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강도 사건
도솔암에서 실컷 낮잠을 자고 저녁밥을 얻어먹은 뒤 밖이
어둑어둑해지는 것을 보고 관수는 절문을 나섰다.
"그러면 거기서 만납시다."
소지감의 말에 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시오."
아주 낮았지만 관수는 뒤통수에서 쫓아오는 소지감의 긴장된 목소리를
들었다. 산밑 마을에 당도했을 때는 그믐이어서 그랬겠지만 사방은 아주
새까만 어둠이었다. 주막에 들어간 관수.
"여기 술 한잔 주소."
술손과 수작을 부리고 있던 주모가
"아이구 내 신세야!"
하며 몸을 일으켰다.
"손이 술 달라 카는데 신세 타령은 와 하노."
"입버릇을 그라믄 우짤 기요."
시비조다.
"기왕이믄 아이고 나무관세음보살 하는 기이 우떨고?"
주모는 킬킬 웃었다.
"내가 염불 모시게 됐소? 나무관세음보살 했다가는 사나이들이 다
달아날 긴데 주막 문 닫으믄 나는 머 묵고 살 기요."
"포전이나 쫓지."
"누구 닮았나?"
"내 뭣 땜에 자네 서방을 닮을 기고."
"서방은 무신 서방. 사팔뜨기 산놈, 오다가다 술잔이나 마시제요."
"그라믄 기둥서방인가?"
관수는 강쇠 얼굴을 생각하며 피식 웃는다.
"기둥서방이라도 됨사? 그런 주제도 아니믄서 젊은 기이 뭐 할 짓이
없어 술장사냐, 산에 가서 나무 뿌리 캔들 입에 거미줄 치겄느냐, 흥!
가다오다 해보는 말이겄지요 머."
언제였는지 강쇠와 함께 술을 마시러 온 일이 있어서 관수는 주모의
얼굴을 알고 글의 내력도 좀 안다. 춘매의 조카라든가 뭐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주모는 관수를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관수는
시간을 재듯 천천히 술을 마신다.
"말로라도 그런 삶이 있이니 쪼그랑 팔지지마는 마 괴않네."
수작을 부리고 있었던 술손이 한마디 빈정거렸다. "
"아이고오, 쪼그랑 팔자라 했소? 그라믄 거기는 대리미로 싹 펴놓은
팔자다 그 말이요? 그런데 백결선생맨크로 옷은 와 그모양이요? 염낭에
술값이나 들었는지 모리겄네."
"내가 되로 주고 말로 받는구나."
사나이는 할 수 없다는 듯 껄껄 웃는다.
"입으로는 못 당할 기요"
관수가 한마디 거든다.
"심 없는 제집이 입으로라도 갚아야제요. 누구 말마따나
기둥서방이라도 있었이믄 술값 떼묵고 달아나는 놈 정갱이 뿌질러
앉히것지만는. 서며 앉으며 내 팔자야, 하게도 됐지 머. 나도 좋은 부모
만냈이믄 기영머리 마주 풀고 백년해로 했일 긴데, 세상 인심 오동지
설한풍이요."
"……"
"누가 되고 저버서 봉사가 되었겄고, 누가 되고 저버서 버부리가
되었겄소. 보고 듣고, 복 많은 년놈들, 앞 못 본다고 속이묵고 뺏아묵고,
말 못한다고 속이묵고 아묵고, 세상이 그런 거라요. 심 없고 돈 없는
사람은 엎어놓고 등짝 밟는 기이 예사, 흥! 절에 가봐도 그렇대요. 불쌍한
중생을 건진다 캄시로 어디 말과 같애야지. 부자가 오믄 맨발로
뛰어나오고 기차븐 사람이 가믄 문전박대나 안함사?"
"절에서 문전박대했다는 것은 처음 듣겄네."
관수가 말했다. 그 말 대꾸는 없이,
"언젠가 예수쟁이들 와가지고 하는 말이, 예수 믿고 회개하라 하드마.
회개할라 카믄 나는 굶어죽게? 그 사람들이사 빼딱구두 신고 말똥머리
하고 얼마나 유식한지 몰라도 책도 들고.다 묵고 살 만 한께 그러고
댕기는 거 아니겄소?"
"청산유수다, 청산유수."
술손이 말했다. 관수는 주모의 넋두리를 듣다 말고 술판에 술값을
내놓고 일어섰다. 몇 잔 술에 얼근해진 관수의 얼굴을 강바람이 쓸고
간다.
"누가 되고 저버서 봉사가 되었겄나, 누가 되고 저버서 버부리가
되었겄나. 흥! 맞기는 맞는 말이네."
하는데 별안간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내린다. 다홍치마 유록
저고리를 입은 딸 영선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간다온다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칠흑 같은 밤길을 걷고 있는 자기 자신이 괘씸하기 짝이
없다.
'애비 노릇도 제대로 못한 주제에 서운하기는 와 이리 서운하노.'
관수는 걷다 말고 강변 둑에 주질러앉는다.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문다.
빨갛게 타는 담뱃불, 담뱃불이 빨갛다는 것을 처음 발견이라도 한 듯
눈앞에 담뱃개비를 세우며 쳐다본다. 바람이 불 때는 불꽃이 튄다. 한
모금 가슴 깊이 빨아당겨 연기를 뿜는다.
'그놈이 있었던들 내 맘이 이렇게 서운하고 허전하까. 딸자식이야 언제
가믄 안 갈 기가.'
