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동차산업 위기와 노동자의 대응
- 현대자동차를 중심으로 -
김정호 박사
[목차]
얼마 전 현대자동차는 최악의 3분기 경영실적을 발표하였다. 분기 영업이익률이 1.2%로 100원치를 팔아 1원 남짓밖에 벌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이는 2011년의 10.3%에 비하면 큰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국제평균 4.5%에도 훨씬 못 미치는 성적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두고 경제 관련 매체들은 현대차의 충격적인 경영실적이 무엇 때문인지 원인 찾기에 나섰으며, 현장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그것의 진의를 놓고 진짜 경영위기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여기에는 요즘 마침 일각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광주형 일자리’와 마찬가지로, 경제위기론을 빌미로 한 회사와 정권의 현장 옥죄기 혹은 對노동 공세에 대한 의혹과 불신이 짙게 깔려 있다.
어떻든 자동차업종과 현대차가 한국경제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놓고 볼 때, 그리고 현대차노조가 한국 민주노조운동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비추어 우리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필자는 이 같은 현대차의 경영위기는 현재 한국 자동차산업이 존폐의 기로에 놓인 심각한 위기 상황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서, 한국 자본주의 전반의 축적위기를 몰고 올 계기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그 여파에 의해 한국 노동운동은 앞으로 새로운 질적인 변화가 필연적으로 동반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이번 위기는 지난 1998년 대규모 구조조정투쟁 이후 지속되어 온 대공장 정규직노동자와 자본 간의 일종의 암묵적 타협에 기초한 ‘산업평화’가 종식됨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는 것이 본 글의 주요한 취지이다.
현대차의 금번 3분기 경영실적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영업이익이 지난해 동기 1조2042억 원에서 9153억 원이나 감소한 2889억 원을 기록했다. -76%나 감소한 것이다. 당기순이익도 지난해 동기 9392억원에 비해 67%감소한 3060억 원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듯 경영 관련 주요지표가 급 추락함에 따라 사측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경영위기론’을 확산시키며 오히려 공세에 나서고 있다. “외부 환경이 어려울수록, 우리들의 노력이 더욱 절실”하다며 모두들 자제하고 협력하자고 호소하는 한편(<함께 가는 길>,2018년 10월 26일자), 사소한 일에도 중징계를 내리는 등 벌써부터 현장 다잡기에 나섰다.
현대차 사내의 현장정파들은 이에 대해 즉각적인 반격에 나섰다. 그들 중 일부는 우선 사측의 ‘경영위기론’을 부정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왜냐하면 일단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회사 측 논리에 말려든다는 생각에서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차투위’(‘차별철폐투쟁위원회’의 약칭)의 논리이다. 이 조직이 11월 6일자로 발간한 소식지(“사측의 경영위기론, 완전 거짓이다①”)의 내용을 보면, 사측의 경영위기론을 부정하는 근거로 상반기 글로벌 판매량이 증가했다는 사실을 든다. 그리고 차는 “재료구입-생산-판매-이익실현”이라는 사이클을 볼 때 분기별로 딱 떨어지는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의 측정이 어렵다고 하면서, 경영위기론은 “숫자 놀음, 숫자 가공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을 편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 만약 현대차가 지금 경영위기 상황임을 인정하게 된다면 그것은 정말 노동자에게 불리한 것일까?
일반적인 상식에 비추어 볼 때, 한 기업의 영업이익률이 단기간에 –76%나 감소한 것은 아무래도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현대차의 영업이익률은 4.7%를 기록하였다. 그것은 비록 2011년 10.3%로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한 때와 비교하면 많은 차이가 나긴 하지만, 그러나 아직까진 그럭저럭 체면을 차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금년 상반기 들어 다시 3.5%로 추락하더니, 이제 3분기에 이르러서는 1.2%로 더욱 나빠진 것이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체력이 계속 약화되고 있는 상태에서, 무언가의 충격에 의해 그 상황이 급속히 나빠지고 있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때문에 우리는 이 사람에 대해 서둘러 어떤 ‘처방’을 내리기에 앞서, 그 사람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실시하는 것이 우선 급선무라고 본다. 설령 그 진단 결과가 회사 측이 주장하는 ‘경영위기론’과 일치하든 아니든 그것은 둘째 문제이다. 객관적이고 냉철한 상황판단 없이는 어떠한 처방도 내릴 수 없으며, 이럴 때일수록 우리 노동자 스스로가 ‘실사구시’ 하는 정신이 필요하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3분기 영업실적 급락의 구체적 원인이 무엇인지를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금번 3분기 영업이익률의 급락은 우선 지난해의 하락 추세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에 더해 새로운 변수인 리콜과 환율 요인 등이 가세함으로써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리콜’ 요인은 이번 3분기 영업실적 악화의 최대 변수로 작용하였다. 현대차 현장정파 중 하나인 ‘자주노동자회’의 11월 9일자 유인물 ”누가 경영위기를 불러왔나?“를 보면, 현대차는 미국시장 리콜사태로 3분기에 5007억 원의 손실이 발생하였다고 하였다. 즉, ”2018년 3월 19일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HTSA)에 따르면 현대·기아차 ZF-TRW의 에어백이 장착된 2011년 쏘나타와 2012-2013년형 기아 포르테 42만5000대 규모가 리콜에 들어갔다. 2015년 47만대 규모로 시작했던 세타Ⅱ 엔진결함 리콜은 결국 119만대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현대차에선 예상되는 손실을 이번 3분기에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증권가의 분석도 이 같은 주장과 일치한다. 이재일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3분기 현대차 실적쇼크의 주요 원인은 5000억 원의 품질 관련 비용이 일회성으로 발생했기 때문”이라며 “리콜의 대규모화로 리콜 비용에 의한 이익 변동폭이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경향신문, 2018년11월10일자)
두 번째 환율요인을 살펴보면, 이것은 최근 미국 달러화 강세로 인해 신흥국 통화가치가 크게 하락함으로써 발생한 영업 손실을 의미한다. 아래 표1을 보면 주요 신흥국들의 환율변동 상황이 나오는데, 한국은 다른 신흥국들에 비해 통화의 하락폭이 상대적으로 적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주로 반도체 호황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 신흥국들의 통화가치의 하락은, 현지에서 자국 통화를 통해 판매된 대금이 우선 달러로 계산된 후, 다시 그것이 원화로 환산되는 과정에서 환차손이 발생하게 됨을 뜻한다. 즉 동일 수의 판매차량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적은 달러로 환산되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원화로 계산할 경우 액수가 자연 적어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신흥국 환율하락 요인으로 인해 대략 1900억 원의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리콜과 환율 두 가지 요인만 감안하더라도 대략 7000억 원의 손실을 입은 셈인데, 이는 전체 영업이익 감소액수 9000억 원의 상당부분을 설명해준다고 할 수 있다.
나머지는 월드컵 마케팅 활동을 확대하고 재고물량을 털어내기 위한 ‘할인판매’에 기인하는 바가 클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위에서 차투위 동지들이 제기했던 판매량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매출액이 감소한 이유를 설명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북미지역에서 판매 부진으로 생긴 재고 물량을 털어내기 위해 인센티브를 대량으로 제공하면서 수익률 하락을 부채질”했을 가능성이 크다. (“현대차 ‘어닝쇼크’…3분기 영업이익 2010년 이후 최저”, 한겨레, 2018년 10월 25일자)
이처럼 3분기 영업실적 악화에는 ‘리콜’과 ‘환율’, 그리고 ‘할인판매’와 같은 요인들이 주요하게 작용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리콜이 가장 결정적으로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어떻게 보면 모두 우연적이고 일시적인 것들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주요한 요인으로 지목되는 위의 ‘리콜사태’ 역시도 자동차 글로벌 메이커들이 언젠가는 한 번씩 겪게 되는 보편적 현상일 수 있다.
업계에서는 이것을 소위 ‘800만대의 징크스’라 부르는데, 예컨대 도요타는 지난 2005년 생산량 823만2143대를 기록한 직후 비슷한 위기가 찾아 온 적이 있다. 이때부터 도요타는 성장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하면서, 2008년 금융위기 때는 엔화 강세, 판매 부진 등으로 ‘3중고’를 겪으며 1937년 창사 이후 처음으로 영업 손실을 기록하였다. 당시 도요타의 재고량은 300만대에 달하였는데, 설상가상으로 2009년에는 미국에서 도요타의 고급차 브랜드인 렉서스를 탔던 일가족 4명이 가속페달 오작동으로 인한 추돌사고로 전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아키오 사장은 미국 청문회에 출석해 눈물을 흘리며 사과 해야만 했으며, ‘세계 최고의 품질을 가진 브랜드’라는 명성에도 커다란 금이 갔다. 폭스바겐도 지난 2010년 800만대와 2014년 1000만대 생산을 돌파한 후, 2015년 디젤 엔진의 배출가스량을 조작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세계적으로 거센 비난을 받고 여러 시장에서 판매정지 처분을 받았다. 1990년대 후반에 제일 먼저 글로벌 생산 800만대를 달성했던 GM 역시도 금융위기 이후 극심한 경기침체와 함께 외형성장 과정에서 누적된 채무가 드러나면서 한때 존폐의 위기에 몰린 적이 있다. (이상 [현대차 大해부]①, 조선닷컴, 2018년 5월 30일자 내용 참조)
이렇듯 자동차 기업들이 전체 생산대수 800만대를 돌파한 이후 품질관리나 판매 등에서 큰 문제를 드러내는 것은 지나친 물량 중심의 성장 때문이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직·생산관리와 제품혁신 측면의 효율성이 뒤따르지 못하면서 기업들이 발목을 붙잡히게 되었다. 현대·기아차도 2014년에 합산 생산대수 800만2987대를 기록함으로써 세계 다섯 번째로 이 대열에 합류했는데, 이번에 이 같은 ‘800만대의 저주’에 걸리게 된 셈이다.
위에서 보듯, 분명 현대차의 3분기 ‘영업실적 급락’에는 몇 가지 우연적인 요인 또는 ‘규모의 생산 효과’를 중시하는 자동차업계의 일반적 관행이 개입되어 있다. 그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서는 아직 현대차에 대해 심각한 ‘경영위기’에 빠졌다고 진단하기는 어렵다. 만약 단기적 혹은 우연적 요인이 주요한 것이라면 그 같은 요인들이 사라지고 나면 비교적 용이하게 다시 원상회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대차도 다른 글로벌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보면 정상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이번 경영실적 악화에는 단기적 요인 외에도 장기적인 추세적 요인 또한 존재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같은 배경위에서 위의 단기적 요인이 결합되었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리콜사태 역시도 단순히 우연적 요인만이 아닌 그 자체 구조적 요소를 가지고 있을 수 있기에, 이에 대한 좀 더 깊은 분석이 필요하다고 보여 진다.
2. 일시적인 위기인가?
여기서 잠시 소위 ‘위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것은 한편에선 도저히 기존의 구조와 운영방식으로는 생존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 닥쳤음에도, 다른 한편에선 변화할 준비가 미처 되어 있지 않을 때 진짜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규정은 작금의 현대차 경영위기 여부를 판단하는 데 있어 유효한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차는 지금 그와 같은 상태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먼저 작금의 현대차 위기가 결코 단기적이거나 일시적 요인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 아님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는 그간 현대차 영업실적이 상당기간 멈추지 않고 지속적인 하락 추세를 보여 왔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영업이익률은 세계평균인 4.5%대보다 약간 높은 4.7%를 기록하였지만, 2018년 상반기(1-6월)에는 이미 그 이하인 3.5%를 기록하였다. 그렇다면 상반기에 이미 이렇듯 영업이익률이 현저한 하락을 보인 원인은 무엇일까? 우선 그것부터 규명해야만 지금의 위기가 단기적인 것인지 아닌지 좀 더 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상반기 재무재표를 보면 앞서 차투위 동지들이 지적했듯이 전년 동기 대비 판매량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출액은 하락했음이 눈에 뜨인다. 즉 2017년 상반기 214만대에서 2018년 상반기 224만대로 총판매대수는 4.6% 증가하였다. 그러나 그 매출액은 1.1% 감소했다. 차투위 동지들이 회사 측의 ‘경영위기론’에 대해 회계조작이 아닌지 의심할 만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점은, 이렇듯 매출액이 하락하면서도 매출원가는 오히려 상승하였다는 점이다. 즉 2017년 반기 총매출원가가 16조8741억 원이었는데, 2018년 반기 총매출원가는 17조1348억 원으로 1.5% 상승한 것이다. 원래 매출액이 하락하면 총 제조원가 역시 하락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정 반대로 매출액이 하락하였음에도 총 제조원가는 오히려 상승하였다. 좀처럼 발생키 어려운 얼핏 모순되는 이 같은 현상은 어찌된 사연일까? 이처럼 매출액 하락과 매출원가 상승이 동시에 작용하면서 상반기 영업이익률이 크게 하락하였다. 여기에 뭔가 문제의 열쇠가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이 두 가지 요인에 대해 각각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총판매대수 증가에도 불구하고 총매출액이 하락한 원인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그간 언론을 통해 보도된 자료를 종합해보면, 그것은 현대차가 그간의 재고물량을 털고 또 신종 차종의 판매촉진을 위한 전략으로 ‘할인판매’를 실시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앞서 금년도 3분기 영업이익률이 감소한 요인의 하나로 작용한 바 있다. 예컨대 현대차는 올 봄에 미국시장에서 모델에 따라 구입 시 최고 3750달러까지 현금 보너스를 지급하는 대세일을 실시하였다. 3월 16일부터 4월 2일까지 진행된 이 행사에서 2018 싼타페 스포츠모델은 최대 3750달러를 보너스로 현금 지급하였으며, 2018 쏘나타는 최대 3250달러, 2018 엘란트라와 2017 투싼의 경우 각각 최대 2500달러를 현금 지급하였다. 중국시장에서도 이와 유사한 전략을 통해 전년 동기 대비 판매대수는 20% 증가하였다. 이로써 사드 사태에 따른 매출 감소분을 일정 정도 만회할 수 있었지만, 이로 인해 매출액은 분명 판매량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감소했을 것이다.
