 = 27로 27세를 듯함)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를 맞아 붉게 되었다" 하고는 유연히 눈을 감았다. 이 시는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난설헌은 문학적 상상력만이 뛰어났던 것이 아니고 신선술도 닦아 초인적인 계시력을 지녔던 것 같다.
"조선의 여자"라는 굴레와 시적 구원
허난설헌은 다음의 셋을 한탄하였다. [ 조선에서, 여자로 태어나,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 자의식강하고 재능 많은 여인에게 그것이 치명적인 굴레가 되었음은 충분히 짐작된다. 더욱이 여자는 이름도 필요 없다던 가부장사회이었다. 그 와중에 남편도 마음에 차지 않았으니, 난설헌이 오직 詩를 도피처이자 구원처로 삼았을 법하다.
시를 통한 해방과 구원은 유선시(遊仙詩)에 특히 많다. 유선시는 신선에 대한 사고와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필력은 물론, 우주를 아우르는 상상력을 요해서 본래 남성의 분야로 여겨졌다. 그런데 배움이 많은 남성 사대부들도 못 쓰는 유선시를 난설헌이 써냈고, 이는 세간의 입방아를 타게 된다. 많은 말 중에서 난설헌이 유선시를 7세에 지은 천재라는 소문도 있었는데, 그 이름이 중국에서 유명해지고 떠돌며 "전설"로 변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난설헌은 遊仙詩를 87首나 남기고 있다. 허균이 간직한 게 그 정도이니, 난설헌이 유선시를 얼마나 더 지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香寒月冷夜沈沈 / 笑別嬌妃脫玉簪 / 更把金鞭指歸路 / 碧城西畔五雲深 ....향기로운 달빛 차가운데 밤은 깊어만 가고 / 웃으며 이별하며 교비 옥비녀를 뽑아준다 / 금채찍 다시 들어 돌아갈 길을 가리키니 / 벽성 서쪽 언덕에는 오색구름이 자욱하다.
이 시에서 난설헌은 "교비(嬌妃)"라는 女神이 누군가에게 옥비녀를 뽑아주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여신이 주도하는 만남을 통해 여성의 주체성을 부각하며 금지된 자유를 초월하는 즐거움을 담아낸 것이다. 이렇듯 시비할 특성이 종종 보이는데다 여자가 높은 기상의 유선시를 쓴 것 자체가 남자들에게는 못마땅했을 것이다.
난설헌은 號 외에 "경번(景樊)"이라는 자(字)를 가질 만큼 자의식이 강하였다. 그런데 여자가 號 하나로도 과하거늘, 심지어 字를 갖고 있다고 시비 거는 남자가 많았다. 당(唐)의 유명한 시인 번천(樊川)을 따르려 하였거나, 女神 번(樊) 부인에 대한 경모이거나, 난설헌의 기개가 마뜩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유교적 세계관에 갇힌 남자들의 질타와 조롱에도 난설헌의 자존과 시적 추구는 꿋꿋하였다. 字가 무엇을 의미하든, 그가 꿈꾼 세계가 거기 있었다.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樑文
허난설헌은 그녀 나이 8세에 이 상량문을 짓고 신동이라는 칭송을 얻었다고 한다. "난설헌집(蘭雪軒集)"에 전하는 유일한 산문이다. "난설헌집"에는 모두 詩만 실려 있고, 散文은 이 상량문 1편뿐이다. 상량문을 집을 지을 때 대들보를 올리며 행하는 상량의식에 쓰이는 글이다. 이 글은 8세 밖에 안된 아이가 상량문을 지었고, 名文이라는 소문이 퍼져서 여러 사람들이 이 글을 보기를 원하였다.
허난설헌의 아우 허균(許筠)이 수안군수(遂安郡守)로 재직하던 1605년 5월에 석봉 한호(石峯 韓濩)의 글씨로 충천각(沖天閣)에서 목판본으로 1차 간행되었다. 이 목판본은 1606년에 사신으로 왔던 중국의 주지번(朱之蕃)의 요구에 의하여 중국으로 건너갔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목판본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은 허균이 공주목사로 재직하던 1608년 4월에 간행된 목판본 "난설헌집"에 덧붙여 실려 있다 (위 사진). 이 글은 1608년 4월에 간행된 "난설헌집"에 실려 있을 분, 원본 글씨나 목판을 찾을 수 없고, 탁본만 국내에 전해지고 있다.
보배로운 일산(日傘)이 하늘에 드리워지니 구름 수레가 색상의 경계를 넘었고, 은빛 누각이 해에 비치니 노을 난간이 미혹된 티끌 세상을 벗어났다. 신선의 나팔이 기(機)를 움직여 구슬기와 궁전을 짓고, 푸른 이무기가 안개를 불어서 구슬나무 궁전을 지었다. 청성장인(靑城丈人)은 옥 휘장의 道術을 다하고, 벽해왕자(碧海王子)도 금궤짝의 묘방을 다 베풀었다. 이는 아늘이 지은 것이지 사람의 힘은 아니다. 광한전 주인의 이름은 신선 명부에 오르고, 벼슬도 신선 반열에 들어 있어서, 태청궁에서 용을 타고 아침에 봉래산을 떠나 저녁에 방장산에서 묵었다. 학을 타고 삼신산을 향할 때에는 왼쪽에 신선의 부구(浮具)를 붙잡고, 오른쪽에 신선 홍애(洪厓)를 거느렸다. 천년 동안 현포에서 살다가 꿈 속에 한 번 인간 티끌 세상에 늦었는데, 황정경(黃庭經)을 잘못 읽어 무양궁에 귀양왔다. 적승 노파가 인연을 맺어주었다. 다함이 있는 집에 들어온 것을 뉘우쳤다.
병 속의 신령스러운 약을 잠시 현사에 내리자, 발 아래의 달이 문득 계수나무 궁전으로 몸을 숨겼다. 웃으면서 붉은 티끌과 붉은 해를 벗어나자 자미궁의 붉은 노을을 거듭 헤치며, 난새와 봉황이 피리 부는 신령스러운 놀이의 옛 모임을 즐겁게 계속하였다. 비단장막과 은병풍에 홀로 자는과부는 오늘 밤이 지나가는 것을 아쉬워하니, 이찌 일궁(日宮)의 은혜로운 명령을 월전(月殿)에까지 아뢰게 할 수 있으랴.
벼슬 맡은 무리들은 몹시 깨끗해서 그 발로 팔색 노을의 관청을 밟으며, 지위와 명망이 드높으니 그 이름이 오색 구름의 전각을 짓눌렀다. 옥도끼에서 차거운 기운이 나니, 계수나무 밑에서 吳質이 잠들 수 없었다. 예상우의곡을 연주하자 난간 가에 있던 素娥가 춤을 추어 올렸다. 영롱한 노을빛 노리개와 노을빛 비단이 신선의 옷자락에서 펼쳐지고, 반짝이는 성관은 별빛 구슬로 머리꾸미개를 만들었다. 여러 신선들이 모여들 것을 생각해 보니, 상계에 거처하던 누각이 오히려 비좁게 느껴졌다. 푸른 난새가 옥비의 수레를 끄는데 깃으로 만든 일산이 앞서고, 백호가 조회에 참석하는 사신을 태웠는데 황금 수실이 그 뒤의 먼지를 따랐다. 유안이 경전을 옮겨 전하자 두 마리의 용이 책상 위에서 태어나고, 희만이 해를 쫒아가자 팔방의 바람이 산비탈에 머물렀다.
