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지금도 인디언 썸머
최광희
연중 날씨가 가장 좋아서 흔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말하는 추석이 지나고 한 주간이 흘렀다. 그런데 날씨는 늦여름이 다시 찾아온 듯이 덥고 습하며 에어컨 없이는 견디기 힘들다. 스마트폰에서 날씨 App을 확인해봐도 연일 낮 기온 30도, 밤 기온 24도를 표시하고 있다. 물론 이러다가 며칠 후면 다시 정상 기온을 되찾겠지만 시원하다가 갑자기 더워진 날씨에 몸이 적응하기 힘들어한다. 시원해야 할 가을의 초입에 다시 여름 날씨가 돌아오자 인디언 썸머(Indian Summer)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인디언 썸머란, 위키백과 사전에 의하면, 북아메리카 중, 남부에서 겨울이 시작되기 직전인 10월 말~11월 중순쯤에 나타나는 고온 현상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단어는 2세기 이상 사용됐음에도 정확한 기원이나 유래에 관해서는 정설이 없다고 한다. 농사를 짓던 인디언(북미 원주민)들이 추수하는데 이 계절을 활용할 수 있어서 겨울이 시작되기 직전에 신이 내려 주는 일종의 축복으로 여겼다는 설명도 있고 인디언들이 영역 다툼을 위해 다른 부족 마을에 쳐들어갈 마지막 기회로 삼은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혹은 인종차별적인 유래도 있는데, 백인들이 이상한 가을 날씨를 가짜 여름으로 생각하고 좋은 않은 의미로 ‘인디언’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인디언 썸머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하지만 유래는 무엇이 되었든지 오늘날 이 말은 날씨의 의미를 넘어 뒤늦게 찾아온 뜻밖의 기회라는 의미로 폭넓게 쓰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이제는 다 끝나버렸는가 싶은 시기에 다시 한번 뭔가를 좀 해볼 기회가 생기는 것은 누구에게나 기쁜 일이다. 이처럼 인디언 썸머란 날씨에서 시작되어 절망 가운데에 뜻하지 않는 희망적인 것을 뜻하는 데에 비유적으로 쓰인다.
지금 가을 초입에 다시 찾아온 더운 날씨가 사람들의 생활에는 잠시 불편할 수 있지만 식물들에게는 생장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된다. 올해 여름에는 가을 김장용 무와 배추를 정식(定植)해야 할 시기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제 때에 정식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배추는 제 때에 정식(定植)하는 것과 한 주간 늦게 정식하는 것에 큰 차이가 난다. 만일 늦게 심으면 금새 날씨가 시원해져서 성장이 느려지고 결국 충분히 자라지 못한 배추를 수확하게 된다. 이는 마치 아침 출근 시간에 10분 늦게 출발하면 교통체증이 훨씬 심해져서 30분 늦게 도착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그런데 올해는 이같은 이상 고온이 찾아오는 바람에 늦게 심은 김장용 배추가 탐스럽게 잘 자라고 있으니 이것이 는 우리를 먹이고 입히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랴?
사실 인디언 썸머라는 단어가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것은 같은 제목의 영화 때문이다. 2001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남편 살해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여자 이신영(이미연)과 그녀의 국선 변호를 맡게 된 엘리트 변호사 서준하(박신양)가 첫 만남에서 운명처럼 그녀에게 반해 해외 연수까지 포기하고 백방으로 애쓴 끝에 결국 무죄 선고를 받아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영화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는 생략하고, 사랑이 끝나버린 것 같은 상황에서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나게 된다는 면에서 그런 제목을 붙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이 인디언 썸머는 날씨와 기온의 의미를 넘어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어떤 일에 기회를 놓쳤을 때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지거나 추진하던 일을 미처 마무리하지 못했을 때 마감 시간에 예상하지 못한 여유가 생기는 경우도 좋은 의미에서 인디언 썸머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귀한 경우는 누구에게나 한 번뿐인 인생을 멋지게 살지 못해서 아쉬워하고 있을 때, 중년 이후에 다시 한번 뛸 수 있는 시간과 건강, 그리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얼마나 복된 인디언 썸머인가? 기후의 인디언 썸머는 개인적인 노력으로 만들어 낼 수 없지만 인생의 인디언 썸머는 준비하고 있으면 기회를 붙잡을 수도 있다.
오늘 한 유명 정치인이 정부 부처의 요직에 임명되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한 달 전에 그분을 만났을 때 아무도 불러주지 않아서 중요한 일을 할 수 없다며, 하는 수 없이 가끔 유튜브나 찍고 있다고 푸념했는데 이렇게 중요한 직책에 임명되었으니 다행한 일이다. 이는 그분 자신의 입장에서와 그분을 지지하는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 환영할만한 인디언 썸머라고 할 수 있다.
흔히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준비하고 기다리는 자에게 기회가 오며, 기회가 왔을 때 붙잡을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디언 썸머는 누구에게나 오며 반드시 오지만 준비된 자만 그 기회를 선용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 바로 내 인생의 인디언 썸머라고 믿고 있으며, 또 다른 인디언 썸머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마치 늦게 심은 김장 배추가 초가을에 늦여름 날씨를 맞아 넉넉히 자라듯이, 내 인생의 가을 녘에 찾아올 기회를 선용하여 멋지게 끝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