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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 묵상글 들. (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 )
* 부족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겸손되이 인정하고 하느님께 다가가는 이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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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의 묵상
성경을 공부하면 할수록, 강론을 준비하면 할수록 ‘성경은 교만한 자 앞에서는 침묵한다.’라는 것을 느낍니다.
성경은 수천 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의 손으로 쓰인 글입니다. 그리고 이천 년이 넘게 탐구와 묵상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이렇게 장구한 역사를 지닌 말씀, 하느님의 섭리 속에 주어진 이 말씀을 고작 몇 년 공부한 사람이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제아무리 똑똑하다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지식으로 성경 말씀을 다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교회는 시에나의 가타리나, 아빌라의 데레사, 아기 예수의 데레사 이렇게 세 성녀에게 ‘교회 학자’라는 칭호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면면을 보면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는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글을 배웠습니다.
그의 저작들은 대부분 그가 구술한 것을 다른 사람이 옮겨 쓴 것이라고 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도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중도에 공부를 포기해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17살까지만 공부하였습니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24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4살에 수녀원에 들어갔기에 그리 오래 공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이 교회 학자라고 불릴까요? 지식의 차원으로만 하느님을 아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똑똑하지는 않지만 부족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겸손되이 인정하고 하느님께 다가가는 이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신다는 것을 교회가 선포한 것입니다.
- 한재호 루카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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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0,17-24: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갔다가 돌아와서 기쁨에 넘쳐 스승님께 일의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어 스승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랐다. 복음을 전하는 자세를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따랐기 때문에 제자들은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 앞에 자신들이 행한 모든 것을 기쁨에 넘쳐 보고 드리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18절) 이 말씀은 사탄이 높은 하늘에서 땅으로, 기고만장한 오만에서 굴욕으로, 영광에서 모멸로, 막강한 힘에서 무력한 상태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그자가 세상을 지배하였고, 모드 그를 경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 말씀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시자,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 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19절) 뱀과 전갈을 밟을 수 있는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뱀의 머리를 짓밟으신 사실에서 온다. 그들이 뱀과 전갈의 독침에 쏘이더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치유될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사탄을 물리치셨고,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도 같은 능력을 주신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기적을 행하고 사탄을 물리친 일로만 기뻐한다면 교만이 커질 수 있다. 그래서 그 교만을 싹일 때 잘라버리신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20절) 고 말씀하신다. 논에 피가 올라오면 즉시 뽑아버리는 농부와 같이 하신다.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시고 예수님 역시 기쁨으로 찬가를 부르신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21절).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란 이방의 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점성사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모두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분은 겸손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내신다. 이것이 복음서의 중심 사상이며 예수님의 본 모습이다. 스승님은 우리를 ‘철부지들’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신비를 알 수 있으니, 우리의 눈은, 또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눈은 행복한 눈이다.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들었으니, 우리 삶의 참된 제물로 그분께 흠숭과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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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 한상우 신부님.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모든 이름에는
그 나름의
의미있는
무게가 있다.
사람은
떠나가도
그 사람의
이름은 남는다.
우리 삶의
보호자가 되시는
우리 이름의
아버지시다.
아버지
하느님의
가슴에 새겨지는
소중한
이름들이 있다.
기록과
기억사이에
눈물겨운
우리의 여정또한
뜨겁게 새겨진다.
하느님만으로
살아가는
이름들이다.
아름다운 삶은
아름다운
이름이 된다.
감출 수 없는
우리를 향한
선하신 사랑이다.
선하신 뜻은
아버지의
구원이다.
선하신 뜻은
아버지의
때안에서
언제든
이루어진다.
우리는 오늘
어떠한 삶을
만나고 어떠한
빛깔로 새겨지고
있는지를 성찰한다.
아버지 하느님의
가슴에 우리는
어떠한 이름으로
새겨질지를
또한 반성합니다.
기쁨과 소중한
이름으로
새겨지길
진심으로
기도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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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의 지면 중에 ‘평화 책꽂이’가 있습니다. 책을 소개하고 필자의 느낌과 의견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한영국 선생님은 정채봉님의 ‘초승달과 밤배’를 소개하였습니다. 그동안의 주로 외국 작가의 책을 소개하였는데 이번에는 한국 작가의 책을 소개한다고 하였습니다. 내용을 알고 싶으신 분은 미주가톨릭신문 홈페이지 지면보기 9월 13일자를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는 ‘연좌제와 신분제’의 사회를 살았습니다. 연좌제는 부모의 잘못, 특히 사상과 관련된 잘못이 있으면 자녀들 또한 영향을 받는 제도입니다. 공무원 시험에 응시할 수 없고, 정보원에 의해서 감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초승달과 밤배에서 할머니는 손자와 손녀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사상범으로 몰려 죽었기 때문입니다. 손자와 손녀 역시 사상범의 가족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많은 사람이 연좌제로 인해 고통을 받았습니다. 저의 주변에도 그런 분들이 있었습니다.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지만 면접에서 떨어지곤 했습니다. 연좌제의 벽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인권이 신장되면서 ‘연좌제’는 더 이상 삶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이 가끔씩 큰 홍역을 치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Black Lives Matter'입니다. 지금 미국에 있는 흑인의 선조들은 대부분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왔습니다.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Roots)'를 통해서 미국 흑인 노예들의 삶과 애환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세기 전만해도 대부분의 나라는 신분제의 사회였습니다. 한국도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신분이 있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천민(賤民)’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사람이 그 신분에 따라서 등급이 매겨지는 사회였습니다.
