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내가 아닙니다
아내 앞에서 나는 나를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아내의 남편입니다.
명세서만 적힌 돈 없는 월급 봉투를
아내에게 내밀며 내 능력 부족으로
당신을 고생시킨다고 말하며
겸연쩍어하는 아내의 무능력한 남편입니다.
세 아이의 엄마로 힘들어하는 아내의
가사일 을 도우며 내 피곤함을 감춥니다.
그래도 함께 살아주는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
나는 아내의 말을 잘 듣는 착한 남편입니다.
2
나는 내가 아닙니다.
아이들 앞에서 나는 나를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세 아이의 아빠입니다.
요것 조것 조잘대는 막내의 물음에
만사를 제쳐놓고 대답부터 해야하고
이제는 고등학생이 된 큰놈들 때문에
컴퓨터앞에 가보지도 못합니다.
막내의 수준에 맞춰 놀이 동산도 가고
큰놈들 학교 수행평가를 위해
자료도 찾고, 답사도 가야합니다.
내 늘어진 어깨에 매달린 무거운 아이들
레슨비, 학원비가 나를 목죄어 와서
교복도 얻어 입히며,
외식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생일날 케이크 하나 꽃 한 송이 챙겨주지 못하고,
초코파이에 쓰다만 몽땅 초에 촛불을 켜고
박수만 크게 치는 아빠,
나는 그들을 위해 사는 아빠입니다.
3
나는 내가 아닙니다.
어머님 앞에서
나는 나를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어머니의 불효자식입니다.
시골에 홀로 두고 떨어져 있으면서도
시외 전화 한 통화에 아내의 눈치를
살피는 불쌍한 아들입니다.
가까이 모시지 못하면서도 생활비도
제대로 못 부쳐드리는 불효자식입니다.
그 옛날 기름진 텃밭이 무성한 잡초밭으로
변해 기력 쇠하신 당신 모습을 느끼며
주말 한번 찾아 뵙는 것도 가족 눈치 먼저
살펴야 하는 나는
당신 얼굴 주름살만 늘게 하는 어머니의
못난 아들입니다.
4
나는 내가 아닙니다.
나는 나를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40대 직장인입니다.
월급 받고 사는 죄목으로
마음에도 없는 상사의 비위를 맞추며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도 삼켜야합니다.
정의에 분노하는 젊은이들 감싸안지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고개 끄떡이다가
고래 싸움에 내 작은 새우 등 터질까 염려하며
목소리 낮추고 움츠리며 사는
고개 숙인 40대 남자.
나는 내가 아닙니다.
5
나는 내가 아닙니다.
집에서는 직장 일을 걱정하고
직장에서는 가족 일을 염려하며
어느 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엉거주춤, 어정쩡, 유야무야한 모습.
마이너스 통장은 한계로 치닫고
월급날은 저 만큼 먼데
돈 쓸 곳은 늘어만 갑니다.
포장마차 속에서 한 잔 술을 걸치다가
뒷호주머니 카드만 많은 지갑 속의
없는 돈을 헤아리는 내 모습을 봅니다.
6
나는 내가 아닙니다.
나는 가장이 아닌 남편,
나는 어깨 무거운 아빠,
나는 어머님의 불효 자식,
나는 고개 숙인 40대 직장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껴안을 수 없는
무능력한 사람이어도,
그들이 있음으로 나는 행복합니다.
그들이 없으면 나는 더욱 불행해 질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나의 행복입니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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