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의 통정진 축성 작업 현장, 서른 정도 되어 보이는 장년의 사내가 제 몸의 두 배는 되는 돌덩이를 끌어안고 숨 한번 거칠어지는 법 없이 산을 올랐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대부분 주변 사람들은 억지로 끌려나온 죄수들이나 돈이 궁해 먹고 살 길이 없는 말갈족인데 반해 장년인의 갑옷은 귀한 장식은 없지만 가슴에 새겨진 '太高句麗 大莫離支'라는 글자만 보아도 보통 병졸이 입는 갑옷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그의 허리에는 어디가도 구경 못할 보검이 채워져 있었다.
그는 커다란 돌덩이를 '쿵!'소리와 함께 집어던지듯 꼭대기 위에 내려놓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드시지요."
언제 다가왔는지 그의 옆에 웃옷을 벗은 장년인 또래의 건장한 사내가 물병을 내밀었다. 그 사내는 가슴에 수북히 털이 나고 수염도 오랫동안 깍지 않은 듯 아무렇게나 길러져 있어서 매우 지저분한 인상을 주었지만 뒤로 질끈 묶은 긴 흑발과 넓은 어깨, 당당한 가슴이 범인(凡人)이 아님을 말해주었다.
"고맙네, 흑치상지."
장년인은 물병을 건네 받아 목을 축이고는 물병을 돌려주면서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우리가 당을 치면 될 것을... 공격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렇듯 아까운 인력을 낭비하다니..."
장년인은 흑치상지에게 대답을 바란 듯 하였으나 흑치상지라는 사내는 말없이 물병을 돌려 받았다. 장년인이 바위 위에서 내려오고 인부들 여러 명이 바위를 들어올려 성벽을 쌓는 곳으로 옮겨갔다.
그때, 흑색 투구에 회색의 갑옷을 입고 허리에는 '保國'이라고 새겨진 보검을 찬 사내가 숨을 씩씩거리며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는 대뜸 투구를 벗어 던지며 주먹으로 흑치상지의 옆에 있던 나무를 후려쳤다.
우지끈!
두께가 젊은 장정의 허리 만한 나무였지만 사내의 놀라운 일격에 맥없이 부러지며 '쿵'소리와 함께 넘어가고 말았다. 일하던 인부들이 놀라서 바라보자 장년인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자자, 아무 일도 아닐세. 그냥 하던 일들 계속하시게."
인부들은 그곳을 힐끔힐끔 쳐다보면서도 멈추었던 일을 계속했다. 장년인은 시선을 보검을 찬 사내에게 돌리며 물었다.
"태왕전에 있어야할 보국장군(保國將軍) 곽도지(藿桃枝)는 무슨 일이 있기에 이곳에 찾아와 그리도 오열하는가?"
곽도지라 불린 사내는 장년인을 쏘아보듯이 하면서 소리질렀다.
"태왕이 제정신이 아니오! 지금 태자가 볼모로 당에 보내졌소이다! 그런데 대막리지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곳에서 수수방관만 하고 계신 거요?!"
흑치상지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 했지만 곧 장년인이 손을 들어 흑치상지를 만류하며 미소 띈 얼굴로 답했다.
"내 태왕의 명을 받들어 천리장성을 축조하는 중이거늘, 어찌 나에게 태왕의 허물을 씌우려는 것인가?"
"대막리지는 당에 태자를 보내는 일이 당의 속국임을 자처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 한 마디 반론도 제기하지 않는 것이오!"
"어차피 나는 허물 좋은 대막리지일 뿐일세. 태왕전을 장악한 늙은이들이 내 말에 귀기울여 줄 것 같은가?"
"그렇다면 이대로 태자가 당에 끌려가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시오?!"
"그러면 내가 어찌해야 그대가 만족하겠는가? 가서 태왕전의 늙은이들과 사대론자들을 쓸어버리고 당과 전쟁이라도 벌이라는 건가?"
장년인의 말은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얘기였지만 그곳에 있는 셋 중 그 누구도 그의 말에 놀라지 않았다. 곽도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연한 표정으로 장년인을 마주보며 말했다.
"필요하다면... 해야한다고 생각하오."
"훗, 보국장군인 그대가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줄이야... 뭐, 상관없네. 어차피 나 역시 저 태왕전 늙은이들은 진작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고인 물은 썩기 마련... 지금은 이 고구려 역시 썩은 물과 다름없지."
장년인의 대답을 들은 곽도지의 말투가 조심스러워졌다.
"그렇다면... 대막리지의 뜻은?"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닐세. 나는 변방에 있고 내 군대는 평양에 있네. 하지만 자네가 나를 믿는다면 내 미추홀로 돌아가 늙은이들을 쓸어버릴 때까지 기다려주게. 나는 자네가 성급히 나서서 일을 그릇 치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까."
곽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은 대막리지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믿소이다."
장년인은 사내에게 투구를 집어주며 웃었다.
"고맙군."
-2
요동항구의 부둣가
모든 항구도시가 그렇듯이 굉장히 쾌활하고 힘찬 아침이 시작되었다. 어부들은 투망을 점검하고 선원들은 짐을 나르고 상인들은 평양으로 향하는 뱃편을 찾고 있었으며 선장들은 소리쳐서 손님들을 부르고 있었다.
그런 부산스러운 분위기와는 달리 밤을 새며 달려 온 연개소문과 흑치상지는 평양행 배에 타서 늘어지게 자고 있었다.
"자자, 평양행 배가 일인당 닷 문이오! 다섯 분 이상이면 일인당 석 문만 받습니다!"
한참이나 신나게 떠들던 평양행 배의 선장은 갑자기 안색을 싸악 바꾸면서 떫은 눈빛으로 그의 앞에 나타난 건달들을 바라보았다. 건달들은 선장의 눈빛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배에 올라탔다.
"네놈들은 또 무슨 일이 있어 온 게야! 어서 썩 꺼져버려."
건달패 중 우두머리같이 보이는 녀석이 생글생글 웃으며 선장에게 말했다.
"영감, 우리 사정도 봐주시구려. 돈이 없어 배를 구하는 상인 분들한테 구걸 좀 하려는데 그렇게 매정하게 굴기요?"
아마 이쪽 부둣가에서 말썽을 일으키고 다니는 파락호들 같았다. 그들은 선장이 소리를 질러대건 쌍욕을 퍼붓건 신경도 쓰지 않고 손님들의 짐을 뒤졌다.
"뭐야, 오늘은 무슨 그지새끼들만 탔나?"
건달들은 손님들의 짐을 툭툭 차댔다. 손님들 중 한 명이 따지고 나서자 건달들은 우르르 몰려들어 손님을 구타하고 배에서 내쫓아 버렸다.
다른 이들은 겁을 먹었는지 눈을 멀뚱멀뚱 뜨고도 그들이 돈을 가져가는 걸 바라보았다.
그때 건달 두목이 흑치상지가 앉아서 자고 있는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봐, 저거 꽤 값나가게 생겼는데?"
그가 가리킨 것은 길이가 팔 척(약 240센티)이나 되는 방천극이었다. 건달 놈 중 한명이 다가가서 흑치상지의 눈치를 살피다가 흑치상지가 자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가 끌어안다시피 하고 있는 방천극에 손을 대었다.
순간, 흑치상지의 두 눈이 번쩍 뜨이며 오른손이 건달의 목덜미를 콱 틀어잡았다.
"컥!"
흑치상지는 건달을 들어올리더니 바닷물 속으로 처넣어 버렸다.
풍덩!
"젠장, 죽여버려!"
건달 두목의 호통에 건달들이 우르르 흑치상지에게 달려들었다. 흑치상지는 아직도 자고 있는 연개소문을 흘끗 보더니 그의 옆에 방천극을 내려놓고 맨주먹으로 건달들과 맞섰다.
제일 앞서 오던 건달이 몸을 띄우며 흑치상지의 얼굴을 향해 다리를 뻗었다. 흑치상지는 대뜸 손을 놀려 건달의 무릎과 발목을 잡아채고 뒤에 이따라 달려드는 건달들을 향해 집어던졌다.
앞에 가던 놈이 날아오자 뒤에서 달려들던 건달들은 주춤거리며 동료를 받아내었다. 그때 흑치상지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어 건달을 받아낸 건달의 면상에 일권을 박아내었다.
빡!
코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나며 건달은 저만치 날아가 얼굴을 싸쥐고 나뒹굴었다. 흑치상지는 연달아 발로 그 옆의 건달을 차올리고 고개를 숙여 주먹을 피한 뒤 다시금 한 놈의 멱살을 잡아채어 바다에 집어던졌다.
"한심한 새끼들! 다 비켜!"
건달 두목은 품속에서 일 척 정도의 단검을 꺼내더니 부하들을 밀어버리고 흑치상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흑치상지는 묵묵히 있다가 두목이 칼을 내지르자 단검의 날을 맨손으로 잡아버렸다.
"허억...!"
여기저기에서 경악에 찬 소리가 터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흑치상지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손에 들은 단검의 날을 종이조각처럼 구겨버렸다는 것이다.
흑치상지는 단검을 빼앗아 멀리 집어던졌다. 그리고 두목의 목덜미와 허리를 잡아채고 뛰어올라 공중에서 한 바퀴 빙글 돌린 다음 멀리 던져버렸다.
흑치상지가 배에 내려앉자 그의 거대한 덩치에서 나오는 무게에 배가 기우뚱하였다.
풍덩!
어찌나 멀리 날아갔는지 건달 두목은 한참 후에야 물 속에 빠졌다. 이미 나머지 건달들은 달아난 뒤였다.
언제 일어났는지 연개소문이 하품을 하면서 흑치상지를 바라보았다.
"뭐야, 시시하게. 정말 형편없는 녀석들이군."
흑치상지는 말 없이 연개소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방천극을 끌어안고 계속해서 잠을 청했다.
배에 있던 사람들은 다들 더욱더 겁에 질려 흑치상지의 주변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선장은 건달놈들이 흠뻑 두들겨 맞자 신나서 선원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돛을 올리라고! 점심 이전에는 떠나야하니 어서 서둘러!"
-3
"후우... 이봐, 자네는 머리도 안어지러워?"
연개소문은 팔꿈치로 흑치상지를 툭 건드렸다. 흑치상지는 한참이나 불편한 자세로 잠을 자서인지 목을 한 바퀴 돌리며 특유의 색 없는 묵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수군에 잠시 있었습니다."
"하아... 그래, 자네는 안 해본 게 없군."
연개소문은 미간을 문질렀다. 배를 타는 게 아니었다. 그는 배의 난간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가 눈을 좁게 뜨며 흑치상지를 불렀다.
"내가 헛것이 보이나? 자네 이리 와보게."
흑치상지는 군말 없이 그의 옆에 섰다.
"해적들이군요."
순간 연개소문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해적? 어떤 놈이 겁도 없이 고구려의 바다에서 노략질을 해? 백제 놈들인가?"
"아닙니다. 당의 전함과 비슷한 구조군요. 아니, 저건 해적선이 아니라 당의 군선입니다."
연개소문의 입가가 살짝 뒤틀렸다.
"당의 군선? 오호라, 아예 노골적으로 약탈을 하시겠다?"
그가 해적선을 보고 놀라 우왕좌왕하는 선장에게 소리쳤다.
"해적선을 향해 돌진해!"
"무, 무슨?!!"
"못 들었나? 해적선으로 돌진해라!"
연개소문은 위에 걸치고 있던 허름한 가죽옷을 벗어 던지고 연씨가문의 삼 대 째 물려져 내려오는 용승검龍昇劍을 뽑아들었다.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부디 아량을 베푸시옵소서."
"아량이고 개나발이고 어서 배나 몰아!"
선장은 황급히 선원들에게 뱃머리를 바꾸도록 명했다.
"다들 선실에 들어가서 문 꼭 닫아걸라고."
연개소문은 흑치상지와 함께 무장을 챙기고 배 갑판 난간에 몸을 밀착시켰다.
이윽고 두 배의 거리가 백 보 사이로 좁혀지자 해적선에서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와 갑판 위에 박혔다.
콱! 콱!
난간에 박힌 화살들 중 일부가 난간을 뚫고 화살촉이 튀어나왔다. 몇 발의 화살이 더 날아온 후 화살비가 멈추고 해적들이 헤엄쳐서 배에 올랐다.
흑치상지가 몸을 일으키며 방천극으로 가장 먼저 고개를 불쑥 내민 해적의 머리통을 날렸다. 그러자 곳곳에서 해적들이 머리를 불쑥불쑥 내밀며 갑판 위로 기어올랐다. 연개소문도 일어서서 동분서주하며 올라오려는 해적들의 머리통에 검을 박아 넣었다.
하지만 워낙 해적들의 수가 많은지라 하나 둘 갑판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고 흑치상지와 연개소문은 포위 된 형국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연개소문은 태연하게 웃으며 흑치상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건드렸다.
“자네, 누가 더 많이 죽이는지 나와 내기할까?”
“... 좀 진지해지십시오, 주군.”
“아아, 알았다고. 잔소리는 그만하게.”
연개소문이 말을 끝맺으며 동시에 해적들을 향해 달려들었고 흑치상지 역시 방천극을 내질렀다.
사태는 생각보다 빠르게 종료되었고 갑판 위에는 십여 가량 되는 해적들이 목이나 허리가 절단되어 아무렇게나 널려있었다. 물론 나머지는 달아났다.
"오늘 따라 피래미들이 많이 꼬이는군."
연개소문은 비웃음을 흘리며 용승검을 꽂아 넣었다.
용승검은 고구려 최고의 명검이라 할 만큼 좋은 검인지라 피가 묻질 않았으나 흑치상지의 방천극은 이름도 없는 돌팔이 대장장이가 만들어 준 싸구려인지라 피를 닦아내지 않으면 녹이 슬었다.
그런고로 흑치상지는 자신이 벗어 던진 가죽옷으로 열심히 방천극의 날을 닦아내었다.
그때 선실에서 동정을 살피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연개소문이 시체들을 가리켰다.
"어이, 다들 여기 와서 저 시체들의 갑옷을 벗기고 시체는 바다에 던져버리게."
선장이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
"저... 꼭 옷을 벗겨 버리실 생각이십니까?"
"갑옷은 전리품일세. 물론 나는 저 따위 갑옷이야 필요 없지만 나중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그만 배의 선장이 무슨 용기가 있어 말대꾸를 하겠는가.
"본부대로 하겠사옵니다."
"아, 참. 그리고 오늘 언제쯤이면 평양에 도착할 듯 싶은가?"
"뜻밖의 해적을 만나 좀 지체되긴 하였사오나... 아마 네 시진(8시간) 안에는 도착할 것이옵니다."
"으흠... 그래?"
-5
평양성
"후우... 언제 와도 떠들석하군."
연개소문은 배에서 내려 멀미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혔다. 때는 저녁, 으슥한 밤이 찾아왔는데도 평양성은 어둠이란 말을 찾기는 어려웠다.
"곧장 자택으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그럴 수야 있나. 오랜만에 고향에 왔는데 천천히 시장골목이나 구경하다가 내일 아침 즈음에 가자고. 태왕전 늙은이들의 상통이 어찌 구겨질지 생각하니 뿌듯하군."
연개소문은 자신이 젊은 시절에 자주 갔던 주막에 들러 저녁을 해결하고 흑치상지와 함께 하릴 없이 시장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들이 태왕전으로 가는 큰 골목에서 약장수의 재주를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모두 비켜라! 모두 비켜!"
왁자왁자한 시장 거리가 착 가라앉으며 당의 관복을 입은 병사 서른 여 명이 가마를 메고 인파를 헤치며 거리를 지나갔다. 흑치상지가 연개소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가마 위에 있는 자가 당의 사신인 모양입니다."
"빌어먹을 놈들, 무슨 제 놈들이 태왕이라도 되는 양 거들먹거리는군."
연개소문은 아니꼽다는 눈빛으로 사신 일행을 바라보았다.
"어서 비켜!"
관원들은 미처 비키지 못한 이들을 발로 차버리고 창대로 치면서 길을 열었다. 연개소문의 눈이 가늘어졌다. 가늘어진 눈에서 한기가 새어나오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원인 모를 냉기에 자리를 피했다.
"오냐, 한 번만 더 건드려봐라. 너희들 머리통을 부숴 주마."
그의 중얼거림에 흑치상지를 제외한 주변인들이 흠칫 놀랐다가 다들 시선을 외면해버리며 자리를 피했다. 그러다가 사신 행렬의 맨 뒤 마치 개 끌려가듯이 목에 줄을 메고 억지로 끌려가는 사람들이 연개소문의 눈에 들어왔다. 여자 반, 남자 반이었는데 열 명 당 한 명의 관원이 붙어있는 식으로 길게 이어져 어림 잡아도 천여 명은 되었다.
"여보오, 저들이 무슨 죄로 끌려가는 거요?"
연개소문이 옆에 있던 상인에게 물었다. 상인은 혀를 차며 시선은 그대로 사신 일행들에게 둔 채 말했다.
"쯧쯧, 돈 없고 약한 게 죄요. 원, 말은 좋아서 포로로 끌려간다지만 가서 평생을 노예생활이나 창기생활로 보낼 것 아니겠소?"
"... 포로?"
연개소문은 이를 갈아대며 사신 일행의 앞을 떡 하니 막아섰다. 흑치상지도 군중들을 헤치고 나가 천으로 싸서 감춘 방천극을 비켜들고 연개소문의 옆에 나란히 섰다.
"뭣하는 놈들이냐?"
관원 하나가 연개소문의 가슴팍을 걷어차려 하자 흑치상지가 나서서 방천극의 창대로 정강이를 후려쳤다.
"으악!"
관원은 정강이뼈를 쥐고 그 자리에 뒹굴었다. 연개소문이 사신에게 말했다.
"당의 사신은 어떤 배짱으로 그리 위엄을 행사하는지 모르겠으나 자국의 백성들은 놔두고 가셔야 하겠소."
그러자 사신의 옆에 있던 관원이 말을 번역하여 사신의 귀에 쫑알거렸다. 사신이 뭐라 지껄이자 다시 그 관원이 연개소문에게 말했다.
"오랑캐란 족속들은 어쩔 수가 없구나. 자신들이 내뱉은 말을 자신들이 지키지 못하겠다고 우겨대니. 이들은 그대들의 태왕이 내린 포로다. 잔말말고 비켜라."
"개소리 집어치우거라! 우리가 너희의 속국이라도 되는 양 지껄인다면 목줄을 비틀어버리겠다."
연개소문이 용승검을 뽑아들었다. 흑치상지도 방천극을 감쌌던 천을 풀었다.
"어리석기는! 어느 안전이라고 병장기를 뽑는 게냐!"
