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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일지 (1951년 5월 ~ 6월)
1951년 5월 1일(화) 흐림-맑음
<전황>
- 제8군, 공산군과 경미한 접전, 소강상태라고 발표
<국내>
- 국회 본회의, 특수농지처리법 미결 폐기
- 허정 사회부장관, 서울 인천지구 남하 피난민 40만명 구호문제 기자회견
- 경남도청에서 북한행정요원 강습 수료식
<주> : 본 자료는 6.25전쟁 1,129일간 일지(1950.6.25~1953.7.27) 내용이며,
- 저자는 부영그룹 창업자인 이중근회장 편저입니다. 감사합니다.
1951년 5월 2일(수) 아주 맑음
<전황>
- 홍천지구 유엔군, 진지 내습한 공산군 격퇴
- 중공군, 서울 북쪽지구부터 동쪽으로 이동
<국내>
- 국회 본회의, 합동수사본부 해체안 가결
- 국무회의, 물가 앙등 조장하는 원조물자 가격의 시세기준 폐지
1951년 5월 3일(목) 맑음-흐림
<전황>
- 유엔군, 춘천 동남지구에서 병력 불명의 공산군과 교전
- 유엔 포병 및 지상부대, 인제 주변 침공 공산군 격퇴
<국내>
- 이승만 대통령, 대구에서 국군장병에게 “최후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고 훈시
- 변영태 외무부장관, “대소강경책 시급하다”라고 기자회견
- 금융위원회, 금리 및 대금업 규정에 관한 법개정 정부에 건의
<해외>
- 그로스 미국대표, 집단대책에서 대중국무기금수 제안
- 대한민국, 유엔경제사회이사회에 북한(단독 또는 소련, 중국과 합력)의 대량살륙행위 제소
1951년 5월 4일(금) 흐림
<전황>
- 국군 및 유엔군 반격 재개, 봉일천-춘천-인제-속초 북방선으로 진격 개시
- 서울 서북방지역에서 공산군 북방으로 격퇴
<국내>
- 이승만 대통령 특별보좌관 가이싱거, 한국군 50만명 무장되면 중공군 격퇴용이하다고 발언
- 신성모 국방부장관, 군의학교 공적 선양하고 표창장 수여
- 대구지방법원, 국민방위군 사건 관련자 선고 사령부 윤익헌대령 징역 3년 6개월, 강석한중령 4개월,
제15교육대 박철 방위중령 6개월, 제25교육대 임병언 방위대령 3년
1951년 5월 5일(토) 흐림-맑음
<전황>
- 유엔군 탐색대, 인제에 돌입, 공산군 255명 살상, 57명 생포
-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유엔군 한국전선에서 주도권 회복하겠다고 담화
<국내>
- 경제부흥위원회 조직
원장 국무총리, 위원 기획 내무 재무 농림 상공 사회 교통 체신부장관
-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 일행, 산업경제 실태조사(대구방문 후 부산 복귀)
- 재한화교반공항소대회, 부산 동아극장에서 개최
1951년 5월 6일(일) 맑음
<전황>
- 유엔 공군, 북한 중요보급로에서 공산군 대수송대 4,000대 발견
<국내>
- 오잔 0시를 기하여 일광 절약시간 실시
- 건국국채 발행액(5%)을 400억원으로 삭감 결정
- 북한 외무성, 유엔총회 의장 유엔안보리 의장에게 ‘미군 세균전 만행’ 규탄
1951년 5월 7일(월) 흐림-비
<전황>
- 유엔군 탐색대, 인제 근교 38선 돌파
- 유엔군 탐색대, 춘천 돌파
- 국군, 의정부 서북방 5km 지점 진출
<국내>
- 정부, 4각료 신임
국방부장관 이기붕, 내무부장관 이순용, 사법부장관 조진만, 농림부장관 임문환
- 국회, 국민방위군사건, 진상 조사 보고
- 국채소화대책중앙위원회, 부처별 국채 소화방법 제시
<해외>
- 중국 소련비밀군사협정설
1) 중국은 새로 병력 60만 명 한국에 투입
2) 소련은 소련식 장비 갖춘 국제의용군 10개 사단 편성
