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께 소장도 심하게 대들었소이다. 먼저 넓게 받아들여 주시니 과연 상전
그릇이십니다."
"다 서로 격앙되어서 그런게야. 우리 사이에 무슨 사감이 있겠나?"
"지당하신 말씀이오. 차후에는 나리 영이면 입닥치고 불속에라도 뛰어 듭지
요."
"이사람 보게. 내가 어찌 그런 영을 내리겠나?"
둘이는 마주보고 웃었다. 그리고 나서 엄준상이 슬슬 정색을 했다.
"이보게. 아무래도 정탐군만 보냈다가는 터진 쌀자루에서 쌀 새나가듯이 군
사만 축내고 말 것 같은데 산에 직접 올라가 본 그대 생각은 어떤가?"
"나리 말씀이 맞습니다. 성무산이 겉으로는 민둥하게 보이지만 숲이 깊고 골
짜기가 많아 대군이 들어가도 뿔뿔이 갈라져서 대오가 잡히지도 않습니다."
백충길이 변명할 구실을 만난 터라 입으로 침을 튀기며 말을 이었다.
"신호로 시위전을 쏘았지만 숲에 가려서 잘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덫에
빠진 짐승꼴이 되었지요."
"산적 하나가 능히 군사 열을 당하겠군."
"보이지도 않는 터라 마치 귀신과 싸우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눈을 가늘게 뜬 엄준상이 백충길을 보았다.
"산적을 밖으로 끌어내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어, 어떻게 말씀이오?"
눈을 둥그렇게 뜬 백충길이 묻자 엄준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작년에 왜구를 진성포로 끌어들여 격멸시킨 일이 생각나는가?"
"그렇군요."
백충길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왜선 일곱척을 잡아 불살랐지요."
그리고는 백충길이 정색하고 엄준상을 보았다.
"그러나 백성 20여인이 죽었소이다. 이번에는 어떻게 유인하실 것입니까?"
작년에 방어사 안희손은 진성포에 시장을 형성해서 왜구를 유인했다. 바닷가
에 시장을 만들어 상거래가 활발한 것처럼 꾸몄는데 실제 시장이어서 백성들
은 영문도 모른채로 물건을 들고 멀리서도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난전 중에 20여명이 죽었다.
엄준상이 피식 웃었다.
"이곳에서 시장을 만든다고 산적이 내려오겠는가? 저놈들은 왜구보다도 간교
한데다 도처에 밀정이 있을 것일세."
"그렇습지요."
머리를 끄덕인 백충길도 목소리를 낮췄다.
"정탐대가 오가는 것도 낱낱이 통기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말인데."
청에는 둘 뿐이었고 사방이 탁 트였으므로 이처럼 밀담을 나누기 좋은 장소
는 드물다. 깊은 방에 박히면 문 뒤에 누가 숨어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엄준상이 지긋한 시선으로 백충일을 보았다.
"우리가 영을 받고 급하게 회군한 것처럼 보이게 한 다음에 며칠 지나서 충
주성을 지나 성무산으로 거창한 공물짐을 띄워 보내는 게야. 경상도 상주에
서 떠난 공물짐으로 소문을 내도록 하면 산적 놈들은 좀이 쑤셔서 내려오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것 아닌가?"
"묘안이시오."
"우리는 회군하였다가 앞쪽에서 기다리고 공물짐을 이끄는 패들은 뒤에서 버
티면 놈들은 날개가 달리지 않는 이상 도망치지 못할 걸세."
"과연."
다시 머리를 끄덕인 백충길이 엄준상을 보았다.
"물론 충주부사나 우리 토포군 한테도 발설하지 말아야겠지요?"
"물론이지. 우선 우리 둘이서만 알고 있는 것으로 하세."
그리고는 엄준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백충길을 보았다.
"백부장, 그대가 날랜 군사 50인을 추려서 공물짐을 이끌도록 하게."
"소인이 말씀이오?"
퍼뜩 눈을 치켜떴던 백충길이 이윽고 지긋이 웃었다.
"소인더러 미끼가 되라는 말씀이시군요. 소인이 곧 진성포의 백성 꼴이 되겠
소."