관원들 중 사신의 호위대장 격인 사내가 능숙한 고구려어로 호통쳤다.
“지금 동부의 미친 승냥이와 싸워보겠다는 것이냐?"
"도, 동부대인 연개소문?!"
그가 놀랄 사이도 없이 연개소문과 흑치상지는 관원들에게 달려들어 무더기로 베어버리기 시작했다.
"머저리 같은 놈들! 정신 차려라! 모두 활을 쏴! 활을!"
호위대장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관원들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시장 골목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 모두들 험한 기세로 노려보다가 관원들이 활에 살을 메기자 일제히 우르르 달려들어 관원들을 쓰러트리고 짓밟았다.
"당 놈들을 생매장하자!"
"저 사신 놈의 목을 베어 당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옳소!"
포로로 끌려가던 이들은 진작에 풀려났다. 이들을 선동했다 볼 수 있는 연개소문은 가마에서 사신을 끌어내었다.
"네놈도 개 끌려가듯이 가봐야 할 것이야."
그는 사신의 갓을 벗겨버리고 머리 채 쥔 뒤 태왕전으로 향했다. 흑치상지 역시 그 뒤를 따랐다.
영류왕의 별궁
"웬 놈이냐! 지금은 폐하께서 연회 중이시니 썩 꺼져라."
별궁의 문을 지키고 있던 보국군 중 한 명이 창으로 연개소문 일행의 앞을 막았다. 연개소문의 뒤에는 흥분되어 따라 온 민간인들이 우글거렸다. 연개소문은 보국군의 말을 무시하고 보국군들의 창을 빌어버리며 별궁으로 들어갔다.
야외에 있는 연회장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연개소문에게 쏠리며 그들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폐하! 신 막리지 연개소문이 폐하의 연회를 위하여 좋은 먹거리를 가져왔사옵니다."
그는 상위를 쓸어버렸다. 쟁반들이 와장창 소리와 함께 깨졌다. 그 위에 당의 사신을 턱 올려놓은 연개소문이 말을 이었다.
"이놈의 머리거죽을 벗겨내어 만두를 빗고 뇌수는 담가서 술을 만들고 창자를 뽑아 순대를 하며 팔과 다리는 회를 뜨고 눈알과 혀를 뽑아 소금에 절여 육포를 만들면 제법 고기가 될 것이옵고, 뼈는 우려내어 사골을 삶으면 그래도 제법 푸짐하게 국물이 나올 것이옵니다. 다만 이놈이 뱃속이 시커먼 당나라 놈인지라 폐하께서 원치 않으신다면 순대는 물리겠사옵니다."
-6
"대막리지, 이 무슨 무례한 짓인가!"
연개소문의 당돌한 태도에 일시 당황한 영류왕은 짐짓 호통을 치며 연개소문을 꾸짖었다.
연개소문은 지지 않고 영류왕을 쏘아보며 대답했다.
"신 막리지 연개소문 아뢰옵니다. 이 씹어먹을 화산족 오랑캐가 고구려의 백성들을 개처럼 끌고 가고 시장 거리의 백성들을 패대는 대도 태왕께서는 어찌 수수방관만 하고 계신 것이옵니까? 신의 가문은 사대를 막리지로 살아오며 고구려의 녹을 먹은 바, 이런 자를 보고도 수수방관할 수는 없사옵니다."
스렁!
용승검이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뽑혀 나왔다. 용승검의 차가운 칼날이 상위에 있는 당 사신의 목에 닿았다.
"사, 살려주오."
당 사신은 오줌을 지리며 빌다가 그 자리에서 혼절해 버렸다.
영류왕은 탁자를 내리치며 연개소문에게 삿대질까지 했다.
"대막리지는 어찌 이리 안하무인인가! 내 그대를 보고 싶지 않으니 어서 물러가라!"
"태왕 폐하! 신 연개소문 다시 한 번 아뢰옵니다! 올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리며 고구려를 우습게 보는 오랑캐 무리들에게 약탈을 당하고 있는데 폐하께서는 어찌 개돼지 같은 오랑캐의 사신을 우대하시고 기름기 흐르는 반찬을 즐긴단 말씀이옵니까?!"
"무, 무어라! 여봐라! 승정군丞正軍은 어디 있느냐! 저 무례한 자를 쫓아내지 못할까?!"
영류왕의 호통에 승정군이 몰려와 연개소문을 포위했다. 허나 흑치상지가 말 한 마디 건네는 법 없이 연개소문의 뒤를 막아섰다.
“주군을 포박하려거든 나부터 쓰러트려라."
승정군들은 위명이 자자한 ‘을지문덕의 화신’에 대해 아는지 감히 달려들지 못하고 서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 승정군장 석주령席朱鈴이 검을 뽑으며 흑치상지에게 맞섰다.
“대역무도한 발언이군!”
연개소문은 여전히 영류왕과 시선을 딱 마주친 채로 용서를 빌지 않았다.
"예! 잘 알겠나이다! 신 막리지 연개소문! 폐하께서 존엄하신 명을 내리지 않으시어도 물러날 생각이었사옵니다!"
연개소문은 딱딱 끊어 내뱉고는 당 사신을 땅바닥에 내친 뒤 승정군들을 어깨로 밀치고 연회장 밖을 나갔다. 흑치상지가 석주령을 주시한 채 그 뒤를 따라나갔다.
"저, 저런 철퇴로 쳐죽일..."
영류왕은 수치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와글와글
"당의 오랑캐 놈을 끌어내시오!"
"그놈이 내 아들이 길을 막았다고 병신을 만들어 놓았소!"
대모달大模達 온사문은 연회장 입구를 막아서고 소리쳤다..
"지금은 폐하께서 연회중이다. 모두 물러가라. 나 같은 일개 무부에게 따져서 무얼 어쩌겠다는 것이냐?"
"국상은 우리 말 따위에 귀도 기울이지 않소!"
"옳소!"
온사문은 여전히 고집스럽게 입구를 막아서고 백성들의 진입을 제지했다. 그때 와글와글한 분위기를 한 번에 싹 잠재우는 사자후 같은 일갈이 터져 나왔다.
"시끄럽다! 어디 그게 너희들 마음대로 되는 줄 아느냐! 우리 역시 연회장에서 문지기노릇 하는 게 지겹지도 않은 줄 아느냐! 어서 썩 꺼지지 않으면 요절을 내버릴 테다!"
어느새 왔는지 보국장군 곽도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단신으로 돌궐의 일개 부대를 격파하여 위명이 자자한 곽도지가 등장하자 군중들은 일제히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조용해졌다.
"뭘 그리 쳐다보는 것이야! 어서 썩 꺼지지 못할까?!"
사람들은 그의 기세에 풀이 죽어 퉁명스럽게 나불거리면서도 하나 둘 돌아가기 시작했다. 온사문은 곽도지를 보며 조용히 타일렀다.
“만사가 힘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닐세. 강압적인 방법은 득 될 게 없다네."
곽도지도 방금 전의 기세는 사라지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쩔 수 없잖소."
그때 연회장 입구로 흑치상지와 연개소문이 걸어나왔다.
"대막리지!"
"대막리지!"
온사문과 곽도지의 입에서 동시에 '대막리지'가 터져 나왔다. 연개소문은 거친 숨을 고르고 있다가 그 둘을 보고는 빙긋 웃어 보였다.
"둘 모두 오랜만이군. 아니지, 보국장군 자네하고는 나흘 만인가?"
곽도지는 뒷머리를 긁으며 흑치상지에게 고개 숙였다.
"형님도 오셨소?"
“그때는 열을 내느라 아는 척도 않더니 이제 와서 인사하는가?”
평소 무심한 흑치상지도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의형의 추궁에 곽도지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웃어버렸다.
온사문이 연개소문에게 물었다.
"대막리지, 무슨 일 때문에 이리된 것이오?"
"여기서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니군. 내 처소로 가세."
-7
"후우..."
국상 이읍로李泣潞는 고운 이마를 찌푸렸다. 그의 주름진 이마가 더욱 일그러졌다.
"연개소문, 돌아오고 말았군..."
그의 음성은 무거움이 짙게 베어있었다.
"비형."
그가 그의 앞에 부복해 있던 흑의인을 불렀다.
"하명하십시오. 주군."
"너라면 내가 고민하는 것이 무언지 알 것이라 믿는다."
"..."
"연개소문의 목을 가져와라."
"...존명."
"어찌 저리도 한심하실 수 있단 말인가?!“
연개소문은 탁자를 내리쳤다. 온사문은 주먹을 쥐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막리지 휘하의 정보부가 얼마 전 이읍로의 식객 중 수상한 자들을 감지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
연개소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암살?”
그는 흑치상지를 불렀다.
“흑치상지, 무기고에서 가장 튼튼한 쇠사슬을 준비해 두게.”
“존명.”
연개소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곽도지와 온사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벌써 밤이 깊었군. 다른 이들이 본다면 의심할지도 모르니 어서들 돌아가시게. 흑치상지가 배웅해 줄 걸세."
뻐어꾸욱... 뻐어꾸욱...
대막리지의 처소
세상을 비웃는 듯한 반달 밑에 음습한 뻐꾸기 울음소리만 울려펴지는 장원의 담을 흑의를 입은 열 명의 사내가 훌쩍 뛰어넘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십 장 정도 되는 담을 넘으면서도 발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경신술이 경지에 이르렀다는 증거였다. 그들 중 푸른 복면을 쓴 사내가 손짓하자 그들은 그림자라도 되는 양 소리없이 연개소문이 잠들어 있는 침실로 내달렸다.
연개소문의 처소 앞에서 지키고 있을 보초병들을 어찌 처리해야할지 생각중이었던 청색 복면인은 이유 모를 불쾌감을 느꼈다. 연개소문의 처소 입구에는 단 한 명의 사내가 웃옷을 벗은 채 벽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던 것이다.
청색 복면인이 턱으로 졸고 있는 사내를 가리켰다. 세 명의 흑의인이 바람처럼 내달려 한 명은 입을 틀어막으려는 듯 오른 손을 뻗고 두 명은 장검을 뽑아서 각각 심장과 목을 노렸다.
그 순간 졸고 있던 사내의 눈이 퍼뜩 치켜떠지며 그의 손이 옆에 세워져있던 방천극을 잡았다.
흑의인들은 숨을 들이켰으나 손을 거두지는 않았다.
부우웅!
방천극이 허공을 가르며 놀라운 속도로 회전하여 두 개의 검 모두를 튕겨냈다.
오른손을 뻗은 흑면인이 왼손으로 단도를 빼들며 사내의 허리를 찔러갔다.
방천극을 쥔 사내, 흑치상지는 방천극을 일직선으로 회수하며 반대손으로 흑의인의 왼손을 잡아 비틀었다.
우두둑!
흑의인의 뼈가 골절되면서 단도가 땅에 떨어졌고 곧 그의 머리는 흑치상지의 방천극에 날아갔다.
철퍼덕!
사방으로 뇌수가 튀면서 눈에서 은은한 살광을 내뿜는 흑치상지의 모습을 저승에서 온 명부객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흑의인들은 훈련을 제대로 받아서인지 동료의 죽음에도 끄떡 않고 일제히 달려들어 흑치상지의 자세가 불안정할 때에 시간차를 두고 일제공격을 가했다.
푹! 푹!
흑치상지의 등 뒤 왼쪽 날개 뼈와 오른쪽 허벅지에 표창이 박혔다. 허나 그는 고통을 모르는 듯 방천극을 휘둘러 날아드는 검들을 쳐냈다.
'괴물이군.'
청색 복면인은 혀를 내둘렀다.
'시간을 끌어서는 안 돼지!'
그는 흑치상지의 방천극에 쓰러지는 부하들을 뒤로하고 연개소문의 처소에 나 있는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 자동적으로 그의 손이 언뜻 비친 침대에 비수를 뿌렸다.
파바바바박!
허나 왠지 사람의 몸에 꽂히는 것치고는 소리가 너무 둔탁했다. 그제야 그는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남색을 즐기는 취미는 없거늘... 쯧쯧, 내 어여쁜 처자가 침소로 뛰어든다면 그야 대환영이나 그대 같은 손버릇 거친 사내는 사절이라오."
그는 혼비백산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제길, 언제...'
하지만 그에게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다시 비수를 허공에 뿌리고 쌍검을 뽑아 연개소문에게 달려들었다. 연개소문은 좌수로 정면을 쓸어 비수를 쳐내면서 천천히 용승검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나 역시 밤이 외로운 지라... 당신의 재롱이라도 봐야겠소."
-8
"흐읍!"
청색 복면인은 숨을 들이키며 쌍검을 내질러 하나는 용승검의 검로를 차단하고 하나는 목을 찔러 들어갔다. 연개소문은 목을 숙여 찔러온 검을 피하고 용승검을 쳐 올렸다.
나의 劒은 山神의 眞氣! 산을 부수고 바다를 울린다!
排山掉海!
그가 배산도해의 초식을 전개하면서 용승검에는 검강이 맺혀 청색 복면인의 쌍검을 올려쳤다.
콰앙!
폭발음이 일어나며 쌍검은 산산조각이 났고 청색 복면인은 저만치 날아가 땅 구석에 처박혔다. 연개소문은 용승검을 꽂아 넣고 저벅저벅 걸어가 청색 복면인의 목 뒤 요혈을 짚었다.
"재롱치고는 너무 싱거운데?"
그는 비웃음을 흘리며 복면인의 몸을 침대 밑에서 꺼낸 쇠사슬로 묶어버렸다.
'이 놈은... 내가 오리란 걸 알고 있었다!'
戟의 秘技! 그 힘은 달을 베노라!
半月斬!
흑치상지의 방천극이 다섯 개로 불어나는가 싶더니 말 그대로 반달형으로 창이 베어 들어오며 흑의인들의 몸둥아리를 헤집었다.
풀썩!
또 한 명의 흑의인이 가슴에서 선혈을 뿜어내며 쓰러졌다.
'비명을 지르지 않는 걸 보아 상당히 고된 수련을 받았군.'
흑치상지는 연개소문의 처소 안으로 들어간 청색 복면인이 생각났는지 슬쩍 처소 안쪽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얼마 남지 않은 흑의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라."
흑치상지의 싸늘한 말투에도 흑의인들은 동요 없이 그의 빈틈만을 찾았다.
"가기 싫은가? 그렇다면 내가 가주지."
방천극이 차가운 밤 공기를 일직선으로 꿰뚫었다.
'헉, 어느새!'
방천극의 공격을 받은 사내는 급히 상체를 비켜 방천극의 날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 사이 다른 흑의인들이 일제히 흑치상지를 향해 덤벼들었다.
흑치상지는 상체를 움직여 자세가 불안정한 사내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좌우에서 날아오는 두 자루 검을 방천극을 빙그르 돌려 쳐냈다. 그는 또한, 등뒤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예기에 본능적으로 몸을 앞으로 굽혔다.
슈우욱!
검이 살짝 흑치상지의 등을 살짝 파고 지나갔다. 선혈이 흘렀으나 흑치상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쓰러져있는 흑의인의 가슴에 방천극을 박아 넣었다. 그는 곧 방천극을 뽑기도 전에 좌수를 움직이고 다리를 놀려 흑의인들의 검을 피했다.
戟의 悟意! 나의 戟은 흉포한 狂龍!
狂龍登天!
흑치상지가 광룡등천의 초식으로 공중에 떠올라 사방에 극을 내질렀다. 달려들던 두 명의 사내는 늘어나기라도 한 듯 비정상 적인 거리에서 찔러 들어오는 창에 심장을 뚫렸다.
털썩! 털썩!
두 구의 주검이 쓰러졌다. 마지막 남은 사내는 가까스르 위기를 느끼고 광룡등천에는 뚫리지 않았으나 흑치상지는 쉬지 않고 방천극을 놀려 사내의 허벅지에 깊은 상처를 새겼다.
사내의 두 눈 동자가 번뜩였다. 그는 발악적으로 흑치상지에게 달려들었다.
'동귀어진? 형편없군.'
흑치상지는 뒤로 이 보 즈음 물러섰다. 순간 사내가 치켜올렸던 검으로 자신의 심장을 찔러버렸다.
푸욱!
"꾸르르르..."
마지막 남았던 흑의 사내는 입에서 피 거품을 게워내며 숨을 거두었다. 흑치상지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기 자신을 살인멸구한다...? 이읍로의 부하들도 꽤 쓸만하군.'
물론 이읍로의 개들이 쓸만하다는 것은 자신에게는 피곤한 일이었다.
-9
다음날 아침
고구려의 평양, 태왕전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웅장하고 높은 성벽의 위용을 뽐내었고 성문을 막아선 승정군 병사들은 금색 갑옷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붉은 전포를 휘날리었다. 사람들은 벌써부터 가게를 열고 밭일을 나가느라 거리는 부산스러웠다. 여기저기 민가의 굴뚝에서 회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저벅 저벅 저벅
추운 날씨임에도 여전히 상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오른손은 방천극을 쥐고 왼손에는 커다란 보따리를 든 채 태왕전의 성문 앞에 선 흑치상지는 승정군 병사에게 말했다. 특유의 딱딱한 음색이었다.
"대막리지께서 보내신 사람이오. 길을 터주시구려."
승정군 중 하나가 눈썹을 찡그렸다.
"지금은 태왕전에서 회의 중이다. 헌데 감히 어딜 들어간다는 게냐."
"고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태왕전에 들 수 있소. 고하는 이가 천하건, 귀하건... 회의 중이라도 변함 없는 율법 아니오?"
"건방진! 할 말이 있으면 연개소문이 직접 오너라! 감히 종놈 따위를 대신 보내다니!"
"...!"
흑치상지의 안광이 번뜩였다. 그는 보따리를 땅에 털썩 내려놓고 왼주먹으로 승정군의 명치를 후려쳤다.
퍽!
"흐억!"
왕실의 친위대인 승정군이라지만 흑치상지의 주먹하나 제대로 당해내지 못하였다.
"이 새끼가!"
그 옆에 있던 다른 승정군 병사가 칼을 뽑아 흑치상지에게 휘둘렀다.
흑치상지는 슬쩍 피하며 그의 목덜미를 잡아버렸다. 그는 병사의 귀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이읍로의 졸개들이군. 허나 대막리지를 우습게 보면 크게 다칠 것이야."
그는 병사의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을 놔주었다. 병사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버렸다. 흑치상지는 명치를 잡고 컥컥 거리는 병사의 뒷덜미를 잡고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흑치상지가 칠척에 다다르는 거한이라서 가능한 것이었다.
"다시 한 번 지껄여 보거라. 감히 일개 승정군 따위가 대막리지의 이름을 불러?"
노기가 가득 찬 목소리였다.
그때 성문 안에서 마흔이 좀 안된 회색 투구에 푸른 갑옷을 입은 장수가 걸어나왔다. 그는 흑치상지를 만류했다.