다음 두 번째 문제, 즉 매출액 감소에도 불구하고 총 제조원가가 오히려 상승한 것에 대해 살펴보자. 이는 일견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로 인해 매출총이익률(판매비와 관리비를 감안하기 전 이익률)은 전년 동기 대비 23.5%에서 17.1%로 무려 6%나 하락하였다. 이것은 부품 매입단가가 크게 올랐음을 의미하는데, 실제 매출 대비 재료비 비율은 4%나 상승했다. 그 동안 영업이익 유지의 중요한 요인이었던 부품단가가 이렇게 갑자기 오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당시 철강과 알루미늄과 같은 자동차 생산에 필요한 주요 원재료 가격은 큰 변화가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부품 매입단가 상승과 관련이 있을 터인데, 주요 부품공급사인 모비스와 현대차와의 거래는 이 시기 2.2%가 감소하였다. 이는 현대차의 매출액 감소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인다. 그런데 유독 정의선 부회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글로비스와의 거래가 2.5% 증가를 보였다. 이것은 분명 비상식적인 현상이다. 이것이 현대차 매출액이 감소한 상황에서도 총 제조원가 상승이 발생한 주요인으로 보이는데, 그 내막이 궁금하지만 이에 대한 심층 분석은 다음 절로 미룬다.
이상으로 일단 상반기 영업이익 하락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이 어느 정도 되었다고 보인다. 즉 그것은 중국과 미국과 같은 주요 시장에서의 할인판매와 함께, 매출액 하락과 제조원가 상승이 동시적으로 작용한 것이 주요하게 작용하였다. 그런데 현대차가 현재 직면한 위기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선 여기서 멈추어선 안 된다. 현대차가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매출액의 감소를 감내하면서까지 이처럼 ‘할인판매’를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정을 좀 더 파헤칠 필요가 있다. 현대차는 내수와 수출을 모두 합친 국내외 총판매량이 2016년 490만대에서 2017년 450만대로 감소함에 따라 재고가 늘어나고 시장점유율이 축소된 상황에서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할인판매를 실시하였다. 그렇다면 이 같은 판매량 감소는 무엇 때문에 발생했는지가 중요하다.
첫째, 그것은 중국과 미국 양대 주요시장에 대한 경영진의 트렌드 전략 실패와 관련이 있다. 중국과 미국은 그 시장규모가 각각 연간 판매량 2400만대와 1700만대이다. 이 양 시장을 합칠 경우 모두 4000여만 대로 전 세계 자동차시장 규모인 9000여만 대의 대략 4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한다. 이 때문에 이들 시장에서의 실적은 곧 전체 경영실적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들 메이저 시장에서 현대차가 점점 밀리고 있으며, 이는 우선 이들 시장의 유행을 따라잡는 데 실패한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먼저 중국시장의 상황을 보자면 이러하다.
“중국에선 2016년부터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가 인기다. 큰 차를 좋아하는 중국인 취향과 레저 수요 증가, 유가 하락 등이 맞물리며 SUV·MPV(다목적차량)의 시장점유율은 2012년 18%에서 42%까지 치솟았다. 폴크스바겐·GM·도요타·BMW·메르세데스·벤츠 등은 SUV 신차종을 앞 다퉈 쏟아냈다. 현대차는 기존 싼타페·투싼 외에 신차가 없었다.”([현대차 大해부]②, “美·中빅마켓서 고전”, 조선닷컴, 2018년 5월 30일자)
보통 우리는 지난해 현대차가 중국시장에서 고전한 이유가 중국의 ‘사드 보복’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위 인용문은 그 근본 원인이 다른 데에 있음을 보여주는데, 사실 현대·기아차의 중국 시장 점유율 하락은 사드 보복 이전인 2015년부터 시작되었다. 2014년까지 중국 시장 점유율 두 자릿수를 유지하던 현대·기아차가 2015년 들어 8.9%, 2016년 8.1%로 계속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정부의 사드 보복이 시작되자 2017년 시장점유율은 5%까지 추락하였으며, 실제 사드 보복 조치가 해소된 올해 1분기에도 중국시장 점유율은 4.3%로 오히려 시장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미국시장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한데, 다음 인용문을 보도록 하자.
“지난해(2017년-주) 현대차의 미국 판매량은 68만5555대로 전년대비 11.5% 줄었고 기아차는 58만9668대로 8.9% 감소했다. 미국에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과 픽업트럭의 수요가 늘고 있었지만, 세단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던 모델 라인업을 제때 바꾸지 못한 탓에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은 것이다. 그나마 미국에서 판매하는 SUV도 지난해 초부터 수출된 기아차의 소형 하이브리드 SUV 니로를 제외하면 대부분 출시된 지 몇 년이 지난 노후 모델들이었다.” ([현대차 大해부]②)
이처럼 양대 시장에서의 판매량 감소는 경영진의 트렌드전략의 오류와 직접 관련이 있다. 현대차 경영진은 확실히 차종 출시와 관련한 잘못된 전략으로 경영상의 큰 손실을 끼쳤다. 하지만 이것만이라면 어찌 보면 문제는 그리 심각하지 않을 수 있다. 더 큰 우려는 현대차가 이들 메이저시장에서 다른 경쟁업체들에 비해 품질과 가격 면에서 경쟁력이 시간이 갈수록 뒤처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중국시장의 경우 그간 중위 정도의 차종에서 나름의 경쟁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최근 가성비(가격대비 성능) 좋은 중국 토종차량의 급속한 추격으로 인해 그 위치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한다면 앞서 언급한 사드 문제는 부차적이라 할 수 있다. 또 미국시장에서도 환율요인, 즉 엔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평가된 원화 요인과 맞닿으면서 일본 업체에게 고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역시 문제는 가성비인데, 다음은 그 사정을 잘 말해준다.
“로이터는 4명의 중국 현대차 판매자와 6명의 미국 전·현직 현대차 관계자를 인용해 현대차가 세계 주요 시장에서 추락하고 있는 이유로 늘어나는 SUV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 것과 브랜드 이미지 대비 가격이 높은 것을 꼽았다. ……현대차는 약 10년 전 저가형 모델로 세계 시장에서 빠르게 점유율을 높여나갔지만 지금은 가격 경쟁력에서 뒤처지고 있다. 2007년 현대차 소나타의 가격은 일본 토요타의 캠리보다 10% 낮았다. 그러나 2014년에는 캠리보다 더 높은 가격에 팔리고 있다. 이로 인해 2010년 미국에서 20만대 가까이 팔렸던 소나타는 지난해 13만1803대로 판매량이 감소했다. 또 중국 내 저가 자동차 부문을 점령했던 현대차는 중국 신흥 강자 지리(Geely), 비야디(BYD) 등에 밀려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독일, 일본의 고급차 브랜드와 저가의 중국차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된 점도 문제다. 특히 중국의 상하이차·창안차 등은 한국차 가격의 70% 수준에 SUV를 내놓았다. 품질은 좀 떨어지지만 가격 경쟁력이 크다보니 현대기아차가 중국시장에서 설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이상 [현대차 大해부]②, 조선닷컴, 2018년 5월 30일)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금년 상반기 매출액 하락의 기저에는 세계 주요 자동차 시장의 트렌드에 대한 최고경영자의 판단 오류와 함께 ‘기술력’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존재하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전자 역시 가벼운 실책은 아니지만, 후자 즉 기술력과 같은 근본적 요인에 비한다면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위기’ 문제와 관련해서는 부차적이라 할 수 있다.
중국 토종차에 비해 ‘가성비’에서 밀리면서 그나마 유지하던 중간적 위치가 점점 위협당하고 있는 것도, 또 미국시장에서 일본차에 밀리는 원인도, 한발 더 나아가 현대차가 중국과 미국 시장의 SUV의 유행을 쫒아가지 못하는 근본 원인까지도 따지고 보면 현대차의 ‘기술력’의 한계가 점점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후자와 관련해서 조금 더 보충설명을 하자면, 트랜드전략의 실패 내면에는 경영진의 판단 착오와 함께, 기술력의 부족과 현대차 내부의 기술개발시스템의 혼란이 존재한다고 보여 진다. 즉 현대차에 있어 SUV의 엔진기술이 세단의 엔진기술에 비해 근본적으로 취약하다는 점인데, 들리는 바에 의하면 현대차 SUV에서 사용되는 디젤엔진은 일본의 한 협력사로부터 제공받은 기술을 약간 개량한 수준이라고 한다. 그리고 현대차 기술개발팀 내부에서도 SUV의 엔진개발팀은 세단 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주류’로 홀대 당하는 처지에 있다고 보여 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과 미국 시장에서 소비자의 기호 변화에 맞추어 기동성 있는 대응을 할 수 있는 내부 기술력이 떨어지게 되는 것은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이처럼 현대차로 하여금 세계 자동차시장에서 지금까지의 자리를 점하게끔 만들어주었던 기술들이 점점 낡은 것으로 변화함으로써 이제 현상유지도 힘들게 되었다면, 이로부터 발생되는 위기는 결코 일시적인 것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기술력의 문제는 미래차와 관련해서 볼 때 더욱 심각하다. 친환경차 관련하여 현대차는 후발주자로서의 최소 지위는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보통 알려져 왔다. 어쨌든 전기차의 경우에도 시장 진입은 일단 한 상황이고, 수소차 역시도 투싼과 넥쏘의 출시로 시장에 발을 담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내년 초 해외 출시를 앞둔 현대차의 전기차종 ‘코나 일렉트릭’과 기아차 ‘니로 EV’의 글로벌 전기차 시장에서의 활약에 얼마간 기대를 걸 수 있다. 최소 내년만큼은 이들과 경쟁 차종이 없을 것이라는 일각의 분석이 있는데, 대다수 글로벌 완성차 브랜드가 고가 신형 전기차 출시에 집중하고 있어서 4000만원대 장거리형 SUV전기차로는 코나와 니로가 유일하다는 평가 때문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미래차 분야에 있어 현대차의 경쟁력은 다른 선두 글로벌 경쟁사들과 비교하면 결코 낙관할 수 없는 처지이다. 아니 오히려 상당히 뒤져있다고 평가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먼저 친환경차 분야를 살펴볼 경우, 현대차가 여기에서 뒤처지고 있는 것은 당사의 독특한 미래차 전략과 상관이 있다. 다른 글로벌 자동차메이커들이 충전 가격이 저렴하고 기존 전기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는 전기차에 투자를 집중하였음에도 현대차는 그동안 다른 행보를 보여 왔다. 현대차가 그간 집중 투자해온 수소차는 충전시간이 5분 안으로 짧다는 게 장점이긴 하지만, 수소충전소 한곳 건립비용만 30~40억 원에 달하고 충전재인 수소가격을 현재로서는 낮추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지금 단기적으로 대중화가 어려운 미래차에 투자해온 셈이다. 이에 비해 전기차 분야는 2017년 현재 전 세계적으로 이미 117만대가 팔려서 상용화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2020년에는 280만대, 2025년 무렵엔 1,000만대 판매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 때 가면 세계 자동차판매 1.1억대 가운데 약 9.4%를 차지하게 되며, 앞으로 매년 연평균 32% 증가가 예상된다.
이에 비하면 현대차가 역점을 두고 있는 수소차의 판매량은 매우 미미한 상태이다. 실제 현대차는 1세대 수소차 투싼ix를 출시한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약 890대를 판매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이들 중 민간에 보급된 수소차는 아직 한 대도 없는 실정이다. 중국정부가 2030년까지 수소전기차 100만대, 수소충전소 1000개를 보급하겠다고 발표한 것을 볼 때 앞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분야의 시장 전망도 조금씩 밝아지겠지만, 그러나 현재 전기차와 비교한다면 그것은 아직 상당한 시간차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지능형자동차 부문이다. 골드만삭스는 2015년에 30억 달러였던 세계 자율주행차 시장 규모가 2025년에는 960억 달러로 10년 만에 30배 이상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으며, 다시 10년 후인 2035년이 되면 자율주행차 시장은 약 2900억 달러 규모로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우리의 생각보다 이 부문의 상용화 역시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앞으로 2020년 이후에는 본격화할 자율주행차 시장에 있어 현대차는 지금 한참 뒤처져 있다. 다음 보도를 보면 그 점이 실감난다.
“올해 초 미국의 기술평가업체인 내비건트리서치는 자율주행차 개발에 나선 기업들을 기술력과 비전, 상용화 전략, 생산력 등 10개 지표로 조사한 결과 GM이 가장 앞선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2000년대 후반 완성차의 경쟁력 하락과 방만한 경영으로 위기를 겪었던 GM은 독일과 일본, 한국 업체들에 비해 일찌감치 자율주행을 포함한 미래 신기술로 사업구조를 재편하는데 성공하였다. 2위는 구글의 자율주행차 개발 자회사인 웨이모가 차지했고 메르세데스-벤츠가 속한 다임러와 독일의 자동차 부품업체 보쉬가 3위에 올랐다. 포드와 폴크스바겐, BMW, 르노닛산 등도 10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반면 현대차그룹은 최하위권인 15위에 머물렀다. 지난해 10위에서 다섯 계단이나 미끄러진 수치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에서 아이오닉 자율주행차를 시연하고 정보기술(ICT)을 통해 차량과 사물을 연결하는 V2X 인프라 구축에 나서는 등 상당한 공을 들였지만, 경쟁사들에 비해 완전자율주행차 상용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다.……블룸버그는 현대차가 아직도 일반도로에서 자율주행 기술을 테스트할 계획이 없다며, 2025년까지 시장에 자율주행차를 출시할 준비가 되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 [현대차 大해부]⑤, 조선닷컴, 2018년 6월 17일자)
최근 조선일보는 세계 최대 인터넷 기업인 구글의 자율주행차 계열사인 웨이모가 다음 달부터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일대에서 자율주행 택시 서비스를 ‘공식 상용화’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다음달 미국에선, 택시기사 없는 택시가 달린다”, 조선일보, 2018년 11월 15일자) 이 기사 내용에 따르면 웨이모의 자율주행 택시 상용화는 2009년 구글이 처음 자율주행차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한 이래 9년 만에 이뤄낸 성과인데, 웨이모가 다음 달 시작하는 자율주행택시는 운전자가 없는 ‘완전’ 무인 자율주행차로 운영된다. 승객이 스마트폰 앱(응용프로그램)으로 자율주행 택시를 호출해 탑승하면 자동으로 목적지까지 데려다 준다. 업계에서는 웨이모의 이 같은 공격적인 움직임이 경쟁사들을 자극해 자율주행 택시 확산 시점을 더욱 앞당길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비교할 때 한국 자동차업계의 상용화 수준은 아직 연구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웨이모가 운전자가 없이 달리는 ‘레벨4 수준’의 자율주행 택시를 상용화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운전자가 꼭 탑승한 상태에서 정해진 도로만 달리는 ‘레벨 3수준’에 머물고 있다. 현재 임시운행허가 취득을 기준으로 볼 때 자율주행차 대수에 있어서도 웨이모가 이미 현 수준 수천 대에서 내년에는 8만대 이상을 운행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반해, 한국은 52대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중 현대차가 16대로 가장 많고, 삼성전자가 5대, 기아차 2대 등의 순이다.