"내가 때맞추어 치고 오면 전혀 피해가 없을 것일세."
"부장 넷중에서 소인만 불러내신 것이 그 일을 맡으라는 것이었소."
몸을 굳힌 백충일이 이번에는 정색했다.
"영이시니 맡겠으나 이번일이 성사되면 소인에게 부사 직임을 물려주신다는
약조를 해주시오."
"허어. 부사가 되려면 전하의 교지가 내려와야 될터인데 일개 부사인 내가
어찌 그럴수가 있겠나?"
"나리와 같이 산적을 소탕한 공1등이 되면 나리는 비어있는 판관자리에 오르
시고 부사 자리가 하나 비게 되지 않습니까? 나리께서 방어사 영감께 추천만
해주시면 부사 자리는 따놓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좋아. 약조했네."
결심한듯 엄준상이 호기있게 말하자 백충길은 머리를 저었다.
"서면으로 써 주시지요. 그것을 가슴에 품고 싸운다면 힘이 열배는 날 것입
니다."
"내가 써주지."
어깨를 편 엄준상이 정색했다.
"조정의 녹을 먹는 신하가 공부터 탐하면 불충이 되겠지만 말일세."
잠시후에 청에서 나온 백충길은 마당을 건너면서 입술을 비틀고 웃었다.
"이놈, 날 산속에서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구나."
대문을 나온 그는 가래를 모아 요란하게 뱉았다.
"네 놈이 실실 웃으면서 날 부르는 걸 보았을 때부터 다 알아보았다."
그때 군관 하나가 허리에 찬 환도를 덜렁거리며 다가와 섰다. 절제사 휘하
때 부터 데리고 다니는 심복 황삼이다.
"나리, 부사께서 뭐라고 하시오?"
황삼이 궁금한 듯 물었다.
■ 음모의 땅
호군 벼슬을 하는 정기수가 개소산 중턱에서 잡힌 것은 아침 묘시도 안되었을 때
였다. 정기수는 성무산에서 15리도 더 멀리 떨어진 개소산을 넘어가다가 잠복하
고 있던 졸개들에게 잡힌 것이다.
그래서 정기수와 그의 하인이 산채로 끌려 왔을 때는 미시가 넘어 있었다. 청에
앉아있던 이반과 하무석은 마당에 꿇어 엎드린 둘이를 보았다. 그들은 맨머리에
짚신 차림이어서 이웃마을 나들이 가는 차림이었는데 등에 맨 짐은 튼실했다.
소두목이 등짐에서 꺼낸 가죽 주머니를 이반에게 내밀며 말했다.
"주머니 안에 상소문과 서신이 하나씩 넣어져 있소이다. 이놈들은 산넘어 마을의
친척집에 간다고 우겼다가 등짐을 빼앗았더니 죽기를 작심한듯 대들었소."
이반이 먼저 서신을 펴서 읽었다. 충추부사 장봉기가 당대의 세도가인 좌의정 한
명회에게 보내는 서신이었다. 서신을 다 읽은 이반이 쓴웃음을 지었다.
"마치 제 아비에게 보내는 서신처럼 구구절절 아부와 하소연이 가득찼구나."
서신을 하무석에게 건네준 이반이 이번에는 왕에게 보내는 상소문을 읽었다.
"이건 더하구나."
마치 더러운 것을 본 것처럼 상소문을 던진 이반이 정기수를 내려다 보았다.
"넌 충주부사 장봉기와 먼 친척이 된다니 살아서 산채를 나갈 수는 없다."
이미 체념을 한듯 정기수는 시선을 내렸으나 하인이 머리를 빳빳하게 들었다.
"대왕께서는 소인좀 보시오."
"이놈아,누가 왕이라더냐?"
이반이 쓴웃음을 짓자 마당에 둘러섰던 졸개들이 왁자하게 웃었고 하무석도 웃음
을 참느라고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그러나 하인의 표정은 절절했다.
"소인은 3대째 정씨댁 씨종으로 내려온 추돌이라고 하오. 이제 주인이 대왕께 잡
혔으니 소인의 종살이를 풀어주시오."
