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과 광기의 언어
ㅡ이승하론
이재복(문학평론가)
1. 아우슈비츠 이후
아우슈비츠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왜, 아우슈비츠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반성의 형식으로 존재하는가? 이 진부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그 끔찍한 악몽이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반성이 어떤 절대적인 실천성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인식의 갱신 정도는 가능하게 한다면 끊임없이 반성의 형식으로 존재해온 아우슈비츠의 악몽은 그만큼 제거되었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 사실은 아우슈비츠에 대한 우리의 반성이 중대한 결함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아우슈비츠에 대해 지금까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반성해온 것일까? 혹시 이성의 눈으로 아우슈비츠의 악을 반성해온 것은 아닐까? 이성의 눈으로 보면 아우슈비츠의 악몽은 그야말로 과오에 지나지 않는다. 이성적인 존재인 인간이 뜻하지 않게 실수로 저지른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하나의 사건이 바로 아우슈비츠의 악몽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우슈비츠는 이성적인 존재인 인간에게 계몽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반성은 이처럼 계몽의 기획 하에 진행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계몽의 기획 하에서라면 아우슈비츠 이후 호르크 하이머와 아도르노를 중심으로 이성에 대한 회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반성은 신화와 계몽이 뒤얽힌, 다시 말하면 이성을 부정하고 해체한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자아 혹은 이성을 신뢰하는 차원에서 진행되어 왔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는 어쩌면 우리가 결코 버릴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성은 인간의 삶의 조건을 결정하는 중요한 토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해체가 곧 이성에 대한 파괴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부정과 해체는 파괴(destruction)가 아니라 또 다른 창조(de-construction)이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 이후 이성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해체를 단행하지 못한 것은 이성이 감성보다 우월하다는 서구의 고질병적인 사유가 그 주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이 계몽의 기획을 통해 끊임없이 진보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믿음은 상대적으로 감성에 대한 관심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예 역사의 장에서 배제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성에 의해 배제된 감성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억압된 채 늘 이성의 틈이나 구멍 혹은 얼룩의 형태로 존재해왔던 것이다. 이성에 눈먼 인간은 이 사실을 망각했다기보다는 숨겨왔고 감성이 이성의 영역을 잠식해 들어오거나 전복하려는 징후가 엿보일 때마다 감성의 정체를 들추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을 더욱더 강화해왔던 것이다.
이성에 의해 주도된 인류의 문명이란 무엇인가? 문명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성에 의한 진보라는 말은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전근대, 근대, 후기근대로 오면서 인류의 문명은 변증법적인 진보의 개념에 입각해 발전을 거듭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이미 문명이라는 말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 아닌가? 문명이 이성에 입각해 진보의 개념을 담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문명과 대립되는 반문명, 문명의 진보를 조롱이라도 하듯 전혀 진보하지 않는 반문명적인 것도 문명과 똑같이 공존해왔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문명이 진보한다고 모두가 믿고 있을 때 그것을 비웃으며 존재자로서의 자신의 영역을 공고히 해온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욕망과 광기 등이 바로 그것 아닌가? 그 중에서 광기는 푸코가 날카롭게 해석해낸 것처럼 이성이 철저하게 숨기려 했고 감시와 처벌을 통해 관리하려 했던 대표적인 반문명적인 징표이다.
푸코가 해석해낸 역사는 이성의 눈으로 씌어진 것을 뒤집어놓은 전복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때때로 푸코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전율을 느낄 정도로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역사에 대한 그의 이 날카로운 시선 때문이다. 광기 혹은 광인을 사회로부터 격리하고 배제하면서 이성이나 그것이 이룩한 문명은 더욱 공고함을 유지해왔다는 그의 해석은 탈은폐의 정도가 주는 충격으로 인해 신선함을 주지만 그에 못지 않게 적잖은 아쉬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푸코의 해석에서 가장 큰 아쉬움은 그가 광기를 근대적인 규율의 측면에서 읽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근대적인 제도에 의해 광기가 관리된다는 점. 그 관리(규율)의 방식이 근대에 들어와 물리적인 것에서 감시와 같은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바뀌었다는 등의 해석은 근대가 가지고 있는 권력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들추어내고 있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광기를 제도적인 측면에서 해석해냄으로써 인간 본성 및 개인의 차원을 통해 표출되는 광기와 그것이 행사하는 폭력의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인간이 가지는 광기는 숨긴다고 숨겨지지 않는다. 광기는 근대적인 세련된 제도에 의해 통제되지도 않는다. 아우슈비츠를 통해 인간이 보여준 광기(폭력)는 문명의 진보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계속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광기는 문명에 편승해 진보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간은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아우슈비츠 이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광기와 폭력의 나날을 인간의 이성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오만과 편견을 버리고 광기 그 자체를 광기로 인식하고 그 광기의 뿌리를 탐색해 나가는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리라 본다. 이런 점에서 이승하의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1991), 『폭력과 광기의 나날』(1993), 『생명에서 물건으로』(1995)는 의미심장함으로 다가온다.