1951년 5월 8일(화) 흐림-비
<전황>
- 유엔군, 의정부 도로로 서울 북방 31km 진출, 38선에 급박
- 국군, 서울 서북방 곡릉강 도하, 서울 북방 27km 진출
- 유엔 공군, 공산군 300명 살상
<국내>
- 국회 본회의, 국민방위군 부정사건 관련 1억원 정치권 유입설로 설전
- 허정 사회부장관, 전재민 구호에 관한 당면문제 언급
1951년 5월 9일(수) 아주 맑음
<전황>
- 국군, 간성에 돌입
- 유엔군 공군, 신의주 비행장 대폭격, 신의주 상공에서 최대 공중전, 공산군기 38대 격파
<국내>
- 이승만 대통령, 청평 가평 일대 전선 시찰
- 이시영 부통령, 거창사건 국민방위군사건 규탄하고 사표 제출
- 한 일 홍콩 간 소포우편 교환협정 성립
1951년 5월 10일(목) 흐림-비
<전황>
- 공산군 주력, 문산 북방으로 계속 퇴각
- 국군, 서부에서 서울 포위하려는 공산군 6,000명 격멸
<국내>
- 이승만 대통령, 국회 각 정과 대표 초청하여 이시영 부통령 사직 수용 의사 표명
- 한국은행과 시중은행 공동융자 방식으로 비료와 농기구 구입 자금 방출
- 한국은행 조사월보(대표 한국은행 조사부장) 창간
1951년 5월 11일(금) 흐림-맑음
<전황>
- 중부전선의 공산군, 가평 부근으로 남하
- 미 제1군단 밀번 중장, 국군 제1사단 용전에 격려문 전달
<국내>
- 국회, 이시영 부통령 사표 반환 115대 1로 가결
- 대통령관저에서 국방장관 농림장관 주영 특명공사 임명식
- 이승만 대통령, 대통령선거 재출마 의사 없다고 회견
1951년 5월 12일(토) 맑음
<전황>
- 화천 동남방지구의 공산군, 점차 이동
- 중공군, 소양강 남안의 교두보 확대
- 공산군, 김화 동방-인제 북방지역까지 연막 사용
<국내>
- 국민방위군 설치법 폐지에 관한 법률(법률 제195호) 공포
- 비상시 향토방위령(긴급명령 제9호) 폐지에 관한 법률(법률 제196호) 공포
- 문교부, 공과 학생에게 일본 유학 허가 방침
1951년 5월 13일(일) 흐림-맑음
<전황>
- 공산군, 고양강 남안 교두보를 향해 대거 남하
- 국군, 인제 부근에서 8회에 달하는 공산군 반격 격퇴
<국내>
- 국회 본회의, 미국 시민권자인 이순용 신임 내무부장관의 국적 문제로 논란
- 미 병원선 헤이븐 호, ‘어머니 날’ 행사로 한국 고아 400명, 헤이븐 호에 초대
1951년 5월 14일(월) 흐림
<전황>
- 소양강 북안 따라 인제 서북방지역으로 진격한 유엔군, 약 2개 대대의 공산군과 격전
- 유엔 공군, 춘천북방지역에서 집결 중인 공산군 맹폭격 175명 사살
<국내>
- 국회, 이순용 내무부장관의 국적문제 논란
- 국회 본회의, 거창사건 조사처리에 관한 결의문 가결
- 국회 본회의, 5월 16일 부통령 선거 시행안 가결
<해외>
- 유럽평의회, 적색국 이외 지역의 희금속 개발 위한 새 사무국 개설 제창
- 신파쇼연맹회의 종료
1951년 5월 15일(화) 비-흐림
<전황>
- 공산군, 춘천-인제 간에서 현저히 증강
- 이기붕 국방장관, 국군 3군 수뇌부와 부산항 LCI호 함상에서 5시간 회담
<국내>
- 이승만 대통령, 부통령 사임과 정부 내 인사이동 등에 관하여 성명
- 부통령 김성수 피선
3차 투표에 재석 151표 중 78표, 차점은 이갑성 73표
- 상공부, 일본 제외한 제3국과는 L/C베이스가 원칙이라는 무역방침 공고
1951년 5월 16일(수) 흐림
<전황>
- 공산군, 인제 남방에서 국군전선 돌파
- 중공군, 5월(2차 춘계) 공세 개시
- 공산군, 소양강 및 북한강 남방의 교두보에 강력한 병력 투입
<국내>
- 국무총리 공보비서관에 정윤조 취임
- 정부, 국회의원보선 보류 국회에 요청
- 국립상이군인결핵요양소 개소식
- 이적행위금품을 발각한 자에 대한 상금교부규칙 공포 실행
1951년 5월 17일(목) 흐림-맑음
<전황>