신분이 다른 사람과는 사랑할 수도 없었고, 사랑한다고 해도 결혼할 수 없었습니다. 재능과 능력이 있어도 신분이 천하면 재능과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때로는 그 재능과 능력 때문에 힘든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우리는 더 이상 피부색 때문에, 성별 때문에, 신분 때문에 차별 받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유엔 인권 선언문은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 우리 모두는 이성과 양심을 가졌으므로 서로에게 형제자매의 정신으로 행해야 한다. 피부색, 성별, 종교, 언어, 국적, 갖고 있는 의견이나 신념 등이 다를지라도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연좌제와 신분제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에 따라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가장 쉬운 일인데 인류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가난의 문제입니다. 가난은 사상과 신분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난은 물질과 재물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나누면 해결 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가난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굶주려서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치료받지 못해서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이 없어서 거리에서 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코로나19는 가난한 국가와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말이 있습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나 지배하려 하지 않고, 소인은 지배하려 하나 공정하지 못합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각 악기의 소리를 존중합니다. 각 악기가 똑같은 소리를 낸다면 아름다운 음악이 되지 못합니다. 각 악기는 저마다의 소리를 연주해야 합니다. 그러나 각자의 악기는 지휘자의 뜻을 따라 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나침판은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언제나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릴 수는 있지만 언제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화이부동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경청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차분하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가고,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욥은 화이부동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도 감사했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거두어 가실 때도 감사했습니다. 재물이 많았을 때는 기꺼이 이웃과 나누었고, 재물을 다 잃었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욥을 고통과 시련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욥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20년 이상 도시 빈민을 위해 사목하는 동창 신부가 있습니다. 다른 사목을 하는 동창을 존중하고, 경청합니다. 자신의 사목을 드러내거나 내세우지 않습니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늘 웃는 모습으로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하고 있습니다. 화이부동의 삶을 사는 동창입니다.
동이불화의 삶을 사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곁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배가 생명보다 중요하다며 정부의 방역지침을 어기고 대면 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는 어쩌면 동이불화의 삶을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배의 장소 때문에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화이부동의 삶을 사는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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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루하루가 좋은 날입니다
-일일시호일-
일일시호일, 하루하루 좋은 날, 기쁜 날, 행복한 날을 사는 이들은 빈손으로 방문해도 기쁘고 반갑고
고맙습니다. 어제 이런 분들이 방문하였고 그대로 사진에 담으니 꽃보다 더 예쁜 모습들에 참 행복했습니다.
이런 분들은 꽃보다 아름다워 저절로 나오는 시입니다.
“꽃이 꽃을 가져 오다니요/그냥 오세요/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좌우명으로 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얼마전 방문했던 코이노니아 자매회 회장이 전해준 야생화 자수전 팜프렛 제목을 보고 떠오른 생각입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바로 하루하루가 좋은 날(Everyday a good day)이라는 뜻입니다. 자수전 팜프렛에 나온 야생화 꽃들도 단순해서 좋았고 선물 받은 작은 작품 둘은 게시판에 붙여
놓았습니다.
맑으나 흐리나 비오나 눈오나, 하루하루 다 좋은 날이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사는 이들이 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제 자작 좌우명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다음 두연과도 통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定住)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작은 나무가
이제는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참 많이도 인용했습니다만 읽을 때 마다 새롭습니다. 네 글자, ‘한결같이’로 요약되는 삶입니다. 바로 우리 분도회 수도자들의 정주서원이 의도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주님과 함께 날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믿음의 푸른나무로,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맑게 흐르는 사랑의 강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삶 자체가 구원의 표지요 그대로
미래가 됩니다.
이렇게 살 때 비로소 해피엔딩, 행복한 마무리 인생이 됩니다. 바로 오늘 욥기와 루카복음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모두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내용입니다. 하루하루 한결같이 최선을 다해 살아 온 결과입니다. 바로 믿음의 승리입니다. 욥기에서 사탄의 시도는 욥의 이런 한결같은 삶의 자세로 초지일관한 결과 보기 좋게 실패로 끝났습니다. 욥의 승리이자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욥의 하느님 체험의 고백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하루하루 한결같이 최선을 다해 살아왔기에 마침내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이런 하느님 체험의 고백입니다. ‘개안開眼의 여정’에 항구한 결과 마침내 때가 되어 영혼의 눈이 활짝 열려 주님을 뵙는 욥입니다.
