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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탑상제4(塔像第四)’편 ‘금관성(金官城)의 파사석탑(婆娑石塔)’에 따르면, 금관국 김수로왕 허황후 황옥(黃玉)이 '서역(西域)'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파사석탑(婆娑石塔)을 배에 싣고 금관국 금관성(金官城)으로 가져왔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금관(金官)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裟石塔)이라는 것은 옛날에 이 읍이 금관국이었을 때,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비(妃)인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25~220년) 건무(建武) 24년 무신(48년)에 서역(西域)의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공주가 처음에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海)를 건너 동쪽으로 가려고 하였는데, 파도신의 노여움에 막혀 가지 못하고 돌아와 부왕(父王)에게 말하였다.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고 명하니, 곧 쉽게 건널 수 있어서 남쪽 해안에 정박하였다. 붉은 돛, 붉은 깃발, 주옥(珠玉) 등 아름다운 것을 실었기 때문에 지금 주포(主浦)라고 부른다. 처음 언덕 위에서 비단 바지를 풀은 곳은 능현(綾峴)이라고 하며, 붉은 깃발이 처음 들어온 해안은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한다.(중략)"
그런데 『삼국유사』가 써진 고려시대 1280년경에 고려 사람들이 생각하던 '서역(西域)'이 과연 어디였는가?
즉, 『국어사전』에 따르면, 서역(西域, Western Regions)'이란 중화인민이 중화인민국의 서쪽 지역을 통틀어 이르던 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한국어위키백과』에 따르면, '서역(西域, Western Regions)'이란 현재의 중화인민국 서쪽에 인접한 지역을 총칭하는 것으로서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천산산맥(天山山脈)과 곤륜산맥(崑崙山脈)에 둘러싸인 타림분지 일대와 파미르 고원을 중심으로 하여 이에 연속되어 있는 투르키스탄(Turkestan) 지역을 포함한다고 한다.
또 '서역(西域, Western Regions)'이란 지역은 동서교통의 요충지로서 옛날부터 문화가 발전하여 한(漢) 대에 서역 36개국(西域三十六國)의 이름이 알려져 있었으며, 서역(西域)의 사람들을 만이(蠻夷)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한(漢) 대 이후 국제적인 교류가 많아지면서 서역(西域)을 더 먼 거리의 나라에도 적용하여 현재의 서방세계까지 서역(西域, Western Regions)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진시황(秦始皇, 서기전 221~210년)이 쌓았다는 장성(長城)의 길이가 만 리(里)가 되었다가 고무줄처럼 늘어나서 현재는 2만 km 이상이 되는 것처럼 '서역(西域)'이란 지역도 유러피언 피자 밀가루 반죽처럼 늘어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림 1] 서역이라고 하는 지역
또 서역(西域)의 사람들을 만이(蠻夷)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남만서융(南蠻西戎)이라고 하면서 왜 서역(西域) 사람들이 만이(蠻夷)가 되었는가?
아무튼 상기한 투르키스탄(Turkestan) 지역은 '투르크족의 땅'이라는 뜻으로서 현재의 사마라칸트, 부하라, 타슈겐트 등 오래된 도시들을 포함하는 지역을 말한다. 즉, 현재는 투르키스탄(Turkestan) 지역 전체가 서역(西域)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가야 허황후 황옥(黃玉)이 '서역(西域)'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면, 현재의 투르키스탄(Turkestan) 지역에서 왔다는 것인가?
그러나 허황후 황옥(黃玉)의 출신지는 그 곳이 될 수 없다. 즉, 고려시대 1280년경에 고려 사람들이 생각하던 '서역(西域)'은 현재의 투르키스탄(Turkestan) 지역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삼국유사』에 따르면, 허황후 황옥이 아유타국에서 가야국으로 올 때, 배를 타고 왔기 때문이다.
