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력후보들의 TV토론은 김대중의 진면모를 국민에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그동안 왜곡과 조작으로 폄훼되거나 일그러진 ‘김대중상’에서 여러가지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긴 세월 갈고닦아 온 경륜과 정책을 설명할 수 있는 다시 없는 기회였다.
또 상대후보들의 약점을 파헤치는, 그래서 상호비교가 가능한 토론장이 되었다. 이회창이나 이인제 역시 TV토론에서 만만찮은 역량과 구변을 갖고 있었다. 한때 이인제의 인기가 치솟은 것은 TV토론의 성과였다.
김대중은 거듭되는 TV토론을 통해 ‘준비된 경제대통령’, ‘IMF국난을 해결할 대통령’등의 이미지가 굳혀지면서 여론조사에서도 앞자리를 유지했다. 김종필과 내각제단합이 ‘권력나눠먹기’라는 역풍을 맞기도 했지만 이인제 후보의 등장으로 보수층과 영남권의 분열, 11월말에 터진 IMF관리체제로 전락하면서 경제파탄에 대한 책임론, 김원기를 중심으로 한 국민통합추진위 인사들의 국민회의 합류 등으로 행운의 여신은 김대중 쪽으로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김대중은 이번 대선이 어느 때보다 집권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보면서 12월 2일 그간 다듬어 온 17개 분야 170개 항목의 대선공약을 발표했다. 주요정책 공약의 제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한국은행독립 △ 노조정치활동보장 △ 월드컵 남북공동개최 △ 내각제 개헌과 특검제 도입 △ 부패방지법 제정 △ 통화량 최대 억제 △ 소비자 보호 활동 강화 △ 1년반 내에 IMF체제 극복 △ 최소한 10%의 예산절감 △ 물가 인상률 3%대로 억제 △ 2년간 총소비 증가율 5~6에서 3~4%억제 △ 저축률 34.6%에서 36.5%로 증대 △ 1999년 중반 경상수지 흑자 △ 6개월간 해고중지와 임금동결 △ 노사정위원회 구성 △ 고용안정 위해 매년 50만 명 고용창출 △ 부가세 5%인하 △ 직접세부담 증가 △ 정부개혁추진위원회 설치 △ 예결위 상설화 △ 부패방지법 제정 △ 고위급 인사청문회 실시 △ 지방경찰제 도입 △ 주민투표법 제정 △ 내무부의 자치청 전환 △ 지방재정발전위원회 설치 △ 농어촌 경쟁력 강화와 농어민 생활개선 △ 농어촌발전 위해 2단계 구조개선 사업실시 △ 제2우루과이라운드 협상대비 △ 농어가 부채원금 일정기간 상환유예 △ 남북관계 정경분리 △ 3원칙 3단계통일 △ 인도적 대북식량지원 △ 인재지역할당제 △ 임기내 영구임대주택 20만호건설 △ 전체예산 중 문화예산 1% 이상 확보 △ 일본문화의 단계적 개방 △ 문예진흥기금 대폭증액 △ 영화심의 폐지 △ 입시과외 금지와 사교육비 절감 △ 신선식품의 물가 3%이내 억제 △ 주부들의 직장 증가 △ 방화 스크린쿼터제 40%대까지 유지 △ 등급외 전용관 설치 △ 대통령직속 과학기술위원회 설치 △ 1인 1PC운동 △ 사이버정보 치안확립 △ 소프트웨어 전문인력 육성 △ 국민건강보험 실시 △ 의료보험 완전통합 △ 보험혜택 대폭확대 △ 소득ㆍ고용ㆍ교육ㆍ주거ㆍ의료보장의 생활 최저선 보장 △ 경로연금확대, 65세 이상 120만 명 월 5만원 지급 △ 장애인 생계보조수당 월 10만원으로 인상 등이다.
‘고난의 화신’이 미래를 내다보는 비전까지 가져서는 안 되는 걸까? 그리고 그 비전의 실현을 위해 대통령자리를 탐내면 안되는 걸까? 그러나 역사적으로 비극적 영웅만에 탐닉해온 한국 국민은 김대중의 집권을 향한 집념을 고운 눈길로 보지는 않았다.
김구마저도 그가 집권을 위해 이승만과 정략대결을 벌였더라면 설사 그가 성공해서 큰 일을 이뤘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한국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누리지는 못하리라. 속세를 등진 수도승과 같은 지도자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한국인들의 심성은 고난과 수탈로 점철된 한국의 비극적인 역사의 산물은 아닐까? (주석 15)
1997년 12월 18일의 날이 밝았다.
김대중은 부인과 함께 아침 일찍 일산에서 투표를 마쳤다. 그리고 다소 진부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大天命)의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당선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전히 마음을 놓기는 어려운 여건이었다.
투표를 마친 김대중 부부는 이날 오후 서울 삼성의료원을 찾았다.
동생 대의가 투표 전날인 17일 오후 4시경 운명한 것이다.
“형님께 누를 끼칠수 있으니 선거가 끝날 때까지 나의 죽음을 절대로 알리지 말아달라.”고 유언하며 숨졌다. 선거 막판까지 상대 진영에서는 구전홍보단을 동원하여 ‘김대중 건강이상설’을 퍼뜨렸던 터였다.
동생은 자신의 사망소식이 전해지면 고령인 형님의 선거에 누를 끼칠까봐 유언으로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아달라고 하며 운명했다. 김대중은 자신 때문에 평탄한 삶을 살지 못한 채 고생하다가 대선 하루 전에 당선의 소식을 듣지 못한 채 숨진 아우의 시신 앞에 한없이 오열했다.
평온한 가운데 전국에서 투개표가 진행되었다.
오후 6시 투표 마감이 되면서 발표된 MBC와 갤럽의 출구 여론조사 결과는 김대중이 1% 차이로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안심하기 어려운 표차였다. 개표 초반에는 이회창이 약간 리드하다가 밤 10시께부터 앞서기 시작하여 자정쯤에 당선이 확정되었다. 김대중 부부는 일산 자택의 2층 안방에서 개표방송을 시청했다.
총유권자 3,229만 416명 중 80.7%인 2,604만 2,633명이 참가한 선거에서 김대중 1,032만 6,275표, 이회창 993만 5,718표. 이인제 492만 5,591표를 얻었다. 김대중 40.3%, 이회창 38.7%, 이인제 19.2%였다. 김대중은 이회창을 39만 557표를 앞서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집 안팎은 삽시간에 환호성과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일산 집 주변으로 밤새 지지자들이 몰려들었다.
<아침이슬>, <선구자>, <목포의 눈물> 등을 합창하는 소리가 집 안으로 들렸다.
“김대중 대통령 만세!”
“행동하는 양심 만세!”
“인동초 만세”
그들은 더러 부둥켜안기도 했다. 남편은 4수 만에 꿈을 이루었다.
무엇보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야 간의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룬 것이다.
하의도에서 청와대까지 가는 길은 참 멀고도 험했다. (주석 16)
주석
15) 강준만, <정권교체가 세상을 바꾼다! - 김대중집권이 그렇게 두려운가?>, <인물과사상> 1, 16~17쪽, 1997.
16) 이희호, 앞의 책, 135쪽.
첫댓글 희열. 기쁨. 더 이상 무신 말이 필요 하리오..........
다시 있을수 없을거 같은 승리 였습니다.
가장 행복 했든 시간 들 였습니다.
그때의 감격이 아직도 기억속에 생생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