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4/월. 비폭력은 준법투쟁이 아니다
나는 지난 12일의 민중총궐기에 참여하지 못했다. 일을 마치고 가까운 도시에 나가보았으나 내가 간 도시는 모두 상경한 탓인지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다. 돌아와 인터넷으로 서울에 모인 백만의 시위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페북에 올라오는 참가 소감과 후기를 보았다. 때론 부럽고 때론 미안하고 때론 염려도 되었다. 어떤 이들은 역사의 현장에서 커다란 감동을 느꼈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너무 온건하고 순화되었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그 어떤 논의를 떠나서 백만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어쩌면 정태춘과 이승환 사이만큼 가깝고도 먼 거리가 느껴졌다.
아직은 단언하기 어렵지만 너무나 착한 집회라는 느낌은 받았다. 멀리서 보는 나에게도 권력이 설정한 폭력과 준법의 프레임이 자기검열처럼 백만의 내면을 통어하는 느낌을 받았다. 거기에 나온 말이 비폭력이었다. 그런데 내가 듣는 비폭력의 어감이 자기검열 탓에 다르게 느껴졌다. 축제 같은 비폭력이 새로운 운동의 자극은 될지언정 목적을 달성할 만큼의 위력을 발휘할 것 같지는 않게 느껴졌다. 오히려 이렇게 통어되는 민중의 힘이 헤게모니 게임을 하고 있는 비박의 여당과 야당에게 기회가 될 것은 분명했다. 백만 민중의 힘을 기존 정치세력들은 헤게모니 장악에 이용하며 변질시킬 것이다. 그것은 당연하다. 때문에 민중은 힘의 결집이 가능할 때 최대한 자신을 정치적으로 가시화해 권력을 창출해야 한다.
물론 나는 현장에 없었으니 수백 곳에서 벌어진 다양한 담론의 현장을 알 수는 없다. 오히려 지나치게 질서정연한 몇 십만을 광화문 광장에 앉혀 놓고 콘서트 식으로 진행되는 중앙집중적 방식이 어쩌면 민중의 생성하는 열기를 붙잡아두는 역효과를 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들은 제자리에 앉아 있으려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외치며 거리를 점령하러 모였는지도 모른다.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들만도 십만이 넘는다고 하지 않는가?
우드스탁이 아니라 80년 광주 시청광장의 코뮨이 벌어지면 왜 안 되는가? 이것이 지속되는 것이라면 민중도 계속 발명하고 조직하고 전파하며 새롭게 형성될 것이다. 하지만 또다시 이백만을 기약하며(?) 민중총궐기가 끝났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단지 박근혜 퇴진만으로 한국사회가 변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민중의 의사가 정치에 반영되도록 명확하고 구체적인 수단을 만들어 놓지 않는 한 정치화는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대신 교회와 절에서 주먹밥을 만들어와 무료로 나누어주고, 사람들은 다른 이를 위해 기부로 밥값을 대신하고, 급식소가 차려지고, 의료소가 차려지고, 여기저기 숙소가 개방되고, 학습소가 차려지고, 침낭을 들고 온 중고생, 실업자, 장애인, 여성, 미술가, 음악가, 대학생, 무주택자 등의 코뮨이 만들어지고, 그렇게 광화문광장을 점거하고, 준법의 이름으로 민중을 탄압했던 권력을 순식간에 해체하고 민중의 발명과 생성을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민중의 생명은 바이러스처럼 강한 결집력과 전염력에 있다. 스스로 생성하고 발명하며 확산되어야만 한다. 민중은 요구하고 관철하는 집단이어야 한다.
솔직히 나는 혁명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이런 상상과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은 한국 최고의 권위가 밑바닥으로 떨어진 지금이야말로 민중이 모든 권위를 파괴 내지 부정하고 근원적으로 사고하고 체험할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식의 전환이 진정 혁명이다. 68혁명이 비록 실패한 혁명이더라도 거기에는 권위에 대한 완전한 부정과 해방의 체험이 깃들어 있었다. 때문에 68세대는 이후 혁명적 상상과 사고를 지속할 수 있었다. 중고등학생이 나서고 초등학생이 나서는 것은 그래서 노동자가 나서고 빈민이 나서고 여성이 나서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지금 당장 박근혜의 퇴진도 중요하지만 민중의 권위로부터의 해방이 더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비폭력은 준법투쟁이 아니다. 간디의 비폭력은 준법인 적이 결코 없다. 오히려 폭력을 위협하는, 폭력보다 더 무서운 비폭력이다. 간디에 의해 재발견된 비폭력은 단지 폭력에 대한 수동적 거부 내지 저항이 아니다. 아힘사, 곧 진리를 파지한 적극적 사랑이다. 헌법이 아니다. 헌법보다 더 상급의 양심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법을 어기고 폭력을 감수하며 전진하는 고도의 내적 강인함을 요구하는 전략이다. 그러니 비폭력은 아무나 요구하고 아무나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청와대까지 행진하는 것이거나,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청와대를 완전히 포위해 외치거나, 혹은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대통령이 앞에 나와 직접 하야를 선언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비폭력이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엉터리 폭력정권의 준법정신으로 비폭력을 지키자고 하면 그것이 말이 되겠는가? 비폭력은 준법투쟁이 아니다.
하지만 비폭력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민중이 일치단결하고 뭉쳐야 한다. 숭고한 양심의 법칙에 복종할 것을 서약하고, 분노와 증오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오직 사랑의 힘으로 폭력과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폭력은 도덕투쟁이기도 하다. 백만이 진정 비폭력을 이해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천명이 비폭력의 평화군이 되어도 폭력과 맞설 수 있다.
우리 자신이 먼저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결코 남도 자유롭게 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이 아직 폭력과 준법의 틀 안에 구속되어 있다. 비폭력은 준법투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