즉,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삼국유사』 ‘탑상제사(塔像第四)’편 ‘금관성의 파사석탑(婆娑石塔)’에 따르면, 수로왕의 왕비 허황후 황옥이 아유타국에서 가야국으로 올 때, 배에 파사석탑을 싣고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가야 허황후(許皇后)는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가서 금관국(金官國)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허황후(許皇后)가 배에 싣고 온 ‘파사석탑(婆娑石塔)’은 ‘할미 파(婆)’자와 , ‘춤출 사(娑)’자를 쓰고 있지만, 산스크리트어(범어) Bha와 Sa의 음역자(音譯字)로서 ‘깨달음’을 의미하고 있다.(근거: Monier-Williams, A Sanskrit-English Dictionary, Clarendon Press, 1899년)
또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가야 수로왕이 왕후(王后)가 될 배필을 맞이하게 될 것을 미리 알고 기다렸는데, 허황옥 일행이 타고 온 붉은 돛단배가 서남쪽에서 나타났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건무(建武) 24년 무신(48년)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朝會)할 때 아뢰기를, ‘대왕이 강령(降靈)하신 이래로 아직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셨으니, 청컨대 신들의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항려(伉儷)가 되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수로)왕이 말하기를, ‘짐이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었다. 짐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일 것이니, 경들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면서,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가벼운 배[주(舟)]와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으로 가게 하였다[망산도는 서울 남쪽의 섬이고, 승점은 연하(輦下)의 국(國)이다.].
그 때 갑자기 바다의 서남쪽에서 붉은 색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나부끼며 북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유천(留天) 등이 먼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곧 배가 육지에 닿았다. 신귀(神鬼)는 이것을 보고 대궐로 달려와서 아뢰었다. (수로왕이) 구간(九干) 등을 보내어 목련(木蓮)으로 만든 키를 정비하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중략)"
즉, 상기한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허황옥 일행이 타고 온 붉은 돛단배가 아유타국에서 동쪽으로 갔으며, 가야국의 서남쪽 방향에서 접근하여 48년 7월 27일에 가야국에 도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왕후(王后)의 이름은 허황옥이며 아유타국의 공주인데, 48년 5월에 아유타국을 출발하였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수로)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있는데, 왕후(王后)가 조용히 왕에게 말하였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서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살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父王)과 황후(皇后)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황천상제(皇天上帝)를 뵈었는데, 상제께서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라는 자는 하늘이 내려 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나라를 새로 다스림에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고 말을 마치자마자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셨습니다.
꿈을 깬 뒤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우리를 작별하고 그곳을 향해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구하고, 하늘의 반도(蟠桃)를 쫓으며, 반듯한 진수(螓首)를 갖추어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수로)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에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왔으니 이 사람에게는 매우 다행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이틀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즉, 상기한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허왕후가 48년 5월에 아유타국을 출발하여 7월 27일에 가야국에 도착하였으므로 아유타국에서 가야국(金官城)까지 대략 두 달 보름 정도 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간 본 연구원이 고대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연구한 결과, 가야국의 금관성(金官城)이 있었던 곳을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강소성 양주(楊州)시로 추정할 수 있었다.
만약 허왕후가 탄 배가 인도나 태국 등 동남아시아 쪽에서 바다를 통해 왔다면, 허왕후의 배는 동남쪽으로 내려가서 다시 동북쪽으로 올라간 다음 양자강 입구에서 강 상류 쪽으로 향해 서북쪽으로 거슬러 올라왔어야 할 것이다.
[그림 2] 가야국 금관성과 아유타국 추정지역
그러나 상기한 가락국기(駕洛國記)에서 보는 바와 같이 허왕후가 탄 배는 아유타국에서 동쪽으로 갔으며, 가야국의 서남쪽에서 나타났다고 한다.
