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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경남 진주 生. 부산고·고려대 경제학과 졸업. 65년 금성방직 입사. 74년 성광통상 창립, 전무이사. 77년 삼신정밀공업 대표이사. 78년 성광전자 창립, 대표이사, 99년 쿠쿠홈시스 대표이사 사장. 2006년 11월∼ 쿠쿠홈시스·쿠쿠전자 회장 | |
‘쿠쿠하세요.’ 어느새 밥 지으라는 말로 통한다. 그 어원은 시장점유율 70%로 압도적 1위인 쿠쿠밥솥. 외환위기가 닥쳐 납품 길이 끊기자 독자 브랜드로 성공 신화를 일궜다. 코끼리밥솥의 본가 일본의 아성을 뚫은 데 이어 중국 시장 공략에 바쁘다.
30년 가까이 밥솥을 만들어 온 ‘밥솥왕’ 구자신 회장은 오늘도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고객의 밥 짓는 소리와 불만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새해는 모두에게 설렘으로 다가온다. 외환위기가 닥친 지 어언 10년, 2007년 새해를 유달리 벅찬 가슴으로 맞는 기업인이 있다.
외환위기 직후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으로 납품해 온 LG전자로부터 납품 중단 통보를 받고 10년째 새로운 기업 역사를 써 온 쿠쿠홈시스 구자신(66) 회장이다.
“기업이나, 개인이나 생각하며 성장한다고 봐요. 어떻게 하면 좀더 효율적으로, 체계적으로 꾸려 나가느냐 고민하면서 말이죠. 요즘은 5년, 10년 뒤 쿠쿠가 먹고살 만한 게 뭘까 생각하며 삽니다.”
회장실 하면 으레 연상되는 으리으리한 소파나 탁자가 없다. 마치 어느 건설 현장소장 사무실 같다. 부산 양산공장 건물 1층은 생산라인이 바삐 돌아가는 작업장이고, 2층은 사무실이다.
그 한쪽에 회장실이 있고, 마케팅 담당 직원들이 일하는 곳과 벽 하나 사이다. 구 회장은 문을 열어 놓은 채 업무를 본다.
외환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은 대표적 기업이 쿠쿠홈시스다. 환란 직후 원청기업 LG전자의 밥솥 판매가 뚝 떨어지면서 하청 주문량도 급감했다. 살아남기 위해 구조조정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소문을 들은 직원들이 당시 구자신 사장 방으로 몰려왔다. ‘월급을 깎더라도 한 배를 탄 식구들이 함께 가자’고 호소했다. 그날 직원들과 꼬박 밤을 새우며 결의를 다졌다.
대다수 기업들이 투자를 줄이던 1998년 4월 독자 브랜드 ‘쿠쿠’로 시장에 뛰어들었다.
“LG 브랜드가 통하지 않는데 과연 쿠쿠 브랜드로 될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더구나 하청만 해와서 유통망도, 영업 경험도 전혀 없었어요. 말 그대로 ‘공돌이’들이 밥솥을 들고 저잣거리로 나선 겁니다.”
석 달 만에 겨우 첫 거래를 성사시킬 정도로 시장 분위기는 싸늘했다. 그래도 공을 들이면 부처도 돌아 눕는다고 품질이 괜찮다는 입소문이 돌면서 상인들의 반응이 달라졌다.
품질은 좋은데 브랜드가 알려지지 않아 설명하려니 입이 아프므로 다른 물건을 끼워 주든지 쿠쿠 브랜드를 광고하든지 선택하라면서….
“사은품의 경우 돈은 적게 들어도 비용으로 그냥 날아가고 마는데 광고는 돈은 더 들지만 투자가 됩니다. 고심 끝에 TV 광고를 하기로 결심했지요. 다행히 그때 빚은 전혀 없고 은행예금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대기업들이 광고를 줄이는 판에 중소기업이 나서니 골든타임을 골라잡았고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1년 3개월 만인 99년 7월 쿠쿠는 국내 전기밥솥 1위 자리에 우뚝 섰다. 이 시절의 난관을 극복하며 구 회장이 터득한 삶의 공식이 있다. ‘하루 24시간이 공평하듯 누구에게나 기회는 온다.
준비하는 자만이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2006년 예상 매출은 3,000억원. 외환위기가 닥친 97년 매출이 300억원이었으니 9년 만에 10배 성장했다.