2. 광기의 역사, 몸의 역사
이승하 시의 광기는 누이를 통해 표상되고 있다.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제1부 '미친 누이를 위하여'에 보면 누이는 "아무런 수치심 없이, 두려움 하나 없이/ 오롯이 옷을 벗는"(「바람 그리기」) 영혼을 상실한 존재이자 "월경이 멎고, 식욕을 잃어"버린 존재로 드러난다. 영혼과 육체 모두 훼손된 누이는 어머니와 연인 사이에 있으면서 늘 아련한 서정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여느 시에서의 누이와는 다르다. 그가 노래하는 누이는 언제나 고통스러운 이미지로 존재할 뿐이다.
그의 시에서 엿보이는 이 고통은 누이가 제공하는 것이지만 보다 더 그 심층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누이에 대한 시인의 의식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미친 누이를 통해 시인이 들추어내려고 한 것은 피해자인 누이의 상처와 함께 그녀를 미치게 한 가해자인 아버지의 폭력성이다. 누이에 대한 가해자가 다름 아닌 아버지라는 사실은 시인으로 하여금 고통의 정도를 더 크게 하고 있다. “너한테 폭력을 가한 아버지를”(「병든 아이」) “심판한다”는 것은 미친 누이를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고통스럽기 때문에 시인은 집을 나와 부나방처럼 돌아다니기도 하고 또 자살을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고통이 진정으로 묻어나는 것은 이러한 인지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감각의 차원에서이다. 시인의 언어에서 묻어나는 고통에 찬 감성적인 소리와 이미지들은 그것이 관념이라기보다는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시인의 고통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한다.
시인의 몸에서 나오는 고통을 생생하게 다시 몸으로 체험함으로써 독자들은 시인의 미친 누이와 가해자인 아버지, 그리고 그 “폭력을 사주한 어머니”를 통해 드러나는, 가장 친밀하고 견고한 가족이라는 관계조차도 순식간에 파괴해버리는 폭력이 가지는 무차별적이고 광포한 힘의 실체와 만나게 된다. 아버지가 자식을 미치게 할 수 있는 이 무자비한 폭력성은 이성적으로 온전히 해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성에 앞서 그것을 순식간에 삼켜버리는 광기에 가득 찬 폭력성에 우리는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시인은 이 광기에 가득 찬 폭력성을 이성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감성의 눈으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광기에 가득 찬 폭력성을 감성으로 맞서게 되면서 새롭게 드러나는 것은 이성의 눈으로 보면 발견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아이러니적인 양상이다. 이성의 눈으로 보면 누가 진짜 미쳤는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광기는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며, 그것을 이성의 눈으로 보면 광기는 이성의 도그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진짜 미친 사람이 누이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진정으로 미친 사람은 아버지이며, 우리가 가둬야 할 사람은 누이가 아니라 아버지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이 사회로부터 격리된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누이이다. 시인이 「정신병동 시화전」시리즈를 통해 보여주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흰 담벼락에 각자의 영혼을 찢어 붙여
후줄근히 젖어드는 자기 확인의 시간
양다리 사이의 치부를 자랑해 보일지언정
사회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친구들로부터
나 자신으로부터도 격리되어 있는데
우리 무엇을 더 부끄러워할 수 있을까
들판과 시냇물, 먼 풍경은 친숙하였고
빌딩과 수돗물, 가까운 문명은 낯설기만 했다.