새벽에 상원부인을 맞아들이자 푸른 머리는 세 갈래 쪽이 흩어졌고, 낮에 상제의 따님을 만났더니 황금북으로 아홉 무늬 비단을 짜고 있었다. 요지의 여러 신선들은 남쪽 봉오리에 모였고, 백옥경의 여러 임금들은 북두칠성에 모였다. 唐宗은 공원의 지팡이를 밟아 우의를 삼장에서 얻었고, 手帝는 화선과 바둑을 두며 온누리를 한 판에 걸었다. 붉은 누각이 높게 지어지지 않았더라면 어찌 편하게 붉은 깃발을 세우고 조회에 참례할 수 있으랴.
이에 十州에 통문을 보내고 九海에 격문을 급히 보내어, 집 밑에 장인의 별을 가두어 놓게 하였다. 목성이 재목을 가려쓰고 鐵山을 난간 사이에 눌러놓으니, 황금의 정기가 빛을 내고 땅의 신령이 끌을 휘둘렀다. 노반과 공수에게서 교묘한 계획을 얻어내어 큰 풀무와 용광로를 쓰고, 기이한 재주를 도가니에 부리기로 하였다. 푸르고 붉은 꼬리를 드리우자 쌍무지개가 별자리의 강물을 들이마시고, 붉은 무지개가 머리를 들자 여섯 마리 자라가 봉래섬을 머리에 이었다. 구슬 추녀는 햇빛에 빛나고 붉은 누각이 아지랑이 속에 우뚝했다. 비단 창가에는 유성이 이어지고, 푸른 행랑을 구름 너머에 꾸미었다. 玉기와는 물고기 비늘같이 이어졌고, 구슬 계단은 기러기 같이 줄을 지었다. 미련이 깃대를 받드니 월절이 자욱한 안개 속에 내리고, 부백이 깃대를 세우자 난초 장막이 삼진에 펼쳐졌다. 비단 창문의 수술을 황금노끈으로 매듭짓고, 아로새긴 난간의 아름다운 누각을 구슬 그물로 보호하였다. 신선이 기둥에 있어 오색 봉황의 향기로운 누대에서는 기운이 불어나오고, 선녀가 창가에 있어 쌍 난새의 거울갑에서는 향수가 넘쳐 흐른다. 비취 발과 운모 병풍과 청옥 책상에는 상서로운 아지랑이가 서리고, 연꽃 휘장과 공작부채와 백은 평상에는 대낮에도 상서로운 무지개가 둘러쌌다. 이에 봉황이 춤추는 잔치를 베풀고, 제비가 하례하는 정성을 펼치게 하였으며, 널리 백여 신령을 초대하고, 널리 천여 성인을 맞이하였다.
서왕모를 북해에서 맞아들이다 얼룩무늬 기린이 꽃을 밟았고, 노자를 합곡관에서 영접하자 푸른 소가 풀밭에 누웠다. 구슬 난간에는 비단무늬 장막을 펼쳤고, 보배로운 처마에는 노을빛 휘장이 나직하게 드리웠다. 꿀을 바치는 왕벌은 옥을 갈이는 집에 어지럽게 날고, 과일을 머금은 雁帝는 구슬을 바치는 부엌에 드나들었다.
쌍성의 나전 피리와 안향의 은쟁은 우아한 곡조에 맞추고, 완화의 청아한 노래와 비경의 아름다운 춤은 하늘의 신령스러운 소리에 얽혔다. 용머리 주전자로 봉황의 골수로 빚은 술을 따르고, 학의 등에 탄 신선은 기린의 육포 안주를 바쳤다. 구슬 돗자리와 옥방석의 빛은 아홉 갈래의 등불에 흔들리고, 푸른연과 하얀 복숭아 소반에는 여덟 바다의 그림자가 담겼다. 이 모든 것이 다 갖춰졌지만, 구슬 상인방에 상량문 글이 없는 것만이 한스러웠다.그래서 신선들에게 노래를 바치게 하였지만, 청평조(淸平調)를 지어 올렸던 이백(李白)은 술에 취해서 고래 등을 탄지 오래이고, 옥대(玉臺)에서 시를 짓던 이하(李賀)는 사신(蛇神)이 너무 많아서 탈이었다. 백옥루 새로운 궁전에 명(銘)을 새긴 것은 산현경의 문장 솜씨인데, 상계에 구슬을 아로새길 채진인(蔡眞人)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나는 스스로 三生의 티끌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운데, 어쩌다 잘못되어 九皇의 서슬 퍼런 소환장에 이름이 올랐다. 江郞의 재주가 다해서 꿈에 오색찬란한 꽃이 시들었고, 梁객이 詩를 재촉하니 바리에 三聲의 소리가 메아리쳤다. 붉은 붓대를 천천히 잡고 웃으며, 붉은 종이를 펼치자 강물이 내달리듯, 샘물이 솟아나듯 상량문 글이 지어졌다. 子安의 이불을 덮을 필요도 없었다. 구절이 아름다운데다 문장도 굳세니, 李白의 얼굴을 대해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비단주머니 속에 있던 신령스러운 글을 지어 올리고, 백옥루에 두어서 선궁(仙宮)의 장관을 이루게 하였다. 쌍 대들보에 걸어두고서 육위(六偉) 자료로 삼는다.
들보 동쪽으로 떡을 던지네
새벽에 봉황을 타고 요궁(瑤宮)에 들어갔더니
날이 밝으면서 해가 부상(부상) 밑에서 솟아올라
붉은 노을 일만 올이 바다를 붉게 비추네
들보 남쪽으로 떡을 던지네
옥룡이 아무 일 없어 연못 물이나 마시니
은평상 꽃그늘에서 낮잠을 자다 일어나
웃으며 요희(瑤姬)를 불러 푸른 적삼을 벗기게 하네
들보 서쪽으로 떡을 던지네
푸른 꽃에 이슬이 떨어지고 오색 난새가 우는데
玉字를 수놓은 비단옷 입고 서왕모를 맞아
학을 타고 돌아가니 날이 이미 저물었네
들보 북쪽으로 떡을 던지네
북해가 아득해서 북극성이 잠기고
봉황의 깃이 하늘을 치니 그 바람에 물이 치솟네
구만리 하늘에 구름이 드리워 빗기운이 어둑하네
들보 위쪽으로 떡을 던지네
새벽 빛이 희미하게 비단장막을 밝히고
신선의 꿈이 백옥 평상에 처음으로 감도는데
북두칠성의 국자 돌아가는 소리를 누워서 듣네
들보 아래쪽으로 떡을 던지네
팔방에 구름이 어두어 날 저문 것을 알고
시녀들이 수정궁 춥다고 아뢰네
새벽 서리가 벌써 원앙 기와에 맺혔네
엎드려 바라오니, 이 대들보를 올린 뒤에 계수나무 꽃은 시들지 말고 , 아름다운 풀도 사철 꽃다워지이다. 해가 퍼져 달이 빛을 잃어도 난새 수레를 어거하여 더욱 즐거움 누리시고, 땅과 바다에 빛이 바뀌어도 회오리 수레를 타고 더욱 길이 사소서. 은빛 창문이 노을을 누르면 아래로 구만리 미미한 인간 세계를 내려다 보시고, 구슬 문이 바다에 다다르면 삼천년 동안 맑고 맑은 뽕나무 밭을 웃으며 바라보소서. 손으로 세 하늘의 해와 별을 돌리시고, 몸으로 구천세계의 바람과 이슬 속에 노니소서.