"이놈이 감히 뉘더러 하라마라해?"
하고 옆에 섰던 소두목이 발길질을 했으나 엎어졌던 추돌이가 벌떡 일어나 앉았
다. 뼈대가 굵은 데다 눈빛이 형형했다.
"소인은 팔매질을 잘합니다. 돌멩이만 쥐면 20보 밖의 참새도 맞춰 떨굴 수가 있
소이다."
그리고는 그가 옆에 선 소두목을 흘려 보았다.
"소인이 마음만 먹었다면 이 자들을 때려눕히고 도주할 수 있었소이다. 그렇지만
종살이를 면하려고 일부러 잡힌 것이오."
"이놈이."
하고 열에 받친 소두목이 다시 발을 들었을 때 이반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만둬라."
소두목이 들었던 발을 내려놓자 이반이 추돌을 바라보았다.
"네가 저 나무에 앉은 새를 맞출 수 있느냐?"
이반이 손을 들어 옆쪽 소나무에 앉은 산새들을 가리켰으므로 추돌은 물론이고
모두의 시선이 옮겨갔다. 소나무는 마당에서 이십여보쯤 떨어져 있었는데 가지
위에 산새 두 마리가 이리저리 뛰어 옮겨다니고 있었다.
"예. 돌멩이만 줍시오."
추돌이 선뜻 대답하더니 이반을 올려다 보았다. 얼굴은 넓고 검었지만 눈이 맑았
고 입술은 고집스럽게 닫혀 있다.
"만일 맞춰 떨군다면 소인을 수하로 거두어 주실랍니까?"
"네가 진심이라면 거두어 주마. 허나 속임수를 쓴다면 당장에 죽인다."
그리고는 이반이 소두목에게 일렀다.
"저놈 결박을 풀고 돌멩이를 주도록 해라."
호기심이 일어난 소두목이 서둘러 추돌의 결박을 푸는 동안 정기수는 똥 먹은 얼
굴로 가만 있었다.
"여기있다."
졸개 두엇이 산채에서 쓰던 돌멩이 10여개를 추돌의 앞에다 던져 놓았을 때 마당
에는 여자와 아이들까지 모였다. 구경거리가 생긴 것이다.
추돌이 돌멩이를 손바닥에 쥐어 보더니 두개를 고르고는 이반을 보았다.
"대왕님,던질까요?"
또 대왕 소리를 했으나 이번에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좋다. 던져라"
이반이 말했을 때 추돌은 소나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손에 쥔 돌멩이
를 만지작거리면서 새들을 노려 보았는데 그 순간 마당에 모인 남녀노소는 입을
다물었다.
산새 두 마리는 아직도 이쪽 저쪽 가지 위로 뛰어 다니고 있었지만 작아서 콩알
만하게 보였다.
그때 추돌이 한걸음 발을 앞으로 뻗더니 뒤로 젖혔던 손을 뿌렸다.
"에잇!"
짧은 기합소리가 났고 그 다음 순간 왼손에 쥐었던 돌멩이를 오른손으로 옮겨쥔
추돌은 다시 팔매질을 했다.
"아앗!"
탄성같은 외침들이 그때 모여선 남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정통으로 돌멩이에
맞은 산새가 부연 깃털을 흩날리며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마리의 산새
도 이어서 떨어졌다.
"대단합니다."
하무석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이반을 보았다.
"저놈 쓸모가 많겠소이다."
이제 모두의 시선이 이반에게로 모여졌다. 모두 감탄한 얼굴들이어서 이반으로
부터 선처가 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반이 추돌을 내려다 보았다.
"넌 검을 쓸줄 아느냐?"
"예. 혼자서 익혔지만 두세명은 당할 수 있습니다. 대왕님."
"넌 두목감이다."
지그시 웃은 이반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청끝에 섰다. 군중들이 수근거리며 이
반과 추돌을 번갈아 보았다. 대부분이 밝은 표정이다.
"그런 무술을 갖고 있으면서 3대째 씨종으로 머물고 있었다니 아깝구나."