ㅡ「정신병동 시화전 1」 부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정신병동에 갇힌 누이와 같은 존재들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을 시인이 '부끄러움'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것은 기실 그들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을 가둔 자들을 향한 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병동에 누이(혹은 정신병자들)를 가두고 그녀의 몸을 통제하고 관리한다는 것은 그 행위 자체가 아이러니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누이가 당하는 폭력에 의한 비극의 정도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이 비극의 정도가 크면 클수록 그만큼 누이를 가둔 사회 혹은 아버지의 치부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정신병동에 갇힌 누이 혹은 정신병자들이 “양다리 사이의 치부를 자랑해 보인”다는 대목은 치부를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숨기고 있는 사회나 아버지를 향한 시인의 아이러니컬한 방법에 의한 비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광기가 하나의 아이러니컬한 양상을 띄면서 실제로 그의 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몸에 가해지는 광기에 사로잡힌 폭력이다. 광기에 사로잡힌 폭력이 직접적으로 행사되는 실존의 장은 바로 누이의 몸이기 때문이다. 누이의 몸에 가해진 폭력은 정신병원에서의 통제와 관리라는 푸코식의 억압은 물론 “월경이 멎고, 식욕을 잃었다”라는 말 속에 잘 드러난 것처럼 그 자체가 이미 생명 활동을 상실할 정도로 가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이 존재하는 이유가 식욕과 성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누이의 몸에 가해진 폭력은 도저히 문명의 짓이라고는 할 수 없는 야만적인 데가 있다.
누이의 몸에 가해진 이러한 광기에 가득 찬 폭력은 『폭력과 광기의 나날』에 오면 좀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가 청각에 환기하는 방식을 통해 폭력을 드러냈다면 『폭력과 광기의 나날』은 그것을 주로 시각에 의존하고 있다. 이 시집은 시각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 사진들을 곳곳에 끼워놓았다. “심장이 뚫려 한길에 누워 있는 원주민”(「공포의 한낮」), “죽어가는 전우를 위해 인공호흡을 해주는 병사”(「주검과의 키스」), “내전으로 인해 다리가 잘려진 소년”(「현대의 묵시록」), “도둑질을 했다고 매를 맞는 흑인 소년”(「폭력에 관하여」), "굶어죽어 가는 소말리아 한 어린이의 오체투지五體投地"(「이 사진 앞에서」), “이라크에 독가스가 투하되었을 때 아이를 안고 죽은 한 쿠르드족 아버지”(「폭력과 광기의 나날」), “세르비아 병사들에 의해 강간당한 회교 여성들”(「1992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등 이 모든 사진들은 인류의 역사가 광기의 역사요 폭력의 역사임과 동시에 몸의 역사임을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진은 순간을 영원으로 바꾸어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물이지만 여기에서의 사진들은 영원을 환기하지 않은 채 그 순간 순간의 강렬함으로만 존재한다.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사진 속의 주검들은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주검을 다시 살게 하는 역설은 광기에 가득 찬 폭력에 의해 억울하게 최후를 맞은 몸의 꿈틀거림이라고 할 수 있다. “심장이 뚫려 한길에 누워 있는 원주민”의 몸은 비록 최후를 맞았지만 “전세계의 시계바늘을 고정시켜 놓”을 만큼 그의 몸(시체)의 꿈틀거림은 강렬했으며, “죽어가는 전우를 위해 인공호흡을 해주는 병사”의 몸이나 “아이를 안고 죽은 아버지”의 몸 역시 죽음을 살아낼 정도로 그 꿈틀거림이 강렬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굶어죽어 가는 “소말리아 한 어린이의 오체투지五體投地”는 최후의 일각까지 이 세계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적인 꿈틀거림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식사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교인을 향한
인류의 죄에서 눈 돌린 죄악을 향한
인류의 금세기 죄악을 향한
인류의 호의호식을 향한
인간의 증오심을 향한
우리들을 향한
나를 향한
소말리아
한 어린이의
五體投地의 禮가
나를 얼어붙게 했다
자정 넘어 취한 채 귀가하다
주택가 골목길에서 음식물을 게운
내가 우연히 펼친 『TIME』지의 사진
이 까만 생명 앞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ㅡ「이 사진 앞에서」 부분(『폭력과 광기의 나날』)
