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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2022년, 곡기 끊고 8일 만에 극락 간 연관 스님(1949~2022)
스님 『왕생집』 이어 『한국 왕생집』 엮은 보정(普淨) 짓다.
1) 집필 마지막 날 새벽에 날아든 ‘극락 간 소식’
엊저녁 청화 스님, 청담 스님 극락 간 이야기에 사진 다듬어 붙이는 작업을 하고 2시가 넘어 잤기 때문에 오늘은 오랜만에 늦잠을 자려고 하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침 6시가 되자 다시 눈이 떠져 『극락 간 사람들(한국 왕생전)』 최종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데 7시 좀 넘어 카톡이 울린다. 옥천사 청련암 원명 스님이 신문 기사를 보내온 것이다.
전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이며, 봉암사 태고선원 선덕인 연관 종사가 6월 15일(수) 저녁 7시 55분 부산 관음사에서 입적했다. 세납 74세. 승랍 54세.
스님의 법구는 부산 관음사에 모셨다. 발인은 17일 오전 10시 30분 부산 관음사에서, 다비식은 12시 양산 통도사 다비장에서 엄수한다. 통도사 주지 현문 스님이 연관 스님 입적 전 부산 관음사를 찾아가 다비식을 통도사 다비장에서 봉행하도록 했다.
연관 스님은 입적 전 일주일 전부터 일체의 곡기를 끊었고, 사흘 전부터는 물도 마시지 않으면서 수행자의 삶을 여법하게 회향하기 위한 준비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 불교 환경연대 상임대표 수경 스님과 전 봉암사 주지 함현 스님 등이 입적 당시 자리를 지켰고, 통도사 주지 현문 스님, 명진 스님 등이 입적 전 연관 스님을 만나 치료 등을 권했지만, 스님은 “나뭇잎이 떨어지면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라며 생사의 경계를 넘어선 초탈한 자세로 수술과 항암치료 등 연명치료 부탁을 거절하고 사바와의 이별을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불교닷컴, 2022. 06. 17. 「전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 연관 스님 입적」)
2) 연관 스님의 행장과 마지막 가는 길
오늘 『극락 간 사람들(한국 왕생전)』 집필을 마감하는 날 새로 극락 간 스님의 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부산 관음사에 전화해서 오늘 행사 안내장을 하나 부탁했더니 바로 메일로 보내왔다. 장례위원회에서 낸 안내장에는 간단한 행장과 신문에 나지 않은 사실들이 있었다.
① 1949년 8월 4일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면에서 아버지 황학용, 어머니 한여자 님을 인연으로 출생하였습니다. 속명은 황민화 黃民和.
② 1969년 1월 15일 금강사에서 우봉 스님을 은사로, 병채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이어 같은 해,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였습니다. 재적 본사는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입니다.
③ 1981년에서 1984년에 걸쳐 직지사 황악학림에서 관응 대강백을 강사로 경율논 삼장을 연찬한 이후 경학에 매진하며 수행 정진하였습니다.
④ 1989년부터 1994년까지 직지사, 김용사 승가대학 강사를 역임했습니다.
⑤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조계종 최초 승가 전문 교육기관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을 역임하였습니다.
⑥ 2002년 희양산 봉암사 선원을 시작으로 기기암, 칠불사, 벽송사, 백양사, 대흥사, 태안사 등 제방 선원에서 40안거를 성만하였습니다.
⑦ 2000년 환경단체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에서 시상하는 제6회 풀꽃상을 수경, 도법 스님과 공동 수상하였습니다.
⑧ 2001년 2월, 생명 평화를 위한 백두대간 1,500리 종주를 하였습니다. 이어 2008년 한반도 대운하 반대 순례단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에 참가하였습니다.
⑨ 1991년 운서 주굉 스님의 『죽창수필』을 번역한 이후 참선 정진과 함께 번역에 매진하였습니다. 대표적인 번역서는 『금강경간정기』, 『선관책진』, 『선문단련설』, 『왕생집』, 『불설아미타경소초』, 『용악집』, 『학명집』 등 다수가 있습니다.
⑩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조계종 표준 금강경』 편찬에 참여하였습니다.
⑪ 2022년 6월 15일 관음사에서 입적하였습니다. 세수는 74세 법납은 53세입니다.