- 중공군(병력 약 9만 5,000명 추산), 서부전선 공격 개시
<국내>
- 이승만 대통령, 대통령 직선제 개헌 추진과 의회 양원제 채택 주장
- 미 경제 협조처, 695만 6,000달러에 달하는 한국행 물자구입권 육군 당국에 부여
- 한국은행 제1기(1950.6.12.~1951.3.31.) 순익금 1억 7,000만원(17일 결산)
1951년 5월 18일(금) 흐림-맑음
<전황>
- 유엔군, 국군, 38선 전 전선에서 남방으로 후퇴 완료
- 인제 서남방 진지의 국군, 예정방어선으로 후퇴, 공산군 1만명 침투
- 공산군, 의정부 침입
<국내>
- 김성수 부통령, 국회에서 취임 인사, 첫 등청
- 국회, 부의장 동의로 이순용 내무부장관 국적문제에 불문 처리하기로 가결
- 민간 무역업자 공공단체, 국내 생산 가능 물품 등 사치품 대량 수입 물의
<해외>
- 유엔총회, 중국과 북한에 대한 전략물자 금수안 통과
- 네델란드 육군 당국, 금년 말 지원병 170명 한국에 증파하겠다고 발표
1951년 5월 19일(토) 맑음
<전황>
- 공산군, 청평 가평 간의 한계 춘천지구에서 돌파구로 계속 남하
<국내>
- 국회 본회의, 이시영 전 부통령의 생활 보장 정부에 건의하기로 결의
- 국회 내 신정동지회와 공화구락부의 합동 결의
- 한국 경찰 미군 방첩대, 범죄 수사의 사무 한계 등에 대한 합의
1951년 5월 20일(일) 맑음-흐림 -- 330일차
<전황>
- 동해안 국군, 38선 이남으로 철수
- 공산군 3사단, 한계-풍암 간 아군 방어선 돌파
<국내>
- 국방부, 병무관계조사위원회 설치
- 한국전쟁 전상자에게 제1차 상이기장 수여
- 부산시장, 과도한 방세 요구와 퇴거 강요 행위 엄단 경고
1951년 5월 21일(월) 비
<전황>
- 중동부 전선, 중공군이 미 제2사단 동방 풍암 북방 향해 4개 병단 투입
- 공산군 제4차 공세 6일 만에 좌절, 북한강 남안의 교두보에서 후퇴 개시
<국내>
- 국회, 전재긴급시책에 관한 건의안 가결
- 정부, 유엔군 대상금 중간상환 미 당국에 요청
- 백낙준 문교부장관, 군사용 일부 학교 반환 통첩 시달
- 킹슬리 유엔한국재건단 단장, 한국전 피해액 5~10억 달러, 민간인 사상자 100만명 언급
1951년 5월 22일(화) 약간 비-흐림
<전황>
- 중공군, 청평 근방의 교두보 포기, 북방으로 후퇴
- 공산군, 서울 북방 15km 지점에서 저항 강화
<국내>
- 국회 본회의, 남한 출신 포로 4만여 명 석방 건의
- 정부, 애국복권발행법 및 동 특별회계법 공포 시행
- 세관행정 협조기관으로 세관통관협회 결성
- 포로 우편 취급 개시
<해외>
- 중국, 대중국 금수안 반박 성명
1951년 5월 23일(수) 아주 맑음
<전황>
- 공산군, 전선에서 일제 후퇴 개시
- 유엔군, 중동부전선에서 반격 한계 탈환
<국내>
- 신정동지회와 공화구락부, 공화민정회로 발족
- 이기붕 국방부장관, 상이군인에 대한 동족애와 동정 요청
1951년 5월 24일(목) 맑음-흐림
<전황>
- 유엔군, 총공격 개시, 공산군의 저항 거의 없음
- 유엔군 기갑탐색대, 동중부전선에서 38선 돌파
<국내>
- 이승만 대통령, 미군 철수 주장 부인하고 유엔군 증파 기대 언명
- 이승만 대통령, 피난민 임시주택 당분간 철거 보류 특별 지시
- 김훈 상공부장관, 한국 수출물자 대중국 유입 금지 방안 발표
- 트루먼 대통령, 총액 85억 달러 대외원조에 관한 특별교서 의회에 송부
1951년 5월 25일(금) 흐림
<전황>
- 유엔군, 춘천 서북방에서 38선 돌파
- 미군, 한계 동북방에서 공산군 격전
- 국군 선견대, 고랑포 동방 16km 진출
<국내>
- 코디에 유엔 사무총장 행정보좌관 내한
- 경제부흥위원회, 기획처 물동국에서 작성한 부흥계획안 검토
- 공보처, 일본 음반사용 금지 담화
- 경부선에 제7, 8열차, 신설 운행
