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전쟁 ․ 비극 ․ 이라크
작성일시 : 2004년 10월 16일 작성자 : 평화바닥 활동가 셀림
목차 1. 활동경과 2. 활동내용 3. 활동정리 및 평가 4. 향후계획 5. 정리하며
첨부 목록 1. 이라크 현지 1차 보고서 2. 이라크 현지 2차 보고서 3. 이라크 주권이양에 따른 이라크인들의 이야기 4. CWB 활동보고서(2004년 6월 이전까지)와 CWB 정관 5. 평화배움터 제안서 6. 현지활동비 결산 내역
1. 활동 경과
2004년 6월 5일 - 한국 시간 오후 5시 30분 인천공항 출국
6월 6일 - 방콕, 암만을 거쳐 현지시간 오전 12시 바그다드 도착(항공편 이용), 거주지 바그다드 내 동쪽 주택가 하이 알 자미에 지역에서 생활시작, 이라크 평화네트워크 활동가 윤정은씨와 함께 생활함.
6월 9일 - 작년 활동지역이었던 알 마시텔 지역 방문, 올해 2월까지 문을 열었던 놀이방과 공부방 지역을 둘러봄. 놀이방 집기 확인
6월 11일 - 이라크 현지 ngo인 CWB(Children Without Border, 국경 없는 어린이, 이하 CWB로 표기) 활동사항 공유 시작. CWB의 주요사업인 바그다드 학교건립 안건을 살람과 장시간 논의를 통해서 무기한 연기하도록 결정함
6월 13일 - CWB 주간회의에 처음 참석, 사무실 위치 타히르 광장근처의 엔지오 종합 건물, CWB 활동가인 살람, 리야드, 자원봉사자 슌드스양을 비롯 2명과 조우(遭遇)함. 의견 공유.
6월 15일 - CWB 전체회의에 참석, 활동가, 자원봉사자들 총 8명이 회의 참석, 회의 도중 아부 그래이브 교도소에 출감하여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알리고 있는 전직 기자를 만남.
6월 16일 - 1차 이라크 현지 보고서, CWB 단체 현황보고서 작성, 한국 평화바닥 팀에게 보냄
6월 18일 - 바그다드 내 최대 빈민가인 알 사드르 지역에 방문하여 금요 예배 참석, 당시에도 알 사드르 시내의 주민들과 미군과의 간헐적인 교전이 지속되고 있었음.
6월 19일 - 악화된 바그다드 내 치안 상황으로 인하여 CWB 바그다드 사무실을 한시적으로 문을 닫고 외곽지역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자는 의견이 나옴. 이에 타흐르 광장 근처에 있는 사무실은 문을 닫고 알 만수르 외곽지역에 있는 공간을 사무실용으로 찾아다녔지만 마땅한 곳이 없어서 이사를 당분간 미루기로 함.
6월 21일 - 새벽 3시 고(故) 김선일씨 납치 사건을 접함. 아침 6시 살람과 함께 김선일씨 석방을 위해서 현지 이라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논의를 함. 한국 팀과의 의견 불일치와 현지 상황 판단 부족으로 계획했던 이라크 내 아랍방송과의 인터뷰를 성사시키지 못하고, 살람과 살람 친구(팔루자 출신의 종교 지도자)가 팔루자에 들어갔다가 단체 세력들과 만남을 가지고 바그다드로 돌아옴. 더 이상의 일은 진행시키지 않고 그의 석방소식을 기다림.
6월 22일 - 김선일씨 사망
6월 24일 - 바그다드에서 암만으로 이동(육로 이용), 살람 동행, 요르단 대학 앞 알 아메라 호텔 거주
6월 28일 - 미군정에 의해 예정보다 이틀 일찍 이라크 주권이양.
7월 5일 - 살람 이라크로 들어감. 계속 이라크 현지에 있는 친구들과 소식을 주고받으면서 재입국 시기를 조율함.
7월 16일 - 살람 다시 요르단으로 나옴
7월 18일 - 바그다드로 재입국(살람 동행, 육로 이동), 바그다드내 알 둘레이미 호텔 거주. 당일 한국인 기자 강은지씨 호텔에서 만남. 강은지씨를 통해서 한국 대사관과 연락이 닿음.
7월 20일 - 작년에 관계를 맺었던 변호사 출신의 하이달이 방문함. 그에게 새로운 거처를 부탁함.
7월 22일 - 알 둘레이미 호텔의 비용이 너무 비싸서 거처를 임시로 바그다드 내 가라데 지역에서 거주하는 한상진씨의 사무실 겸 숙소로 옮김.
7월 25일 - 바그다드 내 안전한 곳으로 알려진 알 자밀레 주택 지역으로 집을 알아보기 위해서 움직임.
7월 26일 - 전직 이라크 원자력 연구소 직원이었던 아부 누리와 CWB 자원봉사자인 라켓이 이라크 지역의 방사능 누출에 대한 보고서를 가지고 찾아옴. 이에 문제를 공유하고 어떻게 이라크 지역의 방사능 누출 문제에 대해서 대처할지를 논의함.
8월 1 ~ 8일 - 정권이양에 대한 이라크 인들의 생각과 의견을 조사하기 위해서 현장조사를 실시함.
8월 초 ~ 미군과 쉬아파 저항세력의 교전 악화. 미군 나자프와 알 사드르 시, 중남부 도시를 포위하면서 학살 실행.
