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가방 깊숙한 곳, 호기심 하나
- 4월 3일
여행이 가까워졌다.
아직 문밖을 나서지도 않았는데, 마음은 이미 몇 번이나 그곳의 낯선 거리를 서성이다 돌아온 것 같다.
짐을 싸기 시작해야 비로소 여행은 현실이 된다.
옷가지들을 하나씩 꺼내어 가지런히 접는다. 그곳의 날씨를몇 번이나 다시 확인하며 낮과 밤의 기온 차,
바람의 결, 햇빛의 온도까지 가늠해 본다. 그 온도와 바람을 가방 속에 직접 담을 수는 없지만,
마음이라도 미리 적셔두고 싶어 꼼꼼히 챙겨본다. 비상약도 챙긴다. 익숙한 약들이 작은 주머니 안에 옹기종
기 모여 있으면, 낯선 땅에서 불안이 가셔질 것 같아서이다.
이번 여행 준비에는 예전에 없던 일감이 하나 더 늘었다.
퇴직 후 집을 지키게 된 남편이 마음에 걸렸다. 내가 없는 동안 그의 끼니가 헐거워질까 봐 주방 불 앞에 서는
시간이 길어졌다. 큼직하게 썬 재료들을 볶아 카레와 짜장을 한 솥 끓여두고,
든든한 미역국과 구수한 된장찌개, 매콤한 마파두부까지 조리해 용기마다 가득 채워두었다.
냉장고 칸칸이 쌓이는 음식들을 보며 비로소 남편에 대한 미안함도 조금은 가시는 듯하다.
짐 가방을 꾸리는 손길만큼이나, 남편의 식탁을 차리는 손길에도 애틋함이 묻어났다.
나는 외국어에 서툴다.
입안에서 맴도는 낯선 단어들 때문에 이번 여행은 조금 더조심스럽고,
그래서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두려움보다 기대가 앞서는 건 내 곁에 안나가 있기 때문이다.
든든하다는 말 한마디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존재이다.
안나는 마치 이미 그곳의 길을 수 차례 걸어본 사람처럼 모든 것을 세심하게 준비해 두었다.
프리다 칼로의 푸른 집, 루이스 바라간의 정갈한 건축물, 차풀테펙 성의 고풍스러운 공기
와 우리가 머물 집과 식탁에 오를 음식들까지 안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멕시코는 내 인생에 단 한 번 찾아온 기회일지도 모른다. 언제 다시 먼 땅을 밟아볼 수 있겠는가.
그 절실한 마음이 나를 움직였다. 정해진 일정에는 없지만, 내 마음이 간절히 향하는
곳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안나와 긴 이야기 끝에 남들보다사흘 먼저 떠나기로 우리는 결단을 내렸다.
그 3일의 시간은오로지 나의 갈망과 안나의 배려가 만나는 이번 여행의 가장
뜨겁고도 소중한 덤이 될 것이다.
그런데 떠나기 바로 전 오늘, 야속한 문자가 날아왔다.
항공기 지연 안내. 출발 시간이 3시간 20분이나 밀려났다.
치밀하게 세워두었던 첫날의 계획들이 헝클어지고, 마음은 벌써 공항 대기석에 앉아 있었다.
서둘러 떠나려던 나의 간절함을 시샘이라도 하는 걸까. 낯선 땅에서의 첫 단추가 어긋난 것
같아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어쩌면 이 또한 여행의 일부일지 모른다.
예상치 못한 연착조차 시간을 요리하는 법을 배우라는 뜻은 아닐까. 계획은 조금 틀어졌을지 몰라도
그 빈틈 사이로예상치 못한 더 멋진 풍경이 스며들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나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나의 여행은 풍성하게 차려져 있다.
그래서일까. 이번 여행은 내가 오롯이 떠나는 길이라기보다, 누군가의 넓은 등에 편안히 업혀 가는 느낌이다.
그 든든한 온기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하다.
그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다 표현해야 할지 몰라, 옷감 사이에, 하얀 약봉지 옆에,
작게 접어 넣은 고마움이라는 마음 하나, 짐 가방 사이에 조용히 밀어 넣어본다.
그리고 가방 가장 깊숙한 곳, 눅눅해지지 않도록 소중히 챙긴 호기심과 오늘 더해진 기다림을 함께 넣는다.
3시간 늦게 마주하게 될 멕시코의 태양은 더 뜨거울까. 안나의 손을 잡고 건너갈 그 시간 너머에서,
어떤 문장을 건져 올리게 될까. 이제 모든 무게와 설렘을 안고 우리는 비로소 떠난다.
첫댓글 무사히 잘 다녀오시고 아름답고 귀한 추억 많이 많이 한가슴 듬뿍 담아 오시길 바랍니다.
자매님가족분들과 함께 저도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건강하게 다녀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