1951년 5월 26일(토) 비
<전황>
- 국군, 양양 점령
- 미군 프랑스군, 홍천 인제 도로 급진격, 38선 이북의 유엔군 교두보 진지 강화
<국내>
- 이승만 대통령, 미 장병에게 무공훈장 수여
- 정부, 한국전쟁 정전 절대 반대 담화
- 무장유격대 100여명, 청주시 습격
- 육군본부 참모부장에 유재흥 소장, 행정 참보부장에 양국진 준장, 작전 참보부장에 이준식 준장 신임
<해외>
- 유엔 3인조정위원회 스웨덴 대표, 한국전쟁의 평화적 해셜 위한 교섭에 응할 용의 있다는 소련 메시지 접수 언명
1951년 5월 27일(일) 흐림-맑음
<전황>
- 미 제2사단, 인제 현리 점령
- 공산군, 화천 근방에서 투항
<국내>
- 상공부, 김포평야에 양수 송전 긴급 결정
- 관재청장, 귀속재산 부정 매매자 및 대여자 엄단
1951년 5월 28일(월) 맑음
<전황>
- 공산군, 화천에서 패주
- 한국에 온 최초의 유엔군 장병 어머니, 영국에서 한국행
부상 당한 아들 마틴 소위를 부산항 병원선에서 면회
<국내>
- 이기붕 국방부장관, “장병 제 소집에 솔선 입대 기대한다‘라고 담화
- 조선민주당, 정전 반대 성명
1951년 5월 29일(화) 맑음
<전황>
- 국군 제1군단, 간성 점령
- 공산군, 문산 고랑포 연천 서남방에서 1주일간 초유의 완강한 저항 개시
<국내>
- 상공부, 수출입 허가 사무 일체 세관과 한국은행으로 이관
-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 민간인 소유 지프차 일체 회수 발표
1951년 5월 30일(수) 비
<전황>
- 유엔 공군, 김화 동북방의 공산군 보급품 대집적소 격파
<국내>
- 신익희 국회의장, 북한 총선거 기대한다고 5.30선거 1주년 기념 담화
- 농림부, 하곡 40만 석으로 가마당 2만 3,000원으로 수집 결정
<해외>
- 미국 일본 간 최초 신특수계약 성립, 일립제작소와 미 정부간 500만 달러(18억원) 계약 조인
1951년 5월 31일(목) 아주 맑음
<전황>
- 유엔군, 인제-현리 간 도로에서 공산군 2,000명 포위
- 새로 도착한 미 중순양함 로스엔젤레스 호, 간성 고성지구의 공산군 시설 야간 폭격
<국내>
- 국회, 제11회 임시국회 개최
- 대한금융조합 대의원 간담회, 금융조합의 독선적 운영 행태 비판
<주> : 본 자료는 6.25전쟁 1,129일간 일지(1950.6.25~1953.7.27) 내용이며,
- 저자는 부영그룹 창업자인 이중근회장 편저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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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6월 1일(금) 아주 맑음
<전황>
- 화천 서북 서방에서 공산군의 저항 분쇄
- 중공군 신정예부대, 전선 돌입, 철원 김화 평강지구 방어강화 기도
- 유엔군, 연천 서방 적성북방 임진강 북방에 교두보 구축
<국내>
- 이승만 대통령, 중요한 공업 금융관계 귀속 기업체 42개 국유화 발표
- 조광섭 의원, 구타사건 발생
- 외자관리청, 구호물자 취급 방침 결정
1951년 6월 2일(토) 아주 맑음
<전황>
- 국군, 고성 확보
- 유엔군, 중부전선에서 맹공으로 공산군의 저항 격퇴하고 3.2km 전진
<국내>
- 국회, 복수환율제 도입 희망
- 민사처, 구호물자에 대해 관세 부과 방침
- 신임 미 제5공군사령관, 무초 대사 안내로 이승만 대통령 예방
<해외>
- 트루먼 대통령, 대공산권 전략물자수출국에 대한 미국 경제원조중지법 서명
1951년 6월 3일(일) 맑음-흐림-비
<전황>
- 미 제1군단, 말뚝박기 작전 개시
- 국군 수도사단, 향로봉 전투 개시
<국내>