고태봉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에 따르면, “다양한 브랜드의 자동차 업체가 각기 다른 디자인과 성능으로 판매 경쟁을 벌이는 지금의 완성차 시장과 달리, 완전자율주행과 차량공유의 시대는 플랫폼 경쟁에서 앞서있는 소수의 업체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기존 내연기관 자동차에선 ‘틈새’ 시장이 존재하여 후발주자들도 나름대로 생존이 가능하였지만, 새로운 미래차 시대에는 ‘플랫폼 경쟁’에 앞서는 소수 업체들만이 독자생존이 가능하며, 이들을 중심으로 세계 자동차업계가 재편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엔비디아-인텔이 완전 자율주행이 가능한 수준의 기술을 확보할 경우 어떤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자동차 업체는 막대한 로열티를 지불하고 핵심기술을 구입해 탑재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경쟁에 뒤처진 자동차회사들은 설령 존재한다 하더라도 이들 소수 메이저들의 ‘하청’ 정도의 수준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럴 경우 한국 자동차업계는 지금보다도 훨씬 왜소해 지게 되는데 그 가운데서의 현대차 위상은 가히 상상이 간다.
이렇듯 앞뒤가 꽉 막혀있는 현대차의 지금 상황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보여 진다. 이대로 가면 현대차의 미래는 없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때문에 지금의 현대차 위기는 이미 일시적이기 보다는 ‘근본적’인 성격으로 전화된 위기라 할 수 있다.
아래 표2를 보면 우리는 그간 현대차의 영업이익률이 추세적으로 저하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또한 현대차의 경쟁력 역시 장기간 추세적으로 저하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이 같은 경쟁력 저하에는 세계 자동차시장 정체, 사드문제, 환율문제, 트럼프 보호주의 등과 같은 어쩔 수 없는 객관적 요인이나 우연적인 성격의 것도 있지만, 그러나 이것이 주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 요인들은 대부분 일시적이거나 다른 경쟁업체들도 모두 공유하는 것인데, 그럼에도 유독 현대차 만이 이 기간 추세적인 하락을 보인 것은 주체적 요인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체적 요인에 있어서는 중국, 미국과 같은 주요시장에서의 트렌드 판단에 대한 오류, 친환경차 개발 등에 있어서의 전략적 방향설정의 오류 등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도 문제의 본질을 포착하기에는 아직 불충분하다.
이제 핵심을 지적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필자가 보기엔 그중 ‘재벌’과 관련된 것이 가장 주요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현대차 위기를 가져오고 경쟁력을 상실케 한 요인들은 대부분 이 재벌문제와 관련이 있다. 특히 가장 관건적인 ‘기술경쟁력’의 저하가 왜 발생했는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한데,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아주 상식적인 질문 하나를 던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즉 현대차가 잘 나가던 무렵 현대차 경영진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 시기는 동시에 기술변화가 가장 극심한 때이기도 하였다. 왜 그 무렵 미래기술에 대한 투자에 심혈을 기울이지 못하고 한전부지 매입 같은 땅 투기에나 신경 쓰면서 그 좋은 시기를 헛되게 보내고 말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 역시도 단순히 경영상의 착오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필자는 이 문제를 규명하는데 있어 한국 재벌의 생리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현대차의 기술경쟁력 저하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연구개발비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현대차의 연구개발비는 다른 주요 경쟁업체와 비교할 때 상당히 적은 편이다. 2017년 현대차의 연결기준 매출대비 연구개발비 비중은 2.6%이었다. 이는 폭스바겐, 도요타의 5.7%와 3.8%에 비해 적지 않은 차이가 난다. 그 절대액수를 비교할 경우 더욱 초라해지는데, 당해의 현대차 연구개발비 총액은 2조5천억 원으로, 이는 폭스바겐 131억 유로(약 17조원)의 15%, 도요타 1조1600억 엔(약 11조원)의 23% 수준에 불과하다.
이렇듯 현대차의 연구개발비가 비중과 절대액에 있어 다른 주요 글로벌 경쟁사들과 큰 차이가 나는 것은 구조적 원인이 있다. 그중 절대액수는 기업규모와도 관련되기에, ‘비중’ 측면을 비교하는 것이 본 글의 취지에 부합된다고 보여 진다. 이 경우 한 기업의 연구개발비 비중은 대체로 다음 두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즉 영업이익률과 경영진의 경영방침이 그것인데, 전자는 객관적 제약조건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주체 요인에 해당 된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첫 번째 측면과 관련하여 보자면, 연구개발비 비중은 매출액 대비로 계산된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 경우 영업이익률(이 역시 매출액 대비로 계산된다) 자체가 낮은 상황이라면 연구개발비 비중도 자연적으로 낮아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현대차 영업이익률이 2017년 4.7%인데 이는 2.6%의 현대차 연구개발비 비중을 객관적으로 제약한 측면이 있다. 현대차의 영업이익률이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는 것이 우려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에 비해 폭스바겐이 지난해 6%에 가까운 연구개발 투자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무엇보다 우선 영업이익률이 그 이상인 7.4%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경우도 폭스바겐은 자신이 벌어들인 이윤 대부분을 기술개발에 투자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현대차의 영업이익률이 높았던 시기, 즉 2011년~2016년 기간 왜 연구개발에 집중하지 않았느냐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실례로 영업이익률이 9.5%이었던 2013년에 현대차의 연구개발비 비중은 2.1%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BMW 6.3%, 폭스바겐 5.8%, 도요타 3.7% 등 주요 경쟁사들에 비해 여전히 차이가 났다. 이는 자연스럽게 우리를 경영진 경영방침과 관련한 두 번째 요인에 주목하게 만든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가 지난 호에서 금년도(2018년) 상반기의 경영실적 악화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로, 총 매출액 저하에 반한 제조원가의 상승을 지적한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당시 모비스 등과의 내부거래는 하락하였음에도 유독 물류회사인 글로비스와의 내부거래가 2.5% 증가하였다. 그렇다면 현대차그룹에서는 왜 그런 일이 발생하였을까? 우리는 회사가 발표한 공식적인 재무제표만 가지고서는 그 속사정을 이해하기 힘든데, 그것은 한국사회에 특수한 재벌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특히 후계승계와 관련이 있는데,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선 잠시 아래 인용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대차그룹 안팎에서는 2017년을 정의선 시대의 원년(元年)으로 본다. 지난해부터 정의선 부회장이 대외 활동을 도맡아 하면서 전면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에 따른 지배구조 개편도 시급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 회장의 최근 건강문제도 현대차의 후계승계 문제를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만들었다. 이 경우 정 부회장이 회사를 지배하려면 기아차가 보유한 현대모비스 주식을 모두 사들이면 된다. 그러나 정 부회장에게는 이 돈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현대차 大해부]④, 조선닷컴, 2018년 6월 6일)
현대차재벌은 얼마 전 현대모비스를 지주회사로 하는 지배구조 개편을 추진하다 중단한 적이 있다. 이 과정에서 정의선 부회장에게로 ‘경영승계’를 완수하려 하였다. 현대차그룹이 상반기에 제출한 지배구조 개편 안을 보자면, 먼저 현대모비스의 국내 A/S·모듈 사업을 분할한 후, 다시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하여 현대모비스를 지주회사로 만드는 것이었다.
개편안대로 모든 것이 이뤄졌다면, 정의선 부회장은 현대글로비스 합병법인 (모비스에서 국내 A/S·모듈 사업을 분할 한 후, 그것들을 글로비스와 합병시켜 생긴 법인) 지분과 기아차가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의 교환(추정 비율 0.61:1)으로 약 9.6%의 현대모비스 지분을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현대제철과 현대글로비스가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 6.3%를 사재를 털어 사들이면 지분율은 16%까지 높아지게 된다. 만약 여기에 더해 정몽구회장 재산 상속분을 감안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구조개편안이 나온다. 정 회장의 현대자동차, 현대모비스 주식 가치를 제외한 그의 다른 주식가치 총액은 모두 약 5조3000억 원이다. 이중 50% 양도세를 내고 나면, 2조 6500억 원이 남는다. 모비스 주가가 적당히 하락하면, 관계사(기아차와 현대제철)가 보유 중인 23%를 충분히 인수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정 부회장이 보유한 주식가치의 변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모비스와의 합병비율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정 부회장이 추가로 사재를 털어 모비스 주식을 사들일 경우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 부회장의 주식가치는 1분기 주식시장 종료일을 하루 앞둔 시점인 2018년 3월29일 현재 약 3조6640억 원으로 추정되는데, 전기(2017년 4분기)의 3조1980억 원에 비해 4660억 원이 증가하였다. 이는 정 부회장의 보유주식(아래 표3 참조) 중 주로 현대엔지니어링과 글로비스 주식가치의 상승 때문이다. 반면 현대차의 주식 가치는 하락했다. 이것은 일감 몰아주기 내지는 이익 몰아주기로 현대차의 영업이익이 감소하는 대신, 관계회사인 글로비스의 영업이익 증가로 주가가 상승하였음을 의미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금년 상반기에 현대차 영업이익이 악화되는 가운데 왜 유독 글로비스와의 내부거래액이 증가하였는지에 대한 의혹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글로비스의 주가를 띄워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원래 현대차에 귀속되어야 할 영업이익 일부가 외부로 유출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같은 관계사로의 이윤유출 사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017년 역시 현대차의 영업이익률은 2016년의 5.5%에서 4.7%로 하락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하락 원인 중에는 당시 ‘사드문제’라는 돌발적인 악재도 작용하였지만, 2018년 상반기 때와 마찬가지로 부품단가 상승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이때는 원재료비 비율의 1% 정도 상승이 문제가 되었다. 이는 2016년도 매출원가가 76조 원이었던 점에 비추어 대략 7500억 원 정도의 차이를 낳게 만들었다. 이 역시 현대제철, 현대모비스와 같은 대형 관계사와의 내부 거래가 문제였는데, 그중 특히 정몽구 회장이 11.81% 지분을 가지고 있는 현대제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7년 현대제철 연결 매출액은 19조1660억 원으로 연결 영업이익률은 7.1%이었다. 비록 전년도 8.7%에 비해 하락했지만 여전히 업계 상위 수준을 유지하였다. 그런데 2017년 경쟁사인 포스코와 현대제철의 판재 판매단가를 비교해 보면, 현대제철이 포스코보다 더 비싸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표4 참조). 포스코의 경우 열연보다 비싼 냉연강판을 비교하였음에도 그러하다. 이는 내부거래가 수익률 상승의 주요 원인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실제 현대제철의 계열사 내부 거래 규모는 2조원이 넘었다. 이 같은 단가 차이는 현대자동차 등 계열사들이 손해 볼 가능성을 높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현대차 대주주가 비교적 높은 지분율을 가진 관계사들은 거의 예외 없이 업계 평균보다 높은 영업이익률을 갖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글로비스의 매출액은 연결기준으로 2017년 16조3580억 원인데, 그의 연결 영업이익률은 4.4%로 업계 최고 수준으로 다른 물류회사 평균에 비해 2배 이상 높았다.(표5 참조) 글로비스의 매출은 70% 이상이 그룹 계열사와의 내부거래에서 발생한다. 이처럼 막대한 이윤이 보장되면 그 차이만큼 현대자동차 등 다른 계열사들이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다음으로 정몽구 4.68%, 정의선 11.72%의 지분구조를 가진 현대엔지니어링을 살펴보자. 2017년도 현대엔지니어링의 매출은 6조9410억 원으로 전년도에 비해 6% 감소하였지만, 영업이익은 오히려 전년도 보다 198억 원이 늘었다. 이에 따라 영업이익률은 8.2%로 다른 대형 건설사와 비교할 때 수익성이 업계 최고를 기록했는데, 실례로 GS건설은 2.7%, 매출액이 약 10조 원 이상인 현대건설의 영업이익률은 4.2%, 프로젝트 중심인 삼성엔지니어링의 영업이익률도 0.8%에 불과하였다.
광고회사인 이노션의 경우를 보면, 2015년 상장 이후 그 지분구성은 정몽구 회장의 큰딸인 정성이가 27.99%, 정의선 부회장이 2%로 얼마간 변동이 있었다. 그전에 모든 지분을 가족이 보유하고 있었는데, 공정거래법 회피용으로 변경되었다. 이노션 역시 내부거래 비중이 85%가 넘으며, 사실상 내부거래라고 할 수 있는 방계회사(현대중공업)까지 합하면 거의 100%에 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노션은 2014년도 11%, 2015년도 9.4%에 이어 2016년도 9.5%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하였다, 2017년도에는 8.5%로 조금 하락하였지만, 삼성그룹 제일기획의 당해 영업이익률이 4.6%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여전히 매우 높은 편이다. 후자는 매출액 3조원이 넘는 광고기획사인데, 매출액 1조 원인 이노션의 영업이익률이 이보다 무려 2배 가까이 높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동안 총수일가의 개인적 탐욕으로만 간주하였던 ‘일감 몰아주기’가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적은 지분만을 보유하고 있는 총수일가가 그룹 전체에 대한 지배를 유지할 수 있도록 ‘개인 자산의 확충’을 신속히 이룰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는 총수일가에게 있어선 대단히 긴급하고 사활적인 과제라 할 수 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은 지금의 현대차 경영위기와 관련하여 매우 관건적인데, 이에 대한 설명을 좀 더 덧붙이도록 하자.