이어 주님은 욥의 운명을 되돌리심으로 참 행복하게 마무리 짓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루카복음의 예수님 역시 욥처럼 해피엔딩, 행복하게 일단락 짓는 모습입니다.
성공적 선교사명을 마친후 귀환하여 기뻐하는 일흔 두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결정적 말씀을 주십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이미 불러 주시어 당신의 사람으로 삼아 주신 것을, 바로 우리의 성소聖召에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매일 우리를 새롭게 불러 주시어 날로 당신과의 일치를 깊게 하시니 바로 이것이 기쁨의 원천이요, 그 무엇도, 누구도 우리를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하느님 아버지 체험입니다. 욥처럼, 아니 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느님 아버지를 고백하며 감사기도를 드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체험의 감사의 고백기도가 참 아름답습니다. 여기서 철부지들이 지칭하는 바 순수한 영혼의
일흔 두 제자들은 물론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들입니다. 참으로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늘 나라의 신비를 깨닫게 하시고 일일시호일 날마다 좋은 날, 행복한 날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10,24).
이렇게 날마다 주님을 뵙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참 행복이요 이 또한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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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26주 토요일-참회의 본보기인 욥
한 주간 들었던 욥기가 오늘 이제 종장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욥은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고 고백하는데
우리가 '알지도 못하고 함부로 지껄였다.'고 할 때의 딱 그 표현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제 알았다고 하고,
당신을 뵈었다고도 한 다음 참회한다는 말도 합니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그래서 욥의 참회에서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참회의 본보기를 보게 되는데
첫 번째는 무엇보다도 알지 못했음, 나의 몰랐음에 대한 참회입니다.
우리는 알고서도 나쁜 짓 한 것을 죄라고 생각하기에
보통 모르고 한 것은 죄라거나 참회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단순 무지는 죄라 할 수 없고 굳이 문제시한다면 부족함입니다.
주님께서도 모르고 한 것에 대해서는 죄가 덜 하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지요.
"알고도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루카 12,47)
그러나 단순 무지가 아니라 교만에 의한 영적인 무지는
영적인 세계에서는 제일 중죄이고 근본적인 죄입니다.
하느님의 신비와 근본적으로 단절케 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신비神祕란 말을 풀어서 얘기하면 신적인 비밀이고,
비밀이란 모르기 때문에 비밀이지요.
그런데 인간의 비밀은 모르게 하기 때문에 비밀인 데 반해
신비는 하느님께서 알게 하셨는데도 우리 인간이 모르는 것입니다.
그 하심과 그 크심이 너무도 크고도 무한하여 도저히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왜 그리 하셨는지 모를 때,
특히 나와 관련하여 왜 그리 하셨는지 모를 때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지껄이면 그러니까 원망이나 불평을 하거나 불신을 토로해서는
안 되고 마리아처럼 그 뜻이 뭣일까 오히려 곰곰이 묵상해야 합니다.
욥의 참회는 이런 하느님 신비에 대해 모름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욥의 참회의 결과는 이제 신비를 아는 것으로 이어지고
그래서 욥은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라고 고백하고,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참회의 결과 욥은 마침내 하느님을 뵙게 됩니다.
하느님을 뵙는 것은 욥이 극도의 고통 중에서
꼭 이루고 말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 고통을 치르고서도 주님을 뵙지 못한다면
아무런 대가가 없는 것이기에 너무도 억울하고 불행합니다.
자신이 이 모든 고통을 하느님을 직접 뵙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고통이 하느님께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면 하느님은
꼭 나타나셔야 하고 그래서 그는 고통의 한 가운데서도
하느님 뵙기를 열망하며 19장에서 이미 이렇게 절규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마침내 나타나셔서 응답해주시니
그 응답이 나무라시는 것일지라도 너무도 감읍할 따름이고,
재물과 자식을 다시 되돌려주시지 않아도 주님을 뵌 것만으로 충분한데
하느님께서는 뺏어가셨던 것 곧 재물과 종과 자식도 다 되돌려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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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누가 주님의 신비를 대면할 수 있는지 봅니다.
제1독서는 고통에 차 울부짖던 욥이 주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고 승복하는 장면입니다.
"저에게는 너무나도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욥 42,3)
풍요를 누리던 욥이 사탄의 농간으로 삶의 나락에 떨어지면서 욥기는 인간 삶의 고통과 실존을 치열하게 다룹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대목은 욥이 감정의 폭풍을 넘어 비로소 자신이 약하고 미소하며, 무능하고 무지한 존재임을 절감하고 주님께 이를 고백하는 장면이지요.