“소말리아/ 한 어린이의/ 五體投地”는 그야말로 하나의 ‘예禮’다. 그의 ‘예’는 인류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특히 인류가 저지른 죄악과 그것을 방조한 인간에 대한 경건한 바람의 차원에서 그의 ‘예’는 행해지고 있다. 인류가 저지른 죄악이라면 무엇보다도 광기에 사로잡힌 폭력의 행사로 인한 인간의 몸에 대한 억압의 역사를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광기의 역사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 인류의 역사를 향해 소말리아의 한 어린이가 보여주고 있는 “五體投地의 禮”는 그가 그것을 희구했든 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광기의 역사를 넘어서고자 하는 간절한 희구로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이 어린이의 “五體投地의 禮”는 단순한 희구로 그칠 수도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광기와 그것이 행사하는 폭력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느 곳에서 장벽이 허물어져도/다른 곳에서 화학무기가 생산되”(「아우슈비츠·21세기」)듯이 혹은 “골고다 언덕에서 죽었던 그대가 폭력에 익숙한 자들의 손에/ 그날처럼 폭행당하고 있”(「예수를 위한 기도」)듯이 광기와 폭력은 끊임없이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광기와 폭력의 사슬을 끊을 수 없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五體投地의 禮”에서처럼 인류가 저지른 죄에 대해 경건하게 반성 내지 참회하게 한다거나 아니면 인류가 저지른 죄에 의해 생겨난 상처를 들추어내어 그것을 환기시키는 일이다.
광기와 폭력에 의해 생겨난 상처를 덧나게 하는 방법은 다소 무모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이것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광기와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그가 받은 상처를 상처로 만나게 하는 방법은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광기와 폭력에 의해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미친 누이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들만의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 환상은 그들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이 환상을 충분히 즐길 수 있어야 그들은 또 다른 갱생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이 갱생의 길을 그의 시에서는 상처받은 몸이 가지는 환상에 대한 조심스러운 모색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3. 상처 속으로 난 길, 생명의 몸
광기와 폭력에 의해 식욕과 성욕마저 상실한 누이의 몸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그녀의 몸은 비록 “버려지”기는 했지만 “곱게도 미쳐”(「바람 그리기」) 그 나름대로 실존의 방식을 찾는다. 누이의 몸이 가지는 이 아름다운 실존은 “이파리도 없이, 어린 풀과 나무들/ 세상의 공기를 만들어보려고/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찌그러진 몸으로 간절히/ 진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모습”(「성분도 직업도 재활원에서」)에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실존의 방식은 누이가 “소리 없이 몸으로 우는 법을 익혔”(「정신병동 시화전 4」)다는 것을 말한다.
“소리 없이 몸으로 우는 법을 익혔”다는 것은 자신의 몸에 폭력을 가한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소리 없이 몸으로 운다”는 것은 몸으로 세계에 반응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보다 적극적인 소통의 가능성을 잠재태 혹은 현재태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숨기거나 배제하지 않고 그것을 온몸으로 감지하여(상처를 상처로서 만나) 어떤 새로운 갱생의 길을 모색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몸으로 운다’는 것. 다시 말하면 몸으로 세계와 맞선다는 것은 그 안에 죽음보다 강한 꿈틀거림 혹은 강한 생명의 숨결을 내장하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슬에 젖은 코스모스 하나의 목숨과
영혼의 상처 아물지 않는 나의 목숨은
무엇이 다른가 어느 쪽이 더 귀한가
…(중략)…
내 손바닥 위에 놓인 작은 코스모스 꽃씨여
땅을 인연으로 하여 너를 꽃피우고 싶다
저 생긴 대로 흐르는 것이 물의 法인데
ㅡ「물의 法」 부분(『생명에서 물건으로』)
살아 있는 한 살려고 애쓰는 것이다
살아 있는 한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씨 뿌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저 밭에 뿌려진 씨앗이
싹 돋고 싶어서 돋아나겠느냐
가르쳐주지 않아도
배우지 않아도
때가 되면 싹이 돋고
때가 되면 잎이 지는
저 많은 생명체들의
생존에의 의지를 보려무나
아들아
내가 너에게 물려줄 것이라고는
생명 이외에는 한 가지도 없다
ㅡ「생명法ㅡ아들에게」 부분(『생명에서 물건으로』)