사방은 칠흑 같아도 강물은 희번덕이고 있었다. 강 건너 쪽에서
깜박이는 불빛, 세상은 쥐죽은 듯 고요하다.
"희맹이 있어야제. 희맹이 없다."
그를 조금이나마 위로해주는 것이 있다면 시부모로 모시게 될 상쇠
내외의 변함없는 마음씨 때문에 영선의 시집살이가 편할 것은 없어도 마음
고생은 안 할 거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학식이 없어 그렇지 사위 된 휘도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지 복이 그것뿐이라믄 그렇기 살아야지 우짜겄노. 흥! 지가 되고
접어서 백정의 외손녀가 되었더나. 흥!"
관수는 담배를 버리고 일어섰다.
평사리 마을에 못 미쳐서 관수는 강변길을 버리고 숲속길로 접어들었다.
옛날 김평산이 귀녀를 만나기 위해 삼신당으로 가던 그 길이다.
길이라기보다 숲을 헤치고 가는 것이다. 삼신당이 가까워졌을 때,
"이자 오요."
소리가 들렸다.
"음."
관수가 대답했다. 연학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누각과 초당이 있는 방향과는 다르게 다시 숲을 헤쳐나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숲이 나타났다. 그들은 대숲을 끼고 한참을 가서 상당 앞에
당도하였다. 사당은 깜깜해서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연학이 사당
문을 열었을 때 불빛이 사당 뜨락에 쫓아나왔다.
"들어가소. 그런 일이야 없겄지마는 내가 기침하믄은 아시겄지요?"
"알겄네."
관수는 재빨리 사당 안으로 빨려들어갔고 사당문이 닫히면서 사방은
어둠에 묻힌다. 사당문에 검정 휘장을 쳐서 불빛을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촛불을 켜놓고 길상이 앉아 있었다.
"이제 몸은 추스릴 만한가?"
관수가 물었다.
"괜찮네."
길상이 대답했다. 지금은 최참판댁 당주나 다름없는 길상이었지만
소년기를 한마을에서 지냈고 밤이면 관수 집에 모여앉아 짚세기를 삼고
삼태기도 만들면서 그들 나름대고 시국 얘기며 동학 얘기며, 길상은
그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사춘기를 보냈었다. 그리고 이들은 함께
윤보와 김훈장을 따라 의병으로 산에 들어 갔던 것이다. 이들 서로간의
추억에는 욕됨이 없었다. 현재의 처지가 달라졌다 하여 길상에게 존댓말을
한다는 것은 관수의 자존심이 허락지 아니하였고, 길상이 역시 옛날과
달라진 관수의 태도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의 앞에서는
환국이아부지라 하며 길상을 대접했으나 최참판댁이라는 배경 때문에
관수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간도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였고 앞으로
환이를 대신하여 제반사를 지휘하게 될 그의 위치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혼사는 잘 치르었는가?"
"그럭저럭."
다른 사람이었다면 관수는 없는 놈이 혼사고 뭐고 찬물 한 그릇이믄
끝나는 거 아닌가, 필시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의 성질을 아는 만틈
길상은 관례 인 선에서 축의금을 보냈을 뿐 더 이상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지만, 드세고 반항적인 송관수, 그러나 사려가 깊은 것은 그를 아는
사람이면 다 인정한다. 해서 그는 오늘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길상의
물음에 없는 놈이, 하질 않고 그럭저럭…… 꽤나 섬세한 사내다.
"서운하겠군."
"서운하지 않다 하믄 그거는 거짓말이고오, 하지마는 딸자식이란 언제
떠나도 떠나보내야 하니께. "
"그건 그렇지."
서로 마주본다. 촛불이 앉은뱅이 춤을 추고 두 사나이 얼굴이 명암이
흔들린다. 이들하고는 아무 인연이 없는 사당, 남의 사당, 그것도 어쩌면
모독일 수도 있는 이와 같은 침입을 이들은 이 순간 같이 느낀 것 같다.
최씨 가문 누대의 선조들 영신이 정좌한 곳, 아무리 나랏일이라고는 하나
이들은 순간적인 위축감을 느낀다. 천민들에게도 신주는 매우 소중하고
두려운 것이다. 서로 바라보던 두 사내는 어느쪽이랄 것도 없이 서로를
외면한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알 길이 없는 길상에게 조상이 있을 리 없고
부모가 있을 리 없다. 부모는 있었지만 아비가 어디서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어미는 생사조차 알 수 없는 관수, 기일이 있을 리 없다. 칠월
백중날이면 영광이네가 절로 찾아가서 얼굴도 모르는 시아버지의 명복을
빌어주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나마 어미는 어디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냘픈 한가닥 희망 때문에 백중 불사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일은 우떻게 되었는고?"
관수가 물었다.
"빈틈없이 다지기는 다져놨는데."
"삼월 삼짇날 변동 없겄제?"
"음."
"그라믄 됐네. 나도 전부터 손은 다 써놨고 마무리만 남았인께."
"전에 말한 대로, 계획에 변한 사항은 없으나 그래도 장서방한테 한 번
더 자세한 얘길 들어야 할 거다."
"그래야겄지…… 그라믄 나는 이 길로 떠나야겄는데, 우리가 또다시
만나게 될지 우떨지."
"무슨 그런 말을 하는가. 우리는 꼭 만나게 된다."
"아니 머 그런 뜻으로 한 얘기는 아니구마. 내가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서 하는 말이네."
