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청도 국립운문산자연휴양림의 고로쇠 나무가 봄을 맞아 귀중한 수액을 방문객에게 선사하고 있다. 숲을 찾은 아이들이 고로쇠 수액을 시음하고 있다. 운문산자연휴양림 제공
세상에 기이한 일이 많고도 많다. 세월의 더께가 쌓여 곰삭은 옛 이야기는 마침내 전설이 된다. 고로쇠 물과 관련된 이야기가 그렇다. 좌선을 오래 해 다리가 굳은 스님이 고로쇠 물을 마시고 무릎이 펴졌다거나, 지리산 백무동의 변강쇠가 뱀사골의 고로쇠 물을 먹고 원기를 회복했다는 이야기다. 광양과 거제의 고로쇠 물이 제법 명성을 얻었지만 가까운 청도 운문산에도 고로쇠 물이 유명하단다. 엄동설한에 무슨 영약을 구하러 가는 양 길을 나섰다.
■구절양장 운문령 길여행의 시작은 운문산자연휴양림에서 보내온 소식이었다. '3월 중에 고로쇠축제를 여니 그리 알아라'는 보도 자료였다. 여행을 기획한 기자는 행장도 못 꾸려 보고 발령이 나서 타 부서로 갔다. 느닷없는 출장을 가게 되어 어수선했다.
다행히 운문산자연휴양림은 부산서 불과 80㎞ 떨어져 있다. 고로쇠 물도 무료로 체험할 수 있다고 해서 슬쩍 흥이 생기기도 했다. 때아닌 겨울 황사가 짙어 차 안에서도 손수건을 복면처럼 두르고 운전을 했다. 행색이 하 수상했다.
서울산IC에 내려 언양시장 앞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눈에 확 띄는 현수막이 있다. '언양기와집 불고기 강춘화 대표님,대화마트 이철호 대표님 1억 기부 아너소사이어티 가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라는 내용이다. 규모가 얼마나 큰지는 모르지만 식당과 마트를 운영하며 '1억 원'을 기부했다는 것은 존경받을 만하다. 그래서 이장님들이 현수막을 내걸었나 보다. 지난 연말정산 기부금을 아무리 더해 봐도 얼마 되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운문령을 오르며 평균 속도를 국도의 절반 이하로 줄였다. 뒤따라오는 RV차량이 거세게 꽁무니에 붙었지만, 앞에는 경산여객의 노선버스가 막고 있어서 여유 있게 고갯길을 오를 수 있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운문령에서는 동해의 일출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새벽에 출발해 일출을 보고 자연휴양림으로 가는 일정을 잡아도 좋겠다.
가속페달을 밟지 않아도 차는 저 혼자 아래로 돌진한다. '엔진브레이크 사용'이라는 경고판이 세워져 있다.
고로쇠나무, 박달나무, 단풍나무, 굴참나무, 층층나무, 노각나무, 신갈나무…. 근심을 훌훌 털어내고 속살로만 사는 겨울나무의 숲에 막 들어선다. 창문을 열어 공기를 크게 마신다.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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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자란 고로쇠 나무. 고로쇠 물은 옛날부터 몸에 이롭다고 알려졌다. |
■고로쇠? 골리수? 휴양림에 들어서자마자 국립운문산휴양림 관리팀 노희구 팀장이 고로쇠 물 한 컵을 내민다. "몸에 참 좋아요. 많이 드세요." 염치없이 꿀꺽 마셨다. 숙취가 있다면 말끔히 달아날 맛이었다.
마침 휴일을 맞아 휴양림에 쉬러 왔다가 막 귀가하는 가족에게 사진 촬영 협조를 부탁했다. 부산 금정구에서 온 이영진 씨 가족이었다. 부인 이경미 씨와 여경(10) 채민(7) 자매를 데리고 1박을 하고 떠나는 중이었다. 목공 체험은 했지만, 숲해설은 듣지 않았다고 해서 바로 고로쇠나무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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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체험 중인 이영진 씨와 여경·채민 자매. |
"시간은 얼마든지 많아요. 취재 도와 드리죠." 흔쾌한 이영진 씨의 대답에 가슴이 훈훈해졌다. '월요일 오전 무슨 방문객이 있어 사진 모델을 삼을 것인가' 하고 내내 고민하며 왔는데 한번에 해결된 것이다.
봄이 온다지만 숲은 추웠다. 운문산휴양림에서만 숲해설사를 6년이나 해 온 예장해 숲해설사가 안내를 해 주었다. 그가 알고 있는 고로쇠 물의 유래는 신라 말 도선국사로부터였다. 전남 백운산에서 오랜 좌선을 마친 도선국사가 일어서다가 몸이 잘 펴지지 않아 나무에 의탁했는데 가지가 부러졌단다. 그 가지에서 수액이 흘러 목도 마르고 해서 먹었더니 무릎이 펴지고 몸도 좋아졌다. 그래서 '골리수(骨利水)'다. 뼈(골)에 이롭다는 얘기다. 옆에서 듣고 있던 노 팀장이 "도선국사가 우리 고향(영암) 어른"이라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9년째 운문산에서 근무하는 임종훈 주무관은 "고로쇠 나무가 희한한 게 비가 오면 수액이 나오지 않고, 날씨가 너무 추워도 그렇다"며 날씨에 따라 생산량이 많이 다르다고 했다. 이 씨의 딸 채민이는 "달고 맛있어요. 수박물 맛이 나요"라며 품평했다. 나무에서 갓 나온 고로쇠 물은 맑은 느낌이 들며 깔끔했다. 하루 이틀 보관하면 당도가 높아진다고 한다.