- 국회, 청주 피습사건 책임 규명에 긴급동의, 내무위원회가 조사 보고하게 함
- 5월 중 부산세관에서 적발된 밀수 총 건수 106건, 총액 2억 200만원으로 대부분 사치품
1951년 6월 4일(월) 맑음-흐림
<전황>
- 인제지구 공산군, 유엔 공군의 공격으로 진지 포기
- 유엔군, 영평 동북방 고지 탈환
- 육군참모총장 유재홍 소장 임명
<국내>
- 백두진 재무부장관, 복수환율제 채택 언명
- 김태선 치안국장, 춘천이남 각 서(署) 복구 언명
1951년 6월 5일(화) 흐림-맑음
<전황>
- 양구 동북방에서 진출
<국내>
- 국회 본회의, 정전 반대 결의안 채택
- 경기도지사, 한강 이북 주민 철거 당부
1951년 6월 6일(수) 아주 맑음
<전황>
- 공산군, 양구 동방 동북방에서 강경 저항
- 공산군, 서부전선에서 국한된 퇴각, 후위전투 계속 수행
<국내>
- 부산-서울 간 전화 취급 개시
- 청량리-춘천 간 철도 완전 개통
<해외>
- 미국 정부, 빈에서 미군 사살한 소련군인 2명 처벌을 소련에 요구
1951년 6월 7일(목) 맑음-흐림
<전황>
- 유엔군 전함 항공기, 원산항 폭격
- 공군, 사리원 해주 근방 철도 맹폭
<국내>
- 이승만 대통령, 파철을 수출 정부가 전적으로 담당할 것이라고 성명
- 국회, 국방부 내무부 관계자와 청주사건 책임자 엄벌 조치 합의
- 김석관 교통부장관, 철도 시설 90% 복구 언명
1951년 6월 8일(금) 아주 맑음
<전황>
- 국군 제7사단, 군량현 전투 개시
- 공산군, 중동부에서 지연작전 약화로 북방으로 퇴각
<국내>
- 이승만 대통령, 38도선에서의 휴전에 반대 성명
- 대통령 국방부장관 해군참모총장, 거제도 피난민 수용 상황 시찰
- 미 제8군, 서울시민을 제외한 한강 이북 주민 철거 명령
1951년 6월 9일(토) 아주 맑음
<전황>
- 미 제9군단, 와이오밍선 좌반부 점령
- 공산군, 철원 김화 평강의 철의 삼각지대 포기, 금성으로 퇴각 개시
<국내>
- 이승만 대통령, 38도선 정전 반대 등 기자회견
- 국회, 구국총력연맹의 해체 놓고 격론
- 공보처 선전대책중앙위원회, 한국전쟁 국난일의 행사 절차 결정
- 장면 국무총리, 서부전선의 서울 대전 대구 등지 시찰
<해외>
- 애치슨 미 국무장관 증언(6회차)
“트루먼 대통령은 타이완 국무부에 타이완 국민정부 원조 활동에 관한 조사 및 정보수집을 명령했다”
1951년 6월 10일(일) 맑음-흐림
<전황>
- 밴 플리트 미 제8군사령관, 철원 김화 점령 완료 발표
- 국군, 공산군의 반격 제지 후 간성 확보
- 양구 화천지구에서 공산군의 강력한 저항 계속
<국내>
- 서울-수원 간 전화 개통
- 미 제8군 헌병사령부, 미군 5명과 국군 중위 1명 포함한 군수물자절도단 체포, 국법회의에 회부 처벌 발표
1951년 6월 11일(월) 흐림-맑음
<전황>
- 미 제9군단, 와이오밍선 우반부 점령
- 화천 북방 및 양구 북방 공산군 저항 점차 소멸
<국내>
- 국회의원 보궐선거 무기연기에 관한 건 / 국무원 공고 제15호 공포
- 장면 국무총리, 부산에서 콜터 중장(미 제8군사령관)과 한강 이북 농민 복귀문제 검토
- 변영태 외무부장관, 국회에서 38선 정전설 사실무근이라고 증언
1951년 6월 12일(화) 흐리다가 맑음
<전황>
- 유엔군, 철원지구에서 김화지구 우군에 호응, 잔적 소탕하고 3km 진출
- 김화지구의 유엔군, 금성 방면으로 퇴각 중인 공산군 격퇴
<국내>
- 장면 국무총리, 환율 인상과 38선 정전설 등에 대한 회견
--- 서울 귀환 불가, 38선 정전은 낭설, 국경까지 진격 기대, 미화 공정환산율은 부동
1951년 6월 13일(수) 아주 맑음
<전황>
- 유엔군, 임진강 일대 탐색활동 전개
- 밴 플리트 미 제8군사령관 전선 상황 언명
--- “유엔군은 승리 가능한 군사력 보유하고 있다. 적은 서울 침범능력 상실했다.
