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랑-고아(Alan-Go'a)를 아십니까? 알랑 미인(美人)이란 말입니다. 알랑-고아는 몽골민족의 성녀(聖女)입니다. 이 이름에 들어간 ‘고아’는 곱다(beautiful)는 의미입니다. ‘알랑’이란 우리가 자주 들어온 아랑 설화의 그 아랑이라는 말이지요.
몽골학의 전문가인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북방 유목민 가운데 오직 몽골만이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한 책을 남겼습니다(아래는 박원길 교수의 책에 있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그들의 시조설화인 알랑-고아의 설화가 있지요. 알랑-고아는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이라는 사람의 딸이라고 합니다. 그 설화의 내용을 보시죠.
밤바다 밝은 금빛을 띤 사람이 겔(몽골인의 천막집)의 에루게(천막 위로난 창문)의 창문을 통해 빛처럼 들어와 나의 배를 비치자 그 빛이 내 뱃속으로 들어왔다. … 뱃속의 아이는 하늘의 아들이다 … 이 아이가 우리 모두의 칸이 되면 일반 사람들은 이 아이의 내력을 알게 되리라 (‘몽골비사’)
어디서 이와 비슷한 신화를 들은 적이 있는 듯한데요. 마치 고구려의 유화부인 설화를 듣는 듯 하지 않나요?
알랑-고아의 아버지는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이라고 합니다. 이 뜻은 “코리족의 선사자(善射者)”라는 의미입니다. 이 선사자라는 말은 우리에게 익숙한 말(한역된 말)로 보자면 주몽(朱蒙)이라는 말입니다. 주몽이란 활의 명인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알랑-고아의 아버지는 고주몽(高朱蒙 : 코리족의 명궁)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몽골비사를 봅시다.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은 사냥을 즐겨했는데 이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과 따로 떨어져 나와 코릴라르(Khorilar)라는 씨족을 만들었다. 보르칸칼돈 산은 사냥감이 많아서 오랑캐들인 신치-바얀의 땅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의 딸인 알랑-고아는 아리크-오손에서 태어난 것이다(‘몽골비사’).”
코릴라르는 몽골학자 가담바에 의하면 코리족에서 갈라져 나온 부족의 명칭이라고 합니다. 이 명칭은 주몽이 코리 부족에서 일단의 지지 세력을 이끌고 남으로 이동하여 나라를 세운 뒤 국명을 코리의 한 나라임을 나타내기 위해 고(高 : 으뜸) 구려(Kohri)라고 부른 것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몽골의 건국신화와 고구려의 건국신화의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 말입니다.
(1) 알타이를 찾아서 지난 강의들에서 저는 우리 민족의 뿌리인 ‘쥬신족’에 대한 해설을 해드린다고 약속한 바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게 ‘쥬신족’이라니 도무지 가당치 않다는 우려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쥬신족’에 대한 분석이 중국과의 불화를 유발할 수도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저도 물론 우리나라의 입장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중국인들이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종주국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현실을 생각하게 되자, 이 과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최근까지도 누군가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여 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 분야에 대해서는 쇼비니즘에 치우쳐 지나치거나 아니면 너무 중화주의적인 사고에 젖어서 철저히 보수로 일관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잘 알지도 못하지만 일단 제가 아는 대로 분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분석에 앞서 저는 우리의 과거를 일국사(一國史) 중심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마치 고구려 백제 신라가 동시에 존재했듯이 같은 혈연과 문화를 공유한 집단이 동시에 여러 개의 부족과 국가로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즉 우리가 사는 한반도의 한국과 한국인의 관점에서만 역사를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중국의 사서(史書)들에서는 수많은 부족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저는 몽골 - 만주 - 한반도 - 일본에 이르는 민족들이 동일한 계열임을 밝히고자 합니다. 현재 진행되는 동북공정(만주사 말살)에 대한 대응은 주로 중국이 제시한 조건과 문제들에 대한 반론을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이것은 중국이 의도하는 바입니다(예를 들면, 중국은 조공이니 책봉이니 하는 문제에만 집착하게끔 유도하는데 이 문제를 해명하려 하면 할수록 중국 측이 원하는 답변이 나오고 말지요). 동북공정은 중국과 우리는 다른 계열의 민족이며 지난 번 말씀드린 유조변(柳條邊)과 같이 중국과는 다른 역사의 주체와 무대가 만주 지역에 존재함을 밝히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저는 세 가지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자 합니다.
① 만약 알타이 동부에서 몽골 - 만주 - 한반도 - 일본 등에 이르는 민족이 한족(漢族)과 확연히 구분되고 동일한 계열로 공통성을 가진다면 그들을 부를 수 있는 보편적인 명칭은 무엇인가 하는 점. 저는 이 보편적인 명칭을 ‘대쥬신’이라고 제안한 바 있습니다.
② 몽골 - 만주 - 한반도 - 일본 등에 거주해 온 민족이 한족(漢族)과 확연히 구분되고 동일한 계열로 볼 수 있는 공통성이나 역사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점. 저는 이 부분을 크게 한반도의 한국인을 대표하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고구려 - 몽골, 고구려 - 만주족 등의 공통성을 추적하는 방법으로 해설해가고자 합니다.
③ 대쥬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민족 집단에 대한 그 동안의 생물학적 연구 성과들을 종합적으로 소개하여 ①, ②의 분석이 과연 타당성이 있는가를 검정해보도록 합니다.
