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24일 연중 제17주일
하늘나라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면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 (마태오 13,44-52)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merchant searching for fine pearls. When he finds a pearl of great price, he goes and sells all that he has and buys it.
말씀의 초대
왕권을 이어받은 솔로몬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신다. 솔로몬은 듣는 마음과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겸손하게 청한다. 주님께서는 그의 청을 기뻐하시며 지혜와 분별하는 마음을 내려 주신다(제1독서). 주님을 사랑하고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예수님의 모상이 된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의롭게 하시고 세상을 당신의 뜻에 따라 이끌어 가신다(제2독서). 하늘 나라의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팔아 그 보물을 산다. 그 보물을 간직한 사람은 하늘 나라의 기쁨을 이 세상에서 이미 누리는 사람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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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애가 깊은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아우가 황금 두 덩이를 주웠습니다. 아우는 금덩이 한 개는 형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둘이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아우가 갑자기 금덩이를 강물 속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형이 그 이유를 물으니 동생이 금을 가지기 전과는 달리 금을 가지고 있으니 형님을 꺼리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덩이를 강물에 던졌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형도 “네 말이 옳다.” 하며 금덩이를 강물에 던졌습니다. 형제의 아름다운 우애를 다룬 옛 이야기입니다. 그 형제는 우애를 깨뜨릴지도 모를 금덩이를 버림으로써 형제의 우애를 찾았습니다. 그들에게 보물은 금덩이가 아니라 바로 형제의 우애였던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이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당신은 보물을 발견한 사실에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보물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것이 당신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때 비로소 그것을 당신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물이 있는 밭을 발견한 사람이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 보물을 얻으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보물은 버려야 얻을 수 있고 포기해야 내 것이 됩니다. 텅 빈 것이 비로소 모든 것을 가진 보물이 됩니다. 우리가 살면서 주님의 보물을 얻기가 힘든 것은 채우고 모으는 것보다 비우고 버리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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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밭에 묻힌 보물이라고 하십니다. 보물이 묻힌 것을 알면 누구나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값은 문제 삼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보물이 묻힌 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있습니다. 답은 신앙생활입니다. 기쁨의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이 보물의 밭을 알 수 있는 열쇠입니다. 어떻게 해야 기쁜 믿음이 될 수 있을는지요? 매일의 기도를 먼저 점검해야 합니다. 신앙은 매일의 고백이고 다짐입니다. ‘주님, 다시 시작합니다. 또다시 출발하렵니다.’ 이 선언이 매일 기도의 핵심입니다. 하루의 첫 행위가 기도라면 신앙은 기쁨으로 바뀌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주위에서 아무리 믿음을 보물이라고 말해 주어도 건성으로 들립니다. 여전히 밭에 묻힌 보물로 남는 것이지요. 기도하면 무엇이 보물이며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십니다. ‘사건과 만남’이 그것입니다. 모든 사건 속에는 주님의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니 늘 깨달음을 청해야 합니다.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왜 이런 만남이 있었는지 말입니다. 이러한 행위가 주님의 뜻을 찾는 작업입니다. 아니 보물의 밭으로 가는 실제 행동입니다. 모든 사건은 우연인 듯 보여도 사실은 ‘필연’입니다. 그러므로 밭에 묻힌 보물은 언젠가는 우리에게 주실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천 가톨릭 대학교 초창기에 있었던 사건 하나를 말씀드립니다. 그 사건의 주인공은 이미 신부가 되어 있지만, 제 기억에 워낙 강하게 남은 사건이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997년 인천신학교가 개교를 하면서 첫 해 신학생들은 등산로 개척을 위해서 또한 건강을 위해서 뒷산을 자주 올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신학생이 무엇인가를 발견했는데, 그것이 칡이라고 주장을 하더랍니다. 다른 신학생들 모두 칡이라는 것을 본 적이 없기에, 그런가보다 싶었고 또 먹어도 된다는 말에 서로 나눠 먹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어요. 글쎄 먹은 것은 칡이 아니라, 나무뿌리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나무뿌리를 건강에 좋은 칡이라고 철석같이 믿은 한 신학생이 결국 한 밤중에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습니다.
문제의 사건은 병원에서 생겼습니다. 배가 너무 아파서 누워 있는데, 의사가 진찰을 하더니만 ‘급성맹장’이라면서 지금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이 신학생은 아주 힘들게 이야기했지요.
“선생님, 저 맹장수술 했어요.”
그러자 의사 선생님께서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맹장도 재발 하냐?”
물론 의사 선생님께서 농담 삼아서 한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칡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나무뿌리를 먹고, 맹장수술 한 것을 몰라서 다시 맹장수술을 할 뻔 한 것 모두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제대로 알지 못하면 값진 보물을 깔고 앉아도 그것을 알 턱이 없겠지요. 그런데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값진 보물을 주셨습니다.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늘나라라는 보물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 하늘나라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게 와 있어도 좋아하지도 또 감사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하늘나라를 제대로 알 수 없을까요?
바로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우리들의 마음 자세 때문입니다. 이슬람교도들은 라마단 시기에는 한 달 내내 금식을 한다고 하지요. 또 하루에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해서 기도합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해 헌신하는 그들에 비해서 우리들의 정성은 과연 어떤가요? 주일미사 참석 한 번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우리들, 작은 희생과 봉사를 통해서 남들보다 더 큰 은총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우리들. 그러면서 내 인생에 어려움이 생길 때에는 가장 먼저 하느님을 원망하는 우리들입니다. 이러한 마음 자세 때문에, 우리들은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은 하늘나라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의 비유 뒤에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상합니다. 하늘나라를 값나가는 진주에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이라고 말씀하시니까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란 현재보다 더 가치 있는 것, 귀한 것, 의미 있는 것을 구하는 삶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늘나라를 산다는 것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남들이 보기에 성공한 인생을 사는 것이라기보다, 삶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려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열심히 온 맘과 정성을 다해 삶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치열하게 찾는 그 사람 속에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제 내 곁에 과연 하늘나라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정말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추구하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고 있었나요? 그래서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늘나라를 내 안에서 완성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요?
이 물음에 하나씩 답변해 나가면서 하늘나라에 다가서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편하게 신앙생활하려는 안일한 마음을 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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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행복을 찾는 사람
-허영업 신부-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오늘날 가장 무서운 절망은 삶의 가치를 상실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유다인인 빅터 프랭클는 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에 수감되어 죽음의 위험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살아남아 아내를 만나야 한다는 단 한 가지의 생각이 삶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불행하게도 그는 아내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빅터 프랭클은 처절한 삶 속에서 역설적으로 하느님의 존재와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마치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처럼 그는 다시금 삶의 목적과 존재 의미를 회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영원성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늘 한계가 있습니다. 삶은 각기 제 무게를 가지고 있고 그 어떤 것도 완전하거나 절대적이지 않으며 영원한 것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미움이나 반목할 시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할 시간도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직 한 길만을 바라보며 어디에서 위로와 힘을 얻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겐 큰 위로가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영원을 향한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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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려라”
-허성 신부-
오늘의 복음말씀 내용 역시 「하늘 나라」에 대한 여러가지의 예들이다. 하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고, 또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 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고, 또 바다에 그물을 쳐 온갖 것을 끌어 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면 첫번째로 밭에 묻힌 보물이란 무슨 뜻일까?
우리는 역사가 오래된 옛 도시인 경주에서 누가 굴착기로 토목공사를 하다가 엄청나게 많은 문화재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종종 접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경우에 문화재 관리규정이 있어서 발견한 사람은 국가에 신고를 해야 하고 신고한 문화재는 국가에서 관리를 하지만 그런 규정이 없다면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투자해서라도 그 보물들을 발굴하려고 할 것이고, 그렇게 해서 묻힌 모든 보물들을 발굴한다면 그는 큰 부자가 될 것이다.
옛날 고대문명이 찬란했던 중동지방에서는 민족들 간에 전쟁도 잦았고 때로는 홍수나 가뭄같은 천재도 심해서 생활터전을 버리고 급히 피난을 가거나 이사를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에 미처 운반할 수 없는 보물이나 살림도구 등은 땅을 파고 감추어 두고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찾겠다고 하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몇년 후에 돌아와 보니, 사막이 대부분인 그 지역이 그동안 모래바람으로 지형이 너무 많이 바뀌어서 어디에 자기의 보물을 묻었는지 몰라 끝내 못찾은채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기에 고고학자들은 지금도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동원해 옛 보물들을 발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두번째로 장사꾼이 좋은 진주들을 찾아 나섰다가 찾던 진주를 만났을 때 기뻐하며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는 서부영화에서 금을 캐서 부자가 되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목선으로 대양을 건너 아메리카 신대륙에 와서 인디언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으면서까지 험한 산속에서 금맥을 찾다가, 마침내 큰 금맥을 발견했을 때엔 환호성을 지르며 자기들이 동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이 재산이건, 몸이건, 모험이건, 폭력이건, 권력들을 총 동원하여 그 광산을 개발하여 금을 캐는 모습을 종종 본다.