임진강 북안의 적은 상당히 견고한 진지를 구축했을 것이다“
<국내>
- 이승만 대통령, 서울 복구상황 시찰 위해 입경, 서울 복구 후 즉시 환도 천명
--- 일선장병의 사기에 만족, 서울 환도는 식량 등 준비 후 실행
<해외>
- 조 중국 소련 전략회담(6.13~14), 38도선에서 정전전략에 합의
1951년 6월 14일(목) 흐림
<전황>
- 국군, 간성 북방 공산군의 2차 공격 격퇴
- 공군, 순천 사리원 등 비행장 폭격
<국내>
- 이승만 대통령, 미 병원선 하벤 호(난치병 치료선) 시찰
- 한강 이북 주민 철거령 해제
1951년 6월 15일(금) 맑음
<전황>
- 국군, 3일간 간성 북방지구의 공산군 반격, 유엔 함대의 엄호사격 하에 격퇴
- 김화 한계 근방 삼림의 공산군, 진격중인 유엔군맹 공격
<국내>
- 군 당국, 한강 이북 농민 철거령 해제
- 철도, 춘천 동두천 문산까지 운행
1951년 6월 16일(토) 흐림-맑음
<전황>
- 금성 남방 진격하는 국군, 완강한 공산군 저항에 부딪힘
- 유엔군, 인천 서북방 북방에서 산발적인 전투
<국내>
- 교통부, 38선 이남 철도 복구 완료 발표
- 국내 철도, 문산-동두천-춘천가지 운행
<해외>
-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북한 파견 위문단 지도와 협조 지시
1951년 6월 17일(일) 아주 맑음
<전황>
- 공산군, 금성 사수 위해 완강한 저항
- 미 제 10군단, 캔사스선 점령
<국내>
- 국회 외무위원장, 신정전안 불가라고 정선설 통박
- 대구에서 38선 정전 반대 국민총궐기대회 개최
- 정일권 육 해 공군 총사령관, 미국 참모학교 유학 계획 표명
1951년 6월 18일(월) 맑음
<전황>
- 강성 서부 침습한 공산군, 공 육 합동으로 격퇴
- 유엔군, 고랑포지구에서 38선 월북
<국내>
- 경북 도내 전염병 환자 급증
- 부산의 소매물가지수, 1947년의 21.5배, 한국전쟁 직전의 6.5배
1951년 6월 19일(화) 흐림-비
<전황>
- 유엔군, 동부전선에서 공산군 포화 뚫고 연초 이래 가장 깊숙이 침투
- 공산군, 김화 철원 북방 신진지에서 퇴각 중지
<국내>
- 권준 준장(전 타이완 국민정부군 제 87사단장) 전선 포로 면담
--- “중공군의 60%가 전 타이완 국민정부군이며 지금도 장제스 총통을 위하여 싸울 것을 희망하고 있다“라고 언명
1951년 6월 20일(수) 맑음-흐림
<전황>
- 원통리 북방 공산군, 저항 약화
<국내>
- 유엔군사령부 미 군표 교환조치로 암시장 비상 구 군표 가격 대폭락
- 조민당 중앙집행위원회, 북한 행정접수정책 입안 결정
1951년 6월 21일(목) 비
<전황>
- 고성 남방에서 교전 후 유리한 고지 탈환
- 화천 동북방, 백암산 부근 공산군 이동 계속
- 유엔군 전차부대, 개성 돌입
<국내>
- 특경대, 국회의사당 잠입한 공비 체포
1951년 6월 22일(금) 맑음-흐림
<전황>
- 인제 북방 공산군의 2차에 걸친 반격 견제
- 노르웨이 의료지원부대 도착
<국내>
- 김훈 상공부장관, 당인리 수색발전소 복구 추진 중 전력대상물자 분실설 낭설로 벌표
- 장면 국무총리, 국회의원 11명에 대한 국민방위군 사건 증인신문을 신익희 국회의장에게 요구하는 공한 봉부
<해외>
- 한국 파병 16개국, ‘6.25에 공동성명’ 발표하지 않기로 결정
