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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의 인도에 의한 바울의 전도여행
행 14:8-22, 16:19-34, 20:7-12
김정은이 등장하면서 “탈북하는 사람들은 발견 즉시 사살하라”는 지시가 내려지면서 얼마전에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땅에 도착했다가 사살되는 끔찍한 뉴스를 접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 이후 북한에서 자유를 찾아 탈북하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담보로 탈북한다는 것은 자유가 그처럼 귀하다는 것 아닌가요? 한국으로 오기 위해서 목숨 건 탈북을 결행한 9명의 북한사람들이 8m의 소형 목선을 타고 망대해에서 무려 770km를 항해한 끝에 일본 해안에 도착했다가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 과정이라든지 또는 탈북자들이 몇 달 동안 기차와 버스로 도보로 중국을 거쳐서 태국까지 갔다가 대한민국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EBS에서 방영한 것을 보니 탈북한 동포들이 자유의 품안에 안기우기 까지 정말 얼마나 먼 길을 오기 위해 아슬아슬한 위기를 넘는 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달프지만 이 고생만 참고 견디면 자유대한민국으로 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모든 고난을 참고 견디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믿고 구원받는 것이 마치 탈북자들이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 자유대한민국의 품안에 안기우는 것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죄악에서 탈출하도록 온갖 죄악의 사슬로 묶여 있는 마귀권세에서 우리를 구원해내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작전에 의해서 여러분들은 오늘 하나님의 품안에 안기우게 된 것은 대한민국이 아닌 영원한 참 자유의 그리스도의 품안에 안기우게 된 것 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우리가 만가지를 가져도 북한에 있다면 무슨 기쁨이 있고 무슨 평안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마음대로 말할 수 있고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마음 껏 누릴 수 있고 자유를 가진 우리들이 아닌가요? 우리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북에서 넘어온 탈북자들의 경우에는 정말 참 자유가 무엇인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안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요8:32-36) 32 또 너희가 진리를 알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시니라.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되 진실로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니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항상 거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롭게 되리라.주님을 믿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은 죄의 종이 될 수 밖에 없는데 예수님을 믿으면 죄에서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런 진리말씀을 전하여야 하지 않을 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인간이 누릴 참 자유와 마음의 평안과 기쁨과 소망을 주의 성령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 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누군가가 우리에게 구원받게 되는 소식을 전하여 주어야 됩니다. 탈북자들도 안내를 받아서 누군가에게 인계되고 또 누군가에게 안내되고 그 하나하나 계획에 의해서 되는 것이지 본인은 믿고 따라갈 뿐인 것입니다. 만약 나쁜 안내자를 따라갔다면 고생도 하고 몸도 팔리게 되고 다시 죽음의 사지로 갈수도 있겠지만 선한 안내자를 만났으므로 아무리 고생을 하더라도 언젠가는 자유대한으로 올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인생을 안내하는 분이 바로 참 좋으신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그 놀라운 구출작전을 우리는 잘 모릅니다. 항상 세밀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여러분이 여기에 오게 되었고 어떻게 영혼이 구원을 얻게 된 것인지 아직은 잘 모릅니다.