8월 13일 - 바그다드, 모슬, 나스리야, 팔루자, 나자프, 카르벨라, 바스라 등 이라크 전 지역에서 미군에 의한 쉬아파 학살에 반대하는 시위 발생,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쉬아파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자프로 이동해서 활동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물어봄. 대부분 불가능하다고 거절함.
8월 15~ 18일 - 내년 1월에 예정된 이라크 의회구성을 위한 선거를 치루기 위한 사전 준비모임격인 이라크 국민회의 개최됨, 나자프에 협상단 파견하였으나 협상실패. 나자프와 쉬아파 집단 거주 도시 내에서 계속 미군의 학살이 진행됨.
8월 20일 - 평화배움터에 대한 큰 골격을 살람과 함께 만들어냄. 알 사드르 지역 사람들과 접촉을 시작함.
8월 25일 - 이라크 방사능 누출 피해 조사를 위한 회의를 가짐. 역량이 미치지 않음을 인식하고 다른 큰 단체로 넘기거나 이라크 내 ngo를 결성해서 전담키로 함.
8월 27일 - 알 시스타니의 중재로 인하여 나자프에서 저항세력과 미군과의 평화안 체결, 하지만 그 외 지역에서는 계속 미군의 학살진행. 알 사드르 지역 출신 사람들과 만남을 가짐.
9월 3일 - 거처를 같은 호텔 3층으로 옮김. 알 사드르 지역 출신 사람들과 접촉을 함. 미군 나자프와 알 사드르에서 철군, 그 와중에 팔루자, 라마디 지역을 공습(空襲)함, 집 근처에서 두건의 폭탄 사고 발생.
9월 5일 - 알 사드르에 거주하고 있는 저항세력들과 만남을 가짐.
9월 6일 - 미군 다시 알 사드르 시내로 진격하여 치열한 교전 발생. 알 사드르 지역 사람들과 만남이 중단됨.
9월 7일 - 집 근처에서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는 이탈리아 반전 구호단체 bridge to baghdad 여성 활동가 두 명과 그들과 함께 활동하는 이라크인 두 명이 집 안에서 무장괴한 20여명에게 납치당함. 당일 밤 대사관에서 긴급 대피 요청을 함. 사태파악을 위해 거절함. 한상진씨는 대사관으로 대피.
9월 8일 - 살람과 하이달을 교대로 만나면서 대책을 논의함. 한시적으로 바그다드에서 활동하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는 판단으로 이라크 북부지역으로 대피하는 것으로 결정함. 또 다시 대사관에서 대피요청이 있었으나 거절.
9월 9일 - 대사관으로부터 주간(晝間)동안 활동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거처를 대사관으로 옮김.
9월 11일 - 이라크 한국대사의 명으로 주, 야간 출입통제 조치를 통보받음. 이에 거처를 안전한 곳(그린존)으로 옮기겠다고 항의했으나 묵살 당하였고 나가려면 국적을 포기하라고 종용받음.
9월 12일 - 대사면담, 최대한 활동을 자제하고 필요시 경호원을 대동하면서 움직일 테니 대사관 출입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함. 대사관에서 제공하는 음식물 거부하기 시작함.
9월 14일 - 대사관 문서기관, 이서기관으로부터 48시간 이내로 이라크를 나가지 않을시 이라크 이민국에 불법체류자로 신고해서 강제추방을 시키겠다고 통보받음. 한국 평화바닥 팀원들과 긴급회의를 가짐. 강제추방 시 향후 비자를 발급받지 못한다는 규정 때문에 암만으로 대피하기로 결정.
9월 16일 - 한상진씨 레바논으로 출국, 활동정리를 위해서 약속받았던 바깥출입 거부당함. 실질적으로 이라크에서 지속했던 활동들을 원만히 정리하지 못함.
9월 18일 - 바그다드에서 암만으로 이동(항공편), 살람도 암만으로 이동함(육로)
9월 21일 - 「평화배움터 - 전쟁지역 아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초안 작성
9월 22일 - 2차 이라크 현지보고서 작성
9월 23일 - 평화바닥 팀과 인터넷 회의, 한국으로 한시적 복귀 결정.
9월 25일 - 암만 출발
9월 27일 - 한국도착
2. 활동 내용
1) 현지 단체 CWB와 연대활동
이라크 현지인이 만들어서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CWB는 그 중심에 살람 가드반이 있었다. 그는 2003년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한국 NGO, 활동가들과 관계를 맺었고 전쟁이 끝나고서도 계속 한국 NGO와 인연을 맺어갔었다. 그러던 중 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 천주교평화연대 주선으로 2003년 8월, 한 달 간 한국을 방문해서 이라크의 상황을 한국에 전달하였고,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한국의 시민사회에 깊은 감명을 받고 이라크로 돌아간 후에 전쟁으로 망가진 이라크 사회를 자신들의 힘으로 복구시키기 위해서 2004년 3월 주위에서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라크 어린이들을 위한 NGO를 결성하였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벌려나갔다.(첨부문서 참조) 하지만 NGO의 경험이 전혀 없는 이라크에서 활동을 지속하면 할수록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그때까지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현(現)평화바닥(예전의 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 활동가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평화바닥 활동가인 이동화(필자)가 이라크로 가서 연대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현지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은 CWB의 현황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예상했던 바대로 CWB는 눈에 보이는 이라크의 수없이 많은 비극에 반응하고 있었다. 또한 단체의 사업들이 대부분 일회성 활동으로 그치고 계속 사업들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위에 많은 뜻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무언가를 하려 했지만 단체 내에 뚜렷한 목적과 단체 구성원들 간의 공유되는 바가 적어서 주위의 자원들(뜻을 지닌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이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현황을 파악한 이 후에 가장 먼저 활동했던 것은 단체 성원들 간의 공유할 수 있는 가치와 목적을 확립시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CWB가 왜 결성이 되어야 하는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결정해서 일단 내부에서부터 동의를 얻고 나아가서 주위에 알리는 작업을 해야 했다. 그리고 단체가 갖추어야 할 기초(단체의 목적, 가치, 원칙 확립, 정관 재구성)부분에 관한 문서화 작업을 동시에 실행했다.