‘밥솥 한류(韓流)’는 계속 뻗어간다2005년 9월은 쿠쿠의 역사에 길이 기록됐다. 밥솥 판매 1,000만 대를 돌파해서다. OEM으로 납품하다 자체 브랜드를 내놓은 지 8년 만의 일이다.
80년대 일본을 다녀오는 여행객들이 손에 손에 일제 조지루시(象印·코끼리표) 밥솥을 들고 돌아오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귀국 보따리대신 출국 보따리로 밥솥 위치가 바뀌고 브랜드도 달라졌다.
중국행 비행기나 여객선에서 한국산 전기밥솥을 든 출국 손님들을 볼 수 있다. 한국인의 자존심을 지켜준 이 밥솥이 바로 쿠쿠다.
국내 시장 평정에 이어 일본 시장을 뚫은 2002년 12월, 구 회장은 감격의 눈물을 훔친다. 밥솥에 관한 한 수많은 특허를 갖고 있는 일본과 부닥치지 않도록 독자 기술을 개발하는 데 꼬박 3년이 걸렸다.
“밥솥 종주국 일본에 언젠가 쿠쿠를 상륙시키겠다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었어요. 개발도상국으로 가려면 보호관세 장벽을, 기술선진국을 뚫으려면 지적재산권의 벽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결국 독자 기술이 제품 곳곳에 묻어나야 해외 진출이 가능한 것입니다.”
여세를 몰아 중국에 수출을 시작했다. 2003년 칭다오(靑島)에 공장을 세웠다. 설립 3년 만인 2006년 손익분기점에 이르렀으며, 하루 평균 3,200대의 쿠쿠가 나와 중국에 깔린다.
구 회장은 사업 협의차 중국을 80번도 넘게 드나들었다. 하지만 그 흔한 관광지 한 곳 다녀온 적이 없을 정도로 일에 푹 빠져 산다.
“중국은 양파 같다고 봅니다. 껍질을 벗기면 또 한꺼풀이 나오고, 그래서 벗기면 또 나오고…. 도대체 알맹이가 보이질 않잖아요.”
중국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그는 요즘 틈틈이 베트남겾짹퉩인도네시아를 찾는다. 쿠쿠는 현재 미주·중국·러시아·베트남 등 26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구 회장이 ‘주방의 꽃’으로 부르는 전기밥솥의 국내 시장 규모는 약 4,500억원. 그 중 3,000억원 정도가 쿠쿠 차지다. “그 이상 가져가기는 다른 회사에 미안하다”는 게 그의 솔직한 표현이다. 따라서 이제 시장은 해외, 밥을 먹는 국가에서 찾아야 한다.
“전기밥솥 외에 새로운 아이템도 찾아야 하겠지만 이제 해외 시장 개척이 중요합니다. ‘밭솥 한류’ 쿠쿠의 열기를 계속 지펴 나갈 것입니다.”
물건 덜 팔아도 외상거래 없다구 회장은 이익을 적게 내더라도 원칙을 지키는 기업인으로 유명하다. 그의 사전에는 외상거래가 없다. 어느 가게든 공장도 공급가격이 같으며, 물건을 내주면 반드시 현금을 받고, 100% 세금계산서를 끊는다.
98년 쿠쿠 브랜드로 국내 시장을 파고들 때부터 이 원칙을 어긴 적이 없다. ‘시장을 거역해선 물건이 팔리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는 직원들에게 “이달에 몇 개 팔았느냐”고 다그치지 않고 “그 점포에 몇 차례 다녀왔느냐”고 물었다.
그러기를 다섯 달째, 몇 개씩 주문이 들어왔고 상인들로선 갖다 놓으니 하나둘 팔리는데 쿠쿠는 하자 등 뒤탈이 없어 마음에 들었다.
“상인 입장에선 하자나 고장으로 반품이 들어와 실갱이를 벌이는 게 여간 피곤하지 않거든요. 쿠쿠는 외상거래를 하지 않는 대신 마진을 더 주었습니다. 물건 괜찮고 마진도 좋으니 서서히 주문이 늘어납디다.”
구 회장은 채권·채무 관계를 거의 일으키지 않고 기업을 운영한다. 그는 이를 자랑스러운 ‘쿠쿠 문화’로 부른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국내 굴지의 유통업체에서 설맞이 특별할인 판매를 한다며 물건을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는 쿠쿠의 ‘동일 모델 동일 가격’ 원칙에 어긋났다.