이는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의식주와 마음과 우리의 모든 활동을 돌보고 계시는 것처럼 성령님은 우리 인생들이 이 땅을 떠날 때까지 우리 배후에서 우리들을 돌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어머니처럼 우리를 안아주시고 길러주시고 보호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성령님의 그 희생적인 사랑을 받는 우리들은 알지 못하는 것은 마치 아이들이 클 때 부모의 사랑을 모르듯이 우리들도 성령님의 사랑을 모르고 있을 때 찾아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교회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성령님 우리로 하여금 이 우주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들은 그분이 만들어 놓은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십니다. 즉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갈 수 있도록 조금도 의심하지 않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렇게 믿어지는 것은 성령님의 가르침 때문이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확실히 예수는 나의 구주이시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심을 믿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자신이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거하시므로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스승을 잘 만나면 그의 인생이 달라지듯이 성령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의 스승님이 되어주셔서 우리가 이 땅을 떠나는 그날까지 우리를 항상 가르쳐주시는 스승같은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님은 우리의 참 좋은 친구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약함을 아시고 나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늘 내 곁에 계셔서 나와 동행해 주시며 인생 길을 걸어 갈 때 외롭지 않도록 항상 위로해 주시며 또 위험한 일을 만날 때 피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시는 참 좋은 친구같으신 분이십니다. 또 성령은 훌륭한 연출가이십니다. 연출가는 작품을 만들고 주인공을 통해 무대위에서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것은 연출가에 의해서 음악과 미술이 동원되고 조명과 의상이 조명되고 수많은 카메라가 동원되면 그 작품은 대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우리들은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다듬어지면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인생으로 살아 갈 수 있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보잘 것 없는 우리들을 유명한 인물로 길러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나 된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잖아요. 어느 경우에 그렇냐 하면 배우들이 무대에 나와서 연기를 잘하여야만 무대뒤에서 지도하시고 연출하시는 분이 영광을 받듯이 성령님이 나를 높여주시고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인생길을 가면서 칭찬도 받고 인정을 받는 것은 결국 우리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떤 예술가든지 정치든지 스포츠이든지 이 세상에 코치와 감독을 통하지 않고 훌륭하게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축구선수 박지성도 수영선수 박태환도 피겨여왕 김연아도 이렇게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감독들과 코치 연출가에 의해서 세계적인 선수로 만들어 진 것이지 본인이 열심히 하였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누구든지 훌륭한 스승을 만나면 다 되는 것입니다. 체육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음악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정치 입문을 하였으며 누구의 도움을 받았느냐가 성공의 관건입니다. 혼자 정치에 성공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습니다. 어떤 정치인의 눈에 띄어서 그 사람이 출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누구든지 훌륭한 스승을 만나면 위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다니엘이 자기들의 능력이 있는 게 아닙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도 그분에게 있습니다. 어부 베드로도 인류역사에 위대한 인물이 되고 사도 바울도 위대한 인물이 된 것은 주님이 그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최권능 목사님 김익두 목사님 이기풍 목사님도 예수님 믿기 전에는 깡패였지만 주님이 붙잡아 주시니까 귀한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중 최권능 목사님이 어떤 분이냐 하면 일제시대 깡패 짓하다가 회심해 목사가 된 사람으로 그의 본명은 최봉석으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가 기사와 이적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별명이 최권능이 된 것입니다. 워낙 열심히 전도하여 70여개의 교회를 세웠다. 일제시대 평양 시내에서 그의 전도를 듣지 않았던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전도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신자다”라고 말하면 그는 “신자면 왜 내게 전도하지 아니하느냐?”고 무섭게 책망하였다. 어느 날 최 목사가 길거리에서 너무나 열심히 전도했기 때문에 교통이 혼잡해져서 순사가 전도활동을 중지시켰지만 그는 듣지 않아 결국 그 순사는 최 목사를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최 목사는 따라가면서 “내가 오늘에서야 경찰서장에게 전도할 기회를 얻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다. 최권능이란 목사가 처음 사용한 말이‘예수천국 불신지옥’이다. 깡패출신답게 무식하게 기독교를 이해한 게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란 전도용어를 만든 것입니다. 최 목사는 이처럼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이 목사님들은 시장깡패로 청년을 보내다가 어느 날 전도를 통해 부름을 받고 능력있는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이니 성령님의 역사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불러서 우리의 삶을 지도해 주시고 성공만 하게 하는 게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역사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의 감독은 성공은 하게 하지만 행복은 못 주는 것입니다. 자신도 행복하지 못한데 어찌 남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인기탈렌트는 만들었지만 인기 배우는 만들었지만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연예인들이 자살하는 것은 남들은 성공했다고 했지만 본인은 마음은 불행하고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본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능자가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성공도 하게 해주지만 행복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성공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위로해주시고 다시한번 희망을 갖도록 믿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여러분을 길이길이 책임져주시고 복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을 따라가면 잘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인도대로 전도하는 행적들이 기록된 책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는 성령의 인도하는 대로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11-18절에 보면 베드로가 욥바성 무두자이 집에서 기도하였을 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큰 그릇을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려오더니 그 안에는 네발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날아다니는 것들이 있는데 소리 있어 들으니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베르도가 말하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이런 일이 세 번 반복하더니 조금있다가 고넬료가 보낸 군인들이 대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여기 베드로 선생님 계시냐고요? 예 제가 베드로입니다. 우리 백부장님이 보내서 저희들이 왔습니다. 누군데요? 로마의 군인 백부장 고넬료이십니다. 왜 오셨는데요? 성령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행10:20) 그러므로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아무 것도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라.