"……"
"저기."
하다가 관수는 앞가슴을 더듬어 봉투를 꺼내었다. 순간 길상의 얼굴에
노기가 떠오른다. 그 봉투는 길상이 축의금을 놓어 보낸 것이며 봉투는
봉해진 채 뜯어본 흔적이 었었다.
"자네, 생각보다 훨씬 졸장부군 그래."
"말이나 다 들어보고 그러라고. 하기는 내가 대장부 아닌 것은 틀림이
없일 것 겉다."
관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다시 품속을 만지다가 사진 한
장을 꺼내어 길상에게 내밀었다. 길상은 사진을 받아 들여다본다.
"내 아들놈이네."
사진은 고보의 교복과 교모를 쓴, 관수를 전혀 닮지 않은 소년, 아니
청년이었다.
"갈길이 바빠서 긴말 할 새는 없고, 그놈이 집 나가서 일본 동경에 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죽일 놈 살릴 놈 해봐야 별수없제. 자네
큰아들이 유학을 가 있이니, 무리한 청인줄은 알지마는 사진을 보고
찾아서 이 봉투를 전해주었이믄 싶어서."
"미친 사람."
길상이 웃었다.
"역시 졸장부구면. 강도질한 놈이 새색시 같은 이런 짓 왜 하나, 정말
자네답지 않군 그래."
길상은 사진만 조끼 주머니 속에 놓고 봉투는 밀어 낸다.
"패거리들 술값이나 하게. 함께 술 마시고 있을 내 처지도 아니니."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럼 그렇기 하지. 그런데 환국이가 좀 쉽기 찾을라 카믄 그놈 핵교
졸업생을 찾이믄 될 성싶구마. 그 핵교에서도 몇 사람은 일본으로 유학을
갔일 긴께."
"걱정 말게."
"그라믄 나는 가야겄다. 오래 머물라 캐도 최씨네 신주들이 내 이노옴!
무엄하구나! 할 것 겉애서 답대비."
처음으로 관수는 농담을 했다.
밖으로 나온 관수는 홀가분했다. 발도 가벼웠다. 관수가 오던 길을
되잡아서 가는데 연학은 말없이 뒤따라가고 있었다. 다른 것을 기대하고
길상에게 사진과 봉투를 내밀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 아들을 봐달라, 못할
것도 없었다. 여러 가지 인연을 생각하면 최씨 집에서 영광이 하나
돌보아주는 것은 무리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관수는 지금까지 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동분서주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그는 다만
영광이에게 돈을 부쳐주어야겠다는 것은 늘 생각했었다. 그러나 길상이
걱정 말게, 하고 말했을 때 관수는 자기 부탁 이상의 일을 길상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삼신당 앞에까지 와서 관수는 걸음을 멈추며 연학을 기다린다.
"그믐밤이라 어둡기는 참 어둡네. 코를 베가도 모리겄구마."
연학이 중얼거리며 다가왔다.
"저기에 뭐꼬?"
관수가 물었다. 두 개의 불빛이 어둠 속에 있었다.
"살쾡이지 머겄소. 동네 닭 잡아묵을라꼬 내리온 모양이요."
불빛은 이내 사라졌다.
"삼월 삼짇날…… 좋은 절기다. 그믐밤은 좀 비키선 셈인데."
"그러씨…… 그러믄 이 길로 남원 갈 깁니까?"
"그래야지. 게다가 구례에서 자고, 구례까지 못 가믄 화개서 자든지."
"산의 사람들은 길 떠났십니까?"
"떠났다."
"괜찮겄십니까?"
"뭐가?"
"그 사람들."
관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성냥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고 나서,
"그래서 두 갈래로 나누은 거 아이가. 하나가 끊어지더라 캐도 되게
시리."
"지는 그것보다 사람을 믿어도 되는가, 이제 와서 걱정해도 달리 도리는
없겄지마는."
"그 사람들 못 믿는다믄 세상 사람 하낫도 믿을 사램이 없다. 하기는
영악하지를 못해서 나도 맴이 안 씨이는 것는 아니다마는, 때에 따라서는
뿌러지게 나오는 사람보다 히죽히죽거리는 사람이 오래 견디네라. 그라고
자네 보기보담은 만고풍상 다 겪은 사람들이다."
"실은 그 사람들도 그렇지마는 앞에 나서는 기이 아닌께 그런 대로
넘어갈 성싶으나 젤 맘에 걸리는 거는 손태산입니다."
손태산은 남원 길서방의 생신 잔치 때 처음 연학이 만나본 인물이다.
그러나 만나기 전부터 연학은 그에 대하여 소상히 알고 있어다. 소상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 연학의 임무였고 한 번 보았으면 그만, 다시 만날
필요가 없는 것이 연학의 위치였다. 그런데 그때 연학은 손태산을 좋게
보지 않았다. 말로 듣던 것보다 훨씬 경망했던 것이다.
"좁쌀 양식 오지랍에 싸고 댕기겄다. 전에 없이 와 그리 잔걱정이
많노."
연학은 어둠 속에서 피식 웃었다.
"많은 사람을 움직일라 카이, 여기서 터지까 저기서 터지까, 나도
모리게 근심이 되누마요."
"터지는 데는 터지고 뚫고 나가는 데는 나가고, 하루 이틀 해온 일도
아니겄고…… 손태산이는 나도 여러모로 그물을 쳐놨다. 당분간은 다른
손이 안 닿으믄 쓸모가 있제. 해서 윤필구를 조져놓은 거 아이가."