(2) 대쥬신 명칭 문제 중국인들은 북방 유목민들을 서융(흉노, 강), 북적(흉노, 선비), 동이(갈, 예맥) 등으로 나누지만 실제로는 강(羌)을 제외하고는 같은 계열의 종족이라는 것입니다(이 점은 계속하여 상세히 분석해 드립니다). 흉노, 선비, 갈, 예맥 이니 하는 명칭들은 이들 부족들이 스스로 부르는 명칭이 아니라 중국인들이 자기들이 분류하기 편리한대로 임의로 부여한 명칭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인간 이하를 지칭하는 욕들입니다.
예컨대 일반적으로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진 ‘예맥(濊貊)’이란 ‘똥오줌이 묻은 더러운 (승냥이 같은) 짐승’라는 뜻인데 어느 부족이 자기 부족을 그렇게 부르겠습니까? 그리고 선비(鮮卑)란 동물무늬가 있는 허리띠[세르베]이고 흉노(匈奴)란 ‘입심 좋은 노예’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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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①] 알타이 산맥과 압록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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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북한의 사회과학원 역사학연구소 근대사 실장인 공명성(34) 박사는 ‘삼국사기’,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국조보감’, ‘기자조선’ 등 북측이 보존하고 있는 370여 권의 고문헌을 7년간 연구한 끝에 우리나라 역대 국호(國號)의 뜻은 모두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제시하였습니다. 즉 고조선 이후 한반도에 실존했던 역대 국가들의 나라 이름은 모두 같은 의미라는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북한에서 나왔지요.
월간 <민족21>(2003. 11월호)에 따르면, 공명성은「조선 역대국호 연구」(2003)라는 논문에서 우리 민족역사의 많은 나라들이 건국시기와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그 이름에는 ‘동방의 해 뜨는 나라’, ‘태양이 솟고 밝고 선명한 나라’라는 공통된 뜻을 담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면 고조선의 아사달(阿斯達)은 ‘밝게 빛나는 아침’, ‘광명을 가져다 주는 동방의 아침’을 뜻하며 여기에서 유래한 조선(朝鮮)이란 나라 이름도 ‘태양이 솟는 동방의 나라’라는 의미라는 것이죠. 부여는 태양, 불을 의미하며, 고구려는 태양을 뜻하는 ‘고(高)’와 성스러우며 크다는 ‘구려(句麗)’를 결합한 것으로 결국 ‘태양이 솟는 신비한 나라’라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또 옛말로 박달인 백제(百濟)는 ‘밝은 산’을, 신라는 ‘새 날이 밝는 곳’, ‘태양이 솟는 벌’을, 발해는 ‘밝은 해가 비치는 나라’, ‘밝은 태양이 솟는 나라’를, 고려(高麗)는 ‘태양, 신성하다, 거룩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고조선에서 조선 때까지의 모든 국호들이 모두 꼭 같은 의미가 있다는 데 대해 과학적으로 해명한 것은 처음인 셈입니다. 공명성의 연구는 국호의 의미를 한자의 뜻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각 나라 사람들의 시원(혈연적 계보), 건국 과정, 신앙과 염원, 고유 조선어 등을 통해 입체적으로 종합 분석한 것입니다.
공명성 박사의 분석은 일단은 만주 - 한반도에 국한되어 있으므로 이 점을 좀더 확대하여 구체적으로 보도록 합시다. 공명성 박사의 분석은 만주 일대 - 한반도에 이르는 국호들은 ‘해뜨는 나라’, ‘해가 밝게 비치는 나라’라는 의미로 모여집니다. 그러면 몽골 지역과 일본 지역이 남게 됩니다.
알타이 산맥을 주변으로 하여 몽골 초원 지역이나 만주 지역까지 거주했던 민족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이나 도읍을 오손(烏孫), 오논(몽골지역), 애신(만주지역) 등으로 불렀는데 이 말들은 모두 알타이 말인 ‘아사나’[해뜨는 곳(日本, 日出地)]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박시인 : 알타이 신화). 따라서 몽골 지역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일본(日本)을 봅시다. ‘일본’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이미 ‘해뜨는 나라’라는 의미로 오손, 조선, 부여, 백제, 구려와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일본말로 ‘아사(あさ)’라는 말은 아침이라는 말로 알타이어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를 앞두고 아키히도 일왕이 고대 천황은 백제왕의 후손이라고 밝혀 상당한 충격을 주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2002년 일본의 인류유전학 권위자인 오모토 게이이치(67 : 東京大學 명예교수)는“한국인과 일본인은 유전학적으로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다”고 밝혔지요] 아이러니하게 들리시겠지만 ‘일본’이나 ‘조선’은 같은 의미의 말이라는 것입니다. 조선이란 ‘해뜨는 밝은 아침’ 또는 ‘아침 해[朝陽]’, ‘동녘의 나라[東國]’, ‘해뜨는 나라[日本]’ 라는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쉽게 말해서 조선의 조(朝)는 뜻으로 사용된 글자이고 선(鮮)은 음으로 사용된 글자로 해뜨는 방향 또는 해를 의미한다는 것이죠. 일본이라는 글자는 모두 뜻글자로 사용된 말이죠. 현대 일본어는 우리 고대의 이두(吏讀)와 유사하다는 것은 모두 아실 것입니다.
금나라(청나라의 전신)의 역사서인 ‘금사(金史)’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태조께서 말하시기를) 요나라는 쇠를 나라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쇠가 단단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쇠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삭아갈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세상에 오직 애신(금 : 金)은 변하지도 않고 빛도 밝습니다. 우리는 밝은 빛[白]을 숭상하는 겨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라이름을 애신[金]이라고 합니다(遼 以賓鐵爲號 取其堅也 賓鐵雖堅 終亦變壤 惟金不變不壤 金之色白 完顔部色尙白 於是國號大金 : 金史 2권 太祖紀).”