허난설헌이 지은 글에 1605년 석봉 한호(石峯 韓濩)가 반초서(半草書)로 글씨를 써서 음각한 목판을 찍은 것이다. 한석봉이 1605년 흡곡현령으로 있을 때, 이웃 고을인 요산군(遼山郡 .. 수안군의 옛 이름)에 갔다가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위에 그 全文을 옮겼지만, 그 내용을 간추리면, 天上 세계에 있다는 광한전(廣寒殿)과 백옥루(白玉樓)의 가상세계를 동경하여 그것을 작자의 이상세계로 현실화시키고, 그 殿과 樓를 짓고 상량(上樑)에 올리는 글을 지은 것이다.
이것은 허난설헌이 여덟살에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그 전거가 풍부한 문장, 신선적인 분위기와 道家의 용어가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는 점으로나, 규방(閨房)의 恨을 달래면서 현실을 떨쳐 버리는 작자의 심경이 상징적으로 표백되어 있는 점 등으로 보아 晩年의 작이라고 할 수 있다. 불행한부부관계와 힘든 시집살이로부터 탈출하고픈 천재 시인의 소망이 담긴 글이라고 하겠다. 이 글이 지어지게된 배경을 알고보면 작자가 가졌던 인생의 무게가 느껴지기도 한다.
규원가 閨怨歌
이 작품은 일명 원부사(怨夫詞)라고도 한다. 이 작품을 통해 조선 사회가 얼마나 전근대적이고, 비이성적인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짐작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 당시 여인들의 눈물 속에서 조선 남자들의 가부장적이고 몰지각한 태도를 엿볼 수 있음을 알 수 있고, 또 그러한 상황 속에서 말도 못하면서 인생을 보내야 하는 조선 여인네들의 한숨이 담겨 있는 조선 여인의 눈물사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조선시대 한 여인의 넋두리의 수준이라고 보기에는 여인의 애절하고 섬세한 심리 묘사가 작품 도처도처에 잘 나타나 있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기(起)에 해당하는 序詞는, 덧없이 흘러간 과거를 회상하면서 이제는 늙어서 보잘 것 없이 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이다. 세월과 함께 쌓여 온 여인의 슬픔과 한 그러나 결국은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해 버리는 한국 여인들의 슬픈 인생관이 잘 나타나 있으며,
한문의 고사숙어 등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무척 우아한 느낌을 주는 글이다. 본사에 해당하고 4단의 구성법으로 보면 承,轉에 해당하는 부분은 술집 출입을 일삼믄 남편의 행색에 대한 원망과 눈물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는 자신의 애닯은 심정과 그러한 슬픔과 외로움을 거문고로 달래는 안타까운 마음을 여성다운 섬세한 필치로 그려냈다. 특히 춘하추동 사계절을 겨울과 여름, 봄과 가을로 대구법을 사용하여 외로움을 부각시킨 점은 매우 뛰어난 문학적 발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규원가의 結詞에 해당하는 부분은 안타까이 임을 기다리며 서럽게 살아가는 자신의 기구한운명을 한탄한 내용이다. 꿈에서조차 만날 수 없는 그 기약 없고 무정한임을 언제나 기다리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기구한 여인의 운명이 슬픈 탄식으로 나타나 있다. " 세상의 서러운 사람 수가 없다고 하지만 박명한 홍안이야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 이것이 어찌 허난설헌 한 사람의 심정이겠는가. 남성들의 횡포에 시달려온 당대 한국 여인의 공통된 운명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내방가사가 폭 넓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여인의 공통된 운명을 주로 노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조선왕조 봉건제도 아래서 빈방(공규)을 지키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버림받은 여인의 한탄을 노래한 것으로, 젊음은 가버리고 이제 늙어 지난 날을 돌이켜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장안의 건달을 남편으로 모시고 살얼음 밟듯이 조심스레 세월을 보냈으나, 자신의 아름다움마저 변해버리자 남편은 떠나간다. 다음은 떠난 임에 대한 질투와 그리움으로 이미 떠난 임인데도 그가 어느 여인에게 머물고 있는지 안타까워 하고, 얼굴을 볼 수 없는 신세인데도 더욱 그리워지는 역설에 시달린다. 시름을 자아내는 데는 4 계절이 모두 다름없다.
특히 빈방을 지키는 여인의 한이 하루 중 밤이부각되어 드러난다. 찬 겨울밤, 길고 긴 여름밤, 경치가 시름을 안겨주는 봄밤, 달빛 비치고 귀뚜라미 우는 가을밤이 모두 그녀에게 슬픔의 시간이 된다. 다음에는 시름을 이기려는 주인공의 처절한 노력이 묘사된다. 등불을 돋우고 거문고를 타다가 잠을 청하여 꿈 속에서나마 현실의 욕구불만을 해소해 보려 하기도 하지만 풀숲에 우는 풀벌레에게 자신의 恨을 전가시키기도 한다.
이 글의 작자는 ?
이 가사는 규원가(閨怨歌), 원부사(怨夫詞. 怨婦詞) 또는 원부가(怨婦歌)리고도 한다. "고금가곡(古今歌曲)"과 "교주가곡집(校註歌曲集)"에 실려 전하고 있다. 작자는 허난설헌과 허균(許筠)의 첩 무옥(巫玉)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송계연월옹(松桂烟月翁)의 "고금가곡"과 "교주가곡집"에는 허난설헌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고, 홍만종(洪萬宗)이 지은 "순오지(旬五志)"에서는 허균의 첩 巫玉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怨婦辭 許筠之妾 巫玉之所製 그러나 허난설헌의 오언고시 "소년행"과 이 "규원가"가 그 내용이 비슷하여 대체로 허난설헌의 작품이라는 의견이 정설로 되어 있다.
홍만종은 그의 저술 "순오지(旬五志)"에서 이 작품에 대하여 평하기를, " 홀로 지내는 모습을 잘 묘사하였으며, 여성다운 향기와 아름다움을 내포하여 비록 옛 문인들의 염체(艶體 .. 부드럽고 아름답게 나타내는 여성적인 詩의 문체)라도 이 보다 더 잘 할 수 있겠는가 ( 說盡空閨情境 曲有脂粉艶態 雖古今詞人 艶體何以過此也 ) ...라고 격찬하였다.
