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도
요한 선교회에서 가을 나들이로 칠천도를 갔다. 가면서 가덕도 일본군 포진지에 들렀다. 지난해 봤지만 소희집 회무침 점심이 좋아 또 찾았다. 1백여 년 전 일군이 노일전쟁 때 발틱함대를 격파하고 미군 공격에 대비 해안 기슭에 굴을 파 포대를 숨겨놨다. 시에서 절벽 높이까지 다리를 놓아 굴속을 쉬 볼 수 있게 했다. 안전 통로를 내고 조명을 만들었다. 대포 모형과 대구 입모습으로 입구를 장식하고 강제 작업 인형을 만들어 세웠다.
별로 볼 게 없는가 간다 안 간다. 하다가 칠천량 해전공원으로 핸들을 꺾었다. 거제도 서북쪽 작은 섬에 들어섰다. 배 타고 건너던 곳이고 다시 한참 가는 작은 섬이다. 이젠 바다를 가로지른 거가대교 웅장한 사장교에다 반은 침매터널을 깔아 잠깐 사이 다다랐다. 다 근사한 다리를 놓아 배는 무슨.
평화로운 조용한 어촌 마을이다. 어디에도 해전을 한 흔적이 없다. 배들이 물에 빠져서인가 파도만 찰랑찰랑하다. 잔잔한 섬들로 둘러싸였다. 11월 말 아직도 단풍이 덜 들었다. 조금 쌀랑한 날씨로 어디 조총 든 왜선이 나타나나 바다만 내려다본다. 씨릉섬 출렁다리를 건넜다 오면서 바닷속을 들여다보며 어디 가라앉은 거북선이 있을까.
서울 중구 을지로에서 성룡과 자란 순신은 부모 따라 외가인 아산으로 내려간다. 무과 시험을 보려다가 늦은 31세에 급제한다. 정읍 현감과 진도 군수를 거쳐 전라 좌수사로 여수에 머물게 된다. 5품에서 4, 3품으로 빠른 진급이다. 모두 어릴 때 친구 서애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선조 25년 봄 임란이 일자 세상은 곤두박질을 친다. 20만 대군이 부산포로 들어와 삽시간 부리나케 서울에 닿는다. 그게 미쳐 한 달도 안 된 5월로 한양성에 들이닥친다. 정발 장군과 동래부사 송상현이 무참하게 짓밟히고 만다. 문경 새재 3관문이 허물어지고 청주 신립 장군도 대군 앞에서 어이없이 무너진다.
오뉴월 궂은 빗속에 선조는 피신해야 했다. 임진강과 예성강, 대동강을 건너 밤낮으로 허둥지둥 의주로 달렸다. 보급이 더뎌선가 평양에 주저앉은 소서행장이다. 당시에 흔한 갖가지 전염병과 겨울 추위로 벌벌 떠는 왜군이다. 깊숙이 들어와서인가 본국 지원이 시원치 않아 병력이 날로 줄어들어만 간다.
한편 옥포와 사천, 당황포, 율포, 견내량, 한산섬 등 줄을 이은 일본 지원군과 보급병들을 맞아 벼락 치듯이 몰아붙인 이순신이다. 배는 불타고 군사는 물살에 떠다녔다. 바다로 나가려다 통영 골짝으로 몰려 혼쭐이 난다. 모두 이 장군의 뛰어난 지략이다. 삼도 수군통제사를 전라와 경상도 백성이 강강술래로 둥근 원을 그리며 발 벗고 나서 도와주었다.
이어 안골포와 절영도, 다대포 전투에서 승전에 승전을 거듭했다. 싸우면 이기는 이순신이다. 화포를 뿜는 거북선과 부딪쳐도 부서지지 않는 단단한 판옥선에 마구 깨지는 삼나무 왜선이다. 교체 군사와 화약, 장비, 급식, 피복 등 당장 필요한 것이 바닥난 평양 수군과 함흥 가등청청 군사는 전의를 잃고 제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환자가 속출해도 의약품도 없어 어려움이 겹쳐만 가는 침략군이다.
이순신 때문에 되는 게 없는 일본이다. 그들이 조선에 오니 무서운 게 두 가지다. 이 장군과 동장군이란다. 의령 곽재우와 밀양 사명당이 왜군을 괴롭혀 육로를 걸어가는 일이 고달프기만 한 일군이다. 왜군 보급창 진주는 김시민이 주민과 함께 저항했다. 북쪽 점령지까지는 멀기만 해라.