이를 보면 쥬신족들은 알타이(金)라는 말이 가진 의미들 즉 ① 금(金)이나 쇠, ② 해뜨는 곳 즉 동쪽(東), ③ 시작하다(始), ④ 밝다[明], ⑤ 하늘을 나는 새[鳥] 등의 의미들을 토대로 나라 이름을 만들어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알타이란 하늘을 나는 새의 의미도 가집니다. 그래서 대알타이족 또는 대쥬신족들은 새[鳥] 특히 까치[鵲]와 봉황(鳳凰)을 숭상하는 민족으로 태양과 관계를 맺고 그 결과 알을 낳아 나라의 시조(始祖)들이 탄생하였다는 신화(神話)를 공통으로 가지고 있지요. 단석괴(壇石塊)ㆍ고구려의 시조ㆍ부여의 시조 등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박시인, 알타이신화)] 그런데 발음 구조와 언어 구조가 확연히 다른 뜻글자 체제인 중국인들은 이들 민족들을 어떻게 불렀을까요? ‘사기(史記)’에서는 “발(發)[밝다는 뜻을 중국음(中國音)으로 나타낸 말]”, “식신(息愼)”, ‘관자(管子)’에는 “발(發)”, “조선(朝鮮)”등으로 불렀고, 이외에도 중국인들은 “숙신(肅愼)”, “직신(稷愼)”, “주신(珠申)”, “예맥(濊貊 :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보고 있음)”등으로 불렀습니다. 앞부분에 나타나는 발(發)이나 조(朝)라는 말은 주로 뜻으로 표현한 것이고 뒷부분에 있는 ‘숙신’, ‘주신’ 등의 말은 이들 민족이 스스로를 부르던 명칭을 소리[音]로 나타낸 말입니다.
따라서 이제 ‘예맥’이란 ‘똥오줌이 붙은 표범이나 멧돼지 같은 짐승’이라는 말이 아니고 ‘해뜨는 밝은 나라’라는 뜻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맥이라는 말이 음(音)을 빌어 표현한 말인데 이것을 오물을 의미하는 예(濊)와 이상한 짐승(貊)으로만 이해했다는 것이지요. 우스운 말이지만 의서(醫書)로 유명한 ‘본초강목(本草綱目)’이나 ‘설문(說文)’, ‘남중지(南中志)’ 등에 이 맥(貊)이라는 짐승에 대해서 상세히 나와 있어 연구자들은 우리 민족이 이 맥이라는 짐승(상상의 동물)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아니지요. 예맥이란 ‘해뜨는 동쪽의 밝은 나라(또는 그 나라 사람)’라는 말입니다(이 때 예는 ‘’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동쪽, 해 뜨는 곳이라는 말이죠).
[참고로 예맥이라는 종족은 ‘관자(管子)’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허뻬이(河北) 동북 지역에 거주하는 종족을 의미하였습니다. 따라서 선비나 동호 등도 모두 이들로 볼 수 있습니다. ‘한서(漢書)’ 소제기(紹帝紀)에 따르면, 예맥은 오환(烏桓)ㆍ선비(鮮卑)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중원에 위협적인 존재로 나타납니다. 북한학자 리지린의 연구에 따르면 황해 연안과 발해만 한반도에 거주했던 종족인 조이족(鳥夷族)과 예맥족이 융합하여 기원전 2천년 경에 숙신이 나타났다고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맥족과 숙신, 선비는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얘기죠.] 항상 알타이 - 만주 - 한반도 - 일본 등에 이르는 민족들의 국가 명칭이나 민족 명칭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의미는 “밝다ㆍ밝은 태양[明]ㆍ새[東]ㆍ금같이 변치 않는 금(金)”이라는 말이 따라다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서라벌’, ‘벌’, ‘서울’, ‘진국(辰國)’이라는 말도 모두 새[東], 즉 해뜨는 곳을 표현한 말이라는 것입니다(양주동, ‘古歌硏究’). ‘사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해뜨는 곳을 의미하며(흉노열전)”, 부여는 불[火 또는 明]을 음독한 것이며 통상 부여를 세(濊, 穢)로 불렀는데 이 세라는 말은 동쪽이라는 말을 음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어떤가요 여러분? 이를 보면 우리가 우리의 뿌리를 찾아가면 갈수록 알타이, 알타이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 알타이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죠. 제가 이들 민족을 대(大) 쥬신족으로 불러야 한다는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죠. 이제부터 저는 이 민족의 이름을 쥬신으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3) 고구려와 만주 만주 지역(중국의 동북방)에 거주한 민족을 만주족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들을 만주족이라고 부른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들의 명칭이 시대마다 달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들을 다른 민족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즉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肅愼)
[‘진서(晋書)’ 97권에서는 “숙신씨는 일면 읍루(挹婁)라고 하는데 불함산(不咸山) 북쪽에 있고 부여를 떠나 60일 거리 되는 곳에 있다. 동으로는 대해(大海)에 닿아있고 서로는 구만(漫) 한국에 접해있고 북은 약수(弱水)에 닿고 그 국경은 수천 리이다”라고 합니다], 한나라 때는 읍루(挹婁), 삼국지 시대나 남북조 시대에서는 ‘물길(勿吉)’, 수당시대에는 ‘말갈(靺鞨)’
[말갈에 대한 기록은 ‘북제서(北齊書 : 563)’에 처음 등장합니다. 이에 따르면, 말갈은 그 조상을 숙신(肅愼)ㆍ읍루(挹婁)ㆍ물길(勿吉)로 하는 종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신당서(新唐書)’에서는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를 ‘말갈’이라는 비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송나라때는 여진(女眞), 청나라 때는 만주족으로 불렀죠.