이반의 말에 추돌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이제야 기회를 잡은 것 아니겠소이까?"
"그런데 내가 듣자하니 충주부사 장봉기가 전에 이천현령이었을 때 데리고온 군
관 하나가 돌팔매를 잘 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반이 허리춤에서 한뼘쯤 되어보이는 단검을 꺼내 쥐었다.
"그 군관은 장봉기의 총애를 받아 한양 본가와의 심부름이나 하면서 지난다던데
넌 그자를 아느냐?"
그 순간 마당 안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져서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이반의 말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그 군관의 이름이 박길오라고 들었다. 뼈대가 크고 눈빛이 강한 용모에다 계집
을 밝혀서 장봉기의 계집종은 다 건드렸다고 하더구나."
"소인은 모릅니다."
그리고는 추돌이 털썩 한쪽 무릎을 꿇더니 땅바닥에 두 손을 짚었다.
"처음 듣는 말씀이오."
그러자 이반이 빙긋 웃었다.
"교활한놈, 무릎을 꿇으면서 벌써 손에 돌멩이를 쥐는구나. 일어나면서 나한테
돌멩이를 뿌리겠지. 거리가 10보도 안되니 내 미간을 명중시킬 수 있겠구나."
그러자 마당 안은 살기가 뻗쳐져서 군상들은 몸을 굳혔으며 가깝게 서 있던 소
두목과 졸개들도 침만 삼켰다. 이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 이름은 박길오다. 사태가 여의치 못하면 거짓 투항하여 두령을 암살하거나
토포군을 끌어들이려는 계략이겠지. 자 일어나면서 돌을 뿌려라. "
이반이 단검을 쥔 손을 내리고는 가슴을 폈다.
"내 미간을 맞춰 보거라."
이반의 말이 끝난 순간에 추돌이 앉은 채로 상반신을 비틀면서 손에 쥐었던 돌멩
이를 전광석화처럼 뿌렸으므로 모두 입만 딱 벌렸을 뿐이다.
하무석도 눈을 부릅떴다. 너무 빨라서 돌멩이도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아앗!"
군상들 사이에서 일시에 비명에 가까운 고함소리가 났고 모두의 시선이 이반에게
로 모여졌다. 그저 눈 깜박할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반은 머리를 조금 비튼채 그대로 서 있었는데 입끝에는 웃음기가 떠올
라 있었다. 그때였다
"어엇!"
이번에는 굵은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으므로 모두의 시선이 돌려졌다. 마당에서
추돌과 가장 가깝게 서 있던 소두목이 지른 외침이었다.
그 순간 군상들은 일제히 눈을 부릅떴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반쯤 일어서 있던
추돌이 천천히 뒤로 넘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마 한복판에는 단검이 깊게 박혀 겨우 손잡이만 나와 있었다. 추돌이
뒤로 반듯이 넘어졌을 때 이반이 정색하고 말했다.
"저 놈의 시체는 까마귀 먹이로 버려라."
이반의 시선이 정기수에게로 옮겨졌다.
"저놈의 본색이 군관 박길오가 아니냐?"
그러자 정기수가 진땀을 흘리면서 대답했다.
"맞소이다. 소인의 목숨이나 붙여주시오."
"토포사도 이 밀지가 가는 것을 아느냐?"
"모릅니다."
"충주부 안에서도 토포군과 내분이 일어났구나."
쓴웃음을 지은 이반이 턱으로 정기수를 가리켰다.
"이놈을 가둬두어라."
얼이 빠져있던 군상들이 흩어지고 청에 하무석과 둘이 남았을 때 소두목이 된 최
개복이 청 끝에 와서 섰다.
"대두령께 드릴 말씀이 있소이다."
"뭐냐?"
이반이 부드럽게 물었다. 이번 일의 공 1등이라면 최개복이다. 박길오가 호군 정
기수를 따라간다는 것도 각돌이를 통해 최개복이 알아낸 것이다.
"소인은 이만 내려갈까 합니다. 성안에 나타나지 않으면 오히려 의심을 받을 것
같소이다."