■운문호 휘감아 삼족대 예장해 숲해설사는 "고로쇠는 아기손 같이 잎이 다섯 갈래이고 열매는 프로펠러처럼 날개가 있다"고 말했다. 더러 당단풍나무의 수액을 속여 팔기도 하는데 오직 고로쇠라야 효험이 있다고 했다.
가지에 있는 겨울눈이 봄기운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데 나무는 생장 물질인 옥신과 물, 양분을 위로 올려 보내기 시작한다. 이때가 요즘 시기란다.
이 씨 가족과 헤어지고 동창천의 발원지인 용미폭포로 올랐다. 이정표에는 용미폭포까지 700m라고 돼 있는데, 직접 오르니 20분이 걸렸다. 임 주무관은 "보통 왕복 1시간으로 안내한다"고 했다. 쉬엄쉬엄 구경하고 오라는 것이다. 백룡이 승천하다 힘이 겨워 꼬리만 걸쳐 놓았다고 하는 용미폭포는 꽁꽁 얼어 얼음폭포로 장관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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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앞두고 수위를 한껏 낮춘 운문호가 고즈넉하다. |
돌아오는 길은 청도 매전 쪽 국도를 탔다. 운문호는 겨울 가뭄에 한껏 수위가 낮아 있었다. 수몰지에서 옮겨 왔다는 옛 한옥 '운곡정사'는 제자리를 잃었지만 사람이 살고 있었다. 대문 기둥에는 '생활하는 곳이니 출입을 삼가라'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문화재가 박제가 아니라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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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몰지에서 옮겨 와 사람이 살고 있는 문화재, 운곡정사. |
운문호 옆에 '영담한지미술관'이 있어 가 보았다. 관장인 영담 스님의 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스님은 직접 닥나무를 삶고 종이를 떠서 한지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거나 공예품을 만드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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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담한지미술관에 전시된 영담 스님의 한지 작품. |
운문댐 하류보 유원지 일대는 '화랑 체험장' 공사가 한창이다. 몇 년 뒤면 활쏘기와 말타기도 할 수 있으려나.
용미폭포의 얼음 녹은 물 한 방울이 운문댐에서 한 번 갇혔다가 청도 매전면 삼족대에서 안버구수의 물과 합쳐진다. 운문의 물은 동창천을 따라가다가 곧 청도천과 밀양강을 만나 몸집을 키운 뒤 낙동강과 바다에 이를 것이다. 저무는 강가에서 한참 서성이다 집으로 향했다.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여행 팁
경북 청도군 국립운문산자연휴양림(054-373-1327)의 고로쇠 물은 다른 곳과 다른 특징이 있다. 그것은 무료 시음이라는 것이다. 가지고 갈 수야 없지만, 먹는 것은 자유다. 그렇다고 말째 들이마실 우악스러운 사람이야 있겠느냐마는.
운문산휴양림에서는 오는 22일까지 '고로쇠 숲에서 건강 한 모금'이라는 체험 행사를 한다. 15일에는 고로쇠 물 마시기, 제기차기, 단체 줄넘기 등 다양한 행사를 한다. 이날은 경품 추첨을 통해 고로쇠 물을 상품으로 받는 기회가 있다. 곁들여 미나리와 쌈 채소, 표고버섯, 감말랭이 등 지역 특산물 장터도 펼쳐진다. 다른 날에 가면 고로쇠 물 한모금 마시고, 숲 해설을 들을 수 있다.
예장해 숲해설사는 "고로쇠 물은 원래 고로쇠나무의 것이기 때문에 엄격하게 채취를 해야 나무의 생존에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산림청도 마을사람들에게 채취 허가를 내줄 때 확실한 규정을 둔다고 한다. 예를 들어 고로쇠나무의 사람 가슴 높이쯤 지름이 10~19㎝라면 단 한 개의 구멍만 뚫을 수 있다. 구멍도 특수 제작된 드릴로 얕게 뚫어 나무를 보호한다.
어떤 이들은 나무의 것을 빼앗아 먹는 부끄러움을 말하기도 하지만, 잘 관리되는 채취장의 고로쇠는 수액을 나눠 먹는다는 고마운 마음을 가지면 된다.
고로쇠 물은 미네랄이 풍부한 이온음료로 흡수와 배설이 빨라 몸을 정화해 준다. 뼈를 강화하며 관절염과 골다공증 예방에도 좋단다. 운문산 고로쇠 물은 마을 작목반을 통해 살 수 있다. 이재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