[참고로 부사년(傅斯年 : 은나라가 동북에서 기원했음을 밝히고 난생신화가 분화한 예들을 밝힌 중국 근대의 대학자)이 주장한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의 내용 가운데 “한나라때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에 제나라는 비스듬히 숙신과 경계를 하였는데 이는 바로 옛날 숙신이 한 나라 당시의 조선에 해당되었다(齊斜與肅愼爲界 是故肅愼當卽漢之朝鮮 : 傅斯年全集 第三冊)”라는 말이 있죠. 즉 한나라 당시에는 숙신(肅愼)과 과거의 고조선(古朝鮮)을 다르게 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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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②] 5호15국 시대의 인종분포(선비-흉노-갈족은 같은 계열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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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앞에서 보셨다시피 그 명칭이 우리 민족과 별로 다르지 않음은 아실 것입니다. 특히 만주족들은 고구려와 발해의 구성요소였습니다. 따라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가 발해와 고려(高麗)고, 금나라(또는 고려)를 계승한 나라가 후금(後金 : 청나라)이고 고려를 계승한 나라가 조선이지요.
여진족의 왕조사인 ‘금사(金史)’에서는 그 머리글에서부터 시조는 고려인(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 : 金史 世紀)이라고 하였고 “금나라는 말갈씨에서 나왔으며 말갈(靺鞨)은 본래 물길(勿吉)로 불렀다. 물길은 과거 숙신의 땅이다(金之先 出靺鞨氏 靺鞨本號勿吉 勿吉 古肅愼地也 : 金史 世紀)”라고 하는데도 모화사상에 젖은 한반도의 역사가들은 이들을 오랑캐로 취급하여 민족사에서 영원히 배제하고 말았습니다.
[후금(後金) 즉 청나라의 황제의 성(姓)은 ‘아이신 자오뤄(愛新覺羅)’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원래 우리가 보아온 ‘아이신’ 즉 금(金)을 뜻하는 알타이어이지만 그 말을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말자’라는 한자음을 빌려서 표현 한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의 음과 뜻을 합해서 해석해 보면 ‘경주 김(金)씨’라는 의미이죠. 놀라셨죠? 이 사실을 여러분들이 바로 지금 아셨다면 우리 국사 교육은 그 근본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도대체 무슨 연유인지 우리 민족과 민족사의 무대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축소지향(縮小指向)’ 그 자체이지요. 오히려 길거리에서 만난 중국인들은 “장성(長城 : 만리장성) 이북은 고려 땅”이라고 하는데도 우리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종족도 오랑캐라고 하면서 굳이 우리와 분리시켜왔습니다. 그러니 동북공정(중국의 만주사 말살정책)을 한국이 이겨낼 수가 없지요.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만주족과 우리의 뿌리가 같은데도 왜 우리는 그동안 이들을 오랑캐 취급을 하고 민족사의 범주에서 제외시켰을까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조선이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여 중국화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고(문화적 우월감이겠죠?), 다른 하나는 고구려나 발해의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을 지나치게 구분하였기 때문입니다. 조선이 소중화를 자처한 문제는 이미 여러 번 거론되었으니 고구려나 발해의 지배 민족 문제를 알아봅시다. 이것은 한 일본 학자의 논문에서 비롯됩니다.
즉 숙신ㆍ읍루ㆍ물길ㆍ여진 등이 실제로는 고구려와 같은 뿌리임에도 불구하고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의 논문(1933)이 발표된 이후 “발해(渤海)의 지배층은 고구려의 유민”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말이 안 되지요. 말갈이라는 명칭 자체가 중국인들이 중국의 동북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부른 소리인데 ‘말갈인 = 고구려인’인 상태에서 누가 지배층이 되고 누가 피지배층이 된다는 말입니까?
고구려나 발해는 위ㆍ오ㆍ촉과 같은 정치적인 국가명칭이고 말갈은 중국인들이 만주 일대에 거주하는 종족을 부른 이름인데 말입니다. 실제로 발해의 피지배층으로 알려지고 있는 말갈계 족장들도 수동적으로 지배를 받은 존재들이 아니지요. 이들은 국제무역은 물론이고 외교에 있어서는 독자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李成市, 발해사 연구에서의 국가와 민족).
말이 나온 김에 발해(渤海)에 대해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갑시다. 중국에서는 발해를 자기의 지방정권으로 중국사의 일부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니지요.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國書)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유지한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遺俗 : 續日本紀 권10)”라고 하여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분명히 합니다. 잘 알려진 대로 발해의 시조 대조영은 고구려의 구장(新羅古記云 高麗舊將 祚榮姓大氏 : 삼국유사)이라는 기록이 있죠.
그래도 여러분 가운데는 “발해가 통일신라와 어떤 공통된 의식이 있을 리가 있나? 그것이 없으면 통일신라와 발해를 하나의 민족으로 보기도 어렵지. 민족애(民族愛)가 있는 것은 좋지만 지나치면 안 되지” 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통일신라(統一新羅)는 발해를 북조(北朝) 또는 북국(北國)이라고 명백히 지칭하고 있습니다(삼국사기 권 10 : 신라본기 / 권 37 지리지). 아마 이 당시까지만 해도 상당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통일신라가 발해에 대하여 북조(北朝)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우리가 한반도 북쪽을 북한(北韓)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즉 통일신라는 발해와 현재는 대립하고 있지만 결국은 통일이 되어야할 동족(同族) 전체의 일부라는 의식이 있다는 말이죠.