낚시꾼들은 월척의 고기를 낚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낚시터로 떠나지만 작은 고기만 잡힐 경우엔, 그 작은 고기도 소중히 낚시 바구니에 보관하다가 마침내 월척의 큰 고기를 낚게 되면 소중히 간직하던 작은 고기들은 그것이 얼마가 되든지 모두 다른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어 버리고 큰 고기만을 챙긴다.
사도들은 예수께서 부르시자 즉시 자기들이 지금까지 소중히 여겨왔던 가정, 재산, 직업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사도 바울로는 신도들을 박해하러 다마스코로 가다가 예수님을 체험하고는, 그가 그때까지 소중히 여기던 자기의 모든 것들을 쓰레기 같이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는 『그리스도가 내 생애의 전부』라고 까지 고백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께서는 그리스도께 너무나 반한 나머지, 비 그리스도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만을 자기의 몫으로 챙겼다. 아무도 두 주인을 똑같이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만을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다.
세번째로 하늘 나라가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 올려 좋은 고기는 그릇에 가리어 담고, 못먹을 고기는 밖에 집어 던진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밀밭에 밀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서 공존하듯 이 세상도, 이 교회도, 이 사회도, 심지어는 내 자신 안에도 선과 악이 공존하면서 서로를 견제하면서 때로는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매일 보고 있고 체험하고 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의 피조물 중에 서로 가장 걸작품이고 하느님의 숨결을 받아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피조물인 우리의 원조 아담과 하와가 무절제한 욕심과 교만심을 자극한 악마의 작전에 넘어감으로써, 가치관의 혼돈과 온갖 죄악이 난무하는 어두움의 세력이 인류를 지배하게 되었고, 이 죽음의 나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강생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악의 세력을 제압하시고 죽음의 그늘에서 신음하던 인류를 구원하셨지만,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구원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는 시작되었지만 끊임없는 도전을 받고 있어서 종말에 결정적인 승리를 얻을 때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 성령의 도우심과 성모님의 전구하심을 구하며 용감히 싸워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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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보화 버리고 천상보화 얻으리 -배광하 신부-
숨겨진 보화
오늘 예수님의 숨겨진 보물 비유 이야기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우선 보물을 발견하여 가진 것을 다 팔아 밭을 산 뒤의 결론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야기가 중간에서 절단되어 버린 느낌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물을 발견했다면 그 자리에서 파내어 집으로 가져올 일이지, 다시 묻어 두고 재산을 다 팔아 밭을 샀다는 것도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밭의 주인이 보물이 숨겨진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대로 두지도 않았을 것이고, 절대 그 밭을 팔 까닭도 없을 것입니다. 주인이 보물의 내막을 알지 못하는데 밭을 몰래 샀다면 그건 훔친 것이나 다름없는 비난받을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비유 이야기에 숨은 뜻은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생각하듯 보물섬을 발견한 횡재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가르침입니다. 즉 이야기가 중간에서 끝나버린 것은 어쩌면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그 다음 이야기를 숨기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보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풍요에서 오는 기쁨, 보물이 아니었기에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 기쁨은 다른 사람은 알 수도 없는 내게 있어서만 보물이고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밭주인에게도 그 보물은 아무 가치가 없을 수 있습니다.
동창 신부 한 분은 최고 대학에서 법을 공부하였고 아버님도 판사이셨습니다. 부모님은 아들이 법조계의 길을 걷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길은 세상이 주는 명예와 안정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길, 나아가 마음만 먹으면 권력과 부를 거머쥘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동창 신부는 성녀 대 데레사의 글을 읽다가 갑자기 자신의 보장된 미래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망설임없이 사제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만약 동창 신부에게 주님 밭에서 발견한 보물에 대해 이야기하라면 그 역시 예수님의 오늘 비유에 대해 같은 이야기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발견한 보물 이야기는 세상 물욕에 가득 찬 사람들에게는 바보같이 들리거나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자신만이 간직한 기쁨에 천상 보물을 발견한 이야기를 중간에 그쳐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물은 어차피 주인이 없는 것입니다.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사야할 값은 우리 자신의 모든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 29)
하느님의 나라
오늘 예수님의 비유 말씀처럼 교회 역사 안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보화를 발견하여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하늘의 보화와 바꾼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세상 모든 것을 다 바꾼다 하여도 결코 살 수 없는 그야말로 보물 중에 가장 값진 보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물은 한 개인만이 소유하며 누리는 세상의 보물과는 다릅니다. 모두가 공유해야 하며, 여럿이 힘을 모을 때 그 보물은 더욱 값진 가치를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보물을 찾은 이들은 아직 보물을 찾지 못하여 세상 여러 물질적인 근심에 짓눌려 있는 이들에게 다가갔고 참된 하느님 나라의 보물을 함께 찾을 것을 알려 주었고 같이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기쁨과 평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선이 작용함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를 일찍이 온몸으로 체험하였던 바오로 사도는 오늘 또다시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 28)
세상이 주는 안락한 삶을 버리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인 방글라데시에서 하느님 나라의 보물을 찾고 계시는 미국 메리놀회 선교 사제이신 ‘봅 멕카일’ 신부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슬람푸르라는 복잡한 거주 지역에서 지역 주민들과 함께 대나무로 된 움막에 산다. 나지막한 양철 지붕으로 덮인 약 4x2미터 정도 되는 공간 속에서 나는 기도하고, 하루 두 번 식사를 준비하고, 휴식을 취하고, 내 자전거를 보관한다. 전기는 들어오지 않고 가까운 공동 우물에 가야 물을 길을 수 있다. 화장실도 공동 화장실을 쓴다.
더운 철이면 사람들이 ‘천장에 선풍기가 달린 집에서 사시지 왜 이런 데서 사세요?’라고 몇 번이나 묻는다. 그러면 나는 ‘당신도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저도 그렇게 살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 길이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이며,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밭의 보물을 찾은 이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 길을 사는 이들은 시련 속에서도 주님의 기쁨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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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의 가치 -홍금표 신부-
「진리를 파는 가게」라는 우화에 이러한 내용이 나온다. 인용하는 부분은 진리를 파는 가게의 아가씨와 진리를 사기 위해 온 한 사나이의 대화부분이다.
『무슨 종류를 사시려고요? 부분 진리를 원하세요, 아니면 전체 진리를 찾으세요 ?』/『전체 진리, 전체 진리를 보여 주시오 ?』『값이 몹시 비싼데요. 선생님』/『얼마요?』 『이걸 가져가시면 여생의 모든 평안을 잃는 값을 치르시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그 사람은 슬픈 마음으로 가게를 나오게 된다는 것이 이 우화의 내용이다. 아마 그가 가게를 슬픈 마음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진리를 얻기 위하여 자신의 평온과 안일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진리를 입으로는 갈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를 얻기 위하여 치러야할 희생이 두려워 진리 앞에서 도망치는 우리의 슬픈 자화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진리란 희생과 포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우화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태오 복음에만 나오는 보물과 진주의 비유를 보게 된다. 먼저 보물의 비유를 살펴보자! 보물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이스라엘 지역은 오늘날도 세계의 화약고로서 항상 분쟁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었지만 성서의 시대에도 이 지역은 전쟁이 자주 일어났던 곳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날 때 피난을 가곤 하였는데 피난을 떠날 때에는 중요한 것들과 이동이 가능한 소형의 물건들만 가지고 피난을 떠나고 몸에 지니고 갈 수 없는 귀중한 것들은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몰래 묻곤 하였다.