욥기의 본문 안에는, 경솔한 세 치 혀로 욥의 잘못을 캐내어 자기들의 설익은 신학에 꿰어맞추려는 무례한 친구들에게, 그리고 하느님께 욥이 고통에 대해 항변하는 부분이 꽤 길게 차지합니다. 욥은 극한의 억울함과 서러움이 치받쳐 올라오는 것을 누르지 않고 모든 인간을 대변해 질문하고 또 질문하지요. 그리고 이제, 그는 "폭풍 속에서 말을 건네신 주님"(욥 38,1 참조) 앞에서 온전히 제 자리를 찾습니다. 창조주 앞에 선 작디 작은 피조물로서의 자신을 인식하게 된 것이지요.
"이제는 제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욥 42,5)
인간으로서 더는 견뎌낼 수 없는 한계점까지 갔던 욥이 주님을 봅니다. 고통과 함께 욥은 신비의 경계를 넘었습니다. 주님은 욥이 자신의 약함과 무지를 깨닫자,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비록 그의 자각과 회개가 완전하지 않더라도 그리 하십니다. 고통의 강을 건넌 이에게는 주님의 신비를 마주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복음은 파견을 받아 선교 여행을 떠났던 일흔두 제자의 귀환 장면입니다. 일흔두 제자도 기뻐하며 돌아오고(루카 10,17), 예수님도 "성령 안에서 즐거워"(루카 10,21)하시니 참으로 밝고 희망찬 분위기가 느껴지지요.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하느님은 당대의 석학들이나 종교 지도자같은 제도권의 권위자들이 아니라, 어부와 세리 등 오합지졸처럼 모여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비를 펼쳐 보이십니다. 여러 모로 부족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받은 권한을 통해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받는 민중에게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선사했음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작은 이들을 통해 전해지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야말로 진정 "아버지의 선하신 뜻"(루카 10,21)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루카 10,22)
아버지에 대한 앎은 아들에게만 유보되었고, 아들에 대한 앎 역시 아버지께만 속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 중에 이 신비를 허락받은 한 부류가 있다면,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내세울 것 없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별볼일 없는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려 하십니다. 제도와 지식으로 무장한 이들에 비해 공도 더 들고 실패 확률도 커서 그야말로 '가성비'가 떨어지는 대상일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시지요.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 10,23)
제자들은 행복합니다. 주님의 힘이, 부족한 자기들을 통해서 이루신 업적을 보았으니까요. 그들이 행한 치유와 구마의 기적이 가장 먼저 변화시킨 이들은 바로 제자들 자신들일 겁니다. 그리고 치유받은 이들의 기쁨과 감사를 통해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든 이 자리에 함께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생생히 체험했을 겁니다.
지금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는 스승을 보는 행복 또한 무량합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곧 하느님의 충만함이고 성령의 흡족함이니, 성삼위 하느님의 완전한 행복이 제자들의 영혼에도 흘러듭니다. 주님의 신비는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의 겨자씨 한 알만치도 못 되는 믿음을 통해 작은 이들에게 내리고 작은 이들을 물들여 변모시킵니다. 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하늘 나라의 신비가 아닐까요!
자신의 약함과 작음을 인정하게 되는 여정에는 고통이 반드시 존재합니다. 자신이 한계에 갇힌 한갓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고통이 아니고서는 깨닫기 어려운 신비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보잘것없이 초라한 작음에 질식되거나 좌절하지 않는 이들이 바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철부지들입니다. 잘나서가 아니라 믿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 이들이지요.
모두가 더 가지려, 더 올라가려, 더 드러내려 하는 세상에서, 비워서 나누고 낮추고 드러나지 않게 사랑하는 우리는 철부지들입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를 간직한 하느님의 귀하디 귀한, "작은 이들"이지요. 우리가 지나온, "악!" 소리 나게 견디기 힘들었던 고통의 자취는 어느새 알알이 영롱한 보석처럼 우리 영혼에 새겨져 빛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더 작아지고 더 낮아지려는 우리에게 허락된 신비는 곧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의 증거입니다.
주님의 작은 이들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말씀으로 철부지인 우리를 묶어 주신 주님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당신 말씀 고통 속에서도 위로가 되나이다."(영성체송) 하고 노래한 시편 작가와 함께 말씀에 의지해 작음의 길, 비움의 길, 낮아짐의 길을 함께 걸어갑시다. 길동무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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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창조시기 33일째-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20)
'완덕의 완성인 겸손!'
예수님으로부터 모든 힘을 받아 파견되었던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10,17)
큰일을 하고 돌아와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령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이 교만에 빠지지 말고, 겸손 하라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겸손은 완덕을 완성시키는 최고의 덕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더라도...
우리가 아무리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인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을 잘 완수하더라도...