빌립에게도 주의 사자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행8:29) 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 남쪽으로 가서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로 가라, 하였는데 그곳은 사막이니라.
이 말씀은 성령이 빌립에게 빌립아 너 유대광야로 가라는 말입니다.
가보니 군인들이 모시고 있는 사람은 에티오피아의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가까이 가니까 성령님이 더 가까이 가서 병거에 합류하라고 해서 병거에 타고 있는 그분에게 가까이 가 보니까 바로 이샤야서를 읽고 있습니다. 그 읽는 성경을 깨달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누가 나를 지도해주지 않는데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내가 말씀을 풀이해 드리겠다고 하면서 이사야에서 말하는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물이 있는데 서 침례한 후 주의 영이 빌립을 그 앞에서 홀연히 사라지게 합니다.
1. 바울의 등장
사도행전은 하나하나가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9장에는 사도바울의 회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마스스쿠스에 가다가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비추면서 사울이 땅에 엎드리니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누구시나이까 하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것입니다.
(행9:10-18) 10 다마스쿠스에 아나니아라 하는 어떤 제자가 있더라. 주께서 환상중에 그에게 이르시되, 아나니야야 하시거늘 그가 이르되, 보소서.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1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곧은거리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사울이라 하는 다소 사람을 찾으라. 보라, 그가 기도하고 있느니라. 13 이에 아나니아가 응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해 내가 많은 사람에게 들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들에게 많은 악을 행하였다 하더이다. 15 그러나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길로 가라. 그는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내 이름을 전하기 위해 내가 택한 그릇이니라. 16 그가 내 이름으로 인하여 얼마나 큰 일들로 반드시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자기 길로 가서 그 집에 들어가 그에게 안수하며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올 때 길에서 네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사 네가 시력을 받게 하시고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셨느니라, 하매 18 즉시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고 그가 시력을 받으니라. 그가 일어나 침례를 받고
성령님은 아나니아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가서 기도하면 그 사람은 눈을 뜨게 될 것이고 성령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아나니아가 가니까 자기를 찾아 죽이기로 했던 그 사람이 소경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성령께서 말씀하신 대로 안수하고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하니 사울이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된 것도 바로 성령님이 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교회는 하나하나가 성령님이 오셔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행복침레교회도 13년 전에 개척예배 드린 후 성령님이 인도해 주셔서 오늘 이렇게 여러 형제들이 모여서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행복침례교회를 지금까지 친히 인도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행복침례교회 식구들이 금년 한해도 이 한 달간도 이 한주도 잘 지내고 있는 것은 성령님이 우리 교회를 인도해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가면 성령님은 우리를 안전하고 평안한 길로 인도하시지만 성령님을 떠나 갈 때는 실패하고 후회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술 담배가 그렇게 좋아서 기회만 되면 술 마시고 흡연하지만 나이들어 간암 폐암에 걸린다든지 병마에 시달리게 되게 되면 술먹게 하는 마귀도 이제 자신을 버리고 떠나가면 그 때는 술 담배도 안하지만 이미 건강을 잃고 후회하니 얼마나 원통합니까? 이처럼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길로 갔는데 나중에는 후회한들 아무 소용없지만 성령을 따라 살면 한 사람도 후회하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가정이 평안하지 않고 자신이 평안하지 않는 것이 성령께 불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내 중심이 우리 가정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모두가 평안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가야 끝까지 갈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을 따라 살았던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스쿠스 도로에서 주님의 밝은 빛에 눈이 멀었으나 주님의 음성을 아나니아로부터 안수받아 눈이 회복된 후 그의 삶은 새로운 삶이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역을 온전히 행하였던 종이었습니다.