"그렇겠다."
머리를 끄덕인 이반이 하무석을 보았다.
"최개복에게 상급을 주도록 하게. 오늘 일의 1등 공을 세웠네."
"물론입지요."
하무석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각돌이한테 줄 상급까지 같이 싸 보내야 겠습니다."
그날밤 자시가 넘었을 때 침소로 돌아온 이반은 기다리고 있던 한운을 보자 얼굴
에 웃음을 띄웠다.
"네가 사내맛을 안 것 같구나."
"술상을 봐 놓았습니다."
"술생각은 없다."
털썩 보료 위에 앉은 이반이 길게 숨을 뱉었다. 이제까지 하무석과 소두목들을
모아 회의를 한 것이다. 한운이 다소곳이 다가오더니 이반의 저고리를 벗겼다.
"무슨 회의가 밤늦도록 길었습니까?"
"토포군이 급하게 회군을 한다니 우선 급한 불을 꺼졌다. 그래서 향후 대비책을
숙의한 것이야."
"토포군이 회군을 합니까?"
한온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럼 우리가 승전을 한 것이 아닙니까?"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정색한 이반이 한온을 보았다.
"하지만 방비만 튼튼히 하면 산채 식구들은 무사할 것이야."
"모두 나으리 은덕입니다."
한온이 말하자 이반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내일 아침에 산채를 떠난다."
"산채를 떠나시다니요?"
눈을 둥그렇게 뜬 한온이 바짝 다가앉았다.
"어딜 다녀오시게요?"
"경상도로."
이반이 한온을 바라보며 웃었다.
"조선땅 남쪽 끝에 가서 왜구를 만나고 싶다."
다음날 아침, 이반은 등짐 하나만 지고 산채를 떠났다. 두령 하무석이 산 아래
까지 배웅을 해주었는데 못내 서운한지 이반과 헤어질 때에는 눈에 물기까지 배
어났다.
"나리, 한달 후에는 꼭 돌아오셔야 하오. 오지 않으시면 소인이 경상도 땅을 헤
집고 다닐 것이오."
하무석이 몇번째인지도 모르게 다짐을 받으려고 들었으므로 이반은 머리를 끄덕
였다. 어젯밤에 한온은 밤이 새도록 품에 안겨 똑같은 다짐을 받았던 것이다.
"절대로 과하게 욕심을 부리지 말고 당분간은 죽은 듯이 숨어있게."
"눈앞에 금덩이가 보여도 나서지 않을 것이니 나리께서나 몸 보중하시오."
하무석이 등에 매고 있던 보퉁이를 풀더니 앞으로 내밀었다.
"이건 나리께서 장봉기의 벽장에서 꺼내오신 금입니다. 노자로 쓰시지요."
"나는 노자가 넉넉해."
정색한 이반이 손을 저었지만 하무석은 이반의 등짐 안에 보퉁이를 쑤셔넣었다.
아이 머리통 만한 금덩이 세개를 사용하기 쉽도록 금편으로 쪼개 놓았는데 금편
조각이 천개가 넘었다.
"나리,황제폐하를 생각하셔서 부디 몸을 보중하시오."
이반을 향해 허리를 굽혀보인 하무석이 마침내 눈물을 떨구었다. 콧등이 시큰해
진 이반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어느덧 조선땅에 발을 디딘 지 두달이 지나 선선한 날씨의 가을이었다. 산은 단
풍으로 물들었고 파란 하늘 위로 흰구름 두어점이 둥실 떠 있었다. 넓게 트인 북
쪽 벌판에서는 언제나 바람이 세어서 이런 물속 같이 깊고 파란 하늘은 본 적이
없다.
충주성을 좌측으로 끼고 돌아 이반은 그날 저녁 때까지 영주성 북쪽의 역참에 이
르렀다. 하루에 150리를 걸었으니 보통 사람의 두배를 걸은 셈이다.
고을은 꽤 컸고 역참에는 역졸들이 오가고 있었는데 뒤쪽으로 창고처럼 보이는
큰 역사가 세동이나 세워졌다. 역마가 가끔씩 요란한 발굽소리를 내며 길을 지났
고 넓은 고을 안은 활기에 차 있었다. 이곳이 경상도 북변의 요충지인 영주역참
인 것이다.