즉, 허왕후 일행이 탄 배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양자강 상류에서 강을 따라 동쪽으로 하류로 내려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현재의 강소성 양주시에서 바라보는 양자강 상류 방향은 서남쪽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가야 허왕후는 양자강 상류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현재의 사천성 주변 인근 지역에서 현재의 양자강을 따라 내려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여기서 '서역(西域)' 아유타국이 있었던 현재의 양자강 상류 사천성 지역을 그 당시 '서역(西域)'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아유타국은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
한편, 『삼국유사』 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가야가 서기후 42년에 건국되고 43년에 도읍을 금관성(金官城)에 정했으며, 허왕후가 48년에 가야로 왔다면, 그 당시는 동한(東漢, 후한)이 서기후 25년에 현 하남성 낙양을 도읍지로 삼은 건국 초기에 해당한다.
즉, 허왕후 일행이 전한(前漢, 서기전 206~서기후 9년)과 후한(後漢, 25~220년)의 교체기에 혼란한 정세를 피하기 위하여 전한(前漢)의 도읍지였던 현 섬서성 서안(西安)시 또는 한중(漢中)시, 또는 사천성 안악(安岳)현 등지에서 이주한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한(前漢)과 동한(東漢) 시대에 한(漢) 왕조에 허씨 성을 갖은 황후와 후궁들이 있었다. 즉, 전한(前漢, 서기전 202~서기후 9년) 대에는 선제(宣帝, 서기전 73~49년)의 공애황후 허평군(恭哀皇后 許平君)과 성제(成帝, 서기전 33~7년)의 페후 허씨(廢后 許氏) 및 후궁 허씨가 있었다.
또 동한(東漢, 후한, 서기후 25~220년) 대에는 광무제(光武帝, 서기후 25~57년)의 후궁 허씨가 있었다.
이들 허씨 가문은 평은후(平恩侯) 허광한(許廣漢, ?~서기전 61년)의 집안인데, 『한서』 외척전(外戚傳)에 따르면, 허씨는 창읍(昌邑, 현 산동성 제녕시 금향현이라고 하나 변이된 것으로 추정됨) 출신이고 한무제(漢武帝, 서기전 141~87년)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허씨 가문은 선제(宣帝)와 성제(成帝) 시기 이후에는 세력을 잃고 , 산양국 또는 창읍국이 있었다고 함)으로 갔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섬서성 서안(西安)시 동남쪽으로 대략 120km 지점에 산양현(山陽縣)이 있으며, 남쪽으로 양자강과 이어진다.
즉, 가야국 김수로왕의 비 허황옥이 평은후(平恩侯) 허광한(許廣漢)의 가문 출신으로서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섬서성 산양현(山陽縣)에서 배를 타고 현재의 강소성 양주시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울러 『삼국유사』가 써진 고려시대 1280년경에 고려 사람들은 전한(前漢)의 도읍지가 있었던 현 섬서성 서안(西安)시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도 '서역(西域)'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후한서』 남만서남이전(南蠻西南夷傳) 남만(南蠻)/파군(巴郡)·남군(南郡)의 만(蠻) 사람들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남만(南蠻) 사람들이 47년에 남군(南郡)·형주(荊州)·강하(江夏) 등지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주동자 중에 허씨가 있었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至建武二十三年(서기후 47년) 南郡水[屠]山蠻雷遷等 始反叛寇掠百姓 遣武威將軍劉尙 將萬餘人 討破之 徙其種人七千餘口 置江夏界中 今沔中蠻是也."
즉, 번역하면 아래와 같이 이해할 수 있다.
"건무(建武) 23년(서기후 47년)에 이르자, 남군(南郡) 도산(屠山)에 사는 만(蠻) 뢰천(雷遷) 등이 비로소 반란을 일으켜 백성을 노략질하였다.
무위장군 유상(劉尙)을 보내 만여 명을 거느리고 격파하여 그 종족 칠천여 명을 강하(江夏)의 경계 중에 두니, 지금의 면(沔) 땅의 만(蠻)이다."
