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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간의 기적
병철, 주영, 정희
이 세 아이는 20세기가 우리나라에 준 최상의 선물이다.
1910년 2월 12일 이병철이라는 아이가 태어났다.
이 해는 경술국치로 불리는 해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공식적으로 망한 해다. 세계지도에서 우리나라가 사라지고 없어진 바로 그해다.
나라가 망한 해에 앞으로 나라를 먹여 살릴 인물이 태어났다는 것은 우리민족의 미래에 대한 예언을 보는 것 같다.
그로부터 5년 뒤 1915년 11월 25일 정주영이란 아이가 태어났다.
강원도 산골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우리 후손들이 영원히 기억할 건설대국, 조선대국, 자동차대국의 성공신화를 만들어 줄 인물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이병철에 이어 더 굳게 힘을 보태라는 민족의 장래에 대한 강력한 예언이 아니던가?
그로부터 2년 후 1917년 11월 14일 박정희라는 아이가 태어났다.
못생기고 작은 이 아이가 패배의식에 찌들어 있던 이 나라를 부국강병의 국가로 만들어 낼 큰 인물이 될 줄 누가 감히 짐작했겠는가?
위의 세 사람은 성장하기까지 서로 얼굴을 마주 한 일이 없었지만 그들이 가진 꿈과 비전과 의지는 똑 같았다.
박정희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났기 때문에 비록 일본군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았지만, 그가 쌓은 극일(克日)운동의 토대 위에서 후일 우리나라는 세계시장의 곳곳에서 일본을 제칠 수 있는 잠재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일본과 가장 잘 싸운 사람은 박정희다.
원래 영웅은 수 백 년에 한 번 씩 탄생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몇 백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한 영웅들이 이 나라가 망하자말자 7년 사이에 한꺼번에 이 땅에서 태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으니, 천지신명은 우리민족에게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대망의 씨앗을 뿌려주신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필자는 수출시장 개척과 수출실적 제고를 위해 해외업무, 해외사업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올해 우리나라 무역흑자가 처음으로 일본의 무역흑자를 앞서는 쾌거를 이루었다. 일본은 우리가 감히 넘보지 못할 세계 최대의 무역흑자대국이었다. 이러한 무역흑자대국을 한번이라도 앞서는 일은 필자의 생애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일인 줄로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자동차 수요대국 미국시장에서 가장 성장하는 자동차는 현대자동차다.
유럽의 소비대국 영국시장에서 팔리는 전자제품의 30%는 삼성전자 제품이다.
지금까지는 일본회사들이 차지하고 있던 바로 그 자리다.
한국은 지구촌 시장에서
반도체 수출 1위,
휴대폰 수출 1위,
철강 수출 1위,
조선 수출 1위,
석유화학제품 수출 4위,
자동차 수출 5위 등의 업적을 실현하고 있다.
100년 전 세계는 ‘영토의 전쟁’이었다.
100년 후 지금의 세계는 ‘시장의 전쟁’이다.
오늘날 세계에서 영토는 자국제품을 팔 수 있는 시장이다.
이병철 과 정주영은 지구촌 땅 끝까지 찾아가 상륙했다.
온갖 좌절을 극복하고, 피 흘려 교두보를 만들고, 거기서 만난 적을 무찌르고, 전진하고 또 전진하면서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렇게 얻은 영토가 5대양 6대주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영토에는 태양이 지지 않는다.
호암 이병철은 필자가 딱 한 번 만난 일이 있다.
1969년이다.
당시 필자는 미쯔이물산(주) 서울지점에 근무하고 있었다. (일본최대의 종합무역상사이면서 3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일본최고의 기업.)
장소는 반도호텔(현 을지로 입구의 롯데호텔)이었다.
일본에서 출장 온 종돈(種豚)전문가(그는 육종학 박사를 취득하고 미쓰이물산 본사에 근무하고 있던 종돈수출 담당이었다.)와 함께 점심식사에 초대받았다.
대화는 주로 종돈 전문가와 이병철 회장 사이에 오갔고 필자는 식사만 하고 나온 기억밖에 없다.(실제로 필자의 역할은 지점의 담당자로 본사에서 온 출장자를 안내하는 정도였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이병철 회장의 사물 파악에 대한 치밀성과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탐구심과 학구열을 거론하기 위해서다.