(1)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바울은 3회에 걸쳐 전도여행을 하였는데 1차는 행13-14장의 내용으로 AD47-49 약2년에 걸쳐 2400km를 바나바와 마가요한과 함께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아 시작되었습니다. 주요 사역지로는 키프로섬 바보에서 마법사 엘루마를 물리치고 로마 총독 서기오에게 전도한 것을 시작으로 바보에서 출항하여 밤빌리아의 버가에 이르렀을 때 마가요한이 선교여행을 중도에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한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2차 전도여행 때 마가요한의 동행문제가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지는 원인이 된 것으로 보아 바울은 마가요한의 귀환에 매우 실망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여행을 계속하여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담대히 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이후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는데 전해주신 율법은 의로운 말씀이지만 인간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으므로 율법으로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지만 율법을 행하므로 의로와 질 수는 없다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메시야를 보내주셨는데 이스라엘의 구속역사를 통해 다윗의 자손으로 언약된 메시야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신데 이 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된지 3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인류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이 바로 복음 중의 복음이라는 것을 전했습니다. 행13:39절에 말씀대로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지만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메시야로 보내주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이신득의 사상은 기독교 신앙의 원리가 되었습니다. 특히 바울은 구약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와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을 접목시킴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의 죄악을 사하여 주신 메시야 되심을 강조하였다.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을 들었던 많은 비시디아 안디옥 성도들은 기쁨이 충만하였다. 이는 어떤 박해나 핍박으로도 성령께서 주신 영적 기쁨을 빼앗을 수 없다는 교훈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도 대적하는 유대인들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안 안디옥 회당을 떠나 이고니움에 와서도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니 허다한 유대인도 헬라인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믿지 않고 사람들을 선동하며 바울과 바나바에게 대적하는 사람들도 있을수록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담대히 전하니 결국은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악의를 품고 그들을 돌로 칠려고 달려들었을 때 루가오니아 도시인 루수드라와 더베로 피하여 거기서 복음을 계속 전하게 되었는데 루스드라에서는 바울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치어 주었으므로 하나님의 역사가 어느 곳 보다도 더 강하게 일어나서 마치 그 지역 사람들에게는 바울과 바나바가 신과 같은 존재였지만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는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역사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심지어 앉은뱅이까지 일어나서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는 것을 보았음에도 바울에게 돌맹이를 던져 피 흘리며 쓰러져 죽게 까지 하고는 성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는데 이런 광경을 목격하던 제자들이 바울주위로 둘러섰습니다. 그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돌을 던지는 것도 보았을 것이고 바울이 핍박받는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바울의 얼굴과 몸에서는 돌에 맞은 상처로 피도 나고 살도 찢어졌고 마치 죽었던 것처럼 보였던 바울이였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일어났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행14:22). 사실상 인간은 누구나 어려움과 고난을 두려워합니다. 유대인들의 집단적인 공격과 돌팔매질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이 권면한 첫마디는 바로 믿음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핍박과 고난속에서도 제자들이 지켜야 할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튼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또 복음을 전했다고 하니 그 더베성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움과 안디옥으로 돌아가 제자들을 굳건하게 하고 또 우리가 반드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고 권면한 후 비시디아를 거쳐 밤빌리아에 이르러 버가에서 말씀을 전하고 잇달리아로 내려가 배타고 안디옥교회로 돌아와서 1차 선교보고를 통해 이방전도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교회를 통해 체계화는데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은 소아시아 오늘날 터키지방의 동남부에서 시작되어 다시 출발한 안디옥교회로 귀환하는 과정으로 끝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전도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위탁한 사명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 제자들에 부탁하신 말씀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는 말씀이었는데 이런 말씀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는 어떤 핍박을 당해도 복음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는 굴하지 않고 전하니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전에는 하나님은 지나간 세대에도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지 않으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햇빛과 비를 주시고 계절과 날짜를 주시고 우리마음에 양심을 주셔서 하나님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깨닫게 하셨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전하셨다는 것이니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이 많아졌고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바울과 바나바는 다시 왔던 지역을 순회하면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건하게 하며 믿음 안에서 거하게 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위로해줍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행14:22). 바울의 이런 권면은 초기 기독교 신앙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곧 고통과 박해를 겪는 것은 초기 기독교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2)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2차 전도여행은 행15:40-18:22 이고 연대로는 49-52년 3년에 걸쳐 5000km를 다녔고 바나바 대신 실라와 디모데를 동행하였으며 1차 전도지의 몇 교회를 방문하였고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기 성령의 인도를 받아 복음의 행로를 유럽으로 바꾸게 된 것에 관한 말씀입니다.
