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에는 오래 통용되는 격언이 하나 있다.
'악마의 증명', 라틴어로 probatio diabolica.
악마가 있다는 건 한 번의 목격으로 족하지만, 없다는 걸 증명하려면 온 우주를 뒤져야 한다. 중세 로마법 주해학자들이 소유권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증명하는 일의 불가능성을 두고 만든 비유다.
오늘날 민사소송의 증명책임 분배 법리와 부동산등기의 추정력이 모두 이 딜레마의 후예다. 다만, 이 격언은 부존재 증명의 곤란을 말할 뿐, 무언가 있다고 주장하는 쪽의 증명 부담을 면제해 주지는 않는다. 주장하는 자가 증명한다.
그래서 먼저 분명히 해 둔다. 이 글, 즉 나의 주장은 '단군'이라는 인물이 기원전 2333년에 실재했음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하겠다는 글이 아니다. 이 글이 증명하려는 것은 다른 명제다. 단군을 겨레의 뿌리로 여기는 인식이 이 땅의 정신사에 700년 넘게 끊이지 않고 실재해 왔다는 것. 이것은 사학사(史學史)의 영역이고, 문헌으로 적극 증명이 되는 명제다. 지금부터 그 증거를 시대순으로 댄다.
13세기, 두 개의 붓이 각자 단군을 적었다.
승려 일연은 단군의 최후를 "후환은어아사달 위산신(後還隱於阿斯達 爲山神)",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숨어 산신이 되었다고 썼고('삼국유사' 권1 기이 고조선 조), 문신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단군조선을 우리 역사의 첫머리에 놓았다.
'승'과 '속', 서로 다른 자리의 두 지식인이 같은 시대에 같은 시조를 기록했다는 것, 이것이 첫 번째 증거다.
고려 말의 문신 백문보는 조정에 올린 글에서 "자단군지금 이삼천육백년(自檀君至今 已三千六百年)", 단군으로부터 지금까지 이미 3,600년이라 하였다('고려사' 권112 열전 백문보전). 단군으로 해를 세는 기년(紀年) 의식이 고려의 공적 언어였다는 뜻이다.
조선으로 넘어가기 전에, 내 주장에 가장 불리한 문헌부터 펴 놓겠다.
건국 이념의 설계자 정도전은 '조선경국전' '국호' 에서 새 왕조 이름의 정통성을 기자에게서 끌어왔다.
"유기자수주무지명 봉조선후(惟箕子受周武之命 封朝鮮侯)", 오직 기자만이 주 무왕의 명을 받아 조선후에 봉해졌다는 것이다.
명 황제의 재가로 국호를 받은 현실을 무왕과 기자의 고사에 포개고, 공자의 "오기위동주호(吾其爲東周乎)"를 끌어와 동쪽의 주나라, 곧 동주조선을 꿈꿨다. 사대의 논리가 국호론의 뼈대다.
단군 폄하론자라면 여기서 외칠 것이다. 보라, 조선의 공식 이념은 기자였다고.
그런데 바로 그 텍스트의 첫 문장을 읽어 보라.
"해동지국 불일기호 위조선자삼 왈단군 왈기자 왈위만(海東之國 不一其號 爲朝鮮者三 曰檀君 曰箕子 曰衛滿)." 해동의 나라는 이름이 하나가 아니었으니 조선이라 한 것이 셋인데, 단군이요 기자요 위만이라는 것이다.
사대론의 정점에 선 문장가조차 세 조선의 첫 자리에서 단군을 지우지 못했다.
그리고 왕조의 실제 운영은 정도전의 설계를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세종실록지리지' 평양부 조는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 내려와 나라를 세운 단군조선을 전조선(前朝鮮)으로, 기자조선을 후조선(後朝鮮)으로 공식 기술했다.
세종 7년(1425)에는 단군 신위가 기자 사당에 곁들여 모셔진 것을 두고 상소가 올라왔다. 단군은 요임금과 같은 시대에 스스로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이라 한 분이고 기자는 무왕의 명을 받아 봉해진 분이니, 나라를 세운 선후로 보면 신위의 자리가 어긋났다는 것이다(;세종실록;).