"그만두게. 태왕폐하께서 계시는 태왕전에서 이 무슨 짓인가?"
대모달 온사문이었다. 온사문은 이미 흑치상지가 등에 짊어진 것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둘은 시선을 마주친 뒤 온사문이 턱으로 포대를 슬쩍 가리키자 흑치상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짧은 시간 내에 암묵의 대화를 나누었다.
흑치상지는 승정군을 싸늘히 노려보다가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회의 중인데도 폐하의 존안을 뵈어야 하겠는가?"
"설사 침실에 드셨다 하더라도 만나야 하옵니다."
"그러면 날 따라오게."
흑치상지는 그 예의 커다란 보따리를 짊어지고 온사문을 따라갔다.
"국상, 저 포악무도한 연개소문을 어찌해야 좋겠소?"
국상, 이읍로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심려 거두시옵소서. 오늘이면 그의 심복인 흑치상지가 대막리지의 죽음을 알리러 올 것이옵니다."
대신들과 영류왕의 동공이 커졌다. 대신들 중 한 명이 다급한 음성으로 물었다.
"뭐요? 그렇다면 자객이라도 쓰신 게요?"
염상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다.
그때 회의장 밖에서 온사문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들려왔다.
"태왕폐하! 대막리지의 하인을 자처하는 흑치상지란 자가 폐하를 알현하기를 청하옵니다!"
이읍로의 입가에서 미소가 짙어졌다.
"들라!"
영류왕의 명으로 회의장 문이 열리며 보따리와 방천극을 쥔 흑치상지가 들어섰다.
"태왕폐하의 존안을 뵙습니다."
흑치상지는 한 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예를 올렸다.
"대막리지의 하인이라... 대막리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 어찌 직접 오지 아니하고 하인을 보내었는고?"
흑치상지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말했다.
"폐하의 혜안대로 큰 변고가 생겼사옵니다. 사실, 어젯밤 대막리지의 처소에 수십여 자객이 들었사옵니다."
영류왕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으나 겉으로는 마음을 감춘 채 근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저런, 고얀지고! 감히 어느 놈이 위대한 태고구려의 대막리지를 암살하려 했는고! 그래, 대막리지의 안위는 어떻단 말인가?"
영류왕과 대신들은 하인을 대신 보내왔으니 분명 연개소문이 죽거나 최소한 거동도 못할 만큼 중상을 입었으리라 생각했다.
허나 흑치상지의 말에서는 그들의 기대와는 정 반대의 말이 튀어나왔다.
"폐하의 은덕으로 요행히 대막리지께서는 무탈하시옵니다. 다만, 그에 따른 후유증 때문에 자리에 누우셨기에 송구스럽게도 소생을 대신 보낸 것이옵니다."
회의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연개소문은 호위병을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 호위병이라고 해보았자 흑치상지가 전부였고 그렇다면 두 명이 수십의 자객을 쓸어버린 것이다. 후유증으로 앓아 누웠다고 하지만 강골 중 강골인 대막리지가 그 정도 일에 앓아 눕는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들의 동요와는 상관없이 흑치상지의 말은 이어졌다.
"그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를 생포하였사온데... 아무리 추궁을 해보아도 입을 열지 않사옵니다. 해서, 이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오라 대막리지를 노린 국가적 차원의 음모이기에 태왕폐하께옵서 심문을 해주시었으면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보따리를 풀었다. 보따리에는 손, 발이 묶여있고 입에는 자갈을 물은 채 기절해 있는 사내가 들어있었다.
흑치상지는 슬쩍 이읍로의 눈치를 살피었다. 이읍로는 태연한 시선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이번 사건의 배후가 알려진다면... 대막리지께서는 그를 천조각, 만조각 찢어발길 것이라 하시었사옵니다. 아, 그리고 온사문 장군과 대막리지께서는 친분이 두터우시니 기왕이면 보국군에서 심문토록 해주시옵소서."
"음, 내 그리 하겠다. 돌아가서 대막리지에게 몸을 아끼라고 전하라."
"예, 하오면 소생은 이만 물러나옵니다."
흑치상지는 다시 한 번 예를 올린 뒤 저벅저벅 회의장을 나갔다. 온사문이 자객을 끌어내라 명하자 보국군 몇이 자객을 들쳐 메고 나갔다.
"소장도 이만 물러가옵니다."
온사문 역시 예를 올린 뒤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이읍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면목 없사옵니다, 폐하."
"어찌 그게 국상의 탓이겠소? 하아... 그나저나 대막리지가 그 배후를 알아낸다면..."
회의장의 분위기는 어둡게 가라앉았다.
-10
대막리지의 처소
집 안에는 곽도지와 연개소문이 탁자에 마주앉아 있었다.
"무슨 일로 부르신 게요?"
곽도지가 뚱하게 묻는다.
"내 벗을 만나는데 이유가 있겠는가?"
웃으면서 연개소문은 곽도지의 잔에 술을 따른다.
"근무 중이오. 금주해야 한다오."
"어이쿠, 그랬나?"
연개소문은 술을 따르던 손길을 멈추고 술병을 내려놓은 뒤 곽도지의 잔을 자신이 쭈욱 들이켰다.
"남의 잔에 뭐 하는 거요?"
연개소문은 여전히 빙글거린다.
"자네가 마실 수 없다는데, 그렇다고 따라놓은 것을 버릴 수는 없지 않나?"
"쳇, 됐소. 그건 그렇고 아직 조기 점검이 끝나지 않았소. 성문도 최근에 많이 약해져서 보수공사에도 감독하러 가야되고... 어서 용건이나 말하시구려."
술잔을 내려놓은 연개소문이 그제야 미소를 지우며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자네... 보국군 중에 신의 있고 쓸만한 젊은이 있는가?"
"...? 무슨 뜻이오? 쓸만한 충복이면 형님으로도 충분하지 않소?"
"흑치상지야 할 일이 많고 늘 내 곁에 붙여둬야 하니까 그렇지... 한 명이면 되네."
"흐음... 알겠소. 내 평소 눈 여겨 둔 젊은이가 있으니 지금 당장 가서 불러오리다."
"대막리지를 뵈옵니다."
"보국장군은?"
"보수공사 감독 중이십니다."
연개소문은 자신의 앞에 마주선 젊은이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때 흑치상지와 온사문이 들어왔다.
"주군, 돌아왔습니다."
"아, 왔는가? 대모달도 왔군."
온사문은 예를 올리며 말했다.
"다행이십니다. 괜찮으신 듯 보이니 한숨 놓이는군요."
연개소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흑치상지, 내가 전하라는 대로 전했는가?"
"물론이옵니다."
"알겠네, 어제 일로 피곤할 테니 이만 물러가 쉬게."
"존명."
그는 시선을 온사문에게 돌렸다.
"보고할 일이 뭔가?"
"정보부가 이읍로의 식객들이 실종되었다고 보고해 왔습니다."
연개소문은 짐작했었다는 듯 끄덕였다. 온사문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오면... 거사는 어느 때에...?"
연개소문이 턱으로 흘끗 대조영을 가리켰다.
“나도 그 일로 이 청년을 부른 것일세."
온사문은 연개소문이 턱으로 가리킨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아니, 자네... 대조영이 아닌가?"
"대모달을 뵙습니다."
-11
"대조영?"
연개소문이 묻자 온사문이 대답했다.
"예, 왜 전에 을지문덕 장군 살아 계실 적에 곽초길 장군과 함께 싸우던 분 있지 않습니까?"
"흐음... 아, 그래! 대중상이라 했던가? 그 양반 무예가 대단했지."
대조영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부친 되십니다."
"과연 범새끼는 다르군. 자네 올해 나이가 몇인가?"
"열 일곱이옵니다."
연개소문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보국군은 승정군, 여기대와 함께 고구려의 최정예인데 열 일곱의 나이에 보국군의 군두에 배치된 것이다.
"대씨 집안은 오래 전부터 출중한 무인들이 많이 나온 곳이지. 하긴... 그렇지 않아도 내 보국장군이 추천한 이라면 능력은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일세. 자, 이걸 받게."
연개소문이 서찰을 내밀었다. 대조영은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지금 바로 국내성으로 달려가 여기대장에게 이 서찰을 전하게. 뭐, 도중에 서찰을 열어보지 말라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은 않겠네. 봐도 별 신통치 않을 테니까."
"선도해 장군 말씀이십니까?"
"그래, 제대로 알았네. 그리고... 내 을지문덕 장군의 밑에서 무예를 닦은 몸이고 자네 부친과 을지문덕 장군은 막역한 사이셨으니 내 자네에게 선물이라도 줘야겠군... 대모달."
"하명하십시오."
"이 친구를 내 무기고에 데리고 가서 아무거나 고르라 하게."
"그러면 염치불구하고 사양 않도록 하겠습니다."
대조영은 예를 올린 뒤 온사문을 따라 대막리지 처소의 무기고로 향했다.
그들이 마당을 지나갈 즈음 어디선가 창대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우웅!
부웅!
탁!
흑치상지가 기다란 봉으로 허수아비를 후려치며 무예를 연습하는 중이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대단히 빨라 보이지도 않았고 그리 유연한 면도 찾아볼 수 없었으나 오히려 유柔를 꺽는 강剛으로서 패도와 힘이 넘쳐흘렀다. 그 힘은 마당 전체를 매워 대조영과 온사문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온사문이 지나가던 걸음을 멈추고 묻는다.
"자네는 지금도 괴물인데 더 강해지면 뭐가 되려고 그러시나?"
흑치상지는 피식 실소를 흘리며 여전히 봉을 휘두르면서 시선은 그대로 둔 채 대답했다.
"제 목표는 천하에 무공을 떨치시던 을지 장군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 말에 대조영은 자신도 모르게 '풋'하는 웃음을 터뜨렸고 온사문은 끌끌 혀를 찼다.
"오늘 자네답지 않게 별 싱거운 농담을 다하는군."
"농담인지, 진담인지는 두고봐야 알겠지요!"
나의 戟은 狂龍의 武威! 그 힘은 하늘에 떨친다!
狂龍振天殲!
흑치상지가 봉을 양손으로 쥐고 자세를 낮추며 광룡진천섬으로 뻗어 허수아비를 찔렀다.
팍!
정확히 심장부위를 찔린 허수아비는 가슴팍만이 동그랗게 파였다. 놀랍게도 흑치상지의 봉은 허수아비를 치지 않고 바로 앞에 멈추어있었다.
대조영은 웃음기를 거두었다.
'대단한 무술이다! 아마 나 같은 자는 백이 덤벼도 이기지 못할 것이다.'
허수아비를 부수는 거야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건 힘 쓸 줄 안다면 뉘댁 하인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봉을 대지 않고 단순히 기세만으로 허수아비를 부수는 자는 고구려 전체에서 손에 꼽는다. 거기에다가 그 기세를 순간적으로 끊는다는 것 자체가 힘들다. 그리고 가장 힘든 것은 허수아비 전체가 망가진 게 아니라 정확히 가슴만 뻥 뚫렸다는 것이다.
흑치상지는 이마의 땀을 슥 닦더니 시선을 온사문 쪽으로 돌렸다.
"그 옆의 도령은 누구십니까?"
온사문이 나서기 전에 대조영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인사를 올렸다.
"대걸걸중상의 아들, 보국군두 대조영입니다."
"존대하실 것 없소. 나는 그저 대막리지의 하인일 뿐이오."
온사문은 허수아비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자네의 무예는 하루가 다르게 느는군. 나와 보국장군 둘이 동시에 덤벼도 힘들겠는데?"
"과찬이십니다. 그나저나 무기고에는 어인 일로?"
"아, 대막리지께서 이 청년에게 아무 무기나 고르게 하라 이르셨네."
"그렇습니까? 잘 됐군요. 마침 제 방천극도 날이 너무 무뎌서 바꿀 게 했는데, 동행하시죠."
-12
끼이이이...
한참이나 손보지 않았기 때문에 대막리지의 무기고치고는 상당히 지저분하고 퀘퀘한 냄새가 코를 찔러대었다.
온사문이 턱짓으로 무기고 안을 슬쩍 가리켰다.
"원한다면 아무거나 고르게."
무기고의 퀘퀘하고 먼지 쌓인 바닥과는 다르게 무기들은 질서정연하게 벽에 걸려 있었고 안시성에서 케낸 좋은 철로 다듬었는지 날이 빛났다.
흑치상지는 한 번 스윽 창고를 둘러본 뒤 뚜벅뚜벅 들어가 십 척에 다다르는 방천극을 집었다. 문에서 들어오는 미미한 빛만으로도 극의 날은 번뜩였고 싸늘한 기운이 느껴지리만큼 날카롭다. 흑치상지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 대조영을 돌아보았다. 뭐라도 골라보라는 눈치이다.
"흐음..."
대조영은 거대한 철편을 만지작거렸다.
온사문이 끼어들며 구석에 처박혀 있는 낡은 가죽집에 들은 검을 집어들었다.
"자네 덩치에 그렇게 커다란 철편을 휘두르는 것은 어울리지 않네. 보국장군이나 흑치상지가 휘두른다면 모를까. 그것보단 이걸 한 번 뽑아보게."
온사문은 대조영에게 휙 검을 던진다.
턱!
대조영은 날아오는 검을 낚아채어 스윽 둘러보았다. 검집은 매우 보잘 것 없다. 그는 검의 손잡이에 손을 얹자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왠지 대단한 느낌인데?'
스르르릉...!
검이 뽑혀나오며 주변에 푸르스름한 기류가 일어 무기고 안을 밝혔다. 흑치상지가 혀를 찬다.
"끌끌... 어디에 처박아 뒀는지 깜빡했는데 이런 곳에 있었군."
대조영은 마른 침을 삼키며 검을 훑어보았다. 검날은 투명하다 못해 푸르스름한 색이었고 칼날은 예리하여 돌덩이라도 두부처럼 자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쪽 검등에는 '新'이라 새겨있었고 반대 검등에는 '帝'가 새겨져있다. 빛을 반사하는 게 아니라 흡사 검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 하다.
대조영은 혼이 빠진 듯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굉장한 검이군요. 이런 걸 제가 가져도 되겠습니까?"
흑치상지는 온사문을 살짝 흘겼다. 연개소문이 가장 아끼는 두 개의 검 중 하나라 일부러 헌 가죽 집에 넣어 구석에 처박아 뒀던 것인데 용케도 온사문이 알아본 것이다. 그는 속이야 떫었지만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막리지는 한 번 하신 말씀은 꼭 지키신다오."
"新... 帝...? 이 검의 이름인가요?"
"신제검, 새로운 왕이라는 뜻이오. 이 검을 얻는 자는 새로운 왕이 된다던가? 하지만 그런 아이들 장난같은 말을 믿는 자가 있겠소?"
대조영은 검을 집에 넣고 허리에 찼다.
"그러면, 전 이만 명을 받들기 위해 물러나겠습니다."
온사문도 말했다.
"흠, 나도 아직 근무 중이니 이만 가보겠네. 대막리지께 인사 전하게."
흑치상지는 둘을 대막리지 처소의 문까지 배웅하고 다시 수련에 열중했다.
국내성 접대실
사각형의 탁자에는 두 명의 중년인이 마주보고 있었다. 한 사내는 문관차림에 어깨에는 금실로 수를 놓았고 네 마리의 학이 새겨진 허리띠를 차고 있었고 그 맞은 편에 앉아있는 사내는 회색의 용린龍鱗갑옷에 흰색으로 '將'이라 써져있는 회색바탕의 전포를 두르고 있었다. 용모를 보아서는 문관차림의 사내가 장수 차림의 사내보다 서열이 높아 보였으나 오히려 문관이 장수를 어려워하는 눈치이다.
중년의 회색 갑옷 장수가 입을 열었다.
"이보시오, 성주. 곡식과 재물이란 참으로 중요한 것이오. 그렇지 않소?"
문관차림의 사내, 국내성주는 선도해의 말뜻을 헤아리지 못해 그냥 대답해버렸다.
"물론이오."
"허나 목숨만큼은 아닐 거라 생각되는구려."
장수 차림의 사내는 탁자 위의 차를 술잔 비우듯 쭈욱 들이켜버리고 '탁'소리 나게 탁자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서, 설마 여기대장이란 자가 으름장을 놓는 게요?"
여기대장, 선도해는 수곡성주의 눈을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어쩔 테요?"
눈을 마주친 국내성주가 몸을 꿈틀거린다.
선도해는 미소를 거두고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콰직!
탁자가 부서지고 둘 사이에는 걸리적거릴 것이 없어졌다. 선도해는 뚜벅뚜벅 걸어가 국내성주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성주라는 자가! 백성들이야 굶어 죽건 어찌 되건 신경도 쓰지 않고 이리도 호의호식하며 사는가?! 그래, 네놈의 뱃속엔 무엇이 들어 그리도 탐욕스러운지 확인해 주랴?!"
"커, 커헉!"
국내성주는 컥컥거리기만 하다가 기절해 버렸다.
선도해는 그를 내팽개치고 접대실 문을 '쾅'소리 나도록 열어젖힌 후 대기하고 있던 최정필最貞珌과 종배숭鐘陪崧에게 명했다.
"국내성주의 모든 창고를 열어 젖혀라! 곡식은 거두어 평양까지의 필요한 양만 남겨두고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재물은 몰수하여 곤궁에 시달리는 자들에게 나누어줘라!"
"존명!"
"존명!"
두 명의 군두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성이 떠나가도록 크게 복명하고 물러났다.
선도해는 직접 창고로 달려가 봉을 휘둘러 문을 부숴버렸다. 여기대 뿐만 아니라 국내성의 병사들까지 따라 나서서 창고들을 열고 곡식과 재물을 거두어갔다.
여기대원들과 국내성의 병사들은 곡식과 재물을 나누어주었다. 국내성의 거리는 거리마다 환호로 가득했다.
"여기대다!"
"선도해 장군 만세!"
최정필이 외쳤다.
"곤궁한 자들은 모두 나서라. 양식은 많고 많다."
종배숭은 끝없이 창고에서 나오는 재물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많이도 쌓아뒀군. 이 정도면 국내성 사람들 전체가 석 달은 먹고 살겠어."
선도해가 말에 올라 거리로 나서자 사람들이 길가에 몰려들어 환호하고 손을 흔들었다. 선도해는 그들을 바라보며 마주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들었다.
그때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던 최정필이 달려왔다.
"대장, 성문 밖에서 대막리지께서 보냈다는 자가 만나길 청한다더구려."
"대막리지께서 보내셨다고? 알았네, 내 군막으로 들이게."
"존명."
선도해는 자신의 군막으로 향했고 최정필은 성문 쪽으로 말을 몰았다.