(행16:7) 그들이 무시아에 이른 뒤에 비두니아로 들어가려고 애쓰되 성령께서 그들을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누가는 성령께서 유럽 선교를 위해 바울로 하여금 아시아에서의 전도를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한것은 표면적으로는 마치 성령이 열심히 일하는 바울의 전도를 방해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심오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분명한 증거입니다. 바울은 2차전도 여행을 하는데 에베소 서머나 두아디라 안디옥 모두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아시아에서 끝까지 머무르니까 밤에 환상 중에 마케도니아 사람이 바울을 보고 이쪽으로 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행16:8-9) 8 그들이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더라.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나타났는데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간구하여 이르되,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성령의 간섭으로 바울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전도방향을 바꾸었던 결과 유럽은 2천년 동안 선진국의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울이 아테네로 가면 아테네가 변화되고 고린도로 가면 고린도가 변화되고 로마로 가면 로마가 기독교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헬라 철학과 헬라 문화가 기독교의 옷을 갈아입고 기독교문화로 바뀌는 것은 바로 성령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서든지 성도의 전도 사역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섭리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이지만 하나님께서도 중대한 관심을 가지시고 친히 전도자의 발걸음을 세밀하게 인도하실 때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행16:10) 그가 환상을 본 뒤에 주께서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확신하였으므로 우리가 즉시 마케도니아로 들어가려고 힘쓰니라. 바울이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시아 전도를 막으시고 유럽 전도를 명하신다는 것에 순종하고 마케도니아로 넘어가기 위해 힘썼다는 것은 성령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였던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기꺼이 자신을 굴복시켜며 순종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복음 전도에 있어서 요나의 불순종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행위를 반복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에 있어서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간섭하십니다. 이런 간섭은 우리를 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잘못된 길을 가려할 때 부모가 이를 제지하면서 지혜의 길로 인도하듯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온전한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하나님의 계획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고 현재의 일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가를 점검하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걸음을 인도하시고 모든 일을 아름답게 이루실 것입니다.
전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교회다니는 것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내게 믿음을 주셔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성령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미혹해서 아버지를 떠나는 길로 가게 하지만 성령님은 언제나 우리를 아버지 집으로 인도합니다. 성령은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탈북자가 자유대한민국에 오는 것이 자유이듯이 참 자유는 아버지 품안에 와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가 우리의 피난처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들의 가정과 앞날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성령이여 나를 인도하여 주옵소서하는 자신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먼 훗날의 우리의 앞날까지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제아무리 지능이 높아도 내일은 모릅니다. 천하에 아무리 뛰어난 과학자라도 내일은 모릅니다. 성령님만이 내일을 아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항상 성령의 인도받으시며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은 마케도니아의 빌립보를 시작으로 사역을 했는데 빌립보에서는 자주색 옷감 장수로서 루디아라는 여자가 자신의 집에서 바울을 지내게 하면서 그 집이 빌립보 최초의 교회가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행16:15) 그녀와 그녀의 집안 사람들이 침례를 받고 우리에게 간청하여 이르되, 만일 당신들이 나를 주께 신실한 자로 판단하였거든 내 집에 들어와 거기 머무소서, 하고 우리를 강권하더라.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님이 함께하는 곳에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안에 있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고 어떤 어려움이 올지라도 나와 함께 하시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러 가다가 점치는 영에게 사로잡힌 소녀를 만나 그녀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니 그녀의 마귀가 나가면서 그녀의 주인들은 자기들의 이득이 사라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행정관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로 우리 도시를 심히 어지럽게 하며 우리가 받아들이기 적법하지 않은 풍습을 가르친다로 이유로 채찍질을 한 뒤 그들을 옥에 가두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행16:25-26)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매 죄수들이 그들의 말을 듣는데 26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감옥의 기초가 흔들리고 즉시 모든 문이 열리며 모든 사람의 결박이 풀리니라.
감옥터에 지진이 나면서 죄수들에게 채워졌던 사슬들이 풀리어 지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때에 간수가 죄수들이 다 도망한 줄 알고 스스로 자결할려고 칼을 뺏을 때 바울이 큰 소리로 외치며 이르되 네 몸을 해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그때에 그들이 등불을 킨 후 두려워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선한 선생들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이 때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16:31-34) 31 그들이 이르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고 네 집이 받으리라, 하며 32 주의 말씀을 그와 그의 집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말하니라. 33 그 밤 바로 그 시각에 그가 그들을 데려다가 채찍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자기의 온 가족이 즉시 침례를 받은 뒤에 34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이르러 그들 앞에 음식을 차려 주며 자기의 온 집과 함께 하나님을 믿고 기뻐하니라.
