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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 1 - 다케오에서 해변을 달리면서 명란젖을 생각하고 구마모토성에 가다!
2023년 2월 23일 차(茶) 로 유명한 사가현 우레시노시의 우레시노 차 교류관 으로 가서 일본
차 (茶) 에 대해 알아보고 또 녹차를 내려서 직접 시음을 하는데..... 다도(茶道) 는
16세기 후반 센노 리큐 (千利休) 에 의해 완성되었으니 그는 와비차(わび茶) 의식을 만듭니다.
30분을 달려 사가현 다케오시의 다케오 도서관 에 도착해서는 안으로 들어가니 어린아이부터 학생과
주부며 노인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고 읽느라 진지한 모습인데
도서관 안에 카페 가 있고 서가는 완전 개방식 이라 한 해에 열람객이 무려 백만명 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다시 렌트카 차에 올라 동남쪽으로 달리는데 큰 강에 놓인 다리 를 건너서 항구를 끼고 계속
달려서 도로변에 자리한 농산물 시장 에 내려 안으로 들어가서는 저녁에 먹을 반찬 거리를 삽니다.
다시 차를 달리니.... 구마모토의 상징인 구마몬(くまモン) 이 보이는데..... 곰을 뜻하는 구마 와
사람을 뜻하는 몬 을 합쳐 마스코트 이름을 구마몬이라고 지었으니 2010년 규슈 신칸센
개통 이후 낙후된 지역에 "관광객을 유치" 하기 위한 캠페인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구마몬 은 국가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2011년 후반, 총칭 유루캬라 라고 부르는 전국 마스코트 설문조사
에서 280,000표를 얻고 1위 를 기록하였으며 구마모토 현은 2011년 구마몬을 통해 28억엔의 판매
수익을 올렸고, 경연에서 우승한 후에 2012년 상반기에만 118억 엔의 판매 수익을 달성하였다고 합니다.
일본은행은 2012년 부터 2년간 구마몬이 1,232억엔의 가치를 창출 하였다고 추산하였으며, 구마몬
을 이용한 상품 제작은 구마모토 현의 허가 가 필요하지만 캐릭터의 저작권 비용은
청구하지 않는데 저 구마몬은 수컷이며, 생일은 규슈 신칸센이 개통된 날인 3월 12일이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우리 렌터카 승합차는 산 을 올라가는 데..... 언덕 양쪽으로는 큰 과수원이니 감귤이 지천으로
땅에 떨어진게 엄청 많은데도 그냥 놔두는 것을 보면 농촌에 사람이 없고, 그나마 농민들도 고령이라
저걸 제 때 수확할 일손이 부족한가 본데... 한국 처럼 동남아인들 을 농촌에 받아들이지는 않나 봅니다?
언덕을 내려가니 다시 오른쪽에 바다 가 나타나는데..... 어촌 마을 을 지나가다 보니 문득 김창일 국립
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가 동아일보에 올린 “명란이 일본으로 전해진 경로” 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한국에서 전해졌으나 일본인이 더 좋아하는 음식 이 있다. 지난달 일본 오사카로 가족여행
을 갔었다. 저녁에 호텔 인근 편의점에 들렀더니 한국인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맥주 안주를 고르기 위해 냉장식품 코너를 서성이다가 한국 젊은이들 대화를 듣게
됐는데 “명란을 일본에서는 명태 자식 이라고 하나 봐. ‘明太子(멘타이코)’ 라 적혀 있잖아.”
옆에 있던 친구가 대답했다. “나는 ‘다라코(たらこ)’ 를 명란 으로 알고 있는데 뭐가 다른 거야.
일본은 명란의 나라답게 제품이 다양하네” 등의 대화가 오갔다. 젊은이들은 명란을 일본
에서 기원한 음식 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중간에 끼어들어 설명해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참을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에게 해산물에 대해 아는척하지 말라는 아내의 엄포 가 있었기 때문이다.
명란 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파된 음식이다. 명란젓과 더불어 명태라는 한국식 이름 도 전해졌다.
명태의 일본어 발음 ‘ 멘타이’ 에 ‘새끼’ 를 뜻하는 코(子) 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용어가
멘타이코(明太子) 다. 러시아어 ‘민타이’, 중국어 ‘밍타이위’ 역시 명태를 자국어로 발음한 것이다.