이러한 이유가 보물이 땅에 묻히게 되는 원인이 된다. 물론 보물은 묻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 왔다면 그 보물을 다시 찾을 수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죽음이나 여러 가지 이유로 돌아올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면 땅에 묻힌 보물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떻든 이러한 사람 중에 아주 적은 수이겠지만 운이 좋은 사람들은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유다법에는 땅위는 물론이요 땅 아래에 있는 것에 대한 소유권은 그 땅의 소유주에게 있다는 법이 있기에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그 보물을 합법적으로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 밭을 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이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물론 포기하기에는 아까운 면이 없지 않았겠지만 땅에 묻혀 있는 보물이 자신의 재산보다 더 가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밭을 사게 된다는 것이 이 비유의 내용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물을 찾아 낼 수 있는 눈」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발견한 보물을 「획득하려는 의지」가 이 비유에서 또 다른 묵상을 제공하는 단서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땅에 묻혀 있는 보물」과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공통된 의견은 보물은 「하늘 나라」를, 그리고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알아보고 매료된 사람들」인 예수님과 제자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비유는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부모 형제는 물론 권력과 물질, 그리고 생명까지 포기하면서 하늘나라를 추구하는 것은 바로 하늘나라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비록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은 행동으로 비쳐질지라도, 이들은 하늘나라가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도 남을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늘나라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값진 진주의 비유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도 초점은 먼저 값진 진주를 알아 보는 눈과 그 진주를 손에 넣기 위해 전 재산을 팔아 버리는 장사꾼의 모습이다.
『모범으로 삼아야 할 것은 진주 하나를 위해 전 재산을 내던진 이 상인의 결단이다』란 어느 주석가의 말처럼 예수님과 제자들은 값진 진주인 하늘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제 이 두 비유의 교훈을 생각해보자! 하늘나라란 모든 사람에게 다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땅에 묻혀 있는 보물이나 숨어 있는 진주처럼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하늘나라라는 보물과 진주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고, 보물과 진주를 위해 재산을 처분하듯, 하늘나라를 위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다 덜 중요한 가치를 희생할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 비유의 교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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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봉모 신부-
우리는 두 주 전부터 계속해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 말씀을 주일 복음으로 듣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한 번도 하느님 나라는 어떤 나라라고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느님 나라는 마치 무엇에 비길 수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가 마치 밭에 묻힌 보물에 비길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비유 하나를 더 들려 주십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에 비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비유 두 개를 연속해서 들려 주시는 이유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두 비유는 서로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농부와 상인은 모두 보물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보물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자신의 모든 소유물을 팔아버립니다. 그리고는 원하는 보물을 삽니다. 세 개의 동사가 그들의 행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찾다’, ‘팔다’, ‘사다’ 모든 동사가 적극적이고 열렬한 자세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두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가르침은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너무나 귀한 곳이기에, 이 나라에 초대받은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이 나라에 들어가도록 애써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한다는 것은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예수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한다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보면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자신이 움켜쥐고 있었던 것을 기꺼이 버렸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배와 그물을 버렸고, 세관장 자캐오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사악한 짓들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찬란했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지만 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것을 다 놓아야 한다는 요구 앞에서 큰 부담을 느껴 끝내 귀한 부르심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오늘 비유의 주인공인 농부나 상인도 모든 재물을 팔아 보물을 사려고 했을 때 많은 부담을 가졌을 것입니다. 위험한 모험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가졌을 것이고 가족으로부터 엄청난 반대에 부닥쳤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자 청년과 달리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였습니다. 그런데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세례받을 당시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 것일까요? 예수께서 아주 간단하게 대답을 주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마태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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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보물을 얻는 법 -이기양 신부-
프랑스 소설가 모파상의 작품 중에 「목걸이」라는 소설이 있지요. 호화로운 생활을 꿈꾸는 마틸드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장관이 주최하는 한 파티에 남편과 함께 초대를 받았습니다. 남편은 부인의 심정을 알고 아껴두었던 돈으로 옷을 사줬지요. 그러나 그것으로 부족했던 마틸드는 친구인 프레스체 부인에게서 진주목걸이를 빌려 치장을 하고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파티를 끝낸 후 집으로 돌아온 그는 목걸이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그들 부부는 전 재산을 처분하고 모자라는 돈은 빚을 얻어 빌렸던 목걸이와 똑같은 것을 사서 프레스체 부인에게 말없이 돌려줬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은 빚을 갚기 위해 십 년 동안이나 고생을 하게 됩니다. 마틸드는 빨래 일을 하면서 더러운 곳에서 먹을 것도 못 먹고 고생을 하는 동안 그 아름답던 얼굴은 비참하게 됐으며, 머리카락은 반백이 됐습니다. 마침내 빚을 다 갚았을 무렵 우연히 프레스체 부인을 만나게 되자 마틸드는 다소 자랑스레 그간의 일을 고백하게 됩니다. 얘기를 다 들은 프레스체 부인은 말합니다. "내게 돌려준 그 목걸이 값을 갚느라 십 년이나 고생을 했단 말이에요? 이를 어째! 마틸드, 그 목걸이는 싸구려 가짜였어요." 우리 인생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애지중지 여기고 평생을 뼈 빠지게 노력하며 매여 살았지만 결국 끝에 가서는 그것이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지요. 재산이 다인 줄 알고 평생을 쥐어짜며 형제간의 의를 끊을 정도로 집착하며 살았는데 생의 끝인 죽음 앞에서야 그것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건강도, 자식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물'은 그런 것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보물,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얻어야 하는 그 보물은 과연 무엇일까요? 답은 오늘 제1독서에 나와 있습니다. 솔로몬이 어떻게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왕이 될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알려주고 있지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1열왕 3,5) 하느님께서 물으시자 솔로몬은 하느님께 지혜를 청합니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너 같은 사람은 네 앞에도 없었고, 너 같은 사람은 네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1열왕 3,11-12). 솔로몬이 청한 것은 하느님을 알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놓았기에 솔로몬에게는 부귀나 장수나 원수 갚음들이 그냥 따라왔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참된 보물이란 '하느님을 아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식이나 재산 건강보다도 하느님을 첫 자리에 모셔야 나머지는 덤으로 받게 되는 것이지요. 전도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베드로를 보고 "나를 따라오너라"(마태 4,19)고 했을 때 예수님을 보물로 알아보았던 베드로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물도 배도 가정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기에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어 천국의 열쇠를 맡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최고 '보물'은 재산도 건강도 원수 갚음도 아니라 솔로몬 왕이 선택한 것처럼 '하느님'입니다. 우리 시대가 이렇게 힘들고 혼란스러운 것은 솔로몬과는 반대로 하느님을 청하지 않고 재물을 청하고 장수를 청하고 자식의 성공만을 청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재물과 자녀 교육, 건강 등은 그것에 집착하게 만들고 결국 하느님을 거역하게 만듭니다. 먼저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나서 재물을 쓰고, 자식을 교육시키고, 건강을 생각한다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 속에서 복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순서가 바뀌었지요. 솔로몬왕처럼 지혜로운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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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다 팔아서 사는 하늘나라 -유영봉 몬시뇰-
묵상길잡이: 공자는 인생 40을 불혹(不惑)이라 하였고, 50세가 되어야 하늘의 뜻을 아는 지천명(知天命)의 경지가 된다고 하였다.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참으로 깨달았다면, 거기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결단이 요구된다.
1. 인생의 가장 귀한 것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공자는 일찍이 50 이 되어야 어느 것이 하늘의 뜻인지를 알게되는 지 천명(知天命)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인간이 참으로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데는 삶의 연륜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라 하겠다.
학생 때에는 대학 입시의 관문만 통과하면 모든 것이 다 풀릴 것으로 생각되지만, 취직과 결혼 그리고 기반잡기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정신 없이 지내게 된다. 더구나 요즘은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다. 끊임없이 자기발전을 위한 몸부림을 계속해야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 막상 "이제 어느 정도 살만해졌다."싶을 무렵이면, 앞으로 살날이 지금까지 살아온 날 보다 적게 남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한 순간 갑자기 "그냥 이렇게 살다가 나의 생이 끝나버린다면, 내 인생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이렇게 무의미하게 끝낼 수는 없다. 참으로 삶을 가치 있게 해줄 뭔가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되면, 노후 걱정과 함께 한해 한해가 너무나 짧게 생각되고 쫓기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된다. 남들처럼 나도 대학에 들어갔고, 열심히 바쁘게 살면서 남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며 지냈다. 더 새롭고 비싼 것을 더 많이 갖기 위해 죽자하고 일하며 쉴 사이도 없이 줄달음치며 살아서 이제 겨우 남부럽지 않을 만큼 되었다고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데, 벌써 저만치 생의 땅거미가 드리워지는 것이 아닌가? 열심히 모았는데, 그래서 제법 차지하고 있기도 한데 그 모든 것이 다가오는 죽음 앞에 이렇게 초라하고 빛 바랜 깃발처럼 쓸모 없어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디서 나의 이 큰 공허함을 채워 줄 그 무엇을 찾을 것인가?