행장에 이어지는 영결 법어에는 조사들의 법거량이 소개되고 한 시인은 조사에서 “다시 북두칠성 그 여섯 번째 별인 문창성으로 가시는지요?”라고 스님이 가신 곳을 궁금해 하였다. 글 가운데 장의위원장인 관음사 지현 스님의 글이 연관 스님의 마지막 길과 스님에 대한 바람이 가장 절절하게 묻어난다.
연관스님!
스님은 코로나바이러스로 격리 중 말기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죽음이 벼락처럼 확연하게 마음에 와닿는 깨달음이 왔답니다. “코로나여! 암이여! 참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라며 임종의 때가 온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니 한 포기의 풀과 한 그루의 나무 그리고 도량에 나온 뱀들도 귀하고 아름답게 보인다고 평생 뜻을 함께한 도반 수경 스님께 토로했다니 차원을 뛰어넘은 수행자 상을 보이셨지요. 수경 스님, 도법 스님처럼 훌륭한 도반들과 뜻을 함께했으며, 마지막까지 정성스럽게 간병한 고담 스님 같은 시자의 시봉을 받은 것은 스님의 큰 덕행 덕분이었습니다.
연관스님!
스님처럼 수행력을 두루 갖춘 스님께서 관음사에 오셔서 고요히 원적을 보이심은 저희들의 복운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스님의 교화를 기다리는 고통스러워하는 중생들이 너무나 많으니 스님께서는 정토의 즐거움에만 안주하지 마시고 속히 저희들 곁으로 돌아오시기를 간절히 정성 다해 간청합니다.
3) 연관 스님과 엮은이의 인연
연관 스님을 뵌 적은 없지만, 엮은이에게는 한두 가지 각별한 인연이 있다. 2008년 엮은이가 정토에 입문했을 때 국내에서 발행하는 모든 관련 책을 모아 닥치는 대로 읽어가는 도중 대구 자운사에서 법 보시한 주굉의 『왕생집』에는 이미 극락에 간 수십 명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었고, 그런 『왕생전』은 엮은이에게 극락에 갈 수 있다는 믿음(信), 극락에 가겠다는 바람(願)을 단단하게 세워 주었다. 그리고 그때 ‘그런데 왜 『한국 왕생전』은 없지?’라는 생각과 함께 『한국 왕생전』을 쓸 발원을 하고, 동대문 밖 안양암, 진주 연화사를 가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왕생집』을 우리말로 옮긴 ‘하청’이란 스님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2009년 입산하여 3년 염불 수행하고(行) 2012년 하산하여 정토 관련 책을 쓰고 있을 때, 자운사 혜명 스님이 『아미따불 48대원』이란 책을 기획하였다며 나에게 원고를 부탁했다. 나는 산사에서 이미 정토삼부경을 번역해 놓았고 『아미따경』은 이미 전자책을 냈으므로 그 원고를 그대로 쓰고, 『무량수경』 앞부분을 정리하여 『아미따불 48대원』을 정리하였다. 그때 혜명 스님이 『아미따불 48대원』에 연관 스님의 「정법개술 淨法槪述」도 함께 낸다고 하여, 그때 처음으로 연관 스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침에 자운사 혜명 스님에게 전화해서 “오늘 연관 스님이 입적하셨는데 마지막으로 『극락 간 사람들』에 꼭 넣어야겠다”라고 하며 연관 스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도중 혜명 스님이 “연관 스님이 바로 주굉의 『왕생전』을 번역하신 ‘하청’이시다”라는 사실을 말하면서 자기도 2000년도 초반에야 알았다고 했다.
2000년대 초반에 『왕생집』 번역하신 ‘하청’이란 분을 수소문하다가 『화두놓고 염불하세』란 책을 쓰신 보적 김지수 교수가 알고 있다고 하여 함께 지리산 실상사에 가서 수경 큰스님, 도법 큰스님, 연관 큰스님을 처음으로 친견하게 되었습니다. 연관 큰스님은 그 자리에서도 수경 큰스님과 도법 큰스님과의 대화에서도 염불에 강론을 펴시었고 염불하기를 권하셨습니다.
주석하시는 암자로 자리를 옮기셔서 차를 내어 주시면서도 오랜 시간 정토 법문을 해주셨고, 「정법개술淨法槪述」에 대하여 환희심을 갖고 있던 저에게 정토 법문 포교하라 하시면서 번역하신 「정법개술」 원본을 법공양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 「정법개술」을 책으로 인쇄해서 법 보시 해 오다가 이후에 제가 출가해서 전화를 드렸더니 반가워하시며 많이 칭찬해 주셨습니다.
