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현대 '김창열 화업 50년'전, 회고 미공개 작품 다수 출품 29일부터 한달간 50년 예술 인생 "너절하지 않았던 화가로 기록되고 싶다"
박종진 기자
'물방울'(1985)
물방울 화가 김창열(84)의 '화업 50년'전이 8월 29일부터 9월 25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김 화백의 초기작부터 근작까지 전 시대 작품을 망라해 선보인다.
물방울 연작이 시작된 1970년대 초ㆍ중반부터 98년 작품까지가 전시되는 본관에서는 작품의 완성도가 가장 무르익기 시작했던 시기의 걸작을 만날 수 있다. 특히 그동안 국내 대중에게 거의 공개된 바 없던 작품이 다수 출품돼 기대를 모은다.
2000년대 이후부터 올해까지 김 화백의 근작들은 신관에서 마주할 수 있다. 90년대 이전에 비해 더 화사하고 여유로워진 작품들에선 최고의 경지에 오른 노 화백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제 물방울은 김 화백의 모든 것, 자신이 되었지만 그 출발은 상처에서 움텄다. 물방울이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닌 삶의 한 부분으로 다가왔던 것. 김 화백은 물방울이 젊은시절 '상흔(傷痕)'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내가 만 스무살일 때 6ㆍ25 사변이 일어났는데 중학교 동창 120명 중 60명이 죽었어. 그 상흔이 내 생에 큰 영향을 주었지. 처음부터 물방울을 그린 것은 아니야."
김 화백은 상흔을 총알 맞은 살갗의 구멍이라고 생각하고 그렸다고 한다. 그 상흔은 미국에서는 공이나 구체(球體)로 대체됐고, 4년 후 파리에서는 녹아내려 점액질로 변했다.
"그때 점액물질이 답답해 보여 투명한 물이 되면 어떨까 하고 캔버스를 뒤집어 물을 뿌렸는데 크고 작은 물방울들이 햇빛에 비쳐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어. 온 몸을 떨게 한 것이 여태까지 오게 됐지."
김 화백의 이번 전시는 50년 화업을 회고하는 개인전이지만 한국 현대 회화의 근원과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김 화백은 서울대 미대를 중퇴하고 박서보, 정창섭 등과 한국의 앵포르멜 미술(art informel, 무정형미술) 운동을 이끌었다.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1968년까지 미국 아트 스튜던트 리그(Art Students League)에서 수학하면서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활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김 화백은 1969년 백남준의 도움으로 파리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여하고, 이를 계기로 뉴욕을 떠나 파리에 정착했다. 거기서 그는 조각가 문신의 마굿간 화실을 한동안 함께 쓰며 가난한 예술가의 생활을 이어나갔다.
김 화백은 1972년 파리의 권위있는 초대전 살롱 드 메(Salon de Mai)전에서 물방울 그림인 'Event of Night'으로 본격적으로 데뷔한 이후 물방울을 소재로 다양한 세계를 펼쳐갔다.
80년대 캔버스가 아닌 마대의 거친 표면에 물방울을 그렸는가 하면 90년대 '회귀'시리즈를 통해 천자문을 비롯한 한자를 배경으로 한 물방울로 시공을 초월한 조화로움을 표현했다. 2000년대 들어선 적극적인 색채의 변주를 보여줬다.
요즘도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작업을 하는 김 화백은 제주도에 건립되는 '김창열 미술관'에 마음을 쏟고 있다. 6ㆍ25 때 1년 여간 피난생활을 했던 제주도와 미술관 건립을 전제로 작품 200점을 기증키로 했다.
21일 갤러리현대에서 만난 김 화백은 "어떤 화가로 기록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너절하지 않은 화가"라고 답했다. 잠깐 영롱했다 이내 자국만 남기고 사라지는 물방울 같은. 그의 인생을 말하는 듯했다.
문득 2009년 3월 부산에서 만난 김 화백에게 물방울의 의미, 상징에 대해 물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 때도 김 화백은 유사한 답을 했다.
"나의 존재성이라고 할까, 서양과 다르고 남들과도 다른 나만의 것…. 불교의 공(空)이나 도교의 무(無)와도 통하지. 모든 물체가 존재했다 사라지는…자연의 섭리라고도 할 수 있지."
김 화백에게 물방울은 '존재와 무',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삶의 본질이자 자연의 섭리인 셈이다. 이번 전시는 그런 김 화백과 물방울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극명하게 전하고 있다. 02)2287-3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