명태(明太) 의 어원은 함경북도 명천(明川)에 사는 어부 태씨(太氏) 가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서 도백(道伯)
에게 드리게 하였는데, 물고기 이름을 아무도 알지 못하고 “태 어부가 잡은 것이다.” 라고 대답하니
“명천의 태씨가 잡았으니 명태 라고 이름을 붙이면 좋겠다.” 고 하였으며 북어(北魚) 라고도 불리는데
1980년후 지구온난화로 수온이 상승하니 일본 대화퇴어장이나 러시아 베링해 로 어장이 옮겨졌습니다.
명태(明太) 내장은 창난젓 이고 알은 명란젓 이며 아가미로 만든 아가미젓, 눈알은 구워서 술안주 하고
괴기는 국 을 끓여먹고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명태, 그 기름으로는 또 약용으로 쓰인다니
가히 국민생선이라고 할만한데, 강산에 7집, <명태> 에 나오는 말이지만..... 명태를 그냥 먹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한민족 뿐이라고합니다? 또 양명문 시, 변훈 작곡, 가곡 명태의 가사를 보자면.....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며 춤추며 밀려 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밤늦게 시를 쓰다가 쇠주를 마실 때 카~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명태의 이름은 여러 가지니 생태 는 말리지도 않고 얼리지도 않은 것이고 북어 는 내장을 꺼내고 말린
것이며 술안주 코다리 는 반쯤 말린 것이고 동태 는 겨울에 잡아서 얼린 것이며 황태 는 잡아서
얼리고 말리는 것을 반복해 3개월 이상 눈과 바람을 맞으면서 자연스럽게 건조한 것이고
노가리 는 어린 놈을 말린 것으로 이야기를 잘 하거나 거짓말 하는 사람을 "노가리 깐다" 고 말합니다.
승정원일기, 난호어목지, 오주연문장전산고, 시의전서등 고문헌에 명란젓 기록 이 많이 나오니 명태
주산지 함경도와 강원도 에서 잡혔는데, 남선창고가 1900년에 부산 동구 초량동에 건립되면서
부산이 명란젓 생산과 소비의 중심지 로 떠올랐다. 함경도에서 잡은 명태를 해상으로 운송해 보관
했다가 전국으로 유통한 창고였다. 이런 연유로 초창기 남선창고는 명태고방 혹은 북어창고 라 불렸다.
가와하라 도시오 는 부산에서 태어난 일본인으로 명란젓 일본 전파 를 이야기할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일본이 패망한후 후쿠오카로 건너갔다. 어느날 시장에서 소금에 절인 명란젓 을 구입해 부산에서 자주
먹던 매운 명란젓 을 만들어 이웃과 나눠 먹었다. 주변 사람들의 호평에 용기를 얻어 1949년부터 팔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인 입맛에 맞춘 숙성절임 명란 을 팔았는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일본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한국 방송에서 종종 소개되는 일화이며 그는 명란을 일본에 전파한 주역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에 앞서 함경도 원산에서 명태 어업을 하던 히구치 이즈하 는 명란의 상품성을 알아보고
강원도 양양에 히구치 상점을 열었다. 1908년에 부산 부평동으로 상점을 옮긴 후 일본, 대만으로 수출했다.
해양문화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국립민속박물관 전시기획팀에서 명란젓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영상물 을
찾아냈다. 일본에 소장돼 있음을 확인하고 어렵게 입수하여 현재 기획전시실에서 상영 중이다.
당시 명란젓이 생소 했던 일본인들에게 홍보 하기 위해 산코 영화사에서 1940년대에 제작한 영상이다.
바닷가에서 명태 내장 을 꺼내어 강 위에서 얼음을 깨고 씻은 후에 소금과 고춧가루 등을
첨가하는 장면, 나무통에 담아서 기차로 운송해 선박으로 수출하는 과정 등이
촬영돼 있다. 이를 통해서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은 한국식 명란젓 맛 을 알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런 토대에서 가와하라가 일본 전역으로 확산시킨 것이다. 맛에 국경은 없다.
