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산 보광사 주지 가산 선우스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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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보광사에서 수행과 포교를 하고 있는 선우스님은 1986년부터 1998년까지 10년 넘게 미국 필라델피아 원각사 보스톤 범어사, 북가주 보림사 등에서 포교활동을 한 미국과 인연 깊은 스님이다. 선우스님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기자; 김 형근 사장님의 인터뷰 부탁으로 스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스님, 무엇보다 운허 큰스님과의 인연이 크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인연부터 시작을 하면 좋겠습니다.
스님; 예, 말씀하신대로 운허 큰스님께서는 저의 상 노스님이셨습니다. 제 은사스님은 화담당 유덕스님이고요.
기자; 미국 가시기전 한국에서는 어떤 수행이나 포교활동을 하셨는지요?
스님; 어려서 동진 출가하여 상 노스님이신 운허 큰스님의 임종시봉을 마치고 법주사 강원에서 운성 큰스님께 강을 받다가 강남 봉은사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봉은사에는 영암스님께서 주석하셨고, 현재 조계종 원로회 의장이신 밀운스님께서 주지 소임을 보고 계셨습니다. 법정스님께서도 주석하셨지요. 여러 큰 스님들 모시며 알게 모르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때 봉은사에 동국역경원 역장이 있어, 스님들은 물론 기라성 같은 역경위원께서 상주 하셨으니 어린나이에 훌륭하신 스님들을 모시고 산 것이 큰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무렵 봉은사는 도심의 대 가람이었음에도 포교의 기능이 성인 중심에 국한돼 있어 제 입장에서는 혁신적인 기획으로 유아부, 초등부, 중등부법회를 82년에 창립하여 86년까지 지도법사 소임이 본 것이 포교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름불교학교를 할 때면 관광버스를 5,60대를 빌려 가곤 했고, 해인사 홍제암에 갔을 때는 홍제암 전체를 사용해야 했었지요.
성철 큰스님께서 아이들을 좋아하셔서 저희는 3천배 할 필요도 없이 늘 성철 큰스님을 근거리에서 친견했고, 칭찬도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아도 뿌듯한 마음이 듭니다.
기자; 미주현대불교 사장님과의 인연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김형근 사장님과의 인연은 원각사에 법안 스님께서 계실 때였습니다. 젊은 사람이 절일을 열심히 하면서 법안스님 시봉도 잘하고, 특히 법문이나, 절 소식등 여러 가지를 알리는 원각사보를 만들던 시절, 뉴욕 원각사를 방문 했을 때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저 자신도 미국에 가기 전에 민주화를 통한 사회운동, 민불련 같은 불교 사회 운동, 잘은 모르지만 어설 프게나마 발을 들여 놓은 상태였지요. 김 사장님이 사회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생각이 나는데 김 사장은 발이 넓고 국제적 인사들과도 교류가 참 많았습니다. 지금도 그때 맺은 인연이 그립습니다. 북한 방문 문제, 독일에 머물던 황석영 선생, 목사님 출신으로 민주화 운동을 이끌던 한호석 선생 등 새삼 다들 보고 싶네요.
그러던 가운데 어느날 미주 현대불교라는 월간지를 창간하겠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뻤습니다. 그 때 미국내의 한국 사찰이 약 100여 개가 있었는데, 서로간의 소통이 절실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그만 도움이라도 거들고 싶다는 마음에, 서로의 인연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자; 스님께서는 몇 년도에 미국에 가셨었는지요?
스님; 1986년 11월 쯤이었습니다.
기자; 처음 정착하신 곳은 어디셨는지요?
스님; 카멜이었습니다.
기자; 어느 절이었는지요?
스님; 운허 큰스님 상좌이셨던, 서운 스님은 장좌불와와, 생식을 오래하신 수행자셨습니다. 스님께서 운허 큰스님 열반 때 한국에 오셔서, 제가 큰스님 오래 모시고 시봉도 잘했다고 하시며, “젊을 때 미국에 와보면 여러 가지 경험도 쌓을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다”시면서 미국으로 초청해 주셨습니다.
보림사라는 절을 창건 하신다고 법당에 모실 성보를 준비해 오라고 해서, 부처님과 탱화등을 준비해 미국으로 갔죠. 보림사는 창건 초기라 여러모로 형편이 어려웠고, 절도 미등록 상태였습니다.영주권 신청도 어렵고 학교를 들어가기에도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나름 영어도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지요. 그러던 어느날 필라델피아 원각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곳의 주지셨던 지명스님께서 공부에 전념해야 하니 저에게 절 소임을 맡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지명스님께서는 박사논문 쓰는 중이어서 여념이 없으셨어요. 그때가 보림사에서 지낸지 6개월정도 였는데 필라델피아로 가게 되었습니다.