"진주 일은 물샐틈없이 짜놨인께 그 일은 아마 맘을 놓아도 될 깁니다."
"마음을 놓아? 걱정해도 소앵이 없는 일이지마는 마음놓을 일이 따로
있지."
나무라듯 말했다.
"그야 그렇지만."
"머 또 할말이 있나?"
"지는 더 이상 할말은 없습니다. 호옥 형님은 다른, 머 하실 말심은
없습니까?"
"벌로 변동한 기이 없인께 나도 더 할말은 없다. 저물고 했이니
가봐라."
"뚝길까지만 함께 가지요."
말없이 두 사람은 어둠을 해치고 걷는다. 부엉이가 울고 이따금
산짐승이 풀숲을 부시럭거리며 지나는 소리도 들렸다.
"영만이는 괜찮기 살더나?"
관수가 물었다.
"괜찮기 살지요."
"아아가 몇이나 되든고?"
"하나 잃어부리고 셋이라 카든지."
"세월 참 빠르다. 언제 이리 되었는고 꿈 겉네."
"사십을 넘기니께 세월이 막 달아나는 것 같더마요."
"그렇지이, 막 달아나지. 그래 자네 형수는 어마니를 닮았는지
모리겄네."
"그만 하믄 맏며누리로 잘 하시는 편이고 살림 이루노라고 고생도
했지마는 지금은 만고에 편합니다."
"그런께 우리 어릴 적의 두만어매맨큼 됐겄다."
"형님보다 두세 살 윌 겁니다."
"그럴 기다. 두만이가 내 동갑나기고 두만이누분께, 시집가던 때가
생각난다."
"……"
"그거는 그렇고, 너거 집이 여수서는 소리치는 부자 아니가. 그런데 와
이 짓을 하노. 니도 참 별난 놈이다."
"지만 별납니까. 형님은 안 별나고요? 참."
관수는 껄껄 웃는다.
"지가 이 집 일을 볼 때만 해도 여수서는 그냥 묵을 만했지요. 형님
말대로 소리칠 정도는 아니었고, 지금 부자가 됐다고 해서, 부자라 캐도
큰집이고 조카자식인데 머 얻어묵겄다고 가겄십니까. 다 이렇기 사는 것도
팔자 소관 아니겄소."
"좀 보태주기는 하나?"
"보태주는 거 없십니다. 우리 식구 굶는 처지도 아니고…… 돌아오라,
그거지요. 돌아오믄 봐주겄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일을 생각하면 한가한 얘기 할 처지도 심경도
아니었다. 더욱이 관수의 입장에서는, 다같이 긴장돼 있으면서 얘기는
거의 무의식적인 것이었다. 한동안 말은 끓어졌다. 둑길이 가까워졌을 때,
"영광이판테서 소식 못 듣지요?"
하고 연학이 물었다.
"듣기야 들었제. 들으나마나……."
"환국이아버지가 환국이한테 이르더마요. 동경 가거든 영광이 어디서 뭘
하는지 수소문해보라고."
"영광이 동경에 있는 거를 우찌 알꼬?"
"지가 말했십니다."
아까 사진을 내밀었을 때 길상은 그런 말은 내비치지도 않았다.
"환국이도 신실한 사람이니께 힘 닿는 대로 애 쓸 깁니다. 있는 곳만
알믄 다 요량이 안 있겄십니까?"
"안 그래도 아까 그 사람 만냈일 적에 부탁을 했거마는."
"형님이요?"
"우짤 기고, 내가 애비 노릇이나 제대로 했나? 그놈만 나무랄 수도
없고, 자식 문에 상두꾼에 든다는 말도 안 있더나."
관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둑길까지 와서 이들은 헤어졌다. 이들이 헤어져서 열흘 남짓. 살월
삼짇날 진주서는 씨름 대회가 있었다. 이 씨름 대회에 손태산이 출전한
것이다. 함양 대표로 나온 손태산은 비록 황소는 따지 못하였지만 고성의
이장사와 최후까지 겨루어 실력이 막상막하였으므로 구경꾼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기술은 이장사가 한수 위라 황소 차지를 했지만 힘으로 볼 때
손태산이 세다고들 했다. 구경꾼 속에 끼여들어 씨름 구경을 하고 있던
연학은 눈살을 찌푸리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흩어지는 구경꾼에
휩쓸려 걸음을 옮기면서
'저래가지고 되까?'
연학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이름이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요량껏 해두라꼬
조세질을 했일 긴데.'
물론 손태산은 주의를 몇 번이나 받았다. 그러나 막상 모래판에 서고
보니 주의 따위는 쉽게 잊어버렸고 승부욕에만 불탔던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진 그는 틀림없이,
"요량껏 하라는 말만 안 들었이믄 황소 따는 것쯤이야 여반장이었제.
제이기럴!"
했을 것이다.
'형님이 아무래도 일을 잘못 꾸민 거는 아닌지 모르겄다.'
연학이 돌아왔을 때 최부자댁은 집이 비어 있는 듯 썰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크나큰 집에 안자 부부만 있었다.
"양현이는 어디 갔소?"
안자의 남정네 박서방에게 물었다.
"작은도련님이 데리고 강가로 갔소."
