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된 후 유스티니아누스는 신분이 아닌 능력으로 인재를 선발함으로써 오랜 황실과 귀족의 부정부패를 일소하였고 귀족계급을 견제하는 데 성공하였다. 황제 즉위 초기에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530년 다라의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과 싸워 승리했으나 531년 유프라테스 강가의 칼리니쿰의 전투에서 완패하고 영구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때 맺은 강화로 동쪽 변방의 안전을 확보하고 과거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점령하고 있던 아리우스주의 게르만 족과의 전쟁을 준비하였다. 그리스도인 황제로 그는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를 회복하는 데 큰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본인이 직접 군사 원정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벨리사리우스, 나르세스 등 우수한 장군을 등용하여 옛 로마 제국의 영토를 많이 회복하였고 특히 이탈리아 반도 본토를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불가르족과 슬라브족의 침입을 막아내었고 특히 북아프리카에서 제국의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그는 정력적으로 일하는 황제여서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하며 수많은 개혁을 단행하였다. 특히 세 차례에 걸쳐 로마법을 집대성하고, 신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단성론 문제로 동방 정교회와 대립하기도 하였으나, 교회의 교리와 이론을 정리하였다. 특히 그는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정비하여 하기아 소피아를 건축하는 등 위대한 건축 사업을 벌였다.
로마법의 집대성은 이미 한세기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시도하여 《테오도시우스 법전》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테오도시우스의 법전에서 한 걸은 더 아나가 완전히 새로운 법전을 만들고 체계화 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529년 트리보니아누스를 법무관으로 임명하고 그의 지휘 아래 특별위원회를 만들었고 이 위원회에서 일련의 과정을 거쳐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했다. 법전의 일부를 소개한다.
바다와 바닷가는 모든 사람의 소유이다. 나의 제국의 모든 사람은 누구나 마음 놓고 바닷가에 나갈 수 있다. 아무도 "여긴 내 땅이야! 나가!"라고 말할 수 없다. 강은 모든 사람의 소유이다. 나의 제국의 모든 사람은 누구나 강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 아무도 그것을 막으면 안 된다. 바닷가에서 파도에 실려 온 보석이나 값진 재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가져도 된다. 노예를 소유하고 급료를 주지 않고 부려도 된다. 그러나 노예가 주인에게 덤비지 않는 한, 때리거나 학대할 수 없다.
이러한 입법사업은 옛 로마법의 재흥을 의도한 것인데, 시대의 요청을 받아들여 법조문의 자구(字句)가 수정되어 있다. 이 대작은 16세기 이래 로마법 대전(Roma법 大典 : Corpus Juris Civilis)이라고 불리웠다.
종교적인 면에서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가 되기 전부터 삼촌 유스티누스를 도와 484년부터 시작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을 종식하는 데 힘썼다. 519년 3월 교황 호르미스다스의 사절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여 양 교회의 분열을 끝냈을 때 유스티니아누스의 도움이 컸다. 이렇게 서방 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다.
황후 테오도라는 548년에 죽었지만 그는 그 후로 17년 동안 더 살았다. 아내가 죽은 이후 그는 종교적인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통치를 소홀히 하였다. 특히 벨라사리우스 같은 유능한 장군을 시기하고 의심을 하여 박해를 가하기도 했다. 565년 11월 14일 유스티니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서거하였으며,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제위는 여동생의 아들이자 테오도라의 질녀인 소피아와 결혼한 유스티누스에게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