쿠쿠가 거부하자 유통업체는 다른 업자 명의로 트럭 넉 대 분량의 밥솥 1,200대를 확보했다. 소식을 들은 쿠쿠는 이튿날 매장을 찾아가 현금 6억원을 주고 전량 매입했다. 6,000만원의 손실을 감수하면서.
그 뒤 이곳과 3년 넘게 거래를 끊었다가 “쿠쿠가 없으니 (매장에) 밥솥이 없더라”라면서 요청해 와 재개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유통업체에서 판매 마진을 더 달라며 경쟁업체 밥솥을 밀어주는 식으로 압박을 가했다.
이럴 때마다 쿠쿠는 거절하고, 유통업체가 “왜 안 됩니까?”라고 물으면 으레 나오는 대답이 있다. “쿠쿠니까요.”
고객 앞서 밥맛 업그레이드하라쿠쿠 본사 기술연구소에는 65명의 연구인력이 있다. 전체 직원의 15%에 해당한다. 연간 매출의 7% 정도를 연구·개발(R&D)에 투자한다. 그 결과 200여 건의 특허와 실용신안을 갖고 있다.
쿠쿠가 가장 자랑하는 기술은 압력 기술. 밥솥의 원조 격인 일본 마쓰시타(松下)가 이를 사겠다고 제안해 왔을 정도다.
쿠쿠는 요즘 특히 디자인에 신경 쓴다. 신세대 주부 고객을 잡으려면 실용성은 물론 깔끔하고 고급스런 이미지를 줘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건강과 환경보호 개념을 결합한 ‘웰빙 가전’ 개발에 노력하고 있다.
이런 개념으로 선보인 것이 현미발아밥솥. 현미는 영양은 풍부한데 맛이 거칠다. 막 발아가 시작된 현미는 밥맛은 부드러운데 값이 비싸다.
쿠쿠는 이 발아현미를 만드는 기능을 밥솥에 넣음으로써 밥맛과 영양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았다.
“밥솥도 창의적으로 만들어야 팔립니다. 기존 밥솥을 조금 바꾸는 식으론 곤란해요. 쿠쿠는 밥솥의 개념을 바꿔 역사를 새로 쓴다는 생각으로 만듭니다.”
구 회장은 “고객에 앞서 밥맛을 업그레이드하라”고 강조한다. 고소하면서도 차진 맛은 기본이고, 고객의 니즈(needs)를 앞서가라는 주문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맞춤밥맛 기능. 공장에서 나올 때 설계된 대로 지었는데 밥맛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쌀 불리는 시간과 가열시간을 조절해 더 차지거나 고소하게 지을 수 있도록 했다.
컴퓨터와 연결해 홈페이지에서 내려받은 조리법대로 찜이나 잡채 등 다양한 요리를 하는 네트워크 쿠킹 기능도 개발했다.
일품석 곱돌밥솥은 돌솥비빔밥을 즐기는 고객의 니즈에 맞춘 것이다. 식사 도중 농담 삼아 전기밥솥에 돌솥을 넣자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연구소가 집요하게 매달린 끝에 이뤄 냈다. 구수한 누룽지와 숭늉을 맛볼 수 있다.
구 회장은 이런 쿠쿠의 변신을 고객과의 끊임없는 대화 덕분이라고 강조한다. 그가 출근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컴퓨터를 켜 쿠쿠 홈페이지에서 고객의 소리를 살피는 것이다.
고객이 쿠쿠하면서 미주알고주알 적은 것을 꼼꼼히 읽는다. 콜센터에 걸려온 전화 내용을 요약한 보고서보다 훨씬 생생하고 참고할 만한 게 많다.
“쿠쿠가 이래서 되겠느냐며 혼내는 편지를 읽다보면 고개를 숙이거나 끄덕이게 됩니다. 서비스나 마케팅 부서 직원을 야단치는 내용도 올라오는데 그곳에선 안절부절이지요. 따로 불러 뭐라고 할 필요도 없어요. 함께 보며 반성하니까요.”
구 회장은 때때로 직접 답장을 쓰거나 전화를 걸어 고객에게 감사하다고 전하거나 사과한다. “고객님의 잔소리가 저희를 키웁니다. 계속 시어머니처럼 잔소리를 해주십시오”라고.
