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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이 백제에 의해 함락되자, 고구려는 신라의 요청으로 신라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진흥대왕은 맹약을 어기고 동쪽 변경을 기습하여 남가슬라부터 길림 동북까지 차지했다. 그러자 고구려는 할 수 없이 전쟁을 일으켜 비열홀(지금의 안변 이북)을 회복했다. 하지만 장수태왕이 점령하고 안장왕 이후에 재점령한 계립령(지금의 조령1)) 이서 지방과 죽령 이서 지방에 있던 나머지 고토는 끝끝내 찾지 못했다. 신라인들은 군사작전의 최대 요새인 북한산을 차지한 뒤로 ‘이 땅을 길이 갖자’는 뜻으로 〈장한성가(長漢城歌)〉2)란 노래를 지어서 불렀다. 이러니 고구려인들이 어찌 가슴 아프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고구려는 거의 매년 병력을 동원하여 신라를 침범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 평원왕이 사랑하는 사위인 온달의 비극적인 전사가 일어났다. 당시의 시인과 문사들이 이 일을 이야기하고 이두로 기록하여 사회에 전파하니, 일반 고구려인들의 적개심은 한층 더 강해지고 신라와의 평화는 길이길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제 기존 역사서에 실린 온달 이야기를 서술하고자 한다.
온달(옛 발음은 ‘온대’니, 백산(百山)이란 뜻)은 얼굴이 울룩불룩하고 성씨도 없는 거지였다. 거지이기는 하지만 마음만은 시원스러웠다. 집에 눈이 안 좋은 노모가 있어서 그는 항상 밥을 빌어 노모를 공양했다. 그 외에는, 하는 일 없이 거리를 오락가락했다. 가난하고 천한 사람을 없이 여기는 것은 어느 사회나 똑같다. 그래서 바보도 아닌 온달을 누구나 다 바보 온달로 부르게 되었다.3)
평원왕에게는 따님이 하나 있었다. 어릴 때 너무 질기게 울어대자, 평원왕은 사랑하는 마음에 실없는 말로 “오냐 오냐, 울지 마라. 우는 것을 좋아하면, 너를 귀한 집 며느리로 주지 않고 바보 온달의 여자로 만들겠다”며 달랬다. 평원왕은 딸이 울 때마다 그렇게 말했다. 이 따님이 성장해서 시집갈 나이가 되자, 평원왕은 상부(上部) 고씨와의 혼사를 추진했다. 그러자 따님이 이런 말로 반대했다. “아버지는 항상 저에게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와서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면, 그 말씀이 거짓말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죽더라도 바보 온달에게 가서 죽겠습니다.” 평원왕은 대노하여 “너는 만승천자(萬乘天子)4)의 딸이 아니냐? 만승천자의 딸이 거지의 여자가 된단 말이냐?”라고 말했다. 그래도 따님은 듣지 않고 “필부도 거짓말을 해선 안 되는데, 만승천자가 어찌 거짓말을 하리이까? 저는 만승천자의 딸인 까닭에 만승천자의 말이 거짓말이 안 되도록 온달에게 시집가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평원왕은 어찌 할 수 없어 “너는 내 딸이 아니니, 내 눈 앞에 보이지 말라”며 쫓아냈다.
궁에서 나올 때에 따님은 다른 것은 가진 게 없었다. 그저 보물 팔찌5) 수십 개를 팔뚝에 차고 나왔을 뿐이다. 벽이 다 무너지고 네 기둥만 우뚝 선 온달의 집을 그는 찾아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온달은 어디갔는지 없고 노모만 있었다. 노모 앞에 절하고 온달이 간 곳을 물어보았다. 노모는 눈은 안 보이지만 코가 있어 귀여운 따님의 향내를 맡고, 귀가 있어 아리따운 미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노모는 솜 같이 보드랍고 고운 손을 만지면서 “어디서 오신 귀한 처녀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째서 빌어먹고 헐벗는 내 아들을 찾으십니까? 내 아들은 굶다굶다 못해 산에서 느티나무 껍질이나 벗겨 먹으려고 나가서는 아직까지 안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따님은 온달을 찾아 산 밑으로 갔다.