기자; 원각사에서는 어떤 원력으로 지내셨는지요?
스님; 우선 조석예불과 일반 대중법회를 보는데, 전 그 때 일반대중 법회는 처음이라 막 다리가 떨리고 말도 잘 안 나왔어요. 성심껏 보긴 했으나 그건 제 생각일 뿐이고, 제가 자신 있는 일을 찾기 시작 했지요. 주말이면 부모와 함께 몇몇 학생들이 보이는 거예요. 아 이거다 싶어 바로 학생법회와 청년법회를 창립했습니다. 처음에는 인원이 적어 청년 법회와 학생 법회를 나누어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때, 필라델피아에서는 1년에 한번 한인 전체 체육대회를 열었습니다. 한국교회가 70여 개 정도 있었는데, 축구다 볼링이다 했다 하면 저희 원각사 청소년들이 늘 준우승을 할 정도로 모두가 열심히 했습니다. 음악을 아주 잘하는 인재들도 모여 청년 합창단까지 창단을 했습니다. 그 때 합창 지도를 맡았던 방 항식 불자님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방항식 불자는 저와도 연배가 비슷한 20대 후반이었습니다. 부처님 오신날 봉축 대법회를 봉행할 때, 미국 전역의 한국 사찰 가운데에서, 청소년들이 합창으로 봉행한 곳은 필라델피아 원각사가 처음이었을 겁니다. 모두가 씩씩하고 열정적이었고, 단합이 정말 잘 되었죠.
기자; 한국과는 다른 교포 학생 불자들에게 특별히 가르침을 주시려 애쓴 것이 있으신지요?
스님; 2세들이라 저의 영어가 부족하여 매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그 청소년들과 친해지다 보니,점차 서로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되었고, 덕분에 한 두 마디만 해도 서로의 뜻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정이 깊어졌습니다. ‘스님이 나의 최고의 친구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정말 행복하고 보람을 느꼈습니다.
원각사는 지하실이 참 넓어서 운동기구도 갖추어 놓았고, 자연스레 청소년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말을 쓰려고 노력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청소년들을 위한 한글학교가 된 셈이기도 했고요.
제가 미국에 갈 때만 해도 1년 단수 여권이었는데, 미국에서 포교를 계속 하려면 영주권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과 정신없이 지내는 사이에 그만 여권이 만기를 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저를 도와준 거사님이 있었습니다. ROTC로 제대하고 직장을 다니다가 5.18 광주항쟁, 전두환 정권의 독재가 싫어 미국으로 유학하여 미국 기업에 취업한 서법연 거사였습니다. 그분의 도움으로 여권을 살리고 비자 연장을 받아 영주권 신청을 했습니다. 그 기간이 1년 반 정도 걸렸고, 덕분에 그 사이 학생법회와 소임에 전념할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영주권을 받을 즈음, 89년 10월 청혜(정윤)스님께서 주지 소임을 맡게 되셔서 저는 숭산 큰스님께서 조실로 계시던 프로빈덴스 관음선원에 방부를 드려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 즈음 김 형근 사장님이 본격적으로 미주현대불교를 창간하셨고, 함께 그 일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김 사장 말이, 창간을 하긴 했는데, 운영할 방법이 없다고 하소연을 하더라고요. 출판과 인쇄비며 운송비까지 책임을 지라는 거예요, 저도 젊고 공부나 하던 처지라 날벼락이랄까, 돈이 얼마가 들지도 몰랐지만 아무튼 거절할 수도 없었고, 책임을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황당한 일이긴 했지만, 김사장의 그런 부탁이랄까, 명령이랄까, 지금 생각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렇게 나온 미주현대불교, 내용도 형식도 아무튼 최고의 수준이었습니다. 그 때 함께 해 주셨던 스님과 불자님들, 그분들의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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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한국에는 언제 어떤 계기로 돌아 오셨는지요?
스님; 그뒤 미국에서 공부를 지속 할 수 없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가장 큰 이유로는 은사스님께 사정이 생겨 학비 지원도 끊겼고, 이런 저런 일들이 생겨 보스톤의 범어사로 가서 잠시 머물게 되었습니다. 범어사 건물이 너무 낡아 보수 작업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프로비덴스 관음선원에서 함께 살던 효성스님과 함께 갔지요. 그 때 범어사 주지는 지광 스님이었고 스님이 한 분이 더 계셨어요. 그러던 차에 제 노스님이시고 한국불교 교학의 중흥을 이루신 봉선사 조실 월운 큰스님을 그 도량에 몇일 모시기도 했지요. 그 사이 효성스님과 유학생, 몇 안되는 불자들, 그리고 목수일을 잘 아는 분의 도움을 얻어 절 보수 공사를 회향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한국에서 사제 스님이 와서 함께 만행삼아 15만 마일을 달리면서 미국을 종횡무진 하면서 미국산천을 공부하며 광대무변함이 무었인가 아주 조그마한 맛을 보았습니다.