상기한 기록에서 남군(南郡)은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양자강 중류 지역으로서 현재의 호북성 형주(荊州)시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한(漢) 대에 강남·파촉(江南·巴蜀) 지방에 있었다고 하는 군(郡)들은 남양군(南陽郡), 한중군(漢中郡), 구강군(九江郡), 회계군(會稽郡), 남군(南郡), 형산군(衡山郡), 여강군(廬江郡), 촉군(蜀郡), 파군(巴郡), 장사군(長沙郡), 동정군(洞庭郡), 창오군(蒼梧郡), 민중군(閩中郡), 남해군(南海郡), 계림군(桂林郡), 상군(象郡) 등인데, 이중에서 촉군(蜀郡)과 파군(巴郡)은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사천성 성도시와 중경시에 해당하며, 남군(南郡)은 현재의 호북성 강릉시(江陵)를 치소로 삼고 있었다고 한다.
또 상기한 기록에서 강하(江夏)는 현재의 호북성 무창(武昌)시로서 현 무한(武漢)시 동쪽 인근지역이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촉군(蜀郡), 파군(巴郡), 남군(南郡), 강하(江夏)의 위치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다.
이어서 『후한서』 남만서남이전(南蠻西南夷傳)에 따르면, 형주(荊州)에서 만(蠻) 허성(許聖)이 101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和帝永元十三年(서기후 101년),巫蠻許聖等以 郡收稅不均 懷怨恨遂屯聚反叛 明年夏遣使者 督荊州諸郡兵萬餘人討之 聖等依憑阻隘久不破 諸軍乃分道並進 或自巴郡魚復數路攻之 蠻乃散走 斬其渠帥 乘勝追之大破聖等 聖等乞降 復悉徙置江夏."
즉, 번역하면 아래와 같이 이해할 수 있다.
"화제(和帝) 영원(永元) 13년(101년), 무당(巫) 만(蠻)인 허성(許聖) 등이 군(郡)의 수세(收稅, 세금)가 불공평하다고 원한을 품다가 둔취(屯聚, 여럿이 한 곳에 모임)해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해 여름에 사자를 보내어 형주(荊州)의 군병(郡兵) 만여 명을 감독해 토벌하나 허성(許聖) 등이 좁고 막힌 곳을 의지해 오랫동안 격파되지 않았다.
이에 여러 군대가 길을 나누어 같이 진군하거나 혹 파군(巴郡), 어복(魚復) 등 여러 길로 공격하니 드디어 만(蠻)이 흩어져 달아났다. 그 수령을 베고 승기를 타고 추격해 허성 등을 대파시켰다. 허성(許聖) 등이 항복을 청하므로 다시 모두 강하(江夏)로 옮겼다."
즉, 형주(荊州)는 동한(東漢, 후한)에서 설치했는데, 현재의 호북성 양양(襄陽)시로 알려져 있으며, 그 위치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다.
또 이어서 『후한서』 남만서남이전(南蠻西南夷傳)에 따르면, 강하(江夏) 만(蠻) 사람들이 169년과 180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靈帝建寧二年(169년), 江夏蠻叛州郡討平之. 光和三年(180년), 江夏蠻復反 與廬江賊黃穰相連結 十餘萬人攻沒四縣 寇患累年 廬江太守陸康討破之 餘悉降散."
즉, 번역하면 아래와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제(靈帝) 건녕(建寧) 2년(169년), 강하(江夏)의 만(蠻)이 반란을 일으켜서 주군에서 토벌 평정하였다.
광화(光和) 3년(180년) 강하(江夏)의 만(蠻)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려강(廬江) 적(賊, 도적) 황양(黃穰)과 더불어 서로 연결해 십여 만 명이 네 현(縣)을 공략하여 도적의 우환이 몇 년에 걸쳤다.
려강(廬江) 태수 육강(陸康)이 토벌 공파하니 나머지는 모두 항복해 흩어졌다."
