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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예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三道軒정태수
心正筆正의 가름침을 남긴 素軒 金萬湖 선생의 서예술
정태수(서예세상 지기)
소헌(素軒) 김만호(金萬湖;1908~1992)선생은 근․현대 대구서예계의 거목으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서예가이다. 선생의 본관은 의성(義城), 아호는 소헌(素軒) 및 봉강(鳳岡)이고, 1908년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오상리에서 김하진공과 이순희여사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했다. 우리는 선생이 살았던 격랑의 시대를 되새기면서 연보에 따라 선생이 살았던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선생이 태어났던 시기는 구한말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였다. 유가의 전통을 지키는 가문습속에 따라 6세(1913년)에 천자문을 마쳤고, 9세(1916년)때 창랑(滄浪) 김희덕(金熙德) 선생으로부터 서예를 지도받았으며, 12세(1919년)를 전후해 김도원(金道源)․이시발(李時發)선생으로부터 사서(四書)를 비롯한 한문을 배우면서 유가의 교양을 닦았다. 종이가 흔하지 않았던 당시에 신문지나 나무판 위에 서예연습을 꾸준히 하면서 소년명필로서 필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15세(1922년)때 상주의 김병옥(金炳玉)선생으로부터 한의학(韓醫學)을 배우기 시작했고, 조진구(趙珍九)선생으로부터 침술을 배웠다. 이 시기에도 낮에는 한의원에서 공부하면서 밤에는 붓을 잡았다. 20대에 접어들어 21세(1928년)에 한약종상(韓藥種商)시험에 합격했고, 23세(1930년)에 종두시술사(種痘施術師) 자격시험에 합격해서 24세(1931년)에 상주에서 한약종상(한약방)을 개원했다.
30대부터 선생이 경영하던 한약방이 번창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상산시회(商山詩會)를 조직해 회장을 맡는가 하면, 농촌진흥조합장 등을 맡아 전국을 순회하기도 했다. 30세(1937년)에 한의사자격시험에 합격해 한의사로 활동을 하면서 서예에도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36세(1943년)에 일본대판서도전(大阪書道展)에 입선했다. 46세 때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어수선한 상주를 떠나 대구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고, 신천동에서 중화의원(中和醫院)을 개원했으나 일제 때 면허가 인정되지 않아 문을 닫고, 49세(1956년)에 각고의 노력 끝에 한의사국가고시에 합격해 대봉동에서 상주한의원(商州韓醫院)을 개원했다.
선생의 50대는 생활이 안정되면서 사회활동과 서예활동에 꽃을 피우기 시작한 시기였다. 55세(1962년)에 제11회 국전에 유공권체 해서작품 <안국사비문(安國寺碑文)>을 출품해 첫입선했다. 그 이듬해도 안진경의 <다보탑비문(多寶塔碑文)>으로 입선하면서 전국에 필명을 날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서예에 대한 토론과 지도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56세(1963년)때 자택 이층에 봉강서당(鳳岡書堂)을 발족시켜 대구서예계에 서예를 전수하기 시작했다. 그 때 권혁택(權赫澤) ․ 신점순(申點順) ․ 김석환(金碩煥)씨 등이 배우기 시작했다. 서실 이름을 봉강(鳳岡)이라고 한 것은 대봉동의 수성언덕에 자리잡았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에 대구서예가들의 모임인 해동서도회(海東書道會)에도 가입했다.
봉강서당을 찾는 초보자에게 선생은 왕희지가 말한 “비인부전(非人不傳 ; 사람이 아니면 서예를 전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서예를 하기 전에 인격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서예는 곧 심화(心畵 ; 마음의 그림)로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서예는 하나의 종교와 같았다. 옥은 갈면 광채가 빛나듯이 서예도 각고의 고통을 이겨내야 그 과정에서 깊은 진리를 터득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서예가의 삶도 이와 직결되어야 올곧은 서가로서 대성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그는 바로 유공권이 말한 이른바 심정필정(心正筆正 ; 마음이 바르게 되어야 글씨도 바르게 된다)을 몸소 실천한 작가였다고 할 수 있다. 1964년 13회 국전에서는 제자인 권혁택씨와 같이 해서로 입선하자 해서명가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 해 봉강서숙(鳳岡書塾)으로 개칭했고 무료로 서예술을 전수한다는 소문이 들자 동호인들이 많이 몰려들어 문호를 활짝 개방했다. 1965년에도 14회 국전에 구양순체의 <蘇東坡 ‘양심가(養心歌)’>로 입선했다. 1966년 15회 국전에서는 자신이 개발한 해서체인 <소동파의 胸中有書>로 특선의 영예를 맛보았다. 그 해는 봉강서숙에 나오는 회원 다섯명(권혁택, 김석환, 여상기, 신점순, 류영희)도 동시에 입선 하는 등 영남지역에서 서실단위로는 이름을 크게 올렸다. 그러면서 한국서예가협회 회원으로 가입해 전국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 때 서예계에서 “소헌하고는 해서를 말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해서의 명가로 널리 알려졌다.