주의 성령님이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를 자유하게 하셨고 그 간수와 그의 가족들을 구원해 내셨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간수의 가정이 얼마나 기뻐하였겠는가 한 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모 리서취 기관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졸업반 학생들을 조사하는데 85%가 불안에 떨고 있다는 것인데 구체적으로는 취업에 대한 불안, 결혼에 대한 불안, 세상 살아가는 것에 대한 불안에 짓눌러 있다는 것입니다. 또 같은 기관에서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하였더니 남자는 94%가 직장을 떠나고 싶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조사하였더니 헤어지고 싶다는 것이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리서치조사 결과를 보면 정말 이상하지요? 꿈을 갖고 대학에 들어갔더니 졸업할 때 불안에 시달리는 학생들이 이렇게 많은 것이며, 그렇게 어려운 직장 들어갔더니 그 직장을 떠나고 싶다는 사람들이 이처럼 많다는 것이며, 서로가 좋아서 결혼을 하였더니 얼마 살지 못하고 헤어지고 싶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영의 불이 꺼졌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피조물인데 주님의 품을 떠난 우리 인간은 어디에 가도 무엇을 해도 기쁨과 평안과 행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직장을 그렇게 원해서 들어갔으면 좋아해야 되는데 떠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신혼의 단꿈이 깨기도 전에 헤어질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인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가정도 직장도 모든 것을 지켜주시고 행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하여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렇게 어려운 감옥까지 갔지만 옥중에서도 감사하며 찬송하고 기도하였던 것은 성령이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성령님을 내 마음에 모시지 않고 교회의 문지방만 넘나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불행한 삶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 항상 기뻐하며 즐겁게 살아가야 됩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나온 후 루디아 집에 들어가 형제들을 보고 그들을 위로한 후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가 세 안식일 동안 그들과 토론하며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고난을 받고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일어났어야 함을 주장하며 자신이 선포하는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 하였더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믿었지만 믿지 않은 유대인들은 시기심에 차서 바울일행을 대적하니 이번에는 베뢰아로 내려갔습니다. 베뢰아에서도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였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믿었지만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베뢰아 까지 내려와서 바울을 대적하므로 이번에는 아테네로 갔는데 아테네는 온 도시가 우상숭배에 빠졌다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섬기는 우상들 중에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것을 보고 너희가 알지 못하고 경배하는 그 분을 내가 너희에게 밝히 알려 주리라고 하면서 알지 못하는 그 분은 세상과 그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므로 그분은 인간들이 만든 곳에 거하시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시고 모든 민족들을 온 지면에 거하게 하시고 미리 정하신 때와 그들을 위한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으니 이것은 혹시라도 주를 더듬어 찾다가 발견하면 그분을 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무지하던 때를 눈감아 주셨으나 이제는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의로 심판하실 분이심을 확신시키고자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말하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일 뒤에 바울이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 본도출신인 아굴라하는 유대인을 만났는데 천막을 만드는 생업이 같으므로 그와 함께 동역하기도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바울이 고린도에서 일년 육개월 머물며 하나님 말씀을 가르친 후에는 에베소로 와서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 그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더욱 완전하게 설명해 주었으며 또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과 변론하며서 그들이 주 예수님을 믿으면서 에베소에 오래 머물 것을 원했지만 만일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내가 다시 돌아오리라 하면서 에베소를 떠나 가이사랴 교회를 문안하고 안디옥교회로 돌아와 2차 선교보고를 했습니다.
