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유배문학 「망계룡산기(望鷄龍山記)」 계룡산을 바라보며 위안을 삼다>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계룡산을 바라보며 지은 기문(記文)’ 「망계룡산기(望鷄龍山記)」는 조선후기 거제도 유배인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가 거제도 유배기간인 1689년부터 1694년 사이에 거제시 계룡산을 보고 쓴 기문(記文)으로 ‘계룡산을 바라보며 귀양살이 위안을 삼았다’는 내용이다. 저자 김진규(金鎭圭 1658~1716)는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제거당하자 지평에 기용되었다. 이 산문은 1689년에서 1694년 사이 거제유배기간 중에 거제도 진산(鎭山) 계룡산을 바라보며 지은 글이다.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는 조선후기 노론의 대표적 정객으로 스승 송시열(宋時烈)의 입장을 고수했던 인물이다. 서포 김만중이 친 삼촌이고 누이동생이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이다. 문장에 뛰어나 반교문·교서·서계 작성을 많이 했으며, 전서·예서 및 산수화·인물화에도 능했다. 그는 거제반곡서원 터에서 귀양살이를 5년간 했다. 문집으로 『죽천집(竹泉集)』, 편저로 〈여문집성(儷文集成)〉이 있다. 거제 반곡서원(盤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청이다.
◉ 이번 주제 「망계룡산기(望鷄龍山記)」는 김진규(金鎭圭) 선생의 거제도 유배문학 中 산문의 하나다. 김진규가 귀양살이 하던 곳이 거제 계룡산 아래인지라, 매일 계룡산을 바라보며 살게 되었다. 그래서 김진규의 선영이 있는 충청도 지역의 계룡산과 거제 계룡산의 이름이 같은 걸 알고 자신의 귀양살이 동안 많은 위안을 삼았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또한 계룡산을 보고 낯선 거제도에서 마음의 위안도 되고 또 지난날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고 한다. 그리고 산의 위용과 아름다움이 충청도 계룡산과 유사하여 자산(玆山), 즉 짙푸른 색에 더한 검은 산으로 표현했는데, 조선시대 유배 간 학자들은 그 지역의 수려한 산 이름을 대개 '현산(玆山)' 또는 '자산(玆山)'이라 표현했다(흑산도 남해도 거제도 등).
또한 “거제읍지 1759년 여지도서편”에는 계룡산은 거제부의 주산으로 읍치 관청의 북동쪽 5리, 대금산 내맥이 이어진 산줄기이다(鷄龍山 府主山在府東北五里大金山來脈)고 했다. 그리고 1881년 8월, 이유원(李裕元)이 쓴 거제향교 풍화루중수기(岐城鄕校風化樓重修記) 내용 중에 계룡산을 보고 감탄한 글이 있다. “계룡산은 주봉으로써 꾸불꾸불하게 산줄기를 이루며, 사슴골(거제면 녹반골)이 넓어지니 포구가 즐거운 표정이다. 그런 기운에서 문명이 나온다 하네. 나는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돌아왔다.(以鷄山爲主峯 落脉蜿蜒 拓鹿洞而面鷰浦 毓文明之氣 余欽歎而歸)”고 감탄했다.
○ 참고로 『죽천집(竹泉集)』은 35권 12책으로, 목판본이다. 1773년(영조 49) 아들 양택(陽澤)이 간행했다. 권두에 양택이 쓴 어제(御製)서문이 있다. 권1은 부, 권2~5는 시, 권6은 기(記)·제(題) 등, 권7은 주(奏), 권8은 책문, 권9는 반교문(頒敎文)·교서 등, 권10은 옥책문(玉冊文)·전(箋) 등, 권11·12는 제문, 권13은 서(書), 권14~28은 소(疏), 권29는 차(箚), 권30은 계(啓), 권31·32는 묘표, 권33·34는 묘지명, 권35는 행장·비명 등이다.
○ 「망계룡산기(望鷄龍山記)」의 형식은 기문(記文)의 일종이다. 기(記)는 사실을 그대로 적는 한문 문체로, 기문(記文)이라고도 부른다. 사물을 객관적인 관찰과 동시에 기록하여 영구히 잊지 않고 기념하고자 하는 데에 목적을 둔 글이다. 옛사람이 기(記)라고 이름을 한 문장은 너무나 광범하여 일체의 기사문(記事文)과 기물문(記物文)을 포괄하고 있다. 기(記)의 문체는 부(賦)와 같으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논(論)과 같으면서도 단정을 짓지 않고 서(序)와 같으면서도 드날리지 않고 비(碑)와 비슷하면서도 칭송을 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망계룡산기(望鷄龍山記)」* 김진규(金鎭圭)의 『죽천집(竹泉集)』
거제도에는 산이 많다. 높고 험한 산이 쭈빗하고 겹겹이 둘러싸여 겹쳐있다. 그리고 산들이 최고로 뛰어나게 높고 우뚝 서 있어 어떤 때에 큰 인물이 나올 것 같다. 나는 일찍부터 기대하고 거제토착민에게 "산 이름 무엇입니까?" 물으니, 그 사람이 말하길, "이 산이 우리 고을 읍진(주봉)이다." "대지에서 나타났기에 그 이름이 '계룡'이다" 그란데 "자손들은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가?" 나는 이 소리를 듣고 놀라서 물으니, "또 다른 산 이름이다." 이에 우리 고향 충청도 연산현진(논산)의 이름과 같구나. 어찌하여 이같이 또 같은 이름일까? 남북은 먼데, 옛날에 이름 지은 자는 (그 사실을) 서로 알았거나, 방문하지 않았을 텐데 충청도 계룡산과 거제 계룡산 이름이 같구나. 각각 같은 의미로 파악하는데 이를 비록 알 수 없었다 하더라도 나는 이름을 도용한 것에서 느끼는 바가 있었다.