2015년 『아미따불 48대원』을 책으로 내면서 「정법개술」을 함께 넣겠다고 전화를 드렸더니 다시 다듬은 걸로 쓰시라며 출판 대표에게 직접 보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연관 스님과는 이미 크게 두 번의 인연이 있었으며, 특히 주굉의 『왕생전』을 통해서 엮은이가 『한국 왕생전』을 쓰게 하셨는데, 그 원고를 마치는 날 입적하여 새벽에 원명 스님을 통해 알리는 것은 “『한국 왕생전』 마지막에 넣은 사람이 있다”라는 것을 알린 것이 아닌가!
혜명 스님도 “『한국 왕생전』을 올리는 이 시점에서 바로 오늘 큰 스님 왕생하신 사실은 우리 『한국 왕생전』 불사가 우리 힘이 아닌 불보살님의 뜻임을 느끼게 합니다”라고 감격해하였다.
4) 연관 스님의 극락 가는 씨앗(往生因)
오전 일과가 시작되자 엮은이는 국회도서관에 가서 『죽창수필』 초간본을 비롯하여 3번의 출판본의 서문과 『往生集 죽음 너머』 서문을 복사하고, 조계종 출판사에 가서 『불설아미타경 소초』를 사서 연관 스님 왕생인을 쓴다.
스님은 『죽창수필』, 『왕생집』, 『금강경 간정기』, 『선관책진』, 『선문단련설』, 『용악집』, 『학명집』, 『불설아미타경 소초』, 『정법개술』 등을 번역, 출간하였다. 그리고 『조계종 표준 금강경』 편찬위원장을 역임하고 경전 번역 및 정진에 매진해 왔다. 주로 정토 관련 책, 특히 운서 주굉의 책을 중점적으로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1991, 운서 주굉 저, 연관 역, 『竹窓手筆』 (불광, 1991)
2005, (운서 주굉 『죽창수필』 선역), 연관 옮김 『山色』, (호미 2005)
2014, 운서 주굉 저, 연관 역, 『죽창수필』 (불광출판사, 2014)
연관 스님이 정토관계를 가장 먼저 낸 것이 1991년 1월 『죽창수필』이고, 4월에 『왕생집』을 낸다. 그러므로 이 두 책을 준비하려면 적어도 1년에서 몇 년 전에 이미 정토와 인연을 맺었다고 볼 수 있다. 연관 스님은 정토와 처음 인연을 맺은 연유를 이렇게 돌아본다.
양산 금강대는 소금강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주인 일장 스님이 … 어느 날 내게 한 권의 책을 꺼내 놓으며, “내용이 간솔하고 좋은 책이니 스님도 한 번 읽어 보오”하였다. 죽창수필과의 만남은 이러한 인연으로 이루어졌다.
연관 스님은 『죽창수필』을 읽고 주굉의 설득력 있는 논리에 빠졌고, 이어서 주굉의 다른 책도 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 비판 없이 전통적으로 익혀 온 구습이나 시폐를 지적한 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스님이 무엇이길래 부모에게 절을 하지 않는단 말인가! 부처가 된 후에 부모의 귀의를 받아도 늦지 않다’ 하였다. 이러한 비판적 문제에 대해서는 스님의 다른 저서인 『정와집集』에서 집중적으로 다룬 것을 볼 수 있다. 세상에 흔히 전하는 사람 사는 얘기나 기담 따위도 재미 이상의 되씹을 맛이 있다.
스님의 필봉은 노고추老古錐 바로 그것이다. 원숙하면서 날카롭다. 상相에만 편집하지 않고, 성性에도 골몰하지 않았다. 거산居山이 발을 오므린 것이라면, 행각(行)은 발을 뻗은 것이다.
마지막에 “아! 스님은 송나라의 영명 화상이 다시 오신 것일까. 어찌 그다지도 행리가 흡사하신가! 감산 덕청憨山德淸은 아미타불 후신이라고 칭송하신 적도 있다”라고 주굉을 크게 가리고 있다. (이상 『죽창수필』 역자 서)
이 『죽창수필』의 서문을 통해서 연관 스님은 나이 50을 바라보는 1990년 언저리에 정토에 입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년이 지난 2005년에 450개쯤 되는 『죽창수필』에서 140개 남짓 가려 봅아서 묶은 것이 『산색山色』, 9년 뒤 2014년에 낸 개정판도 일장 스님이 세운 남원 황매암에서 썼다.