당시 CWB는 이라크 내무부(the ministry of interior) 등록된 상태였고 내무부 산하 기관인 national democratic institute에 정식으로 정기회의에 참가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매주 1회 자체 회의를 가지면서 활동들을 점검하고 실행하고 있었다. 6월부터 그 회의에 참석을 하면서 CWB팀원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6월 중순, CWB 사무실 인근에서 발생한 폭탄공격으로 인하여 같은 빌딩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여러 NGO들이 한시적으로 활동을 접고 사무실을 폐쇄하기 시작하였고 CWB내에서도 사무실을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이유는 그 빌딩자체가 정부산하 건물이었고 저항세력의 표적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외국인인 내가 자주 출입을 했기 때문에 이라크 사회 내에서 높아져 가고 있는 반 외국인 감정으로 인하여 시간이 갈수록 빌딩자체가 공격받을 확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에 상시적으로 사무실에서 근무했던 리야드를 철수시키고 좀더 안전한 곳으로 사무실을 옮기려고 했고 알 만수르 지역과 알 후리야 지역에 있는 장소를 사무실로 이용하기 위하여 접촉을 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6월 21일 김선일씨 사태가 발생했고 살람과 나는 요르단으로 긴급대피를 했다.
7월 중순, 다시 바그다드로 돌아오고 나서는 개인 신변위협 때문에 바깥활동을 가급적 자제하고 거주하고 있는 곳에서 문서화작업에 치중하였다. 그동안 진행했었던 사업들은 대부분 유보를 시키거나 취소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올해 초 바그다드 내 알 투와이사 지역 학교 지원을 하면서 발견된 알 투와이사 지역 방사능피해에 관해서 구체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는 아부 누리라는 사람이 CWB 자원 활동가였던 라켓을 통하여 접근을 해 왔고 살람과 나는 이를 어찌 대처를 해야 할지 고민하였다.
그 분이 가지고 온 정보는 걸프전과 걸프전 이 후 미군의 공습으로 인하여 폭파된 원자력 발전소가 지금까지 가동하고 있고 이는 사담 후세인 때에도 심각한 방사능 오염피해가 발생했으며 지금도 그 계속 방사능이 유출되고 있어서 지역 사람들에게 직접 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토양과 인근 강인 유프라테스 강을 경유하여 이라크 지역 사람들에게 심각한 방사능 2차 오염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 번을 내가 거주하고 있는 곳에서 만나서 그의 설명을 들었고 그가 가지고 있는 피해보고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일에 대한 부담이 커지면서 방사능 피해 조사와 같은 작업은 CWB의 영역이 아님을 인식하였고 이 사안을 다른 큰 단체에 넘겨서 좀 더 세밀하게 작업을 해야 했기에 그 분에게 다른 외국인 단체를 소개 시켜주었고 더불어 자체 조직을 꾸려서 조사할 수 있게 NGO를 만들게 도움을 주었다.
8월, 나자프와 알 사드르 지역에서 미군에 의한 학살이 진행이 되면서 그 지역의 사람들을 접촉하였다. 그 지역의 상황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이었고 미군의 공습으로 인하여 아이들이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더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이라크의 어린 아이들도 총을 들기 시작했고, 높은 실업율로 인하여 아이들도 살아남기 위해서 거리로 구걸하거나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극히 좋지 않은 상황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러면서 평화배움터에 관한 생각들이 만들어져 가기 시작했고 이를 살람에게 타진을 하고 주위 이라키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9월 초에 대략적인 평화배움터 초안을 만들 수 있었고 이를 살람과 함께 합의해 냈다. 그리고 암만에 거주하면서 한국에 보낼 초안을 완성하고 한국으로 전송했다.
2) 현지 상황 한국에 알리기
현지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서 일지와 보고서를 작성하여 한국에 보냈다. 일지는 총 30여 회, 보고서는 1, 2차 현지 상황 보고서와 CWB 단체 현황보고서와 2편의 기고용 글을 작성하였다.
3) 한국, 이라크 아이들 서신 교류
이라크 아이들과 한국아이들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게 서로 간에 서신을 교류하는 제안을 바끼통에 했으며 바끼통으로부터 때 마침 이라크 어린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한통 받았다. 이를 영어로 번역하였고 이를 다시 살람이 아랍어로 번역하여 살람의 첫째 딸(도하)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도하에게 답장을 받으려 했지만 그 때에 이라크 주재 한국대사관에 몸이 억류되어서 더 이상 진행시키지 못했다.