주지하다시피 재벌은 독점자본의 한 형식이자 한국사회에 있어선 그 주요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재벌의 특징은 피라미드식 기업집단을 형성하는 가운데 그 정점에 총수일가와 같은 ‘자연인’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같은 재벌의 내적 모순은 개별기업의 규모가 커지고 전체 기업집단의 규모 역시 끊임없이 확대됨에 반해, 그것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총수일가의 지분은 상대적으로 축소되게 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기본모순인 ‘생산의 사회적 성격의 고도화와 자본주의적 점유 방식’ 간의 모순이 한국적인 형식으로 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재벌에 있어서는 왜 이 같은 모순이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요인 때문인데, 하나는 ‘확대재생산을 위한 자본 확충’의 요구이며, 다른 하나는 ‘재산 상속’과 관련된다.
우선 첫 번째 요인부터 살펴보자. 자본주의에서 확대재생산에 대한 요구는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나온다. 하나는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사회 생산력이 발전할수록 일반적으로 자본의 필요 최소단위가 커진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자본 간의 경쟁 때문이다. 이 경우 확대재생산을 달성하는 방식에는 다시 다음 세 가지가 있는데, 즉 집적, 집중, 그리고 금융권차입 혹은 주식시장 상장과 같은 사회적 자본을 이용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볼 때 재벌형식의 기업집단에 있어 총수일가의 지분구조에 변화가 발생하는 경우는 이하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주식시장에 상장하는 과정에서 지분축소가 발생한다. 비상장 기업을 주식시장에 상장하는 것은 대개는 기업규모를 신속히 확대하기 위한 자본 확충의 필요성 때문이다. 이 경우 원래 총수일가의 개인자본보다도 훨씬 큰 사회 자본을 모집하게 되며, 이에 따라 총수일가의 지분은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된다. 또 각국의 주식시장 관련법은 대체로 주식소유의 사회적 분산을 장려키 위해 상장 조건으로 개별 대주주의 지분을 일정수준 이하로 제한하는 조건을 두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경우 코스피 시장에 상장하기 위해서는 소액주주 소유비율이 25% 이상이거나, 공모비율이 25% 이상이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소액주주 1000명 이상의 조건을 갖출 것도 요구하는데, 이 같은 규정에 따라 주식시장에 처음 상장할 때 총수지분의 축소가 발생한다.
둘째, 이후 추가적인 사업 확장 과정에서 총수지분이 축소되게 된다. 기업은 사내유보금 등 자기자본만으로 부족할 경우 금융기관 대출, 유상증자를 통한 방식으로 긴급 투자자금을 모집한다. 이 경우 이자부담 때문에 금융기관 대출에만 의존할 수 없는데, 이에 따라 유상증자 방식을 채택할 경우 일반적으로 총수의 지분축소가 발생한다.
셋째, 기업을 주식시장에 상장할 경우가 아니더라도 재벌은 끊임없이 문어발식으로 자기 사업영역을 넓혀 가는데, 그것은 a. 생산-유통-판매 등 관련된 자본축적운동 전 과정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 b. 총수의 기업지배구조를 보완할 목적 등을 갖고 있다. 이 경우 총수는 개인 소유 자본을 투자함으로써 그 같은 비상장기업을 직접 지배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총수자본을 분산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어, 앞서 모기업의 유상증자가 필요할 시에 이에 응할 수 있는 힘을 약화시킨다.
넷째, 재벌형식의 기업집단의 경우 모기업-子기업-손자기업의 형태로 한 기업을 이용한 다른 기업의 지배사슬이 끝없이 이어지게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리하여 전체 재벌 기업집단 내에서의 총수지분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된다.
다음으로, ‘재산 상속’ 관련한 요인을 살펴보자. 재벌형식의 기업집단 내에서 총수일가의 지분이 지속적인 축소를 하게 되는 것은 총수 일대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다음대로 이어지는 ‘후계승계’ 과정에서 더욱 첨예하게 발생한다. 왜냐하면 상속법에 따라 일정 분을 국가에 세금으로 바칠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한국의 경우는 30억 원 이상의 재산을 상속받을 경우 그 절반인 50%를 국가에 납부하게 되어 있다. 이 때문에 매번 후계 상속이 일어날 때마다 총수일가의 지분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한국 재벌은 지금 창업주로부터 ‘3대 경영’으로 넘어가는 단계에 와있다. 이 경우 두 차례의 상속과정을 거치게 되는 셈인데, 그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예컨대 단순계산을 할 경우에도, 만약 창업주가 원래 50%의 지분을 가졌다고 한다면 2대 때엔 25%, 3대에 이르러선 12.5% 밖에 남지 않게 된다.
후계승계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우리가 고려할 점은, 한국경제의 규모가 커지고 그것을 떠받치는 재벌 규모가 커질수록, 그리고 주식시장 상장을 통해 기업이 공개화 되고 주식 분산이 이루어질수록, 이에 비례하여 후계승계 작업의 어려움은 날로 커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이 같은 후계승계는 일찍부터 여유를 두고 장기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이는 그 만큼 기업집단 내 이윤유출도 장기간에 걸쳐 일상적으로 발생되게 됨을 뜻한다.) 예컨대, 삼성그룹 이재용의 경우 일찍이 1996년 그가 일본 게이오대학에 유학하던 무렵부터 이미 이 작업을 진행하였음에도, 최근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조작 사건이 다시금 불거진 것을 보면 아직까지도 후계승계 작업이 완료되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총수의 경영권 강화와 후계승계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한국 재벌들이 즐겨 쓰는 방식은, 총수일가가 관계회사를 차려 본사의 이윤을 체계적이고 장기적으로 빼돌리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관계회사를 통한 ‘일감 몰아주기’는 다음 세 가지 측면의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즉 (1) 총수일가의 경제적 탐욕 실현 (2)총수일가의 그룹 전체에 대한 지배력 강화 (3) 후계승계가 그것이다.
현대차 역시 정확히 이러한 논리에 따라 행동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현대차에서 후계승계가 이루어 질 때마다 새로운 ‘관계회사’가 부상하였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다. 현 현대차 회장인 정몽구는 모비스의 개인 최대 주주인데, 그는 그것을 통해 그의 부친 정주영으로부터 현대차에 대한 경영승계를 순조롭게 할 수 있었다. 모비스는 부품사업과 AS를 통해 급성장하였는데, 스스로 이들 기술들을 개발했다기보다는 사실상 하청 부품협력사들의 기술을 빼돌리거나 이들을 매수 합병하는 방식이 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더해 현대차를 통한 일감 몰아주기와 높은 납품단가 등으로 현대차의 이윤을 유출시킴으로써 급성장하였다.
이제 그의 아들인 정의선 대에 이르러선 조금 다른 방법을 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미 부품사업과 AS 분야는 그의 아버지가 대주주인 모비스의 주 업무이기 때문에 똑같은 업무의 관계회사를 두 개나 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글로비스라는 물류 전문회사를 따로 차려 이것으로 모비스와 비슷한 방식으로 현대차로부터 일감을 챙기고 그 이윤을 유출 하는 방식으로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이처럼 현대차는 원래 자신에게 귀속되어야 할 이윤의 상당부분을 총수일가가 관련된 관계회사로 지속적으로 유출시킨다는 측면에서 연구개발투자의 여력은 크게 줄어들게 된다.
우리는 현대차의 한전부지 매입과 관련한 현대차 경영진의 행동에 대해서도 상당부분 이 같은 시각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재벌구조 하에선 막대한 사내유보금이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총수에게 큰 의미가 없다. 그것이 ‘자기지분의 확대’를 위해 쓰여 질 때라야 비로소 가장 큰 의미를 갖게 된다. 따라서 지분이 날로 왜소해지고 있는 총수로서는 사내유보금을 모기업의 발전을 위해서만 전면 투자하지 않는다. 기업집단 내에서 각 기업에 투자한 자기 지분의 이익을 먼저 고려하게 되며, 그를 통해 최종적으로 기업집단 전체의 통제력을 강화하는데 일차적인 관심을 둔다. 한전부지 매입사건은 이 같은 재벌의 생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물론 이 사건은 연구개발보다도 업무용으로 위장한 부동산투자를 통해 손쉽게 돈을 벌려는 한국 재벌의 나약한 일면을 보여주는 측면이 강하였지만, 이것만이 다는 아니었다고 보인다. 당시 한전부지를 10조5천억 원으로 시가보다 3배나 비싼 돈으로 매입한 데에는 상당 정도 정권과의 검은 유착이 들어 있을 것이라는 주변의 관측이 많이 있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현대 측이 박근혜에 대가로 요구했던 것은 현대제철의 경쟁사인 포스코에 대해 일정한 불이익을 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현대제철은 아다시피 정몽구가 지배주주로 있는 회사이다.
어떻든 오늘날 현대차 경영위기를 논함에 있어 한전부지 매입사건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당시 한전부지 매입가격 10조5천억 원은 그때 입찰에 참여한 현대차그룹(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 3사) 전체의 동원 가능한 현금성 자산 25조5000억 원의 40%가 넘는 액수였다. 이처럼 막대한 돈을 주 업무가 아닌 엉뚱한 곳에 쏟아 부은 셈인데, 아무리 잘 나가는 현대차라도 그렇게 되면 정작 중요한 곳에 투자할 여력이 없어지게 된다. 이때부터 현대차의 몰락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다른 글로벌 경쟁사들이 차세대 기술을 위해 사활을 걸고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막대한 연구투자비를 쏟아 붓고 있는 시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당시 한전 매입비를 살 돈이면 마침 그 무렵 매물로 나온 재규어-랜드로버(2조3000억 원), 볼보(2조1000억 원) 크라이슬러(4조4600억 원)를 모두 사고도 남았다. 고급 자동차 브랜드를 통해 현대차가 기술력을 키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셈이다.
그밖에도 이미 경영위기의 먹구름이 뒤덮기 시작한 2017년도에 현대차는 무려 1조800억 원의 배당을 했다. 이는 당시 현대차 개별 당기순이익의 42%에 해당하는 막대한 액수이다. 이로 인해 정 회장의 배당도 500억 원이 넘었으며, 정 부회장 역시 200억 원 이상을 받았다.
경영위기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이렇듯 배당률이 높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들의 수입은 배당만 받는 것이 아니다. 2016년 정 회장의 연봉은 53억 원으로 글로벌 완성차 업체 최고경영자의 연봉 중에서도 상위그룹에 속하였다. 2017년 역시 업계 평균 수준 이상인데 정 회장에게는 47억원, 정부회장은 12.5억 원의 연봉이 지급되었다. 전년도보다 얼마간 감소하였지만 현대모비스에서도 이들은 각각 34억 원과 5.5억 원을 받음으로써 정 회장의 연봉 총액은 80억 원에 이르렀다. 이는 현대차보다 훨씬 잘 나가는 폭스바겐 경영 이사들의 퇴직연금을 포함한 연간 급여 평균액(성과급 제외)이 약 140만 유로(한화 약 18억 원)로 추정되는 것과 비교된다. 이 역시 단순한 총수일가의 탐욕만으로 해석될 수 없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종합해 보면, 작금의 현대차 경영위기는 객관적 상황과도 일부 관련이 있지만, 주요하게는 재벌경영과 관련된 주체적 요인이 더욱 크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점은 이하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경영전략에 있어 세계시장의 ‘트랜드’를 읽는 데 실패하였다. 중국과 미국 양대 시장에 있어 SUV 유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그 대표적이다.
둘째, 리콜사태와 관련된 품질문제의 발생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부품협력사에 대한 수탈적 원-하청 관계 및 비정규직 양산을 통한 초과착취 방식을 수행하는 ‘신경영전략’과 관련이 있다.
셋째, 총수일가가 대주주로 있는 관계회사와의 내부거래를 통한 장기적인 이윤 유출의 발생이다. 이로 인해 현대차의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능력은 장기간에 걸쳐 현저하게 감소하였다.
넷째, 경영권 승계문제가 작용하였다. 이는 지금 현대차의 ‘주요모순’으로서 위기의 제반 측면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상에서 첫 번째는 구조적 요인이 아니지만, 나머지 세 가지는 한국의 재벌문제와 관련된 구조적 요인이라 할 수 있다.
현대차의 일부 현장 활동가들은 작금의 현대차 위기를 아직도 다소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기껏해야 몇몇 악재 때문에 발생한 일시적 경영악화 내지는 인위적인 수치조작을 통한 회사 측의 의례적인 ‘엄살’ 정도로 받아들인다. 적어도 현대차에 있어선 앞으로도 당분간 지난 1998년과 같은 대규모 구조조정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분위기이다. 그 근거로 사측과 노조는 이미 단체협약을 통해 대략 매년 2천 명씩 발생하는 정년퇴임을 통한 자연감축 방식으로, 향후 10년간 2만 명을 줄이기로 합의를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 6만여 명의 인력이 4만 명 정도로 축소되게 되어, 미래차 보급에 따라 엔진이나 변속기 등 기존 부속품이 없어지게 되는 것에 따른 인원감축 분을 얼추 맞출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 공연히 대규모 구조조정 운운하는 것은 현장에 불안감만을 조성하고, 오히려 ‘고통분담’을 호소하는 회사 측에 좋은 빌미를 제공할 뿐이라는 것이다.
과연 지금의 현대차 위기는 이렇듯 대규모 구조조정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낙관적’인 것일까? 일부 활동가들의 이 같은 판단과는 달리, 현장 내 30~40대 비교적 젊은 층의 정서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감도는 것 같다. 50대 이상의 고참 들이야 이제 곧 정년퇴임할 것이기에 걱정이 덜 하겠지만, 아직도 창창하니 현대차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젊은이들로서는 그렇지가 않은 가 보다. 그들은 아마도 정년을 다 채울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욱 강하다.
이들 젊은 노동자들의 걱정은 사실 공연한 것이 아니다. 사측 경영진 스스로가 현재 현대차의 미래에 대해 별로 자신감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인용문을 한 번 보도록 하자.
“현대·기아차 경영진은 최근 판매량 회복 시점을 전망한 내부보고서를 보고 혼란에 빠졌다. 이 보고서에는 미국과 중국시장 판매량 회복이 단기간에 불가능해 최대 판매량(801만대)을 기록했던 2015년 수준으로 올라오는 시점을 5년 뒤인 2023년으로 봤다. 2023년 판매량이 회복되더라도 세계시장 점유율은 2015년 8%대에서 7%대로 떨어진다. 이 같은 전망도 신차 라인업을 다양화하고, 신흥시장에서도 견조 한 성장을 지속한다는 전제에서다.” ([현대차 大해부]② “美·中빅마켓서 고전… 판매량 회복까지 최소 5년”, 조선닷컴, 2018.05.30.)