엇그제 젊었더니 어찌 벌써 이렇게 다 늙어 버렸는가 / 어릴 적 즐겁게 지내던 일을 생각하니 말해야 헛되구나 / 늙은 뒤에 서러운 사연을 말하자니 목이 멘다.
부모님이 낳아 기르며, 몹시 고생하여 이 내 몸 길러낼 때 / 높은 벼슬아치의 배필을 바라지 못할지라도 군자의 좋은 짝이 되기를 바랐었는데 / 삼생(三生 ..전생, 현생, 내생)에 지은 원망스러운 업보(業報)요, 월하(月下 ... 월하빙인의 준말로 중매인을 의미)의 부부의 인연으로 / 장안의 호탕하면서도 경박한 사람을 꿈 같이 만나 / 시집간 뒤에 남편 시중하면서 / 마음쓰기가 마치 살얼음 디디는 듯하였다.
열 다섯 살 열 여섯 살(三五,二八 .. 열대여섯 살)을 겨우 지나 / 타고난 아름다운 모습 저절로 나타나니 / 이 태도로 평생을 약속하였더니 / 세월이 빨리 지나고 조물주마저 시기가 많아서 / 봄바람, 가을 물이 / 베틀의 베올 사이에 북(살쿠리를 넣는 나무통)이 지나가듯 빨리 지나가 버려 / 꽃 같이 아름다운 얼굴 어디 두고 / 모습이 밉게도 되었구나 / 내 얼굴 내가 보고 알거니와 어느 임이 나를 사랑할 것인가 / 스스로 부끄러워 하니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여러 사람이 떼를 지어 다니는 / 난봉꾼이 노는 술집(冶遊園 ..기생집)에 새 기생이 나타났단 말인가 / 꽃 피고 날 저물 때 정처없이 나가서 / 흰말과 금 채찍을 하고 어디어디 머물러 노는고 / 멀리 있는지 가까이 있는지 모르는데 / 소식이야 더욱 알 수 있으랴
(겉으로는 남편과) 인연을 끊었지마는 / 생각이야 없을 것인가 / 임의 얼굴을 못 보거니 그립기나 말았으면 좋으련만 / 하루가 길기도 길구나 / 한 달이 지루하기만 하다 / 규방 앞에 (玉窓 .. 여자가 기거하는 방) 심은 매화 몇 번이나 피었다 졌는고 / 겨울 밤 차고 찬 때 자국 눈(발자국이 날 정도로 조금 내린 눈) 섞여 내리고 / 여름 날 길고 긴 때 궂은 비는 무슨 일인가 / 봄 날 온갖 꽃 피고 버들 잎이 돋아나는 / 좋은 시절에 아름다운 경치를 보아도 아무런 생각이 없다 / 가을 달이 방에 들이 비추고 귀뚜라미 침상에서 울 때 / 긴 한숨 흘리는 눈물 / 헛되이 생각만 많다 / 아마도 모진 목숨 죽기도 어렵구나
돌이켜 여러가지 생각을 하니 / 이렇게 살아서 어찌 할 것인가 / 청사초롱을 둘러 놓고 / 푸른 빛갈로 아름답게 꾸민 거문고를 / 비스듬히 안고서 / 벽련화 한 곡을 시름에 잠겨 타니 / 소상강 밤비에 댓잎 소리가 섞여 들리는 듯 / 묘 앞에 세우는 망주석에 / 천년 만에 찾아온 특별한 학이 울고 있는 듯 하고 / 손으로 타는 솜씨는 / 옛 가락이 아직 남아 있지마는 / 연꽃무늬가 있는 휘장을 친 방안이 / 텅 비어 있으니 누구의 귀에 들리겠는가 / 마음 속이 굽이굽이 끊어졌도다
차라리 잠이 들어 꿈에나 보려 하니 /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과 풀 속에서 우는 짐승 / 무슨 원수가 져서 잠마저 깨우는고 / 하늘의 견우성과 직녀성은 은하수가 막혔을 지라도 / 칠월 칠석에 매 년에 한 번씩은 때를 놓치지 않고 만나는데 / 우리 임 가신 뒤에는 / 무슨 건너지 못할 강이 놓여 있기에 / 오고가는 소식마저 끊어졌는가 / 난간에 기대어 서서 / 임 가신 곳을 바라보니 / 풀에 이슬은 맺혀 있고 저녁 구름이 지나 갈 때 / 대나무 숲 우거진 곳에 / 새 소리가 더욱 서럽게 들린다 / 세상에 서러운 사람이 수없이 많다고 하지만 / 기구한 운명을 가진 여자 신세야 / 나 같은 이가 또 있을 까 / 아마도 이 임의 탓으로 살듯말듯 하구나
한국인과 怨恨
원한을 남달리 많이 말하는 한국인의 가슴 속에는 그만큼 원한이 짙게 맺혀 있는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또 역사 자체에 원한이 서려 있음을 증언하기도 할 것이다. 원한이라는 말에 간직된 내용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혼자 마음 속에서 들끓는 노여움, 분함, 분통인가 하면 남을 향한 저주이고 앙갚음의 독기(毒氣)일 때도 있다.
자책(自責)으로 가슴을 베는 恨이 있는가 하면, 남에 대한 원망으로 칼을 가는 원한도 있다. 뜨거운 불길로 타오는가 싶다가는 얼음처럼 차가워지기도 한다. 가벼운 후회인가 하면 돌이킬 수 없는 파탄에 대한 땅을 치는 통곡일 수도 있다.
한을 남기지 않겠다고 이를 앙다물면, 야무진 성취동기가 되고 목적을 향해 내닫는 원동력이 되며 충격이 되기도 한다. 남에게 한(恨)만은 끼치지 말며 살자고 다짐을 하면, 선린(善隣)을 위한 윤리의식이 되기도 한다. 이 같은 원한은 한국 문학사에 있어서 보면, 신라시대에 비롯하여 고려와 조선조 시대를 거쳐서 오늘에까지 이어져 왔다. 우리의 경우 한(恨)의 소재 전통은 문학사의 중추적인 흐름을 형성하면서 문학 발생의 창조적 원리로 작용하였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허난설헌의 존재가 독특한 것은 그녀가 사대부가의 여인이었으며, 그녀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이 당시 강조되던 현모양처로서의 婦德을 갖추었다거나 성공한 자식을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올곧게 그녀가 창작한 詩의 탁월함 때문이었다는 점에 있다.
허난설헌은 왜곡된 형태이기는하지만 제한적으로 사회활동이 자유로워 문재(文才)를 뽐내는 것이 가능하던 황진이와 같은 기생도 아니었고, 화가로서 탁월한 재능이 있었지만 율곡 이이 같은 훌륭한 자식을 길러낸 것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신사임당처럼 부덕을 상징하는 여인도 아니었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詩로서 그 이름을 남겼고 훗날 그녀의 詩는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가 많은 지식인 문인들에게 격찬을 받으며 오랫동안 애송되었다.