그 후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 갔을 때, 보림사에 삼묵스님께서 주지를 살고 계셨는데 저보고 주지를 맡아 달라고 하셨던 것을 거절하다, 두 세 번 째의 보림사 방문 때 삼묵스님께서 아예 절을 떠나 버리셔서, 제가 한국에서 처음 미국 올 때에 모셔 왔던 부처님을 모시고 다시 불사와 포교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주현대불교의 10호부터 연재를 쓰면서 불사 포교를 시작 하였지요. 김 사장께서도 문서 포교를 하시느라 고생이 정말 많았습니다. 불평, 불만의 소리도 있었지만,김사장의 충정을 아는지라 무슨 소리를 하던 상관을 하지 않았습니다. 소통이 필요한 시대에, 매체가 반드시 필요한 법이고, 미주현대불교를 번듯한 매체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기자; 대륙을 종횡무진하시고 샌프란씨스코에 정착하시면서 어떤 기획이나 비전을 갖고 계셨는지요?
스님: 보림사의 구심점은 한국불교이고 그 보림사는 미국에 있고, 그곳에 불자는 물론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절을 찾아와 옹달샘인양 목을 축이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걸 생각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척박하고 열악한 환경에, 월세조차 내기 힘든 처지였습니다. 돌이켜보면 무모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원력이 있다면 못할 일이 없다는 배짱도 있었죠. 그래서 그간의 인연을 빌어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시내 호텔에 약 1,500평이 되는 홀을 빌려 2주동안 전시를 했습니다. 전시한 작품만도 1,280점이었습니다. 전시회를 앞두고 백일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한국에 갔더니, 수많은 작가들이 흔연히 나서서 작품을 만들어 보시해 주셨습니다. 최고의 전시회였지요. 그렇게 모은 15만달러의 돈으로 건물도 사고 불사도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문화원의 도움도 컸고요, 무엇보다 후손들에게 불교의 가르침,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알려 주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던중 1997년 1월에 은사스님께서 암 투병을 하고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국에 가 보니 이미 암이 심하게 진행된 상태여서 의사조차 치료를 포기 한 상태였습니다. 그 때 샌프란시스코 메디컬센터에 ‘견도향’이라는 분이 보조의학 공부를 하면서 우리 절에 자주 오시곤 했었죠. 동국대 간호학과 교수생활을 오래 하셨던 분입니다. 그분의 도움으로 미국과 국내의 보조의학을 다방으로 구해 생즙을 해드렸는데, 그만 그해 11월 중순(음력으로 10월 23일)에 은사스님께서 열반하셨습니다. 그 사이 미국을 14번 왕복 했더군요. 마음이 앞서긴 했습니다만, 만리타국에 사느라 때를 놓친 것이 지금도 한이 됩니다.
월운 큰스님께서 은사가 열반했으니 맏상좌인 제가 한국으로 돌아 올 것을 권유하셔서 1998년 3월 미국으로 돌아와 후사를 사제 도행스님께 위임하고 귀국하였습니다.
기자; 그 때에 이 보광사로 오셨습니까?
스님; 이 절은 고려 전기에 창건된 절인데 일제와 육이오를 겪으면서 거의 패허가 되었습니다. 은사스님께서 사재를 들여 이 절의 토지를 사들여 중창을 시작하셨죠. 은사스님께서는 상좌들의 교육과 미래를 볼 때 길한 곳이라 확신하여 마련한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보광사에서 열반하셨는데, 당시는 이 요사체도 변변치 않았고, 토담집이 하나 법당은 기둥만 있었고 삼성각은 다 쓰러져가고 있었으며, 심지어 초상을 치루는데 밥 할 곳도 없었습니다. 저희 은사스님께서는 무척 청빈하신 분이셨습니다. 체격은 외소하신 분이셨지만 강단이 있으셔서 월운스님을 모시고 봉선사 본사 재건에 거의 평생을 바쳐 불사를 하셨습니다. 지금 보광사의 저 넓은 도량은 본래 산이였습니다.포크레인과 트럭을 장만하여 흙을 퍼 나르고 하여 이 만큼이나마 도량의 형세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간 법당, 삼성각, 요사체, 공양간 등도 차례로 준공을 보았고요. 공양간의 벽돌은 제가 손수 벽돌을 찍어 만들기도 했습니다. 지금 보이는 저 위의 흙도 지형에 맞는 풍수를 만들기 위해 파내고 작은 산을 쌓은 것이고요, 그 앞으로 큰 법당을 새로 건립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귀국한지도 벌써 18년인데, 2003년에 한번 다녀오고 지금껏 한국에 살고 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