-13
수도로 돌아오는 선도해의 얼굴에는 수심이 짙다. 옆에 청마를 타고 따라오는 대조영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대를 통솔하며 그 뒤를 따르던 최정필이 종배숭에게 불쑥 말을 던졌다.
"이봐, 종 군두."
"뭔가?"
"왠지 대장의 안색이 어둡군."
"으흠..."
그것 정도야 종배숭도 진작부터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심복 중 심복들인 자신들에게조차 발설치 않는 것을 보면 뭔가 중요한 일일 것이다.
"뭔진 모르겠으나 대장께서 잘 판단하실 게야. 말씀할 때까지 기다려 보세."
이윽고 요시가 다 되어서야 여기대는 평양성에 도착했다. 성문 앞에는 그들 외에도 여기대 한 부대가 더 대기하고 있었다.
최정필이 손을 흔들었다.
"여어, 이게 누구신가? 오사단 군두 아닌가?"
종배숭이나 최정필은 모두 성이 있었으나 검모잠은 천민출신이라 성이 없었다. 그래서 동료들은 그를 그냥 오군두라 불렀다.
비스듬히 대검을 쥐고 있던 검모잠은 말을 몰아 달려온 뒤 말에서 내려 선도해에게 예를 올렸다.
"대장을 뵈옵니다."
선도해는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으흠, 거란을 토벌하러 갔다더니... 벌써 온 건가?"
"예, 지금 출입허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최정필이 발끈하며 나섰다.
"개선군에게 출입허가를 명분으로 기다리라니, 당치도 않군!"
선도해도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몰아 성문지기에게 다가갔다.
"나는 태고구려의 여기대장 선도해다. 문을 열어라."
병사들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중 군두로 보이는 자가 송구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변명했다.
"저어... 모든 군대는 태왕폐하의 명을 받기 전에는 성문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뭐라? 도대체 그 따위 법은 누가 만든 것이냐?"
"그게... 국상께서 제안하셨다고..."
최정필이 나서서 말을 끊고 쌍창을 군두에게 들이밀었다.
"그래서, 외지에서 죽을 고생을 하다 온 개선군의 앞을 막겠다는 것이냐?"
같은 군두였지만 여기대의 군두와 일반 군두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군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에 성문이 열리며 치안을 돌보고 있던 대모달 온사문과 보국장군 곽도지가 걸어나왔다.
온사문이 선도해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성문에 한 때의 군마가 도착했다 기에 와보았더니 여기대장이셨구려. 참으로 반갑기 그지없소."
"그래, 자네도 오랜만일세."
곽도지는 씨익 웃으며 농을 건넨다.
"여기대장께서는 하루가 다르게 나이를 먹는구려."
"자네도 하루가 다르게 험악해지는군."
군두는 온사문을 보고 예를 올렸다.
"대모달을 뵈옵니다."
"이 사람들을 들여보내라. 모든 일은 내가 책임지마."
"예? 하오나..."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아, 아니옵니다. 명대로 따르겠나이다."
군두는 병사들에게 물러나라 명하고 온사문에게 예를 올린 뒤 자신도 같이 물러났다. 여기대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평양에 입성하였다.
-14
야심한 시각 평양성 태왕전
국상 이읍로 및 기타 대신들은 이미 물러간 뒤였고 태왕전에는 태사의에 앉은 영류왕과 그 앞에 한 쪽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중년인만이 있었다.
중년인이 입을 연다.
"여기대장 선도해, 태왕 폐하를 알현하옵니다."
"여기대장, 그대는 어찌 짐의 명도 없이 태왕전에 들었는가?"
"폐하, 신이 듣자하오니 모든 군대는 평양성의 출입을 위해서는 폐하의 어명을 기다려야 한다고 들었사옵니다. 사실이옵니까?"
"그렇다. 짐이 군사들을 통제하고자 하는데 뭐가 잘못되었는가?"
선도해가 고개를 들어 영류왕을 마주보았다.
"폐하, 평양에서 군사의 지휘권은 대모달에게 있사옵니다. 게다가 명이 없이는 입성할 수 없다니요? 소장의 부하들은 여진과의 싸움 때문에 피로해있고 귀환 중 군량마저 떨어졌사옵니다. 나라를 위해 오랑캐를 토벌하고 온 저희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이 이런것이란 말씀이옵니까?"
종내에 가서는 따지는 듯한 어투로 변하자 영류왕은 차분히 타일렀다.
"어허, 무엄하다. 여기대장은 목소리를 낮추라. 짐이 군대의 통행을 관리하려 함은 최근 국상의 말에 따르면 나를 도모하려는 반역의 무리들이 있다하는 고로, 내 우리의 군대인지 반역의 무리인지 구분해내기 위해서이니라."
"... 알겠사옵니다. 무례한 소장을 너그러이 용서해주신 성은에 황공하옵니다."
선도해는 예를 올린 뒤 태왕전을 빠져나갔다.
한편, 연개소문의 저택
허름하고 화려하지도 않으나 각이 살아있어 강인한 인상을 주는 웅장한 저택이다. 저택 앞에는 두 명의 장년인이 감회에 젖은 듯이 대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년 만일까, 흑치상지?"
"..."
연개소문이 나직이 물었지만 흑치상지는 굳이 대답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연개소문 역시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니까.
끼이익...
거대한 대문이 신음을 내며 열렸다. 너른 마당과 수련을 위해 설치해 놓은 허수아비, 을지문덕의 석상, 그리고...
"아버지!"
이제 열둘이나 되었을까? 연개소문을 닮은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그의 허리에 매달렸다. 연개소문의 얼굴에 언뜻 미소가 번졌으나 그는 다시 냉막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남생이 이놈! 내가 싸우지 말라 하였거늘... 그 얼굴에 난 손톱자국은 무엇이더냐?"
연남생은 퍼뜩 놀라더니 소매로 광대뼈 부분을 가렸다.
"이건 개한테 밥을 주다가 할퀸 거에요."
보고 있던 흑치상지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연개소문은 짐짓 엄한 표정으로 호통을 쳤다.
"네 어미없이 자란 자식이라 남들에게 천시 당하고 싶은 게냐? 늘 성정을 죽이고 참을 줄 알라 일렀거늘... 덩치만 자랐지 생각은 조금도 자라지 않았구나."
"피이... 오랫만에 오시고서는 겨우 그런 말씀만 하세요?"
연남생은 시무룩한 얼굴로 연개소문을 흘끔흘끔 보다가 대문 밖으로 뛰쳐 나가버렸다. 흑치상지가 잡으려 했으나 연개소문이 말렸다.
“저 따위 못난 놈은 내버려두게!”
"그래도 도련님께 좀 심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후우... 아내가 일찍 죽지만 않았어도 자식 놈 교육은 제대로 시켰을 텐데..."
“...”
둘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때 연가장의 총관이 맨발로 뛰쳐나왔다. 이제 막 초로에 든 총관은 그의 아버지인 연태조가 동부대인일 적부터 총관을 죽 맡아온 자로서 살짝 굽은 허리에 긴 수염, 붉으스름한 대추빛 얼굴이 인상 좋은 노인이다.
"동부대인, 동부대인! 오오, 이제야 오셨습니까?"
연개소문은 얼굴을 피고 총관의 손을 마주잡았다.
"오랫만이오, 총관. 여전히 건강해 보이시는구려. 그리고 나는 이제 동부대인이 아니라 대막리지요. 사실 엊그제 도착했는데 이틀은 대막리지의 처소에서 묶고 왔소."
총관은 아무렴 어떠냐는 듯 연개소문과 흑치상지를 방으로 데려가 연개소문이 떠난 사이에 일어난 일을 주욱 늘어놓았다.
한 동안 담소를 나누던 연개소문이 문득 입을 열었다.
"아, 총관. 연회 준비를 하려면 얼마나 걸리겠소? 이곳에서 말고... 다른 장원을 빌려서 말이오."
"연회 말씀이십니까? 다른 장원이나 공터에서요?"
"그렇소."
"우리 연가장의 가산이 다른 가문에 비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나 연회 준비하는데는 나흘 안이면 충분합니다. 참, 인원은 얼마 정도...?"
"백 명 내지는 이백여 명이 될 거요. 해 줄 수 있겠소?"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 날 밤은 흑치상지와 연개소문, 총관 셋 모두 거나하게 술에 취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15
평양성의 태왕전
늘 그렇듯이 평정이 열리고 형식적인 인사와 몇 마디 시시콜콜한 주제의 사항이 건의되고 그럴 듯한 건의는 받아들인 뒤 영류왕은 더 이상의 건의가 없는 걸로 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오늘은 이만 해산토록 하겠소. 다들 수고하셨소."
문무백관들이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영류왕이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영류왕이 태왕전을 나가자 그제야 하나 둘 고개를 들고 서로 담화를 나누며 밖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잠시만, 여러 대신들께서는 소장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태왕전의 입구를 막아선 이는 다름아닌 대막리지 연개소문이었다.
국상이 앞으로 나서 그의 눈을 쏘아보았다. 석주령은 바로 연개소문의 옆에서 검의 손잡이에 오른 손을 얹고 있었다. 허튼 짓 하면 목을 날려버리겠다는 뜻이다.
"여기 있는 분들도 바쁘신 분들이 많으시니 시간 끌지 마시구려."
"아아, 제가 드릴 말씀은 다름이 아니오라... 이제 천리장성의 축조도 마쳤으니 그 완공 기념으로 용락호龍落湖근처의 공터에서 한 상 차리고자 합니다. 여러 문무백관들께서는 빠짐없이 들려주십시오. 물론 국상께서도 자리를 하셔서 연회를 더욱 빛내주시리라 믿습니다."
연개소문은 이읍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의미 모를 미소를 흘렸다.
그가 말을 마치고 태왕전을 나서자 대신들이 웅성거렸다.
"대막리지가 드디어 우리에게 고개를 수그리려는 심산이지 않겠소?"
어느 대신이 조심스레 말하자 다른 이들도 동조하며 이내 태왕전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다만 국상인 이읍로만이 미간을 구겼다.
'연개소문... 무슨 꿍꿍이를? 설마 이 자들을 다 죽일 리는 없을 텐데...'
그 날 밤
용이 떨어져서 파인 구멍에 물이 차여 만들어진 호수라는 용락호의 빼어난 광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공터에는 한참이나 연회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가장 상석에는 자리가 두 개 있었는데 한 곳에는 주최자이자 대막리지인 연개소문이 앉아있었고 그 옆에는 국상인 이읍로의 자리였으나 오늘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빠진 고로 공석으로 남겨두었다.
다른 연회와는 달리 연씨 가문의 재력이 미미한 편이다 보니 기생이라던가 악단을 데려다 음악을 연주하게 할 수는 없었지만 고급스러운 술과 기름진 음식만으로도 대신들은 연개소문이 자신들을 인정해 준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후후, 그래... 실컷 먹어들 두거라. 어차피 얼마 있지 않으면 죽은목숨일 테니.'
연개소문은 속으로 찬웃음을 흘리면서도 겉으로는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대신들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다들 적당히 취해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자 연개소문이 손을 들어 주목을 끌었다.
"저희 연씨 가문의 재력이 미미한 고로 악단도 없고 여자도 없으나 다만 무인들이 많은 집안답게 쓸 만한 무사들이야 몇 있사옵니다. 소장의 하인 중 칼춤을 잘 추는 이가 있으니 여러 분 앞에서 칼춤을 추게 하여 흥을 돋구고자 하옵니다. 어떻습니까?"
평소 같았으면 칼춤이라는 말에 뭔가 꺼림칙한 것을 느꼈을 터이지만 다들 거나하게 취한지라 연개소문의 속뜻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거 볼만 하겠수다!"
"하하, 칼춤이라... 한 번 해보시구려!"
여기저기에서 찬동과 재촉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연개소문은 하인을 시켜 흑치상지를 불러왔다. 흑치상지는 두 자루의 칼을 들고 사방으로 한 번씩 대신들에게 절을 올렸다.
이윽고 칼춤이 시작되었다...
흑치상지는 망나니들이 죄수의 목을 칠 때에나 휘두르는 커다란 칼을 두 개 양손에 쥐고 처음에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다가 점점 칼을 휘두르는 것이 빨라져 나중에는 횃불에 비쳐서 붉어진 검광만이 번뜩였다. 대신들은 흑치상지의 칼이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우리만큼 빨라지자 어지럼증을 느끼며 연개소문에게 그만 둘 것을 요구했다.
"... 쳐라."
연개소문의 입에서 나직이 명이 떨어졌다. 순간 음식을 나르던 하인들이 대뜸 칼을 꺼내들고 대신들의 목을 내리쳤다.
"여, 연개소문!! 네 이놈이!!"
대신들은 술기운이 확 달아나며 다들 살아보려 발버둥을 치고 애원도 해보았다. 하지만 흑치상지까지 가세한 가운데 살아날 대신은 아무도 없다.
일 각도 되지 않아 이백여 명의 대신들은 모조리 피떡이 되어 연회장에 뒹굴었다.
연개소문은 무심한 눈으로 사지와 목이 나뒹구는 연회장을 바라보다가 하인들에게 명했다.
"시체들을 모조리 호수에 던져버려라!"
그리고 하인 한 명에게 명했다.
"너는 지금 대모달에게 달려가 일을 도모하라 이르라! 흑치상지와 나는 곧장 태왕전으로 향한다."
태왕전, 태왕의 침소
환관 한 명이 급한 듯이 침소로 들어왔다. 평소 같았으면 즉시 사형에 처해질 일이지만 환관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다.
영류왕은 부스스 눈을 뜨고 귀찮다는 듯 환관을 노려보았다.
"그대는 어찌 짐의 명도 없이 함부로 침소에 드는가?"
환관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폐, 폐하! 어서 옥체를 피하시옵소서! 지금 바, 반역이 일어났다 하옵니다!"
"무, 뭣이!? 반역?!"
"신이 듣기로 미추홀 내에서 승정군과 보국군이 충돌하였다 들었사옵니다."
영류왕은 한 동안 망연자실해 있다가 불쑥 환관에게 물었다.
"반역의 수괴가 누구더냐? 혹시 대막리지 연개소문이더냐?"
"송구스럽습니다만 거기까지는 밝혀진 바가 없고... 다만 보국군을 선동한 이가 대모달 온사문과 보국장군 곽도지라고..."
"이런 고얀지고!! 당장 여기대장 선도해와 승정군장 석주령을 부르라!"
"하오나 지금은 먼저 옥체를 피하셔야...!"
"시끄럽다! 감히 짐에게 훈계를 하려는가?!"
환관은 뜨끔한 표정으로 엎드려서 그저 살려달라고만 빌고 황급히 침소를 빠져나갔다.
"승정군 따위 조무래기들을 상대할 시간이 없다! 이읍로를 찾아라!"
곽도지가 한 손에는 패도를 쥐고 한 손에는 보국검을 쥔 상태로 승정군들을 헤집으며 주변의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대모달 온사문은 석주령과 마주한 거대한 도끼를 비켜 쥐고 서로 틈을 노렸다.
“신의 있고 충의로운 자라 믿었건만...”
석주령은 온사문과 대치한 상황에서도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사문, 끝내 이래야만 하겠소?”
온사문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변명 따위는 할 생각 없소. 용서를 바라지도 않을 것이오. 나는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일 뿐, 그대 역시 마찬가지일 테니 피차간에 후회 따위는 없겠지.”
석주령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온사문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연개소문은 태왕전의 후문을 들이쳐 가병들을 이끌고 승정군과 맞섰다. 흑치상지는 소수 가병들을 데리고 태왕전의 담을 넘어 열세에 몰린 보국군들을 구출했다.
반면 승정군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밀리고 있는 데 유독 태왕전의 국고를 지키는 병사들만은 결사적으로 막아서고 있었다. 그들을 이끄는 장수는 이제 막 서른이나 되었을까 싶은 젊은 군두였다.
그는 두 자루 철곤을 사납게 휘둘러 보국군들의 머리를 부숴 버리며 우렁차게 고함을 질렀다.
"반역당들을 막아라! 우리는 태왕폐하의 군사들이다! 물러서는 놈은 내 쌍편이 용서치 않으리라!"
와아아아!!
그가 이끄는 소수의 승정군은 사기충천하여 중과부적임에도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흑치상지가 보국군들에게 물러나라 한 뒤 쌍편을 든 젊은 장수와 마주섰다. 흑치상지가가 나직이 물었다.
"너는 누구냐?"
젊은 장수가 들고 있는 철편에 돋친 가시에서 살점과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는 가슴을 당당히 펴고 철편으로 흑치상지를 가리키며 호통을 쳤다.
"반역도에게 알려 줄 이름 따위는 없노라! 나는 그저 자랑스런 태고구려의 승정군두다! 반역의 우두머리인 연개소문은 어서나와 나의 철편을 받으라!"
짝짝짝
저만치 전투를 치러 피를 뒤집어 쓴 연개소문이 어둠 속에서 가병들과 함께 나타났다. 그는 박수를 치며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못 본 친구인데, 대단하군. 하지만 이걸 어찌하나? 나도 죽기는 싫거든. 대신 흑치상지가 자네를 상대해 줄 걸세. 아마 멋진 승부가 될 게야."
흑치상지는 방천극을 쥐고 승정군두에게 겨누었다.
"승정군두건 태왕폐하건 상관없다. 다만 우리 주군의 앞을 막는다면 내 방천극을 피할 생각은 버려라."
그의 전신에서 진득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젊은 장수 역시 지지 않고 철편을 쥐며 흑치상지를 향해 쇄도해갔다.
-16
戟의 秘技! 그 힘은 달을 베노라!
半月斬!
흑치상지의 방천극이 반달을 그리며 승정군두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승정군두는 두 자루 철편을 땅바닥에 끌며 달려오다가 일시에 폭발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방천극을 향해 올려쳤다.
나의 鞭은 泌晟義의 破! 破碎의 極!
破天雙龍鞭!
카가강!
흑치상지의 방천극과 쌍편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승정군두의 팔이 튕겨 나온 쌍편의 힘에 의해 젖혀졌고 흑치상지의 방천극 또한 뒤로 날아갈 듯 무서운 기세로 젖혀졌다.
"을가신공乙家身功?"
으드득!
쌍편을 꼬나 쥐고 자세를 바로잡은 승정군두의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새나왔다. 흑치상지는 방금 충돌에서 느껴진 낯설지 않은 사내의 기운이 을지문덕의 비기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상대의 동요야 상관없다는 듯 이번에는 승정군두가 먼저 쌍편을 질풍같이 휘돌리며 오른쪽 철편을 흑치상지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부웅!