(2) 주굉 모음, 방륜 지음, 하청 풀어 씀,『왕생집 · 정법개술』, 여래, 1991.
주굉 모음, 방륜 지음, 하청 풀어 씀,『왕생집 · 정법개술』, 여래, 2008.
(자운사 법보시)
운서 주굉 역음, 연관 옮김,『往生集 죽음 너머』, 호미, 2012. 9.
『왕생집』은 『죽창수필』보다 4개월 늦게 나왔는데, 역자 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백하건대 역자는 돈독한 정법 행자淨法行者도 아니고, 정법교의淨法敎義에 대한 지식도 천박하다. 따라서 출판에 앞서 이른바 법을 아는 자가 두렵기도 하고, 홀깃 남의 집을 엿보듯 한 자괴심도 없지 않다.
두 권의 책을 번역해 냈으나 아직 돈독한 정법 행자가 아니라는 것을 넌지시 말하고 있다. 그러나 13년 뒤 개정판을 낼 때는 이미 환갑이 넘은 나이가 되었고, 그동안 정토 경전까지 깊이 연구하며 스스로의 정토관을 세운다.
스님은 머리말 「옮긴이가 들려주는 「왕생집」 들여다보기」에서 『왕생집』 각 편마다 담고 있는 내용을 여섯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것이 연관 스님의 정토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비로 보시를 행하며 계율을 청정히 지키고 10선을 행하며, 도리에 충실하고 각자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 정토에 왕생하는 본바탕 [이것을 정토와의 정인正因이라 한다]이 됨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불효하며 염불하는 이는 없고, 인색하고 욕심 많이 부리며(慳貪) 염불하는 이는 없으며, 울분을 참지 못하면서 염불하는 이는 없고, 10악을 저지르며 염불하는 이는 없으니, 청정한 6자 명호六字名號인 ‘나무아미타불’에는 6바라밀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둘째, 많은 이들이 왕생을 위해서 어떤 수행을 하였는지 알 수 있다.
정토종의 초조라 일컫는 혜원 스님은 여산에서 고승과 선비 일백사십여 명과 함께 정토 모임(淨社)을 만들어 날마다 선송禪誦, 『관무량수경』에 의해 정토의 16가지 경계를 관상하며 경전을 독송하는 염불법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이는 촛불을 잡고 탁자에 기댐으로써 생각을 집중하여 흩어지지 않게 하였다고 하며, 어떤 이는 미타와와 관음 두 경전을 지니고 독송하며 정토왕생을 발원하였으며, 또 방등참方等懺이나 법화참法華懺 같은 예참법을 행하며 왕생을 발원하였으며, 경전의 소를 지어 발원했다거나, 대승 경전을 독송하고 찍어 내어 왕생을 발원했다고도 하고, 반주삼매 般舟三昧[반주는 불립佛立]라 한다. [부처님이 공중에 서 있는 모습을 관하여 얻는 삼매]를 닦아 왕생을 얻기도 하고, 주력呪力에 의지해 왕생을 발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을 작관作觀이라고 하는데, 실상념實相念 · 관상념觀想念 · 칭명념稱名念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먼저, 실상념實相念은 제일의심第一義心에 들어가서 법신의 실상을 관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얻은 삼매를 진여삼매 또는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 한다. 이 법문은 본래 선에 속하는 것이지만, 선심으로 나타난 경계가 바로 정토이므로 역시 정토법에 포함시킬 수도 있다. 이 법은 상상근기가 아니면 능히 깨닫지 못하므로 중근기와 하근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정토법에서는 이 법을 제창하는 이가 드물고 선문에 맡겨 둔다.
관상념觀想念의 「관무량수경」에서 말한 아미타불 극락 국토의 의정장엄依正莊嚴을 관조하는 16가지 관법을 말한다. 이 관행觀行이 깊어지면 눈을 감든지 뜨든지 극락 아닌 곳이 없어서 그대로 사바세계가 변하여 정토가 되니 죽을 때를 기다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몸이 극락국에 노닐게 된다. 따라서, 공덕과 효과의 크기로 말하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이것으로 얻은 삼매를 반주삼매般舟三昧 또는 불입삼매佛立三昧라고 한다. 다만 관법이 미세하고 깊어서 실로 실행하기 어려운 법문이다.