즉, 려강(廬江)은 현재의 안휘성 합비시로 알려져 있는데, 그 위치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촉군(蜀郡), 파군(巴郡), 남군(南郡)·강하(江夏)·형주(荊州)·려강(廬江) 등의 위치가 모두 현재까지 알려진 것처럼 [그림 2]의 위치가 올바르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간 본 연구원이 고대 지명들을 연구한 결과, 려강(廬江)은 현재의 안휘성 합비시 인근지역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현재의 안휘성 합비시 인근지역에는 대가야가 있었으며, 532년에 가야와 신라가 통합한 후에는 신라의 대야성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까지 알려져 있는 것처럼 남군(南郡)·강하(江夏)·형주(荊州)·려강(廬江) 등 지명들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변이된 것으로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들 지명들의 본래 위치는 [그림 2]에 표기되어 있는 현재의 위치보다 서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 허황후가 양자강 상류지역에 해당하는 '서역(西域)'에서 동쪽으로 가야국 금관성으로 왔다고 추정하는데 지장은 없을 것이다.
다만, 전한(前漢)과 동한(東漢) 시대의 허씨 가문이 동남쪽으로 이주함으로써 허황후가 가야에 오게 되었는지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동한(東漢)이 25년에 건국되었으며, 허황후가 48년에 가야에 왔다고 하므로 시기적으로 같은 시기임을 알 수 있다.
또 허성(許聖) 등이 가야 허황후와 같은 허씨 가문이라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반란을 일으킨 지역이 양자강 중류와 상류 지역이므로 서로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아무튼 조선시대 우의정을 지낸 허목(許穆, 1595~1682년)이 지은 『미수기언(眉叟記言)』에 따르면,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옥의 출신지에 대하여 서로 다른 학설과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현재의 인도 남천축국 아유타국 공주설, 아유타국 망명객이 정착했던 현재의 중화인민국 사천성 허가촌 출신설, 서역(西域) 지역의 허국(許國) 출신설 등이 있었다고 한다.
즉, 『미수기언(眉叟記言)』이란 책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1512년에 재 간행된 후에 쓰인 책이므로 역사왜곡의 같은 선상에서 쓰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허황옥의 출신지에 관하여 중요한 암시를 남기고자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즉, 『미수기언(眉叟記言)』에 따르면, 인도를 남천축국이라고 기록하였다. 또 현재의 사천성 허가촌을 밝히고 있으며, 서역(西域) 지역의 허국(許國)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상기한 세 가지 출신 설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 같은 의미라고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즉, 인도 남천축국에 아유타국이 있었는데, 가야 허황후의 집안이 처음에 사천성 허가촌으로 이주했는데, 그 곳에 허국(許國)을 세워서 살다가 다시 가야국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론해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다만, 가야 허황후가 인도 남천축국으로부터 가야까지 이주한 것이 아니라 허황후의 집안이 대를 이어서 순차적으로 이주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한편, 현재 김해에 있는 금관가야국 허황후 황옥(黃玉)의 고분 비문에 ‘보주태후허씨릉(普州太后許氏陵)’이라고 쓰여 있으므로 허황후의 시호가 보주태후(普州太后)였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주태후(普州太后)'란 『삼국유사』 등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고 허황후의 비는 조선시대 이후에 세운 비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보주(普州)'란 한[전한(前漢: 서기전 206~서기후 9년), 후한(後漢: 서기후 25~220년)] 대의 지명이 아니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따르면, 북주(北周, 557~581년) 대에 현재의 사천성 안악현(安岳縣) 지역에 '보주(普州)'를 처음으로 설치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위키백과(영문판)』에 따르면, 허황후가 죽은 직후인 후한(後漢) 시대에는 '보주(普州)'란 없었고, 그 당시 현재의 사천성 안악현 지역을 익주(益州)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보주태후(普州太后)'란 용어를 『미수기언(眉叟記言)』에 남김으로서 후손들이 '보주(普州)'라는 지명을 찾게 하여 현재의 사천성 안악현을 찾을 수 있게 하지 않았겠는가?
아무튼 허황후가 가야에 도착한 후, 허황후 일행을 배에 태우고 왔던 사공 등 일행은 다시 아유타국으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반란 등 난리가 나서 많은 백성들이 한꺼번에 이주한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