슬프구나~ 하늘도 무심하여, 나는 고향에서 멀리 떠나가, 이 검은 산(玆山) 아래에 처소가 있다. 고향 땅을 떠올리는 생각이나 할 수 있는 것에서 작은 위안이 된다. 나는 벼슬살이를 탐내 하늘의 저주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느끼고 마음을 움직여 반성하는 깨달음으로써 멀리 떠나 있다.
보통 사람은 고향을 떠나면 벼슬살이로 가지만, 나는 추방당해 떠돌다가 지금은 여기로 추방당해 귀양살이를 하고 있다. 영남 해안 변방 요새에서는 어떠한 욕심도 없다. 이로써 현산(玆山, 계룡산)이라는 것으로 불리어져 이와 같은 지난 인연이 있게 되었다. 조석으로 산 이름(계룡산)을 듣는데 고향의 진영도 이와 같겠구나. 푸른빛이나 바랜 색의 형상으로 뛰어나게 우뚝 솟아 있고 또 간략히, 서로의 눈에 삼삼하기까지 하니 이에 말미암아 미루어 생각하는 이유다.
조상의 터전(고향)과 선영의 무덤은, 모두 다 내 마음속에 있을 뿐이다. 옛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유배 온 사람들이 저 산을 올라가 봐야 한다고 말한다. 볼만하고 맛볼만한 곳인지라, 나라 안의 사람들이 즐거워 할 곳이란다. 이제 현산(玆山)은 아마도 고향에서 맛보던(감상)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즉 내 생애가 이와 같음이라, 이로써 바다 가운데 섬이 나의 고향과 같게 느끼면서 계룡산을 바라본다. 고향 떠나 살아보니 (지난) 벼슬살이가 어쨌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하늘이 슬퍼하는 것 같다. 만일에 고향 동네로 살아 돌아간다면 뜻밖의 행운일 것이다. 또한 한번 현산(계룡산)에 올라가서, 지난 인연을 돌아보고 잇닿아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다만 과오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전날에 도움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뛰어나 은둔한 은사를 끝까지 찾아보고 저쪽과 견주어 보니 같지는 아니하다. 옛날에 이름을 취해 세운 뜻을 헤아릴 뿐, 그러나 감히 바라는 바가 아닌지라, 부족하나마 내 마음의 뜻을 이에 기록해 남겨 놓고자 한다.
[裳郡多山 嶂嶠重複環遶 而有巍然最高而大者出於其間 余始至而望之 問土人曰山何名 人曰此爲吾邑鎭 鷄龍之名 著於輿地 子豈未之知乎 余聞而驚曰 異哉山名 此吾故鄕湖西連山縣鎭之名也 何爲而又名於此 南北遠 古之名之者 不相聞歟 彼此之名 各有取義歟 是雖未可知也 余於此竊有所感 嗟乎 豈天憐余去鄕遠遷 使處玆山之下 少慰懷土之思耶 抑天惡余之狃於仕宦 不歸故鄕 使遷此而因以感發省悟耶 凡人之離土 有以仕宦 有以流遷 今余旣流遷 嶺海關塞 無不可也 而乃來于玆 是若有宿緣 而朝夕聞山之名則是故鄕之鎭 而巍然之形蒼然之色 又略相髣髴焉 由此而想像 丘壠與桑梓 皆在眼中 古人云越之流人 見所甞見於國中者喜 今玆山盖無異乎故鄕之甞見 然則雖沒齒於此 以海島爲吾鄕 其視以仕宦離土何如也 若天哀之 萬一幸而生還田里 亦當一登玆山 以償宿緣 歸居于連 庶補前日不歸之過 而窮探山林之勝 以較彼 此同異 而究古取名之義 然而非所敢望也 聊志之以爲記]
◉ 거제도 계룡산(鷄龍山)은 예나 제나 거제시의 진산(鎭山)이자 주산(主山)으로, 높이 566m의 산이다. 거제도 중앙에 우뚝 솟아, 동서남북 4개의 산이 마치 머리를 조아리듯이 하고 있는데 북쪽의 대금산, 동쪽의 옥녀봉, 남쪽에는 가라산(585m)과 노자산, 서쪽은 산방산이 그들이다. 계룡산의 동쪽으로는 고현만에서 문동에 이르기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서쪽에는 거제면과 한려해상국립공원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이러한 거제시의 진산(鎭山) 계룡산(鷄龍山)은 닭의 벼슬과 용의 등지느러미를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어찌되었건 거제도로 유배온 수많은 분들에게 마음의 위안과 평안을 주었던 계룡산의 기문을 남겼다는데 그 의의가 크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