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제5화 영화 300인 전사의 테르모필레와 세계3대 운하 고린도와 미케네-2018년 10월9일-
델피 산속의 조용한 호텔 Amalia Hotel Delpi 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한 후
1시간 30분을 달려 영화 300인의 전투가 벌어졌든 테르모필레에 도착하였다
오늘의 일정은 테르모 필레-고린도-미케네 -에피다우로스-나폴리오를 관광하는
코스이다
테르모필레는 뜨거운 통로의 문을 의미하고 온천이 솟아나는 카리모도로스 산의
험준한 절벽과 마리아코스 만에 끼여 있는 도로로 가장 좁은 곳이 15m 정도의
폭 밖에 되지 않아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다.
페르시아의 210만명의 병력을 상대로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이 3일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 지형의 협곡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B.C480년 6월 무렵 페르시아왕 크세르 크세스는 30만(260만?)의 육해군을
동원하여 육군은 해군과와 함께 테살리아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리스 동맹군의 육군은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자신의 휘하에 동맹군
병사 7000명을 데리고 테르모필레의 협곡에서 페르시아군을 저지하고
해군은 그리스의 명장 테미스토클레스가 아르테미시움 앞바다에서 페르시아
군을 저지하였다
8월말 테르모필레에 도착한 크세르 크세스는 레오니다스에게 '무기를 내게 바치면
살려주겠다'고 항복할 것을 제의하자 "와서 가져라(Molon Labe)"라며 용맹함과
기개를 보여 주었기 때문 페르시아 군은 분노하여 첫날 총 공세를 하였으나 협곡
에서의 팔랑거스 전법에 페르시아 군대는 치명상만 당하고 둘째 날도 페르시아
최강 측근 부대인 이모탈 부대를 투입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초조하여 새로운 작전을 구상하든 중 밤중에 찾아 온 밀고자 '에피알테스'라는
농부가 협곡의 샛길을 안내하였다
3일째 되든날 아침 셋길로 처 들어 온 페르시아 군대를 맞이하여 스파르타의
300인 전사들은 그리스 연합군을 후퇴시키는 퇴로를 열고 최후의 1인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결전하였으며 이 전투에서 300명 전원 전사하였고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도 함께 전사하였다 고한다
배신자 에피알테스'는 그리스 역사에 영원히 남아 에피알테스는 그리스어로
‘악몽’을 뜻 한다고 한다
국도 옆에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300명의 스파르타 병사들을 이끌고 전사한
레오니다스 왕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이 서있는 앞쪽의 계곡이 테르모 필레 계곡으로 이곳에서 그 역사적인
전투가 일어 난 곳이고 이 계곡 언덕에는 하나의 기념 동판이 세겨저 있었다
이 동판은 테르모플레 전투에서 용감하게 전사한 스파르타의 전사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전투 현장에 세워 진 기념 동판으로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었다
<나그네여, 가서 스파르타인에게 전하라.
우리들은 조국의 명령을 지켜 여기 잠들었노라>고
우리 일행은 이름없는 용감한 전사들의 숭고한 정신에 경의를 표하며 잠시 동안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우린 3시간을 남하하여 고도 고린도에 도착하였다
세계 3대 운하의 하나인 코린토 운하는 19세기 후반에 완공한 그리스 본토와
필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해 주는 통로이며 코린트 (Corinth)는 고대 그리스에서
최강자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이에 위치한 도시 국가였다
기원전 6세기 코린토스(Corinthos)에 의해 아크로 코린토스 산 아래에 건설되었는데
지정학적으로 상업이 발달하여 도시는 번창하였으며 에게해 주변의 여러 그리스 도시
국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왕래하여 이곳에는 태양신 아폴론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뿐만 아니라 옥티비아 신전, 포세이돈 신전, 상업의 신 헤르메스 신전과
같은 여러 신전이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BC 146 년에 코린트는 카르타고와 똑같이 로마에 의하여 도시가 파괴
당하고 패망하여 주민들은 몽땅 노예로 팔려 나갔다고 한다 두 도시는 같은 해인 BC 146 년에 멸망하였다.
