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터스텔라〉가 천만 관객을 앞두었다고 한다. 동시대적 감각을 나누고 싶다는 공감화 욕구 때문인지 더 많은 관객이 극장을 찾았다. 무엇이 〈인터스텔라〉를 보게 만드는 힘이 된 것일까 상대성이론, 블랙홀, 웜홀, 오차원, 시간이동 등 과학적 상상력에 대한 호기심, 막대한 제작비를 들인 우주 영화라는 점, 요즘 부쩍 힘을 잃어가는 부성애에 대한 향수, 심지어 과학교육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까지, 이유는 다양했다.
〈인터스텔라〉, 가치를 추구한 삶
나 역시 이 영화를 매우 흥미롭게 보았다. 개인적으로는 우주복을 입은(멋진 슈트가 아니다) 매튜 매커너히가 40대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쿠퍼 역을 맡았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퇴사한 주인공이 다시 조직의 영웅이 되어 재취업하고 지구를 구한다는 발상 자체가 짜릿함을 주는 시대적 맥락을 살아가고 있다.
또 하나, 쿠퍼가 농사꾼으로 살아가면서도 과학자로서의 감각과 능력을 전혀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쿠퍼가 옥수수밭을 일구면서도 과학 ‘놀이’를 계속 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 놀이야말로 연구의 본질이니 아니던가. 그러나 이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주인공이 보여주는 삶에 대한 태도였다.
주인공 쿠퍼의 일생은 과학자로서의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것은 가치에 대한 탐구이다. 쿠퍼는 부자가 되기 위해 우주로 나간 것이 아니다. 성공을 해서 유명해지고, 과학자로서 실적을 올리기 위해 위험을 감수한 것도 아니다. 그는 과학자로서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 하고, 또 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소신에 인생을 걸었다(그 때문에 지구로 돌아온 뒤에 다시 동료를 위해 우주로 떠날 수 있었다. 진리 앞에 순수한 과학자 부녀의 그 ‘담담하고도 건조한’ 권유와 선택이 존경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삶에 대한 태도는 곧 ‘지구를 위하는’ 일이 되었다. 쿠퍼는 자신의 가치를 잃지 않고 끝까지 그것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다. 우주에서의 그가 당당하면서도 겸손하고, 믿음직하면서도 신뢰가 가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람이 제일 마지막에 무엇을 보게 될까 어느 장면에선가 쿠퍼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이 가장 마지막에 무엇을 보게 될까.” 그 대사가 나에게는 이 영화의 키워드로 다가왔다. 우주에서도 찾아야 할 단 하나의 질문은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쿠퍼는 그것이 ‘자식’이라고 말했다. 지구인을 위해 우주로 떠난 그는 결국 자식을 보려고 지구에 다시 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딸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끝까지 살아서 우주선을 지켰다. 쿠퍼가 떠올린 ‘자식’이라는 가치를 반드시 ‘혈연-자녀’로 한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낳은 하나의 생명이자 분신 같은 타자이기도 하고, 실제로 책임지고 돌보아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최선을 다하게 되는 사랑의 원천이기도 하며, 돌봄을 통해 나 자신을 성장시키고 그것을 미루어 확장된 사랑을 하게 만드는 에너지이기도 하다.
상징으로서의 우주란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삶의 시간과 공간 그 자체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현재의 삶을 살고 있는가. 과연 어떤 가치를 위해 소중한 정성을 바치고 있는가.
올 한 해 어떤 가치를 키울 것인가 한 해가 마무리되는 즈음이다. 지나온 한 해를 돌아보고 새로 올 한 해를 설계하는 때이기도 하다. 계획에 대해 말할 때 항상 가시적인 성취나 일에 관련된 것을 말하는 습성과 문화가 있다. 졸업, 입학, 취직, 결혼, 출산, 승진, 성과, 재테크, 이사.
그러나 이제 생각의 틀을 조금 바꾸어보면 어떨까. 올 한 해는 어떤 가치를 돌보고 키우며 살아갈 것인가. 내 생의 마지막에 보게 될 어떤 것을 위해 올해는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만으로도 마음은 이미 풍성해지고 있다(어쩌면 가난해지고 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때는 답을 찾으면 된다.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라. 그런 사람이 없다고 해도 걱정할 것은 없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독서라는 대안이 있지 않은가.
“나와 남을 비교하자면, 나는 친하고 남은 멀다. 나와 사물을 비교하자면 나는 귀하고 사물은 천하다. 세상에는 도리어 친한 것이 먼 것에게 듣고, 귀한 자가 천한 것에게 부림을 당하니 어째서인가 욕망이 밝음을 가리고, 습성이 진실을 가리기 때문이다. 이에 좋고 싫고 기쁘고 노여워하는 것과 행동거지, 우러르고 굽어보는 것 모두를 남만 따라하고 주관대로 하지 못한다. 심할 때는 말하고 웃고 표정 짓는 것까지 남이 갖고 노는 장난감처럼 바친다. 정신과 생각, 뜻, 모공, 뼈마디 하나까지 내 것이 없게 되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 처사가 손수 심은 나무가 수백에서 천 그루이다. 뿌리와 줄기, 가지와 잎을 마디마디 줄기줄기 모두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고 북돋아 주어 길렀다. (이용휴, 「아암기(我菴記)」)"
조선후기 문인 혜환(惠寰) 이용휴(李用休 1708~1782)가 벗 이처사에게 써준 글이다. 이처사는 자기 집의 당호를 ‘아암(我菴: 나의 집)’이라고 정하고 이용휴에게 글을 청했다. 이용휴는 남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살겠다는 뜻이니 아름답다며 격려해주었다.
나답게 살려는 뜻을 키우는 것은 내 삶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것과 같다. 한 그루씩 심은 나무가 어느덧 천 그루가 되었다. 오늘부터 마음과 가치를 위해 무언가 하나씩 심어간다면, 언젠가 우리 앞에도 천 그루의 나무가 수만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 아닐까.
어느새 마음과 가치의 우주가 우리 앞의 인터스텔라(inter-stella. 별과 별 사이)로 장관을 이룰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생각은 미래의 별이 된다. 생각하고 상상하지 않는 한, 우리 인생의 길은 반짝이는 별이 뜨지 않는 그저 암흑, 어둠뿐일지 모른다. 보이지 않을 때 행한 음험한 생각과 행동은 결국 언젠가 낱낱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반대로 안 보이게 행한 선과 진실도 언젠가는 제 뿌리를 찾아가는 법이라고 고전을 통해 나는 배웠다. 그것이 사실이 되게 하는 게 바로 ‘가치’다. 고전은 그런 가치를 ‘현실화하는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 해를 보내고 맞으면서 인생의 먼 미래를 장식할 풍성한 별(생각, 상상, 감성, 사람, 가치)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그렇게 해보려고 한다.
글쓴이 / 최기숙 |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교수 (한국문학 전공) ·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 예술교육 및 멘토 |
· 저서 『감성사회』, 글항아리, 2014 『한국고소설의 주인공론』, 보고사, 2014 『제국신문과 근대』, 현실문화, 2014 『감정의 인문학』, 봄아필, 2013 『조선시대 어린이 인문학』, 열린어린이, 2013 『처녀귀신』, 문학동네, 2010 『환상』, 연세대출판부, 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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