다소 비관적인 이 같은 판단은 학계와 자동차업계, 증권업계 애널리스트 등의 주류적인 생각인 것 같다. 이들은 현대차가 내년까지 미국과 중국시장에서 어려운 상황이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크며, 최소한 “새로운 신차 사이클이 시작되는 시점까지는 고전이 계속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렇지만 필자가 보기엔 이러한 판단 역시도 아직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측면이 있다. 이들은 지금 현대차의 경영위기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 그 근원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하다. 또 현대차가 향후 부딪치게 될 자동차업계의 대변혁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있다. 사실을 말하면, 지금의 위기는 현대차의 존폐와 관계될 뿐만 아니라, 조만간에 한국경제 전반을 혼란으로 몰아넣을 사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생각은 필자의 기우에 불과할까?
본인이 그렇게 판단하는 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지금 불행하게도 현대차는 ‘3중 위기’를 동시에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국제 자본주의 위기, 한국경제의 위기, 그리고 현대차의 자체 경영위기다. 이하에서 이들 하나하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1) 국제 자본주의 위기
먼저, IMF 외환위기 때와 지금의 국제적 상황이 크게 달라졌음에 주목해야 한다. 현재 미국의 국제적 패권 지위가 크게 흔들리는 중이다. 이 때문에 세계 자본주의는 지난 금융위기 이후 수습은커녕 시간이 갈수록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지금 일국적 차원을 벗어나 지구화단계에 들어선 자본주의에 있어서는, 누군가가 나서 전 지구적 차원에서 세계경제의 균형자적 역할을 해줄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신자유주의가 한창 기세를 떨칠 무렵인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그 같은 역할은 미국의 몫이었다. 미국은 자신의 달러패권을 이용하여 세계경제에 있어 ‘소비중심’으로서의 역할을 나름대로 수행하였으며, 이를 통해 세계 자본주의는 자신의 과잉생산 압박을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도 2008년 금융위기를 맞이한 이후에는 태도가 달라졌다. 지금은 제 살 궁리에 급급한 실정인데, 현재 미국과 유럽을 휩쓸고 있는 포퓰리즘의 열풍은 신자유주의 이후 방향을 찾지 못하는 자본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세계 자본주의는 지금 ‘일국주의’로 후퇴하느냐, 지구화를 향한 전진을 계속하느냐의 갈림길에 서있으며, 현재 횡행하는 보호무역주의는 세계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자본주의 전반의 모순을 한층 격화시킬 것이다.
지금 세계경제를 뒤흔들고 있는 중미 간 무역전쟁은 미국의 대중 억제전략, 그리고 미국경제 자체의 재정적자와 무역적자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수준으로까지 올라온 사정이 함께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발하였다. (필자의 레디앙 발표 글, “중미 무역전쟁―패권국가 미국의 최후 공세”
미국은 현재 거대한 재정적자와 무역적자, 그리고 빈부격차의 심화와 고용불안으로 인해 광범위한 저소득층의 불만이 폭발직전에 와있다. 이처럼 ‘자기 코가 석자’ 인 상황에서 다른 동맹국들의 형편을 봐줄 수 있는 형편이 전혀 아닌 것이다.
이처럼 한국이 1997년 IMF 위기를 맞이할 때와는 상황이 분명히 달라졌다. 그 땐 미국이 소련의 붕괴로 인해 유일패권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으며, 국제 자본주의 지도자로서 나름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같은 미국이 이끄는 세계 자본주의는 당시 외환위기에 처한 한국경제에 대해 어느 정도 활로를 열어 줄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은 외환위기를 비교적 빨리 소화할 수 있었으며, 이후 세계경제의 확장기조와 인접국인 중국시장의 지속적인 확대, 그리고 엔고와 같은 유리한 조건들을 십분 활용하면서 다시 재기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젠 그러한 조건들이 대부분 사라진 상태이며, 다만 엄중한 각국 간의 경쟁만이 남아 있다. 트럼프가 취임한 직후 즉각 한미FTA 재협상을 요구한 데서 보듯, 미국은 오히려 자국시장을 방어하고 한국시장을 공략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당장 걱정되는 것이 미국의 ‘자동차관세 25%’이다. 얼마 전 GM이 미국 내 5개와 해외 2개 공장에 대한 폐쇄와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 하자, 트럼프대통령은 “수입자동차 관세를 매기면 GM공장이 문을 안 닫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트럼프의 이 같은 위협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이 때문에 유럽연합을 비롯한 주요 대미 자동차수출국들은 전전긍긍하고 있다.
지난 G20의 트럼프-시진핑 정상회담을 통해 중미 무역전쟁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이 카드가 현실화될 가능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 이는 현대차를 포함한 전체 한국 자동차산업에 또 다른 커다란 악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우선 르노삼성자동차와 한국GM의 국내 생산량은 반 토막 날 것이라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또 한 해 50만~60만 대 정도 대미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현대-기아차로서도 생산 공장 2개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을 정도의 타격을 입게 된다. 이쯤 되면 현재 고사 직전의 부품회사들도 곧바로 직격탄을 맞고 무너질 공산이 크다. 현대차 노조가 “만약 미국의 한국산 자동차와 부품에 25% 관세폭탄이 현실화되면 대재앙 쓰나미로 다가와 한국자동차산업 몰락의 핵폭탄이 될 것” (현대자동차지부, 2018년12월10일자 성명) 이라고 말한 것은 결코 과장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2) 한국경제의 위기
지금 세계는 유례없는 신 과학기술혁명의 파도 한 가운데에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미처 미래기술에 대한 준비가 부족한 한국은 자신이 그동안 자랑해왔던 제반 분야들을 하나 둘씩 내려놓고 있는 중이다. 처음 조선업종에 이어 지금은 자동차, 그리고 머지않은 장래에 반도체로 확대되는 위기를 맞고 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재벌경영’의 구조적 족쇄에 갇혀 있는 한국의 주요 기업들은 물론이고, 국가적 차원에서도 별 다른 뾰쪽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기술혁명은 그 어느 때와 달리 개별 기업차원의 혁신능력뿐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전 국가적 차원의 종합적인 혁신체계 구축이 요구된다. 국가는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창의적인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교육체계 및 연구시설과 함께, 주택·의료·환경 등의 복지시설을 제공할 의무를 짊어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한 튼튼한 사회보장체계의 구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된다. 그러나 취약한 재벌체제에 기초한 한국의 국가권력은 이런 면에서 볼 때 너무나도 부족하다. 능력과 의지 모두 결핍되어 있는데, 더욱 한심한 것은 지금 와서 이러한 것들을 갖추기에 이미 시기가 상당히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혀 그를 위한 사회적 합의조차 이루어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대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국사회 역시도 이미 기존의 산업구조와 사회시스템으로는 더 이상 안 되는 상황에서, 새로운 변화를 위한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는 전형적인 위기상황임을 알 수 있다.
한국사회는 그 대신 늘어만 가는 비정규직으로 인해, 빈부격차와 사회갈등은 날로 심화되고 인재는 고갈되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더욱 황폐해지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이미 1500조원을 넘어선 가계부채이다. 이미 통제력을 상실한 가계부채는 날마다 새로운 기록을 갱신하면서 도대체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최근 저신용·저소득자가 주로 몰리는 제2금융권의 대출이 많이 불어난다는 소식은 매우 불길한 징조로 들린다. 그것은 벼랑 끝에 몰린 한계 채무자들의 마지막 도피처일 가능성이 크다. 금리가 은행보다 훨씬 높은 보험·카드사·대부업 등 제2금융권의 대출은 올해 3분기까지 19조원이 늘어나서 대출 잔액은 이미 414조원을 넘어섰다. 이는 전체 가계대출의 27%를 차지하는 것이자, 2017년 한국 전체 GDP의 25%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이처럼 위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한국경제의 전반적 상황은 현대차의 경영위기탈피 가능성을 더욱 낮게 한다. 현대차가 당면한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내수의 뒷받침과 함께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한국사회는 그럴만한 여력이 없는 실정이다. 오히려 향후 경제위기와 서민층 파산의 급증으로 내수의 급격한 위축이 예견되는데, 이는 현대차의 경영위기를 진일보 촉진하게 될 것이다.
(3) 현대차 자체의 경영위기
현대차는 지금 전통 내연기관차 부문에서는 중국의 급속한 추격으로 인해 기존의 지위를 위협받고 있으며, 미래차(친환경차, 지능형차) 분야에서는 세계 선두그룹들과 비교해 추격이 쉽지 않을 만큼 거리가 생긴 상황이다. 여기에 더해 이하 두 가지 사실은 앞으로의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한다.
(a) 이미 급락한 영업이익률을 단기간에 회복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 지난 호에서도 언급했듯이 영업이익률은 연구개발비 규모와 비중을 결정하는 객관적인 제약조건이 된다. 이 때문에 무엇보다도 시급한 연구개발투자가 크게 제약될 것이라는 우려가 들지 않을 수 없다. 현재 폭스바겐, 도요타, GM 등 세계 주요 메이커들은 하나 같이 기존 내연기관차 시장에서 벌어들인 돈을 아직 수익이 나지 않는 미래차의 연구개발비로 쏟아 붓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이처럼 기존 내연기관차 분야에서 일정한 영업이익률이 올라주어야 미래차 경쟁에서도 뒤처지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엄중한 상황에서 이제 적자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는 현대차의 경영성적은, 향후 연구개발투자를 근본적으로 제약하게 만들어 선두주자와의 격차가 좁혀지기는커녕 더욱 벌어지게 만드는 악순환을 발생시킬 수 있다.
(b) 여전히 ‘후계승계’ 문제에 발목이 잡혀 있는 불안한 리더쉽. 총수일가의 지배력 강화를 먼저 고려해야하는 한국의 재벌경영은 위기 극복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핵심 사업으로의 집중을 위해 비업무용 부동산, 세계 각지에 편재한 생산기지, 관계회사와의 복잡한 거래를 과감하게 정리하는 것은 한국 재벌의 속성 상 쉽지가 않다. 이 점은 GM이 위기 극복을 위해 취했던 태도와 좋은 대조가 된다. GM은 지난해에 독일 자회사 오펠과 영국 복스홀을 매각하면서 유럽 시장에서 과감히 손을 뗐다. 이어서 인도나 남아공 등에서도 잇따라 철수하여, 미국과 중국 등 돈이 되는 거대 시장에만 집중하는 전략으로 수익을 늘렸다. 이렇듯 구조조정을 통해 절감한 비용과 자산은 대부분 자율주행차와 카셰어링 등 신사업에 투자하였다. 그 결과 올 초 미국의 기술평가업체인 내비건트리서치로부터 자율주행차 개발에 나선 기업들에 대한 기술력과 비전, 상용화 전략, 생산력 등 10개 지표에 대한 종합 평가에서 GM이 가장 앞선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대차 大해부]①’800만대의 저주’에 갇힌 현대차‘)
재벌경영으로 얽히고설킨 현대차가 이렇듯 오직 회사만의 발전을 위한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
향후 현대차 위기와 한국경제의 위기는 서로 맞물리며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국내 최대 자동차업체인 현대기아차그룹의 위기는 그 자체로서 한국경제 전반의 위기를 촉진 할 것이다. 한국 자동차산업은 생산액과 부가가치, 수출액, 종업원 수 모두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대략 10%로 단일산업 중 규모가 매우 크다. 산업네트워크 분석을 통해서 보면, 자동차산업 및 1차 금속제품 산업이 우리나라 제조업에서 중심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들 산업은 겉으로 드러난 성과보다도 국민경제에서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i-KIET산업경제이슈, 제6호, 2017년2월6일) 이 같은 국민경제에 있어 핵심적인 지주산업의 몰락은 기존 조선업 불황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충격을 가져올 수밖에 없으며, 수십만 개의 일자리가 한꺼번에 사라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현대·기아차 등 완성차 업체와 8800여 곳에 달하는 협력업체가 직접 고용한 인력은 35만5000명이다. 판매 및 물류, 서비스 등 간접고용 인력까지 더하면 국내 자동차산업의 고용 인력은 175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처럼 도처에 인화물질로 겹겹이 둘러싸인 현대차는 사실상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국면을 맞고 있다. 현대차의 예견되는 앞날은 도대체 어떠한 것일까? 필자가 보기엔 근본적 전환의 계기를 지금 마련하지 못한다면 독자생존이 어렵다고 본다. 기존의 내연기관차 시대에는 나름대로 틈새시장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앞으로 완전자율주행과 차량공유의 시대가 오면 어차피 세계 자동차시장은 플랫폼 경쟁에서 앞서있는 소수의 업체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 인공지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기술혁명은, IT와 기존 고급 기술력을 가진 두 선진 부분의 연합에 의한 소수 몇 개의 메이저를 중심으로 세계 자동차산업을 재편하게끔 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처럼 가다가는 현대차를 비롯한 한국 자동차산업 전반은 이들의 하위 파트너 내지는 심지어는 하청업체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기술종속과 플랫폼 의존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지금 애플이 대부분의 핸드폰 제조회사로부터 높은 사용료를 받아 가듯 상당히 높은 특허비용을 지불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하청업체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아직 완전히 공개되지 않은 대형악재 하나가 현대차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필자의 이 같은 판단에 힘을 실어준다. 그것은 ‘대형 리콜사태’인데, 지난 2015년9월과 2017년3월 미국에서 실시된 현대차와 기아차의 세타2 엔진 결함 리콜에 대한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HTSA)의 적정성 조사 결과가 조만간 발표될 예정이다.