산 밑에서, 느티나무 껍질을 벗겨서 갖고 내려오는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이 온달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름을 물은 뒤에 자기가 찾아온 이유 즉 결혼에 대한 회포를 털어놓았다. 온달은 ‘부귀한 집의 예쁜 딸로 태어나 가난하고 천한 걸인을 서방으로 구할 이유가 있으랴’라고 생각하고 “너는 사람 홀리는 여우나 도깨비다.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해가 지니까, 네가 내게 덤비는가 보다”라고 소리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섰다. 그러고는 사립문을 꽉 닫아걸고 나오지 않았다.
따님은 문 밖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다시 들어가서 간청했다. 온달은 어찌 대답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기만 했다. 노모는 “내 집 같이 가난한 집이 없고 내 아들 같이 천한 사람이 없는데, 그대는 일국의 귀인으로서 어찌 가난한 집에서 서방을 섬기려 하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따님은 “종잇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니, 마음만 맞으면 가난하고 천한 게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는 팔찌를 팔아 집이며 밭이며 논이며 하인이며 소며 기타 모든 것을 샀다. 빌어먹던 온달은 하루아침에 부자가 됐다.
따님의 목적은 온달을 한갓 부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온달에게 말 타기와 활쏘기를 배워야 하니 말을 사오라고 했다. 당시는 전쟁의 시대였기 때문에, 고구려에서는 마정(馬政)을 매우 중시했다. 왕의 마구간에 있는 말은 국마(國馬)라 하여 잘 먹이고 잘 기르며 화려한 굴레를 씌웠다. 대왕이 말을 타다가 다치면, 말먹이꾼과 마부에게 죄를 물었다. 그래서 말먹이꾼과 마부들은 날래고 건강한 말이 있으면 일부러 굶기고 때려서 병든 말로 만들어버리곤 했다.6) 따님은 구중궁궐의 처녀이기는 했지만 이런 폐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을 사라고 심부름 보낼 때 온달에게 “시장에서 파는 말을 사지 말고, 버리는 국마를 사오세요”라고 시켰다. 따님이 직접 말을 먹이고 다듬으니, 말은 날로 살찌고 튼튼해졌다. 온달의 말 타고 활 쏘는 기술도 날로 진보하여, 유명한 선생이나 고수들도 온달을 따라잡을 수 없게 되었다.
3월 3일 신수두 대축제가 열렸다. 이때 열린 사냥 시합에 온달이 참가했다. 온달은 기마 실력도 탁월하고, 사냥으로 잡은 짐승도 가장 많았다. 평원왕이 불러서 이름을 물어보자, 온달이라고 답했다. 평원왕은 크게 놀랐지만, 따님에 대한 분노가 아직 풀리지 않은 터라 온달을 사위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당시 북주(우문씨 왕조) 무제가 중국 북부를 통일하고 위세를 과시했다. 그러더니 고구려의 강성을 시기하여 요동을 침공했다.7) 이산(肄山)8) 들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누군가가 홀로 용감하게 싸우는데, 칼질이 능수능란하고 활쏘기도 신묘했다. 그가 수백 명(〈온달 열전〉에 따르면 수십 명_옮긴이)의 북주 병사들을 베는 것을 보고 알아보니 바로 온달이었다. 왕은 감탄해서 “이건 참으로 내 사위다”라며, 온달에게 대형(大兄)을 제수하고 극진히 총애했다.