[참고로 소련 학자 엘 에르 꼰체비찌는 고대 조선족과 숙신의 인구분포가 사료와 지리상으로 일치하고 이들의 종족 형성 과정이 유사하며 토템이 공통적으로 새[鳥]라는 점, 종족 발상지가 백두산(白頭山)이라는 점, 그리고 이들을 묘사하는 말이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사실상 동일 종족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안호상 선생은 조선이라는 말이 선비족이나 숙신으로부터 유래했으며 그 파생어가 직신, 주신(珠申)이라고 합니다. 중국인 학자 슈이 이푸는 ‘삼국지’와 ‘후한서’를 분석한 후 중국 대륙의 동부에 거주했던 모든 민족은 동일한 기원을 갖고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4) 고구려와 몽골 지금까지 우리는 만주족과 고구려의 연계성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몽골과 한반도의 민족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 부분도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여 분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흉노와 몽골 그리고 만주족들이 자로 잰 듯이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야 합니다. 황병란의 연구에 따르면 흉노(匈奴)는 산시(陝西) 지역의 서남지역, 서북 지역, 허베이(河北) 지역 대부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차지했으며 주나라 때는 융적(戎狄[룽띠]), 또는 견융(犬戎[취엔룽])이라고 불렀고 전국시대 이후에는 호(胡) 또는 흉노(匈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즉 흉노와 호(胡)는 다른 종족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 동안 흉노는 오히려 유럽에 가까운 인종으로 치부하고 호(胡)는 만주족을 뜻하는 것으로만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자유롭게 이동하는 유목민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나온 말로 생각됩니다. 흉노족이란 그 명칭은 한족들이 아무렇게나 만든 명칭입니다. 따라서 흉노(匈奴 : 말이 많은 노예들)라는 명칭은 전혀 합당한 말이 아니지요. 이들은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만주 일대에 이르기 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거주했던 부족입니다. 아래의 그림을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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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③] 기원전후의 흉노의 활동영역(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 262쪽 재구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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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시면 한족(漢族)이 흉노라고 부른 종족들이 알타이를 중심으로 퍼져있으며 시간이 갈수록 서쪽 지역의 흉노들은 더욱 서쪽으로 옮겨가고 있고, 동쪽 지역의 흉노들은 더욱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그래서 서쪽으로 이동한 민족들을 훈족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쥬신족들과 그 영역이 별로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즉 중국과 대쥬신의 경계는 만리장성으로 보면 대체로 일치한다고 할 수 있죠).
위의 그림을 토대로 보면 몽골의 경우, 이들 흉노족들의 거주영역과 대부분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몽골과 고구려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추적합시다.
고구려는 ‘태양이 솟는 신비한 나라’라는 의미로 대쥬신의 보편적인 국가명칭을 가지고 있음은 이미 지적하였습니다
[경우에 따라 ‘사기’의 내용을 참고하여 골(谷) 또는 고을(郡)이라는 순 우리말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국의 사서들에는 중국 동부 해안 지대, 만주지역, 한반도 등에 거주했던 사람들을 고리(藁離), 고려(高麗), 구려(九黎), 구리, 코리 등의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쥬신족은 알타이 산맥과 바이칼호에서부터 남으로 이동해 와서 현재의 요서ㆍ요동ㆍ청주ㆍ시베리아ㆍ한반도 등에 정착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쥬신 계열의 국가들 가운데 한반도에 거주하는 쥬신족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한족(漢族)과의 대립을 통해서 성장 발전해온 국가로 5세기 무렵에는 동북아시아의 패권국가(覇權國家)로 성장합니다.
왕동련(王桐齡)의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에는 “구려(九黎)의 임금을 치우(蚩尤)라고 한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고추모(高雛牟)가 북부여에서 일어나 해모수를 제사하여 일부 편입된 영토를 '다물도(多勿都)'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다물(多勿)'은 ‘려어위복고구토(麗語謂復古舊土)’라 하여 옛 땅을 되찾는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토(舊土)는 과연 어디인가’가 대쥬신 역사와 고구려 역사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추정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고구려란 원래 ‘꼬우리(꾸리)’[코리(Khori)라고 읽히기도 함]족 또는 맥족(貊族)이 남하(南下)하여 만든 국가로 ‘꼬우리(꾸리)’족이란 동몽골의 광활한 대초원인 메네킨탈에 살던 민족이라고 합니다. ‘꼬우리(꾸리)’라는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은 케룰렌강(江)과 할흐강(江) 유역에서 동북대평원 멀리 흑룡강(黑龍江)과 송화강(松花江) 일대를 경유하여 남하한 부족들이라고 합니다. 중국의 왕건군은 ‘고구려민족탐원(高句麗民族探源)’에서 고구려인은 부여에서 왔고, 부여는 숙신 계통의 퉁구스족 즉 후대의 여진족이므로 고구려도 여진족이라고 합니다.
이 같은 내용을 다른 각도에서 추정할 만한 내용들이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있습니다. 즉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인 고주몽(동명성왕)은 대략 개루부 출신(‘舊唐書’)으로 2천년 전 동부여를 떠나 졸본으로 가서 나라를 건국했다고 하는데 그 이동 경로와 우리 민족의 뿌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말이죠. 그리고 제가 ‘들어가는 말’에서 지적하였던 몽골과 고주몽의 관계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주몽은 원래 부여사람으로 동부여(현재의 길림성 돈화시)를 출발하여 보화산(寶花山 : 돈화시 동북50km)을 거쳐 곤연(鯤淵 : 경박호로 추정)을 지나 엄리대수(奄利大水 : 송화강으로 추정)를 건너 제사, 묵골 등을 만나 졸본(현재의 환인)에 이르렀다고 합니다(삼국사기 : 고구려 본기). 여기에는 전시대비용 산성인 오녀산성(烏女山城)과 평화 시의 성으로 사용된 성의 유적인 하고성자(下古城子)가 남아있습니다. 이상으로 보아 고주몽은 여러 부족들을 합해서 나라를 건국한 것이죠.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부여에서 남하한 다음 졸본부여 왕의 사위가 되었다가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백제본기). 이것은 주몽이 압록강 중류의 토착세력과의 연합 과정을 설명하고 있죠. 아래의 지도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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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④] 2세기 후반의 동북아와 고주몽 이동경로(화살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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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몽골과 고구려는 형제 관계였다고 합니다. 멀리 대흥안령(大興安嶺) 남단에서 발원하는 할흐강(江)이 보이르 호수(湖水)로 흘러들어가는 곳에 ‘할힌골솜’이라는 곳이 있고 여기에는 석상(石像)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꼬우리(꾸리 : Khori)’족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석상을 중심으로 서쪽은 몽골이 살고 있고 동쪽은 코리족이 살았다고 하는데 이들은 서로 통혼(通婚)하며 같은 풍습과 민족설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몽골비사’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앞의 ‘들어가는 글’을 참고하세요).