쿠쿠란 브랜드는 요리를 뜻하는 ‘쿡(cook)’과 정확한 시간을 알려 주는 뻐꾸기에서 따온 이름. 쿠쿠 밥솥 하나가 소비자에게 전달되기 전에 100여 가지 안전성 테스트와 370여 가지 품질검사를 거친다.
쿠쿠는 주중은 물론 주말에도 24시간 안에 직접 찾아가는 애프터서비스(AS)로 유명하다. 이처럼 품질최고주의와 철저한 AS, 브랜드 마케팅이 1등 쿠쿠를 만들었다.
세계적 종합 생활가전 메이커로 우뚝 서는 것이 쿠쿠의 목표다. 이를 위해 밥솥과 청국장발효기에 이어 2002년 리오트(Liiot) 브랜드로 가습기·진공청소기를 선보였다.
“기업이란 멀리 보고, 높게 보고 목표를 그려 놓고 이를 좇아야 합니다. 그래야 직원들이 비전을 보고 열심히 일하지요. 기업이 답보 상태에 있으면 그 순간부터 후퇴하는 겁니다. 2002 월드컵처럼 우리나라 최초 우주인도 쿠쿠를 쓸 겁니다.”
구내식당 밥 한 톨 안 남기는 회장님구자신 회장은 LG그룹을 일으킨 능성 구씨 집성촌인 경남 진주시 지수면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구자신 회장은 LG그룹 2대 회장인 구자경 회장과는 10촌간이다.
그는 고려대 재학 시절 총학생회장(64년)을 지냈다.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는 6·3시위를 주도했다가 100여 일 동안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다.
당시 고려대 상과대학 학생회장이던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함께 학생운동을 했다. 대학 졸업 후 쌍용그룹 전신 금성방직에 입사했는데, 그의 전력을 안 회사가 당시 금성방직 사장이자 공화당 재정위원장이었던 성곡 김성곤 의원의 비서로 발령을 냈다.
그러나 69년 오치성 내무부 장관 해임안을 가결시킨 항명사건의 핵심인물로 지목되면서 쓸쓸히 정계를 떠나는 성곡을 지켜보면서 그는 ‘이 길은 내 길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그가 정치인에서 기업인으로 진로를 바꾼 이유다.
74년 오퍼상인 성광통상을 새웠다. 그러다가 78년 금성사(현 LG전자)에서 소형가전 OEM 제조업체를 물색한다는 소식을 듣고 성광전자를 창립, 밥솥과 인연을 맺었다.
“정치요? 기질은 조금 있었지만 접은 지 이미 오래입니다. 몇 차례 정치권의 유혹을 받긴 했어요. 정치도, 사업도 결국 자신이 선택하는 일이고, 무슨 일이든 사회에 얼마만큼 기여하느냐가 중요한 것 아닌가요?”
그는 스스로 실용주의자라 부르며, 10년 정치 물을 먹은 뒤 기업인의 길을 선택한 것을 잘한 일로 평가한다. 대학 동창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 대해 묻자 “기업을 떠나 정치를 한다고 해서 말렸는데 생각보다 성공하더라”는 말로 대신했다.
그는 2006년 11월 장남에게 대표이사 사장을 맡기고 회장으로 한발 물러 앉았다. 미국에서 회계학을 공부한 구본학 사장은 96년 쿠쿠에 입사해 해외 시장을 개척하는 데 앞장섰다.
“한국에서 중소기업을 한다는 것은 사장이 북 치고, 장구 치고, 노래하고, 오만 가지 일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주위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발등의 불 끄기에 바빴지요. 이제 쿠쿠가 이렇게 성장하도록 도와준 사회 각계에 보답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구 회장은 그 방법으로 소외이웃을 돕는 쪽에 마음을 두고 있다.그는 직원용으로 만든 회사 로고가 새겨진 점퍼를 즐겨 입는다. 식사도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구내식당에서 해결한다.
12월 14일 인터뷰를 하다 보니 점심때가 지났다. 낮 1시가 넘어 함께 구내식당으로 향하면서 문 앞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식사했어?” 하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는 1식3찬을 참 맛있게 먹었다. 식판에 밥 한 톨 남기지 않았다. 냅킨도 딱 한 장으로 이리저리 접어 입을 닦은 뒤 식탁까지 깨끗이 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