이런 넋두리 같은 고백은 교리 반에 나온 중년층의 예비신자들에게서 자주 들을 수 있다. 어쨌든 내가 지금까지 허둥대며 그렇게도 열심히 쌓아 온 이 모든 소유가 나의 공허(空虛)를 메꾸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어느 날 확인하게 된다.
2. 모든 것을 팔아서 사야 할 것.
'이것이 제일이다' 고 열심히 찾고 쌓아온 것들이, 참으로 별것 아닌 것으로 보였다는 것은 그만큼 새로운 것에 눈을 떴다는 말이 아닐까! 우리에게 진정 살맛을 주고, 죽을 때까지 우리를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교 신앙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바에 따르면 그것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섬기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아닌 누군가를 진정으로 위하는 참 사랑의 체험을 할 때, 그 안에서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며 그 구원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결혼을 하든, 수도자나 성직자가 되든, 하느님 안에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쏟는 사랑과 봉사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인생을 낭비하는 삶이 되고 말 것이다.
3. 소유형의 인간과 존재형의 인간.
에릭 프롬 이라는 사회심리학자는 인간은 소유형과 존재형이 있다고 했다. 소유형의 인간이란 비싸고 새로운 것을 많이 갖는데 행복이 있다고 믿고 매사에 어느 것이 이익이 되느냐에 만 민감한 인간을 말한다. 이런 사람은 매사에 계산적이다. 그에게는 사랑도 장사꾼 적인 거래의 일종일 뿐이다. 영악하고 한푼이라도 손해를 볼 짓은 결코 안 한다.
반면에 존재형의 인간은 손익(損益)이 아니라, 어느 것이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를 더 중요시하는 인간형이다. 이런 사람은 소유보다도 보람과 의미를 더 추구한다. 소유형의 인간이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도망가는 품꾼'이라면, 존재형의 이간은 '양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목자' 인 셈이다. 소유형의 인간은 위급할 때만 하느님을 필요로 하고 '도와 달라'는 기도밖에 하지 못한다. 존재형의 인간에게 있어 하느님은 항상 흠숭의 대상이며 섬겨야 할 분이며 감사의 기도를 바쳐야 할 분이시다.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는 밭에 묻힌 보물이나 진주를 발견하고 모든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사는 것과 같다"(마태 13,44-45) 고 말씀하신다. 어느 것이 이익이냐에 만 눈먼 사람들은 썩어 없어질 것밖에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배를 채울 수는 있어도 가슴 뿌듯하게 할 가치와 보람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값진 진주는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함으로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 이다. 이것 외에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내가 버린 것(시간 ,관심, 돈), 그것만이 참으로 내 것임을, 영원히 남는 것임을 잊지 말자. 이를 깨닫는 것이 참 지혜이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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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적입니까? 존재적입니까? -대구대교구 주보-
초등학교 다닐 때 소풍을 가면 빠지지 않고 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날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보물찾기입니다. 보물찾기가 시작되면 모든 어린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선생님들이 숨겨 놓았을 보물을 찾으려고 시간이 가는 줄을 모릅니다. 어떤 어린이는 숨겨진 보물을 찾고서 너무나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곤 합니다. 어떤 어린이는 하나도 찾지 못해 울상이 되기도 합니다. 아무튼 보물찾기는 소풍 때의 가장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소풍 날 보물을 찾듯이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필요한 것, 가장 가치로운 것 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에릭 프롬이라는 학자는 인간의 유형을 “소유와 존재”로 구분하였습니다. “소유형의 인간” 이란 ‘새로운 것을 많이 갖는데 행복이 있다’고 믿고, 모든 일을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것만 민감하게 반응하며, 지극히 계산적이어서 사랑도 거래의 일종으로 생각합니다.
반면에 “존재형의 인간”은 ‘어느 것이 의미가 있는가? 어느 것이 가치가 있는가?’를 중요시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소유보다는 존재 그 자체의 의미를 더 추구합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좋은 진주를 발견하고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사는 것과 같다”라고 하신 오늘 복음의 말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소유형의 인간”은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두어 서배는 채울 수 있어도 가슴 뿌듯하게 할 가치 있는 것을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진정한 보물과 좋은 진주는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존재형의 인간 즉, 신앙인의 참된 삶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디에 나의 모든 것을 쏟고 있습니까? 소유적입니까? 존재적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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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우리의 현실은 하늘나라의 기대와 모순되어 있어 의심과 어려움이 따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누구한테나 기쁜 소식으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이 승리의 행진을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창조 때부터 세상이 깨끗한 상태로 만들어졌으면 지금 우리가 이런 갈등과 모순 속에 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왜 기쁜 소식은 알아듣기도 어렵고 알아보기조차 어려울까요? 뭐가 이렇게 복잡할까요? 설상가상으로 하느님 나라를 소개하는 비유 말씀도 ‘감추어진 것’에 속합니다. 알아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의 효력은 온전히 우리의 선택과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한 농부가 남의 땅을 갈다가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합니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44ㄴ절) 다른 이의 밭을 간 이 농부는 소작농이거나 날품팔이꾼일 것입니다. 그는 보물을 숨겨두는 치밀함까지 갖추었습니다. 그동안의 바람과 계획은 다 팽개치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그 밭을 살 정도로 용감합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이 납니다. 귀한 것이기에 더욱 정당한 방법으로 보물을 차지합니다.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도 매한가지입니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46절) 그 시절에 천연 진주는 매우 값진 보석이었습니다. 이 상인은 오랫동안 값진 진주를 찾아 떠돌았습니다. 좋은 진주만을 취급하는 전문가이니 금방 이 진주의 값어치를 알아보았을 겁니다. 애타게 찾던 것이기에 이때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밭에 묻힌 보물이나 희귀한 진주는 쉽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런데 농부와 상인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의 가치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가치를 발견했을 때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가치를 소유하고 싶은 열망에 다른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앞뒤 안 가리고 가진 것을 다 처분합니다. 짝을 이루는 이 두 비유는 하늘나라의 가치와 그 가치를 발견했을 때의 무한한 기쁨, 그리고 그에 따르는 노력과 대가를 잘 보여줍니다. 보물이 어느 날 갑자기 거저 굴러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끊임없이 하늘나라의 가치를 갈망해야 합니다. 하늘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자신이 누리던 안정과 평화와 소유를 포기하고 수고와 노력을 다하여 기쁘게 하느님 나라에 온전히 들어갑니다.