흑치상지는 재빨리 고개를 수그렸으나 대단한 기세가 머리 위를 가르고 지나가자 자신도 모르게 몸이 뭔가에 눌리는 갑갑함을 느꼈다. 승정군두의 연환 공격인지 왼쪽 철편이 옆구리를 노렸고 빗나간 오른쪽 철편도 흑치상지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나의 戟은 狂龍의 武威! 그 힘은 하늘에 떨친다!
狂龍振天殲!
철편이 머리에 떨어지는 순간 흑치상지의 고개가 최대한 왼쪽으로 틀어지며 그의 양손이 방천극을 쥐고 반 바퀴를 회전하였다.
머리를 공격하던 철편이 아슬아슬하게 흑치상지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고 옆구리를 공격하던 철편은 방천극의 창대에 가로막혔다. 그 이후 흑치상지의 신형이 광룡진천섬의 기세로 승정군두의 목을 노리고 섬광 같은 속도로 달려나갔다.
'거리가 없다!'
연개소문은 흑치상지의 승리를 확신했다. 본래 곤이란 무기에 비해 극이 오히려 더 많은 거리를 확보해야 하나 흑치상지는 근접전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창대를 좁게 잡고 단검처럼 휘두르는 것에도 능숙하였다.
승정군두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쪽 철편을 놓아버리고 다른 철편을 양손으로 쥐고 찔러오는 방천극을 향해 휘둘렀다.
나의 破碎는 狂龍의 기세를 꺽는다!
狂龍破勢!
'설마...!'
연개소문의 눈이 부릅떠졌다.
파캉!
승정군두는 철편으로 흑치상지의 찌르기를 막은 것이다. 그것도 창끝을 정확히 조준해 내려쳐서...
챙그랑!
흑치상지의 방천극 날이 깨지며 파편이 휘날렸다.
쿵!
잠시 후 승정군두의 철편도 깨끗이 잘려서 땅바닥에 떨어져 박혔다.
한 동안의 정적이 흐른 뒤 둘의 입이 동시에 떨어졌다.
"내가 졌다."
"내가 졌다."
방천극 날의 파편이 튀면서 긁혔는지 흑치상지의 미간에는 길게 혈흔이 새겨져 있었다. 반면 승정군두는 목에 길게 선혈이 그어져 있었다.
연개소문이 정적을 깨트리고 통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러면 비겼군. 승정군두, 어떠한가? 이래도 내 목을 가져갈 자신이 있는가?"
두 사람은 아직도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연개소문은 주변의 병사들에게 명했다.
"저 군두와 저자가 이끄는 승정군은 보내주거라."
그리고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비겼으니 자네를 공격하지 않겠네. 하지만 자네도 떠나주어야겠어."
승정군두가 잘린 철편을 집어들었다. 승정군 한 명이 얼른 다가와서 그의 쌍편을 건네받았다.
보국군들이 길을 열었다. 승정군들이 그 사이를 다 지나가고 마지막으로 승정군두가 흑치상지에게 말했다.
"내 이름은 양수봉. 안시성주 양만춘의 조카다. 승부를 내고 싶다면 안시성으로 찾아와라."
그는 피로 물든 전포를 휘날리며 보국군 사이를 걸어가다가 연개소문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대역죄인인 당신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오. 차후에 숙부께서 당신의 목을 받으러 오실 터이니 그때까지 부디 죽지 마시구려."
연개소문은 늘 여유 있었다. 그는 팔짱을 끼며 씨익 웃어 보였다.
"좋을 대로."
재주 있으면 해보라는 뜻이다.
한참이나 그를 노려보던 양수봉은 황궁을 나섰다.
그가 떠난 후 연개소문이 보국군들의 대열을 정비하자 대조영이 달려왔다. 전신에는 피를 뒤집어 써서 처참한 살육전을 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명검인 신제검에는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대막리지, 승정군을 몰아내었습니다."
"그래. 이제 태왕폐하를 알현할 때이군. 헌데... 여기대장은 어떠한가?"
"실은 그게..."
대조영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연개소문이 괜찮다는 듯 슬며시 웃었다.. 대조영은 말을 이었다.
"현재 여기대의 움직임은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승정군의 편을 들거나 보국군을 공격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만일 다른 이들이라면 대세파악도 못하고 눈치만 본다 비웃을 것이나 상대는 선도해였다. 그에게 반역에 가담하라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을 주는 일이었고 그의 충정을 가장 잘 아는 연개소문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대장이 눈감고 지나가 준 것만 하여도 우리편을 들어준 것일세. 그 사람으로서는 속이 쓰라리겠지..."
흑치상지는 아직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미간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대조영이 자신의 전포를 찢어 흑치상지의 이마를 감아주었다.
"어찌 여포장군의 이마에 생채기가 생기셨습니까?"
대조영이 흑치상지의 표정을 보고 평소 그 답지 않게 농을 건넸으나 흑치상지는 아무 반응이 없다.
연개소문이 대조영의 팔을 끌었다. 그리고 나직이 그의 귀에 말했다.
"놔두게, 방금 싸움에서 뭔가 얻은 게 있나보지. 그건 그렇고... 이제 태왕폐하를 알현할 시간일세. 대 군두, 보국장군과 보국군장을 데려오게."
"존명."
-17
콰쾅!
폭약이 터지는 듯 태왕전의 문짝이 날아갔다.
털썩
승정군의 시체 두 구가 나뒹굴었다.
그리고 가슴팍에는 '태고구려 대막리지'라 새겨진 갑옷을 입고 어깨에는 피에 절은 황색 전포를 둘렀으며 손에는 길이가 사 척에 다다르는 긴 용승검을 든 연개소문이 저벅저벅 걸어들어왔다.
그 뒤로 대조영의 전포를 찢은 조각으로 머리를 감싼 흑치상지, 허리에 보국검을 차고 불량스런 자세로 패도를 어깨에 걸친 곽도지, 단정한 자세로 신제검을 들고 있는 대조영, 커다란 만도를 차고 있는 대장군 개천달 등이 나란히 들어왔다. 그 뒤로 정변에 참여한 여러 무장들이 걸어 들어왔다.
영류왕은 용의에 앉아 연개소문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서는 분노가 일렁거렸다.
"연개소문! 내가 네놈에게 고개 숙이며 목숨을 구걸할 것처럼 보이더냐! 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용의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연개소문은 말 없이 영류왕에게 걸어갔다.
"대역무도한 놈! 내가 주는 녹을 먹고살면서 어찌 나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이냐! 네놈은 당과 우리 고구려의 전쟁으로 백성들이 죽어나가길 원한단 말이냐!"
단상을 걸어 올라온 연개소문과 영류왕 사이의 거리는 일 장도 채 되지 않았다. 침묵을 지키던 연개소문이 입을 열었다.
"중원 오랑캐들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소. 이미 당은 노골적으로 우리 고구려의 백성들을 수탈하기 시작했소이다. 그 약탈은 바다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서로 정면전을 펼칠 날은 멀지 않소."
그가 천천히 용승검을 뽑았다.
"내 시시한 대의명분 따위는 내걸지 않으리다."
푸욱!
용승검이 태사의에 앉은 영류왕의 심장에 박혔다.
영류왕의 입에서 바람 새는 듯한 소리가 흘렀다.
연개소문은 용승검을 집어넣으며 눈을 감았다. 그가 들릴 듯 말 듯 조용히 영류왕에게 말했다.
"태왕 폐하... 대역무도한 신을... 용서치 마소서..."
연개소문이 몸을 돌리면서 감겼던 그의 눈이 번쩍 떠졌다.
"태왕의 시체를 용락호에 버려라! 그리고 사로잡은 승정군장을 끌고 와 참수하라! 또한 여기대장에게는 명령이라 전하고 데려오도록 하라!"
"존명!"
전령을 맡은 장수들이 미추홀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다리 한 쪽이 온사문의 도끼에 찍혀 피범벅이 된 석주령이 병사들에게 끌려왔다. 연개소문은 무심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석주령은 억지로 무릎꿇지 않고 버티며 연개소문을 노려보았다.
"으드득! 이 연가 놈아! 네놈이 어찌 태고구려의 사직을 망치려 드느냐! 태왕폐하를 시해한 네놈이 무사할 성싶더냐!"
연개소문이 나직이 말했다.
"후우... 더 할 말 있소?"
석주령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이 은혜도 모르는 개돼지 놈아! 사 대를 대막리지를 지내온 집안 놈이 무엇이 모자라서 반역을 일으키느냐! 내 지금 너를 벨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베어라."
연개소문의 말이 떨어지자 흑치상지의 방천극이 떨어져내렸다.
털퍼덕...
승정군장 석주령의 수급이 땅바닥에 뒹굴었고 그의 육체는 앞으로 무너져버렸다.
"안타깝게 되었군. 충신이었는데..."
연개소문이 그의 수급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 어디에서도 안타까운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잠시 후 대모달 온사문이 이읍로의 수급을 쟁반 위에 담아 가지고 들어왔다.
"이읍로의 목이옵니다."
개천달이 잠시 주춤거리다가 앞으로 나섰다.
"대막리지, 헌데... 이읍로와 석주령 및 대신들의 식솔들은 어찌 할까요?"
"놔둬라."
의외의 답변에 곽도지의 눈이 둥그렇게 되었다.
"무슨 말씀이시오? 그들의 식솔들을 놔두면 무슨 후환이 생길지..."
"보국장군, 예로부터 사람의 행실을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하였네. 그들은 우리와 생각하는 바가 달랐을 뿐 모두 고구려의 백성들이었네. 피는 이걸로 충분할 걸세."
그는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치 오늘 할 일이 끝난 것처럼 기지개를 쭉 펴고 태왕전을 걸어나갔다.
"자, 오늘은 해산이다."
"주군, 밤이 늦었습니다."
벌써 세 시진 반 째 술만 들이키고 있었다. 흑치상지는 한 시진 전부터 계속 말리려 했으나 연개소문은 그마저 무시했다.
"후후, 상지. 아무리 마셔도 취하실 않는데 이 어찌하면 좋은가? 아마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날 죽이려 하셨을 게야."
흑치상지는 굳건한 목소리로 부인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선주께서도 똑같은 결단을 내리셨을 겁니다."
연개소문은 탁자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는 괴로운 듯 쥐어짜는 목소리로 흑치상지에게 말했다.
"제기랄, 오늘만 놔두게. 제발... 내일부터는 정신 차릴 테니. 지금은 혼자 있고 싶네."
"..."
흑치상지는 말 없이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그 이후...
천하는 빠르게 돌아가고 영류왕이 시해당한 지 보름이 안되어 나이 어린 조카 보장왕이 등극했다. 연개소문은 선도해를 참모로 삼고 한 편으로는 군사를 길러 신라의 공략에 나섰다.
한 달이 지나자 태왕전은 새로운 인사들로 채워지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야속하게 죽은 이들을 잊어갔다.
장군부
선도해와 연개소문이 마주 앉아 있고 그들 사이의 탁자 위에는 고구려와 당의 경계선과 요서의 벌판이 그려진 지도가 있었다. 선도해가 통정진을 짚으며 말했다.
"대막리지, 통정진의 병력은 최소한의 경비대를 남기고 후방으로 물려 천리장성의 병력을 강화하는 게 옳을 듯 싶습니다."
"아니, 통정진은 안시성과 요동성으로 통하는 요충지잖소? 그곳에서 당태종의 병사들이 갈린다면 우리 군은 각개격파 당할 것이오. 여기대장은 무슨 다른 생각이라도 있는 거요?"
"통정진은 분지입니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어서 공격자가 안을 들여다보는데 이롭기 때문에 방어의 이점을 하나도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약점만이 많은 곳입니다. 차라리 통정진을 포기하고 이곳 회원진을 지킨 뒤 당의 대군이 빠져나간 통정진을 회원진의 군대로 친다면 적의 보급선을 끊는 것이 쉬워집니다."
"여기대장께서는 과연 병법에 통달하셨소."
"과찬이십니다."
연개소문은 지도에 몇 가지를 표시한 뒤 옆에 있던 흑치상지에게 건넸다.
"흑치상지, 통정진의 총대장에게 이대로 전하게."
"존명."
나가려는 흑치상지를 선도해가 붙잡았다.
"아, 그런데 신라 공격은 어떻게 되어 가는가?"
"현재 보국장군과 종 군두가 출진 준비중입니다. 이미 훈련이나 편성은 마무리되었고 내일 출병할 예정입니다."
"대막리지, 아무리 보국장군이 용맹하고 종 군두가 뛰어난 지장이라지만 오천의 군사로는 비열흘을 함락시키기 중과부적입니다."
"알고 있소. 그래서 두 군데의 원군이 있소."
"원군이라시면...?"
"수곡성주 양세강이 이만의 병사를 이끌고 지원할 것이고 한강 유역을 얻지 못한 백작도 어느 형태로든 도와줄 거요."
"아, 그렇군요."
나제동맹의 배반으로 백제의 신라에 대한 원한은 뼈까지 새겨져 있었다. 연개소문은 그를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열흘과 한강 지방을 수복하려는 뜻은 신라와 백제의 복종이 아니라 당의 도발이오."
"당의 도발이라니요?"
"후후, 두고 보시오."
다음날
"잘 다녀오게. 개선식에서 보자고."
흑치상지는 곽도지의 어깨를 굳세게 붙잡았다. 그리고 손수 흑치상지의 허리에 패도를 묶어주었다. 곽도지는 힘차게 흑치상지의 손을 마주쥔 뒤 말 위에 올랐다. 종배숭은 선도해에게 고개를 숙여보인 뒤 최정필과 인사 몇 마디를 나눈 뒤 대열의 앞에 나섰다.
"진군이다!"
우뢰와 같은 곽도지의 명령에 여기대 오백이 힘차게 출발했고 그 뒤에 보국군 천과 나머지 병사들이 뒤따랐다.
한편 당의 조정...
"뭣이!"
쾅!
이세민이 태사의를 내리쳤다.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숨이 거칠어졌다.
"감히 동쪽의 오랑캐 따위가 내 의지를 대신한 사신을 내칠 수가 있단 말이냐! 내 당장 이놈들을 찢어죽이리라!!"
그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때 침묵을 지키던 신하들 중에서 한 명이 나서서 그를 말렸다.
"폐하, 아직 돌궐의 잔당이 남아있고 북의 융족들 역시 움직임이 심상치 않사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아직은 시기상조로 판단되오니 깊게 생각하시옵소서."
이세민이 으드득 이를 갈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내 융족만 정벌하고 나면 바로 동이를 멸할 것이다!"
-19
고구려군의 군사 회의실
종배숭이 입을 열었다.
"현재 비열흘에 잠입한 첩자로부터의 정보에 따르면 적들의 경비가 삼엄하고 최근 고구려의 정변소식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내비치고있다 하오."
곽도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제 놈들이 빌붙어야 할 지, 아니면 맞서 싸워야 하는지 염두를 굴리는 거요. 하여간 신라 놈들은 마음에 안 들어. 그런데 경비가 철통같다면... 어디, 배치도 좀 봅시다."
첩자가 보내온 서신에는 비열흘의 성곽 구조와 군사들의 배치상황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곽도지가 욕과 함께 패도의 손잡이를 탁 때렸다.
"이런 제기랄, 정말 뚫을 곳이 없구료."
"이래서는 정면전으로는 뚫을 수 없소. 수곡성주의 원군을 기다림이 어떻겠소?"
"아니, 그건 안될 말입니다. 당초 수곡성주의 병력은 비열흘을 함락시킨 뒤 치안유지와 방어를 위한 원군이외다. 만약 그들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면 신라가 우리의 움직임을 눈치챌 것이오."
다들 곽도지를 괄괄하고 별 생각 없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으나 사실 그의 판단력은 종배숭 이상으로 냉정한 면이 있었다. 적어도 전쟁에 한해서지만...
"으흠... 그렇다면 좀 위험하나 계책 한 가지를 써봅시다."
"무슨 계책 말이오?"
"지금 비열흘의 통행은 엄격히 통제되고 있소. 낮의 잠깐이 아니고는 호족들 역시도 허가를 맡아야만 성문을 열어주지요. 허나 내가 내일 자시에 성문을 열어보겠소이다."
종배숭은 곽도지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곽도지는 내심 좀 불안했으나 승낙했다.
"종 군두를 믿어보겠습니다."
다음 날 비열흘의 병용 마굿간
탐라에서 자란 건장한 말들은 전쟁에 나가기를 기다리는지 힘차게 투레질을 해대었고 마굿간지기는 코를 틀어막으며 말들의 똥을 삽으로 퍼내고 있었다. 그때 허름한 옷차림의 사내가 그에게 다가왔다.
"어이구, 이게 누구신가?"
마굿간지기는 뒤로 돌아 그를 돌아보았지만 처음보는 얼굴이었다.
"실례지만 누구신가?"
"쯧, 사람하고는... 아니, 나를 잊었단 말인가?"
그가 섭하다는 표정을 짓자 마굿간지기는 왠지 그가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래... 내 자네를 어찌 잊겠는가?"
결국 그도 덩달아 아는 척을 해버렸다. 허름한 옷의 사내, 종배숭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비열흘 성주께서 이곳에 말을 보관하신다 들었네. 사실인가?"
"암, 물론. 내 이 비열흘에서 최고가는 마굿간지기인걸."
마굿간지기는 가슴을 내밀고 으스대었다.
"저 말이 바로 성주님의 애마일세."
그는 윤기나는 갈색털의 말을 가리켰다. 종배숭으로서는 마침 물어보기도 껄끄러웠던 차에 아주 잘 된 일이었다. 종배숭이 마굿간지기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자, 가세. 이럴 게 아니라 내 한 잔 사겠네."
종배숭은 마굿간지기를 근처 술집으로 데려가 방 하나를 빌리고 그에게 수면제를 탄 술을 먹였다. 마굿간지기는 그대로 쓰러져버렸고 종배숭은 그의 옷을 벗겨 자신이 입은 뒤 입에 자갈을 물리고 사지를 꽁꽁 묶어 구석에 처박아 놓았다.
"미안하게 됐군. 하지만 보는 사람이 있으면 누군가는 구해주겠지. 물론 비열흘이 함락된 이후에 말이야."
그는 문득 옷에 대고 코를 킁킁거렸다. 그리고 인상을 팍 찡그렸다.
"옷 좀 빨지. 말똥 냄새 한 번 더럽군."
그날 밤 자시 경...
성주의 저택 대문을 말똥 냄새를 풀풀 풍기는 사내가 두드렸다. 하인이 문을 열어보고 종배숭을 구걸하려는 거지로 오해했는지 인상을 팍 구기며 대뜸 주먹부터 날렸다. 하지만 그냥 맞아줄 종배숭이 아니었다.
"어이쿠!"
