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는 있는 것인가?
초기 경전에서는 무아를 설하며, 대승경전에서는 아상 타파를 설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성청정심이니, 참나니, 본래면목이니, 주인공, 일심, 여래장 등을 동시에 설하기도 한다.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참나, 본래의 나, 진실된 나가 있다고 말하니 이 즈음에 이르면 많은 분들께서 깊은 수렁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혼란스러움을 잠시 비워두고 부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지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고 있는 ‘참나’에 대하여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
보통 우리가 참나를 말할 때, 그 참나는 참나가 아니라 참나라는 말일 뿐이고, 생각일 뿐이고, 참나라는 개념의 인식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많은 선지식 스님들께서 참나를 찾으라고, 자성불을, 본래면목을 보아야 한다고 방편설법을 하시지만, 많은 제자들은 ‘도대체 참나가 무엇일까’ 하고 참나에 대하여 생각하고, 분별하고, 인식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참나는 생각되어질 수 없고, 말로 표현되어질 수 없으며, 우리의 인식과 분별 그 너머에 있고 없음을 넘어 서 있을 뿐이다. 행여 ‘생각 그 너머에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나’를 말로 표현했다고 했을 때 조차 그것은 그렇다고 말로 표현되어지고 있을 뿐이지 그것은 여전히 참나가 될 수 없다. 단지 ‘우리의 생각과 인식, 말을 초월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일어날 뿐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들 중생들의 마음에서는 무언가 표현을 하길 바라고, 논의 되길 바라고, 설하여 지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자리는 표현할 수도 없고, 논의의 대상도 아니며,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대한 그 어떤 상도 내세우지 말 것을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이 즈음에서는 ‘참나’라고 방편으로 세워 놓은 그 방편까지도 오직 일미(一味)의 진리로써 거두어 들이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다.
세속제와 제일의제(第一義諦)라는 말이 대승불교 경전이 나온 이후에 논사들에게 설파되고 있는 점도 이러한 점, 이렇듯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그 자리에 대한 또 다른 표현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동안 방편으로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자성불을 찾아야 하고, 본래 면목을 보아야 한다고 했던 그 말 또한 단지 방편의 말일 뿐이었음을 잘 살필 수 있어야 하겠다.
즉, 우리가 쉽게 쓰는 말 ‘참나’니, ‘자성불’이니, ‘본래면목’이니, ‘한마음’이니 하는 이 모든 것들 또한 하나의 진리를 표현하는 방편의 ‘말’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당처인 것은 아니니, 그러한 말에도 걸려서는 안 되며,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금강경의 표현대로 한다면 ‘참나는 참나가 아니라 이름이 참나일 뿐’인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그래도 방편일 뿐이지만 참나, 자성불이 있긴 있는게 맞지요?’ 하고 질문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그것마저도 다 놓아버려야 한다는 말씀을 금강경에서는 하고 있다.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일견에서는 대승이나 선불교의 견성, 본래면목 등을 보고 불조의 가르침에서 어긋난 것이라고까지 폄하하는 일이 있던데, 그것은 선의 본질과 언어적인 방편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실제 육조단경에서는 ‘본래 한 물건도 없다’라고 하였고, 백장어록에서는 ‘원래 부처란 없으니, 부처라는 견해를 내지 말라. 부처란 중생에게 사용하는 약이다’라고 했다.
또한 임제는 ‘구할 수 있는 부처도 없고, 이룰 수 있는 도도 없고, 얻을 수 있는 법도 없다’고 했고, 황벽은 ‘본래 부처에게는 진실로 한 물건도 없다’고 했으며, 대혜종고는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고 조사가 서쪽에서 왔지만, 역시 전해줄 수 있는법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러니 참나는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으니 오직 중도로써 설할 뿐이다.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평일 07:50~08:00) 방송중에서
첫댓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항상 읽으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어갑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