마지막 비유의 배경은 갈릴래아 호수입니다. “또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47절) 어부들은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면 뭍에 돌아와 그물에 걸린 고기를 가려내는 일부터 합니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큰 물고기와 작은 물고기,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 등을 구분해 냅니다. 비늘이나 지느러미가 없는 것은 부정한 것에 속합니다(레위 11,10-12; 신명 14,9-10).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버렸다.”(48절) 우리가 하느님을 의식하든 안 하든, 하느님께 마음을 쏟든 안 쏟든 세상살이는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는 듯 보입니다. 착한 사람한테나 악한 사람한테나 모든 것이 똑같이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49-50절) 고기를 잡을 때가 있고 그것을 가려낼 때가 있듯이, 선과 악이 명확히 구별될 때가 옵니다. 누구도 그때를 피할 수 없습니다. 악한 자들은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맞습니다. 악을 가려내시는 하느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날까지는 악이 선과 섞여 있는 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51ㄱ절) 제자들은 이 비유 설교를 알아듣지만 다른 이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52절)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이는 집주인과 같아 자기 곳간의 물건을 다 파악하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물건을 꺼낼 수 있을 뿐더러 오래된 것과 새것을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압니다. 이것을 풀이하며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이는 예수님의 설교 주제인 하늘나라를 익힌 사람입니다. ‘새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이요, ‘옛것’은 구약성경과 율법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교 율법학자라면 예수님의 언행에 비추어 구약과 율법을 풀이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의 곳간 열쇠를 맡기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성경은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곳간과 같습니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곳간의 주인입니다. 현명한 이라면 그때그때 살면서 필요한 해답을 말씀에서 찾을 것입니다. 옛것과 새것을 적당하게 잘 끄집어 낼 줄도 알고 오래된 것에 새로운 것이 있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말씀의 곳간에서 오랫동안 숨겨진 보물을 발굴해 낼지도 모르고, 그토록 애타게 찾던 진주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에서 기쁨을 찾은 이들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과 말씀을 맞바꿀 것입니다. 다시 물으십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51ㄱ절)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에다 열정을 쏟아야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곳간 주인은 우리 자신입니다. 지금은 모든 게 뒤섞여 혼란스럽지만 아무쪼록 선과 악이 판가름 나는 종말에는 하느님 앞에 두려움 없이 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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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를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값진 진주에 비유합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삽니다. 보물과 진주, 두 단어는 다르지만 같은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는 비유입니다. 보물 혹은 진주가 사람을 현혹시키듯이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한 사람도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비유가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는 소유하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가진 것을 버리면서 추구하는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이론이나 지식을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죽음 후에 가는 곳이 아니라, 현재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면,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은 현세에도 내세에도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하느님을 자기 안에 영접하여 함께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게 살면 우리의 실천이 달라집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을 잘 믿고, 그분의 계명을 잘 지키고, 그분에게 잘 바쳐서 그분의 마음에 들어서, 그분으로부터 특혜를 받아 잘 사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교섭해서 환심을 사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이 세상을 사는 인간의 지혜일 수는 있어도 신앙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복을 비는 신앙이나, 기적을 찾아다니는 신앙은 그리스도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지키고 바칠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몇몇 사람에게 기적하는 힘을 주고, 다른 사람들은 외면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시고 당신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을 철저히 실천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있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서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고 그 하느님의 일을 배워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를 밭에 묻힌 보물 혹은 좋은 진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그리스도 신앙인에게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얻어야 하는 보물 혹은 진주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 있고 그 함께 있음에 충실하기 위해 많은 것을 버립니다. 부모가 자녀들과 함께 있기 위해 한 인간으로 누릴 수 있는 많은 것을 버립니다. 부부가 함께 있고 친구가 친구와 함께 있기 위해서도 많은 것을 희생합니다. 그것은 그 함께 있음이 좋아서 자유로이 택해서 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많은 것을 버리고 함께 있음을 얻어서 더 자유로워지고 더 풍요로워집니다. 이런 함께 있음은 인간이 자유를 잃고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노예는 자유를 잃고 주인과 함께 있습니다. 교도소에 수용된 사람은 자유를 잃고 교도관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된 사람은 한 인간 개체로서 많은 것을 잃었지만, 자녀를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누리는 자유와 행복이 있습니다.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는 사람도 많은 것을 버렸지만, 부부로서 누리는 새로운 자유가 있고 삶의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친구에게 충실한 사람도 그것을 위해 많은 것을 버렸지만, 친구와 함께 있어서 누리는 자유와 기쁨을 맛봅니다. 하느님의 나라도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많은 것을 버리는 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좁은 시야를 넓혀 주고 우리의 이기심을 벗어나서 더 큰 자유를 누리게 해 줍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면서 더 자유롭고 더 풍요로워집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베푸심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인간 위에 군림하고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좁은 시야를 넓혀주고, 우리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자유를 누리게 하십니다.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자유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셨습니다(갈라 5,1). 이 자유는 하느님이 베푸심이라는 자각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믿으신 하느님은 베푸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실천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세상이고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었을 때,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는 십자가가 발생하였습니다. 내어주고 쏟는 것이 하느님의 생명이었습니다.
우리 삶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베푸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베풀면서 행복합니다. 우리가 이 베품의 가치를 부인하면, 이 세상은 동물의 세계가 되고 맙니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아지고, 더 강해지는 것 외에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 베푸심을 알아듣지 못하면, 세상에는 감사할 것도, 용서할 것도, 희생할 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경쟁만 있을 것입니다. 나 한 사람 잘 살고, 나 한 사람 많이 갖고, 나 한 사람 도로상에서 빨리 가면 되는 세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인간다운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베품은 하나의 암호와 같이 우리 삶 깊은 곳에 감춰져 있습니다. 그 암호를 읽어내고 실천하신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은 보물 혹은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버린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이기심, 욕심, 허영, 속물근성 등을 버릴 때 비로소 읽을 수 있는 암호입니다.
이 베푸심의 발견과 영접은 나의 계획, 나의 노력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푸심이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야 합니다. 그분의 숨결이 우리 안에 일해야 합니다. 이 숨결은 묻혀 있는 보물과 같이, 보이지도 소리를 내지도 않습니다. 이 숨결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 삶의 깊은 곳에 흐르는 베품의 숨결입니다. 내가 이 숨결을 찾아 돛을 달면, 나도 이 숨결과 함께 흐를 것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베품의 이야기이지만, 나도 그 흐름에 합류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보물이나 진주와 같이 숨겨져서 혹은 암호와 같이 해독(解讀)을 필요로 하는 양식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의 숨결에 돛을 달고 함께 흐르는 실천을 하는 사람들 안에 하느님은 확인 되는 분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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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행복 -김찬선신부-
오늘 아버지 다윗에 이어 임금이 된 솔로몬은 하느님께 소원을 아룁니다. “주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당신 종을 제 아버지 다윗을 이어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만, 저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서 백성을 이끄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에 하느님께서는 부와 권력과 같은 다른 것을 자기를 위해 청하지 않고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고 답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솔로몬은 지혜로운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지혜를 청하면서 명석한 머리를 달라 하지 않고 듣는 마음, 이해하는 마음(Heart to understand)을 달라고 하고 하느님께서도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지혜는 머리의 능력이 아니라 마음의 능력이라는 표시입니다. 머리를 어떻게 잘 굴리느냐가 아니라 마음을 어떻게 잘 쓰느냐가 관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어떻게 쓰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까요?
듣는 마음과 지혜롭게 분별하는 마음을 청하는 솔로몬에게 하느님은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장수를 청하지 않았다고 칭찬하십니다. 즉, 칭찬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를 위해 청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서의 부와 장수를 청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우리가 청하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첫째로 보통의 우리는 나를 위해 무엇을 달라고 청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의 우리는 小市民이고 이기주의적입니다. 그러나 크게 쓰이는 큰 인물은 자기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 자기를 포함한 모두를 위해 기도합니다. 원불교의 가르침 중에 大空大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를 크게 비우는 사람이 사회 公益에 크게 이바지 한다는 뜻이지요. 자기를 비우는 사람이 弘益人間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행복할 때 자기도 행복한 사람이 진짜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불행한데 자기만 행복하려는 사람이 있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자신의 행복을 느끼려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사람과 사랑을 잃어버리기에 결국 불행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내가 행복하려면 다른 사람을 나의 행복에 초대해야 하고, 그래서 현명한 솔로몬처럼 듣는 마음, 이해하는 마음을 달라고 해야 합니다. 자기의 고통과 문제만 가지고 동동거리는 옹색한 마음보다 다른 이의 아픔과 하소연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야말로 남의 행복으로 행복해지는 참으로 지혜로운 자의 행복한 마음입니다.
두 번째로 보통의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와 장수를 청합니다. 요즘 말로 하며 Well-being을 원하는 것입니다. Wellbeing은 참으로 좋은 말이고 그래야 되지만 문제는 그 내용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장수하는 것이 Wellbeing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부와 건강에 대해서 집착한다면 Mal(bad)-being이 될 것이고 그 인생은 불행해질 것입니다. 더 많이 벌려다 재산을 다 날리고 건강에 대해 너무 걱정하느라 건강을 상하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가치가 전도되어서는 안 되고 우선순위가 바뀌어서도 안 됩니다. 이 세상 행복을 위해서 돈이 건강보다 앞서서는 안 되고 돈이 사람보다 앞서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돈이 중요하다 하여 건강 상할 정도로 집착한다면 이 얼마나 바보짓입니까? 돈이 중요하다 하여 사람을 다 잃으면 이 얼마나 바보짓입니까? 더 나아가 영원한 행복을 위해서 이 세상 것이 하느님 나라보다 앞서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더 가치 있는 것과 덜 가치 있는 것을 분별할 수 있고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덜 가치 있는 것을 팔아버릴 수 있는 마음이 오늘 솔로몬이 청하는 지혜로운 마음이고 오늘 복음이 얘기하는 하느님 나라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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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어떤 신부님의 체험담입니다.
한번은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는데 미국 청년과 나란히 앉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그 신부님의 옆에서 자신의 약혼녀를 자랑하더래요.
“신부님, 제 약혼녀는 얼굴이 예쁘고 몸매도 아름다워서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답니다.”
1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자랑하기에 신부님께서는 점점 궁금해졌습니다. ‘아니 얼마나 약혼녀가 아름다우면 이렇게 1시간 이상을 자랑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물었습니다.
“당신 혹시 애인의 사진 가지고 있소?”