<포쓰저널>의 김성현기자가 쓴 기사에 따르면, NHTSA는 이미 조사를 마무리한 채 현대 기아차 측과 벌금 액수 등 후속조치에 대한 합의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며, 최종 결과는 이르면 12월 늦어도 내년 초에는 나올 전망이다. 조사 대상은 2011년―2014년 식 세타2 엔진을 장착한 현대차와 기아차 등 총 6개 차종인데, 이들을 모두 합치면 대략 290만대나 되는 규모이다. 해당 차종에서 이미 ‘미충돌 발화 사고’로 사망자까지 발생한 상태인데, 미국 정비업계에 따르면 현대 소나타를 기준으로 할 경우 엔진 교체 비용은 대당 300만원 안팎으로, 총 8조5천억 원 가량이 소요 될 전망이다. 이는 지난해 기준으로 볼 때 현대차 2년간의 순이익에 해당되는 액수이다. 여기에다 만약 현대·기아차가 엔진 결함을 속인 것으로 판정되면 형사처벌과 민사상 손해배상이 더해지게 되며, 미국 시장에서의 이미지 실추와 신뢰도 추락까지 감내해야 한다.(“현대차·기아차 세타2 엔진 발화원인 ‘거짓보고’ 의혹 NHTSA 조만간 결론”, 포쓰저널, 2018년11월20일자)
그렇잖아도 경영위기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현대차에게 있어 이 사건은 결정타가 될 수도 있다. 국제 독점자본은 그때쯤 가면 아마도 각종 내우외환의 위기에 빠진 현대차를 헐값에 인수하거나, 지배주주 자격으로 자본 참여를 통해 자신의 글로벌 생산체계에 편입시키려 할 것이다. 한국 재벌과의 연합은 그들에게도 유리한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직접 표면에 나서지 않고서도 한국의 잘 정비된 ‘비정규직제도’와 국가의 특혜를 충분히 활용하면서 초과착취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위기 시나리오’가 지금 당장 실현되기 보다는 향후 몇 년 간에 걸쳐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부자가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 말이 있듯이, 명색이 세계 5대 자동차 메이커의 하나면서 국내에 독점적 지위를 구축한 현대기아차그룹은 향후 일정한 시간을 두고 쇠락해 갈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3중 위기’에 직면한 현대차는 ‘주관적 의지’만 가지고서는 지금의 하강 추세를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 회사는 가능한 갖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위기의 전면적 폭발을 누르려 할 것이지만, 그러나 위기의 점진적 진척을 막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고찰로부터 우리는 현대차 경영진이 들고 나올 카드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이 몰고 올 기술적 변화를 감안 하고 중국의 맹렬한 추격을 염두에 두면서, 결국 가까운 시기에 대규모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할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회사 측은 오히려 ‘어차피 발생할 수밖에 없는’ 현대차 경영위기를 역공의 기회로 삼으려고 할 가능성이 크다. 마침 지금은 문재인정부가 경제위기로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하며 구석에 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현대차가 자신의 경영위기론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차츰 구조조정 전략을 구체화한다면, 추가적인 다음과 같은 이득도 기대할 수 있다. 즉 경영위기는 현대차 개별 자본만의 문제가 아니며, 또 ‘재벌경영’ 때문에 생긴 것도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경제 전반의 거시경제 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과오를 덮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는 것이며, 거기에다 ‘경제위기’의 책임을 문재인정부에게 돌림으로써, 이 정부의 재벌개혁에 대한 예봉을 꺾어 ‘타협적’이게 만들 수 있는 계기로도 삼을 수 있다.
어찌되었든 현대차 정규직노동자와 사측의 지금까지의 일종의 잠정적 타협과 휴전의 시기는 점차 지나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현대차는 이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여 기존의 경영전략을 일대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와있다. 현대차의 운명에 있어 남은 것은 두 가지 방향밖에 없다. 자본가에게 유리한 방향으로의 구조조정이든지, 아니면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재벌에 대한 근본적 개혁이든지 둘 중 하나이다. 분명한 것은 그 어느 쪽이든 지금까지의 ‘산업평화’는 깨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며, 그에 따른 상호간 ‘위기’의 책임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예상된다.
회사는 벌써부터 현장규율 강화를 들먹이며 현장의 주도권을 탈환하려는 움직임을 점차 노골화하고 있다. 예년과 다르게 금년 초부터 관리직 200여명에 대한 권고사직을 실시하였고, 그밖에도 노조 감시용 혐의를 받고 있는 ‘담장 감시카메라 설치’를 추진하고 있다. 사측은 또 지난 11월16일자로 의장3부 B조 도아반원 대부분에 대해 ‘작업표준 미준수(변칙근무)’를 이유로 중징계(감봉)하는 조치를 내렸다.
물론 이와 함께 회사 측 말을 잘 듣는 어용 대의원과 노조간부의 양성 작업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현대차노조를 확실히 자신들의 통제 하에 두어야만 앞으로 경영위기의 진척에 따른 일감 줄이기, 인원감축, 노동강도 강화 등의 구조조정 작업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용 대의원들에 대한 매수 작업도 사실상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2000년대 초 경기가 좋을 때와는 달리 이들을 돈으로 달랠 수 있는 재정 기반이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 재벌이 그간 정규직과의 타협을 가능케 했던 물적 조건은 지금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현대차가 위기 심화정도에 따라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다분한 가운데, 일부 활동가들이 아직도 사측과 노조가 향후 10년간 2만 명의 ‘자연감소’를 협약한 상태이기 때문에 별반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상황인식이 대단히 느슨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문제는 그 ‘10년’ 이란 긴 세월에 있다. 지금처럼 4차 산업혁명의 진행 속도가 빠르고, 지금까지의 내연기관 시대와 획을 긋는 자동차업계의 일대 혁명적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 시기에 있어 10년이란 세월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아주 긴 세월’이 된다. 그 동안 어떤 일도 발생할 수 있으며, 실제 경제위기가 도래할 경우 자본가들의 약속은 반 푼 값어치도 안 되는 한 장의 종이쪽지에 불과하다. 안이하게 그들의 약속을 믿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는 ‘허약한’ 노조에 대해 자본가들이 신의를 지켜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번 싸움은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든 싸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회사’와 ‘국가’ 위기를 빌미로 한 자본과 정권의 대대적인 공세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노동자들은 웬만한 대응논리를 갖고서는 이 싸움을 이길 수가 없다. 먼저 냉정하게 이 싸움의 성격을 바라보아야, 객관 상황의 요구에 부응하고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낼 수 있다.
금번 현대차 경영위기는 객관적으로 볼 때 ‘재벌경영’과 ‘자본주의’ 모순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따라서 이 싸움 역시도 필연적으로 반재벌, 반자본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자.
(1) 먼저 ‘반재벌’ 성격에 관해 논의해 보자.
우리는 지금까지 현대차 경영위기의 근원이 총수경영, 후계승계 등 재벌문제와 관련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총수 1.73%, 총수일가 3.45%(2018년 5월 기준, 공정거래위)라는 적은 지분만을 가지고서 거대한 현대차그룹을 지배하고 또 그것을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는 ‘일감 몰아주기’ 등을 통해 끊임없이 현대차의 이윤을 관계회사로 유출시킬 수밖에 없다.
장기간의 이 같은 이윤 유출은 현대차의 체력을 쇠약하게 만들었으며, 급기야 내연기관차와 미래차 모두에 있어서 국제 자동차 메이저들에 비해 기술경쟁력이 만회하기 힘들 만큼 뒤처지게 만들었다. 따라서 이 싸움은 기본적으로 ‘반재벌’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현대차 경영위기의 원인과 관련하여, 일각에서는 ‘귀족노조’ 운운하며 현대차 노동자들의 상대적 고임금이 마치 위기의 주범인양 사태를 호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같은 비난은 현대차 재벌과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보수언론의 여론공세에 불과하다. 현재 세계 자동차시장 점유율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폭스바겐과 비교할 경우 그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폭스바겐의 독일 자체 노동자는 11만7천명으로 현대차보다 2배나 많은데, 생산대수는 122만5천대로 현대차의 73%에 불과하다.(2017년 기준) 노동시간에 있어서 볼 때도 폭스바겐 노동자들은 1년 평균 노동시간이 1300시간 이하이며, 이는 현대차 노동자들 1880시간보다 30%나 적다. 이렇게 적게 일함에도 불구하고 개별 기준 1인당 연봉은 2017년 기준으로 91,969유로(한국 돈 1억2천만 원)로 현대차 9200만 원보다도 더 많다. 이상은 현대차 위기가 결코 인건비 문제가 아니라, 기술력과 경영관리 능력에 있어서의 차이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현재 문재인 정권이 추진하는 ‘광주형 일자리’ 역시도 방향을 완전히 잘못 잡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 한국 자동차산업 전체가 존폐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그리고 그 본질이 ‘기술경쟁력’의 뒤처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주형 일자리’와 같은 대책은 여전히 문제의 원인을 현대차 정규직들의 고임금에서 찾는다.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저렴한 인건비를 통해 생산체제의 양적 확대를 도모한다. 그것은 문재인 정권이 애타게 바라는 고용문제의 해결에는 얼마간 도움을 줄 수는 있을지언정, 또 다음 번 총선에서 득표율 제고에 유리할지언정, 문제의 해결책에서 어긋나기에 곧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지금도 재고 누적과 가동률 저하로 시달리는 현대차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 뿐이다.
따라서 이 같은 방안은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위기의 본질(재벌문제)을 외면한 채, 잠시의 타협만을 강요하는 미봉책일 뿐이다. 앞으로 이어질 일련의 사태 전개에서 노동자들이 이 같은 정권과 현대차 재벌의 야합에 굴복하고 타협하게 되면, 이는 향후 본격적으로 전개될 투쟁에 있어 전선의 분명한 설치를 모호하게 만들고 노동자들의 예봉을 꺾는 데 기여할 뿐이다. 때문에 단호히 현대차 재벌에 반대하며, 재벌해체와 총수경영을 종식시키는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광주형 일자리’와 관련해서는 다음 호에 좀 더 상세히 다루기로 하자.)
(2) 다음으로 ‘반자본’적 성격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비록 현대차 경영위기가 재벌경영과 관련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금번 위기가 ‘재벌해체’나 ‘재벌민주화’를 요구하는 수준에서 완전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현대차 위기를 다시 살펴보자면, 그 근저에는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제4차 산업혁명이 존재한다. 즉 기존 내연기관을 대체하는 새로운 미래차 관련된 기술의 맹렬한 발전이 있으며, 이는 한국의 낡은 재벌경영과 정면으로 충돌함으로써 그 후진성을 남김없이 드러내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현대차 경영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선 이런 재벌경영을 해체하고, 그 대신 전문 경영체계를 구축하여 전력을 다해 이 기술발전을 따라가면 되는 것일까? 그러나 이 경우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이하 한 현대차 노조간부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전기차는 고용 측면에서는 악마의 기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기자동차 전용라인일 경우 최대 30%의 고용이 사라집니다. 부품도 3만개에서 1만 3천개로 줄어들기 때문에 기존 부품사의 줄도산과, 대형 부품사로 통폐합 되는 산업전환이 불가피합니다. 여기에 저의 고민지점이 있습니다.”
이는 지금 현대차를 비롯한 자동차업계 노동자들이 부딪치고 있는 딜레마를 잘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미래차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그것을 상용화할수록, 노동자들에게는 곧바로 ‘고용불안’이 엄습한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은 선뜻 전기차든 수소차든 혹은 스마트카든지 간에 그 보급을 반길 수만은 없는 입장이다. 4차 산업혁명이 앞으로 자동차산업의 고용에 몰고 올 파괴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래 글을 보면 더욱 잘 실감할 수 있다.
“축구장 18개 크기(18만4000㎡)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고작 50여 명 뿐이다. 칸막이로 나뉜 작업 공간에 배치된 로봇 2대가 차체 부품에 분주히 접착제를 바른 뒤 다음 제작 라인으로 옮기면, 사방에 설치된 4대의 로봇이 이를 조립해 차체를 완성한다. 사람은 분주히 지게차로 조립에 필요한 부품을 실어 나를 뿐이다. ……이 공장에선 160대의 로봇이 전기를 소비하며 전기차를 만들고 있지만, 에너지 비용은 일반 내연기관 모델 생산 공장의 절반밖에 들지 않는다.” (중앙일보, 2018년 10월 2일자)
이는 먼 미래에 대한 공상과학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라, 지금 현재 독일 라이프치히에 있는 BMW 전기차 차체 생산 공장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이다. 보통 3~4백 명 정도의 노동자들이 완수해야 할 자동차제조 공정이 겨우 50명 인원의 투입만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같은 생산과정의 변화를 일으키는 4차 산업혁명은 자본주의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재앙’이다. 왜냐하면 한편에선 인간노동을 대체하는 로봇에 의한 생산체계의 거대한 발전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선 이로 인한 실업자 대군이 양산되기 때문이다. 그 많은 제품들을 누가 다 사줄 것인가? 언론들이 벌써부터 걱정하고 있듯이 4차 산업혁명은 이렇듯 대량실업을 몰고 올 가능성이 크다. 모 정부관련 연구기관의 보고에 따르면, 이론상으로 보면 2025년이 되면 인공지능에 의해 기존 일자리의 70%가 사라질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다른 대안은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노동자들은 여기서 현대차 경영위기에 대해 ‘재벌해체’ 요구에만 그쳐서는 안 되고, 나아가 그것의 ‘공기업화’까지 요구해야 하는 이유가 생긴다. 그것은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로, 기술혁신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는 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과학기술의 발전이 왜 인류에게 이렇듯 재앙으로 다가오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과학기술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기보다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 올바르게 그것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윤 추구’만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문제인 것이다.