선생은 60대에 필명을 지역에서 전국으로 넓혀갔다. 1968년 봉강서숙을 봉강서도회로 개칭하면서 경북공보화랑에서 제1회 봉강서도회서예전을 열었다. 이 전시는 그 당시 보기 드문 서숙전을 열어서 회원들의 작품에 대한 외부의 평가를 받아보고자 한 의도에서 열렸다. 그 때 대구지역에서는 ‘죽농 서동균, 소헌 김만호, 삼우당 김종석 등 70여명의 재사(才士)들이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는 일간지기사가 보일 정도로 서예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때 열린 서숙전은 광주, 진주 등 역외 지역과 교류전도 겸하면서 선생이 작고한 이후에도 문하생들에 의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금년(2012년) 45회 봉강연서회원전이 열릴 정도로 반세기에 가까운 오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 동안 권오석, 이수락, 박선정, 김세훈, 우상홍, 이종희, 허록, 고의환, 김대환씨가 역대회장을 맡아왔고, 1992년 선생이 작고한 이후에도 박선정, 우상홍, 김영훈씨가 회를 이끌고 있다. 선생이 작고한 이후에도 평생 동안 무료로 지도해 준 선생의 고귀한 인품과 높은 예술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후학들은 지속적으로 전시를 열고 있어 서단의 귀감이 되고 있다.
62세(1969년)에 대구공화화랑에서 선생의 첫 개인전이 열렸다. 그 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일군 성과를 보여준 전시였다. 52점의 작품에 “6체를 고루 선보여 다양성이 돋보인다”는 심재완 선생의 평을 얻은 것을 보면 그 동안 공부해 온 선생의 독실한 공부과정을 담아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5년에는 봉강연묵회로 다시 개칭하면서 회원들이 먹에 대해 더 깊이 연구하려는 의지를 모았고, 1978년부터는 봉강연서회로 회원전을 계속하면서 지금까지 이 이름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1976년 광주의 송곡 안규동선생의 요청으로 영호남교류전을 갖기로 한 뒤 대구의 남성적인 필의와 광주의 여성적인 면이 어울어진 영호남교류전의 물꼬를 열면서 교류전을 여러 번 개최했다. 1986년에는 진주의 진주서도원(박춘기 원장)도 참여해 폭을 확대했다. 이런 교류전을 통해 대구지역의 서예를 다른지역에도 알렸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70세(1977년)에는 대구에서 고희전을 열면서 인서구로(人書俱老 ; 사람과 글씨가 함께 노련해 진다)의 경지를 선보인다. 72세(1979년)에는 대구, 부산, 마산에서 서예개인전을 개최하면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함으로써 후학들에게 직접 예술창작과정을 실천해 보였다. 1982년에는 선생의 예술적 업적을 기리고자 계명대학교에서 서집(書集)이 발간되었고, 매일신문에 30회에 걸친 ‘나의 회고’(1987년) 연재를 통해 선생 자신이 생각하는 서예에 대해 진솔하게 술회했다. 선생은 85세(1992년)를 일기로 일생을 마감했다. 그는 젊은 시절엔 한의사로서 인명을 구제했고, 60대 이후엔 지역서단의 대중화와 서예의 본원적인 정신성고양을 위해 노력하면서 수많은 제자들에게 심정필정을 가르친 서예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돌이켜보면, 선생의 서예에 대한 인식에는 몇 가지 분명한 철학이 있었다. 첫째, 한학없는 서예는 사상누각과 같기 때문에 문자의 내용과 뜻을 깊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고, 둘째, 서예는 단순한 예가 아닌 도(道)이며, 마음의 그림이기 때문에 인격을 수양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점, 셋째, 법(法)으로 들어가서 무법(無法)으로 나와야 비로소 법고창신을 이룰수 있다는 점, 넷째, 좋은 글씨는 정신과 육체가 건강한 오합(五合 ; 당나라 손과정의 서보에 글씨쓰기에 적합한 다섯 가지를 말함)을 갖추고 오괴(五乖 ; 손과정이 말한 다섯 가지 맞지 않은 것)에서 배제된 상태에서 운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의 작품은 해서를 바탕으로 자연미가 배인 중후한 행초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무엇보다 해서에 일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근․현대 대구서단의 중추로서 큰 족적을 남긴 선생이 뿌린 묵향은 오늘도 지속적으로 전파되고 있다.
비폭한연, 39x139, 1979.
중사신통, 39x139, 1979.
현학남비가질주, 38x138,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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