“소리 없이 몸으로 우는 법”과 “물의 法”, “생명法”은 다르지 않다. “소리 없이 몸으로 우는 법”은 “물의 法”과 “생명法”의 원인이거나 결과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여기에서의 ‘法’은 서로 통한다. 이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소리 없이 세계에 맞서 온몸으로 울었기 때문이다. 광기와 폭력에 의해 죽음보다 무거운 상처를 지닌 몸을 “물의 法” 혹은 “생명法”에 의해 거듭나게 한 것(상처를 상처로서 만나게 한 것. “물의 法”이나 “생명法”은 “저 생긴 대로 흐르”게 한다)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혁명이다. 광기와 폭력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 몸의 생명을 다시 “물의 法”이나 “생명法”에 의해 거듭나게 하는 것은 자아와 세계와의 지독한 싸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광기에 사로잡힌 아버지의 폭력에 의해 자식(누이)의 생명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당한 상태에서 “아들아/ 내가 너에게 물려줄 것이라고는/ 생명 이외에는 한 가지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대목은 희생적인 제의祭儀를 치르고 난 이후의 큰 깨달음을 연상시킨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스러운 제의를 감내하면서도 끝끝내 버리지 못하는 그 생명이란 과연 무엇인가? 왜, 시인은 폭력으로 점철된 광기의 역사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으로 생명을 내세우고 있는가? 그것은 광기 자체가 생명을 억압하거나 소멸시키기 때문에 생명을 부각시키게 되면 그 광기의 부정성이 극대화되고 부정성이 클수록 희생에 대한 제의적인 측면도 상대적으로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생명을 내세운 시인의 의도를 정확하게 짚어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단순히 광기를 고발할 요량이었으면 시인은 그 죽음보다 힘든 고통을 감내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인이 겨냥한 것은 광기를 넘어 생명의 차원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존재론이다.
생명의 차원에서 보면 가해자인 아버지와 피해자인 누이는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다. 누이는 아버지의 생명의 씨앗으로 또 다른 하나의 생명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비단 아버지와 누이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보다 범위를 확장하면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 인간과 우주 사이에서도 성립되는 존재 양태이다. 생명은 하나 하나가 고리처럼 연결된 온생명이다. 비록 광기가 인간이 생래적으로 혹은 후천적으로 가지게 되는, 숨길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온생명의 그 도저한 흐름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온생명의 도저한 흐름을 시인은 「생명法」과 「어린 생명에게」에서 각각 “바람 잘 때 고개 수그리는/ 저 많은 생명체들의/ 향일向日에의 의지를 보려무나”라든가 혹은 “세상에 태어난 지 2년 7개월이 된/ 어린 딸과 함께 별을 봅니다/ 수십 수백 광년을 달려왔을 빛과/ 어린 생명의 눈빛이 만나는 순간입니다”라는 식으로 강렬하게 노래하고 있다.
온생명의 도저한 흐름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 생명의 원천을 탐색하기에 이른다. 시인이 탐색 끝에 찾아낸 생명의 원천은 “자궁을 가진 두 사람”(「두 여성에게 바침」), 곧 어머니와 아내이다. 어머니와 아내는 “생명을 수확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이 새롭게 수확한 “밝은 새 생명을/ 어두운 세상에다” 내보낸다. “어두운 세상에” 내보내진 생명은 이 두 여성의 곁을 떠난다. 떠날 뿐만 아니라 “자궁으로 자신의 생명을 키웠던 두 사람을/ 베드로처럼 세 번 부인할 수도 있는” 그런 존재가 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자궁을 가진 두 사람”, 다시 말하면 그 “자궁으로 새 생명을 키웠던 두 사람”은 나(새 생명)로부터 떠나지 않는다. 또한 두 여인과 내가 불화의 관계에 놓여 서로에게 주는 상처가 깊어져도 이들의 “영혼과 육체”는 “분리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자궁으로 생명을 키웠던 두 사람”의 생명 사랑이 얼마나 견고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이란 “자궁을 가진 두 여인”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바로 그런 것이다. “서로에게 주는 상처가 깊어져”도 그 상처를 외면하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까지도 감싸안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생명이다. 광기에 의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스러운 제의를 체험한 시인이 그 광기에 대한 폭로와 한풀이로 일관하지 않고 생명의 문제를 들고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광기와 폭력으로 점철된 가족사, 더 나아가 인류사를 치유할 수 있는 것으로 생명, 특히 “자궁을 가진 두 여인”으로 상징되는 생명을 들고 있다는 점은 그 동안 이성과 남성에 의해 주도되어 온 역사에 대한 반성과 함께 앞으로 다가올 세계에 중심음을 낼 수 있는 것이 감성과 여성이라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감성과 여성의 부드러움과 포용성을 내장하고 있는 생명에 대한 믿음은 「어린 생명에게」라는 시에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어린 별이 자라 초신성으로 폭발하고