같은 기술이라도 이윤생산이 아닌 사회 전체의 ‘복지증진’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 의미는 180도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4차 산업혁명의 대표적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인공지능과 그와 함께 수반되는 제반의 과학기술혁명, 예컨대 소재혁명, 에너지혁명, 로봇과 자동화 기술의 발전은 사상 유례가 없는 풍부한 재화와 그 저렴화를 가져올 것이다. 이리하여 인류에게 있어 상대적으로 궁핍했던 시절에나 유효하였던 ‘등가교환’ 법칙의 의의를 완전히 상실하게 만들 수 있다. 넘쳐나는 재화 앞에서 굳이 이득과 손해를 따지는 행위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 인공지능의 발전은 지금의 시장의 무정부성을 극복하고 인간이 사회적 생산을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인공지능 기술의 한 영역인 ‘사물인터넷’의 발전은 이 같은 전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기에 접어들면 인간은 각종 수치화된 정보의 수집, 기록, 처리에 있어 거대한 능력을 획득하게 된다. 각 개인과 다양한 사회 주체들의 생활과 생산 및 공공의 각 영역에서 일어나는 활동은, 수치화되어 시시각각으로 체계화된 사물인터넷 망을 통해 집결되어 자동적으로 분석되며, 이에 따라 필요한 경제 및 공공적 계획이 수립되게 된다. 이제 다시 시장과 같은 ‘보이지 않는 손’의 작동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지며, 그 무정부적 성격 때문에 발생하는 경제공황을 다시 겪을 필요가 없게 된다. 이리하여 인간의 보다 직접적인 생산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게 되며, 이 때문에 시장은 자연스럽게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처럼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기술은 ‘대량실업’을 몰고 올 수 있는 폐단과 함께, 다른 한편 인류에게 새로운 미래를 펼칠 수 있는 가능성도 부여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폐단을 줄이고 후자의 가능성을 전면화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주요 기업들을 하나 둘씩 사회적 소유로 바꾸어 가고, 현대차의 경우에는 그것을 ‘공기업화’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현대차가 재벌 총수일가나 소수 대주주들의 점유물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복지를 위한 수단으로 바뀌게 만들 수 있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일자리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은 물론이다.
둘째, ‘공기업화’는 4차 산업혁명의 기술발전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서도 한국의 입장에선 꼭 필요한 방안이다. 지금 경영위기의 늪에 빠진 현대차는 당분간 영업이익률이 높아지기가 힘든 상황이다. 앞으로 세타2 엔진결함에 의한 추가 리콜비용이 발생할 경우, 이를 감당하는 데만 2017년 수준의 순이익을 2년간 몽땅 바쳐야 할 실정이다. 이 같은 제약에 의해 시간이 갈수록 현대차는 세계 경쟁사들과의 격차가 더욱 벌어지게 되어 있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이 같은 격차를 줄이기 위한 유일한 방안은, ‘공기업화’를 통해 사회 전체의 기금이라 할 수 있는 ‘국가재정’을 체계적으로 투여할 수 있는 길을 합법적으로 마련하는 것이다.
중국이 강점을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은 기업 차원의 연구개발과 국가적 차원의 연구개발이 긴밀한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면서, 낙후된 기술력을 단시간 내에 높이는 데 성공하였다. 실례로 이동통신 분야를 살펴보자면, 필자가 중국 유학을 막 시작하던 무렵인 2000년대 초만 하더라도 중국은 핀란드의 노키아가 주도하던 제2세대 이동통신기술에 있어 매우 후진국이었다.
그러나 제3세대 이동통신기술인 TD-SCDMA를 자체 개발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이 기술의 개발을 위해 정부의 지도하에 국유기업 및 관련 기업들이 대거 참여하였으며, 공공연구기관과 대학 연구역량 등이 함께 공동협력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마침내 독자적인 표준개발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제3세대 이동통신에 이르러서는 중국은 그간의 열세를 단번에 만회하면서 미국과 한국을 바짝 추격하였다. 지금 제4세대 이동통신은 세계 선두주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며, 내년부터 상용화될 것으로 전망되는 제5세대 이동통신의 경우 현재 ‘화웨이’ 열풍이 보여주듯이 앞으로 중국이 주도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오늘날의 과학기술 발전은 이처럼 전 사회적 역량이 총동원되는 진정한 ‘혁신국가’ 체계의 구축을 요구하고 있다. 그동안 폐쇄적 재벌구조 하에서 한국은 기업들이 각개약진하고, 역대 정권은 ‘구상’과 정책만 발표해왔지 실제 추진은 미약한 채 정권교체 때마다 새로운 계획이 발표되는 악순환을 거듭해왔다. 지금 위기에 처한 현대차를 공기업화 함으로써 그 경쟁력을 되살리고, 더불어 명실상부한 혁신국가 체계 구축을 위한 계기로 삼을 수 있다.
(3) 이상을 종합하면, 향후 현대차 경영위기에 맞선 투쟁은 ‘재벌해체’와 함께 ‘공기업화’를 동시에 요구하는 투쟁이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생산 사회화와 극소수 총수일가의 점유로부터 비롯된 현대차의 위기를 가장 철저하게 해결하는 방법이며, 또 제4차 산업혁명에도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지금은 소위 ‘주주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단순히 현대차 재벌을 해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정몽구-정의선 총수일가의 점유를 다시 소수 대주주의 점유로 바꾸는 것에 불과하며,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수가 없다.
여기서 조금 더 일반화로 나아가자면, 필자의 생각으로는 지금 시기 ‘구조조정’에 맞설 수 있는 한국 사회의 유일한 방안은 앞으로도 ‘공기업화’ 일수밖에 없다고 본다. 공유제적 소유는 물질 생산이 전체 사회성원을 위한 복지향상에 복무하도록 할뿐만 아니라, 지금 당장은 또한 ‘시장과 결합’하고 또 그것을 극복해갈 수 있게 하는 가장 ‘유연한’ 소유형식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인공지능시대의 본격적 개막의 문턱에 서있다. 그 때문에 지금 전개되는 치열한 국제경쟁에 대비하는 것 역시도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중대 과제이다.
증기력을 핵심으로 하는 제1차 산업혁명이 18세기 중후반에 영국에서 시작된 후, 전 세계적으로 파급되는 데는 거의 10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전기력으로 상징되는 제2차 산업혁명은 19세기 후반부터 시작해서 근 50년의 세월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전자와 통신기술의 제3차 산업혁명도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근 30년의 세월동안 지속되고 있다. 이 같은 역사적 전례에 비추어 볼 때, 인공지능으로 상징되는 제4차 산업혁명은 비록 그 진행속도에 있어 앞서의 것들 보다는 더 빠를 것이지만, 그러나 그 본격화에는 앞으로도 일정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인공지능은 앞으로 사물인식, 행동, 계획 등의 순으로 그 발전단계를 높여갈 것이며, 이에 수반하는 3D인쇄와 같은 제조기술 역시도 다종 재료사용, 생명복사와 같이 단계적인 발전을 이룰 것이다.
이 때문에 제4차 산업혁명 관련한 기술이 경제와 사회생활의 각 영역을 점령해 가는 과정은 치열한 지구적 경쟁 속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며, 이는 교육제도 등 고급인력의 배양을 위한 인적 자원에 대한 대규모 투자와, 인공지능과 자동화가 몰고 올 대량의 실업사태에 대처할 수 있는 사회보장제도의 완비 두 가지가 방향이 될 것이다. 앞으로 이 두 방면에서 방안을 갖지 못한 국가들은 과거보다도 훨씬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현재 후자와 관련해 ‘기본생활수당’ 제도의 도입이 일부에서 거론되고 있다. 연구기관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경우 그 소요예산은 최소한 연간 480조원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렇듯 무엇보다도 문제는 재원 마련인바, 현재 미국과 유럽 및 일본 등 선진국들이 겪는 재정적자 문제를 볼 때 어떠한 자본주의 국가도 앞으로 더욱 소요될 복지재정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할 수 없다. 그것은 공기업을 바탕으로 한 국가만이 해결할 수 있다.
이 경우 재벌기업의 공기업화의 기초 위에서 수립되게 될 ‘공유제 기업이 주도하는 시장경제’는 이 같은 상품경제가 지양(止揚)되는 과도기적 과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끌 수 있는 제도가 될 것이다. 과학기술과 생산력이 급속한 발전을 이루는 시대에는 한 사회가 얼마만큼 유연성을 갖는지가 최대의 관건이 된다. 그런데 이 같은 유연성은 다름 아닌 ‘이윤 동기’와 ‘복지 동기’를 적절히 조화시킬 수 있는 ‘사회개혁‘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회개혁’은 소유관계 및 사회의 상부구조를 생산력발전의 객관적 요구에 맞춰 적시에 변화시키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러할 때 주요 기업에 대한 전 사회적인 공유제를 기초로 할 경우, 사적기업 중심의 사회와 비교할 때 비교할 수 없는 유연성을 지닌다. 이 같은 사회적 소유의 유연성은 협소한 이윤추구만이 목적이 아니라, 사회 성원의 물질과 정신적 만족을 자신의 생산목적으로 삼는 사회의 기본 성격과도 관련된다. 이 목적을 위해 사회생산의 ‘이윤 동기’와 ‘복지 동기’를 적절히 조합해 낼 수 있으며, 또 공유제와 사적 소유 내지는 공기업과 민간기업의 비율 등을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도 있다. 이점은 지구화와 과학기술혁명으로 상징되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지구화와 과학기술혁명으로 인해 생산력발전 속도가 유례없이 가속화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 같은 생산력발전과 현존하는 생산관계 및 사회제도와의 충돌이 수시로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공기업화를 위한 구체적 과정에 관해 논해보자. 현대차의 공기업화 계기는 필자가 앞서 예상하는 위기의 전개과정에 따르면 자연스럽고 필연적으로 찾아오게 된다. 현대차의 파산 위기에 대해 국가는 수수방관만 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공적자금’의 투여를 통한 회생방안을 마련할 것이다. 최근 문재인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나마 인지하면서 이미 자동차산업 지원책을 하나둘씩 내놓고 있다. 이러한 지원은 현대차 경영위기가 구체화 될수록 점차로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재벌구조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문제의 원인을 전혀 도려낼 수 없으며, ‘밑 빠진 둑에 물 붓기’ 식으로 민중의 혈세를 낭비하기 십상이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현대차 경영진은 2018년 영업실적이 예년에 비해 대폭 악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서도 주가부양에 열을 올리고 있다. 현대차는 지난 11월30일 보통주 213만6681주와 우선주 63만2707주 등 총 276만9388주를 12월3일부터 내년 2월 말까지 장내매수 방법으로 매입하겠다고 공시했다. 이러한 자사주 취득액 규모만 2500억 원에 달하는데, 금년 들어 현대차가 자사주 취득에 쓴 돈만 해도 1조5400억 원에 이른다. 이는 1-3분기 연결 기준 누적 순이익(1조8483억 원)의 80%를 넘어서는 수준이고, 3분기 연결 기준 현금성자산(9조3364억원)의 약 16%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디지털타임스, 2018년 12월 2일자) 아까운 실탄이 엉뚱한 방향으로 소모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차가 독자생존이 불가능함이 판명되어 정부지원이 본격화 될 때가 노동자들로서는 ‘위기이자 기회’이다. 우리는 IMF 위기를 당한 후 그 극복과정에서 경험한 쓰라린 기억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통분담을 호소해 놓고 나중에는 그 성과물들을 모두 재벌들이 챙겨가지 않았나? 이후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사회의 양극화와 빈곤화가 진행되었으며 가계부채는 늘어나는 반면, 재벌의 사내유보금은 마치 그에 정비례하듯 크게 증가하였다. 왜 아무런 책임이 없는 노동자들이 이런 경영위기에 대해 가장 많은 고통과 책임을 짊어져야만 하는가? 따라서 이번에는 반드시 ‘공기업화’를 요구하여야 하며, 현대차의 경영위기에 대해 사회가 책임을 떠맡는 대신 그 성과 역시도 전체 사회로 귀속시키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노동자들은 ‘노동자-시민-정부 대표회의’ 구성을 요구해야 한다. 만약 현 관료와 정치기구 하에서 공기업화만을 요구할 경우, 지금 포스코나 KT처럼 자칫 주인 없는 무주공산이 되어 갖가지 비리의 온상이 되기 쉽다. 예컨대, 박근혜와 이명박 정부 때의 낙하산 인사가 그것인데 (문재인 정부 하에서도 그러하다!), 이 경우 기껏 애써 경영 정상화를 이룬 후 나중에 가서 공기업의 방만한 경영을 이유로 다시 ‘사기업화’를 추진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선, ‘노동자-시민-정부 대표회의’를 설치하여 이들로 하여금 전문 경영인 선임을 비롯한 관리감독을 맡도록 하여야 하며, 이후 현대차를 포함한 다른 ‘구조조정’의 선례로 삼도록 하여야 한다.
현대차에 대한 공기업화를 요구하는 시기 역시 중요하다. 이 같은 ‘공기업화’ 요구는 위기가 전면화 된 뒤가 아니라 가능한 빠를수록 좋다. 지금부터라도 당장 요구하고 나서야 한다. 왜냐하면 하루가 다르게 진행되는 제4차 산업혁명과 세계 자동차업계의 기술발전 추세에 비추어 볼 때, 조금이라도 늦을수록 이후 만회가 그 만큼 힘들기 때문이다. 현재도 ‘연기금’을 동원하고, 몇 가지 조처를 보완한다면 공기업화를 어렵지 않게 진행할 수 있다.(필자 레디앙 연재 글, [비정규직 투쟁의 방향 정립⑧-1] “재벌의 본질적 성격과 개혁 방안” 참조)
끝으로, 현대차 경영위기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자들이 ‘공기업화’를 요구하는 것은 너무 과도하지 않을까하는 우려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때문에 자칫 자본과 정권, 그리고 사회여론의 뭇매를 자초할 것에 대한 걱정이 앞서는데,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오히려 이 같은 당당한 요구로 맞설 때만이 앞으로의 싸움에서 수세적 입장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공세를 취할 수 있다.
첫째, 노동자계급은 단순한 반대세력이 아니라, 자신을 반드시 ‘대안세력’으로 부각시켜야만 한다. 그를 위해 이번 위기를 계기로 그동안 한국 사회의 낡은 병폐인 ‘재벌경영’과, 더 나아가 자본주의 한계를 뛰어 넘는 ‘총체적’ 대안을 전 사회적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가 공기업화를 비켜 가고 나면 어떻게 이런 큰 그림을 제시할 수 있을까? 이렇듯 가능성 있는 더 밝은 미래에 대한 제시는 투쟁에 나서는 노동자들에게 싸움의 목표와 의의를 보다 분명하게 인식케 하며, 새로운 동기 부여를 하게 한다. 그간 보아왔듯이 자본의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에 있어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싸움이 성공한 사례를 찾기가 힘들다.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 ‘구조조정 반대’ 만 외치는 것은, 비록 일부 사회적 동정은 불러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것은 또한 자본의 ‘천부적 권리’에 도전하는 것이기에 대단히 무력할 수밖에 없다. ‘공기업화’와 같이 자본주의를 뛰어 넘는 대안을 제시할 때만 투쟁주체 스스로가 당당해 질 수 있으며, 나아가 전체 노동자계급을 단결시키고 한국사회에 널리 흩어진 광범위한 ‘반재벌’ ‘반자본’ 세력을 결집시켜 낼 수 있다.