여기에 겸손의 덕이 더해지지 않으면 결코 완덕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늘 독서는 욥기의 말씀인데, 하느님께 드리는 욥의 둘째 답변입니다. 욥은 이 답변을 통해 하느님께 자신의 신앙과 허물을 고백합니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욥기42,2.5-6)
욥의 이 멋진 답변을 들으신 주님께서 욥에게 이전보다 '더 큰 복'을 내리십니다.
좀 안다는 사람들!
좀 가진 것이 있다는 사람들!
좀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람들!
신앙생활 좀 한다는 사람들!
바로 이런 사람들이 깨어 있지 않으면 쉽게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심하면 하느님의 자리 위에서 놀 수도 있습니다.
교만은 우리의 '가장 큰 적이며 장애'입니다.
겸손한 이들이 됩시다!
철부지들이 됩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욥'이 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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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 이영근 신부님.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복음>은 파견 받았던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말하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드리는 감사기도요 찬미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20,21)
이는 마치 예수님의 겟세마니 기도에서처럼, “아버지의 뜻”과의 친교와 일치를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겟세마니에서의 기도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마태 26,42)라는 수난의 길을 앞두고 드리는 순명과 의탁의 기도라면, 여기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라는 확신에 찬 감사와 찬미의 기도입니다. 그러니 마치 이 기도는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루카 1,47)라고 기뻐 찬미하는 성모님의 노래와 같습니다. 곧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파견된 제자들에게 곧 철부지들에게 드러내주심에 “감사를 드리십니다.” 여기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감격스런 찬양의 고백’을 뜻합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는”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와, 감격스런 고백과, 탄성은 ‘히브리인들의 축복기도의 전형적인 방식인 ‘감사’(berakah)를 통해 표현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잘난 체 하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아니라, 받아들이며 기뻐하고 돌아온 철부지 제자들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께 넘겨주셨다.”(루카 10,22)는 것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만이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고, 동시에 당신과 당신이 드러내 보여주려는 이들만이 아버지를 알게 된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루카 10,22).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를 알게 된 제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3)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며,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과 자비를 입은 경험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찬가”(마니피캇)을 불러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이렇게 기도할 일입니다.
“아버지, 저희에게서 일어난 모든 것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저희가 응답하도록 도와주소서.
그리하여,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소서.’
(Ut in omnibus glorificetur Deus. 베네딕도 규칙서 58,9)”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주님!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선하신 뜻을 드러내신 당신의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 뵙고,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당신 뜻, 그 안에서 제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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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 새벽을 열며.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빠다킹신부님.
“신부님은 저를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평생 혼자 살아온 분이 가정생활의 어려움을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과연 제게 어떤 도움을 얻을 수가 있을까요? 물론 그 어디에서도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없어서 저를 찾아오셨겠지요. 그러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부정적인 생각 자체가 정작 도움을 받을 수 없도록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할까요?
우리는 종종 “당신이 뭘 알겠어?”라는 부정적인 마음으로 상대방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그래서 내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너’만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마음이 주님을 향한 우리 생각도 바꿔버립니다. “주님께서 뭘 아시겠어? 정말로 계시기는 한 거야?”라는 생각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아무 도움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게 큰 도움이 될 거야.”라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만났을 때는 계속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자그마한 말과 행동 안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 위치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부정의 자리인지, 아니면 긍정의 자리인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위치에 따라서 내 문제 해결의 방향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전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72명의 제자가 예수님께 이렇게 보고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제자들은 큰 기쁨에 휩싸였습니다. 마귀들까지 복종하는 자기들이 받은 사도의 명예로 인해서 크게 기뻤던 것입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있습니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으로도 하늘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 기뻐할 수 있는데, 세상의 인정을 받아야지만 기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인정만을 따르다 보면 주님께 대한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권능이 이제 자신들에게 주어졌음을 깨닫습니다. 이는 이제까지 어떤 임금들과 예언자들도 받지 못한 선물이었습니다.
그 선물을 우리도 받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의 부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긍정의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간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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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즐거움을 잃지 않는 한 인생은 무너지지 않는다(이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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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청하고 계십니까?
제게 면담을 요청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기대를 하고 오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실망을 안고 돌아가시는 분이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부이기에 삶의 나락에 빠진 것을 구해주고, 마음의 모든 문제를 마법처럼 해결할 것으로 생각하십니다. 하지만 제게 이런 힘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전지전능한 힘이 제게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저를 찾아오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저와 함께 주님 안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일 것입니다. 즉, 제게서 전지전능한 힘 자체를 요구하시는 분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실망만 안고 가시지만, 기도 안에서 함께 대화하면서 주님의 위로를 받으시려는 분은 기쁨을 안고 돌아가십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청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주님의 전지전능하신 힘을 요구하기보다, 주님과 함께할 힘을 요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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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이기우 신부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오늘은 개천절입니다. 기원전 2333년에 이 땅에서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뜻으로 ‘하늘이 열렸다’고 천명한
개천절입니다. 문명의 단위를 나라라고 부르는데, 그 주체가 단군왕검으로서 고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고, 그 후 역사에서 나라의 권력을 맡은 주체는 여러 번 바뀌어서 고조선이 고구려, 신라, 가야, 백제였다가
통일신라로, 다시 고려를 거쳐 조선까지 내려왔던 겁니다. 일본인 군국주의자들이 침략하여 식민통치를 한 적이 있으나 그들은 우리 민족에게서 나라가 아니라 정치권력을 뺐었던 것뿐입니다.