- 이탈리아, 대중국 북한 금수에 대하여 유엔의 서유럽 제국과 합류
1951년 6월 23일(토) 맑음-흐림
<전황>
- 전 전선에서 공산군 저항 강화
- 유엔 공군, 처음으로 수풍댐 폭격
<국내>
-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밀수선 철저 단속 언명
- 이순용 내무부장관, “피난민의 서울 귀향은 시기상조, 지시 있을 대가지 대기하라”라고 언명
1951년 6월 24일(일) 흐림-맑음
<전황>
- 전 전선에서 전투 치열, 서부에 공산군 부대 출현
- 평강 근방고지 하루 반나절 격전 후 아군 철수
<국내>
- 이승만 대통령,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이종찬 소장 임명
- 유엔한국재건단, 한국재건사업 착수 성명 발표
1951년 6월 25일(월) 흐림-맑음 – 365일차 -
<전황>
- 공산군, 전 전선에서 소규모 정찰공격 치열
- 서부전선에서 아군 탐색대, 별다른 전투 상황 없음
- 국군의 1년간 피해 상황
<국내>
- 6.25발발 1주년 기념식 각처에서 거행
-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6.25 반공 총궐기대회 거행
1951년 6월 26일(화) 맑음
<전황>
- 간성지구에서 활종 중인 아군 탐색대 각지에서 교전
- 유엔군, 김화 동북방에서 고지 철수 후 재탈환
<국내>
- 이승만 대통령,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접견
- 정부, 소련의; 화평제안에 긴급 국무회의 소집
1951년 6월 27일(수) 맑음-흐림
<전황>
- 유엔군 탐색대, 인제지구 공산군 방어선 일재에서 완강한 저항 조우
<국내>
- 사회부, 유엔군 북진에 다른 남하 피난민 20여 만병 구호
- 공보처장, 정전설에 대한 유언비어 유포 경고 담화
1951년 6월 28일(목) 맑음
<전황>
- 간성 서남방에 내침한 공산군 격퇴
- 양구지구 경미한 교전
<국내>
- 민국당, 38선 정전반대 성명 발표
- 평양방송, ‘38선의 회복’이라는 조건하에 휴전을 수용할 의사가 있다고 보도
1951년 6월 29일(금) 맑음
<전황>
- 전 전선 소강상태
- 유엔군사령부, 공산 측에 휴전회담 제의
<국내>
- 국회본회의, ‘38도선 정전 반대 결의안’ 만장일치로 통과
1951년 6월 30일(토) 아주 맑음
<전황>
- 간성지구에서 활동 중인 아군 탐색대, 각지에서 교전
- 유엔군, 김화 동북방에서 고지 철수 후 재탈환
<국내>
- 이승만 대통령, 정전협상 반대 성명 발표
- 정부, 소련의 화평제안에 긴급 국무회의 소집
<해외>
- 유엔군사령부 각서 발표
“미군 관계자들은 말리크 제안을 신중하게 취급하고 있는 중이며, 38선에서 군대의 철수는 이적행위다”
- 영국 고위관계자, 유엔군이 38선에 항구적 진지 건설 중에 있다고 언명
<주> : 본 자료는 6.25전쟁 1,129일간 일지(1950.6.25~1953.7.27) 내용이며,
- 저자는 부영그룹 창업자인 이중근회장 편저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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