전망대 아래 바다와 구름에 반쯤 가린 섬 들이 운무 에 둘러쌓인 모습이 참으로 신비로워
보이는데 여기 언덕의 정상부 전망대에는 관세음보살상 (觀世音菩薩) 이 서 있으니
아래 설명을 읽어보니.... 공업화된 일본에서 운수, 자동차, 선박, 토목, 건축 등 5대
사고를 예방하고 안전을 빈다고 했으니 불교 국가인 일본에서는 주된 신앙인가 합니다.
관세음보살 은 불교의 보살 중 하나로 산스크리트어 원어는 아왈로끼떼슈와라 이며, 신묘장구
대다라니에서 언급하는 "알바로기제새바라" 가 음역이니 한문으로는 관음보살,
관자재보살 이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서는 그냥 “관음상(觀音象)”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고 이끄는 보살 로 중생의 모든 것을 듣고 보며 보살피는 의미를 손 1천개와
눈 1천개 로 형상화하여 천수천안 (千手千眼) 관자재보살 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대개 42개
정도로 약식화 하며 보통 관세음보살상 뒷편 광배에 천수(千手) 를 상징하는 수많은 손 이 있습니다.
언덕에서 바다를 바라보는데 저 아래쪽은 가고시마로 옛날 사쓰마번 으로 불렸으니..... 사쓰마번은 1609년에
군대를 보내 유구국(오키나와) 을 손에 넣고 사탕수수 를 재배해 들여와 그 재력으로 근대화를 위한 공장
들을 세우고 막부를 움직이다가 1862년 번주 시마즈 히사미쓰가 에도(도쿄) 근처를 지날때 가로지르던
영국인들을 칼로 베어죽인 때문에 영국함대 7척이 가고시마를 습격해와 사쓰에이 전쟁 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사쓰마번의 설탕 을 생각하다가 이은정씨가 국제신문 도청도설란에 쓴 아스파탐 논란 이란 기사가 떠오
르는데.... 설탕이 유럽에 알려진 건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 때니 인도 정복에 나섰던 네아르쿠스
장군은 인도인이 갈대와 같은 식물 줄기에서 단맛이 나는 즙 을 만드는 걸 보고 놀랐다. 그는 사탕수수
를 ‘꿀벌 없이 꿀을 만드는 갈대’ 라고 불렀다. 16세기까지 설탕은 왕이나 귀족들만 먹는 사치품이었다.
설탕 수요가 늘자 유럽 열강은 서인도제도 섬들과 브라질 에서 본격적으로 사탕수수
재배에 돌입했다. 조직화된 플랜테이션 농업은 설탕이 대중화 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설탕 생산량이 늘면서 17세기 후반에는 중산층도 즐기게 됐다.
설탕이 우리나라에 보급된 것은 20세기 초로 일본 기업이 평양에 사탕무 를 원료로 한 설탕
공장을 세웠는데...... 일제강점기 서울 시민이 가장 고통받던 질병은 치통 이었으니
설탕이 대중화 하면서 치아 건강 을 위협한 것이다. 제일제당 (현 CJ 제일제당) 이
1953년 부산에 처음으로 설탕 공장을 지었다. 1960년대 명절 선물로 설탕 은 최고 인기였다.
이렇게 귀했던 설탕은 당뇨병과 비만 이 사회문제가 되면서 천덕꾸러기 로 전락했다.
당류가 과도하게 들어 비만 위험을 높이는 음료와 식품에 부과하는 설탕세 를
도입한 나라가 많다. 하지만 설탕은 과자 아이스크림 등 많은 가공식품에 들어간다.
단맛은 인간이 좋아하는 원초적인 맛 이기 때문이다. 설탕의 유해성이 걱정스러우나 단맛을 즐기고
싶은 대중의 욕구에 맞춰 과학자들은 대체 감미료 를 찾아냈다. 그 중 하나가 ‘아스파탐’ 이니
1965년 미국 화학자 제임스 슐라터가 위궤양약 연구를 위해 화학물질을 합성 하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설탕의 200배 가까운 단맛을 내지만 칼로리는 거의 없다고 한다. 다이어트와 건강
에 민감한 젊은 세대 수요가 늘면서 제로 슈거 음료 가 인기다. 청량음료는
물론 비타민 제재나 소주 등에 설탕 대신에 아스파탐 등 설탕 대체재를 넣은 것이다.