안자 부부만 남겨놓고, 연학이는 왔다갔다했지만 식구들은 서울 손님이
다녀간 후 모조리 평사리로 떠났고 개학이 되면서 윤국이와 양현이 진주로
돌아왔으며 나머지는 아직 그곳에 체류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 환국이는
일본으로 갔다. 음력설을 전후하여 제사를 모시기 위해 해마다 식구들이
평사리로 가는 것은 관례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옥고를 치른 길상의
정양을 위해 오래 머무는 듯했고 절에 불공을 드린다는 말도 있었다.
"누가 이 십니까?"
박서방이 물었다.
"고성 사람."
"구겡꾼이 많았십니까?"
"응"
연학이 내키지 않는 대답을 하자 박서방은 뒤켠으로 돌아가고 연학은
마루 끝에 걸터앉는다.
'만일에 뭐가 잘못되믄 풍지박산이다.'
처음부터 연학은 손태산을 끌어들이는데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간물이
될 그럴 위인은 아니었지만 자기 능력보다 야심이 컸고 저돌적인 것이
흠이었다. 그리고 사리에 의해 나섰다기 보다 그는 조막손이 손가, 아비에
대한 환상 때문에, 그리고 그의 밑천이란 힘뿐이었다. 연학이 남위 길서방
집에서 모임을 가진 후 관수에게,
"사람이 신중하지 못한 것 겉소."
자기 의견을 말했을 때
"쓰기 나름이제. 앞으로 나가는 놈도 있어야 하고 뒤로 돌아가는 놈도
있어야 하고, 다 쓸모가 있네라. 저저이 다 할라꼬 나서는 일도 아니지
않나."
"하긴 그렇소."
"답대비, 간뎅이가 부어서 그기이 탈이제. 심성이 나쁜 놈은 아닌께."
하며 관수는 개의치 않았다.
연학은 집안을 한바퀴 돌아본다. 오늘 밤 실행에 옮기게 될 일을
계획하기론 꽤 오래 전이다. 길상이 출옥한 후 얼마 되지 않아 관수가
제안했던 것이다.
"몇몇 관서에 폭탄을 투척하는 것 이상으로 효율이 있는 일이네."
길상은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찬성이었다.
"응징과 실리, 그리고 인심, 세 가지를 거둘 수 있지. 암살이나 폭탄
투척은 총기, 폭탄의 확보가불가능하고 거의가 잡힐 것이니 인원을 아끼는
뜻에서도 그렇고,"
해서 세부 사항까지 면밀히 검토가 된 후 계획은 짜였고 관수가 간도를
다녀오면서 일은 결정이 되었던 것이다. 길상을 국내에 잡아두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오백 섬지기 땅을 내놓은 서희는 물론 이러한 계획은 알지
못했지만 길상으로서는 지시하는 입장에서 그 땅 오백섬지기는 명분을
세워준 것이기도 했다.
해가 지고 밤이 왔다. 쫑알쫑알 쫑알대던 소리가 들리더니 양현이도
안자 곁에서 잠이 들었는지 집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늦게까지 공부를
하던 육국의 방에도 불은 꺼져 있었다.
연학은 집에 가지 않았다. 행랑채 맨 끝방에 목침을 베고 누워서 천장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이따금 최씨네 집에서 자기도 했었기 때문에.
박서방이 군불을 지핀 모양이다. 방은 따뜻했다. 정적을 깨고 대청의
기둥시계가 육중한 추를 흔들며 둔중한 소리를 낸다. 행랑에서도 그
소리를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 연학은 귀를 세우며 시계 치는 소리를
센다. 열두 번이었다. 연학은 열한 번 칠 때도 세었고 열 번 칠 때도
세었다. 다시 사방은 정적에 묻혀버린다. 연학은 일어나 앉으며 담배를
붙여문다.
이 무렵, 김두만의 집 담을 두 명의 괴한이 넘어가고 있었다. 두만은 그
동안 어느 부자가 살던 집을 구입하여 생활의 규모를 넓히면서 술도매상도
처분하고 양조장 사업에만 진력해왔으며 서울네도 비빔밥집에서
안방마님으로 자리를 굳혀왔던 것이다. 오늘 밤 김두만의 집에는 서울네와
침모, 일하는 어멈 세 명의 여자들이 있었다. 일꾼들은 모두 양조장에 가
있었고 부친이 위중하다 하여 둘째인 기동과 함께 두만은 독골에 가고
없었다.
"둘째부인, 일어나시오."
서울네는 잠결에 소리를 들었다.
"어서 일어나시오."
"아아, 아이구!"
"천천히, 소리를 지르면 상할 것이오."
서울네는 비로소 가슴을 겨누고 있는 써늘한 것을 느꼈다.
"웨, 웬 사람이오?"
서울네는 사시나무 떨 듯 떤다. 방안도 어두웠고 문밖도 어두웠다.
새까맣게 어두웠다. 공포에 떠는 서울네에게는 지옥 구렁창에서 소리만
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상해 가정부에서 왔소이다. 이런 방법말고는 군자금을 조달할
길이 없었소, 양해하시오."
"도, 돈, 무 무슨 돈이, 집에는 도, 돈이 없습니다."
"긴말 하면 시간만 가지. 양조장 자금으로 쓰려고 시장의 점포 두 개를
팔지 않았소. 알고 왔으니 자아 금고 문 여시오. 우리가 죽음을 불사하고
여기 들어온 만큼 사불여의하면 부인은 죽을 것이오."
칼끝이 앞가슴에 바싹 와서 닿았다. 서울네는 본능적으로 더듬더듬
자리걸음으로 금고 있는 곳에 다가간다. 칼은 등뒤에서따라 왔다.