그녀의 한탄 ... 三恨
그는 세가지를 한탄하였다. 첫째는 조선이라는 소천지(小天地)에서 태어난 것.. 둘째는 女子로 태어난 것.. 세쩨는 남편인 김성립과 결혼 한 것...
이수광의 "지붕유설"에 실린 詩畵처럼, 그는 신혼시절에 글공부하는 남편과 줄곧 떨어져 살았다. 그래서 남편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를 세상사람들은 음탕하여 시집에 싣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이처럼 허난설헌을 둘러싼 봉건적 상황이 그의 첫 번 째 컴플렉스이고 恨이었다. 빈녀음(貧女吟) 같은 詩가 능력이 있으면서 가난해서 시집도 못 가는 노처녀의 한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능력이 있어도 인정받지 못하는 조선사회의 현실 속에 자기 모습을 한탄한 詩이다. 게다가 금슬이 좋지 않은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어려서 죽어버리자, 이러한 모든 한과 콤플렉스가 겹쳐서 恨과 기다림의 문학으로 승화되었으며, 결국 한 여자의 힘으로는 현실을 극복하지 못 할 것으로 알았기에 神仙世界로 지향하였던 것이다.
허난설헌의 묘
이 곳 광주시 초월리의 묘역은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書雲觀正公派)의 가족 묘역이다. 3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맨 하단에 허난설헌과 두 자식의 묘..그리고 그 위에 남편 김성립과 새로운 부인의 합장 묘가 있고...맨 위에 김성립의 아버지 김첨의 묘가 있다. 허난설헌의 묘는 원래 이 곳으로부터 약500m 떨어져 있었는데, 도로공사로 인하여 이 곳으로 이장되었다.
그녀의 작품 세계
그녀의 作品 세계... 그는 동생의 재능을 알아본 오빠의 배려로 글을 배웠다. 그는 어른이 되었을 때, 가난한 집 아가씨는 열심히 옷을 만들어도 그 옷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서 사회의 불공평을 비판하는 사회비평 그리고 道敎的인 가치관 등 다양한 가치관을 詩로 표현하는 재능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그의 詩를, 임금노동자는 그가 생산하는 것의 所有者가 될 수 없다는 칼막스의 "소외론"과 비교할 정도로 그녀의 才能을 격찬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허난설헌의 친필 글씨와 앙간비금도(仰看飛禽圖) ... 아버지와 딸로 보이는 두 사람이 뜰에 서 있는데, 그 중 머리를 젖혀 저 멀리 산 위로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는 이 소녀야말로 허난설헌의 또 다른自我라고 미술사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이 그림은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소녀가 그림 속의 인물로 등장하는 첫 그림으로 알려져있다. 임진왜란 전 조선중기까지 그림이 중국의 고사인물도나 우리의 山水가 아닌 화보풍의 산수를 그린데 비해, 허난설헌의 이 그림은 주변의 實景이 등장하는 경우로 조선 후기 眞景 山水畵, 風俗畵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가족들
아버지 허엽(許曄. 1517~1580)은 호가 초당(草堂)이며, 서경덕의 문인으로 경상도관찰사를 지냈고, 東人의 영수가 된다. 첫째 부인 한씨와의 사이에 두 딸과 큰 아들 허성(許宬)을 두고, 둘째 부인 김씨와의 사이에서 허봉(許峯)과 난설헌 그리고 허균(許筠)의 2남1녀를 두었다. 어머니는 후취인 강릉 김씨로서, 예조판서 광철(光轍)의 딸이다.
큰 오빠 허성(許筬. 1548~1612)은 字는 공언(功彦)이며, 호는 악록(岳麓) 또는 산전(山前)으로 불리웠다. 1583년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를 하였다. 일본의 풍신수길이 일본을 통일한 1590년에는 왜(倭)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조선통신사가 결성되었는데, 이 때 허성도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같이 통신사로 갔던 김성일 등의 東人은 전쟁에 대비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펼쳤지만, 허성은 東人임에도 불구하고 西人이었던 황윤길의 주장에 찬성하게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난 후 1594년에 이조참의로 승진되었으며, 이어서 이조참판과 전라도안찰사를 거쳐 예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에 이르기까지 요직을 두루 거쳤고, 1607년 宣祖의 유교(遺敎)를 받게 되어서 세인들이 고명칠신이라 칭하였다.
둘째 오빠 허봉(許봉. 1551~1588)은 호가 하곡(荷谷)이며, 자는 미숙(美叔)이다. 유희춘의 문인으로 허난설헌의 재능에 가장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1572년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74년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자청하여 명나라에 가서 기행문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를 저술하였다. 1575년 이조좌랑이 되었고, 1583년 창원부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김효원과 함께 東人의 선봉이 되어 西人들과 대립하였다. 1584년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던 병조판서 율곡 이이의 직무상 과실을 들어 탄핵을 하였다가, 종성에 유배되었고, 1585년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방랑생활을 하다가 38세의 나이로 금강산에서 객사하였다. 홍길동전을 지은 동생 허균(許筠)은 생략한다.
난설헌집 蘭雪軒集
허난설헌의 詩는 임종 때의 유언으로 대부분 소각해 버렸다. 그후 동생 허균(허균)이 남은 작품을 모으고, 그의 기억을 되살려 난설헌집을 편집하였다. "난설헌집"은 3종이 현전하고 있다. 하나는 목판본으로, 만력년간(萬曆年間)에 허균이 편찬한 파격적인 재주갑인자(再鑄甲寅字)로, 1606년 초간한 것으로, 내외를 뒤흔든 명성으로 말미암아 곧 희귀해졌다.
그러자 1608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과 부사 양유년(梁有年)의 "제사(題辭)" 그리고 허균의 "발(跋)"을 자필대로 옮긴 초판인 목판 초간본이 있었으나 모두 현전하지는 않는다. 지금 전해지는 목판본(위 사진)은 동래부의 중간본으로 1692년의 再刊本이다. 주자본과 목판 초간본의 격차가 불과 2년 밖에 안됨은 鑄字本의 인쇄부수가 불과 백여 편 정도이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이 重刊本이 일본에 건너가 1711년 분다이야(文台屋次郞)에 의하여 일본에서도 간행되었다. 詩 210수, 사(辭) 1수, "몽유광상산시서(夢遊廣桑山詩序)" 1편, "광한전백옥루상량문" 1편 등이 수록되어있다. 수록된 대부분의 詩가 허난설헌의 詩가 아니라 허균의 위작(僞作)이라거나 또는 허균이 중국시를 몰래 섞어 놓은 것 또는 중국 詩를 표절한 것이라는 비판이 이수광(李粹光), 김만중, 신흠(申欽) 등에 의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남용익(南龍翼)은 허난설헌의 시가 그 격이 오빠 허봉(許烽)의 시보다도 높아서 허균이 그에 미치지못한다고 말할 정도로 허난설헌의 시재(詩才)를 높이 평가하였다. 또 중국에서 처음 중간된 만큼 중국 詩를 섞어 놓은 것은 삭제되었을 것이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허난설헌의 詩로 긍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개인시집을 가진 첫 여성 韓流 시인
조선의 시사(詩史)에서 그녀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상징적 사건이다. 여성에게는 출판 자체가 불ㄹ가능하였던 시절 .. 게다가 중국의 내노라하는 시인들도 난설헌 시집을 구하고자 야단이었다. 요즘으로 보면 시인이 그것도 여성시인이 한류스타이었던 것이다. <난설헌집. 蘭雪軒集>은 그러한 상징성을 지닌 여성의 첫 개인시집이다.