그런데 세계보건기구 산하 국제암연구소 (IARC) 가 아스파탐을 ‘발암 가능 물질(2B군)’ 로 분류한다고 발표
하자 전국의 빵이나 과자, 음료수 등 업체들에 비상이 걸렸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 입니다?
왜냐하면 2급 발암물질에 우리가 매일 먹는 김치 와 피클 절임채소가 있고 더 위험한 2A에 소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염소고기, 튀김 등이 있으며 가장 위험한 1군에는 담배, 석면, 알코올(술), 햄, 소시지, 베이컨
등이 있는데..... 저걸 매일 먹는 우리가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2B군) 정도에 난리법석 을 떨다니 말입니다?
하기사 뭐 우리나라 사람들은 건강에 워낙 예민 한지라.... 또 냄비근성도 있으니 아스파탐 논란 이 커진
것이라.... 그러고는 드디어 구마모토 에 도착하는데, 숙박업소를 찾아 체크인을 하고 배낭을 놓고
나오는게 순서지만 지금 해가 지고 있으니 입장시간이 문제인지라 먼저 구마모토성 부터 보기로 합니다.
구마모토성 을 찾아 아래쪽 대형 주차장 에 차를 세웠는데..... 예전에 한번 구마모토성에 왔을때는
전차를 타고 정류소 에 내려서 올라오다 보니 가토 기요마사의 동상 을 지나 쉽게 올라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저 코스가 아니고 저 길보다 조금 더 서쪽 아래에 있는 주차장 에 도착
한지라..... 성으로 오르는 입구를 찾을려면 오른쪽으로 가야 빠른지, 아니면
왼쪽으로 가야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으니 가족을을 두고 먼저 혼자 달려 올라 갑니다.
예전에 왔던 도로는 아니지만 큰 도로를 확인하고는 멀리서 손짓을 해서 가족들을 불러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행인에게 성 입구 를 물으니 큰 도로에서 오른쪽 언덕길로 올라 가라고
하는지라..... 올라 가서 다시 큰 도로를 만나니 이 도로가 바로 예전에 우리가 왔던 도로 입니다.
비스듬히 경사가 진 도로 왼쪽길 로 조금 더 걸어 올라가니 커다란 운동장 같은게 나오는
데.... 예전에는 병사들과 주민들을 수용한 집들이 빽빽히 늘어섰던 산노마루 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의 건물들은 오래전인 메이지유신 때에 모두 헐리고 텅빈 연병장 같은데,
저 멀리 시커먼 "구마모토성 천수각" 이 그 위용을 드러냅니다. 예전 같으면 해자 를
2개나 건너고 성벽과 망루가 이어진 3면에서 수비군의 총알이 쏟아지던 갈지자 길 을
구비 구비 돌아서 혼마루로 올라가야 했지만 이제는 텅빈 운동장을 걸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천수각 에 가기 이전에 보이는 성벽의 모서리 는 마치 여인의 치마 처럼 날렵하게 뻗어 내려
오는데..... 이런 축성 방식을 "산기즈미 (算木積み) " 라고 부르니, 일본에서 뿐만
아니고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증축해 쌓은 증산 부산진성이나 서생왜성 등에서도 보입니다.
구마모토성 (熊本城) 은 성의 규모에서 볼때 일본 4대 성 의 하나로 불리는데, 임진왜란 때 조선
을 침공한 선봉장 가또 기요마사(加藤淸正) 가 1600년의 세키노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편으로 참가해 승리후 자기 영지로 돌아와 조선인 포로들을 동원해 쌓았다고 합니다.
조선사람들 이 기와도 구웠기 때문에 구마모토성의 기와는 일본식이 아닌 조선식 이며 1598년 울산 도산성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에 포위되어 생고생을 한지라 우물을 100개 나 파고 식용 가능한 토란 줄기로 만든
다다미를 짜며 또 성벽에는 조롱박으로 도배를 했는데.... 그때 울산 사람 포로들이 거주한 동네는 지금도
"울산마치" 라 불리니 구마모토시 주오구 신마치 1초메~3초메로 우루산마치(蔚山町) 라는 전철역 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