3. 활동 정리 및 평가
1) 이라크 상황 정리 및 분석
6개월 만에 다시 돌아간 이라크는 너무도 많이 변해있었고 불행하게도 악화되었었다. (첨부 1 참조) 전쟁이 끝난 지 1년이 훌쩍 넘었지만 오히려 1년 전보다 더 악화된 전기사정, 높은 실업율, 치안의 부재 등은 이라크인들의 삶을 고통과 전쟁 속으로 몰아넣었다. 또한 올해 2월과 4월에 있었던 아부그래이브 교도소 사건과 팔루자 학살은 전쟁의 양산을 바꿔놓았다. 그동안의 산발적으로 저항했던 저항세력들이 그 사건 이 후 점차 조직화되기 시작했고 미군의 분노로 가득 찬 이라크인들이 이에 적극 합류하면서 그 세력은 늘어가고 튼튼해 졌다. 가장 뚜렷한 변화는 작년까지 그 세력이 미비했던 쉬아파 무장 세력인 몰타다 알 사드르측의 세력 강화였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가 미국 점령시작부터 계속 반미 무장투쟁을 외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동안 그의 무장 강경 투쟁노선에 동조하지 않았던 다수의 쉬아파와 일부 수니파들도 그 민병대에 가담하기 시작했고 직 간접적으로 호응하였다. 또한 이라크 인근 국가 출신의 이슬람전사들의 잇따른 외국인 납치와 참수 등은 이라크 내 사회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또한 이러한 납치와 참수, 외국인 정부와 기업, 국민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전략이 일부 국가와 기업들에게 성공을 거두자 이라크 내 반발감에도 불구하고 계속 진행이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대담해지고 치밀해졌다.
외국인과 자국민에 대한 납치는 초기에는 주로 일부 위험지역과 도로상에서 발생하였고 실제로 납치가 되었다 하더라도 미군과 점령당국에 관련이 없으면 풀어주었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러한 형태는 바뀌었다. 지금까지(2004년 9월) 약 110여명이 납치되었고 그중 40여명이 죽음을 당하였다. 이러한 외국인 납치와 참수 전략은 당분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라크 내부의 혼란도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의 상황은 이라크인들로 하여금 사소한 문제도 극단적 방식으로 해결하게끔 하였고 실재로 내부 치안을 담당해야 할 경찰과 군인은 자신들 안전을 지키기에도 급급한 실정이 되었다. 이러한 이라크의 사회가 끝이 안 보이는 혼란의 상황으로 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점령당국의 잘못된 통치에 있고 미군의 학살에서 연유하고 있다. (첨부 2 참조)
현재의 이라크 상황을 풀기 위한 가장 첫 단추는 점령군의 철수이다. 이 단추가 끼워지지 않고서는 절대로 이라크 평화라는 다음단계로 갈 수가 없다. 미군은 공개적으로 내년 이라크 총선 전까지 저항세력들을 소탕, 섬멸할 것이라고 공언했고 실제 10월이 시작되면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학살은 비밀에 붙이고 저항세력들의 일부 극단적 행위(외국인 납치, 참수)를 언론에 보도 하면서 자신들의 학살을 정당화 시키고 있다. 현재의 전쟁상황을 고착시키는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이라크 내부에서 제대로 된 언론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라크 한 지역에서 사건이 발생하여도 일부 아랍계 언론을 제외하고는 외국인 기자들이 접근할 수 없고 최근에는 사건을 취재하고 있던 아랍계 기자들 마저도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이라크에 거주하는 기자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우선시 하게 되고 실재 현장에 접근하지 못하고 이라크 임시정부에 발표하는 자료들과 미군이 발표하는 자료들을 받아서 그대로 본국에 전송하는 것이 이라크 뉴스의 대부분이다. 또한 이라크 현지의 3개의 방송사와 각 지역별로 종파별로 정당별로 발행하는 신문들이 있기는 하지만 방송사는 철저히 친미적이고 친 정부 쪽이고 신문들은 이라크 사회 내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이라크는 철저히 비틀어지고 왜곡되어져 전달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내년 1월 총선의 실행가능성도 의심하고 있다. 충분히 근거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미국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정치과정 속에 이라크를 끼워 맞출 것이고 현재의 군사작전도 총선 즈음해서 정치적 타협의 방식으로 변화시켜서라도 총선을 진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의 계획된 총선을 연기했을 때에는 그나마 미국과 이라크 임시정부와 한발 걸쳐 있는 온건 쉬아파 이야툴라 알 시스타니측의 엄청난 저항이 있을 것이 분명하기에 미국과 임시정부는 선거를 실시할 수밖에 없다. 그 때까지 미군과 점령군은 수니지역과 강경쉬아파 그룹의 소탕을 목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할 것이다. 이미 미군과 점령군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서 최후를 향해서 치닫고 있는 중이다.
2) 활동 정리 및 평가
① 변화된 환경, 불안한 치안 상황
2004년 2년을 계획하고 이라크에 재입국을 하면서 세웠던 활동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한 가지는 CWB와의 연대활동이었고 나머지는 전쟁피해여성을 대상으로 한 구술사 작업이었다. 결론적으로 계획했던 활동들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변화된 이라크의 상황이었다.
6월 초에 도착한 바그다드는 작년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절반은 같았고 절반은 달랐다. 같은 절반은 여전히 이라크 인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사회적 간접 시설은 복구가 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고 그 안에서 이라크 인들이 힘겹게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절반은 이라크 인들이 가지고 있는 절망과 분노가 한층 깊어졌다는 것이었다. 치유되지 않은 채 1년 이상 깊어지는 절망과 분노는 타인에 대한 적대감으로 변화되고 있는 중이었고 그러면서 외국인에 대한 반감과 납치로 이어졌다.