물론 이는 동생 허균 덕분에 가능하였던 일이다. 허균이없었다면 시집도 당연히 없었을 터이니 말이다. 난설헌의 시를 갖고 있던 허균은 1608년에 드디어 "난설헌집" 목판본을 공주에서 출판한다. 이미 1590년에 서애 유성룡의 跋文을 받아 놓았지만, 임진왜란으로 늦어졌다. 明의 사신 주지번(주지번), 양유년(양유년) 두 사람의 서문도 있는 이 책은 명나라에서도 서로 구하려고 하는 바람에 금세 유명하여졌다.
이전에 명나라의 오명제가 조선의 시를 모아 출판한 "조선시선 (朝鮮詩選 .. 1600년)"덕에 난설헌의 이름이 중국에 이미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일본에서도 "난설헌 시집"이 출판되니, 1711년 분다이야 지로에 의해서이다. 이로써 난설헌은 한,중,일에서 시집을 출간한 한류의 우너조격 스타시인이 되었다.
그런데 후대에 올수록 난설헌을 폄훼하는 글이 많아진다. 그 중에서도 진보적 지식인으로 알려진 홍대용, 박지원 등의 남성 우월 시각과 비판은 실망스럽다. 난설헌을 인정하는 일부 남자 외에는 대부분 비판을 일삼았던 것이다. 조선은 과연 남자의 나라이었다. 자신들이 금줄 쳐놓은 세계 안에서 얌전하게 살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여자는 "재주 없는 것이 덕"이었을까.
그러한 여건에서도 난설헌은 규방의 여인이 보고 듣는 세계를 뛰어넘는 詩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빈녀(貧女)처럼 소외된 약자나 열악한 현실에 대한 시도 많다. 그 때문인지 난설헌 시가 대부분 허균의 작품이라는 설이 있었고, 지금도 표절 혹은 위작이라는 의심을 품고 있는 학자들이 그 근거를 논리적으로 제시하며 의심하고 있다. 죽을 때 시를 다 태우라고 한것과 그 많은 어려운 시를 어린 나이에 지었다는 것이 믿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허봉이나 허균의 인정에서 확인되듯, 난설헌은 천부적 재능릐 소유자이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불행한 결혼생활
허난설헌은 15세에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하였다. 김성립은 안동 김씨로 그녀보다 한 살이 많았다. 김성립은 5대가 계속 문과에 급제한 명문 가문의 자제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東人과 西人으로 붕당된 상황에서 東人은 또다시 北人과 南人으로 분리되기 시작하였는데, 김성립은 南人계에 속한 인물이었다. 당시 南人은 北人보다 사상적으로 성리학에 더욱 고착되어 있었고, 보수적이었다. 자유로운 가풍을 가진 친정에서 가부장적인 가문으로 시집 온 허난설헌은 시집살이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양반가의 여성에게조차 글을가르치지 않았던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시를 쓴느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는 달갑지 않은 존재이었다. 허난설헌의 시어머니는 지식인 며느리를 이해하지 못했고 갈등의 골은 깊어가기만 하였다. 남편 김성립은 그런 그녀를 보듬어주기보다는 과거공부를 핑계 삼아 바깥으로 돌며 가정을 등한시하였다.
뛰어난오빠들과 남동생을 보고 성장한 허난설헌에게 평범한 김성립은 성에 차지 않는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8세 때 이미 신동이라고 소문난 아내를 김성립은 버거워하였다. 허난설헌의 남동생 許筠은 훗날 자신의 매형인 김성립에 대해 "문리(文理)는 모자라도 능히 글을 짓는 자, 글을 읽으라고 하면 제대로 혀도 놀리지 못한다 "고 평하였는데, 이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김성립은 무뚝뚝하고 별다른 재기는 없고, 고집 세고 고지식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허난설헌은 결혼 초기에 바깥으로 돌기만 하는 남편을 그리는 戀文의 詩를 짓기도 하였으나, 어느 순간 김성립과의 결혼에 회의를 느끼고 남성중심 사회에 파문을 던지는 시를 짓기도 하였고, 때로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여 현실의 불행을 잊으려 하였다. 이렇게 불행한 결혼생활이 이어오는 사이, 허난설헌의 친정은 아버지 허엽과 따르던 오빠 허봉의 잇따른 객사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허난설헌은 두 명의 아이를 돌림병으로 잇달아 잃고, 뱃속의 아이를 유산하는 불행이 겹친다. 이때의 슬픔을 그녀는 "곡자(哭子)"라는 詩로 남겨 놓았다.
여성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시어머니의 학대와 무능하고 마음이 좁은 남편, 몰락하는 친정에 대한 안타까움, 잃어버린 아이들에 대한 슬픔 등으로 허난설헌은 건강을 잃고 점차 쇠약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詩로서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다.
『 몽유광상산시 夢遊廣桑山時 』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 기대었구나 /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 달빛 서리 위에 차갑기만 하여라
벽해침요해 碧海浸瑤海
청란의채란 靑鸞倚採鸞
부용삼구타 芙蓉三九朶
홍타월상한 紅墮月霜寒
이 시는 난설헌이 꿈에 신선이 살고있는 광상산(廣桑山)에 올라가 노빌면서 지은 詩이다. 여기서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는 난설헌의 분신이다. 떠러지는 꽃송이는 下降의 느낌을 가지고 있으며, 난설헌의 원초적인 공포, 우울, 시름의 불안의식이 죽음의 영상화 작용을 한 것이다.
또한 하강의 이미지는 난설헌의 시에서 < 복사꽃이 진다. 오동나무 잎이 진다. 계수나무 꽃이 진다. 눈이 내린다. 비가 내린다. 구름이 날아 내린다. 이슬에 젖는다, 선녀가 내려온다 > 등등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물질적 상상세계의 물과 역동적 상상세계의 공기와의 상호작용에서 빚어진 것이다. 사람은 꿈을 떠나서 살 수 없지만, 현실을 떠나서도 살 수 없다. 꿈과 현실세계는 함께 하고 있다. 난설헌의 경우에 꿈은 공간작용에 의하여 놀이의 방향에 모든 존재를 확대시키고 있다. 제목만 보더라도, 난설헌의 시에서는 꿈을 다룬 詩들이 많다.
여기에도 왜곡이 ...