그러나 100년후 로마의 시저와 아우그스투스에 의하여 유대인 이주 민으로 도시가
다시 건설되었다고 한다
코린트의 잘 알려진 왕으로 시시포스(Sisyphus)는 신들을 속인 죄로 그는 사후에
둥그런 돌을 굴려서 언덕 꼭대기까지 영원히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트로이 전쟁 때 코린트의 왕은 아가멤논으로 스파르타 왕이었던 메넬라오스의
형이고 아르고스, 미케네, 코린토스를 지배하는 왕으로 묘사되었으며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 동맹군의 총 지휘관이었다
로마 시대의 유적들로 575M 의 바위산 아크로 코린토스 정상에 있는 아프로디테
신전과 사도 바오로가 갈리오 총독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았던 재판정이 보존돼 있다.
기원전 6세기에 원기둥 38개를 기반으로 세워진 아폴론 신전이 건설되었는데
지금은 도리아식 기둥 7개만 남아있다고 헌다
도리아식 기둥은 장식이 단순하고 이오니아식은 끝부분이 말린 장식으로 되어 있으며
고린도식 장식은 꽃잎이 퍼져나온 형태의 문양이 기둥에 있는 것을 말한다
광장에는 스토아와 아고라(Agors)가 있고 광장 중앙에는 사도 바울이 설교했든
연단 비마가 있었으며 앞문 동쪽에는 피레네 샘(Peirene Fountain)이라는 로마
시대의 물 저장소와 옥타비아 신전 등이 있었다고 한다
고린도는 사도 바울의 고린도서로 유명하다
바위산 아크로 코린토스 정상에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신전을 지어놓고 성녀들이
1000명 가까이 있었으며 고린도 사람들은 이곳을 성전처럼 여기며 드나 들었으며
이들은 성관계를 신께 드리는 예배로 생각하며 향락을 즐기고 있었다
그래서 서기 50년에서 52년에 사도 바울은 이곳 고린도에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하였고 네차례나 순례하면서 성도들의 교화를 위해 고린 도서
전 후서가 만들어 졌다고 한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 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6-19
1881년에 착공하여 1893년에 완공한 고린도 운하는 에게해와 이오니아해를
잇는 운하로서 세계 3대 운하의 하나이다
대규모 토목공사로서 총길이 6.3km 폭 21, 깊이 80m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중요한 루트이다
기원전 7세기에 통치자 페리안드로스(Periander)가 이 운하에 대한 효용성릏
처음 제시한 후 고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본격적으로 노예 6,000명을
동원하여 건설하다가 중단 되었다고 한다
우린 고린도를 뗘나 30분을 달려 미케네 문명을 찾아 갔다
미케네 유적지는 아르골리스(Argolis)평야에 솟아 있는 두개의 산 프로피티스
일리아스 산(Profitis Illias)와 사라(Sara) 산 사이의 건설되었으며 제우스의
아들 페르세우스(Perseus)가 기원전 16세기 이전에 세웠다고 한다
미케네 문명 시대 (BC 1600~1100)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크게 발전했으며
크레타에 있는 크노소스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파괴된 후 미케네는 에게 해
지역의 지배 세력이 되었다
BC14-12세기경 전성기 시대의 성채는 동서로 300M 남북으로 150M의 크기이며
1-3M 크기의 돌 기둥들로 구성된 성곽의 둘레는 1KM나 되었다
츨입구에는 서로 마주보는 사자가 세겨진 사자문이 있고 사자문을 지나면 바로
오른쪽에 원형 묘지가 있다.