초기에는 이러한 분위기에 적응하면서 계획했던 활동들을 수정해 가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과의 만남도 한정될 수밖에 없었고 주위 친구들을 위해서 행동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가 알고 있던 그들은 여전히 친절했고 손님들에게 환대 했었다. 하지만 웃음 뒤에 숨겨진 그들의 두려움을 눈치 챘을 때 더 이상 그들을 작년처럼 편하게만 대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와중에 김선일씨 사건이 발생하였다. 김선일씨 사건은 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았다. 개인적으로는 납치에 대한 두려움도 생겼고 주변의 이라크 인들에게는 한국인과 같이 일을 했을 때 실재하는 위험을 인식시켰다. 암만으로 대피하였을 때 살람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활동을 많이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김선일씨 사건이 났을 때의 한국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또 한번 김선일씨와 비슷한 사건이 발생한다면 한국사회에 불어 닥칠 반 이라크 정서와 그에 따른 역풍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활동위주에서 신변안전 확보가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었으며 그 이후에 활동들을 장기적 관점에서 천천히 시행하는 것으로 수정하였다.
7월 중순에 다시 바그다드로 들어가서 가장 먼저 부딪친 문제는 거처의 문제였다. 김선일씨 사건이전까지는 바그다드 내 하이 알 자미에 지역의 살람의 친척집이었는데 안전상의 이유로 더 이상 그 곳에서 지낼 수가 없었고 안전이 보장되는 호텔에서 거주를 시작하였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서 오랫동안 지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찾아낸 고육지책이 바그다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상진씨 거처로 잠시 머무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계속 거주할 방을 찾아다녔지만 가격과 안전의 이유로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좀 더 문제가 되었던 점은 가격보다는 안전의 부분이었다. 친구 하이달의 도움으로 수차례 새로운 집을 다녔지만 나와 하이달이 만족할 만한 집이라 하더라도 주위의 다른 이라크 친구들을 다 만족시키진 못했다. 그 때도 우선 고려했던 것은 안전의 문제였다. 그러면서 8월을 보내고 9월이 시작되면서 한상진씨가 거처를 옮겨야 할 때 같은 건물 3층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그 곳은 새로운 집을 얻기 전이 임시거처로 여겼다. 그리고 9월 7일 인근에서 거주하고 있던 이탈리아 여성활동가 두 명이 집에서 무장세력에 의해 납치를 당했을 때 안전한 곳을 찾아서 대사관으로 대피하게 되었다. 당시 거처했던 곳이 나와 주위의 이라크 인들이 모두 만족할 만한 안전한 곳이었다면 대사관으로 대피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돌이켜 보았을 때 현지 활동을 위해서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것은 거처의 문제이다. 특히나 분쟁지역이거나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곳에서 최선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거처는 불가능하겠지만 활동가에게 심적 안정감을 주는 거처는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할 문제이다.
② CWB 와의 연대활동
주요하게 계획했던 활동이었지만 가장 불만족스러운 부분이다. 그만큼 기대가 컸기에 반성을 해야 부분도 많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 부분도 전체의 이라크 상황에 연관되어서 영향을 받았지만 연대활동의 미진한 부분을 모두 이라크의 불안한 상황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살람이나 CWB회원들이 가지고 있었던 나에 대한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한 점이 그렇다. 그들이 나에게 원했던 것은 돈이나 물질적 지원이 아니었다. 그들의 짧은 NGO 활동경험에서 기반 되는 불안감과 지속적인 활동을 하기 위한 연대활동이었고 이를 외국 NGO 출신이 내가 채워주길 바랬다.
처음 CWB사람들을 접했을 때 이들은 이미 팔루자 의약품 지급이나, 알 투와이사 지역 알 파탈 스쿨 지원을 진행하고 있었고 바그다드 지역 학교를 순회하면서 학부모, 선생님, 지역 교육담당자들이 함께하는 연속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아이디어들이 계속 나오고 있었고 그러한 아이디어 중에 무엇이 가능한지 타진하고 있었던 때였다. 하지만 당시 내가 했던 활동은 신중을 기하고 활동의 지속성을 위해서 여러 사업들을 중단하고 유보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 생각은 그동안 이라크와 같은 지원당사국 NGO의 관행(외부 펀드를 지원받아서 일을 진행시키고 펀드 유입이 끝났을 때 활동을 중단하는)을 막고 내부 결실을 다지면서 천천히 그리고 오래 활동을 지속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살람 이외의 다른 CWB회원들에게는 방해자로만 인식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들의 추진력을 끊어버리는 악역으로 치부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6월 15일 경 CWB 사무실 인근에서 미군의 차량이 저항세력의 공격으로 전소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이라크 젊은이들이 몰려들어서 불에 타고 있는 미군 험비차량 근처에서 춤을 추면서 환호했었고 이를 취재하려던 외국인 기자들에게 달려들어 당장 이라크를 떠나지 않을 시에는 죽이겠다고 했다. 이를 지켜본 살람과 CWB회원들은 불안감을 직접적으로 느꼈고 이는 CWB 사무실을 옮기자는 제안으로 이어졌다. 그 이전부터 정부 관공서나 경찰서는 공격을 대상이 되었었다. CWB 사무실도 TAHRIR(해방) 광장에 있는 예전 정부 건물이었기에 폭탄공격의 대상이었다. 그러면서 다른 장소로 사무실을 옮기고자 했지만 CWB 회원들 집이 다들 외곽이어서 쉽게 찾지 못했다. 그러면서 김선일씨 사건이 발생하였고 CWB의 핵심이었던 살람이 암만으로 나와 같이 대피를 하는 바람에 CWB와는 긴밀한 소통을 하지 못했다. 김선일씨 사건이전에 나왔던 신문발행, 연극 이라크 순회상연 등과 같은 일들은 시기를 놓쳤고 그 이후에는 특별한 사업이 없어서 정기회의 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면서 평화배움터에 대한 의견이 나와 살람을 통해서 제기가 되면서 다시 조금씩 활기를 찾기 시작했지만 초기의 그 활발함과는 약간 달랐다.