그는 몸을 움츠러트리는 척 하면서 하인의 장단지를 걷어찼다. 하인은 그대로 넘어져서 데굴데굴 구르고 큰 소리로 '나 죽네.'를 연발했다. 그러자 잠시 후 저택의 총관이 우락부락한 표정으로 몽둥이를 들고 열댓 명의 장정들과 우르르 몰려나왔다.
"어떤 쌍것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한 밤 중에 난리더냐!"
종배숭은 바짝 엎드려 싹싹 빌었다.
"나으리, 제가 죽일 놈입니다요. 저는 그저 성주님의 애마가 사라졌다는 것을 고하러 왔을 뿐인데 이분이 글쎄 대뜸 주먹을 휘두르더니 제풀에 넘어..."
"뭣? 성주님의 애마가 사라져?!!"
"아, 그렇다니까요."
총관이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갔다가 속옷차림의 성주와 함께 헐레벌떡 뛰어왔다. 성주가 얼굴까지 벌게져서 물었다.
"내 애마가 사라졌다고?! 어디로 갔는지는 아느냐?!!"
"글쎄 고것이... 제가 오늘은 일이 있는 바람에 오후 종일 자리를 비운 게 아닙니까? 그런데 방금 돌아와 보니 그놈이 없어졌더라구요. 혹시 본 사람이 있나 수소문해보니 어느 경비가 성 외곽에서 본 일이 있다고 하던데..."
"그 경비의 이름이 무어냐? 내 당장 그놈에게서 캐내야겠다."
"소인도 초면이었던 사람인지라..."
"제기랄, 병사들을 풀어 성 주변의 숲을 샅샅이 뒤지라고 해!"
성주가 신경질적으로 총관에게 빽 소리쳤다.
"그리고 이놈은 감옥에 처넣어버려! 말을 찾지 못하면 넌 사형이다. 알아들었어?!"
종배숭은 엎드려서 울고 불며 애원했다.
"아이고, 제발 목숨만 살려줍쇼. 저한테는 칠순이 넘으신 노모가 계시옵니다. 제가 죽으면 어머님은 누가 돌봅니까요?"
"시끄럽다!"
성주가 총관과 함께 병사들이 모이는 병렬장으로 향했다. 총관은 황급히 몇몇 하인들을 지목해 병사들에게 모이라는 명을 전하게 하고 자기 자신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하인들 중 하나가 종배숭을 끌고 가려는 듯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순간 종배숭이 딴 사람이라도 된 양 씨익 웃었다.
"나를 감옥에 처넣으려고?"
방금 전과는 판이하게 달리진 그의 말투에 하인들이 순간이나마 움찔했다. 그때를 놓지지 않고 종배숭의 다리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팍!
그는 그의 팔을 잡은 하인의 등에 발차기를 꽂아 넣으며 그가 앞으로 몸이 굽자 팔꿈치로 목을 찍었다. 하인은 그 자리에 쭉 뻗어버렸다.
떡대가 큰 하인들이 일제히 달려들었지만 종배숭의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반 각도 지나지 않아 상황이 종료되었다.
종배숭은 널브러진 하인들의 머릿수를 셈했다.
"열 넷... 달아난 놈은 없군."
그는 목을 한바퀴 돌린 뒤 북문을 바라보았다.
"자, 이제 우군과 합류할까?"
-20
끼이익...
비열흘의 성문이 열리고 달빛조차 어두침침한 가운데 기마병들이 몰려나와 사방으로 흩어졌다. 멀리 숲에서 광경을 지켜보던 곽도지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종 군두가 성공한 모양이군."
그는 손을 들어올리고 진군명령을 내렸다.
"함성을 죽이고 북이나 징은 울리지 마라! 여기대는 전력으로 달려 성문을 장악해라! 그 뒤에 보국군이 뒤따르고 성문이 점령되면 나머지 부대가 입성해서 잔당을 멸한다!"
"존명!"
수풀을 뚫고 오백의 여기대가 질풍처럼 달려나갔다. 성루 위에서 그 모양을 보던 비열흘 성주가 옆의 부관에게 물었다.
"저게 무어냐?"
때마침 달이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질 않았다. 부관은 한참이나 주시해서 여기대를 바라보다가 다급히 외쳤다.
"고구려의 병사들입니다! 어서 성문을 닫으라 명하십시오!"
"뭐, 뭣?! 여봐라! 어서 성문을 닫아라!"
열렸던 성문이 다시 스르르 닫히기 시작했다. 종배숭은 성문 근처 나무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말을 몰아 돌진해오는 여기대와 성문이 닫히는 시간을 계산해봤다.
'보국장군이 너무 서급했다. 이대로는 성문이 먼저 닫히고 말아!'
그는 품에 숨겨두었던 비수를 꺼내들고 성문을 닫느라 끙끙거리는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서른 명의 병사들이 아연실색하여 병장기를 뽑아들었으나 종배숭은 오히려 창을 빼앗아들고 수위병들과 싸웠다.
"활을 쏴라!"
어느 병사의 외침에 성루 위에서 종배숭을 향해 화살이 날아들었다. 종배숭은 창을 휘둘러 화살 몇 대를 쳐냈으나 전부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인지라 장단지에 화살 한 대가 박히고 말았다. 그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가 몸을 뒹굴려 길 옆 나무 뒤로 숨었다.
그때 여기대가 성문으로 들어와 위병들을 거칠게 짓밟았다. 그 뒤를 거대한 방패로 앞을 가린 보국군들이 달려왔다. 종배숭은 장단지의 화살을 뽑아버리고 소매를 찢어 상처난 곳을 꽉 메어 지혈했다.
성주의 부관이 소리쳤다.
"북문을 빼앗겼다! 모두 성문의 탈환에 힘써라!"
하지만 비몽사몽중인 부대와 마음을 단단히 먹고 기습을 감행한 부대는 상대가 되질 않는다. 보국군들이 방패를 앞세우고 성루로 올라가는 계단을 달려갔다. 화살비가 퍼부어졌으나 대부분은 방패에 꽂히고 보국군들은 별반 피해없이 하나 둘 성루를 점령했다.
"태고구려의 보국장군 곽도지가 여기있노라! 죽고 싶은 자는 나서라!"
곽도지는 길거리에서 신라병사들과 마주치자 말을 몰아 나서며 쩌렁쩌렁한 소리로 호통쳤다. 신라 병사들 중 화랑인 듯한 청년이 말을 몰아 곽도지에게 달려들었다.
"머리에 피도 않마른 애송이, 일찍 죽고싶어 안달이 난 것이냐?"
부우웅!
곽도지의 패도가 허공을 가르며 화랑의 머리를 베어갔다. 화랑이 급해 고개를 숙이며 창을 내질렀으나 곽도지의 보국검이 창대를 잘라버렸다. 다시 한 번 보국검이 번뜩이면서 화랑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와아아!
고구려군이 용기백배하여 압도적인 숫자차이임에도 신라군을 도륙냈다. 곽도지가 다시 명했다.
"무기를 들지 않은 자는 죽이지 말라! 만일 약탈하는 자가 있으면 목을 칠 것이며 아녀자를 겁탈하는 자는 거세를 해버릴 것이다! 알아들었느냐?!"
"존명!!"
종배숭이 절뚝거리며 곽도지에게 다가왔다.
"보국장군이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내 이 꼴이 되고 말았소."
곽도지는 말에서 내려 종배숭을 부축했다.
"이번 전투의 제일전공은 누가 뭐래도 종 군두이십니다. 그건 그렇고 그 똥내나는 옷은 뭐란 말이오?"
미추홀의 장군부
전령 한 명이 대막리지의 자리에 앉아있는 연개소문에게 말했다.
"보고! 보국장군과 여기대 이사단 군두가 이끄는 부대가 비열흘을 함락시켰다 합니다!"
연개소문은 고개를 끄덕이고 전령에게 물었다.
"아군의 피해는?"
"전사자 두 명과 중상자 세 명에 나머지는 미미한 경상입니다!"
선도해가 퍼뜩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열흘은 요새 중 요새입니다. 어떻게 그런 성을..."
"종 군두가 본래 대단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계속하라."
"예! 현재 수곡성주 양세강의 병사들이 민심을 진정시키고 치안유지를 맡고 있으며 보국장군과 여기대 이사단 군두는 회군중입니다!"
"개선식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연개소문은 전령을 물리고 흑치상지에게 명했다.
"흑치상지, 자네가 이번 개선식을 준비하게."
"존명."
그때 성문을 지키고 있던 검모잠이 장군부에 들어왔다. 그는 예를 올린 뒤 말했다.
"보고! 당의 사신이 도착했습니다."
선도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당에서?"
연개소문 역시 팔짱을 꼈다. 그가 선도해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일까요?"
"글쎄요, 일단은 만나봐야 알겠지요."
-21
고구려의 장군부
"이런 제기랄."
곽도지는 자신도 모르게 욕을 툭 내뱉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자꾸 눈을 꿈뻑거렸는데 아마 개선식 때 마신 술 때문은 아닐 것이다.
눈치를 주는 듯 반대에 앉아있던 최정필이 슬쩍 흘겨보자 그는 분통 터진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그 까짓 당나라 사신 놈이 뭐 그리 대수라고 이리 오랫동안 접대한단 말이오! 나한테 맡기면 당장에 그놈의 아갈통을 부수어서..."
"입 다물게."
상석에 앉아있던 온사문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한 마디만 더 하면 자네가 당나라 사신에게 하려 한 그대로 해주지."
곽도지는 뭐라고 궁시렁 거리면서도 더 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선도해가 입을 열었다.
"비록 실권을 장악한 자들이 우리라고는 하지만 외교에 대해서는 문외한들일세. 대신들이 알아서 할 일이니 우리야 조용히 기다리세."
그때 장군부의 문이 열리며 연개소문과 흑치상지가 들어섰다. 앉아있던 장수들이 모두 일어서 예를 올리고 온사문은 상석에서 물러났다. 연개소문은 상석에 앉은 뒤 모두에게 앉을 것을 명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당에서 외교를 맺자고 하는군."
장수들이 모두 퍼뜩 놀라는 가운데 선도해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도교 전파 말이군요."
"음."
말석에 앉아 있던 검모잠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선전포고가 아니라 외교라니요? 게다가 도교 전파는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온사문이 눈살을 찌푸렸다.
"제 놈들의 사상을 우리 고구려인들에게 뿌리내리려 하는 짓거리입니다. 받아들이지 않는 게 좋겠군요. 듣자하니 도교윤리와 사상은 허무맹랑하기만 하고 무위자연 어떻고 전쟁은 비윤리적인 짓이라고 한다 합니다. 소장의 짧은 식견으로는 그 도교란 것은 이상이 될 수 있을지언정 현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럴 것이야. 하지만 구세력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개혁이 필요하지."
개혁이란 말에 술렁이던 장군부가 잠잠해졌다.
"현재 우리의 위치란 매우 불안해. 조정에 새로 채워진 인사들은 겉으로는 출세의 길을 열어 준 우리에게 복종하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우리를 신뢰하지 않아. 백성들 역시 마찬가지지. 민심은 천심이라 하는데 비록 여기대가 민중들에게 인기가 높다지만 압도적인 지지를 얻진 못하지. 그래서 구세력의 산물인 불교를 밀어낼 다른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야."
종배숭이 답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어차피 소장들이야 외교에 관해서는 알지 못하는 무부들이니 크게 관여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곽도지는 옆에 앉아있던 대조영에게 대충 대화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물었고 대조영이 세 번이나 반복해서 설명해 준 뒤에야 뭔가 이해하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대막리지 말씀이 옳소."
그의 말에 큰 신경을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연개소문은 장군부를 둘러보고 주변을 환기시키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제장들을 소집한 이유는 당과의 외교가 아니오. 최근 거란이 크게 일어나 북동쪽 고을을 열세 군데나 파괴하고 욕살의 토벌대를 섬멸시키는 등 만행이 말이 아니라고 하오. 이곳 장군부의 누군가가 나서주셔야 겠소.“
온사문이 나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온사문이 일어서자 선도해는 말석에 앉은 검모잠을 돌아보았다.
"거란족들은 여기대 오군두의 이름만 들어도 공포에 떤다 하니 자네가 가서 한 힘 거들도록 하게."
"존명."
연개소문은 황명이 적힌 칙서를 온사문에게 주면서 말했다.
"군 편성은 대모달에게 맡기고 참모는 여기대 오군두 검모잠이 맡도록 하겠소. 적의 숫자는 대략 오만 정도라 하니 참고하시오. 그러면 오늘은 해산하겠소."
미추홀의 성문
대부분의 승정군들이 파직되거나 정변시 살해되어 그 자리에 보국군들이 배치되었다. 덕에 보국군 군두인 대조영은 어느새 성문지기 대장이 되어버렸다. 느즈막이 해가 지는 걸 보며 그는 문득 술생각이 간절해지는 것을 느꼈다.
'교대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아직 퇴근하지 않았으면 검모잠과 술이라도 한 잔 해야겠군.'
그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즈음 누군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잡았다.
"음?"
검모잠이었다.
"아니, 자네가 여긴 어인 일인가?"
"아직 퇴근하지 않았으면 술이라도 한 잔 할까 해서 왔네."
"마침 잘 되었군."
"무슨 말인가?"
"아닐세, 아무것도."
그때 한 보국군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성문을 지키던 병사다.
"어찌 이리 호들갑이냐?"
"군두님, 어떤 떡대 큰 노인네가 와서 대막리지를 끌고나오라고 호통을 치고 있습니다."
"미친 것들은 상대할 것 없다고 말하지 않았더냐."
"그게 그것이... 주먹으로 보국군들을 때려눞혀서..."
"뭐야?"
"연개소문! 쥐새끼처럼 숨어있지 말고 썩 나오너라!"
대조영과 검모잠은 미추홀 앞의 광경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나가던 행인들은 빙 원형으로 둘러서서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고 그 원의 가운데 게거품을 물고 널브러진 보국군과 그들을 깔고 앉아있는 덩치 큰 노인네가 있었다.
태고구려 보국군의 위엄이 크게 실추되는 순간이었다.
"미추홀에서 이 무슨 무례요!"
대조영이 신제를 뽑으며 노인에게 호통을 쳤다. 노인이 대조영을 바라보더니 이를 으적거리며 널브러진 보국군의 창을 주워들고 역으로 성을 냈다.
"나는 연가 놈에게 볼 일이 있느니라! 어디서 보도듣도 못한 애송이가 까부느냐!"
그러더니 대뜸 창을 내질러 대조영의 어깨를 찔러들어갔다. 대조영은 몸을 굽힌 채 한 바퀴 돌면서 검을 내질렀다. 노인은 황급히 창대를 거꾸로 잡고 창날로 신제의 검날을 튕겨냈다.
'어린 놈이 제법이구나.'
노인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 노인 대단하군.'
대조영은 손바닥이 얼얼해지는 걸 느끼면서 세삼 노인을 다시 보았다.
"흥! 어림도 없느니라! 두 놈 동시에 덤비거라."
노인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대조영과 검모잠에게 합공하라 말했다. 검모잠은 대검을 뽑아들며 대조영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노인장이 합공을 원한다면 사양치 않겠소."
이윽고 노인이 다시 둘을 향해 달려들었다.
대조영은 왼발을 축으로 몸을 돌리며 노인의 뒤로 미끄러졌다. 노인의 창이 예상이나 했다는 듯이 그가 향하는 자리로 찔러들어왔다. 대조영은 기겁하며 신제를 거두어들이고 몸을 뒤로 젖혀 창을 피해냈다. 노인은 검모잠의 대검을 창날로 쳐내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젊은 놈이라 그런지 힘 하나는 끝내주는군.'
검모잠은 대검 특유의 파괴력으로 노인을 압박했고 대조영은 신제로 예리하게 빈틈을 파고들었다. 허나 노인은 이백여 합이 넘도록 밀리는 기색 없이 대검을 받아내고 신제를 피해내며 동수를 이루었다.
이미 날이 캄캄해졌으나 사람들을 이런 구경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아무도 집에 갈 생각을 않았다. 대조영과 검모잠이 관인이니 민간인들은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한 몫을 했다.
'이런 제기랄, 느즈막에 패기 부리다가 이 무슨 추태인가.'
노인은 애송이 둘도 제대로 상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친 쪽은 오히려 그 '애송이 둘(?)'이었다.
'도대체 뭐하던 인간이지?'
검모잠은 인상을 쓰며 머리를 굴려봤으나 딱히 생각나는 인물이 없었다.
'양만춘? 아니, 그 사람은 그 양수봉의 숙부라고 했으니 이렇게 나이가 많지 않을텐데... 걸걸중상은 조영의 부친이시니 아닐 테고... 을지장군께서는 하직하셨고... 곽장군도 그렇고...'
그의 머릿속에 전대 장군들 중 누군가 떠오르려는 순간 노인의 공격이 이어졌다.
'이런 제길!'
대조영의 손목이 빙그르르 돌아가더니 허리를 베어가던 검날이 비스듬이 치켜올라가고 어느새 노인의 눈을 찔러갔다. 노인의 굵은 백미가 꿈틀거렸다.
'요놈 보시게?'
그는 창날을 반 바퀴 다시 돌려 쳐내려다가 뒤에서 느껴지는 섬뜩함에 옆으로 상체를 비켜섰다.
쾅!
검모잠의 대검이 땅바닥을 때리면서 굉음이 울렸다. 내공을 담은 일격이 실패하자 검모잠은 잠시동안 운신이 어려워진 것을 느꼈다. 이 순간 공격당한다면 대조영이나 자신이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웬 노망난 노친네가 미추홀에서 지랄발광이냐!"
뜻 밖의 원군이 나타났다. 성문에서 패도를 어깨에 척하니 걸치고 허리에는 기다란 보국검을 찬 곽도지가 불량스러운-관인이 아니라 삼류건달 같은-자세와 표정으로 백안으로 노인을 흘기면서 걸어나왔다.
그는 턱을 치켜세우고 같잖다는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눈썹이 다시 꿈틀거렸다.
"이건 또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냐? 쓸데없이 얻어터지고 울지나 말고 가서 대역적 연개소문을 끌고 오너라!"
"노망난 노친네 같으니. 대막리지가 당신같은 미친 인간 상대해 줄 정도로 한가로운 줄 아시오?"
"그러면 네놈도 땅바닥에 애무 좀 해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검모잠과 대조영은 성문 쪽으로 비켜섰다. 곽도지는 보국검을 뽑아들고 노인을 노려보았고 노인은 섣불리 선공하지 못했다.
'이런 육시럴! 이놈은 저 두 놈하고는 등급이 틀리군. 평소 같으면 모르겠는데 지금은 많이 지쳤으니 원...'
속으로 욕을 내뱉을 즈음 곽도지의 패도가 허공을 가르고 노인의 어깨를 공격해왔다. 노인은 뒤로 물러서면서 창을 양손으로 쥐고 두 번째로 찔러들어오는 보국검을 위에서부터 내리쳐 밑으로 꺽이게 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창대를 한 바퀴 돌려 창날의 반대쪽으로 머리를 공격했다.