“밤마다 금색 빛을 띤 사람이 천막의 창을 타고 빛처럼 들어와 배를 비벼서 여인의 뱃속으로 들어오는데 이는 하늘의 아들이었다. 나중에 이 사람이 태어나면 대칸이 될 터인데 그 때가 되면 모든 이들이 이를 우러르게 된다.”
그리고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활의 명인(코릴라르타이-메르겐)이라는 족속들로부터 몽골과 코리로 나눠진 것이라는 얘기죠(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양궁으로 세계를 제패하는 것은 아닐까요?). 재미있는 이야기들 중의 하나는 초원(草原)에서 몽골과 꼬우리(꾸리) 양족(兩族)의 여자들이 오줌을 누다 서로 만나면 몽골의 여자는 왼손을, 꼬우리족의 여자는 오른손을 흔들어 형제애(兄弟愛)를 과시하곤 했다고 합니다.
몽골과 꼬우리족은 족보를 매우 중시하는 민족으로 몽골 속담에 “7대 조상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숲 속의 원숭이와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중국인들은 대쥬신을 마치 조상과 예의도 모르는 오랑캐로 보고 있는데 이것은 중국인들이 얼마나 대쥬신에 대해 무지한지를 보여줍니다).
꼬우리족이나 몽골족들은 소의 갈비를 구워서 뜯어먹거나 소와 같은 가축의 뼈를 푹 삶아서 그 물에 소금과 파를 넣어서 간편한 식사(이를 ‘슐랭’이라고 하는데 설렁탕이라는 말과 관련이 있겠지요)를 하고 있으며, 아이를 기를 때는 실이나 천으로 천막의 기둥과 기둥을 묶어서 흔들거리는 장치(요람)에다가 둡니다. 그리고 파나 야생마늘과 같이 다른 민족들 특히 한족(漢族)들이 피하는 음식을 먹기도 합니다. 복장에 있어서도 몽골은 외투도 무릎 아래로 내려가는 법이 없어서 매우 간편하여 말 타기에 매우 유리하고 여자의 치마도 주름을 잡아서 둘러 입는데 이것은 한족들에게 이상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구를 보더라도 농경민인데도 불구하고 이동이 쉬운 작은 가구들이 많이 발달해 있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유목민의 생활습관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이죠.
그 뿐이 아닙니다. 현재도 몽골의 바이칼 호수 주변에는 대쥬신들의 공통된 생활 습관들을 보여주는 많은 요소들이 남아있습니다. 예를 들면, ① 바이칼 호 안에 있는 샤먼바위, ② 모든 의식을 주관하는 샤먼의 존재, ③ 우유의 흰색을 신성함의 상징으로 하는 관습, ④ 우리의 씨름이나 일본의 씨름과 유사한 바릴단, ⑤ 이방인이 왔을 때 우유를 세 번 찍어서 정화하는 것, 즉 하늘ㆍ땅ㆍ사람에게 경의를 표함(우리의 고수래와 행태 유사), ⑥ 노래를 즐겨 자주 부르고 우리의 가야금과 유사한 악기인 야탁(13줄)ㆍ츠안사(4줄), ⑦ 전통요리인 랍샤는 우리의 칼국수와 제작과정이나 맛이 거의 동일하다는 점 등을 들 수도 있습니다.
이상을 토대로 보면 몽골은 고구려와 분리할 수 없는 인종적 문화적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역사의 여명기에 그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살펴보더라도 공통성을 충분히 추적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누가, “에이, 그래도 몽골과 한국은 너무 멀잖아?”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목민들의 입장에서는 몽골의 울란바트로에서 북한의 신의주에 이르는 길이 그리 먼 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서히 점진적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요.
다만 이 같은 이동으로 인하여 공통점을 많이 상실해 간 것은 사실입니다. 즉 고구려가 졸본(현재의 환인)에 정착하여 이후 농경을 위주로 하는 정착생활을 하면서 불가피한 여러 가지 차이들이 나타난 것이죠.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죠. 그것은 바로 민속(民俗)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몽골의 민속과 과거 고구려 지역도 아니고 지금 우리와 비교해보면 그 유사성이 너무 많아서 매우 놀라게 됩니다. 몽골에서는 한반도를 ‘솔롱고스’ 즉 ‘무지개의 나라’라고 부르는 점을 생각해보세요. 모질게 춥고 힘든 유목생활에서 끝없이 남으로 내려오고 싶은 소망의 표현은 아닐까요?