"저 저 어, 어두워서 어이구!"
침묵을 지키고 있던 사내가 성냥을 그었다. 금고 문이 열렸고 성냥불은
꺼졌다. 사내는 꺼진 성냥개비를 입에 놓고 다시 성냥을 그었다. 얼굴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몸은 마른 편이었다. 칼을 들이댄 서울 말씨의
사내는 몸이 건장한 것 같았으며 음성으로 미루어 젊은 남자인 것 같았다.
침묵의 사나이는 금고 속의 현찰을 확인한 뒤 꺼진 성냥개비를 입에
놓었다. 그리고 돈을 꺼내어 양쪽 호주머니 속에 나누어 넣는다.
"그러면 우리가 무사히 갈 수 있게 부인께서는 고생을 좀
해주셔야겠소."
준비해온 끈으로 서울네를 묶은 뒤 입에는 재갈을 물리고 이들은
바람같이 담을 넘어 사라진다. 그런데 같은 시각에 이상한 일은 또
벌어지고 있었다. 이순청 집 담벽에 붙어선 두 사나이.
"불이 켜져 있는 방이 이 집 주인 거처방이다."
한 사내가 소근겨렸다. 그리고 덩치 큰 사내를 담 위로 밀어올려주는
것이었다. 담을 넘은 사내, 손태산은 사방을 살펴보다가 불이 켜져 있는
방을 향해 곧장 간다. 신돌 위에는 구두 한 켤레가 있었다. 손태산은
주저없이 방문을 쑤욱 연다. 한복을 입고 우두커니 앉아 있던 순철의 부인
이도영이 얼굴을 돌렸다.
"억!"
몹시 놀란 듯 일어서려다 말고 도로 주저앉는다. 아랫목에는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다.
"나는 가정부에서 온 사람이오. 알아듣소?"
손태산은 여차하면 맨주먹으로 이도영의 면상을 내리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도영은 말없이 손태산을 쳐다만보고 있었다.
"두말 하믄 잔소리고오, 이런 부잣집에서 나랏일로 돈 빌리돌라 카는데
못하겄다 하지는 못할 기요. 부모 없는 자식이 없고 나라 없는 백성이
없이니. 내 하는 말이 틀리자 않다 생각하무는 순순히 내놓으소."
"..."
"이거 귀가 먹었나, 입이 붙었나, 재미없기 나오믄."
하다가 강도질하러 간 거는 아닌께, 통사정하는 입장인꺼로 말조심을 하고
시간을 끌지 않게끔, 하던 관수의 말이 생각났다.
"주인어른, 불학무식해서 예법을 모리니 용서하이소. 그러나 장수의
자손으로 부끄러븐 짓은 안 했인께, 그나저나 시간이 없는데 긴 타령 할
수 없고 어서 ! 가부간,"
하자,
"저기,"
하며 이도영은 문갑을 눈으로 가리켰다.
"와 이랍니까 주인장, 내가 얼라요? 철은 다 들었인께 주인장이
내놓으소."
"참말 불학무식하네. 이런 일 할라 카믄 까막눈은 면해야지."
하며 이도영은 문갑을 열고 부피가 얇은 것과 부피가 많은 돈다발 두 개를
꺼내온다.
"하여간에 고맙소. 미안시럽지마는 좀 묶여 있어야겄는데."
손태산은 준비해온 끈을로 이도영을 묶으면서,
"까막눈은 면할라 카이 날 새부렀고, 까막눈이라꼬 나랏일 못라겄소. 내
주먹 하나로 왜놈 열 명은 때리잡을 기요."
손태산은 쓸데없는 말을 하면서 이도영을 묶은 뒤 재갈을 물린다. 돈은
챙기고 전등을 껐다.
"아닌게아니라, 주인장, 점잖은 사람한테 실례가 많았소."
손태산은 유유히 나온다. 밖에 나왔을 때,
"사나이 배짱이 이만은 해야지."
그는 크게 소리 내어 웃고 싶은 심정인 것 같았다. 그러나 동행이 그를
잡아 끌었다.
열두시가 넘은 시각, 큰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이 더러 있었고
술집·기생집은 주흥이 무르익어 여자들의 웃음 소리 남자들의 술취한
소리가 흘러나오곤 했다. 열두시에서 새벽까지 길고도 짧은 시간, 일은
계획대로 진행이 된 것 같았다. 어둠이 걷히고 뿌연 아침 안게가 거리에
깔렸을 때, 시가에는 비상이 걸렸다. 서울네는 침모가 발견했고, 이도영
씨는 그보다 훨씬 늦게 마누라가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다.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서울네는 비교적 정확하게 어젯밤에 일어난 상황을
설명하였고 강탈당한 돈은 삼천원이라 했다. 기별을 받고 독골에서 달려온
김두만은 사색이 되어.
"그놈들 반드시, 틀림없이 잡으시오! 내 그 돈을 찾아서 경찰서에
기부하겠소! 그놈들만 잡아주시오!"
서투른 일본말로 소리소리 지르는 것이었다. 돈 삼천 원이 적은 돈인가.
면소 서기가 십 년을 고스란히 모은 월급도 그만한 돈엔 못 미친다.