우리는 나라를 빼앗긴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제는 이 땅에 총독부를 세워놓고 우리의 말과 글 나아가서는 문화와 전통까지 말살하려고 획책했고,
전반적으로 조선 왕조보다 훨씬 더 못한 악랄한 정치로 이 땅의 백성을 노예로 부리며 괴롭혔습니다.
일제 36년의 식민통치는 총체적인 악이었고 식민지 시절 조선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하지만 말과 글 그리고 문화와 전통을 빼앗기지 않고 지키려던 백성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 패망한 일제로부터
우리는 36년만에 권력을 되찾고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나라의 이름을 바꾸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더 또렷한 민족적 정체성과 성실한 노력으로 국운을 상승시켜서
이미 일본을 따라잡았고 현재 미국과 유럽 선진국들도 부러워하는 나라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하자면, 이 나라의 기원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이나 삼일운동 직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진 1919년이 아니라 최초에 문명사회를 세우려는 뜻으로 이룩된
고조선이 세워진 기원 전 2333년 오늘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나라의 역사는 거의 반만년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우리 민족은 나라의 이름이 여러 이름으로 바뀌는 동안에도 10월 초순에 제천(祭天)행사를
치르며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이화세계(理化世界)라는 개천의 이념을 기리곤 하였습니다.
‘홍익인간’이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겠다는 뜻이고, ‘이화세계’란 이치로써 세상을 다스리자는 뜻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5천 년 전인 그 옛날에 이렇듯 심오하고 선진적인 정신을 기치로 내걸고 세워진 나라입니다.
제천행사는 '하늘을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으로서,
스스로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천손족 의식을 지닌 우리 겨레가 지내던 고유 의식입니다.
씨를 뿌린 봄에는 농사가 풍요롭기를 하늘에 기원하고 곡식을 거둔 가을에는 풍요로운 수확을 주신 하늘에
감사하려는 취지로 치러졌으므로, 민족의 신화를 비롯해서 음악, 문학 등 예술의 맹아가 이 제천행사로부터
싹텄습니다.
그 옛날의 제천 행사에서 유래된 민속명절들은 단오와 추석, 시월상달
이 같은 우리 민족의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뿌리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첫째,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하느님을 믿고 숭배하던 종교적 바탕이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 이러한 종교적 바탕 위에서 농사 등의 현세적 삶의 질서를
종교적으로 해석하고 설계하며 기원하는 문화적 전통이 비롯되었다는 것,
셋째 이 종교적 바탕과 문화적 전통이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적인 삶의 양식을 규정해 왔다는 것입니다.
이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뿌리를 감안할 때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첫째로 종교적이고 문화적이며 공동체적인 이 민족 전통적인 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과,
둘째로 전통적으로 알아왔던 막연한 하느님 개념에 이백여 년 전에 들어온 천주교가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체적이고 인격적이며 역사적인 개념으로 세례를 준 것처럼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공동체적인 생활양식에 그리스도적인 공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공헌은 구체적으로 보면, 십자가와 부활의 섭리로 역사와 문화 그리고 공동체적 생활양식을 승화시키는
일종의 문화적 세례 작업이라고 볼 수 있으며, 백 년 박해라는 십자가로부터 비로소 부활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 민족의 윤리와 정서가 담긴 문학작품 속에는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한(恨)의 정서와 권선징악(勸善懲惡) 개념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의 정서는 십자가의 경험적 범주에 해당하지만 권선징악 개념은 막연한 추상적 기대에
지나지 않으므로, 한의 정서를 발생시키는 악의 구조를 실제로도 선의 구조로 바꿀 수 있는 현실적인 지혜가 요청됩니다. 그 지혜가 바로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섭리입니다. 즉, 막연하고 이원론적인 선악의 대립인식에서
벗어나서 악에 대한 선의 자기희생을 통해 악을 선으로 승화시키는 부활의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
민족 문화에 대한 신앙의 지혜요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고 하셨는데,
그들이 ‘지금 보는 것’이란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변화된 현실이었습니다. 즉, 복음선포로 말미암아
하늘의 별처럼 사탄이 떨어지고 마귀들이 복종하며 하느님의 선이 공동체적으로 실현되는 새로운 현실이
그것인데, 이는 결국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현실입니다.
우리 민족도 이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현실’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이 이 땅과 이 나라에 진정한 문명을 이룩하기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선교적 과제입니다.