(5) 대쥬신과 한족(漢族) 대쥬신족들은 여러 면에서 한족(漢族)과는 다릅니다. 한족이 대쥬신족들을 서로 이간질하여 약화시키려고 한 것은 이들이 가진 기동성과 전투력 때문입니다. 대쥬신족들은 기본적으로 이간계(離間計)에 쉽게 넘어가는 속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쥬신족들은 원래가 워낙 광대한 지역에 분포하면서 자유로운 유목생활을 하여 복잡한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하나의 부족이나 국가로 통합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몽골은 면적(156만 5천㎢)은 한국의 10배 이상이지만 그 인구(269만 4천4백32명 : 2002년 기준)는 20분의 1도 되지 못합니다.
대쥬신은 하나의 나라로 묶기는 어렵지만 어느 한 부족에서 영걸(英傑)이 나타나면 그 멀리 흩어진 부족들을 신속히 통합하여 하나의 세력화(勢力化)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중국에게는 엄청난 위협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한족들은 이들을 경멸하면서도 무서워하는 것이죠.
예를 들면 전설적인 제왕이기는 하나 치우천황(蚩尤天皇)을 시작으로 모돈(冒頓 : 전한대의 단군임금), 단석괴(壇石塊), 고구려의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 재위기간 391~412), 요나라를 건국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 재위기간 916~926), 금나라의 시조 아골타(阿骨打 : 재위기간 1115~1123), 징기스칸(원나라의 태조), 누르하치(奴兒哈赤 : 청나라의 태조) 등을 들 수가 있겠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한족(漢族)들은 가급적이면 다른 민족이 한족과 조금만 피가 섞여도 한족으로 포괄적으로 부르는데, 흉노의 경우는 2백만이 되지 않았고 만주족은 1백만도 되지 않는데 굳이 이를 잘게 나누어 분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결국 적(상대)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고 제압해버리는 소위 “분할하여 통치하려는 전략(Divide and Control)”의 일환으로 보입니다(아니면 중국인들이 이들의 사정을 정확히 알지 못한 데서 오는 혼란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세월이 흐를수록 한족(漢族)들은 점점 그 영역이 확대되는 반면에 주변민족은 소수민족으로 지속적으로 약화되어 결국은 한족에 동화되어 버리지요. 현재 중국 전문가의 견해에 따르면, 만주족은 겨우 20만 정도가 명맥을 유지한다고 합니다. 현재 중국 인구 13억 가운데 94% 정도가 한족이고 나머지 6%에 좡족, 몽골, 휘, 마오, 조선족 등 55개의 민족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좡족이 전체 인구의 1.33%이고 가장 적은 종족은 2천명이 채 안되지요. 참고로 문화대혁명 시기에 중국 정부는 중화민족의 화합에 장애가 된다고 하여 수십만 명의 몽골인들을 학살하고 쫓아내어 현재 내몽고자치주에서 원주민이었던 몽골인은 6%에 불과하다고 합니다(티베트도 대동소이하지요).
만약 우리가 똑같은 방식으로 중국인들을 엄격하게 계속하여 분류했다면 수십의 인종으로 나눌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목민들은 한자(漢字)와 같이 통일된 문자체계를 당시에는 가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중국의 기록으로만 우리를 보게 된 것이죠. 안타까운 일입니다. 문화의 위력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줍니다.
(6) 대쥬신의 새로운 역사를 위하여 이제까지는 힘들게도 각종 중국의 사서들로 분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유전학(遺傳學)과 생물학(生物學)이 고도로 발달해있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론을 이용하면 우리의 분석들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최근(2003) 동북아 민족들의 유전자를 비교한 결과 한국인의 유전자는 중국인과는 9.4개의 염기가 달랐으나 몽골인과 다른 염기는 7.8개에 그쳤습니다. 민족이 서로 갈라진 지 3천년이 지나야 하나의 염기가 차이가 난다는 이론에 따르면 몽골인이 중국인보다 훨씬 나중에 우리 민족과 갈라졌다는 뜻입니다. 김종일 교수(한림의대 생화학교실)에 따르면, “한국인-몽골인의 차이가 한국인-중국인의 차이보다 1.6개 적다는 것은 몽골인과 한국인이 갈라진 것이 중국인하고 갈라진 것보다 4천~5천년 정도 더 최근의 일”라고 합니다. 따라서 한민족과 가장 가까운 민족은 몽골족이라는 사실이 입증된 것입니다.
한민족의 기원을 추적해온 주채혁 교수(강원대 역사학)는 한민족의 ‘알타이-사얀산맥 기원설’을 주장합니다. 알타이와 그 동쪽의 사얀산맥에 살면서 순록을 키우고 숭배했던 유목민족이 만주 싱안(興安)령 쪽으로 이동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죠.
알타이 자치공화국의 세계적인 스키타이 유적인 파지리크 무덤의 발굴에 참여했던 최몽룡 교수(서울대 고고학)는 파지리크 봉토분은 적석목곽분으로 고신라(古新羅)의 것과 비슷하다고 하면서 “알타이 지역에 사는 투르크계와 몽골계 원주민은 우리 민족과 사촌관계다”고 밝힙니다.
대쥬신 즉 알타이인들은 대싱안링 산맥을 넘어 한반도로 들어왔으며 또 이들은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갑니다. 몽골인들에게 한국은 ‘솔롱고스(무지개의 나라)’이죠. 말을 타면서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서 태평양과 마주치는 곳 그곳은 바로 한반도이죠. 그리고 그 곳에서 다시 바다를 건너 이동합니다(여러분도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해당하는 포항의 장기곶이나 울산의 장승포로 가셔서 태평양을 바라보세요. 아마 색다른 감격을 느낄 것입니다).
2003년 6월 23일 일본 돗토리(鳥取)대 의학부 이노우에 다카오(井上貴央) 교수팀은 벼농사 도입과 청동기 전래로 상징되는 야요이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DNA가 현대 한국인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야요이 시대 유적인 돗토리현 아오야가미(靑谷上) 절터에서 출토된 야요이인 유골의 미토콘드리아 DNA 염기배열을 분석한 결과 이 같은 결론을 얻은 것이죠.