칭명념稱名念은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염불법이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염불법에 견주어 실행하기 쉬워서 상 · 중 · 하근기를 막론하고 능히 부처님 명호를 부를 수만 있으면 성공하지 못할 이가 없고, 염불을 일심불란 하게 만하면 금방 삼매를 얻게 된다. 이렇게 하여 얻은 삼매가 염불삼매다.
「왕생집」에서는 여러 염불 작관作觀 가운데서 “칭명 염불” 법을 가장 두둔하며 제창하고 있다. 이 염불법은 아미타 부처님의 전신인 법장비구의 48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설사 내가 부처가 될지라도 시방 중생이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즐거워하여 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하면, 10념十念만을 하고서도 만일 태어나지 못하면 정각을 이루지 않겠나이다.”
이 경문은 “시방 중생이 10념만 하더라도 반드시 이 나라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원”에 의한 것이다. 법장 비구의 48원 가운데 이것이 가장 중요하므로 이 원願을 “원의 왕”이라 부른다. 칭명 염불은 수많은 대덕이 끊임없이 제창하고 실행하여 여염에도 널리 파급된 염불법이다.
셋째, 염불 수행의 그치는 ‘일심불란一心不亂’이다.
‘일심불란’은 염불 수행할 때 지극한 마음으로 미타의 명호를 지송하여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자기 몸과 ‘나무아미타불’이 합일하는 것으로, 어느 편에서나 거의 보인다. 이 ‘일심불란’은 「불설아미타경」에서 부처님이 직접 보이신 것이다.
“사리불이여,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불에 대해 설한 것을 듣고 그 부처님의 명호를 굳게 가지되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나 나흘이나 닷새나 엿새나 이레 동안 일심불란 하면 …….”
‘일심불란’이야말로 수행의 극치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 책 다음으로 출간하게 될 주굉 스님의 저술을 자세히 풀이한, 「석가불이 아미타를 설한 경(佛說阿彌陀經疏)」에서는 수십 쪽에 걸쳐 이 “일심불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일심불란’이 곧 선문의 ‘일념一念’이라고 말하면 눈을 부라리며 팔을 걷어붙이고 따질 자도 있을 것이다. 심천이 다르다는 뜻을 것이지만, 아! 부처님이 “나의 설법은 마치 제호의 맛과 같아 가장자리나 중간이 같으니라”라고 하신 말씀을 듣지 못했는가?
넷째, 정토왕생을 발원한 이들이 죽음에 이르면 부처님께서 관음과 세지 등 여러 보살과 함께 어김없이 맞이하신다.
이것은 법장비구의 48원에 따른 것이다. “설사 내가 부처가 될지라도 시방 중생이 보리심을 발하고 모든 공덕을 닦아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하여 내 나라에 태어나고자 하되, 목숨이 다할 때 만일 대중에 둘러싸여 그 사람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정각을 이루지 않겠나이다” 곧 ‘시방 중생이 발원하여 이 나라에 태어나고자 하면 임종할 때에 반드시 와서 영접하려는 원’이다. 죽음을 맞는 이를 위해 부처님이 와서 맞이하는 내영來迎은 죽음의 문 앞에서 속수무책인 인간에게 큰 위안이다. 얼마나 크게 위안이 되었으면 악인이면서도 왕생한 웅준이라는 자가 “아, 마침 이런 것이 있었구나!” 했겠는가!
다섯째, 간화선문의 최후 목표점이 견성성불에 있듯이, 염불 정토의 마지막 목적지는 왕생정토다.