그 청년은 “그럼요. 너무나도 예쁘고 아름다운 제 애인의 사진을 이렇게 늘 가지고 다니지요.”하면서 신부님께 사진을 꺼내서 보여 주었는데, 그 사진을 본 신부님의 소감이 재미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본 여자 중에서 그렇게 못생긴 여자는 생전 처음이었습니다.”
사랑하면 눈이 먼다는 말도 있지요. 물론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아마 이 청년에게 적용이 되는 말이 아닌가 싶은데요, 실제 우리들의 삶 안에서 그런 모습은 자주 목격이 됩니다. 그래서 비록 다른 모든 사람이 거부를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 때문에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측면에서 사랑의 체험이란 것은 이 세상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사랑을 특별한 곳에서만 찾으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단지 내 마음만 바꾸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인데도 불구하고, 특별하게 내게 다가오는 사랑을 꿈꾸고 그래서 텔레비전이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착각을 할 때도 참으로 많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특별한 모습만이 사랑일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대한 설명을 하십니다.
먼저 보물의 비유에서 농부가 밭을 가는 것은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밭을 갈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죠. 이것은 농부에게 있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운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주를 발견한 장사꾼의 비유는 그렇지가 않지요. 장사꾼은 처음부터 진주를 찾아 다녔습니다. 구하고 구하다가 드디어 가장 값진 진주를 발견한 것입니다. 즉, 이 두 가지 비유는 기대하지 않았던 발견과 기대하면서 찾다가 발견한 것이라는 큰 차이를 보이면서, 하늘나라도 이처럼 늘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런데 하늘나라가 이렇다면, 하늘나라의 가장 큰 특징인 ‘사랑’도 이렇지 않을까 싶네요. 내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장소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에 우리는 사랑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랑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들은 더 뜨거운 사랑의 체험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전히 특별한 사랑만을 원합니다. 그러다보니 늘 불평불만으로 가득합니다. 왜 나는 그런 사랑을 받지 못하는가라는 생각뿐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내가 먼저 그런 특별한 사랑을 할 생각은 왜 하지 못할까요?
이러한 나의 이기적인 마음들이 사랑을 체험하지도 못하고, 결국 하늘나라도 발견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는 거룩한 주일이 되셨으면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거룩한 주일을 만들어 봅시다.
-빠다킹신부-
珍珠를 차지하기 위하여
-강영구신부-
+하늘나라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면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
그대에게
우리 인생은 선택과 결단의 연속입니다. 지금 무엇을 선택하는지, 어떤 결단을 내리는지에 따라서 당신의 운명은 물론 행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여기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쓰레기와 콩알만 한 진주(珍珠)가 있습니다. 둘 중의 하나를 가져야 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양의 많음에 현혹되어 쓰레기더미를 선택한 당신은 두고두고 후회하게 됩니다. 당신이 쓰레기 더미를 선택하게 된 것은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탐욕(貪慾) 때문이지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貪瞋痴)을 불가(佛家)에서는 삼독(三毒)이라고 가르치지요. 삼독(三毒)으로 흐려진 눈은 바른 선택, 올바른 행동과 처신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바른 선택을 하려면 바르고 밝고 맑은 마음을 가져야 하는 법입니다.
만일 당신이 진주를 선택했다면 당신은 오랫동안 행복할 것입니다. 영롱한 빛깔, 변하지 않는 모습, 작지만 고급스럽고 값진 보석을 손 안에 간직한 것을 기뻐하게 됩니다. 당신이 진주를 선택한 것은 맑고 투명한 눈 무엇이 값진 것인지를 가려낼 수 있는 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모든 것을 투자하여 그 진주를 차지하는 유능한 장사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당신의 눈을 맑고 밝게 닦으십시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가난하고 단순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당신은 유능한 장사꾼처럼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차지하는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一明)
올인 -장동현 신부 -
우리 학교에는 테니스부와 골프부가 있습니다. 운동부에 소속된 학생들이 얼마나 운동을 열심히 하는지 모릅니다. 밥 먹고 하루 종일 테니스와 골프만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손은 온통 굳은살로 덮여 있습니다. 개인생활도 거의 포기한 채 운동에만 몰두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목표를 이룰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도 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며 즐겁게 운동을 합니다. ‘이기겠다. 기량이 뛰어난 선수가 되겠다.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겠다. ’ 이런 뚜렷한 목표가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찾아낸 사람과 우리 학교 운동부 학생들의 공통점은 목표가 뚜렷하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건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전적인 투신이 필요합니다. 아르바이트 하듯이 해서는 보물을 살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느님 나라보다 귀하고 값진 것은 없습니다. 죽음도 좌절시킬 수 없는 영광이 하느님 나라 시민의 특전으로 우리에게 제공됩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소중한 몫은? -하화식 신부-
사람들은 돈 계산만큼은 빠르고 정확하다. 그것은 바로 돈이 내 삶에 가장 소중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곧 값어치 있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을 희생해서라도 그것을 사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정작 우리 인생의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생각의 범위가 현세에만 머물게 된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닌데 우리는 거기에 모든 인생을 걸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얻어야 할 가장 소중한 몫은 무엇일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 삶의 최대 목적이 되고 또 가장 소중한 몫이 되고 있는가? 그 결과에 따라 내가 가진 것을 모두 팔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생기게 될 것이다.
만일 화재로 인하여 가진 것을 모두 잃어버렸다고 가정할 때 이왕에 더 좋은 몫으로 내어놓으면 보람도 있고 더 큰 영광도 될 텐데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많은 돈을 잃어버리게 되면 돈에 대한 아까움도 있겠지만 그렇게 될 바에 차라리 하고 우리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된다.
그럼 하느님 나라에 대한 나의 몫은 어떤가? 내가 내는 교무금·헌금은, 그리고 남을 위해 베푸는 자선은 얼마나 봉헌하면서 살아가는가? 한 걸음 나아가 내가 소유하고 있는 재능과 시간과 재산을 어느 정도 팔 수 있는가?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대목이다............◆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 조욱현 신부-
오늘 복음의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또 우리의 모든 상황을 포기해야 할 만큼 중요한 ‘하늘나라’ 또는 주님의 ‘말씀’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그 물의 비유는 지난 주일의 가라지의 비유와도 유사하다. 그러면서 선과 악의 ‘결정적’ 구분과 선택에 관 한 종말론적 상황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천사들이 나타나 선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는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마태 13,49- 50). 이것은 항상 그리스도를 ‘철저히’ 선택하라는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제1독서 : 1열왕 3,5. 7-12 : 너는 지혜를 달라고 청하였 다
솔로몬 왕조가 시작되었을 때, 솔로몬은 나라를 잘 다스리고 통 치할 수 있도록 가장 소중한 것, 즉 ‘지혜’와 ‘분별력’을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다(7-9절). 재력과 권 력이 그의 품위를 높여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한 것들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는 지혜와 덕망 이 없다면 그는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고 만다. 이러한 모습은 일반 사회 뿐 아니라 교회의 역사 안에서, 지금 현재도 드러나고 있다. 그리하여 야훼께서는 솔로몬이 “장수나 부귀나 원수 갚는 것”(11절)을 청하 지 않고 지혜를 청한 것을 칭찬하시며, 그에게 “슬기롭고 명석한 머리”를 주실 뿐만 아니라 다른 은총도 무수히 베풀어주신다(12-13절).
솔로몬의 이 기도는 모든 사람들의 생활에서 가장 본질적 인 것을 꿰뚫어본 기도이다. ‘선과 악을 가려내고’ 공동체에 유익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명석한 머리‘는 더욱 그렇지 않은가 ?
교회 안에서도 책임을 맡은 입장이라면, 바로 다른 사 람들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그들의 행복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며, 우리가 추구해야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찾는다는 이유로 세상을 멀리하거나 이웃에 게 무관심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분은 현세의 모든 것을 통하여 어디서나 그분 을 발견하고, 솔로몬이 백성들을 위해 하느님께 청했듯이 우리 형제들을 위해 청하 기를 바라신다.
복음: 마태 13,44-52: 하늘나라 에 대한 비유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진주에 대 한 비유에는 다 같이 값진 보물을 찾자마자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팔아버리고 그 보물을 얻으려 애쓰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44; 46 참조). 그들은 그들이 발견한 엄청난 가치, 그것은 그리스도의 현존 즉 하늘나라에 압도되어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그 것을 소유하려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어떠한 모험도 무릅쓸 수 있는 ‘용기’를 드러내게 된다. 여 기서 이제 그리스도와 복음에 비길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망설일 수 있겠는가 ? 그분 때문이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목숨을 얻 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 10,39).