젊은 별이 식어 백색왜성으로 숨거두어
생명의 위대함과 고결함을 들려줄 것입니다
딸과 함께 바라보는 저 많은 별을
이 어두운 지상의 누군가가 지금
바라보고 있을 것임을 믿습니다
ㅡ「어린 생명에게」 부분(『생명에서 물건으로』)
일단 이 시에서 노래되고 있는 ‘별’은 루카치가 동경한 그리스 로마 시대의 창공의 별만큼이나 투명하게 빛나고 있다. 시인이 “딸과 함께 바라보는 별”에는 한 점 회의가 스며들 틈이 없어 보인다. 이 견고함은 광기에 사로잡힌 폭력에 온몸으로 맞서 치열하게 싸워서 얻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광기에 사로잡힌 폭력에 온몸으로 맞서 이만한 생명의 몸을 얻은 것은 눈물겨운 일이다. 그러나 기우인지는 모르지만, 아니 어쩌면 이것은 기우가 아닐 수도 있다. 그가 얻은 생명의 몸이 조금 위태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생명의 몸을 노래한 『생명에서 물건으로』를 보면 이 위태함이 현실로 드러난다. 시인이 아직 견고한 생명의 몸을 얻기 위해 해결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시인이 광기에 사로잡힌 폭력과 싸워 힘겹게 얻은 생명의 몸으로도 완전히 포용할 수 없는 존재로 남아 있다. 만일 시인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심적인 충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가 겨냥하고 있는 광기와 폭력을 넘어선 생명 추구는 온전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4.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광기에 사로잡힌 폭력을 누이의 몸에 행사한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힘겨운 일임에 틀림없다.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고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주는 포근함과 부드러움에 안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에 대한 발견으로 시인은 광기에 사로잡힌 폭력을 넘어설 수 있었고 생명의 몸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시인이 어머니의 자궁을 통해 발견한 생명의 몸은 아버지를 감싸 안을 수 있을 정도로 크고 깊은 것이지만 시인은 그 생명의 몸 안에 아버지를 온전히 담고 있지 않다. 『생명에서 물건으로』를 보면 비록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간간이 우회적으로 아버지를 생명의 몸 안에 감싸 안아야 된다는 그런 의식 정도는 흘리고 있지만 그것이 눈에 뜨일 만큼 힘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이승하의 시가 광기와 폭력에 병든 몸을 넘어 생명의 몸을 사적史的으로 통찰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아버지에 대한 이해가 좀더 있어야 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시에 등장하는 아버지 역시 누이 못지않게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누구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도 “죽음으로 이르는 병”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이에게 광기에 사로잡힌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그 자신은 누이뿐만 아니라 가족과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소외되어 결국에는 고독이라는 죽음보다 더 깊은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시인은 아버지의 이 고통까지도 누이의 고통과 동등하게 관심을 가지고 읽어내야 한다. 시인이 시인일 수 있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한 ‘세계 내’에 은폐되었던 의미를 혹은 진실을 들추어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고통을 제대로 읽어낼 때 시인은 비로소 온전한 생명의 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온몸으로 광기에 사로잡힌 아버지의 폭력에 맞섰듯이 다시 온몸으로 그 아버지의 상처와 만나야 한다. 아버지와 나는 한 몸도 아니고 그렇다고 두 몸도 아닌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관계 하에 있는 존재들이 아닌가? 아버지의 몸을 향해 시인이 몸을 열어야 할 보다 절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재복(문학평론가)
1966년 충북 제천 출생
1996년 『소설과 사상』으로 등단
현재 한양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한양대 미래문화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