극락정토는 법장비구가 세자재왕불의 가르침에 따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도량을 만들기로 하고서, 처음 설계한 뒤에 오백 겁 동안 사유하고 불가사의한 힘을 더한 뒤에 이윽고 이룩하였다. 그리고 청정 불토를 다 만든 뒤에, 다시 세자재왕불 앞에 나아가서 이곳에서 중생을 제도할 48가지 큰 원을 세웠으니, 곧 “설사 내가 부처가 되더라도 나라 가운데 지옥 · 아귀 · 축생이 있으면 정각正覺을 이루지 않겠나이다. 비록 내가 부처가 되더라도 이 나라의 천인天人이 목숨을 다한 뒤에 다시 삼악도에 떨어지는 자가 있으면 정각을 이루지 않겠나이다”는 원이 한 예이다. 극락정토는 아미타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만드신 의보와 정보가 매우 장엄한 곳이라서 이곳이야말로 최고의 이상향이라 할 것이니, 정토 행자로서 이곳에 태어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왕생집에서는 온갖 수식을 다 하여 이 왕생의 정경을 보이고 있는바, 실로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왕생은 사후의 일이라, 정定에서 극락을 여행하고 돌아와서 알려 주었거나 꿈속에서 왕생의 정상을 보았거나 임종의 거룩한 정상으로 왕생을 가늠할 수밖에 없다. 왕생뿐만 아니라 왕생의 품위도 정에서 본 것이나 꿈속에서 본 것이나 임종의 거룩한 정상이 잣대가 될 수밖에 없다. 어느 염불 수행자는 죽음에 다다라 단정히 가부좌하고 앉아 부처님 명호를 부르더니, 염불 소리가 차츰 낮아지면서 숨소리도 차츰 잦아들었다 하였으니, 이를 보고 누가 왕생을 의심하고 정토교의 우수성을 의심하며 이를 본받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누가 이런 말을 했다. “왕생은 극락이라는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다. 시방 삼세에서 가장 훌륭한 스승인 아미타 부처님을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고 위 없는 깨달음을 얻은 뒤에 사바세계로 다시 돌아와서 수많은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것이 왕생의 본래 뜻이다. 번뇌를 다 녹이지 못한 중생이면 누군들 후신後身을 다시 받아 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정토왕생에 뜻을 두고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이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정토 수행자가 왕생을 최후 목표점으로 삼는 까닭이다.
여섯째, 시방 국토에도 수많은 정토가 있으니, 예컨대 동방에는 아촉, 약사, 수미등왕 등의 부처님이 계시고, 남방에는 명등, 상방에는 향적불이 계신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제각기 정토가 있어서 모두 넓고, 장엄하며 먼지와 때가 끊어진 곳이다. 그러나 「왕생집」에서는 유독 서방의 극락세계만을 선택하여 이곳에 왕생하기만을 강력히 주장한다. 「왕생집」은 그 까닭을 밝히지 않았으나, 「자세히 풀이한, 석가불이 아미타를 설한 경」(근간)에서는 그 까닭을 열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칭명염불稱名念佛(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불법), 일심불란一心不亂(생각이 한곳에 전념하여 흩어짐이 없는 것), 왕생정토往生淨土(정토에 왕생하는 것), 이 세가지를 나는 정토종의 세 솥발(三鼎)이라 부르고자 한다. 이 세상에 몸을 의탁한 이상 그 누구도 죽음이란 문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니 누구라도 이 정토 법문에 의지하여 저 아미타 부처님의 내영을 입어 서방정토에 왕생하여 부처님을 뵙고, 가르침을 친히 듣고,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아서 인연이 오면 다시 이 사바로 돌아와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기 바란다.
여기서 우리는 연관 스님의 정토관을 뚜렷이 알 수 있고, 스님은 30년 이상 이를 실천했다고 본다.
(3) 운서 주굉 지음, 연관 옮김, 『불설아미타경소초』, 불광출판사, 2015.04.22.
1990년대 『죽창수필』과 『왕생전』을 옮겨 나누며 자신의 극락 가는 길을 닦은 스님은 2013년부터 정토 경전 연구에 뜻을 두고 『불설아미타경 소초』를 옮겨서 펴낸다.
720여 쪽에 달하는 이 책의 요지는 칭명염불, 일심불란, 왕생정토이다. 칭명은 왕생의 인因이요, 왕생은 일심의 과果이며, 일심은 앞과 뒤를 아우르는 이 경 전체의 골자다.
방행放行이면 마음이요, 비로자나요, 아미타며, 파정把定이면 마음도 아니요, 비로자나도 아니요, 아미타도 아니다. 방행이 옳은가, 파정이 옳은가? 옳고 그르고는 잠시 그만두고, 연관은 틈틈이 2년여 만에 이 일을 회향한다. (『불설아미타경 소초』 해제)
『왕생집』의 고갱이를 『아미따경』을 통해서 다시 확인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미 정토에 대한 완벽한 관이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방륜 거사 저/ 연관 스님 역, 『업을 지닌 채 윤회를 벗어나는 성불법 정법개술』 (비움과 소통, 2017년 10월 27일)
『정법개술』을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왕생전』과 함께 1991년 발표하였다. 그 뒤 여러 번 법보시품으로 발행되는 동안 고치고 손보아 2017년 책으로 냈다. 이 책에는 황염조黃念朝 거사가 쓴 『정토 고갱이(淨宗心要)』와 하련거夏蓮居 거사의 『정토 수행의 지름길(淨修捷要)』이 함께 실려 있다. 이 책은 정토 수행자들이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하도록 펴낸 것이다.