2차 전도여행은 소아시아지역에서 유럽지역으로 선교사역을 확대하였고 살전 살후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2차 선교 중에는 제자라는 말이 나오는데(행14:20) 제자는 예수님을 믿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란 어느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훈련과 영적인 헌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한국교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점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예수믿고 구원받았으니 천국에 간다는 것만을 강조하지 예수님 영접하고 그의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 오랫동안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잘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고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난 상태에서 믿음의 장부가 되어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고난을 당하였던 바울의 삶을 다시한번 살펴보면서 제자의 삶이 어떤 삶인지 생각하는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제자의 삶이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을 지키려할 때 엄청난 불이익과 고난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고난과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예수님을 믿고 복음전파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나왔던 지역을 다시 다니면서 고난을 당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하는 삶이 그리스도 제자의 삶이란 것입니다, 그런 환난이 제자들에게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십자가의 환란으로 왔지만 제자들에게는 여러 가지의 환란으로 오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 많은 교회들이 기복사상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믿으면 무엇이든지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당연히 겪어야하는 고난에 대해서는 말을 아낍니다. 세상에서 번영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전부인 것이며 영생은 뒷전에 있습니다. 영생을 소유한 것 보다 더 큰 복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얻으려면 사소한 고난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딤후2:1,3) 1 그러므로 내 아들, 너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건한 자가 되고 3 너는 예수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고난을 견디어 내라.
(딤후 3:11-12) 11 안디옥과 이고니움과 루스드라에서 내게 닥친 핍박과 고난을 잘 알았으며 내가 어떠한 핍박을 견디어 냈는지 잘 알았느니라. 그러나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져 내셨느니라. 12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모든 자는 핍박을 받을 터이나
바울이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을 떠나기에 앞서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선택하였으며 기도와 금식가운데 주께서 부탁하신 믿음을 강조하였던 이러한 모습은 각 교회의 제자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환란과 고통속에서 믿음을 지킬 수 있는 힘은 바로 하나님에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울당시나 오늘이나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면서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거나 압박을 당하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구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고난에서 극복한 사람들 치고 기도하지 않고 일어선 사람을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힘은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미치는 곳에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복음이 미치는 곳에서는 놀랄만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앉은뱅이에게 외치기를 일어나 걸어라 하였더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이 앉은뱅이처럼 자유롭게 살아가지 못하고 어둠가운데서 사탄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는 자유롭게 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지니라 하였듯이(요8:32) 이제 우리들도 주님만 우리 마음속에 모시면 자유케 하시는 주님의 권능을 통해 우리가 참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3차 전도여행은 행18:23-21:19로 53-58년에 걸쳐 약 6년간 5000km를 여행하였으며 누가와 디모데를 동행하였다. 2차 전도지의 몇몇 교회를 방문하였으며 에베소 두란노 서원에서 약 2년 6개월 동안 말씀을 강론하기도 하였습니다. 3차 여행은 1,2차 전도열행을 통해 세운 교회를 방문하여 뿌리를 굳게 내리게 하였으며 고전,후, 롬, 갈라디아서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로마여행은 27-28장으로 59-61년으로 3년에 걸쳐 약 4000km를 여행한 것으로 봅니다. 로마제국의 수도에서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세계전파에 기틀을 다졌고 옥중서신인 엡, 빌, 골, 몬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자신의 뒤를 이을 제자들을 훈련시키고자 하는 꿈을 이뤘다는 점에서 다른 전도여행들과 다릅니다. 바울은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교회의 성장을 도울 제자들을 뽑아서 훈련시킴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본을 따랐다. 본서에 등장하는 바울의 열 명의 제자들은 모두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중에 세웠던 교회들을 대표하는 젊은이들이었다. 디모데(루스드라), 디도(안디옥), 가이오(더베), 아리스다고(데살로니가), 세군도(데살로니가), 소바더(베뢰아), 소스데네(고린도), 두기고(에베소), 드라비모(에베소), 에바브라(골로새), 빌레몬(골로새) 바울은 이들을 에베소 두란노에서 집중적으로 훈련시켰다. 이들은 후에 바울을 대신해 바울이 세웠던 교회의 중요 지도자들이 된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1세기 교회는 계속됐다. 복음의 능력은 소위 부자가 되는 비결도, 권력을 얻을 수 있는 힘도, 사회의 저명한 인사가 되는 어떤 노하우도 아니다. 복음의 진정한 능력은 가난했던 초대교회 신자들이 복음을 의지하고, 박해 속에서도 그의 삶을 끝까지 살아낼 수 있었던 힘이었다. 복음은 그들에게 “영혼의 자유”를 허락했다. 그들을 억압하고 있는 모든 삶의 굴레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켰다. 비참한 노예 신분, 억울하게 착취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어느 무엇도 그들을 굴복시키지 못했다. 그들이 품고 있는 믿음을 끝까지 붙잡을 수 있었던 영혼의 자유, 그것이야말로 복음이 가진 진정한 능력이 아닐까?
