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생명력을 가진 호랑이 이미지
우리 나라에 전하는 호랑이 이미지로 가장 오래된 것은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면 대곡리 소재)이다. 여기에는 표범 한 마리를 포함하여 모두 열한 마리의 호랑이가 그려져 있다. <그림 1>의 화면 왼쪽은 점무늬 표범이고 그 오른쪽은 줄무늬 호랑이임을 확인할 수 있다. 반구대가 지닌 성격으로 볼 때, 호랑이는 당시 사람들을 위한 수렵의 대상을 넘어 주술적인 신앙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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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그림 1> 반구대 암각화의 호랑이(부분), 신석기 말기~청동기 시대 (오른쪽)<그림 2> 능산리 고분의 백호도, 백제 말기(7세기),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소재 |
주술과 신화의 세계에서 ‘호랑이 신’이자 토템 신이던 호랑이는 음양오행·신선·불교사상 등의 영향을 받아 방위신·12지신 같은 기능을 갖춘 신으로 변화하였고, 그 이미지는 사신도(四神圖)<그림 2>와 석상(石像)<그림 3>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후 고려 시대에는 호랑이가 주로 동경(銅鏡)의 사신 무늬로 등장하였으며, 조선 시대까지 회화와 무늬로 다양하게 조형화되었다. 이처럼 경외와 숭배의 대상으로 절대적 위치를 가졌던 호랑이가 점차 예술 전반에 다양한 형태로 활용되면서, 여러 가지 상징 의미를 갖추게 된 것이다.
조선 시대의 호랑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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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김유신 묘, 12지신상의 호랑이상, 통일신라 시대(8세기), 국립경주박물관 |
고려 시대의 문헌에서 호랑이 그림에 대한 내용을 찾아 볼 순 있으나, 현재 전해지고 있는 호랑이 그림은 대개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들이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형식은 산신도(山神圖)
1)나 까치가 함께 그려진 호작도(虎鵲圖)이며, 이밖에 무서운 호랑이 한 마리를 그린 맹호도(猛虎圖), 오랑캐들이 호랑이를 사냥하는 호렵도(胡獵圖), 소나무와 함께 그린 송호도(松虎圖), 호랑이 또는 표범의 가죽무늬를 그린 호피도(虎皮圖), 호랑이 무리를 그린 군호도(群虎圖)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호랑이 그림은 그 종류(줄무늬, 점무늬), 자태, 즉 서 있는지, 앉았는지, 엎드렸는지, 웅크렸는지 등등과 그림에 함께 등장하는 대상들에 따라 의미도 달라진다. 이와 같이, 호랑이 그림은 오랫동안 다양한 내용을 여러 형식에 담아온 것이다.
산신과 호랑이
옛날 사람들은 하늘의 신이 내려와 산에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산에 있는 특정한 나무, 바위, 그리고 호랑이처럼 강한 짐승에게도 신령스러운 힘이 있다고 여겼다.
이런 옛사람들의 믿음을 ‘송호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림 4>를 보면, 산신의 지위를 갖는 호랑이가 소나무와 함께 등장한다. ‘산신·호랑이·소나무’의 연관성은 고려 시대의 ‘숭산신고사(崧山神故事)’에서 비롯한 것으로, 소나무는 산신, 즉 호랑이의 영험함과 변신 능력을 나타내게 된다.
“숭산신은 원래 높은 산의 신[高山神]인데 요나라가 왕성에 침입하자 그 신이 밤중에 소나무 수만 그루로 변화하여 사람소리를 내어 이를 물리쳤으므로 후에 그 상(像)을 봉해서 ‘숭(崧)’이라 하고 받들었다고 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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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대송호도, 조선 후기, 경기대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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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산신탱, 조선 후기, 목아불교박물관 |
산신을 소나무와 호랑이로 표현한 ‘송호도’는 도교의 ‘신선기호고사(神仙騎虎故事)’
3)의 영향을 받아 신선(대개 어린 동자를 동반한다)이 중심이 되고 호랑이는 그 보조적 위치로 바뀌게 되는데 이러한 그림이 산신도의 전형을 이루게 된다. 이때 호랑이는 산신의 뜻을 받들고 보좌하는 존재이기에 몸을 낮춘 듯한 자태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그림 5>에서 소나무를 배경으로 화면 중앙에 당당히 자리한 신선 모습의 산신과 대조적으로, 호랑이는 몸을 낮춰 그에게 아양을 떠는 고양이처럼 보인다.
산신과 까치, 그리고 호랑이
‘숭산신고사’의 숭산신이 있는 황해도에서는, 앞서 살펴본 신선형 산신도와 달리 소나무와 호랑이, 그리고 까치 한 쌍이 등장하는 까치호랑이 그림이다. 유독 황해도의 산신도가 까치호랑이 형식인 것은, 산신이 소나무로 변신했다는 이야기의 의미가 강하게 유지됐다고 볼 수 있는데, 호랑이는 소나무로 변신한 산신의 뜻을 까치를 통해 전달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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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그림 6> 호작도, 18세기, 호암미술관 (오른쪽)<그림7> 대호작도, 조선 후기, 경기대박물관 |
그렇다면, 왜 하필 까치가 등장하는 것일까.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원래 산신의 사자(使者)는 까치가 아니라 까마귀였다.