5) 연관 스님이 극락에 간 것을 기리며
이 글을 쓰면서 무량수여래회 자항 거사에게 전화했더니 두 가지 사항을 더 알려 주었다. 첫째 스님은 이미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을 번역하여 출판 준비 중이었다고 한다. 『만선동귀집』은 송나라의 영명 연수延壽(904~975)가 지은 책으로 모든 선善은 궁극적인 진리로 돌아간다고 설하며, 선禪과 염불을 함께 닦을 것을 권장하여 염불선 念佛禪의 터전을 확립한 저술이다. 스님이 그동안 선을 중시하고 염불을 경시하는 한국 불교계에 『만선동귀집』으로 자신의 불교관을 보여 주려는 임종게라고 본다.
또 2달 전 스님이 무량수여래회에 『왕생집』 300권을 보내 법보시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조용히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엮은이의 불교 카톡방에 연관 스님이 곡기를 끊고 간 기사를 실었더니 이런 질문이 있었다.
“연관 스님께서 입적을 일주일 앞두고 미리 곡기를 끊으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첫째, 이미 갈 곳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스님은 『죽창일기』, 『왕생전』, 『정법개론』 같은 책들을 번역하여 적어도 30년간 준비해 오셨습니다. 죽음을 준비한 사람에게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둘째, 마지막 육체가 스러지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을 여읜 것입니다.
셋째, 태어난 것은 마음대로 안 되었지만 가는 것은 자기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넷째, 주변 사람들 병간호하고 병원비 쓰는 쓸데없는 낭비를 미리 막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을 준비 안 하고 두려워만 하고 있을 때 스님은 꾸준히 준비하여 내공을 쌓은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죽음을 스스로 결정해 가는 관습은 현재도 인도 자이나교에는 전통이 되어 내려오고 있다. 불교와 함께 생겨나고 교리가 비슷하여 서양 사람들이 불교로 오인하는 자이나교에서는 고승들이 공개적으로 곡기를 끊어 삶을 마무리 한다. 그러면 그 마지막 가는 길을 신도들이 가마에 모시고 행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스님들 전기에도 나옵니다. 『극락 간 사람들(韓國往生傳)』 상권에 1872년, 「한 글자에 3번 염불, 3번 돌기, 3번 절한 아미따경 사경 – 남호당 영기」 편에서 소개했습니다. “스님이 그 일을 마친 뒤 병이 생겼는데 한숨 쉬며 말하기를, ‘허깨비 몸뚱이가 병이 많고 세상에 사는 것도 이익이 없으니 곡기를 끊겠노라’하고 9월 22일에 돌아가시면서 잠깐 문인에게 ”숲속 짐승에게 (내 몸뚱이를) 던져 주어라“라고 했다는 기록입니다.
불교 스님이 아닌 미국의 한 환경운동가도 만 100살이 되자 곡기를 끊고 부인 무릎에 누어 조용히 삶을 마감한 이야기도 있다. (헬런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원래 어제 『극락 간 사람』 하권을 탈고하려고 했으나 연관 스님 편을 새로 쓰느라고 하루를 더 썼다. 스님의 행적과 저서를 보면서 스님은 30년간 일관되게 극락 가는 길을 벗어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信), 그 믿음을 바탕으로 한 바람(願), 그리고 정토 수행(行)과 마지막 회향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하셔서 그 증과(證果)는 극락 윗동아리(上輩)에 가실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한국 왕생전』을 쓰게 해주신 스님이 마지막 날 직접 본인의 이야기를 책의 끝에 넣도록 해 주셔서, 조금이라도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가벼운 마음으로 『극락 간 사람』 하권을 마무리한다.
6) 연관 스님의 마지막 모습이 주는 교훈 – 도움 염불이 필요하다.
앞에서 연관 스님의 극락 가는 씨앗(往生因)에 대해서 자세히 보았다. 그런데 연관 스님 장례가 끝난 뒤 마지막을 지켜본 50년 도반 수경 스님이 엮은이가 알고 싶었던 마지막 순간 이야기를 대중에게 전했다.