이렇게 해서 체험하게 될 새로운 현실이야말로 진정한 ‘하늘’일 것입니다.
복음이 선포될 때 하늘이 새로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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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 연중 26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대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하고 끝마무리를 합니다. 기도를 하되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아버지 하느님을 통하여 그 풍요로움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일흔두 제자가 선교여행에서 돌아와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여러 질병을 낫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마귀까지도 쫓아냈는데 그것은 그들 자신의 능력이 아닌 주님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서 마귀들을 복종시킨 것입니다. 제자들은 기뻐했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20). 참다운 기쁨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하느님 나라에 뽑힌 것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마귀를 복종시킬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께 선택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누리는 인기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기의 바다에 빠지면 주님은 잊고 나를 드러내서 결국 주객이 전도되고 망하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 허락하셔서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뽑아주시고 영원한 생명에로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능력을 당신의 자녀들을 통해서 드러내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의 도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이라 했고, 소화 데레사 성녀는 “주님 손안의 장난감, 주님 손안에 쥐어진 작은 공”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과연 나는 주님 안에서 무엇이 되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이 되어야 할까?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행하여 아무리 인기가 좋아도 주님의 도구임을 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일보다 구원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주님을 차지하는 기쁨 안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이름이 이미 하늘에 기록되었다면, 그 이름의 빛을 잃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주님, 저의 머리 위로 당신의 손길을 얹어 주소서. 만일 당신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성 필립보 네리).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의 이름이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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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루카 10,17-24
사탄의 복종도 큰 기쁨이었지만, 더 큰 기쁨이 있었으니,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선교 사명을 부여받은 제자단의 규모는 상당했습니다.
직접 선발하신 12명의 제자 외에도, 70명 혹은 72명의 제자단이 존재했습니다.
70이라는 숫자는 창세기 10장에 등장하는 모든 민족들의 명부에 따라, 전 인류를 이루는 일흔 국가의 숫자와 일치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해 70명의 제자단을 뽑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다들 무사히 선교 활동을 마치고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를 드리고 있습니다.
출발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신당부에 따라 돈주머니도 식량자로도, 여벌 옷이나 신발도
지니지 않았습니다.
땡전 한 푼도 없이 계속된 전도 여행길에 제자들은 굶주림에 시달렸고, 심신은 지칠대로 지쳤을텐데, ‘선교 여행 결과 보고회’ 분위기는 놀랍게도 기쁨과 축제의 분위기였습니다.
제자들 얼굴은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한 의기양양한 얼굴, 세상을 다 얻은 그런 얼굴이었습니다.
상기된 얼굴의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복음 10장 17절)
제자들의 성공담에 예수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시며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루카 복음 10장 18~20절)
제자들은 마귀들이 자신들에게 굴복하고 물러나는 것,
다시 말해서 사탄에 대한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직접 체험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 체험이 얼마나 강력했던니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뱀과 전갈을 짓밟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유다 문학 안에서 뱀과 전갈은 그 사악한 본성상,
생명을 위협하는 사탄의 부하로 여겨졌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전갈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시는 분, 독사와 살모사를 짓이기고 사자와 용을 짓밟으시는 분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그러한 능력을 고스란히 당신 제자들에게 물려주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사탄의 세력에 지배되지 않게 되습니다.
그들은 이제부터 하느님 아버지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있어 사탄의 복종도 큰 기쁨이었지만, 그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큰 기쁨이 있었으니,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게 선택된 것입니다.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각 고을마다 그 고을 주민들의 명단을 명부에 써서 잘 보존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 명단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그 고을에서 제공하는 모든 혜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으로 간주된 하늘나라에서도 그와 비슷한 명단이 존재한다고 여겼습니다.
그 명단에는 하느님께서 뽑으신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생명의 책입니다.
생명의 책! 사이비 교주들이 자주 애용하는 표현입니다.
지금 서울구치소에서 무상 급식 잘 하고 계신 사이비 목사 역시, 틈만 나면 ‘생명책’이라는 표현을 써서 우리를 포복절도시킨 바 있습니다.
“누구를 찍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삭제시키겠습니다.
광화문 집회 안나오면 생명책에서 지워버리겠습니다.
헌금 안내면 생명책에서 빼버리겠습니다.”
그 소중한 생명의 책을 그토록 남용하고 훼손시켰으니,
조만간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그간 습관적으로 저질러온 신성모독을 어찌 감당해낼까 걱정입니다.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은 지독한 허언증과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이비 목사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닙니다.
오직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친히 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 보속하는 마음으로 이웃 사랑에 충실하면서,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만을 굳게 믿으며, 그분의 관대한 용서와 자비를 기대할 뿐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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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10,17-24
진정한 휴식은 언제 시작되는가?