현재의 이라크의 많은 NGO들은 이라크 임시정부와 유착관계를 형성하고 미군측이 주관하는 사업이나 활동에 뛰어들고 있다. 더구나 이라크 NGO에서 발행하는 신분증은 이라크 사회내에서 신분을 증명하는 신분증 역할을 하고 있어서 일부 NGO에서는 돈을 받고 신분증을 발급하고 있다. 하지만 CWB는 등록은 되어있지만 그들 나름대로 미군과 관련된 사업, 그리고 정부가 주관하는 사업들에는 관여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이라크 어린이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려는 건강함을 지니고 있다. 특히나 팔루자 학살이 있을 때 학살 현장 안으로 들어가서 의약품을 전달하고 식량을 전달하여서 팔루자 내에서도 신망을 얻고 있다.
CWB가 가지고 있는 내부의 아쉬운 점은 살람에게 대부분이 집중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살람이 흔들리거나 거취가 변하면 CWB 전체가 휘청거린다. 물론 리야드와 바심이라는 젊은 상근자 둘이 있었으나 아직까지 내부의 동력은 부족한 듯 하고 이는 살람도 자주 이야기 했다. 이에 꾸준히 지속할 수 있고 CWB가 가지고 있는 목적에 적합한 사업이 있을 때에는 새로운 내부자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현재 CWB에 필요한 것은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들이 느끼기에는 자꾸만 주위에서 친구들이 떨어져 나가고 대신 적(이들에게 적은 너무도 명확하다. 미국과 미군, 그리고 점령국과 점령군)들이 예전 친구들이 대신했던 일 속으로 들어와 대체하고 있다. 정치적 입장과 생각이 단체의 전부를 덮기는 않기에 필요시 이라크 임시정부나 미군에서 나오는 펀드를 받아서 사업을 진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CWB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이라크는 이라크인에 의해서 재건이 되어야 하고 그 명제는 너무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를 이루는 방법은 다양할 것이고 전쟁상태로 붕괴된 이라크 사회를 조금이라도 복구하기 위해서는 건강성을 지닌 단체와 연대를 해야 할 것이다.
③ 이라크 소식 알리기, 어린이 서신 교류
계속 악화되어가는 이라크의 사정과 한국에서 보도되는 선정적이고 점령국의 시각이 반영된 이라크 소식을 접하면서 현재 이라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특히나 8월부터 시작된 미군과 점령군의 저항세력 섬멸, 소탕 군사작전은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학살의 현장이 벌어지는 곳으로 접근을 할 수가 없었고 밖으로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기 때문에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소식을 기민하게 전달 할 수가 없었다. 또한 소식을 알리는 것에 대한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을 때 기자의 정체성보다는 잘 알지도 못하는 활동가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자기 만족적 대답이 있어서 소식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계획했던 활동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현재의 이라크 소식은 온통 비틀어져 있다. 그 안에 일반 이라크 민중들이 생각과 목소리는 없다. 있다면 미군의 기자회견이나 이라크 임시정부의 발표뿐이다. 더군다나 자이툰 부대가 이라크에 완착한 후에는 한국의 예비 학살자들에 대한 동정이 주를 이루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라크 민중들이 약간의 편차는 존재할 지라도 한국의 군인들에 대해 전혀 동정을 하지 않고 그들의 주둔에 분노해 하고 증오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냈기 때문에 이제는 그들의 안전을 걱정해야 한다는 그러한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하루라도 빨리 그들을 한국으로 돌려보내야 함에도 이는 소수의 의견이 된듯하다.