그러 나 이것이 어려운 것은 그러한 가치를 알면서도 그것을 잡기 위해 용기있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또 그 것을 실현하는데 방해가 되는 하찮은 일들을 포기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이나 유일한 진주를 얻을 기회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인간적인 모든 것은 우리 자신 안 에 ‘새롭게 변모’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현존이 그렇게 작용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그러한 활동 즉 ‘새롭게 변모’시키는 활동을 받아들이고 그분께 온전히 자신을 내 맡겨야 한 다. 이 때에 우리는 그 보물과 진주를 갖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지혜’이다.
복음의 마지막 부분 에서 참된 제자의 모습을 이렇게 비유하고 있다.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는 마치 자기 곳간에 서 새 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52절). 이 비유는 마태오의 개인 체험 뿐 아니라 그 의 복음을 연상케 한다. 그의 복음은 구약성서의 모든 내용(낡은 것)이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빛에 비추 어 재해석된 무한한 가치를 지닌 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은 신앙의 유산으 로 전해진 복음의 무한한 ‘부’를 더 깊게 하고,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삶을 통하여 앞으로 나아가라는 권 고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세대가 처음부터 발굴해서 세상에 드러내야 할 ‘보물’의 진가를 발견하고 또한 널리 알릴 수 있는 방법이다.
제2독서 : 로마 8,28-30 :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하셨다
사도 바오로 역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해 깊이 사고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 여 베풀어주시는 사랑의 선물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영원으로부터 생각하셨고(에 페 1,3-14) 모든 것을 우리의 ‘선익’을 위하여 마련하시고 ‘미리 정하셨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 “그분의 아들의 모습”(29절)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때에 하늘나라가 확장되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나라를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바오로 사도에 의하 면 하느님께서는 이미 당신의 계획 속에 우리를 ’영광스럽게 해주실‘ 계획까지도 세워놓으셨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응답을 드리고 그분을 ’다시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참된 지혜란 무엇인가 ? 하느님 을 두려워하며 그분의 뜻에 항상 일치하려고 하는 삶을 통하여 그분을 소유하는 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참된 지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아버지 하느님과 일치하셨던 그리스도는 지혜 자체이신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닮으려 진정으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삶이 된다면 우리는 진정한 지혜를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을 닮을 수 있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들을 팔 수 있을 때, 하늘나라와 그분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그 지혜와 함께 참된 봉사 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참된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하고 또 우리 의 삶을 노력하자. ♡
보물과 그물의 비유 -허성 신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려라”
오늘의 복음말씀 내용 역시 「하늘 나라」에 대한 여러가지의 예들이다. 하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고, 또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 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고, 또 바다에 그물을 쳐 온갖 것을 끌어 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면 첫번째로 밭에 묻힌 보물이란 무슨 뜻일까? 우리는 역사가 오래된 옛 도시인 경주에서 누가 굴착기로 토목공사를 하다가 엄청나게 많은 문화재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종종 접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경우에 문화재 관리규정이 있어서 발견한 사람은 국가에 신고를 해야 하고 신고한 문화재는 국가에서 관리를 하지만 그런 규정이 없다면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투자해서라도 그 보물들을 발굴하려고 할 것이고, 그렇게 해서 묻힌 모든 보물들을 발굴한다면 그는 큰 부자가 될 것이다. 옛날 고대문명이 찬란했던 중동지방에서는 민족들 간에 전쟁도 잦았고 때로는 홍수나 가뭄같은 천재도 심해서 생활터전을 버리고 급히 피난을 가거나 이사를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에 미처 운반할 수 없는 보물이나 살림도구 등은 땅을 파고 감추어 두고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찾겠다고 하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몇년 후에 돌아와 보니, 사막이 대부분인 그 지역이 그동안 모래바람으로 지형이 너무 많이 바뀌어서 어디에 자기의 보물을 묻었는지 몰라 끝내 못찾은채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기에 고고학자들은 지금도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동원해 옛 보물들을 발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두번째로 장사꾼이 좋은 진주들을 찾아 나섰다가 찾던 진주를 만났을 때 기뻐하며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는 서부영화에서 금을 캐서 부자가 되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목선으로 대양을 건너 아메리카 신대륙에 와서 인디언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으면서까지 험한 산속에서 금맥을 찾다가, 마침내 큰 금맥을 발견했을 때엔 환호성을 지르며 자기들이 동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이 재산이건, 몸이건, 모험이건, 폭력이건, 권력들을 총 동원하여 그 광산을 개발하여 금을 캐는 모습을 종종 본다. 낚시꾼들은 월척의 고기를 낚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낚시터로 떠나지만 작은 고기만 잡힐 경우엔, 그 작은 고기도 소중히 낚시 바구니에 보관하다가 마침내 월척의 큰 고기를 낚게 되면 소중히 간직하던 작은 고기들은 그것이 얼마가 되든지 모두 다른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어 버리고 큰 고기만을 챙긴다. 사도들은 예수께서 부르시자 즉시 자기들이 지금까지 소중히 여겨왔던 가정, 재산, 직업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사도 바울로는 신도들을 박해하러 다마스코로 가다가 예수님을 체험하고는, 그가 그때까지 소중히 여기던 자기의 모든 것들을 쓰레기 같이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는 『그리스도가 내 생애의 전부』라고 까지 고백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께서는 그리스도께 너무나 반한 나머지, 비 그리스도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만을 자기의 몫으로 챙겼다. 아무도 두 주인을 똑같이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만을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다. 세번째로 하늘 나라가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 올려 좋은 고기는 그릇에 가리어 담고, 못먹을 고기는 밖에 집어 던진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밀밭에 밀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서 공존하듯 이 세상도, 이 교회도, 이 사회도, 심지어는 내 자신 안에도 선과 악이 공존하면서 서로를 견제하면서 때로는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매일 보고 있고 체험하고 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의 피조물 중에 서로 가장 걸작품이고 하느님의 숨결을 받아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피조물인 우리의 원조 아담과 하와가 무절제한 욕심과 교만심을 자극한 악마의 작전에 넘어감으로써, 가치관의 혼돈과 온갖 죄악이 난무하는 어두움의 세력이 인류를 지배하게 되었고, 이 죽음의 나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강생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악의 세력을 제압하시고 죽음의 그늘에서 신음하던 인류를 구원하셨지만,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구원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는 시작되었지만 끊임없는 도전을 받고 있어서 종말에 결정적인 승리를 얻을 때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 성령의 도우심과 성모님의 전구하심을 구하며 용감히 싸워야 하겠다.
하늘나라 문을 열어본 사람 -양승국신부-
벌써 몇달째 뵙지 못했던 저희 수도원 '단골 할머님'께서 오셨기에 반가운 마음에 차를 한잔 대접했습니다. '자식들이 다들 효자이니 해외 효도관광이라도 다녀오셨겠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면 도로를 걸어가시던 중 한 운전자의 부주의로 대퇴부를 크게 다친 할머님께서는 장장 4개월 동안이나 병원 신세를 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저는 '그동안 꼼짝도 못하시고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냐? 지금은 좀 어떠시냐?'고 여쭸는데, 할머님 대답은 저를 더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70평생 처음으로 그렇게 넉달 동안 꼼짝없이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처음 한두 달은 심신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통증도 컸지만, 가해자가 그렇게 원망스러웠고 미운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석달째 들어서면서 마음을 바꿔먹게 됐다. 하느님께서 내게 대피정 한번 하라고 이런 기회를 주신 것 같다."
아직도 운신이 온전치 못하신데도 할머님께서는 활짝 웃으시면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요즘은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옆 침대에 누워 있던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머리도 다치지 않았고, 뼈도 제대로 붙었고, 정말 고마운 일이다. 병실에서 지낸 넉달이 힘들었지만 내 평생 가장 좋았던 시간이었다. 정말 하느님을 만난 시간이었다."
만만찮은 고통 가운데서, 이해하지 못할 불운한 사건에서도 하느님 뜻을 찾고 하느님의 눈으로 만사를 바라보려는 할머님의 신앙이 참으로 훌륭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 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할머님의 신앙고백을 들으면서 진정 그분은 하늘나라의 한 귀퉁이를 목격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늘나라를 조금이라도 들여다본 사람은 할머님처럼 이 세상의 생활양식을 조금씩 탈피하고 초월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늘나라의 문을 잠시라도 열어본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 잠시 스쳐지나가는 이 세상 것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이 세상 그 너머에 있는 더욱 가치 있고, 한층 의미 있고, 더욱 영원한 것, 다시 말해서 하늘나라를 추구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가치 중에 가장 큰 가치는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누가 보건 말건, 험악한 저잣거리에서건 거친 들판에서건 자신이 처해 있는 자리 어느 곳에서나 기쁘게 사는 사람, 열악한 상황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그 사람은 이미 천국을 맛본 사람, 천국을 사는 사람입니다.