4) 알다시피 까마귀는 샤머니즘에서 태양신을 상징하는 동물로 신의 뜻을 하달하는 새로 숭앙되었다.
5)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 까치는 예로부터 상서로운 새인 길조(吉鳥)
6)이자 서낭신
7)의 신탁(信託)을 전하는 능력이 있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까마귀가 점차 친근하고 믿음직한 까치로 바뀌었으리라. <그림 6>을 보면, 산신의 뜻을 까치 한 쌍이 지저귀듯 전달하고 호랑이는 다소곳이 앉아 그 뜻을 들으며 그대로 행하겠다고 답하는 듯하다. 그 순간 호랑이는 하나의 짐승이 아닌 신물(神物)로 변신하는데, 호랑이 이마에 제3의 눈처럼 표현된 동그라미로 ‘신령한 호랑이’를 강조하게 된다.
까치호랑이 그림의 또 다른 의미
<그림 7>을 <그림 6>과 비교해 보자. 얼핏 비슷한 형식의 그림으로 보인다. 까치 한 쌍이 앉은 소나무를 배경으로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린 호랑이가 앉아 있으니 말이다. 차이가 있다면 호랑이의 종류에 있다. <그림 6>이 줄무늬라면 <그림 7>은 점무늬로 마치 표범 같다. 그래서 <그림 7>은 산신도라기보다 중국의 문배세화(門排歲畵 : 정초에 복을 기원하며 집 문에 붙이는 그림) 풍속과 연관된 표범까치 그림, 즉 보희도(報喜圖)
8)(<그림 8>)계통으로 볼 수 있다.
“원래 중국에서 ‘희보(喜報)’라는 길상적 의미를 표현하기 위하여 까치와 표범을 그렸는데, 그것은 한자 발음과 까치의 상징성을 인용한 것이다. 즉 표범의 ‘표(豹)’ 발음이 중국식으로 ‘bao’라고 소리나는데, 이 발음이 보답한다는 뜻의 ‘보(報 ; bao)’ 발음과 똑같다. 그래서 표범은 보(報)를 뜻하는 것이 된다. 한편 까치는 옛날부터 상서로움과 기쁨을 전해 준다고 하여 희작(喜鵲)으로 부르던 길조이다. 따라서 까치는 기쁠 ‘희(喜)’를 상징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한 화면에 표범과 까치가 함께 등장하는 것은 ‘즐거움을 보답한다’는 ‘희보’라는 길상 문구를 표현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9)
우리 나라의 문배세화인 까치호랑이 그림이 중국의 보희도 형식을 빌려와 호랑이를 표범처럼 그렸다고 해도, 크게 다른 두 가지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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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그림 8> 보희도(부분) (오른쪽)<그림 9> 청화백자송하호문 항아리, 18세기, 국립경주박물관 |
첫째는 보희도에 볼 수 없는 소나무가 항상 배경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정월(正月)인 인월(寅月)을 뜻하는 소나무를 연상하여 ‘신년보희(新年報喜)’, 즉 ‘새해를 맞아 기쁜 소식이 들어온다.’는 의미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는 호랑이의 표정이 구별된다. 중국 보희도인 <그림 8>의 표범이 사납고 매서운 표정이라면, <그림 7>의 호랑이는 할아버지 얼굴 같기도 하고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아 심지어 멍해 보이기까지 한다. 백자에 청화안료로 그려진 <그림 9>의 까치호랑이 무늬에서도 호랑이가 으르렁거리고 있지만, 그렇게 무섭거나 위협적이진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호랑이를 고분고분하게만 그린 호랑이 그림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호랑이의 위엄과 용맹을 덕목으로 삼고자 그린 것도 있다.
1) 무신도(巫神圖)의 하나로 절의 산신각이나 무당의 신당에 걸린다.
2) 서긍, 『고려도경』 숭산묘 기사
3) 중국 도교의 대본산인 강서성의 용호산에 은거하던 도사 장천사(張天師)가 천하의 악마를 정복하기 위하여 호랑이를 타고 출발하였다는 고사를 말한다.
4) 『삼국유사』 권 제5, 피은 제8, 랑지승운(郞智乘雲) 보현수(普賢樹) : 지통이 불자가 되도록 랑지 스님에게 인도한 까마귀를 산신의 사자로 묘사하고 있다.
5) 까마귀는 고대 이래로 태양의 흑점활동인 일식의 관찰결과로 신비화되었으며, 조류 중에서 높은 산에 적응하는 생태적 속성의 월등함으로 천신과 교통할 수 있는 신격을 부여받은 것으로 보인다.
6) 신라 석탈해의 탄생 신화에서 까치는 길상의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다. 탈해왕의 성이 석(昔)씨로 된 이유도 까치 덕분에 (탈해왕이 들어 있는) 궤를 열어 보게 되었다 하여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를 떼어 낸 ‘석(昔)’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7) 무속신의 하나인 성황신(城隍神)으로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길흉화복을 좌우하는 전능의 신으로 여겨진다.
8) 표작도(豹鵲圖)라고도 한다.
9) 허균, 『전통미술의 소재와 상징』, 교보문고, 1991, 43~44
첫댓글 집에 걸어놨다가..........밤에 화장실가려 일어났다가.........놀래 쓰러지는거 아닐까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