앞으로 살람을 통하여 일주일에 한번 내지는 이 주일에 한번 이라크의 소식을 받기로 했다. 물론 여러 한계가 존재할 것이다. 살람의 생각과 시각이 많이 반영이 될 것이고 뉴스의 전달보다는 칼럼과 같은 소식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라크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들의 의견과 사고를 아는 데에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가능하다면 젊고 유능한 기자출신의 이라크인과 연결을 취해서 그(들)에게 소식을 받는 것으로 일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이라크 어린이들과 한국 어린이들 간의 서신교류는 개인적으로 무척 중요한 사업이라 생각했고 이라크에 들어오기 전부터 바끼통(http://cafe.daum.net/gibumiraq)과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논의하면서 양국의 어린이들 간에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교류를 했으면 했기에 한국 어린이들의 편지는 바끼통으로부터 받고 이것을 이라크 어린이들에게 전달을 하려 했다. 7월에 다시 이라크에 들어가서 바끼통 운영자인 프랭스에게 제의 메일을 보냈고 그러면서 서신 교류는 시작되었다. 마침 한국의 익명의 어린이로부터 편지를 한통 받았고 이를 영어로 번역해서 살람에게 넘겨주었고 살람은 그걸 아랍어로 번역해서 자신의 첫째 딸인 도하에게 건넸고 도하로부터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과정이 거의 한달 정도 걸렸다. 작년 같은 경우라면 이라크 어린이들과 함께 지냈기 때문에 이번의 경우보다 훨씬 빨리 할 수 있었을 텐데 일단 움직이는 것이 한정되다보니 이라크 어린이들을 만나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쉽게 여기고 시작하다가 의외로 많은 시간이 투여된다는 것을 알았고 하지만 이는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꼭 필요한 일이기에 계속 지속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4. 향후 계획
1) 평화배움터 사업
평화배움터의 시작은 김선일씨 사건 이후 암만에서 살람과 같이 지내면서부터였다. 암만에서 약 2주간 살람과 한방에서 같이 지내면서 살람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나는 무엇을 하고 싶고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을 때, 그동안의 경험(알 마시텔 공부방, 그리고 살람이 했었던 다르 알 하난과 알 누리 장애인 시설의 지원)들로 인하여 쉽게 새로운 사업을 벌이기를 주저했을 때 그리고 한국과 이라크의 시민단체가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을 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생겨났었다. 살람과 CWB 회원들 아니 이라크 어린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을 지니고 있는 이라크인들은 대부분 전쟁 문화 속에서 자라날 이라크 어린이들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고 이를 풀어낼 교육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살람의 주장에 적극 공감을 하였다. 하지만 이를 어떻게 현실화시켜낼 것인지? 특히나 예산에 대한 부분들, 작년에 경험했던 알 마시텔의 기억들, 또 책임지지 못할 부분을 벌리고 이로 인하여 한국과 이라크 사람 두 쪽에 다 상처만을 남기는 것은 아닌지? 등등의 주저와 두려움은 떨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 평화배움터가 이라크 평화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전쟁을 반대하는 활동과 연관이 있는지? 이러한 질문들도 내부에서 계속 있었다.
8월 나자프와 이라크 중부도시, 그리고 바그다드 내 최대 빈민가 알 사드르 지역에서 미군과 점령군에 의한 학살이 진행이 될 때 어떻게든 그 학살에 저항을 하고 싶었고 막고 싶었다. 온 몸으로라도 그 곳에 가서 아이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러면서 계속 이라크의 아이들의 모습들을 보았다. 갈수록 많은 아이들이 거리로 나와서 행상을 하거나 구걸을 했다. 알 사드르 지역의 아이들이나 미군의 폭격이 계속되고 있는 팔루자나 라마디 지역의 아이들의 사정은 더욱 심했다. 학교는 폭격으로 파괴되고 놀이터는커녕 집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면서 집 안에서 분노와 증오만을 키우고 있었다. 내가 이러한 아이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8월 하순부터 알 사드르 지역의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그동안 알 사드르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들었다.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가슴이 많이 아프면서 화가 치밀었다. 귀로 듣고 있는 나도 이렇게 화가 나는데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는 그들은 얼마나 분노를 할지 상상할 수 있었다. 이들은 당연히 총을 들고 길가에 나가서 싸울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그 지역의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지?
이렇게 알 사드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많은 질문들과 주저함은 해야한다라는 생각으로 바뀌었고 그러면 어떻게 현실화를 시킬 지로 주제는 넘어갔다. 살람과 작년에 관계를 맺었던 이라크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고 그들의 생각을 물었다. 그들은 모두 다 적극 찬성했고 자신들이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적극 돕겠다고 했다. 작년에 이라크에 공부방을 열었다가 올해 운영상과 안전상의 이유로 문을 닫았던 경험이 있는지라 그러한 경험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초안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데 투여했다. 그리고 다시 암만으로 나왔을 때 초안(첨부 5 참조)을 만들었다. 많이 허술하고 부족하다. 많은 고민을 했다하더라도 살람과 둘이서 만든 초안인지라 한계가 너무 많았다.
평화배움터가 현재의 이라크 전쟁 상황을 해결하는데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아마도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성과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라크 평화활동보다는 이라크 재건 활동에 더 가깝다. 하지만 이는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그 씨앗이 자라서 커다란 평화의 나무가 될지, 피어나지도 못하고 땅속에 그냥 묻혀버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는 또한 씨앗을 준비하는 자들의 몫일 것이다.
평화배움터의 정체를 거칠게 정리하면 전쟁 진행지역에 아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또한 평화와 관련된 공부를 같이 하자는 것이다. 아마도 가장 난관이 예상되는 부분은 평화와 관련된 공부라고 생각한다. 평화는 보편적이기도 하지만 또한 상대적일 수 있다. 평화에 대한 답은 완성형이라기보다는 진행형일 것이다. 전쟁과 폭력, 죽음과 고통이 없는 상황을 바라는 이라크 사람들과 한국의 사람들이 같이 끊임없이 찾아야 하는 화두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실마리를 평화배움터가 마련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2) 준비해야 할 것들
초기의 적응기간, 김선일씨 사건, 암만 생활, 재입국, 나자프학살, 이라크 전 지역에서의 전쟁 심화, 한국군 파병, 이탈리아 활동가 납치, 대사관내 억류....... 이 속에서 나는 평화배움터에 대한 초안을 만들었고 그에 대한 활동을 시작할 것이다. 상황이 호전되었을 때 다시 이라크에서 활동할 수 있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정리해 본다.