오늘 복음은 일흔두 제자가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께 돌아와 자신들이 체험한 놀라운 일들을 보고하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라며 자랑스러워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라고 하시며,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어쨌든 복음을 전한 뒤의 쉼은 꿀 같은 기쁜 일입니다.
이들은 진정 휴식을 취할 준비가 되어있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휴식을 잘 취합니까?
주말에 온종일 자고 나면 몸이 개운한가요? 물론 몸은 그럴 것입니다.
명절 연휴를 보내고 나면 기쁘신가요? 어느 정도는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왠지 완전히 개운하고 기쁜 휴식을 취한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안식’, 즉 ‘휴식’은 이런 쉼과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휴식에 대해 말하려면 우선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생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인정받으려고’ 고생합니다.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도, 자녀를 키우고, 자녀가 공부하는 것도 사실은 인정받기 위함입니다.
인정받으려는 근저에는 자신이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이 욕구를 부모가 다 채워주면 좋겠지만 사실 부모에게도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또한, 아무리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인정해주더라도 다 채워지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인정받으려고 공부하고 결혼하고 취직하고 일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멈추지 않으면 영원히 휴식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진정한 휴식을 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무석’ 교수의 『30년 만의 휴식』이란 책에는 가명 ‘휴’라는 유능한 인재의 사례가 나옵니다.
휴는 어느 날 사장에게 사직서를 내라는 말을 듣고 정신적 스트레스로 설사가 멈추지 않아 이무석 교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일등을 놓쳐 본 적 없는 엘리트였고 대기업에 입사하여 자신 팀장이 회사를 차려 나갈 때 스카웃 되어 함께 회사를 일군 사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가라는 말에 황당하기 그지없고 분노가 치미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경쟁심이 너무 강해서 더 유능한 인재까지 못 살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왜 쉼 없이 달려왔을까요?
그것은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누구에게 인정받으려 했던 것일까요? 아버지에게였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임신했을 때 유산시킬 것을 권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할머니 집에 피신하면서까지 낳은 아이입니다.
아버지는 형만 사랑하고 휴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여행도 형하고만 갔습니다.
그런데 그 형이 아버지가 원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여 이민 가버렸습니다.
아버지는 형에게 분노했지만 그렇다고 휴를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휴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모든 것에서 일등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쫓겨나게 생긴 것입니다.
휴는 이무석 교수를 아버지처럼 여겼습니다.
인정받고 싶어 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심지어 증오하였습니다.
어느 날 휴가 만나자고 하였을 때 이무석 교수는 휴가를 간다며 그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쓰러져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상담자가 이렇게 자신의 정보를 흘려주지 않는 이유는 내담자가 상담자에게서 자신이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투사 시켜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거울이 깨끗해야 자신이 더 잘 보이는 법입니다.
휴는 아버지에게 있었던 분노를 이무석 교수에게 드러냈습니다.
자신도 이 교수처럼 휴가를 떠납니다.
휴가 여행 중에 이 교수의 배가 뒤집히는 꿈까지 꾸게 됩니다.
휴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이무석 교수에게 표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만났을 때 뾰로통하여 한마디 말도 안 했습니다.
이때 이 교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쓰려져 응급실로 가게 되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설사가 멈추었고, 가족들과 또 직장인들과도 온전한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휴는 비로소 휴식을 찾았습니다.
휴는 이제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무석 교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아버지를 투사하여 함께 박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꿈에 아버지 소파에 앉아 있는 한 마리 개가 나왔습니다.
그 개는 점점 커져서 소파의 수십 배 크기가 되었습니다.
소파는 아버지를 상징하고 개는 자신을 상징합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개로 부른 적도 있었습니다.
이제 소파보다 커 버린 자신은 더는 소파에 잘 보일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휴식의 시작입니다.
사탄이 사는 곳은 어딜까요? 지하입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사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라고 하십니다.
하늘은 인간을 지배하는 권세입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권세는 나를 쉬지 못하게 만들고 인정받고 싶게 만드는 누군가입니다.
그것이 자기가 될 수도 있고, 부모가 될 수도 있고, 그 부모를 투사시킨 누군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조금 사랑하다가 그 사람을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해줘야 했지만 사랑해주지 못한 데 대한 분노가 그 사람에게 투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사랑했다가 갑자기 미워한다면 그래도 사랑해주십시오.
그 사람은 나를 누군가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야 그 사람을 고생시키는 바로 그 권세도 함께 못 박힙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사랑하지만 동시에 미워할 수도 있는 이유는 예수님은 우리 모든 애증의 대상을 투사하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하면 그 산을 넘어 에덴동산을 만나게 됩니다.
그곳에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참으로 휴식을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나를 고생시키는 모든 하늘의 권세가 함께 못 박힙니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에게조차 잘 보일 필요가 없어질 때, 나는 참된 휴식, 참된 안식에 들어갑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먼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했던 사람이 하는 미움도 참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그 사람이 나에게 투사했던 그 누군가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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