검모잠은 노인의 창술이 선도해의 봉술과 많이 흡사하다는 걸 느꼈다.
'누구지?'
하지만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노인과 맞붙어 싸우던 곽도지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이런 노망난 영감탱이가 말년에 보약만 처먹었나! 뭐 이리 힘이 좋아?"
노인의 눈썹이 다시 꿈틀거리면서 곽도지는 창이 세 갈래로 갈라지는 듯한 환상을 보게되었다. 지지않겠다는 듯 곽도지는 코웃음을 치며 패도를 고쳐쥐었다.
나의 刀는 破滅의 極! 그 힘은 太山의 암석을 부순다!
碎巖激!
본래 쇄암격의 초식이 부월로 인용되는 것인데 온사문이 수련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배우던 곽도지가 완전히 자신만의 도법을 개발해내었다. 어차피 파괴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무공이라는 데에는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아무튼 쇄암격의 기세에 질려버린 노인이 창을 거두어들이고 몸을 피하며 간간히 창을 곽도지의 빈틈에 찔러넣었다. 곽도지는 도와 검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자신이 아는 을가신공을 쏟아내었다.
노인이 서서히 궁지에 몰려갈 무렵 성문에서 또 다시 누군가 뛰어나와 싸움을 말렸다. 선도해였다.
"멈추시오!"
곽도지는 끊어진 듯 딱 행동을 멈추었고 노인 역시 시선을 선도해에게 돌렸다.
"오랜만입니다. 뇌 장군."
노인은 입을 꾹 다물고 선도해를 노려보았다.
"드시지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선도해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뒤 곽도지에게 주변을 정리하라 이르고 노인을 데리고 미추홀로 들어갔다.
검모잠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오른 주먹으로 왼손바닥을 탁 때렸다.
"뇌음신! 맞아 뇌음신이야!"
-23
약 두 시진 후
장군부
군사회의가 없는 장군부는 썰렁하리만큼 고요했다.
기다란 탁자에는 양쪽으로 의자가 늘어서 있고 그 뒤의 벽에는 쭈욱 철편, 장검, 삼차극 등의 병기가 진열되어있다. 하나같이 날이 시퍼렇게 선 일류급 무기들이다.
물론 난방 따위는 될 리가 없기 때문에 장군부 안은 얼어죽을 만큼 추웠다. 허나 그 안에 마주보고 앉아있는 두 장수는 전혀 추워하는 기색이 아니다.
한 명은 각진 턱에 짧은 수염이 꼿꼿하게 턱을 뒤덮었고 반대쪽 한 명은 준수한 얼굴에 멋지게 휘어진 눈썹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둘 모두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검은 투구, 마상에서 적을 차도록 개량된 못신, 여기저기가 찢겨졌다가 다시 쇠판을 덧붙인 게 역력한 용린갑은 그들이 여기대임을 말해주었다. 다만 다른 것이라 하면 상석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위치한 사내는 회색 전포에 일(一)이라 씌여있었고 반대쪽 사내는 이(二)라고 씌여있다는 것이다.
물론 각각의 병장기도 있었는데 일이라 쓰인 전포를 두른 사내의 뒤 벽에 비스듬이 쌍창이 기대어져 있었다. 반면 반대쪽 사내는 허리에 장검을 차고 오른손으로 단도를 빙글빙글 돌리며 왼쪽 팔로는 턱을 괴었다.
그들은 여기대의 군두, 최정필과 종배숭이다.
"이봐, 종 군두."
단도를 빙글빙글 돌리던 종배숭이 하던 짓을 멈추고 흘끗 최정필을 바라보았다.
"뭔가?"
"난 솔직히 뇌 장군에게 군사를 주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어."
"대막리지께서 하신 일인데 일개 군두들이 무슨 상관인가?"
"그런 자네는 뭘 고민하고 있는 거지?"
종배숭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보였나? 난 그저 칼 돌리는 장난에 빠졌을 뿐이야."
그리고는 다시 단도를 빙글빙글 돌렸다.
듣는 이가 무시하건 어떻건 최정필은 말을 이었다.
"우리 대장의 말솜씨가 제법이라고는 하지만 방금 전까지 대막리지를 죽일거라 바락바락 대들던 인간이 태도 싹 바꿔서 선봉을 자처해 신라를 친다는 것이 말이나 돼?"
"물론. 지금 그렇지 않은가?"
"제기랄, 이제 대모달과 오군두가 거란토벌에 나서면 그 사이에 안시성주와 내통해서 미추홀을 둘러싸고 맹공을 퍼붓을지 누가 아는 일이야."
종배숭은 순간 손을 살짝 헛짚어 단도에 손가락이 베이고 말았다.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자네가 불길한 말을 해대니 부정 타는데?"
"신중하기로 유명한 자네가 뇌 장군을 의심치 않는 건 참 의외야. 아무리 전우라지만 두 시진 전까지만 해도 뇌 장군은 대막리지를 죽이겠다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어."
"나 참, 자네야말로 과격하기로 유명한 친구가 왜그리 끙끙거리는지 모르겠네. '흥, 제깟 것들이 미추홀을 포위해? 그러기만 해봐라! 내 쌍창으로 갈아버릴테니!'라고 하는 것이 자네에게 어울릴 듯 싶네."
"그만 두세, 그만 둬."
최정필은 자신도 이제 귀찮다는 듯 손을 훠이훠이 내저었다.
선두에서 군을 이끌던 온사문은 저만치에서 말을 탄 한 사내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온사문은 본능적으로 도끼를 꽉 움켜쥐었다가 상대가 검모잠임을 알고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래, 어느 방향으로 가는 것이 좋겠나?"
온사문의 물음에 검모잠은 다시 말머리를 돌려 왔던 길을 향했다.
"조금만 더 가면 아사달입니다. 비록 지금은 폐허가 되었으나 병사들이 숙박하기에는 적합한 곳이라 여겨집니다."
"후우, 그래. 다들 이틀 동안 잠도 못 자고 행군해서 많이들 피로하겠지."
그는 안쓰러운 듯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병사들은 질서정연하고 눈빛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허나 마음 따로 몸 따로인지라 다리에 힘이 풀려 툭하면 쓰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다들 힘내라! 반 시진 이내에 취침에 들 수 있을 것이다."
행군은 계속되었고 온사문이 이끄는 부대는 아사달에 들어섰다.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병사들은 행복한 표정으로 폐가 안에서 자거나 막사를 치고 대자로 누워버렸다.
온사문은 도시의 중앙에 있는 말라죽은 고목을 바라보며 착잡한 생각에 빠졌다. 이 거대한 도시는 사람 한 명 살지 않았고 주변은 황량했다. 그는 아사달이 특이하게 춥다고 느꼈다.
"알고 계시겠지만 이것이 신단수입니다."
뒤에서 검모잠이 걸어오며 말했다. 온사문은 묵묵히 도끼를 어깨에 짊어진 채 고목을 올려다보았다.
죽은 나무이건만 아직도 크기만은 대단하여 미추홀의 성벽보다도 높았다. 앙상한 가지는 마치 온사문을 잡아먹으려는 듯 탐욕스럽게 굽이쳤다.
온사문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영원한 저주가 없듯 영원한 광영 또한 없는지라, 신도神都에는 사자死者만이 쓸쓸히 서있누..."
검모잠도 크게 숨을 들이쉬며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표정으로 신단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러다가 문득 대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가며 소리쳤다.
"누구냐?!"
뒤에서 누군가가 달려온다는 걸 감지하자 그의 손이 주저없이 대검을 뽑아 몸과 함께 회전했다.
팍!
검면에 괴상한 물체가 얻어 터지면서 저만치 날아갔다. 둥글게 보인 물체는 곧 늑대의 모습으로 변했다. 대검과 부딪히는 순간에 몸을 둥글게 말아 충격을 완화시킨 것이다.
온사문도 주변을 살피면서 서서히 뒷걸음질쳐 검모잠과 등을 맞대었다.
"조심하게. 늑대 말고도 뭔가 더 있군."
내공을 익히지 않은 검모잠은 육감으로만 주변의 살기를 감지했으나 을가신공을 익힌 온사문은 음탁한 기운에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야영지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걱정이군.'
다행히 야영지 쪽에서 소란이 없는 걸 보아 큰 일은 없는 듯 싶다.
"모습을 드러내라."
-24
연개소문은 앉아서 뭔가를 고심했다.
"양만춘... 골치아픈 양반 같으니라고."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연개소문은 퍼뜩 뭔가 생각난 듯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 해 정신없이 휘갈겼다.
"흑치상지!"
"하명하십시오."
연개소문은 아직 먹도 채 마르지 않은 서찰을 주면서 말했다.
"전령에게 이 서찰을 안시성주에게 전하라고 이르게."
"존명."
한편, 안시성
안시성주의 집이라 하나 마당은 그리 넓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 청렴한 양만춘의 성격을 보여주듯 주변은 깨끗하게 정돈되어있고 대문 앞에는 고을 꼬마들이 집어먹을 수 있도록 다과 한 대접을 내어놓았다.
부우웅!!
두 자루의 철편이 마당 안의 허공을 가르며 파공성을 내었다.
나의 破碎는 狂龍의 기세를 꺽는다!
狂龍破勢!
양수봉은 한 철편을 놓아버리고 다른 철편을 양손으로 쥔 뒤 허공을 내리쳤다. 흑치상지와 싸웠을 때 사용한 마지막 초식이었다.
콰콰쾅!!!
분명 철편은 허공에 멈추었는데도 여파로 마당에 광풍이 몰아치며 먼지들이 피어올랐다.
'제기랄, 이걸로는 꺽지 못한다!'
쿵!
그는 신경질적으로 철편을 땅바닥에 꽂아버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흑치상지가 쓴 무공을 막아낸 것은 요행에 불과했다. 다시 한 번 요행을 바라는 것은 무리야.'
"무리하는구나."
뒤에서 인자한 목소리와 함께 양만춘이 뒷짐을 진 채 걸어왔다.
"숙부님."
양수봉은 재빨리 일어서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인사를 올렸다.
"너무 낙심 말거라. 을지장군께서도 흑치상지를 보시고 '분명 자라면 천하에서 적수를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헌데 너는 동수를 이루지 않았더냐?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다."
"아닙니다. 저는 마지막 수에서 운으로 공격을 막아냈을 뿐입니다."
양수봉은 마당 벽에 세워진 빗자루를 가져와 자세를 낮추고 흑치상지가 취했던 동작을 비슷하게 흉내냈다.
"바로 이 초식을 사용했는데 실제로 굉장한 속도였습니다. 운이 좋아 막아내긴 하였으나 다음 번에 붙는다면 어찌 될 지 자신할 수 없습니다."
"음, 광룡진천섬인가? 그렇다면 요행으로 막았다는 네 말도 틀린 말은 아닐 것 같구나..."
양만춘은 땅에 박힌 양수봉의 철편을 뽑아들었다.
"광룡진천섬의 최대 맹점은 그 어마어마한 속력이다. 그리고 본래 먼 거리에서 찔러들어가 가속력을 이용하는 것이지만 내가 아는 흑치상지라면 분명 그런 것은 큰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러하였습니다. 거의 거리가 없는 상태에서 극을 짧게 쥐고 찔렀습니다."
"그래, 그래... 그래야 흑치상지 답지. 허나 파괴력은 너에게 밀릴 것이다. 물론 흑치상지의 완력이나 너의 완력이나 비슷한 수준이겠지만 무기의 특성상 너는 파괴력에서의 우위를 확보할 수 있지. 만약 다시 한 번 광룡진천섬을 쓴다면... 이렇게 하거라."
직접 쌍편을 휘둘러 양만춘은 한 가지 행동을 보여주었다.
한 철편으로 극의 창대를 휘감고 다른 한 철편으로 날을 올려치는 초식이었다.
"그렇게 하면 그 다음 동작을 할 수 없게되지 않습니까?"
"이런 뒤에 곧장 쌍편을 놓아버리고 몸으로 들이받아라."
"예?"
양만춘은 그저 미소만 지어보이고 쌍편을 조카의 손에 들려준 뒤 가버렸다.
-25
안시성의 집무실
"군대를 이끌고 온다...?"
일개 성주의 집무실이라 하기에는 탁자는 너무 낡아보였고 방 안은 깨끗이 청소해놓았으나 단 하나의 장식도 없어 왠지 황량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양만춘은 홀로 앉아서 전령이 가져온 서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전쟁이라도 벌이자는 건가?"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가 그냥 서찰을 구겨버렸다.
"연개소문이 그리 어리석은 사람은 아닐 것이야."
대막리지의 처소
"흑치상지!"
연개소문의 부름에 흑치상지가 즉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자네 나와 어디 좀 가야겠군."
"예? 하오나..."
"아, 내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고 이미 여기대장에게 말해두었으니 큰 탈은 없을 게야."
흑치상지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고개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갔다. 그는 본래 그런 사람이다.
간단한 여장을 꾸린 뒤 흑치상지와 연개소문은 길을 나섰다.
"주군, 이 길은 개모성으로 향하는 곳입니다."
흑치상지가 말을 몰면서 앞장서는 연개소문에게 말했다. 연개소문은 뒤를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런데 그게 뭐 어쨋다는 겐가?"
"개모성에서 조금만 더 가면 안시성이 나옵니다."
그제야 연개소문은 웃어 보이면서 속내를 드러냈다.
"당연하지. 내 안시성주를 토벌할 것일세. 물론 선봉은 자네가 서야겠지."
일순간 흑치상지는 그 답지 않게 당황했으나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
"존명."
안시성의 망루
성루 위에는 세 명의 장수가 서 있었다. 가운데는 중년인 양만춘이었고 그 오른쪽에 그의 조카 양수봉이 쌍철곤을 잡고 서 있었다. 양만춘의 왼쪽에 있는 사내는 화승譁蠅이란 말갈족 출신 청년인데 대단한 강궁인지라 말 위에서 이천 보 거리의 나뭇잎을 명중시켰다.
화승이 중얼거렸다.
"대막리지란 작자가 신의를 개풀로 아는군."
다만 본래 잡배 출신인지라 언행이 좀 거칠고 게으르다는 단점이 있으나 양만춘은 본래 도량이 넓은 사람이어서 화승을 아끼었다. 또한 호방하고 의리있는 면도 있어 양수봉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잠시만 더 기다리세."
양만춘은 저만치 개모성으로 향하는 길이 뻗은 숲을 보면서 조용히 타일렀다.
"숙부님, 대막리지가 숙부님을 희롱한 듯 싶습니다. 벌써 두 시진 째 이러고 있지 않습니까?"
양수봉마저 그리 말하니 양만춘도 이만 내려갈까 하는데 문득 화승이 양만춘의 팔꿈치를 툭툭 쳤다.
"저기 왠 두 명이 오는데요?"
눈을 가늘게 뜨고 양만춘은 화승이 가리킨 숲을 바라보았다. 과연 연개소문과 흑치상지가 천천히 말을 몰아오고 있었다.
"대막리지군. 그 옆은 흑치상지인가?"
양만춘은 무심코 중얼거렸으나 양수봉은 흑치상지란 말에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화승은 여전히 숲을 살피면서 말했다.
"군대는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다가 숨겨둔 걸까요?"
이윽고 연개소문과 흑치상지가 안시성 망루 위의 세 사람을 볼 수 있을 만큼 다가왔다. 연개소문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안시성주, 참으로 오랜만이오."
화승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얼씨구, 아주 반갑게 손을 흔드는데 활로 꿰어버려?"
그가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는 시늉을 하자 양수봉이 그의 손을 탁 쳤다.
"쓸데없는 짓 말게."
"쳇, 농담도 못하나?"
양만춘도 반갑게 마주 손을 흔들었다.
"약관의 동부대인이 이제는 어엿한 대막리지가 되셨구려. 그런데 군대는 어디다 내버려두고 둘 만 오신 게요?"
연개소문은 박장대소를 터트리며 답했다.
"하하하! 설마 안시성주께서 군이 무엇인지 모르실 줄은 생각 못했소. 여기 장수가 있고 병졸이 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이오?"
그 말에 양만춘도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연개소문이 말을 이었다.
"그쪽에서도 한 명의 병졸을 내보내어 한 번 전쟁을 벌여봅시다. 내가 진다면 대막리지에서 물러나겠소. 허나 그대가 진다면 나를 대막리지로 인정해야 할 것이오. 어떻소?"
양만춘이 웃음을 거두고 답했다.
"이런이런, 대역적이 자리를 놓는다고 해결될 문제겠소? 나는 대막리지께서 진다면 대막리지의 목을 쳐야겠소. 어떻소?"
연개소문은 턱을 긁으면서 흑치상지를 돌아보았다.
"자신 있나?"
흑치상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양수봉이 떠오른 것이다.
허나 연개소문은 그의 대답을 듣지 않고 다시 양만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좋소! 내 목을 내드리리다!"
"주군!"
흑치상지가 놀라자 연개소문은 그의 눈을 마주보며 투박한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나는 자네를 믿어. 힘껏 싸우라고."
잠시 망설이던 흑치상지는 자신도 연개소문을 마주보며 그의 손을 꽉 쥐었다.
"존명!"
-26
안시성의 성문이 열리면서 말에 오른 젊은 장수가 쌍철곤을 쥐고 나왔다. 흑치상지가 방천극을 겨누며 그를 향해 소리쳤다.
"양수봉! 약속대로 승부를 내러 왔다!"
양수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 한 번 건네는 법 없이 말을 몰아 돌진해갔다. 흑치상지 역시 방천극을 비켜쥐고 말을 몰았다.
탱캉!
허공에서 방천극과 철편이 부딪혔다. 양수봉은 왼쪽 철편으로 방천극을 밀어내고 반대쪽 철편으로 흑치상지의 가슴팍을 내리쳤다.
탁!
방천극의 창대가 내리떨어지는 양수봉의 철편을 다시 받아냈다.
수십 합이 오가고 말이 엇갈리면서 흑치상지는 방천극을 거꾸로 쥔 채 양수봉에게 내질렀다. 날카로운 파공성에 양수봉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방천극의 날이 그의 볼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날카롭군.'
말머리를 흑치상지를 향해 돌리면서 양수봉은 긴장했다. 그리고 철편으로 얼굴을 향해 날아든 방천극을 쳐내면서 흑치상지의 말머리를 향해 철편을 휘둘렀다. 흑치상지는 방천극을 빙그르 돌리면서 말에게 날아드는 양수봉의 철편을 쳐냈다.
두 기의 말이 완전히 교차했다.
둘은 다시 말머리를 돌려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몇 합이나 싸운 것 같으냐?"