허난설헌의 一生이 불행으로 일관하였던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특히 그의 親家쪽 가족들의 연이은 불행 그리고 아들,딸의 죽음 그리고 남편과의 평탄치 못했던 결혼 생활...모두 사실이다.어찌되었든지 시대를 앞서 산, 天才인 부인과 살아야 하는 남편과 시어머니의 어려움은 분명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역사와 진실의 왜곡이 있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 같다. 즉, 남편인 김성립의 방탕한 생활과 시어머니의 학대... 이 얘기들은 모두 친가쪽 특히 허균의 기록에 의존된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남편과 시댁과의 갈등...그녀에게만 특별할 수는 없다. 당시의 사회풍토상... 김성립은 안동 김씨 가문의 長子로, 29세에 과거에 급제할 만큼 학문이 깊었으며, (그는 난설헌이 죽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다)
그의 再婚을 비난하지만, 후사없이 본처가 죽었다면, 당시에는 재혼하여 代를 이어야 하는것이 오히려 의무이었고 당연한 세상이었다. 진정 불행한 여인은 아마 김성립의 새로운 아내 남양 홍씨일지도 모른다. 그는 결혼한지 3년만에 자식도 두지 못한채 ,남편 김성립은 임진왜란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그리고 그의 시체도 찾지 못하고 가묘(假墓)를 만들어 평생 제사를 지내게 된다. 허난설헌... 김성립...남양 홍씨, 그들의 얘기는 한권의 소설로도 부족할만큼 파란만장 자체이다.
허난설헌과 일찍 죽은 두 아들의 묘가 나란히 있다. 어린 남매의 무덤 앞에서 냉수 떠놓고 소리 종려 넋을 부르며 " 밤마다 사이좋게 손잡고 놀아라 "고 당부하던 허난설헌의 음성이 시비(詩碑)에 각인되어 있다. 중부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의 소음이 쉴새없이 귓전을 할퀴고 지나가는 가파른 언덕 위에 지금은 그녀가 그토록 가슴아파했던 두 아이의 무덤을 옆에서 지키고 있다.
수식유란청우향 誰識幽蘭淸又香 그 누가 알리요! 그윽한 난초의 푸르름과 향기를
년년세세자분방 年年歲歲自芬芳 세월이 흘러도 은은한 향기 변치 않는다네
막언비련무인기 莫言比蓮無人氣 세상 사람들이 연꽃을 더 좋아한다고 말하지 마오
일토화심만초왕 一吐花心萬草王 꽃 수 한번 터트리면 온갖 풀의 으뜸이니...
곡자 哭子
1577년 허난설헌은 15세의 나이에 김성립과 결혼하고, 1579년 큰 딸을 일헝사다. 그리고 이듬해 또한 아들 희윤(喜胤)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 후 몇년이 지나 1589년 허난설헌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 전에 뱃속의 아이를 유산하고 만다. 이 곡자(哭子) 詩는 딸을 잃은 후 아들마져 죽게되자 그 슬픔을 노래한 시이다.
거년상애녀 去 年 喪 愛 女 금면상애자 今 年 喪 愛 子 애애광릉토 哀 哀 廣 陵 土
쌍분상대기 雙 墳 相 對 起 소소백양풍 蕭 簫 白 楊 風 귀화명송추 鬼 火 明 松 楸
지전초여백 紙 錢 招 汝 魄 현주전여구 玄 酒 奠 汝 丘 응지제형혼 應 知 弟 兄 魂
야야상추유 夜 夜 相 追 遊 종유복중해 縱 有 腹 中 孩 안가기장성 安 可 冀 長 成
낭금황대사 浪 昑 黃 臺 詞 혈읍비탄성 血 泣 悲 呑 聲
지난 해 사랑하는 딸을 잃고 / 올해에는 아끼던 아들을 보내었네 / 슬프고 슬프도다, 이 광릉 땅에 / 두 개의 무덤이 마주 서 있네 / 백양(白楊)나무 숲에는 쓸쓸히 바람 불고 / 도깨비불은 송추(松楸)에서 번쩍인다 / 지전(紙錢)으로 너희 혼을 부르고 / 현주(玄酒)를 너의 무덤에 뿌린다 / 응당 너희 남매의 혼은 / 밤마다 서로 좇으며 놀리라 / 비록 벳속에 아이가 있다한들 / 어찌 강성하기를 바랄 수 있으리 / 아무렇게나 황대사(黃臺詞)를 읊으며 / 피눈물 흘리며 소리 맞춰 슬피 운다.
위의 詩에서 광릉(廣陵)이란 경기도 廣州(난설헌 시댁의 가족묘지)를 말하고, 백양(白楊)은 버드나무 즉 백양목을 말하는데, 흰색의 백양목은 죽음을 상징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송추(松楸)는 공동묘지의 또 다른 이름이다. 지전(紙錢)이란 종이돈으로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원혼을 부를 때 사용하는것이며, 현주(玄酒)는 정화수로 아이 무덤에 술 대신 사용한다. 종유(縱有)는 부사로 비록..이라는 의미이며, 안가(安可)는 부사로 어찌..라는 뜻이고, 황대사(黃臺辭)는 자식을 죽인 어미를 자책하는 노래를 의미한다.
허난설헌의 작은 오빠 허봉이 쓴 죽은 조카의 묘비명이다. 허봉은 난설헌을 매우 아껴서 詩도 지어 보내고, 붓도 선물하였다 특히 1582년 (난설헌이 20살 때) 중국의 유명한 시인 두보(杜甫)의 시집을 보내면서 편지도 동봉한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러하다.
"내가 열심히 권하는 뜻을 저버리지 않으면, 희미해져 가는 두보(杜甫)의 소리가 누이의 손에서 다시 나오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강직한 허봉은 율곡을 탄핵하였다가 함경도 甲山으로 유배되며, 귀양이 풀린 후에도 서울에 돌아 오지 못하고 떠돌아 다니다가 금강산에서 38세의 나이에 객사하고 만다.
허봉이 허난설헌의 중매를 섰다. 즉, 남편 김성립의 아버지안 김첨(金瞻)과 같이 유학을 공부하던 동료이었고, 마침 그의 아들 김성립과 자신의 누이를 중매한 것이다.아들의 이름이 희윤....그 당시 딸의 이름은 없었다. 하지만 난설헌은 이름도, 號도 다 있을만큼 시대를 앞서 산...그리고 그 친정의 개화된 풍속을 엿 볼 수 있다.
허난설헌의 詩 ... 표절 논란
허난설헌의 작품이 중국의 詩를 표절하였다는 是非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있었다.
그녀가 살았던 시절에도, 지금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어쩌면 요즘 학자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로 알려져 있으나 , 그녀의 문학사적 비중과 門中의 반발 등을 염려하여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문제를 제기하지는 못 하고 있다고 한다.