사실 바울의 3차 전도여행에 있어서 핵심 지역은 에베소였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 동안 선교센타를 운영했기 때문이다(행20:30). 그리고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의 소요 사태로 인하여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드로아를 거쳐 마게도니아 곧 빌립보와 데살로니가로 이동하여, 자신이 2차 전도여행 때에 개척했던 교회를 다시 돌보게 된다. 그리고 그는 헬라 곧 아가야 지방으로 갔고 아가야 지방의 고린도에서 약 3개월간 머물면서, 고린도후서를 집필하였고, 로마서를 써서 보낸다. 그리고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복귀하려고 하였지만, 유대인들이 그를 해치려고 공모하고 있다는 것을 것을 듣고 계획을 수정한다. 다시 육로를 이용하여 북쪽으로 이동한 후 마게도니아를 지나서 배타고 드로아에 상륙한 후, 거기에서 밀레도를 거쳐 시리아의 두로로 가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두로에서 가이사랴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된다.
3. 바울은 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는가?
바울은 이미 에베소에 있을 때부터, 마케도니아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행19:21). 그는 이제 로마를 거쳐 서바나(스페인)까지 가서 전도하려는 계획을 이미 세워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3차 전도여행의 종착 지점으로서 그가 예루살렘을 선택한 것은 자신이 개척했던 이방 교회로부터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구제 헌금을 전달하기 위함이었지만 바울은 각 교회에서 직접 자신이 헌금을 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각 지역의 교회의 대표자들을 대동하여 그들이 직접 예루살렘교회에 구제 헌금을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래서 3차 전도여행 중에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교회에 가게 된, 각 교회의 지도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총 7명이었다. 베뢰아교회에서는 부로의 아들 소바더, 데살로니가교회에서는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더베교회에서는 가이오, 루스드라교회에서는 디모데, 에베소교회에서는 두기와 드로비모가 있었다. 이런 교회에서는 다 자신에게 복음을 전해 준 모 교회, 곧 예루살렘교회로부터 받은 영적인 은혜를 물질으로나마 보답하려는 의지를 표현하려고 하였다.
4. 바울이 드로아에서 죽었던 유두고를 살리다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의 살해 음모 계획을 들었던 바울은,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배를 이용하지 않고 육로를 이용하여 돌아가는 방식으로 계획을 수정하지 아니할 수 없어서 그가 도착한 곳은 드로아였다. 바울은 이미 자신이 개척한 교회들을 이제는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는 알았으므로 마지막 밤 드로아 어떤 3층집에 모인 성도들에게 하나라도 더 말씀을 전달하려고 밤중까지 강론을 이어갔었을 때 유두고라고 하는 어떤 청년이 말씀을 들으려고 창가에 걸터 앉았다가 그만 졸음을 이기지 못한 채 삼층에서 떨어졌는데 일으켜 세워 보니 죽어 있었다. 하지만 바울이 내려가서 그 청년 위에 엎드린 후에 자신의 가슴에 그 청년을 껴앉고 주님께 그 청년을 살려달라고 부탁하니 이 청년은 거짓말처럼 다시 살아나게 된다. 그리고 바울은 날이 새도록 떡을 떼고 그들과 이야기한 후에 그곳을 떠나게 된다. 다음날 그 청년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적지 않게 위로를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이 유두고의 일로 인하여 교회를 위로하여 힘주시기 위함이다(행20:12).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청년을 살려주셨고 그래서 이 청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 청년으로 인하여 교회는 위로를 받았고 큰 힘을 얻게 되었다. 이 땅에서 하늘나라로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날은 우리나라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믿을 수 있지만 사탄은 우리가 마음 편하게 교회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생활의 염려 정욕과 쾌락의 유혹을 통해 믿음에서 점점 떨어지게 만듭니다. 인본주의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환란없이 편하게 믿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전 같으면 천국은 오직 예수님만 믿어야 가는 것이지 다른 종교를 통해서는 갈 수 없다고 했는데 요즘은 기독교인들조차도 네가 믿는 종교도 선하게 살면 천국에 갈수 있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점점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 말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한다고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으면서 고난당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바울의 삶이 여러분의 삶의 본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