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 6. 주일예배설교
고린도전서 12장 22~26절
‘코로나19’는 공동체용 리트머스 용지
■ 지금은 ‘코로나19’를 잠시라도 떨어트리고는 생각할 수 없는 시절입니다. 모든 것의 알파와 오메가가 ‘코로나19’입니다. ‘코로나19’로 세상의 모든 판은 바뀌고 있고, 글자그대로 급변의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사회와 문화, 종교는 물론이고, 정치와 경제 등 모든 것이 급속히 바뀌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의 대변혁이자 혁명입니다.
이런 대변혁의 시대에는 반드시 시대적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코로나19’도 분명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코로나19’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일까요? 더 나아가 시대에 던지는 화두는 무엇일까요? 여러 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핵심은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를 무시(無視)한 것이 이 재난/재앙의 으뜸 이유입니다. 그렇기에 공동체를 회복(回復)하라는 것이 이 상황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화두는 ‘공동체’입니다. 이렇게 진단해볼 때, ‘코로나19’는 공동체용 리트머스 용지로 우리에게 온 메신저입니다. 이 메신저가 우리에게 공동체를 화두로 던지며 공동체의 정의를 내렸습니다. “우리들의 공동체는 ‘운명공동체’요!”
그렇다면, ‘운명공동체’란 무엇인가요? 운명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너와 내’가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분별(分別)은 하지만 분리(分離)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남 녀, 어른 아이, 미국 한국, 유럽 아시아, 인간과 자연 등과 같은 분별은 하지만, 결코 별개의 것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운명공동체’는 어느 특정 집단이나 나라를 넘어, 전(全) 지구적이고, 전(全) 우주적 개념입니다.
이러한 운명공동체라고 하는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 ‘코로나19’의 ‘운명공동체론’입니다. 그렇다면, 이 메시지는 우리가 처음 듣는 메시지일까요? ‘코로나19’로 인해 처음 접하는 개념인가요? 아닙니다.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개념입니다. 더욱이 이 메시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너무도 잘 아는 메시지입니다. 진작부터 오늘 본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운명공동체’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아주 명확히 알려주십니다.
■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입니다. 모든 편지에는 이유가 있듯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쓴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분열을 멈추고 하나가 되라!”는 이유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다한 선교를 통해 세운 교회이기 때문에 애정이 컸습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식 중 하나가 당파 싸움으로 교회가 분열됐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펜을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편지 처음부터 분쟁에 대해 지적했습니다. 1장 11~12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이렇게 분쟁의 사실을 지적하는 바울의 마음은 간절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장 10절) 이러한 간절함이 오늘 우리가 읽은 12장으로 연결되고, 이후 13장에서 절정을 이어갑니다. 13장은 무엇입니까? 그 유명한 ‘사랑장’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13장 12절)
바울은 1장에서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는 메시지 전하고 난 후, 이에 대한 신학적 작업을 한 것이 우리가 읽은 12장입니다. 그리고 13장을 통해서는 “사랑”의 개념으로 본문인 1장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 그런데 우리는 여기쯤에서 궁금함을 하나 해결하고 가야합니다. 그것은 이 본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국한된 지침이 아니냐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충분히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분쟁을 끝내라고 하면서 신학적 권면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 한해 말씀하신 것은 “소금과 빛의 삶을 살라!”는 등과 같은 경우입니다. 이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귀감/감동을 주는 삶을 권하실 때 외에는 모든 말씀이 신앙유무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본질적으로 보면,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신앙의 유무, 그리고 신앙의 상태에 상관없이 모두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 아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이 결정적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 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신앙의 유무와 상관없습니다. 그러므로 12장의 “지체론(肢體論)”은 모두에게 해당되는 지체론입니다. ‘모두가 하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통치 하에 ‘모두 하나’입니다. 모두가 지체입니다. 그래서 ‘운명공동체’인 것입니다.
■ 본문은 ‘운명공동체’의 상태를 매우 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가 아프면 모두가 아프다!”(26절) 이보다 적확한 묘사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니 어느 지체라도 무시할 할 수 있는 지체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지체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피조물도 무시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본문의 표현에 의하면, 더 약해보이고, 덜 귀히 여기는 것들이 오히려 더 요긴하고, 더욱 귀하다는 것입니다.(22~23절)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어느 것이라도 무시하는 순간 가장 요긴하고 귀한 것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세계화’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193개국에서 각각 살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마치 193개의 배에 각각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각 배마다 선장과 선원이 있고, 193개의 배들이 충돌하지 않기 위한 규칙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과거의 국제질서였습니다. 그렇지만 세계화로 인해서 전 세계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코로나19’ 사태가 전 세계를 더 작아지게 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지구에 살고 있는 78억 명이 더 이상 193개의 배에 살고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배에 타고 193개의 캐비닛에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인류는 ‘운명공동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코로나19’ 사태 이전에는 우리가 193개국에서 각각 살고 있었다 하더라도, 이제부터라도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제사회에는 매우 모순적인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같은 배에 탔는데 불이 났을 때, 가장 어리석은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누가 이 불을 냈느냐’를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화재가 발생하면 일단 불을 꺼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 이 불을 냈느냐’를 가지고 싸우는 것은 나중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미국과 중국이 지정학적 갈등으로 인해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서로 국제사회에서 형님 노릇하겠다고 하는 미국과 중국이 서로 협력해서 불을 끌 생각은 하지 않고 서로 싸우는 상황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모순입니다.
그런데 이 모순이 한국사회에도, 한국교회에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가짜 뉴스를 통해 ‘누가 이러한 사태에 이르게 했느냐’를 두고 싸우는 상황입니다. 참으로 옳지도 않고 명분도 없는 싸움입니다. 특히 이 와중에 의사들, 정치인들과 같은 이들이 밥그릇 싸움을 하고 있으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 참으로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고 운명을 함께 짊어질 때입니다. 지금은 시시비비를 가릴 때가 아니고 모두의 아픔을 치료할 때입니다. 지금은 ‘코로나19’라는 리트머스 용지를 통해 공동체의 회복의 필요성을 진단 받은 이상, 공동체의 회복에 모든 역량을 집중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할 일이 있습니다. 민족과 조국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수고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인류와 지구 공동체의 평안을 위해 수고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과 화해하고 공생하기 위한 수고와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운명공동체입니다. 들어도 익숙하지 않은 어떤 나라의 낙후된 동네의 이름 모르는 아이의 생명도, 저 습한 곳에 사는 관심 두기 어려운 미생물도, 모두 모두 운명공동체의 일원입니다. 모두가 소중한 운명공동체의 가족입니다.
이 사실과 진실 앞에 바르게, 그리고 열심히 수고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