먼저, 허난설헌과 같은 해에 태어난, 지봉(芝鳳) 이수광(李秀光)은 그의 책 지봉유설(芝鳳類說)에서 허난설헌의 詩는 몇 편만 제외하고는 전부 위작(僞作)이며, 그의 동생 허균이 관여하였다고 적고 있고, 3년 후 신흠(辛欽)도 이같은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 외에도 구운몽의 김만중, 홍만종,이덕무 등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이 표절 사실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현대의 전문가 교수들도 간단히 언급하고 지나치거나, 당쟁의 소산이라고 얼머무리고 있었지만, 최근 순천향대학의 어느 교수가 작심한 듯 그 적나나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발표하였는데.. 그동안의 명성을 한번에 뒤집을 수 있을 정도의 충격적인 내용이었다고 한다. 중국 詩의 몇 글자만 바꾼....허균의 소개로 중국에 소개된, 허난설헌의 시집은 베스트셀러이었다. 당시 중국의 여러 학자들은 외국여자 시인에 대한 경외감에 빠질 수 있으나 표절의 흔적이 많으니 자세히 알아보고 읽으라고 충고하고 있다. 여러 사람이, 여러 차례에 걸쳐.....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과 그의 새로운 아내 남양 홍씨의 묘...합장이다. 그러나 김성립이 임진왜란에서 전사하고 시체를 찾지 못하여 그저 가묘(假墓)일 뿐이다. 이 일대는 안동 김씨의 가족묘역이었다. 허난설헌의 묘는 원래 이 곳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몇년 전 도로공사로 인하여 이 곳으로 이장되었다. 그래서 일찍 죽은 자식들과 나란히 묻혀 있다.
부부 갈등과 김성립의 바람기에 관한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온다. 남편 김성립이 접(接..글방 학생이나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에 독서하러 갔다. 허난설헌은 남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옛날의 접(接)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오늘의 접(接)은 재주(才)가 없다... 즉 古之接有才,今之接無才(고지접유재,금지접무재).." ....즉, 오늘의 접(接)은 재(才)가 빠진 즉 첩(妾.여자)만 남아 있다고 하며 방탕한 남편을 꾸짖었던 것이다.
이러한 얘기도 있다. 김성립과 친구들이 서당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친구들이 거짓으로 김성립이 기생집에서 술을 먹고 있다고 난설헌에게 전했다. 이에 난설헌은 안주와 술을 보내면서 詩를 한 구절 써보냈다. "낭군자시무심자, 동접하인종반간 (郎君自是無心者,同接何人縱半間)" 즉, 낭군께선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찌된 사람이길레 이간질을 시키는가... 친구들은 그녀의 재주와 기백이 호방함에 놀랐다고 한다.
천재 부인과 사는 남편의 괴로움
하여튼 天才인 부인과 사는 김성립에게 방탕기는 분명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만남은 잘못된 만남이었슴이 분명하다. 같은 수준의 사람을 만났으면....
남편의 바람기에...허난설헌의 애절한 詩가 전해 온다. (제목 ..다른 여인에겐 주지 마셔요)
아유일단기 我 有 一 端 綺 아름다운 비단 한 필 곱게 지녀 왔어요.
불식광준란 拂 拭 光 浚 亂 먼지를 털어내면 맑은 윤이 났었죠
대직쌍봉황 對 織 雙 鳳 凰 한쌍의 봉황새 마주 보게 수놓으니
문장하찬란 文 章 何 燦 爛 반짝이는 무늬가 그 얼마나 아름답던지
기년동중장 畿 年 疼 中 藏 여러 해 장롱 속에 간직해 두었지만
금조지증랑 今 朝 持 贈 郞 오늘 아침 님 가시는 길에 드리옵니다.
불석작군금 不 惜 作 君 衿 님의 바지를 만드신다면 아깝지 않지만
막작타인상 莫 作 他 人 裳 다른 여인의 치마감으로는 주지 마셔요.
빈녀음 貧女吟
豈是乏容色 / 工鍼復工織 / 少少長寒門 / 良媒不相識 / 不帶寒餓色 / 盡日當窓織 / 唯有父母憐 / 四隣何會識 / 夜久織未休 / 憂憂鳴寒機 / 機中一匹鍊 / 終作阿誰衣 / 手把金剪刀 / 夜寒十指直 / 爲人作嫁衣 / 年年還獨宿
인물도 남에 비해 그리 빠지지 않고 / 바느질 솜씨, 길쌈 솜씨도 좋건만 /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자란 까닭에 / 좋은 중매자리 나서지 않네 / 춥고 굶주려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 하루 종일 창가에서 베만 짜고 있다네 / 오직 내 부모님만 가엾다 생각할 뿐 / 그 어떤 이웃이 이 내 속을 알아주리오 / 밤이 깊어도 짜는 손 멈추지 않고 / 베틀소리만 짤깍짤깍 처량하게 울리네 / 베틀에 짜여가는 이 한 필 / 필경 어느 색시의 옷이 되려나 / 가위로 싹둑싹둑 옷 마르노라면 / 밤이 차가워 열 손 끝이 곱아오네 / 시집 갈 옷 삯바느질 쉴 새 없건만 / 이 내 몸은 해마다 독수공방 면할 길 없네
길쌈과 바느질 솜씨가 뛰어난 한 여인이 나이가 찼지만, 가난 때문에 이웃집 신부의 혼례옷을 만들어주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신세이다. 빈녀음(貧女吟)은 4수로 이루어진 연작시이다. 이 시는 남을 위해 옷을 짓는 여인의 모습을 통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즉, 자신은 가난 때문에 혼인도 못하는 처지이면서도 생계를 위하여 밤이 깊어도 베를 짜는 것을 멈출 수 없고, 추운 밤에 손끝이 시려와도 남이 시집갈 때 입을 옷을 바느질해야 하는 여인의 처지를 보여 줌으로써 불평등한 사회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1행과 2행에서는 겨울 밤 바느질의 괴로움을 노래하고 있고, 3행과 4행에서는 남을 위해 밤을 새워 하는 바느질과 자신의 불우한 삶을 대비시켜 표현하고 있다.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불우한 여인의 고달픈 삶을 애상적 시풍으로 그린 작품이다. 작자 자신의 불우한 삶과도 통하는 시이다. 그리고 시집갈 날은 멀어지기만 내용으로 불공평한 현실을 은근히 고발하는 작품이다.
허난설헌이 27세로 요절하자, 그의 동생 허균(許筠)이 누이를 그리며 詩를 남긴다.
옥(玉)이 깨지고 별이 떨어지니 그대의 한 평생 불행하였다.
하늘이 줄 때에는 재색을 넘치게 하였으면서도
어찌 그토록 가혹하게 벌주고, 속히 빼았아 가는가?
거문고는 멀리 든 채 켜지도 못하고
좋은 음식 있어도 맛보지 못하였네
난설헌의 침실은 고독만이 넘치고
난초도 싹이 났건만 서리 맞아 꺾였네
하늘로 돌아가 편히 쉬기를
뜬 세상 한순간 왔던 것이 슬프기만 하다.
홀연히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가니
한 세월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구나
김성립의 아버지..즉 허난설헌의 시아버지 김첨(金瞻)의 묘
이 일대 안동 김씨의 사당이다. 허난설헌의 위패도 모셔져 있다. 원래는 아니었을 듯한데, 후세에 허난설헌의 평가가 좋았으므로 포함시킨 것 같다. 허균이 역적죄로 사형을 당했으므로, 함께 하기도 어려웠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