이곳은 기둥없이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곳으로 보아 천장은 돔형으로 만든
것으로 성내의 원형 분묘는 왕가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기서 출토된 황금 데드 마스크는 아가맴논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여
아가멤논 데드 마스크 (dead Mask)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원형 왕가의 무덤에는 많은 출토품들이 나왔는데 특히 크레타 문양의
도자기도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북쪽 제일 높은 곳에는 왕궁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높은 위치에 있어 모든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곳이 었다
궁전에는 넓다란 룸이 있어 연회등 다양한 행사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왕궁의 벽화도 화려하게 채색된 그림이나 문양들이 크레타 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왕궁은 규모는 적지만 화려하게 건축되었든 것으로 추정 되었다
1876년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이 발굴한 미케네 유적들이다
왕궁 터와 조금 떨어진 반대편 언덕에는 지하 납골당 혹은 벌집 묘지로 불리는
"아트레우스의 보고(Treasury of Atreus)"아가멤논의 묘(Tomb of Agamemnon)"
라는 미케네의 건축물은 아직까지도 잘 보전되어 있었다
BC 13세기 건축되었으며 입구가 아취형 천정을 가진 납골당이며 적은 방이 있었다
미노스 문명은 기원전 3000년 무렵에 에게 해에 위치한 크레타 섬에 들어섰으며
그 중심인 크노소스 궁전 터를 보면 그 문화의 우수성을 알 수 있다.
자연 재해등으로 파괴되든 미노스문명은 기원전 2000년 무렵에는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청동기 문명으로 일어난 미케네 문명을 꽃피우며
크레타 문명을 계승하였다
군사적 성격이 강하여 트로이를 정복하고 에게 해를 장악하였으며 트로이 문화
까지 흡수한 미케네 문명이었지만 BC1100년 경 철제 무기를 사용하는 도리아인이
북쪽에서 내려와 미케네 문명을 파괴한 후 수세기 한동안 암흑시대가 이어졌다.
그 후 BC 8세기경 그리스 본토 곳곳에서는 폴리스라는 도시 국가가 나타났으며
이 폴리스를 중심으로 그리스 문명은 화려하게 피어났다고 한다
미케네에서 1시간을 이동하여 다음 행선지인 에피다우로스에 도착하였다
파레아 에피다브로스(Epídauros)에서 약 8km 떨어진 내륙에 있는 에피다우로스
유적은 최첨단 종합 병원격인 아스클레피오스의 성소와 가장 완벽하고 잘 보존된
고대 원형극장과 신전등이 있었다
에피다브로스에는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후 5세기까지 번성한 세계 최대의
병원인 아스클레피온이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부상자를 치료하던 곳이기도 한 병원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폴리스들간의 싸움으로 25년에 걸친 이 전쟁에서는
스파르타가 승리를 거두었지만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전체
그리스를 쉽게 정복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스의 신 아폴론은 데살리의 피레지아스 왕의 딸 코로네를 사랑하여
아이를 가졌는데 피레지아스 왕은 그런 딸을 이시스의 아내가 되도록 강요하자
화가 난 아폴론은 아르테미스 여신과 함께 화살을 쏘아 이시스를 죽여 버리고
코로네도 불길에 던져 버렸다 다행히 코로네는 죽지 않았고 에피다우로스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아스클레피오스하고 한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자신의 불치병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 죽지 않는
영원한 신이 되었고 에피다우로스에서 불치병을 치료하는 곳으로 병원 이름이
아스클레피오스였으며 입구에는 모든 질병의 근원을 마음의 문제로 생각하여
‘오직 순수한 생각만 가진 사람만 들어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또한 공연을 통하여 환자에게 마음의 안정과 기쁨을 주기 위해 원형극장도
만들어 병원과 같이 치료하는 곳으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4세기경 가파른 산의 경사로를 이용해서 만들어진 극장은 14000여명
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며 음향효과가 어느자리에 있든 무대 중앙의 공연과
음악의 소리가 깨끗하고 동일하게 들리고 증폭되도록 설계되었는데 가장
조화를 잘 이루는 음향의 황금 분활 때문이라고 한다
황금 분할이란 1:1.618 비율로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사용 했는데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도 이 황금 분할에 가깝다고 한다
상단이 23게단으로 되어 있고 하단이 32개단으로 돠어있어 32/23는 1,618이며
전체55/32도 1,618이란 숫자가 나온다고 한다
원형 극장 근처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26개의 돌기둥만 남은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의 유적도 있었다
이것으로 오늘의 강행군 투어를 끝내고 한적한 시골마을인 나폴리온의 Amalia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오늘의 일정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