성루 위의 양만춘이 화승에게 물었다.
"육백 합은 부딪친 것 같습니다. 수봉이도 대단하지만 저 놈도 괴물이군요."
화승은 양수봉과 흑치상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답했다.
이미 날이 저물어 가건만 맞붙은 둘은 지칠 줄을 몰랐다.
수백 번 째 다시 서로가 돌진해오는 순간 양수봉이 오른쪽 철편을 땅과 수평으로 뉘였다.
나의 棍는 破滅의 權能! 그 기세는 하늘을 찢어발기고 땅을 가른다!
天地大滅劫!
그의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여져 있었는데 말의 턱을 쳐올리려는 자세였다.
'제길!'
이대로 되면 낙마한다는 것을 눈치챈 흑치상지가 역으로 양수봉의 말을 향해 방천극을 내질렀다.
나의 戟은 一閃이라! 모든 것을 파한다!
天崩一點戟!
상대적으로 긴 방천극이 먼저 양수봉의 말을 찌를 상황이었다. 양수봉은 이를 악물면서 오른쪽 철편을 거두고 양 철편으로 방천극의 창날과 창대를 후려쳤다.
카캉!
다시 허공에서 방천극과 쌍편이 부딪치면서 둘은 서로의 반탄력으로 말에서 균형을 잃고 떨어지기 시작했다.
흑치상지는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아 신형을 양수봉 쪽으로 돌리며 다시 방천극을 양손으로 잡고 허리를 낮추었다.
나의 戟은 狂龍의 武威! 그 힘은 하늘에 떨친다!
狂龍振天殲!
낙법으로 땅에 착지한 양수봉은 등에서 찔러 들어오는 섬뜩함에 몸을 돌렸다. 이미 흑치상지는 허공에서 양수봉 쪽으로 쏘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인간이 아니군!"
화승이 순간적으로 경악에 찬 소리를 질렀다. 공중제비야 몸이 민첩하면 할 수 있을 테지만 화승이 경악한 것은 뒤집은 상태에서 땅에 발을 대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찔러 들어간 것이다.
'광룡진천섬인가?'
양수봉은 올 것이 왔다는 듯 왼쪽 철편으로 방천극의 끝을 쳐내고 한쪽 철편으로 창대를 휘감아 들어갔다.
"음?"
지켜보던 연개소문은 순간적으로 양수봉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의아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래서는 둘 모두 행동이 억제될 뿐인데...?"
양수봉과 흑치상지는 서로의 병장기를 한 명은 봉쇄하려, 한 명은 풀어내려 힘을 주었다. 일 각이 다 가도록 그런 대치상황이 계속되었다. 둘의 내공수준이 엇비슷해서인지 쉽사리 한쪽이 밀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둘은 거의 동시에 병기를 놓아버리고 서로를 향해 육탄으로 돌격했다.
"육탄전?"
양수봉의 의도를 안 연개소문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흑치상지는 고구려 최고의 씨름꾼이지.'
흑치상지는 양수봉의 얼굴을 향해 오른발을 차올렸고 양수봉은 흑치상지의 명치를 향해 정권을 내질렀다.
팍!
탁!
흑치상지의 발목은 양수봉의 수도에, 양수봉의 손목은 흑치상지의 왼손에 동시에 막혔다. 둘은 한 번 뒤로 떨어진 뒤 다시 육탄으로 맞붙었다.
나의 拳은 白虎의 威勢라!
白虎强襲勢!
둘은 같은 무공으로 주먹을 내지르며 다시 수십 번 손발을 교차했다.
이미 날은 저물었고 안시성의 성루에서는 횃불을 피웠다.
여전히 흑치상지와 양수봉은 서로를 차고 막으며 겨루고 있었다.
"후욱... 후욱..."
"하... 하아..."
두 사람은 야수같은 눈빛으로 서로를 노려보며 거친 호흡을 가다듬었다.
여태 구경만 하던 연개소문이 소리쳤다.
"두 사람 모두 지쳤는데 물 한 사발씩 들이키고 하는 게 어떤가?"
흑치상지는 슬쩍 연개소문이 있는 쪽을 바라본 뒤 다시 양수봉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양수봉도 고개를 끄덕이고 떨어진 쌍편을 주워들은 뒤 말에 올라 안시성으로 들어갔다.
"싸울 만 한가?"
연개소문은 물통을 넘겨주며 흑치상지의 어깨를 툭 쳤다.
벌컥벌컥 물을 들이킨 흑치상지는 턱을 타고 흐르는 물들을 팔뚝으로 스윽 닦아내고 머리끈을 풀어 던졌다.
"아주 대단합니다."
그리고 다시 방천극을 집어들고 말 위에 올랐다.
"미칠 정도로!"
"자네 괜찮기나 한 거야?"
화승의 물음에 양수봉은 입가의 물을 스윽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양만춘이 웃어 보이며 물었다.
"어떠냐? 고구려 최강자의 무공이."
양수봉은 거추장스럽다는 듯 갑옷을 벗어 던지면서 대답했다.
"굉장하군요."
그리고 다시 쌍편을 집어들고 말 위에 올랐다.
"미쳐버리고 싶을 만큼!"
-27
끼이이익----
안시성의 성문이 낮은 신음과 함께 무겁게 열렸다. 문이 열리면서 쌍편을 들고 갈종마 위에 올라앉은 양수봉이 천천히 말을 몰아 나왔다. 이미 흑마 위에 앉아 기다리던 흑치상지가 먼저 방천극을 질풍같이 휘돌리며 돌진해갔다. 양수봉 역시 느긋하게 몰던 말을 급하게 몰면서 흑치상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두 장수 사이에 다시 격돌이 일어났다.
나의 戟은 沙漠을 가르는 疾風이라!
削風殲!
나의 棍는 破滅의 權能! 그 기세는 하늘을 찢어발기고 땅을 가른다!
天地大滅劫!
카카캉!!
삭풍섬이 몰아치면서 흑치상지의 창이 폭풍이라도 되는 양 사방으로 찔러들어왔다. 양수봉은 정확히 가운데만을 일격으로 부수며 다른 곤으로 배산도해를 펼쳐 흑치상지의 머리를 내려쳤다.
파캉!
흑치상지가 떨어져내리는 곤을 방천극으로 쳐올리면서 두 기의 말이 교차했다. 그때 갑작스럽게 흑치상지가 방천극을 놓아버리고 양수봉의 허리춤을 붙잡았다. 그리고 말 위에서 불끈 들어올리려는 듯 힘을 쓰기 시작했다.
"무식한 놈!"
화승은 성문 위에서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양수봉은 의외의 행동에 놀랐으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자 곧장 흑치상지의 목덜미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흑치상지가 양수봉을 들어올려 집어던진 순간, 양수봉도 흑치상지의 목을 틀어쥐고 허리를 휙 돌려 저만치로 던졌다. 둘 모두 말 위에서 붕 떠 허공을 날았다.
털퍼덕!
털퍼덕!
거의 동시에 두 명이 먼지를 일으키면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정신들을 잃었는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수봉아!"
화승이 소리치면서 성문밖으로 달려나갔다. 연개소문도 달려가 쓰러진 흑치상지를 일으켜 세웠다. 성루 위에서 관전하고 있던 양만춘이 껄껄 웃었다.
"어떠시오? 대막리지. 내 조카도 이만하면 고구려 최강이라 칭할 수 있지 않겠소?"
"옳은 말이오. 헌데 전쟁에 비겼으니 이 처리를 어찌해야 하오?"
양만춘은 이미 예상이나 했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별 수 있겠소? 이만 물러가시구려. 소장도 대막리지의 목은 포기하겠소."
연개소문은 고개를 끄덕이고 흑치상지를 말 위에 얹고 자신의 전포로 묶어 고정시킨 뒤 자신도 말 위에 올랐다.
"안시성주! 후에는 동료로 만납시다!"
그 말을 남기고 연개소문은 왔던 길을 돌아갔다.
"그렇다면 좋으련만..."
양만춘은 연개소문의 뒷모습을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아사달
"크르르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번뜩이는 눈으로 온사문을 주시하며 늑대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도끼를 비켜 쥔 온사문과 대검을 양손으로 쥐고 몸을 낮춘 검모잠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온사문이 목덜미가 서늘함을 느꼈을 때 이미 그는 땅바닥을 한 바퀴 구르며 예기를 피한 뒤였다.
쉬익!
그의 목이 있던 자리에는 채찍 하나가 먹이를 낚아채는 매처럼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온사문이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곳에는 채찍을 휘두른 인영이 아직 땅에 발을 딛지 않고 있었다.
나의 斧는 山神의 眞氣! 산을 부수고 바다를 울린다!
排山掉海!
온사문이 허공에 도끼를 휘두르자 그 방향의 일정범위가 전부 가루가 되어 박살나면서 무형의 기운이 채찍을 휘두른 자를 향해 쇄도했다.
콰콰콰콰콰!!!! 쾅!
놀랍게도 허공에서 채찍과 온사문의 강기가 부딪치면서 온사문의 강기가 파훼되었다.
타탓!
그 인영은 우아한 자세로 내려서 온사문과 검모잠을 바라보았다.
"기습입니다!"
검모잠이 다급하게 외치며 온사문의 어깨를 밀어버리고 자신도 자리를 피했다.
파바바밧!
그들이 있던 자리에 수십대의 화살이 박혔다. 동시에 서른 명 정도의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온사문과 검모잠에게 달려들었다.
검모잠은 선두의 사내가 휘두르는 창날을 쳐내고 그의 배에 깊숙히 대검을 박아넣었다.
팍!
온사문은 도끼로 달려드는 무리의 머리통을 쳐내면서 채찍을 휘두른 자를 경계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 채찍을 쓰는 자를 신경쓰던 검모잠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여자?'
온사문과 검모잠은 다시 등을 맞대고 서로 뒤를 보호하면서 자신들을 포위한 사내들을 주시했다. 사내들은 대부분 가죽모자에 털신을 신고 있었는데 화살촉 역시 돌인데다가 무기도 구리인 걸 봐서 거란족들 같았다.
'정찰대인 것 같군. 그래도 본대는 못 찾은 것 같으니 다행이다.'
아마 이들은 정찰 겸 아사달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신단수 근처를 돌아다니던 중 검모잠과 온사문을 보고 다급히 숨어있다가 둘 뿐이란 것을 알자 덤벼든 것이다.
여자가 손을 들어올리자 온사문과 검모잠을 포위했던 사내들이 서서히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정면에 나서면서 능숙한 고구려어로 물었다.
"토벌대인가? 대검을 든 젊은이는 검모잠일테고... 도끼를 든 당신은 누구지?"
온사문은 도끼를 비켜쥐고 자세를 낮추며 나직이 내뱉었다.
"오랑캐에게 알려줄 이름 따위는 없다."
"호오, 제법 대단한 긍지인데?"
여자는 차게 웃으면서 채찍으로 땅바닥을 후려쳤다.
쾅!
피어오른 먼지가 가라앉으며 움푹 파인 땅이 드러났다. 일종의 과시용인 듯 싶었으나 온사문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 내가 먼저 소개할까? 내 이름은 유호. 당신은?"
"... 온사문."
"그래, 온사문. 어디 한 번 잘 해보자구."
유호는 차게 웃으면서 채찍으로 온사문을 가리켰다. 그러자 사내들이 무기를 들고 다시금 온사문과 검모잠을 포위했다.
"으아아아!!!!!"
한 사내가 괴성을 지르며 온사문에게 달려들어 커다란 도끼로 내리찍었다.
캉!
온사문의 도끼가 사내의 도끼를 쳐내는 순간 사내의 몸이 둘로 쪼개지며 그 몸을 뚫고 채찍이 날아와 온사문이 내지른 오른팔을 휘감았다.
촥!
채찍은 순식간에 둘둘 말려서 온사문의 오른손을 꽉 죄었다. 허나 온사문은 고통스러운 내색 없이 유호에게 싸늘히 말했다.
"부하를 멋대로 다루는군."
"훗, 덕에 당신을 잡았는데 소모품이 문제겠어? 그리고 힘이 없어서 죽은 건 동정할 가치도 없다고."
자신의 부하를 동정하는 온사문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녀는 더욱 꽉 채찍을 죄었다.
"..."
온사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가 오른손에 들린 도끼를 왼손으로 옮겨쥐었다.
"부하가 소모품이라고?"
그가 허리를 낮추고 도끼를 비켜쥐었다.
"힘이 없어 죽은 건 동정할 가치가 없다고?!!!"
그리고 일순의 섬광같이 몸을 날렸다.
콰아아앙!!!!
유호가 피할 사이도 없이 온사문의 도끼가 그녀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마어마한 폭발음과 몸을 짓누르는 기운이 유호의 숨을 옥죄었다. 때문에 도끼에 가격당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거란족 사내들도 입을 벌리고 있다가 달아나버렸다.
"장군님!"
온사문과 검모잠이 돌아오지 않자 그들을 찾아나선 듯한 너댓 명의 병사들이 폭음을 듣고 신단수 쪽으로 달려왔다.
온사문은 오른팔을 느슨하게 감고 있는 채찍을 걷어버린 뒤 말 없이 돌아섰다. 유호는 여전히 동공이 풀린 채 몸을 떨었다. 그 광경을 본 병사들 역시 그만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온사문이 후려친 방향으로 이백여 채의 폐가가 박살나 있었다.
거란왕 야율타耶律媠의 막사
거란의 최고 권력자라는 것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막사는 넓직해서 이백여 명 정도가 함께 들어설 수 있을 정도였다. 앞에 위치한 높은 단상에는 태사의가 놓여있었고 땅바닥은 호랑이의 가죽으로 덮여있었으며 태사의에 앉은 야율타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있었고 아랫자리 땅바닥에 앉은 부족장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전령이 뛰어와 절을 올리며 절도 있게 보고했다.
“대모달 온사문이 훈련된 병사 만오천을 이끌고 남부 촌락을 침공했습니다.”
거란왕은 턱을 괸 팔을 내리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대모달이 직접...?”
혼자서 중얼거린 야율타는 퍼뜩 어딘가에 생각에 미쳤는지 전령에게 물었다.
“공주는?”
“손수 정찰을 나가시겠다고 어젯밤에 친위병들과 진영을 이탈하신 뒤 소식이 끊겼습니다.”
공주가 정찰을 핑계로 외지를 나돌아다니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수렵이나 방랑을 너무 좋아해서 탈이었다.
“음, 그런가? 수고했다. 선봉대의 족장에게 내가 군사들을 이끌고 갈 터이니 공주의 행방을 알아내는데 힘을 써달라고 전해라.”
“존명!”
전령이 빠른 걸음으로 막사를 빠져나갔다. 야율타는 태사의에서 일어나 부족장들을 둘러보았다.
“형제들, 드디어 고구려와의 기나긴 악연을 끊을 순간이 도달했다. 이 만주 땅의 지배자는 이제 우리가 될 것이다.”
족장들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거란토벌대의 막사
막사 안에는 원탁이 하나 놓여있었고 온사문과 검모잠을 비롯한 토벌대의 장수들이 둥글게 앉아 회의를 열고 있었다. 온사문이 작전을 설명했다.
“현재 본국의 경우 신라와 교전 중이고 당과 대치 중이기에 치안 유지에 쓰이는 병력을 제외하면 이곳에 올 수 있는 병력은 우리가 전부다. 하지만 적들은 긁어모을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데려왔다. 정찰대가 보고한 오만은 적의 선봉대에 불과했다. 적은 적어도 수송 병력을 제외하고도 십이만 정도로 추정된다. 그에 반해 아군은 삼만 오천.”
막사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적들의 사기는 충분히 높고 먼 길을 온 아군의 사기는 자연스레 추락하고 있다. 아무리 아군이 정예병이라지만 전면전은 무리다. 그래서 우리는 교란책을 사용한다.”
온사문이 허리에 멘 단검을 칼집 채로 뽑아서 지도의 한 곳을 가리켰다.
“이곳이 우리의 위치다. 거란의 거대부족이 다섯 개라는 것을 감안할 때, 적들은 행군속도가 느려지는 집단 행동보다는 여러 길로 나누어서 우리를 공격해올 것이다. 그리고 아군이 밀려나는 틈을 타 뒤쪽으로 진격해온 부족이 후방에서 매복공격을 하겠지. 하지만...”
그는 한 숨 돌리고 말을 이었다.
“아군이 위축되는 모습을 보여봤자 적에게 유리할 뿐이다. 우리가 원군을 부르고 원군을 기다리는 사이 수십 개의 마을이 더 박살나고 몇 개의 성이 더 함락 당한다. 물론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온사문은 탁자에 펼쳐진 지도의 한 곳을 단검으로 팍 찍었다.
“우리는 적들과 최대한 마주치지 않고 그들의 본대로 진격해 군량을 불태워버린다. 이의 있는 자는 말해보도록.”
한 장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 그 다음, 아군도 전멸 당할 겁니다.”
“부정하지는 않겠네.”
“부하들이 식량이 불타 눈 뒤집어진 적들에게 도륙당하는 걸 보실 생각입니까?”
검모잠이 안색을 굳히며 그 장수를 노려보았다.
“자네 말이 지나치군.”
온사문이 팔을 들어 검모잠을 제지했다.
“자네는 아무 말 말게.”
“...”
“살길 원하는 자는 전부 돌려보낼 것이니 그런 걱정은 말게.”
“전부 돌아가겠다고 하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나 혼자 돌격해서 거란왕의 목을 대막리지께 가져다 드릴 것이네.”
태연한 대답에 그 장수는 한 동안 할 말을 잃었다. 온사문은 그가 다시 반론을 펴길 기다리다가 그가 말이 없자 다시 장수들을 바라보았다.
“다른 의견이 있는 자는 개의치 말고 말해보라.”
방금 이의를 제기했던 장수가 다시 말했다.
“장군께서 틀리셨습니다.”
화를 낼 법도 하건만 온사문은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리며 부장에게 대하는 예로 물었다.
“내가 한 말 중 무엇이 틀렸는지 서슴지 말고 말하게.”
“대모달께서는 혼자 돌격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저도 따라갈 거니까요.”
그 장수는 엄숙한 표정으로 온사문의 눈을 마주보았다. 온사문은 웃었다.
“그것 참 눈물나도록 고마운 말이군.”
첫댓글 오, 정말 많이 쓰시내요 ^^
중간 정도 읽고 가요 T_T ; 교활가야하니 1주일 후에나 돌아올 것 같아요 ^_^ ; 그 때 나머지를 읽고 꼬리 달겠습니다 ^_^ 연개소문 정말 좋아한다는 乃 가장 좋아하는 분은 담덕님이시지만요 ^_^ ; 담덕님을 주인공으로 해서 다음에 써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