아깝고 원통한 것을 생각하면 눈알이 빠질 지경이다. 그러나 김두만은 돈
아까운 것 이상으로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다. 칼 들고 야밤에 들어온
괸한들, 가정부에서 왔다는 그들에 대한 공포는 결코 아니었다. 일본
경찰에 대한 것이다. 상해 가정부 운운하지 않았더라면, 단순히 돈을
털러 들어온 강도였었더라면 김두만의 입에서 기부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의 하나 가정부와 내통하지 않았는가 의심을 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돈 삼천원이 문제인가. 파멸까지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을 궁지에 몰아 넣은 그들에 대한 증오심도 물론 대단해서 김두만은
진심으로 글들의 체포를 원하였다. 한편 탈진이 되어 자리에 쓰러진
이도영을 찾아온 두 명의 형사는 사건의 경위를 묻고 있었다. 끈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맨 이도영은,
"키는 중키쯤 돼 보였고 몸은 마른 편이었소."
몹시 땀을 흘리며 말했다.
"말씨는 어떻든가요?"
"서울 말씨였소/"
실로 해괴한 일이다. 손태산은 중키도 아니었고 마른 편도 아니었다.
이도영 자신이 불학무식하다는 말까지 한 손태산이 서울 말씨는커녕
사투리치고도 심한 편이었으며 상스러웠던 것이다.
"김두만 씨 댁에 침입한 자들과 인상 착의가 비슷하군요. 흉기는?"
"칼이었소."
"시간은?"
"그러시... 그기이 그러께 한시는 지났을 성싶은데 확실히는
모르겠소이다."
이도영은 계속 사실과 다른 말을 했다. 손태산은 칼 같은 것 가져오지
않았고 침입한 시간도 열두 시가 조금 지났을까.
"그자들이 김두만 씨 댁을 습격하고 나서 이곳에 왔군. 몇 사람이었소?"
"두 사람이었소."
계속 이도영은 땀을 흘렸다. 얼굴은 창백했다.
"운수 불길하여, 기왕지사 돈은 뺏 지마는 이러다가 영감 병 나겄소.
꿈 한번 잘못 꾸었다 그렇기 생각하시이소."
순철의 모친이 참다못해 말했다.
"임자는 가만있소."
무너지려는 허리를 세우며 이도영은 마누라를 나무란다. 어투가 매우
엄격했다. 듣기론 내세울 만한 문벌도 아니며 겨우 편지 정도 쓰고 읽는
학식밖에 없다는 것이었는데 깡말라 보여 그랬던지, 테가 가는 안경을
쓰고 가지런히 다듬은 콧수염 때문이었는지 그의 풍모는 돈에 무서운
상인으론 보이지 않았다. 이도영의 기를 수첩에 적고 있던 형사는 순철
모친의 말이 비위에 거슬렸던지,
"우리도 당신네들 손해본 돈이 문제가 아니오. 서장 목이 오락가락하는
대사건이오. 대일본제국 경찰의 치욕인 것이 문제란 말이요. 하룻밤에 한
곳도 아니요 두 곳이나 습격을 당했다는 것은,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돼."
험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조선인 형사였다.
"임자는 안에 들어가소. 남자들 하는 얘기에 끼여들어 요망하다는 말
듣기 전에."
눈살을 찌푸리며 이도영은 마누라에게 다시 말했다.
"끼여들기는 누가 끼여들었십니까. 영감이 갱신을 못하신께 그랬지요."
"허허어!"
"알았십니다."
순철이 모친은 남편 영에 못 이겨 물러난다.
"제놈들이 달아나면 어딜 가. 독안에 든 쥐새끼지. 이 기회에 이곳
불온도배들 뿌릴 뽑아야 해."
함께 온 일본인 형사의 말이었다. 신속하기가 번개같은 일본 경찰은
신고를 받는 즉시 진주서 빠져나가는 길목을 일제히 차단했고 불온하다고
점찍어놓은 사람들 집에 경찰관이 쫙 깔리면서 수색에 나서고 있었다.
물론 최씨네 집에도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그런데 이도영 씨,"
하고 형사는 날카롭게 불렀다.
"오천 원이라면 흔히 만져볼 수 없는 큰 돈 아닙니까?"
"..."
"그런 현금을 마치 겨져가 달라는 듯 집에 두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소?"
제일 중요한 얘기는 이제부터다, 하듯 형사는 이도영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무슨 말심을 그렇기 하시오! 불난 집에 와서 부채질을 해도 유분수지,
도둑에게 가져가라고 집에 돈 놔두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이오!"
"도둑이 아니지 않소."
"아니면!"
"가정부에서 군자금으로 가져갔다 그 얘기 아니오."
"들어온 놈이 누구이든 남의 돈 강탈해갔으면 도둑이지, 도둑
아니라니!"
얼굴이 벌개지면서 이도영은 화를 냈다.
"아아, 아 역정 내시지 말고 현금이 있었던 경위를 설명해주시면
됩니다."
한참 있다가 이도영은 화를 가라앉히며 본래의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원래 성미가 은행 같은 곳에 예금은 잘 하지 않소."
"그래서요, 그래서 금고도 아닌 문갑 속에 아무렇게나 간수한다?"
이해 못하겠는데요.
"금고는 백화점에 있고오, 집에는 본시부터 금고가 없소, 이거는 내
판단이지마는 금고란 여기 돈 있소, 하고 도둑에게 가르쳐주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오? 내가 현금을 관리하는 것은 당신네들한테도 말 못하오.
그거는 내 비밀인께. 그러나 오천 원이 어찌 문갑 속에 있었는가, 그것은
쉽게 이야기해줄 수 있소."