훗날 영양왕이 즉위했다. 온달은 “계립령(조령_옮긴이)과 죽령의 이서 지방은 본래 우리 고구려의 영토였습니다. 신라에 빼앗긴 뒤로 그 땅 인민들은 늘 통한으로 여기고 부모의 나라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저를 어리석다 하지 않으시고, 군대를 내주시면 한 걸음에 그 땅을 회복하리이다”라고 아뢰었다. 영양왕은 허락했다. 출정하기 전에 온달은 군영에서 “신라가 한수 이북의 우리 영토를 빼앗았다. 만약 이번에 이것을 회복하지 못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아니하리라”라고 맹세했다. 그는 아차성(지금 경성 부근 광나루 옆의 아차산)9) 아래서 신라 군대와 접전을 벌이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고구려 병사들은 돌아가서 장례를 치르려고 온달의 시신을 영구에 넣었지만, 영구가 땅에 꽉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따님이 직접 와서 울며 “국토를 못 찾고 임이 어찌 돌아가랴. 임이 아니 돌아가는데, 이 첩이 어찌 홀로 돌아가리오” 하고 졸도한 뒤 못 깨어났다. 그러자 고구려인들은 따님과 온달을 그 땅에 함께 묻었다.
영구가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온달의 영구를 갖고 돌아가려 할 때, 장례를 주관하는 사람들이 온달이 “계립령과 죽령 이서가 고구려로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돌아오지 아니하리라”라고 하던 말이 생각나 온달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에 감동해서 차마 영구를 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심정을, 영구가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 같은 상황으로 표현한 것이다.
《삼국사기》 〈온달 열전〉의 끝부분에서는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삶과 죽음이 결판났으니, 아아 갑시다’라고 하자 비로소 (관이) 들리고 하관하게 됐다”고 했다. 그러나 만일 공주가 ‘삶과 죽음이 결판났다’는 말만 하고 울었다면, 공주가 국토에 대한 열정도 없었을 뿐 아니라 남편에 대한 애정도 박약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또 온달의 영구가 그 말에 움직였다면, 온달은 국토의 회복을 위해 죽은 게 아니라 상사병에 걸려 죽은 것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말을 사서 온달을 가르친 공주의 노력은 무엇이 되고, 안온한 부귀를 버리고 전쟁에 나선 온달의 진심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조선사략》에 따르면, 공주는 “‘국토를 아직 수복하지 못했으니 공께서 어찌 귀환하시겠습니까? 공이 귀환하실 수 없으니 첩이 어찌 홀로 귀환하겠습니까?’라고 말하고 한 차례 통곡한 뒤 졸도했다. 고구려인들은 공주를 그 땅에 함께 묻었다”고 했다. 물론 《조선사략》은 시간적인 거리로 보면 《삼국사기》보다 신빙성이 낮지만, 위의 문구만큼은 전쟁시대의 분위기에 부합하므로 이 책에서는 《조선사략》을 채택하기로 한다.
정약용·한진서 선생은 “신라가 한수 이북의 우리 영토를 빼앗았다”는 온달의 말을 근거로 고구려가 한수 이남을 차지해본 적이 없었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계립령과 죽령의 이서 지방은 본래 우리 고구려의 영토”라는 온달의 말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고구려가 장수태왕 때의 몇 년 동안과 안장왕 이후의 몇 해 동안에 한수 이남을 점령했던 것은 명백하다. 온달이 말한 ‘한수’는 지금의 한강이 아니라 양성의 ‘한래’다.
몇 해 전에 일본인 이마니시 류는 북경대학에서 조선사를 강의할 때 〈온달 열전〉을 실제 역사로 볼 만한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정말 무식한 말이다. 온달의 죽음을 계기로 고구려·신라 동맹의 길이 끊어지고 백제·고구려 동맹이 성립하여 삼국 흥망의 새로운 국면이 열렸다. 이런 온달에 관한 기록을 남긴 〈온달 열전〉은 삼국시대의 몇 안 되는 글이다. 김부식의 가감삭제를 통해 사료의 가치가 어느 정도 줄어들었으리라는 점은 역사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