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읽어 주는 예수 성서와 함께 1705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
고진하 시인은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김달진문학상과 강원작가상을 수상.
*행복해진다는 것 헤르만 헤세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왔지/ 그런데도 그 온갖 도덕 온갖 계명을 갖고서도/ 사람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 하다네/ 그것은 사람들 스스로 행복을 만들지 않는 까닭/ 인간은 선을 행하는 한 누구나 행복에 이르지/ 스스로 행복하고 마음속에서 조화를 찾는 한/ 그러니깐 사랑을 하는 한…/ 사랑은 유일한 가르침/ 세상아 우리에게 물려준 단 하나의 교훈이지/ 예수도 부처도 공자도 그렇게 가르쳤다네/ 모든 인간에게 세상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의 가장 깊은 곳/ 그의 영혼/ 그의 사랑하는 능력이라네/ 보리죽을 떠먹든 맛있는 빵을 먹든/ 누더기를 걸치든 보석을 휘감든/ 사랑하는 능력이 살아 있는 한/ 세상은 순수한 영혼의 화음을 울렸고/ 언제나 좋은 세상 옳은 세상이었다네/
제 작은 서재엔 낡은 혹백 사진 한 장이 걸려 있습니다. 인도의 한 대학 부근에 있는 박물관에서 구한 사진인데, 제가 매우 아끼는 사진입니다. 독립운동을 하던 마하트마 간디가 뱅골의 시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를 찾아가 함께 찍은 사진이죠. 풍채 좋은 타고르 옆에 앙상한 몸매의 간디가 다정하게 앉아 있습니다. 흰천 한 조각을 몸에 걸친 간디는 깡마른 두 다리가 드러나 몹시 측은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간디의 몸이 앙상해 보인다고 해서 간디의 삶과 사상이 앙상한 것은 아닙니다.
얼마 전에 리처드 아텐보로우의 영화 [간디]를 보았죠. 동족의 총탄에 쓰러지기 직전, 간디는 영국에서 온 여기자를 만나 무명실을 잦는 물레를 연실 돌리며 ‘행복’에 대해 말합니다. “행복은 물질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일과 자부심에서 나오지요.”
물레를 돌려 무명실을 만들고 천을 만들어 자기 옷을 지어 입었던 간디의 삶은 어찌 보면 반근대적입니다. 사실 그런 일은 불가촉천민不可觸殘民 같은 낮은 계급의 사람이나 하던 천한 일이었죠. 하지만 간디는 귀천을 따지지 않고 자기 일을 사랑하며 살았기에. 독립을 갈망하던 인도인에게 존경을 받고 국부國父로 불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자기 일에서 긍지와 자부심을 느낀다고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왔지/ 그런데도 그 온갖 도덕 온갖 계명을 갖고서도/ 사람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네/ 그것은 사람들 스스로 행복을 만들지 않는 까닭/
이 시처럼 간디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에 충실한 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행복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피땀 흘려 일해 보람을 얻기보다 어떻게 하면 쉽게 한탕 하여 부귀를 누릴지에만 혈안이 된 부박한 영혼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살지요. 이런 허황된 마음으로 살면서 어떻게 자기 생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대형 의류매장을 지나다가 멋진 옷을 걸친 마네킹을 보고 문득 떠올린 구절이 있습니다. “마네킹은 몸에 걸친 옷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옷이 아니다”(철학자. 마르쿠제,〈1차원적 인간》중). 마르쿠제는 행복을 보장해 줄 거라 여기는 화려한 소유물이 실은 행복한 마네킹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의 시선은 여전히 행복한 마네킹에 꽂혀 있습니다. 마네킹이 걸친 옷을 나도 걸치면 행복해질 거라는 철석같은 믿음 이런 믿음이 실현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우울증에 걸리거나 심한 경우 자살을 선택합니다. 행복을 재는 척도가 딱하게도 오직 더하기(+)나 곱하기(x)에만 고정돼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은 결국 자본주의의 배불뚝이 신 맘몬(Mammon, 사람을 노예로 부려 먹는 재물을 우상화한 탐욕의 신)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행복을 만들지 않’습니다. 행복은 저절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늘 성찰하며 땀 흘리는 나의 노력을 통해 만들어 가야죠.
저는 시골에서 낡은 한옥에 살다 보니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며 지내야 합니다. 흙집이다 보니 틈틈이 수리해야 하고, 마당이나 텃밭에 웃자란 풀도 깎아야 합니다. 지난해 가을엔 여름 장마에 무너진 돌담을 손수 쌓았습니다. 돌담 쌓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제힘으로 다루기 어려운 큰 돌도 있습니다. 그럴 땐 연장을 이용해 돌을 굴려 천천히 쌓아야 합니다. 그렇게 제 힘으로 쌓은 돌담이 조금씩 모양을 갖춰 갈 때 희열이 몰려옵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이죠.
스스로 행복하고 마음속에서 조화를 찾는 한/ 그러니까 사랑을 하는 한… /사랑은 유일한 가르침/ 세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단 하나의 교훈이지/ 예수도 부처도 공자도 그렇게 가르쳤다네/ 모든 인간에게 세상에서 한 중요한 것은/ 그의 가장 깊은 곳/그의 영혼/그의 사랑하는 능력이라네
헤세는 행복의 원리로 ‘스스로’를 강조합니다. 행복의 비결은 자발적인 삶의 태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사에서 중요한 것으로 ‘가장 깊은 곳, 그의 영혼, 그의 사랑하는 능력’을 꼽고 있죠. 과연 인간에겐 헤세의 시구처럼 ‘사랑하는 능력’이 있을까요. 시인은 예수와 부처와 공자를 운위하지만 인간은 그런 가능성을 품고 있을까요. 만일 우리가 인간의 그런 가능성을 부정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밝지 않을 겁니다. 저는 지난겨울에서 봄까지 광화문에 타오른 촛불을 보면서, 그 추운 날씨에 수백만이 모여 밝힌 촛불의 뜨거운 염원을 지켜보면서 인간에 내재한 ‘사랑하는 능력’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광화문 촛불의 에너지는 분노의 에너지이지만, 그것은 세상을 파괴하려는 분노가 아니라 세상을 살리려는 사랑의 분노였죠.
사랑하는 능력이 살아 있는 한/ 세상은 순수한 영혼의 화음을 울렸고/ 언제나 좋은 세상 옳은 세상이었다네
‘사랑의 능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창세기는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여기서 하느님의 형상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해합니다. 인간에 내재한 하느님의 사랑, 이 ‘순수한 영혼의 화음’이 세상을 살리는 힘이라는 거죠. 당신과 나의 행복은 곧 순수한 영혼의 화음, 우리 속에 살아 있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신뢰하고 그것을 신나게 발현하는 삶을 사는 데 있는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