뿐만 아닙니다. 도쿄(東京)대 의학부 인류유전학교실 도쿠나가 가쓰시(德永勝士) 교수는 인간의 6번 염색체 내에 존재하는 ‘HLA 유전자군’을 이용한 인간유전자(게놈) 정보를 비교 연구한 결과, 일본 본토에 사는 사람들과 가장 가까운 집단이 한국인과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으로 추정된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도쿠나가 교수는 일본인, 한국인, 중국 조선족, 만주족, 몽골족 등 동아시아 12개 민족(집단)을 비교분석한 결과, 일본 본토에 사는 사람들은 오키나와(沖繩)인이나 홋카이도(北海道)의 아이누족보다 한반도에 사는 한국인과 중국에 사는 조선족에 가장 가까웠다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연구들은 그동안 2차 대전을 전후로 형성된 일본 극우파(極右派)들의 황국사관(皇國史觀)이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황국사관에 따르면 일본인이 천황(天皇)의 통치 아래 형성된 단일민족이라는 것이고 한국인들은 그 방계의 후손이 되므로 일선동조론(日朝鮮同祖論)이 성립한다는 말인데 우리가 지금까지 분석한 것과는 비교해보았을 때 본말(本末)이 전도(顚倒)된 내용이죠. 결국 아시아인의 유전자 비교 분석 결과가 나오면서 황국사관은 사실상 해체된 것이죠.
이 기회에 일본(日本)이라는 명칭도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일본은 ‘해뜨는 곳’ (또는 해뜨는 나라)이라는 의미인데 일본에서 보면, 해뜨는 곳이라는 곳은 태평양 바다밖에 더 있습니까? 결국 일본이라는 말은 한반도에서 할 수 있는 말이지요. 일본을 의미하는 왜(倭)라는 말은 외(왼쪽)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박시인 선생님에 따르면 사람은 중앙에 남면(南面)하고 있다는 역리(易理)에 의하여 왜는 동쪽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참고로 옥저(沃沮)는 당시 발음으로는 오쥐, 여진말로는 와지 등인데 이 의미는 모두 나무 또는 숲을 의미하는 말인데 이 말은 동쪽을 뜻한다고 합니다. 왜(倭)라는 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지요. 왜국은 7세기에 아예 일본(日本) 즉 해뜨는 나라로 개칭합니다.
참고로 중국의 주변민족에 대한 연구를 했던 상수운(桑秀雲 : 1934~2002)의 연구 ‘동이와 조선의 관계(東夷與朝鮮的關係 : 1983, 臺灣政治大學邊政硏究所年報)’에서는 일본학자[八木奘三郞]의 신동이(新東夷)와 구동이(舊東夷)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만주(滿洲)와 조선(朝鮮 : 한반도), 일본(日本), 류우큐우(琉球) 등의 민족을 신동이(新東夷)라고 하는데 이들은 한족(漢族)에 동화되지 않은 민족들이고 이전에 중국 주변이나 산동, 하북, 안휘, 연해주 등에 있었던 동이족들로 중국에 동화된 민족들을 구동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죠.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찾아서 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내용이 너무 길고 복잡한데다 여러 말이 중복되어 이해하기가 힘드셨으리라 봅니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첫째, 알타이 동부에서 만주 - 한반도 - 일본에 이르는 종족들이 같은 계열이라는 말입니다. 즉 고구려는 몽골 지역이나 만주 지역의 거주민들과 동일한 근원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현대 생물학의 발전으로 더욱 더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일반 명칭은 ‘대쥬신’이 가장 타당하리라 봅니다.
둘째, 대쥬신족들은 유목생활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분포 지역이 광대하고 중국과 같이 동일한 문자나 문화체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분산되어 지내다가 한 두 사람의 영웅(英雄)이 출현할 때마다 거대한 하나의 국가를 형성해온 것입니다. 농경민이 보기에는 이들의 영역이 매우 먼 거리겠지만 유목민들의 입장에서 서울 - 하얼삔 - 울란바트로가 그리 먼 길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완전히 같은 하나의 민족이라고 보기도 어렵지만 전혀 다른 민족으로 봐서는 더욱 안 된다는 말입니다.
셋째, 대쥬신족들은 기나긴 역사를 통해 한족들과 끊임없이 대립 투쟁하면서 발전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대쥬신은 한국과 일본, 몽골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사멸(死滅)되어가고 있으며 중국 정부는 대쥬신의 약화 혹은 소멸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현재 진행되는 동북공정(東北工程)도 그 일환입니다. 우리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민족(韓民族)이라고 하면서 축소지향(縮小指向)으로만 나아간다면 결국은 한반도조차 고스란히 지키기 힘든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중국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경계해야 합니다.
넷째, 우리가 우리와 같은 계열의 민족(형제 국가)과 서로 반목(反目)한 것은 보다 발달된 중국의 문화의 영향이 크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중국은 ‘분리하여 통치하기(Divide & Control)’의 방식으로 이들을 지나치게 세분하여 서로 이간하였고 한반도에 있는 정권(조선)을 철저히 중국화함으로써 이들의 연계성을 단절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한반도나 남만주에만 너무 집착하지 않고 중국 중심적인 사고에서 해방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뿌리를 더욱 쉽게 찾아갈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우리의 역사의 무대를 이 비좁은 한반도에 국한시키고 엉뚱하게도 작은 중국(中國)을 자처하면서 자위해왔습니다. 이것은 중국이 가장 바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라도 보다 큰 시각으로 역사와 세상을 바라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