월드컵 예선전을 바라보면서 느낀 것 중 하나가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너무도 비본질적인 것들, 엉뚱한 것들에 목숨을 건다는 것입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창창한 어린 선수의 인대나 무릎을 걱정하기보다는 오직 득점만을 생각합니다. 선수 생명에 치명적 태클이나 위험한 파울도 좋은 작전이라며 거칠게 몰아붙일 것을 강요합니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것들, 지적이고 영적인 것들은 대체로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기고 기피합니다. 대신 즉각 효과가 나타나는 것들, 말초적이고 감각적인 것들에 목숨을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생활양식은 조금은 달라야겠지요. 우리는 세상에 있는 많은 대상들 가운데서 좀더 고상한 것, 한층 가치 있는 것, 더 의미 있는 것, 좀더 덕스러운 것, 더 아름다운 것, 더 변치 않을 것들을 추구하고 거기에 목숨을 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최우선적 과제는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신 하느님, 보물 중에 보물이신 예수님을 더욱 적극 추종하는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라는 보물 중 보물을 발견한 진정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있어 다른 모든 것들은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입니다.
'선택'에는 반드시 '포기'가 요청됩니다. 하늘나라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을 삶의 이정표로 삼은 우리에게 있어 이제 예수님 이외의 부차적 요소들에 대한 점진적 이탈과 포기가 요청됩니다.
복 있는 그리스도인 -이시찬 신부-
니에커크라는 사람이 아프리카의 오렌지 강가에 사는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친구와 대화하던 중에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돌이 예사로운 돌이 아님을 발견했습니다. 니에커크는 그 돌을 장난감과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박사에게 감정을 의뢰한 후 다아아몬드인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비싼 값에 팔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흐른 후 니에커크의 집에 토인 마법사가 찾아 왔습니다. 니에커크는 토인 마법사가 가지고 있는 크고 빛나는 돌을 보고 그것을 팔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마법사는 그 돌이 마법용으로 쓰는 것이라며 쉽게 내놓으려 하지 않았지만 니에커크는 자기의 전 재산을 건네주면서 힘겹게 그 돌을 살 수 있었습니다. 감정하여 보니 그 돌도 세계에서 보기 드문 귀한 다이아몬드였습니다. 그는 이것을 보석 상인에게 11만 파운드에 팔았고, 그 상인은 다시 어느 귀족에게 20만 파운드에 팔았습니다. 이것이 ‘남아프리카 스타’라고 불려지는 유명한 다아아몬드입니다.
천국은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으며,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보화와 진주는 모두 값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야 한다는 것을 서두에서 말씀드린 예화에서 보았습니다. 천국도 이와 같습니다.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것은 포기해야 하고, 세상이 주는 기쁨과 재물 그리고 나의 욕망과 영광을 포기해야합니다. 내가 가진 가장 귀중한 것을 포기할 때 소유할 수 있는 그것이 천국입니다.
진정 인생의 최고 가치, 천국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도 바울로는 필립비서 3장 8절부터 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예수회 소속 헨리 나우웬 신부는 자신의 저서에서 "너는 보물을 발견한 사실에서 기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보물을 발견했다고 해서 네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때 보물은 네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이아몬드를 장난감과 바꾼 어린이와 같지 않습니까?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천국의 가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포기 없는 천국의 복을 누리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영원하고 가치있는 것을 얻기 위하여 가진 모든 것을 투자하고 소비하는 복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낡고 오래된, 그리고 살아 있는 -한상봉 이시도로·예술심리치료사 -
새는 아무리 높이 날아도 땅 위에 다시 내려앉는다고 했다. 무주를 떠난 지 한 달이 넘었다. 처음 전북 무주 광대정이라는 산골에 자리잡을 때는 사뭇 유토피아적 환상이 나를 이끌었다. 농사짓고 살겠다고, 숲을 둘러치고 산비탈에서 채마밭을 일구고, 바람소리에 귀를 씻으며 정갈한 삶을 몸으로 감당하기로 했다. 그래서 무주(茂珠)를 무주공산(無主空山)이라 고쳐 불렀다. 주인 없는 빈 산에서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삶, 제 먹을 것 제가 지어먹고, 제 마실 물 제가 퍼서 먹는 삶, 남 속이지 않고 뿌린 대로 거두는 삶을 희망했다.
이맘때쯤 장마가 지속되는 날이면, 우산을 쓰고 산등성이 밭자락에 서서, 발 아래 흩뿌리는 비안개를 바라보며 넋 나간 사람처럼 스스로 감탄했다. 산 논에 비옷 입고 물꼬 보러 가면, 때로 콧등을 타고 내리는 빗물을 느끼며 그저 서 있곤 했다. 그것은 산에 사는 사람의 축복이므로…. 귀농한다고 산에 들어오는 사람은 그러했다. 좁은 경작지와 하늘에 막연히 기대어 짓는 농사가 돈이 될 리 없었고, 한 이삼십 년 뒤에나 기대해야 할 여유로운 휴식을 어쩜 미리 당겨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새 새끼처럼 적게 먹고, 언젠가 썩을 몸을 아끼지 않고, 내 안의 그늘진 숲을 맘껏 들여다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경상도 땅, 아니 아직도 신라 땅이라 불러야 옳을지 모르는 경주에 머물고 있다. 야트막한 건물이 소곳하니 들어앉은 시내를 벗어나, 불국사 앞자락 벌판에 지어놓은 저층 아파트 2층방이 우리 집이다. ‘아파트는 집이라기보다, 여러 개의 방으로 채워진 공간이겠지’ 생각한다. 그 방에서 비 맞는 토함산을 창으로 내다보며 가끔 광대정 산골을 추억한다. 이렇게 비 내리면 광대정에는 송진 냄새 가득하고, 마당에 고인 물도랑에는 송홧가루가 연둣빛으로 덮여 있었다.
문화적 고대(古代)를 회상하는 경주와 역사적 시원(始原)을 더듬는 무주는 어떤 면에서 닮아 있다. 낡고 오래된 것들과 생육번식을 반복하는 자연은 밝은 문명의 그림자이다. 우리가 이미 진작 벗어나 살지만, 또한 그것 없이는 허기(虛氣)에 시달리는 ‘무엇’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틈틈이 천 년 전에 살던 왕들의 무덤가를 헤매고, 그 시신 옆에서 사진을 찍는다. 계곡물에서 나무 그림자에 싸여 세상의 간섭 없이 낮잠을 청한다. 이런 우리네 얼굴은 불쌍하다. 애처롭고 가엾다. 새는 아무리 높이 날아도 땅위에 내려앉아야 다시 날 수 있듯이, 사람도 그러하고 세상도 그러하다.
-이수승 신부-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면 좋겠느냐?"고 물으십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똑같은 질문을 나에게 던지신다면 나는 무엇을 달라고 청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첫 번째 비유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사기 위하여 자기의 온 재산을 포기할 만큼 어리석은 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현명한 사람입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솔로몬 왕은 하느님께 바로 이 지혜를 청해서 받습니다. 그리고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바로 하느님의 숨겨진 지혜요, 보물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어린아이 때는 손 때 묻은 인형이나 장난감이 가장 소중한 보물이요, 어쩌다 생기는 동전 몇 푼, 과자봉지에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큰 세상 것들을 보고 들을 만큼 성장한 후에는 더 이상 내가 가진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또 세상의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현실적인 계산법에 익숙해져 내가 손해보는 짓일랑은 알아서 하지 않게 되고, 내 것, 내 이익에 관계되는 것이면 놓치지 않는 영악스러움이 몸에 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내 이익, 내 것이라는 그 분명한 선은 무엇을 위한 것이며, 어디에 가치 기준을 두고 있는지 문득 스스로에게 물으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솔로몬에게 하신 것처럼 한 가지 소원을 물으신다면 과연 나는 무엇을 청할 수 있을지. 머리가 커진 나는 어린 시절처럼 단순하지도, 순수하지도 못해서 이것 저것 따져보느라 선뜻 대답을 못할 것 같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살만큼 소중한 것도 없이, 그저 남들처럼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니까 의미 없는 것들에만 매달려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 볼 시간이 필요한 때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또 한번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면 좋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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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주일말씀 오늘에서야 읽고 잘 새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