"말씀해보시오."
형사의 어세가 한결 누그러진다. 지방의 유지인 만큼, 경제권을 쥐고
있는 강자인 만큼 그도 날씨 보아가며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내 사업이 사업인 만큼 항산 자본이 넉넉해야 하는 관계상 땅을
장만하질 못하였소. 한데 지난 가실에 마치 맞는 땅이 있다 말을 듣고, 두
차례 가보기도 했고 계약을 한 거는 달포 전이었소. 오늘이 잔금을 치를
날인데 어젯밤 그 꼴을 당했던 거요. 잔금 받을 사람이 이 소동을 보고
돌아갔거나 아니믄 근처에 있일 성싶소. 이만 하믄 알아듣겄소? 문서도
있인께."
"그럼 그 돈 있는 것을 어찌 알았을까?"
"그거는 나도 궁금하오."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놈의 소행인 듯한데."
"아까 당신네들은 대일본제국 경찰의 치욕이다, 그런 말을 했는데
이거는 내 이도영의 치욕이오. 내가 친일파라는 것은 세상이 더러 아는
일이지마는, 이제는 세상 사람 놀림감이 되지 않았소? 진주 사람들이
드세다는 것은 당신네들이 더 잘 알 거요. 나도 돈의 문제보다 이아무개가
친일을 해서 돈냉이나 벌더니 가정부 사람들이 와서 칼 딜이대고 털어
갔다, 속이 씨원하다, 그렇기들 입방아를 찧어싸면 내 장사는 어찌
되겠소. 당신네들 치안이 물샐틈없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겠소?
적반하장이라더니 피해자를 보고 머 어째요?"
"아아, 아 고정하시오. 우리도 신경이 곤두서다 보니, 언짢은 점이
있더라도 양해하시오."
계속 땀을 흘리고 얼굴이 새파랗게 돼 있던 이도영은 성질을 내다가
자리에 픽 쓰러졌다. 혼절을 했던 것이다.
"아이구 영감! 이러다가 큰일나겄네!"
마당에서 서성거리던 순철의 모친이 뛰어왔다. 그리고 의사 불러 오라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이도영은 극도의 긴장 때문에 혼절한 것이다. 그는 형사의 눈이 독사
같아서 몸서리치고 떨었던 것이다.
(4부 3권으로 이어집니다)
어휘 풀이
*괄호 속의 숫자는 본문 속의 면수와 행수를 가리킴.
상배(11:4): 상처의 높임말.
솥전만 돌지 말고(31:12): 변죽만 울리지 말고.
벅수(31:18): 장승.
거물장(33:30): [방언] 거멀장.
고반소(37:27): [방언] 파출소.
한 다리가 짧았지(44:25): 수운의 모친이 상민이었다는 얘기를 둘러서
한 말.
상충살(57:14): 방위나 일진이나 시 따위가 서로 맞질리는 살.
대대로(59:30): [방언] 비슷하게.
쪼다리(60:0): [방언] 꼴.
남우 앞(60:25): 남의 첩.
거천(68:17): [방언] 봉양.
매동구리(69:19): [방언] 매듭.
제금(71:8): [방언] 딴살림. 분가.
아금바리(71:10): [방언] 아금밭게. 알뜰하게 발밭다.
악문(73:21): 악으로 갚음. 배신.
덛들어서(73:23): [방언] 건드려서.
철기 날개(94:12): [방언] 잠자리 날개.
짚베옷(114:5): 바래지 않은 무명옷.
논(121:21): [방언] 설움.
헌해(122:16): [방언] 험담.
간불용불(142:22): 머리카락 하나 끼울 틈도 없음. 조금도 빈틈이 없음.
신이나 돌리놓지(145:10): '개가'를 돌려서 표현한 말.
부치(146:2): [방언] 부처
얌얌할(148:1): [방언] 심심할.
고내기(148:25): [방언] 고양이.
지운 데(152:6): [방언] 기운 데. 모자라는 데.
얼(153:30): [방언] 응어리. 원망.
은정(154:7): [방언] 하소연.
정지(156:2): [방언] 부엌.
밥대기(157:23): [방언] 밥을 해주는 사람. 여기서는 마누라를 뜻함.
된정(158:15): [방언] 짜증.
질주(159:18): [방언] 정상.
제기나(159:21): [방언] 적이나, 다소라도.
중우(159:22): [방언] 바지.
신기한 방어(172:19): 민간에서 하는 주술적인 예방.
이혈(177:4): [방언] 유혈.
성지간(179:6): [방언] 형제간.
처네(227:30): 지난날, 여자가 나들이할 장옷처럼 머리에 쓰던 물건.
조세질(229:6): [방언] 충고.
넘찐(241:4): [방언] 건방진.
도사리(245:14): 못자리에 난 어린 잡풀.
사림을 동개부릴라꼬(258:30): [방언] 살림을 합친다는 뜻.
찻머리(271:30): 정류장.
칭아(338:11): [방언] 차이
후둣가 보내서(345:16): [방언] 닦달하여 쫓아 보내다.
이새(346:2): [방언] 혼전에 배우는 바느질 따위의 제반 가사.
쫄대기를 치고(347:24): [방언] 못살게 굴다.
소캐(335:27): [방언] 솜.
부작대기(355:29): [방언] 부지깽이.
앵하믄(358:3): [방언] 아까우면.
쟁피(361:19): [방언] 창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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