이반이 거리의 제법 수선스런 주막 안으로 들어서자 계집종이 쪼르르 달려나왔
다.
"술상을 봐 드릴까요? 국밥도 있습니다."
"시장하고 술도 고프니 다 가져오너라."
"국밥까지 끼어서 다섯푼입니다요."
그리고는 계집종이 몸을 돌렸다. 주막 안에는 손님들이 가득차 있었는데 역졸도
보였고 이반처럼 먼 길을 다니는 차림새의 행색도 서넛이었다. 이반이 짚신에 감
발을 단단히 맨 일행의 옆에 자리 잡았을 때 사내 하나가 힐끗 시선을 주었다.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먼길 가시는 길이시오?"
하고 사내가 먼저 인사를 텄으므로 이반도 대꾸했다.
"예. 충주성에서 이틀 걸려 왔습니다."
"허, 충주성에 토포군이 가득차 있다던데 금귀는 잡았답디까?"
"아직 잡지 못한 것 같소."
"금귀는 영주성에서도 출몰했다네."
옆쪽 사내 하나가 나섰다.
"보름 전에는 전라도에서도 출몰했고."
"인심이 사나우면 다 그런게여."
첫 사내가 다시 힐끗 시선을 주더니 말을 받았다. 이십 오륙세 정도의 기골이 다
부진 사내였는데 눈빛이 올때마다 찌르는 느낌이어서 이반은 호흡을 가다듬고는
스스로의 눈빛을 가라앉혔다.
무술을 쌓을수록 가장 표가 나는 부분이 눈이다. 그 눈빛으로 공부의 정도까지
측량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내는 숨기지도 않고 마구 내뿜고 있다.
국밥을 곁들인 술상이 날라져 왔으므로 이반은 허기진 배를 채웠다. 영주역참은
고려때 세워진 군사 요충지로 옛적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접경지역이었는데 병풍
처럼 산줄기가 둘러 쳐져서 이곳만 넘으면 경기도 접경까지 물 내려가듯 진군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산등성이마다 봉화대가 만들어졌고 역참에서 파견된 수비군이 보름 간격
으로 교대를 한다. 이반이 술 한병을 다 비웠을 때였다.
동행들과 노닥거리던 예의 눈빛 센 사내가 몸을 돌려 이반을 보았다.
"오늘은 이곳에서 묵고 가시려오?"
"꼭 이곳에서 묵을 사유가 없소이다. 저잣거리를 둘러보고나서 정하겠소."
"저녁에 돌아다니시다가 술취한 군사들을 만나면 봉변 당하시기 쉽소."
"태평성대에 군사가 백성을 괴롭히다니요? 난 처음 듣소."
그러자 사내가 싱긋 웃었다.
"통성명이 늦었소. 난 김 회라고 하오."
"난 한양에 사는 박 득이라고 합니다."
이반이 이번에는 가명으로 박득을 썼다.
술청 안으로 군사 서너명이 들어오면서 소란스러워졌다. 김회의 말대로 술취한
군사들이었는데 손님들의 술상을 밀어 제끼거나 욕설을 내뱉는 통에 분위기는 대
번에 흉흉해졌다.
두어군데 손님들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주모가 주걱을 흔들며 악다구니를 쓰는 바
람에 난장판이 되었다.
"같이 나가시겠소?"
김회가 은근한 시선으로 이반을 보며 물었다. 그의 동행 세명도 자리에서 일어서
는 중이었다.
"호젓한데다 술시중 드는 색시가 고운 곳이 있소."
"이곳에 그런 곳도 있소?"
"군량이 집산된 곳이라 쥐도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오리도 많은 곳이오. 그러니
술과 계집이 꼬이는 수 밖에."
쓴웃음을 지은 이반이 등짐을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모에게 다섯푼을
건네 줄 적에 옆쪽에서 건드리던 군사가 실눈을 뜨고 이반을 보았다.