이 논의는 단군 사당을 따로 세우는 것으로 이어졌다. 앞서 태종 16년(1416)에는 변계량이 제천례 존폐 논쟁에서 "우리 동방은 단군이 시조인데 하늘에서 내려왔지 천자가 분봉한 나라가 아니다"라며 하늘에 제사할 권리를 단군에서 끌어냈다('태종실록' 태종 16년 6월 1일).
사대를 국시로 삼은 왕조의 심장부에서, 단군의 자주와 기자의 사대가 신위의 좌차를 놓고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만장일치의 숭배는 만들어 낼 수 있어도, 좌차를 둘러싼 다툼의 기록은 만들어 낼 수 없다. 15세기 관료들이 단군의 자리를 놓고 논쟁했다는 사실 자체가, 단군 인식이 살아 있는 공적 담론이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관찬 사서 '동국통감' 이 단군조선에서 서술을 시작하고, 구월산 삼성사가 환인·환웅·단군 삼신을 모시고, 사찰마다 산신각이 선 것은 그 담론의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근대의 문턱에서 이 지층은 뜻밖의 자리에서 다시 드러난다.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은 GOD를 무엇으로 옮길지를 두고 용어논쟁(Term Question)을 벌였다.
천주냐, 상제냐, 신이냐.
이 논쟁을 토착 신명 '하나님'으로 매듭짓는 데 앞장선 이가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이다. 번역 가능한 한자어들을 제치고 굳이 이 땅의 하늘 신앙을 택했다는 것은, 하늘을 조상으로 섬기는 천손(天孫) 의식이 그만큼 견고하게 살아 있었다는 방증이다.
헐버트는 자신의 한국사 서술을 단군에서 시작했고, 월남 이상재, 도산 안창호, 명동학교의 규암 김약연 같은 초기 개신교 지도자들도 단군을 민족의 조상으로 받아들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평리원 검사 출신의 이준 열사는 그의 저술로 전하는 '한국혼의 부활론'에서 국혼의 부활을 부르짖었는데, 그 이준이 을사오적 처단을 시도하다 복역 중이던 나철을 사면 대상에 넣으려다 곤욕을 치른 동지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준의 국혼론과 나철의 대종교 중광은 한 뿌리에서 갈라진 두 줄기였다.
대종교에 귀의했고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 역할을 한 예관 신규식(건국훈장 대통령장)은 망명길에 오르기 전 개천절에 천궁을 참배하고 시 한 수를 남겼다.
"개천경일배천궁 일주심향고혈충 차거여비신화력 완명하이주미공(開天慶日拝天宮 一柱心香告血衷 此去如非神化力 頑冥何以奏微功)." 개천절 경축일에 천궁에 절하고 한 줄기 향으로 피 끓는 속마음을 아뢰니, 이번 길이 한얼님의 힘이 아니라면 미련한 내가 무슨 공을 이루겠느냐는 것이다.
개천절이 독립운동가의 시 첫 구에 그대로 박혀 있다. 그는 상하이에서 펴낸 한문 잡지 '진단(震壇)' 에 연재하고 훗날 타이베이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된 '한국혼(韓國魂)'에서 이렇게도 물었다.
"우리나라 선인들이 신인이 태백산 단목 아래 강림하였다는 한 줄의 기록이 없었다면, 아마 갈천씨의 백성이 되었거나 무회씨의 백성이 되었을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손문이 축사를 보내고 진독수가 제자를 써 준 그 잡지에, 조선의 망명객은 단군을 적고 있었다. 갈천씨(葛天氏)와 무회씨(無懷氏)는 복희씨 이전의 전설상 제왕들이니, 그 한 줄이 없었다면 남의 계보에 얹혀 사는 백성이 되었으리라는 통찰이다.
500년 전 변계량의 "하늘에서 내려왔지 분봉받지 않았다"는 상소와 정확히 같은 자리에 서 있는 문장이다. 그리고 이 연속선의 끝에 대한민국이 있다.