일본은 당시 돈육의 최대수입국이었다. 한국에서 일본인이 좋아하는 육종을 사육하여 일본에 수출하고자 돈육의 ‘비육단지’조성을 이병철 회장은 기획하고 있었다.
실무자에게 시켜도 좋을 사안이었지만 창업자 스스로 직접 전문가로부터 종돈에 관한 지식을 섭렵하려는 그 진지한 태도와 겸허한 자세는 삼성의 오늘을 있게 한 탄탄한 토대가 되지 않았을까 필자는 그렇게 회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병철은 기업가 정신의 화신이다.
기업을 위해서는 어떠한 치욕도 감수했다.
‘돈병철’이라는 사회의 수군거림도 그에게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한 때 ‘재벌 망국론’의 대표재벌이라는 딱지표도 그에게는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사업으로 나라에 기여하겠다는 그의 ‘사업보국’ 신념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다.
“국가발전에 필요한 사업은 경영환경이 어려워도 도전해야 한다. 돈만 벌려면 다른 일을 하라. 기업인의 사명은 새로운 사업의 창조다.” 라는 그의 어록만 봐도 ‘사업보국’의 신념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짐작 가고도 남는다.
이병철은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제조업다운 제조업을 일으킨 인물이다.
한국의 개발도상 단계에서 이런 인물이 때맞추어 나타난 것은 민족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당시 한국의 경제형편은 1945년 광복 후 6.25 한국전쟁(1950-1953)까지 외부에서 받은 원조가 아니면 무조건 무역이었다. 내부에서 무엇을 만든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삼성물산도 무역업부터 시작했다.
이병철은 무역업에서 머물지 않고 곧 바로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주변에서 왜 고생해 가면 제조업을 하느냐고 말했지만, 이병철은 “무역만 해서는 안 된다. 들여온 재료로 물건을 만들어서 국민에게 공급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만든 회사가 제일제당이다. 당시 국민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먹을 거리였기 때문이다. 그 후에 삼성전자를 만들어 가전 사업을 일으키고 70년대 중반부터 사업 다각화를 꾀하여 중화학공업으로 확대시켰다.
삼성이 처음 전자산업에 진출하기 위해 일본 산요전기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산요전기는 삼성전자에 자본도 40% 대고 기술도 줬다. 1970년 말 공장건설이 완공되자 산요전기는 부품과 원자재 가격을 높이고 기술제공에도 비협조적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두 회사는 상당한 긴장관계가 계속되는 가운데 삼성전자는 수모를 받으면서 견뎌냈다.
삼성은 일본의 ‘풍부한 자본’과 ‘앞선 기술’을 가장 잘 활용한 회사다.
어느 누구보다 일본의 자본과 기술 지원을 많이 받았다.
1964년 세계최대의 비료공장을 설립할 때 미쓰이 물산의 지원을 받았고, 반도체 사업을 시작할 때도 일본의 샤프에서 기술을 도입하는데 성공했다.
창업자 이병철 회장의 해박한 일본에 관한 지식과 치밀한 판단력 그리고 앞을 내다보는 혜안 덕분이었다.
삼성의 최초 기술적 스승이던 일본의 산요전기는 2009년 파나소닉전기에 흡수합병 되면서 망했다. 반면 바로 그해 삼성전자는 세계 1위의 전자업체로 부상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런 걸 말하리라!
아산 정주영은 필자와 인연이 깊은 편이다.
필자를 어여삐 여기고 남달리 깊은 신뢰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정주영과 필자는 일본 동경에서 처음으로 상면했다.
정주영은 동경지점장과 현대그룹 회장의 상면이 이루어질 때까지 필자에게는 감히 근접할 수 없는 아주 높은 사람이었다.(1981년 당시의 필자 신분이 ‘부장’이었으니 아득하게 높은 위치에 있는 그룹회장을 서울 본사에 있었다면 상면이나 가능했겠는가?)
필자에게는 천조일우의 행운일 수밖에.
동경 ‘제국호텔’에서 인사를 드리고 출장업무 수행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일본근무 기간이 통산 17년으로 늘어났다.(현대그룹 최장수 한자리 해외지점장 기록이다.)
