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염적벽 김삿갓 벚나무
화순군 이서면 동복천에 물염, 창랑, 장항, 보산 등 4 적벽이 있다. 이중 물염은 봄, 창랑은 여름, 장항은 가을, 보산은 겨울적벽이다. 이 적벽은 조선 전기 때까지는 그냥 석벽이었다. 적벽이란 이름은 1519년 기묘사화에 동복으로 유배 온 최산두(1483~1537)가 붙였다,
중국에 4 적벽이 있다. 후베의 적벽은 삼국시대 주유와 조조가 대전을 벌인 양쯔강에 있다. 소동파가 적벽부를 읊은 적벽은 황주에 있다. 또 무창과 한양까지 모두 네 곳이다. 우리나라도 금산군 부리면의 금강을 적벽강이라 하니, 이곳 깎아지른 단애 이름이 적벽이다.
하지만 중국이나 금강의 적벽보다 화순 이서 동복천의 4 적벽이 그 규모나 아름다움에서 더 빼어난다. 어디 풍광뿐일까?
지금은 물염정, 망미정, 송석정만 있지만, 조선시대에 이곳 동복천에는 수많은 정자와 누각이 있었다. 그중 동복천 8경으로 고소대, 봉황대, 동복현청의 협선루, 포월정, 만경대, 망미정, 물염정과 동복의 주산인 옹성산을 꼽는다.
망미정과 송석정이 남아있는 보산적벽은 겨울적벽이다. 여기 망미정에서 바라보는 옹성산의 설화는 봄, 여름 갈겨울의 풍광을 모두 합쳐놓았다. 이곳 보산적벽 아래는 금모래밭이었다. 임란의 용장 황진 장군이 동복 현감 시절 말을 몰아 군사조련을 했던 곳이다. 또 이곳 정자에서 사람들은 풍영을 누렸다. 가을에 베어 말린 풀단에 불을 붙여 건너편 옹성산 절벽 위에서 던지는 봄철 낙화놀이는 그 중 백미였다. 김삿갓이 이 낙화놀이에 왔고, ‘무등산이 높아도 소나무까지 아래이고, 적벽강이 깊어도 모래 위로 흐른다’는 시도 그날 읊었으리라 짐작한다.
옹성산의 단애인 장항적벽은 노루목 적벽이라고도 하는 높이 100여m의 가을적벽이다. 이곳 가파른 절벽 틈새에 한산암이 있었다. 한여름이 지나간 물결에 서늘한 바람이 실리는 날 하늘에서 내려오는 종소리는 절로 손을 모으게 했다. 한산암에 오르기 전 물결에 비추인 내 모습을 보나니, 가을 동복천은 저승길 들머리의 바로 그 명경이었다.
이어 창랑적벽은 여름적벽이다. 병풍처럼 둘러친 맑은 물에 붉은 배롱꽃 그림자와 두둥실 하얀 구름송이가 흘러가는 모습은 가슴으로만 보는 그림이다. 더위가 무엔가? 창랑적벽 맑은 물에 노 저어 나룻배를 띄우면 누구나 운무를 부르는 신선이었다.
물염적벽은 벚나무가 봄을 여는 봄적벽이다. 여기 물염정의 물염(勿染)은 세상사에 물드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그 물염의 아름드리 벚나무가 아들 손자 벚을 거느리고 봄을 맞는다.
지리산의 운해를 신비로 걸친 주목은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고 동구를 지키는 느티와 은행도 오백 년은 거뜬이다. 하지만 수명으로 어찌 나무의 우열을 평가하랴? 또 그러지도 않는다.
벚나무는 봄의 나무이다. 이른 봄날 온갖 초목의 새잎이 나올 무렵, 꽃이 먼저 피어 온 세상을 화사하게 수놓는다. 꽃구름인 듯 두둥실, 꽃비인 듯 우수수, 꽃눈으로 하늘하늘 흩날려 부풀고, 적시니 그 마음 둘 데 없다. 이 벚나무의 왕인 왕벚나무는 제주도가 원산지이다. 또 늘어진 삼단 같은 가지를 실바람에 흔드는 능수벚나무는 숨을 멈추게 하는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이 벚나무는 오래 살아야 백 년이다. 이른 봄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히고, 그 결실 또한 풍성하니 어찌 오래 살길 바랄쏘냐? 더욱 잎자루마다 꿀샘으로 뭍 곤충을 살리니, 온몸으로 사는 그 열정을 오래 살지 못함으로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렇게 백 년 이쪽저쪽의 여기 물염정의 벚나무는 이제 할아버지다. 앞으로 언제까지 자리를 지킬까 싶지만, 아들 손자가 대를 이어갈 것이니 무엇이 걱정이랴? 더욱이 물염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