1948년 신생 공화국은 '연호에 관한 법률'로 '단군기원(단기)'을 공식 연호로 삼았다. 헌정의 시간 자체를 단군으로 셈한 것이다. 1949년 개천절의 법정 국경일 지정은 그 연장선일 뿐이다.
혹자는 물을 것이다. 건국 전승을 국가 기념의 축으로 삼는 것이 시대착오 아니냐고. 그렇다면 우리만 시대착오인 게 아니다.
로마인들은 로물루스의 건국 전승 기원전 753년을 기점으로 해를 세는 건국기원(ab urbe condita) 기년법을 썼고, 유대력은 지금도 천지창조를 기점으로 해를 센다.
일본은 '일본서기'의 진무천황 즉위 전승에 근거한 2월 11일을 1966년 '건국기념의 날'로 부활시켜 국경일로 지키고 있다.
가장 정확한 평행 사례는 베트남이다. 시조 훙왕(雄王)의 전승을 이어 온 제사 신앙을 호찌민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곧바로 공휴일로 지정했고, 유네스코는 2012년 이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세계는 건국 시조 전승을 실증의 대상이 아니라 계승의 자산으로 다룬다.
유네스코가 공인한 것도 훙왕의 실재가 아니라 그를 기려 온 공동체의 기억이다. 개천절이 기념하는 것도 정확히 그것이다.
"그 모든 수용은 근대 민족주의가 필요해서 만들어 낸 발명품 아닌가." 라는 반론이 있다. 아니다. 13세기의 승려와 문신, 고려의 조정, 신위의 좌차를 놓고 다툰 조선의 관료들, 사찰의 민속, 근대의 선교사와 독립운동가, 그리고 제헌 공화국의 입법자로 이어지는 이 연속선은 근대가 발명하기에는 너무 길고, 조작하기에는 너무 여러 진영에 걸쳐 있다.
불교, 유교, 개신교, 대종교, 그리고 세속 국가. 서로 배척하던 전통들이 단군 앞에서만은 한목소리를 냈고, 목소리가 갈릴 때조차 다툼의 대상은 단군을 모실지가 아니라 어디에 모실지였다.
발명품은 이런 계보를 갖지 못한다. 오히려 "단군 인식은 근대의 조작"이라는 폄하론이야말로 적극적 주장이며, 그 입증책임은 폄하론자에게 있다. 그들은 아직 이 700년의 연속선을 반증한 적이 없다.
칼 세이건은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The Demon-Haunted World)'(1995)에서 '차고 속의 보이지 않는 용'을 이야기했다. 어떤 검증도 비켜 가는 주장은 공허하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고, 나는 그 기준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단군 인식은 차고 속의 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정도전의 '국호' 첫 문장에, 실록의 상소문에, 국가 제향의 축문에, 산신각의 기둥에, '하나님'이라는 말 속에, 헤이그로 떠난 검사의 유고에, 망명객이 개천절에 읊은 시구에, 그리고 관보에 찍힌 단기 연호에 지문처럼 남아 있다. 검증을 비켜 가기는커녕 검증할 자료가 도처에 쌓여 있다.
세이건의 저울이 하나라면, 반대쪽 저울도 있다.
체스터턴은 "Tradition means giving votes to the most obscure of all classes, our ancestors", 전통이란 모든 계급 가운데 가장 잊힌 계급인 조상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이며, 곧 "the democracy of the dead", 죽은 자들의 민주주의라 했다('Orthodoxy', 1908). 지금 살아 있다는 우연만으로 과거 세대의 표를 몰수하지 말라는 것이다.
버크는 사회란 "a partnership between those who are living, those who are dead, and those who are to be born", 산 자와 죽은 자와 태어날 자 사이의 동업이라 했다('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 1790).
700년 동안 단군에게 표를 던져 온 무수한 세대가 있다. 그 표를 무효표로 만들려면, 개표 부정을 증명해야 한다. 이 모든 기록을 앞에 두고도 단군과 개천절을 폄하하려거든, 먼저 저 연속선이 허구임을 증명하라.
주장하는 자가 증명한다. 법정의 오래된 원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