정주영 창업자와 일본에서 같이 식사 한 것이 300번이 넘는다. 골프수행도 50번이 넘는다. 일본재계의 거물들과 자리를 같이 한 것은 일일이 회수를 세어볼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정주영은 필자에게는 서양식 멘토였고 한국식 스승이었다.
다 아는 일이지만 정주영은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이다.
이병철은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유학까지 다녀 온 엘리트 지식인이었지만, 정주영은 산골마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서당에 다니다가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5세에 초등교육을 마친 사람이다.
한국의 산업화 시대에 두 사람은 최대의 라이벌이었다. 재계 1등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였던 것이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지 않는가? 정주영은 자신보다 나이가 위인 이병철을 언제나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이병철 회장은 성공을 위해 치열한 승부근성을 갖고 자신의 단점을 되짚어 고쳐가며 성공의 길을 현실화한 인물”이라며 “삼성의 성공비결은 이병철 회장의 기업가 정신의 결정체”라고도 말했다.
정주영이 최초로 세운회사는 자동차 수리회사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 아도서비스를 창업하여 자동차 수리업을 시작하였다.
정주영이 일으킨 기업은 모두 중후장대형산업(重厚長大形産業)이다.
이병철이 경박단소형산업(輕薄短小形産業)을 일으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제조업을 일으켰다면, 정주영은 우리나라의 제조업을 경공업 중심에서 중공업 중심으로 중심축을 이동시킨 인물이다. 정주영이 최초로 창업한 자동차, 조선공업은 건설, 제철산업 등과 맞물려 한국산업화의 주춧돌이 되었다. 정주영은 한국 중공업산업의 아버지라 평가 받고 있다.
이병철 회장과 정주영 회장의 공통분모는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광범위한 ‘지식습득력’과 치밀한 ‘사업창조력’이다.
정주영은 지식습득에 거의 동물적 흡수 능력을 가진 분이다.
여행 중에도 항상 책을 끼고 다녔지만 그의 독서력은 굉장하였다. 출장지에 가서도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은 현지신문이었다. 방문 회사를 가기 전에 반드시 새로운 지식, 새로운 상황, 새로운 현장의 감각으로 무장하였다. 변화상을 속속들이 꿰차고 상대방을 만났으므로 회의에서는 언제나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다.
이병철은 동경에 출장 오면 언제나 ‘야에스 북 센터’(동경 최대의 서점)에 들렸다. 한 번에 수십 권의 책을 구입하는 현장이 티브이에 방영될 정도로 책을 좋아하였다. 모르는 것은 무엇이든 직접 캐물어 확인 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분이다.
두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사업 분야의 창업을 가장 많이 한 인물이다.
대통령 박정희는 정치지도자다.
그의 ‘조국근대화’와 ‘조국산업화’라는 일관된 정치신념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오늘날은 상상할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구촌에는 140여 개의 신생국가가 탄생하였다. 그 많은 나라 중에서 산업화에 성공하고 민주화에 성공하여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나라는 오직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남북이 정치이념 때문에 갈려 상호 대치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 낸 성공신화이기 때문에 더욱 값진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필자는 지금 7년간의 기적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1910년에서 1917년까지 7년간을 말한다. 이 기간 동안 병철, 주영, 정희 라는 세 아이가 한반도에 태어난 것은 기적이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흘렀다.
금년은 2010년이다.
2010년부터 2017년의 7년 동안 우리나라는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날 것으로 필자는 예상하고 있다.
기적의 시작은 원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국운은 한국을 지구촌에서 가장 발전하는 나라로 만들 것이다.
우리는 발전하기 위해 살고 있다.
하루 하루 발전하지 않는 삶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앞으로 7년간 일어날 기적의 주인공은 오늘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 젊은이들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선비정신으로 무장하자. 한국의 젊은이들이여!
和元 김진수 올림(선비리더십아카데미 회장)
첫댓글 병철, 주영, 정희 이들에게도 선비정신이란 것이 있었나요? 선비정신...
위에 말씀하신 세분의 탄생...우리에게 내린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뒤이어 나타난 3김... 그건 재앙이었습니다.
하늘은 축복도 주지만, 그 축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를 시험하나 봅니다.
이 땅의 어리석은 백성들... 다음의 선택에 실수를 연발하여, 그 축복의 의미를 스스로 반감시키고 있습니다.
문제는 아직도 그 잘못된 선택에 대해 잘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