짐 정리하러 봉암사 갔다 오니까 병원 안 가고, 연명 주사라든지 이런 거 일체 안 쓰고, 벌써 곡기를 딱 끊었다. 곡기를 딱 끊고 이틀 뒤 물만 마시고, 이틀 있다가 4일 후에는 물까지 딱 끊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 정신이 없는 줄 알라, 의식이 없는 줄 알아. 누가 오던 쳐다보지도 않고 눈도 안 떴어요. 눈도 안 뜨고 쳐다보지도 않고 들은 척도 안 했다. 누가 와도 ‘스님 저 왔습니다’ ‘누구 왔습니다’ 해도 반응을 안 했어. 그런데 저녁에 살짝 나한테 ‘야 지금 어떻게 된 거냐?’ 물었다. (웃음)
”아무 걱정하지 마라, 송원장이 그러는데 너 정신이 굉장히 맑고 정신 상태가 굉장히 봉암사 있을 때보다 좋아졌단다. 맑은 정신으로 갈 수 있는 조건이 다 갖추어졌다고 그런다. 그러니까 너는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염을 지어서 염을 지어서 밝은 정신으로 제 죽음의 문제를 네 스스로 받아들이고 순응할 수 있는 거기에 전념해라“라고 했다.
옆에 있던 시자가 ”염불하세요! 염불 돼요?” 하니까,
”어렵다. 임종 시 목숨이 딱 끊어질 때, ‘나무아미타불’ 10번만 하면 극락세계에 왕생한다는 것 나 그거 믿는다. 그러나 지금 나는 한 번도 안 된다.“
이건 난 무서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솔직하고 자기 있는 그대로 드러낸 것이거든, 죽기 10분 전에, 스님들이 곧 돌아가실 것 같다고 5명이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급히 나를 오라고 해 가니까, 이 사람이 숨을 쉴 수가 없으니까 입을 벌리고 아~ 아~ 이러고 있었는데, 그 순간에 ‘아미타불’ 소리는 안 나오지만, 의식이 또렷한 거야. 나를 빨리 오라고 한 것은 스님 목소리로 연관 스님한테 (염불을) 들려주라 이거야. 내가 가서 내 목소리 있는 힘을 다해서 ‘나무아미타불’ 염불했다. 같이 5분 내지 10분간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10분이라는 사람도 있고 5분이라는 사람도 있는데) 계속 연관 스님 입이 따라서 염불하다가, 보니까 멎었어. 맥 짚어 봐라 하니까 손목에 맥은 벌써 없어졌고 사타구니하고 다른 쪽 맥을 짚어 봐야 하는데 의사들이 와서 보고 맥이 끊어졌다는 거야.
극락 가는 씨앗을 그리 많이 심었지만, 마지막 가는 길에 도움 염불(助念)이 얼마나 크게 도왔는지를 아주 잘 보여 주는 본보기다.
첫째, 스님은 마지막까지 맑은 정신을 가지고 스스로 염불하는 마음을 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그런 스님도 마지막에 업이 한꺼번에 몰려오면 10념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는 우리가 평소 쉽게 ‘죽을 때 10념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염불 수행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큰 교훈을 준 것이다.
셋째, 앞으로 염불 행자들은 도움 염불의 중요성을 알고 어떻게 이런 도움 염불을 제도화해야 하는지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극락에 간 보살에 대한 이야기할 때 그곳에서는 병원에서 도움 염불하는 도우미들이 제도적으로 활성화되었다는 것을 보았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준비가 꼭 필요할 것이다.
원아임욕명종시 진제일체제장애 면견피불아미타 즉득왕생안락찰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극락도사 아미타여래불 🙏
첫댓글 그곳에서는 병원에서 도움 염불하는 도우미들이 제도적으로 활성화되었다는 것을 보았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준비가 꼭 필요할 것이다.
.......!!! 염불행자들이 앞으로 도반님들의 조념을 위해서 준비해야할 숙제라는 생각이드네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극락도사 아미타여래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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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그런 스님도 마지막에 업이 한꺼번에 몰려오면 10념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는 우리가 평소 쉽게 ‘죽을 때 10념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염불 수행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큰 교훈을 준 것이다.
셋째, 앞으로 염불 행자들은 도움 염불의 중요성을 알고 어떻게 이런 도움 염불을 제도화해야 하는지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극락에 간 보살에 대한 이야기할 때 그곳에서는 병원에서 도움 염불하는 도우미들이 제도적으로 활성화되었다는 것을 보았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준비가 꼭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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