곰보 상판에 주먹코였는데 체구가 우람했다.
"네 놈은 어디서 온놈이냐?"
그러자 김회가 얼른 가운데에 끼어 들었다.
"우린 아래쪽 백면고을에 삽니다. 유집장댁 소금을 구하고 오는 길이요."
"유집장이라."
입맛을 다신 곰보가 턱짓을 했다.
"유집장 위세믿고 나대다간 경을 칠줄 알아라. 썩 나가."
일행과 함께 주막을 나왔을 때 김회가 쓴웃음을 지은 얼굴로 이반을 보았다.
"유집장이란 역참의 창고를 관리했던 군기사 휘하의 부장이었는데 거금을 모은
다음 관직을 떠나 백면고을에 주저앉았지요. 지금도 역참의 판관과 죽이 맞아 갖
은 노략질을 다 하고 있소."
"어찌 그리 잘 아시오?"
저잣거리를 같이 걸으며 이반이 묻자 김회가 힐끗 시선을 주었다.
"자주 내왕을 하다보니 귀에 들립니다."
"장사를 하시오?"
"우리는 명과 왜국의 물품을 들여와 파는 무역상이오."
정색한 김회가 뒤를 따르는 동행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이번에 한양성 대갓집에다 꽤 많은 물품을 팔았소. 이문이 열배는 남는 장사이
지."
"한양성에서 돌아오시는 길이군."
"무역선이 합포에 있소."
밤이었지만 꽤 번잡한 저잣거리를 지나 김회가 안내해간 곳은 아래쪽 낮은 언덕
밑에 세워진 꽤 큰 저택이었다.
기와가 반듯하게 올라갔고 담장도 튼실해서 어지간한 대갓집처럼 보였는데 김회
는 거침없이 반쯤 열린 대문을 밀고 앞장 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느냐?"
마당에 선 김회가 소리쳐 부르자 부엌에서 계집종이 달려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이 있느냐?"
불이 켜진 방들을 흘겨보며 김회가 목소리를 높인 것은 안에 있는 사람들이 들으
라는 수작이었다. 계집종이 미처 대꾸를 하기 전에 안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여인
하나가 마루로 나왔다.
"에구, 나리께서 오셨군요."
맑은 목소리가 어둠에 덮인 마당을 울렸다. 여자가 문에서 비껴서며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어제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그동안 무고했는가?"
어깨를 편 김회가 점잔을 빼더니 옆에 선 이반을 가리켰다.
"오는 중에 손님을 모셔왔네. 술상을 잘 차려오게."
"그러믄요. 어서 드십시오."
이반은 김회를 따라 방으로 들어섰는데 안은 장식이 호화스러웠고 넓었다. 대황
초가 사방에 켜져 있어서 환했다. 일행까지 합해 사내 다섯이 둘러 앉았을 때 여
인이 이반을 향해 두손을 방바닥에 짚으며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수옥이라고 합니다. 물수(水)자에다 구슬 옥(玉)자를 씁지요."
"난 박가일세."
성만 밝힌 이반이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갸름한 얼굴에 피부는 비
단처럼 윤기가 났고 오뚝 선 콧날에다 입술은 비맞은 앵두처럼 탐스러웠다. 눈이
번쩍 뜨일만한 미인이다. 이반의 시선을 받은 수옥이 시선을 떼지 않고 희미하게
웃었다.
"허,이사람 교태를 부리는 것 보게,나는 아예 안중에도 없구나."
옆에 앉은 김회가 부러 시샘을 낸듯 말하자 수옥이 살짝 눈을 흘겼다.
"나리께선 연홍이가 있지 않습니까?"
"어허,그럼 우린 사람도 아니란 말인가?"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일행 중의 하나가 목소리를 높이자 수옥이 손으로 입을 가
리며 웃었다. 구슬이 그릇 안에서 굴러가는듯한 웃음소리가 났다.
"나중에 혼자들 오시면 다 상대를 해 드리지요."
그리고는 수옥이 술상을 준비하겠다며 방을 나갔으므로 김회가 정색하고 일행들
을 소개했다.