① 명확한 활동계획
현지의 사정은 항상 예측불허이다. 특히나 분쟁지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건, 사고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는 명확한 활동계획을 세우고 이를 수시로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장기, 단기 계획을 구분해서 세우고 실행해야 한다.
② 튼튼한 네트워크 구성
김선일씨 사건이 터졌을 때 현지와 한국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다. 중간에 연락이 끊기기도 해서 양측에서 답답하고 불안해했던 것도 사실이다. 개인 활동이 아닌 팀활동의 일환으로 분쟁지역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현지 활동가와 모국 팀간의 튼튼한 네트워크는 필수이다.
③ 활동 원칙 구성
분쟁지역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상황들에 대한 원칙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해외의 큰 구호단체의 경우에는 돌발상황에 대해서 나름의 원칙이 있어서 상황에 맞게 활동들이 체계적이고 통일적으로 수행된다. 어떠한 상황에서는 활동을 고수해야 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는 활동을 접고 철수를 해야 하는 원칙들이 필요하다. 물론 모든 상황을 다 예측해서 원칙을 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김선일씨 사건이나 대사관의 사건에서 미루어 볼 때 현지활동가와 팀간에서 우왕좌왕했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현지 상황 변화에 따른 팀의 원칙이 꼭 있어야만 하고 이에 근거해서 활동을 해야 불의의 사고를 방지할 수 있고 혼란을 막을 수 있다.
④ 지속적인 재정 확보
이번 이라크 활동은 이라크 현지 물가 변동으로 인하여 예상했던 재정보다 많은 재정이 필요로 했다. 최소한의 재정이 확보되지 않을 경우에는 현지 활동가가 스스로 위험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
앞에서 열거한 것은 분쟁지역에서 활동하려는 조직의 일반 원칙들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계획이 평화배움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면 좀 더 세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먼저 평화배움터를 장기적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그룹을 만들어야 한다. 단순한 전쟁피해 복구 차원의 활동을 넘어서 전쟁지역에서 평화를 실천할 수 있는 교육과 활동을 원하는 개인과 조직들을 묶어내야 한다. 사실 한국군 파병이 끝난 이 후 한국 사회 내에서 이라크에 대한 관심은 많이 떨어진 상태이고 전쟁반대와 점령반대, 파병반대를 외쳤던 조직들과 개인들이 많이 지쳐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지금 분위기에서 그룹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평화배움터는 한 단체나 특정 개인들로 구성이 되어서는 제대로 실행하기 힘들다. 재정도 문제이겠지만 배움터 안을 채울 평화 교육은 뚜렷한 종착역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럿이서 같이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돌아와서 그룹이 구성되어지면 구체적인 계획을 만들어서 진행시키고 각 개인이나 단체가 하고자 하는 다른 아이디어를 소통시켜 현실 가능한 사업들을 준비한다. 그리고 상황이 호전되고 여건이 나아지면 현지 활동을 시작하면서 평화배움터의 진행과정을 점검하고 이를 한국에 전달한다. 그리고 현지에 사무소를 개설하고 반전, 반 점령 활동을 시작해야 한다.
5. 정리하며
올해 6월 다시 이라크로 돌아가려 할 때 주위에서 많은 우려를 하였고 반대도 많이 했다. 그 이유는 활동가들이 현지에 가면 일부 범죄집단에 의해 납치될 가능성이 너무 크고 만약 납치가 되었을 때에는 활동가의 안전뿐만 아니라 한국인에게나 이라크인에게도 모두 안 좋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타당한 이유이다. 여전히 이와 같은 상황은 진행 중이고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판단된다. 다시 현지에서 활동하기 위해서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상황이 호전된 후에 현지로 들어가서 활동을 한다. 둘째는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현지로 들어가는 경우일 것이다. 둘 다 스스로에게 명확한 정당성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솔직한 지금의 심정이다. 계속 고민을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현지에 있는 이라크 인들에게도 의견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판단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순간에도 미국 정부와 그의 동맹국 정부는 이라크 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고 이라크 인들은 그들을 상대로 저항하고 싸우고 있다. 또한 전쟁이 만들어 가고 있는 최악의 사회와 문화 속에서 삶을 지속하고 있다. 시기가 언제일지는 당장 판단할 수는 없지만 전쟁의 고리를 끊고 전쟁이 만들어내는 비극과 고통을 기억하고 알려야 한다. 왜 전쟁을 막아야 하고 종식시켜야 하는지를 점령, 가해 집단의 시각이 아닌 피해집단의 시각으로 알려야 한다. 그리고 한국 민중과 이라크 민중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연대의 활동을 조직해 내야하고 무엇보다 이라크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가져야 한다. 이러함이 그동안 이라크에서 보고 들었던 기억에 대한 대답이고, 계속 이라크 현지에서 활동을 하려는 내 내면의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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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라크 현지 1차 보고서 2. 이라크 현지 2차 보고서 3. 이라크 주권이양에 따른 이라크인들의 이야기 4. CWB 활동보고서(2004년 6월 이전까지)와 CWB 정관 5. 평화배움터 제안서 6. 현지활동비 결산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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