선조는 이순신이 달갑지 않다. 삼남의 백성이 그를 숭앙하기 때문이다. 연전연승하는 이 장군을 어찌하면 내칠 수 있을까 고심이었다. 황해도 덕수 이씨가 전주 이씨 왕가를 넘보는 것으로 여겼다. 마침 일이 생겼다. 가등청청을 내치라는 명령을 거역한 죄를 물어 파직하고 서울로 압송했다. 대신 한산섬 제승당 삼도 수군통제사를 경상 좌수사 원균에게 맡겼다.
이때 일이 생겼다. 일본 수군이 칠천량에 들어온 것이다. 이 장군처럼 이길 거라 여기고 군사 5천 명으로 당당히 나섰다가 역부족으로 그만 참패하고 만다. 정성 들여 만든 1백여 척의 배들이 불타거나 가라앉고 살아남은 병사들도 어디론가 뿔뿔이 도망치기 바빴다. 빠진 배들이 어디 보일까 했지만 푸른 하늘빛을 받아 검푸른 파도만이 넘실댄다.
이덕형은 감옥 이순신의 몸이 모진 고문으로 상했다고 말한다. 판자 칼을 덮어쓴 죄인 순신은 이제 어전 회의에서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당상관 수백 명 중 대부분이 선조의 눈치를 보며 ‘그리하옵소서’ 한다. 죽이라는 말이다. 유성룡이 말렸지만 막무가내이다. 병조판서 이항복이 ‘전시에 장군을 벌함은 옳지 못합니다.’ 이어 오리 이원익이 나서서 무고로 인한 것이며 누명을 쓴 것이라 풀어줘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영의정의 말에 누그러져서 권율의 밑에 백의종군으로 들어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 경상도와 전라도 수군절도사가 일군의 침략으로 자리를 비웠다. 허허로운 바다를 지키라 뒤늦게서야 부랴부랴 이순신을 2품의 통제사로 다시 내려보낸다. 군사와 보급품을 받지 못하고 배도 10여 척 밖에 없다. 남정네들을 불러 모아 부서진 배를 고쳐 이내 바다로 나아갔다.
전라도 곡창지대로 들어오려는 수백 척의 왜군을 맞아 울돌목에서 맞닥뜨렸다. 10여 척으로 싸움이 되겠나. 물살에 뒤엉긴 수많은 왜선이 뒤집히면서 급류에 휩쓸렸다. 이순신의 지형을 이용한 명량대첩의 전략이다. 이어 풍신수길의 사망으로 철군이 시작됐다. 5백여 척의 왜군과 남해 노량에서 전쟁을 벌였다. 11월 19일 달 밝은 밤에 명나라 진린 제독의 도움을 받아 밤새워 죽기 살기로 싸웠다. 3백여 척을 부수고 수많은 왜병을 수장시켰다. 20여 차례 해전을 모두 이긴 그였지만 날 샐 무렵 북을 치던 이 장군의 가슴에 조총이 날아들었다.
부모가 살던 아산에 묻혔다. 인조와 숙종 왕이 최고 훈장 충무 시호를 내리고 현충사 현판을 사액하며 정조는 영의정 벼슬을 추서한다. 세조 때 남이와 선조 때 김시민 등 9명의 충무공이 있지만 오직 이순신이 뚜렷하다. 국보 난중일기에 자세한 7년 전쟁의 얘기가 나온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됐다. 영웅을 넘어서 성웅으로 불린다. 광화문 광장과 진해에 장검을 든 커다란 동상이 세워졌고 1만여 초, 중, 고에도 그를 기리고 있다.
6언절구 한시를 시조로 풀이한 것이 눈에 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할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긋나니.”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살려낸 이충무공을 잊을 수 없다. 영원히.
첫댓글 임란 적적지를 순례 하시고
역사를 기술 하셨어요
가덕도 외항포 진지와 왜관 건물
소희네 식당 선생님과 함께 했던 일이
새삼 떠 오릅니다 그 땐 효향스님도 동행이였죠
수고하셨고 공부 잘 했습니다
감 잘 먹고 있습니다.
넘어갈 때 사르르 넘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