"이쪽은 무역선 선장인 오춘이고 이쪽들은 내 수하 사람들이오."
내가 사람도 아니냐고 투정했던 텁석부리가 선장이었다. 선장 오춘이 이반을 향
해 빙긋 웃었다.
"내가 명에도 여러번 갔지만 수옥이 같은 절색은 드뭅니다. 박공께 추파를 보내
는 걸 보니 난 이제까지 헛바람만 일으킨 것 같소."
"난 저런 미색은 싫습니다."
정색한 이반이 머리를 저었다.
"마당에서 가꾼 화초보다 산과 들에서 자라난 야생화가 더 곱습디다."
"어허, 과연."
머리를 끄덕인 김회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반을 보았다.
"박공은 유람 다니신다고 하셨는데 우리하고 같이 무역을 하지 않으실라오?"
이반의 시선을 받은 김회가 빙긋 웃었다.
"난 박공의 눈빛을 보고 박공의 무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대번에 알았소. 그만하
면 우리하고 동업할만 합디다."
"그것만으로 충분할까요?"
이반도 웃는 얼굴로 김회를 보았다.
"자금도 있어야할 것 아니겠소? 내 등짐이 어지간히 무겁다는 것도 보셨겠지…."
"알고 있소이다."
정색한 김회가 똑바로 이반을 보았다.
"내 짐작으로는 금괴가 너댓개는 들어 있는 것 같던데 맞습니까?"
"목침만한 금괴 셋을 금편으로 쪼개 넣었으니 거의 맞췄소."
"그 많은 재물을 갖고 무얼하시려오? "
"글쎄 굶는 백성들이나 구제를 할까?"
입술 끝을 비틀고 웃은 이반이 지긋이 김회를 바라보았다.
"아니면 군사를 길러 반역을 할까?"
"혹시 성무산에서 내려오신 분이 아니시오?"
하고 불쑥 오춘이 물었으므로 이반이 머리를 들었다. 방안에는 이미 팽팽한 긴장
감이 덮여서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네 사내의 시선을 받은 이반이 다시 웃었다.
"그렇게 짐작하는 이유를 들읍시다."
"첫째로 박공의 눈빛에서 살기를 보았기 때문이고, 물론 박공께서도 내 눈빛을
읽으셨겠지만 말이오."
김회가 차분하게 말했다.
"우린 관인(官人)인지 아닌지를 금방 압니다. 박공은 관인은 아니시오."
"그것뿐이오?"
"내가 한양에서 오는 길입니다. 한양성 안팎으로 좌악 깔린 금귀의 용모파기가
박공하고 딱 닮았습니다."
"허어. 그런가?"
"더욱이 무겁게 늘어진 등짐은 돌멩이를 넣은 것 같았는데 누가 돌멩이를 넣고
다니겠소? 우린 대번에 압니다."
"금에서 냄새라도 나나?"
"그리고 성무산의 금귀를 토벌하려고 토포군이 진을 치고 있소. 박공은 그쪽에서
오셨소이다."
"내가 보기에 그대들도 무역상은 아니야."
이반이 던지듯이 말했다.
"네 사람 모두 무술의 고수인데다 등짐에는 병장기가 들어있어. 단검에다 표창까
지 쇠붙이가 잔뜩 들어있는것 같군."
네 사내를 둘러본 이반이 어깨를 폈다.
"그렇다. 내가 금귀다."
눈빛은 곧 그 사람의 정기를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무인들은 칼을 겨누고는
상대방의 눈빛으로 강약과 허실을 판단한다. 이반의 시선을 차례로 받은 사내들
의 얼굴이 굳어졌다.
모두 한차례씩 승부를 낸것 처럼 숨을 길게 몰아쉬거나 어깨를 늘어뜨렸는데 이
반의 기세를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회가 상체를 펴더니 이반에게 말했다.
"말로만 듣던 금귀를 이렇게 뵙게 되어 광영이올시다. 백성들은 금귀를 의적으로
부르고 있지요. 정체를 밝히셨으니 소인도 털어 놓겠소이다."
정색한 그가 말을 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지기들을 만나는가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