둘째, ‘공기업화’ 요구를 통해서 진정으로 재벌과 정권에 위협을 가하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양보와 타협을 모색하게끔 만들 수 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명확한 대안과 탄탄한 논리로 무장할수록, 내부의 대오는 더욱 굳건해지며 상대가 만만히 볼 수 없게 만든다. 자칫 잘못 건드리면 노동자들의 요구를 공론화하고 확산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이는 적들에게는 더욱 치명적이다. 이러한 이유에서도 전체 진보진영과 노동운동은 현대차 경영위기와 공기업화 요구를 빨리 공론화하여 입장을 통일시키는 것이 유리하다.
셋째, 노동자들은 이 싸움에서 일시적인 패배를 감내해야 할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싸움은 결코 단기간의 일회적 싸움으로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점을 감안한다면 노동자들이 이번 싸움에서 ‘공기업화’ 목표를 명확히 제시하는 것은 큰 의의를 갖는다. 이는 향후 다른 구조조정투쟁의 기본 방향을 제기하는 것이며, 현대차 노조의 재기를 위한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그것은 더 나아가 지금 시기 절실한 노동계급의 ’새로운 정치세력화‘의 움직임을 촉발시키게 될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창당이 1997년과 1998년 노동법개악 저지와 구조조정 반대투쟁의 일시적 좌절 속에 가능했던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향후의 구조조정 투쟁과정에서 강제해고, 무급휴가를 당한 노동자들의 전원 복직과 ‘공기업화’ 요구를 내걸고 끈질긴 싸움을 계속한다면, 또 그것을 새로운 정치세력화 과제와 결합시켜 낼 수 있다면. 우리는 과거 민주노동당 수준을 훨씬 뛰어 넘는 새로운 노동자계급정당을 만들어 갈 수 있으며, 앞으로 한국의 정치 판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낼 수 있다.
이렇게 싸우는 것이 무기력하게 구조조정 반대만을 외치다가 끝나고 마는 싸움보다는 훨씬 값지고, 결국 승리를 쟁취하는 방식이 아니겠는가?
앞으로 현대차 경영위기의 진전 상황에 따라 노동자들의 투쟁 역시 변화될 수밖에 없다. 현대차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는 그 성격으로 볼 때 존폐 위기에 몰릴 수 있을 만큼 심각한 것이다. 따라서 ‘독자생존’을 기준으로 향후 그 진행과정을 다음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현 재벌경영체제 하에서 독자생존을 모색하는 단계. 현재의 총수경영을 그대로 둔 채 ‘경영쇄신’ 등의 자구책을 통한 위기탈피 노력을 지속하는 시기이다. 정부는 이 때 현대차와 한국 자동차산업 전반의 위기 조짐을 감지하고 부분적인 지원에 착수한다. 현장은 경영위기와 관련한 자본 측의 한층 강화된 선전에 의해 심리적으로 얼마간 긴장되고 위축된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와 함께 자본은 현장규율의 강화, 노동강도 강화를 점차 노골화할 것이며, 현장의 주도권 탈취를 위한 노조와의 경쟁이 격화된다. 그러나 아직 대규모 구조조정은 소문만 떠돌 뿐 정식 거론되지는 않는 상태이다. 이 단계에선 노동자들도 경영위기의 진단, 즉 위기냐 아니냐, 얼마만큼 심각한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등을 놓고 내부 논쟁과 함께 사측과의 여론전을 전개한다. 노동진영 전체에서도 점차 현대차 경영위기가 쟁점으로 부각되며, 그에 대한 대안으로써 현대차노조보다 먼저 ‘공기업화’ 요구가 제출되어 토론되지만, 아직은 선전적 차원에 머무른다.
(2) 정부의 개입 하에 독자생존을 모색하는 단계. 대규모 리콜사태 발생과 그에 따른 거액의 비용 손실, 또 세계 자동차시장 위축의 지속과 현대차의 판매대수, 매출액, 영업이익률 감소가 지속되어 마침내 적자 전환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간 현대차 수뇌부의 ‘경영쇄신’ 노력이 실효성을 거둘 수 없음이 판명됨에 따라, 현대차 ‘독자생존’ 여부가 대내외 적으로 공식 쟁점화 된다. 이 경우 자본 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제연구소, 증권계, 보수언론 등의 ‘과감한 구조조정’에 대한 여론 압박이 노골화된다. 다른 한편 구제금융 등을 통해 정부가 본격적 지원에 착수한다. 부분적으로 총수경영 책임을 물어 이들의 ‘사재일부’ 반납, 심지어는 경영권 포기와 전문경영인 체제로의 전환까지 거론될 수 있다. 물론 이때 가장 큰 희생에 대한 요구는 노동자들에게 돌려질 것이다. 예컨대 그동안 고임금과 고비용, 강성 귀족노조 때문에 위기가 발생했다는 식으로 몰아갈 것이다. 여기서 강제적인 ‘대규모 구조조정’ 계획이 발표되고, 이에 맞선 노동자들의 결사항전으로 인해 양 진영의 충돌이 본격화한다.
이에 따라 다음 두 가지 가능성이 다시 제기될 수 있다.
첫 번째는 노동자들이 ‘재벌해체’와 ‘공기업화’ 그리고 ‘노동자-시민-정부 대표회의’ 소집 요구를 내걸고 정면으로 맞서서 완강하게 투쟁하며, 사회적으로도 우호적인 사회여론이 형성됨으로써 정부가 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경우이다. 이때는 현대차의 독자생존이 가능하고 한국 자동차산업의 미래에는 새로운 장이 펼쳐질 수 있다. 지난 호에서 언급했듯이, ‘공기업화’를 통해 국가자금을 체계적으로 R&D에 투여할 수 있는 합법적 방안이 마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중국처럼 기업 차원의 연구개발과 국가 차원의 연구개발이 긴밀한 유기적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뒤처진 기술력을 차츰 만회해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사회적으로는 대량해고와 비정규직의 양산을 방지함으로써 국내 실업문제의 더 이상의 악화와 시장 축소를 방지할 수 있고, 정부는 인적자원에 대한 투자를 늘려 차츰 경제성장의 기반을 바꾸어 갈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노동자와 시민 그리고 정부가 하나가 되어 공동의 목표를 위한 노력을 경주할 수 있게 되며, 경제와 사회 전반의 체력을 튼튼히 함으로써 국제 선두그룹을 추적할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하게 된다.
다른 한 가지 가능성은, 노동자들의 ‘공기업화’ 요구에 대해 자본과 정부가 힘으로 짓밟고 강제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경우이다. 사실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관례를 보면 이 같은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그러나 이 경우도 노동자들이 당당하게 자신들의 ‘공기업화’ 요구를 내걸고 정면으로 맞선다면, 과거처럼 그 대오가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전히 마지막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차와 기아차를 포함한 전체 36만 명에 달하는 한국 자동차산업 노동자들의 밥줄이 달린 만큼, 그 저항의 규모도 엄청날 것이다. 때문에 자본과 정권으로써는 노동자들이 완강하게 저항할 경우 일회적인 공격만으로는 자신들의 구조조정 요구를 다 관철시킬 수가 없다. 노동자들의 저항이 거셀수록 자본의 구조조정 역시 최소화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싸움은 장기화 하게 된다. 이후 노동자들이 계속해서 강제해고와 무급휴가에 대한 철회와 노동자들의 전원 복직을 요구하고 끈질긴 싸움을 계속해 나간다면, 이 싸움은 차츰 새로운 질로 변화해 가게 된다. 즉 정치세력화를 위한 운동과 결합되면서 한국 노동운동사에 있어 완전히 새로운 국면이 펼쳐질 것이다.
(3) 독자생존의 포기와 해외매각으로 나아가는 단계. 만약 위의 두 번째 단계에서 노동자들이 애초부터 자본과 정권의 여론을 앞세운 대대적인 공세에 위축되어 소극적인 ‘구조조정 반대’만을 외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사회의 동정적 여론만 기대한 채 적당히 저항하다가 결국 지난 1998년 때처럼 굴복하고 만다. 이 경우 현대차와 한국 자동차산업의 독자생존은 최종적으로 물 건너갔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쇠락을 거듭하다가 해외매각의 길로 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현대차 경영위기를 몰고 온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재벌경영체제가 이 경우 철저히 해소되기 힘들며, 또한 제4차 산업혁명이 몰고 올 고용위기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전혀 대책을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기술혁명을 추진할 국내 인재의 양성과 시장기반의 확충도 모두 포기될 수밖에 없으며, 대신 대량 해고와 비정규직화로 인해 사회의 양극화는 한층 심해지고 계급계층 간의 대립은 더욱 첨예해진다. 이 같은 상황에서 비록 정부가 일정기간 거액의 돈을 쏟아 부으면서 회생을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한들, 그것은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 될 수밖에 없다. 곧 바닥이 드러나게 될 것이며, 이미 현저하게 벌어진 세계 선두주자와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되어 독자생존을 포기하고 해외매각을 추진할 수밖에 없게 된다.
지금 ‘광주형 일자리’ 문제가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현실 진행을 고려하면, ‘광주형 일자리’는 위에서 설정한 제1단계 내에서 양 진영이 맞붙는 ‘서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후 현대차 경영위기의 진척에 따라 그것은 점차 성격을 달리 해 갈 것이다. 이에 관해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현재 ‘광주형 일자리’를 추진하는 동력은 현대차보다는 문재인 정부로부터 나오는 것 같다. 현대차 경영진은 지금 자신의 위기가 ‘고임금’ 문제나 값싼 자동차의 양산과 같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자동차시장 성장세의 둔화, 트렌드 전략의 실패, 새로운 미래차 기술 개발에 있어서의 전략상 오류 등에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기에 아직까지 정부의 이 같은 계획에는 소극적이다. 또한 지금 괜히 노조를 자극하여 파업을 일으킴으로써 생산 차질을 야기하는 등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 시기는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 같다.
이에 비해 인기 유지를 위해 ‘일자리 창출’이 급한 문재인 정부로서는 현대차보다 더 조급하다. 지금처럼 북핵문제나 남북교류 하나만 가지고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다. 조금씩 그 약발이 다해가고 있는 상태이고, 한국정부가 북미관계의 종속변수이기에 그 진전 역시 순조롭지 않다. 날로 경제가 악화되고 그에 비례하여 지지도도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보다 ‘일자리 창출’이 제일의 정책과제가 되고 있다. 이는 내후년 총선을 승리로 장식하고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기 위해서도 지금부터 꼭 이루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차가 문정부의 추진에 마지못해(?) 응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a) 무엇보다 ‘후계승계’라는 아킬레스건이 있다. 그것을 빨리 마무리 짓는 것이 급선무인데, 이를 위해선 정부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지주회사제로의 전환을 위해서든, 공정거래위가 ‘순환출자’ 고리 끊기의 마감 시한을 설정한 것과 관계되든, 어떻든 지금으로서는 서슬 퍼런 적폐청산의 칼을 아직 휘두르고 있는 현 정부와 척을 두어선 이로울 것이 없다. (b) 정부가 나서서 총대를 메고 노사관계를 풀어준다고 하니, 한번 ‘기대해 볼’ 만하다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잘만 하면 강성 현대차노조와 정규직들을 약화시킬 수 있고, 자동차생산 사업장에 있어 비정규직을 더욱 확대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광주형 일자리’는 형식상으로는 정부가 대주주인 독립법인을 설립하여 추진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중간 자회사’를 두는 것을 통해 비정규직을 양성하는 것과 본질상 다를 바가 없다. 당연히 그것이 활성화 되면 정규직의 상대적 ‘고임금’을 하향평준화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더군다나 소요될 자본의 상당부분과, 공장설립 부지, 노동자복지 등을 모두 광주시(사실상 중앙정부의 지원)가 책임져 주겠다고 하니 현대차로서는 별반 부담될 것이 없다. 이에 더해 정부는 현재 경영위기를 겪고 있는 현대차와 자동차산업에 대해 ‘구제기금’ 성격의 자금지원을 ‘당근’으로 제시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광주형 일자리’ 추진에 있어 이 같은 초기의 능동과 피동의 관계는 앞으로 서로 뒤바뀌어 질 수 있다. 그 계기는 다름 아닌 현대차 경영위기의 단계적 진척이 될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원래 일정한 ‘선의’를 가지고 이 같은 정책을 추진했었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재벌체제’라는 한국적 현실을 무시한 정책은 애초부터 자신의 본뜻과는 달리 변질되면서 노동자들에게 있어 큰 재앙이 될 가능성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 그 같은 실례는 많이 있는데, 예컨대 IMF 외환위기 직후 대통령으로 당선된 김대중과, 이후 서민의 대통령이라는 노무현 등이 한 일이 그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자유주의 철학에 입각하여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고 그 보완책으로 사회보장제도를 구축한다고 하였지만, 현실에서는 전자만 이루어진 채 후자는 불철저하게 수행되었다. 결국 이 때문에 한국사회에는 비정규직이 넘쳐나는 재앙이 발생하였으며, 재벌들에게 이용당하고 그들만 좋은 일 시켜주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는 이들이 본질상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이해를 대변하는 세력으로서의 정치이념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번 ‘광주형 일자리’ 역시 그렇게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일단 이 같은 사업이 실현됨으로써 기존의 노조체계와 정규직을 무력화시키는 선례가 남겨지고 또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게 된다면, 이후 이 정권 하에서가 아니더라도 한국의 재벌들은 이 같은 ‘제도혁신’을 충분히 활용할 것이다.
실제 ‘광주형 일자리’에는 시간이 흐를수록 복잡한 색체들이 담겨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애초 이 사업이 제안될 때는 ‘4차 산업혁명’ 관련한 거시적 대응과 사회적 합의를 통한 더 많은 ‘일자리 창출’이란 취지가 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후 ‘4차 산업혁명’ 관련한 대응전략은 연구개발 투자를 통한 미래차의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기보다는, 엔진과 변속기 등이 불필요해지는 향후 미래차의 기술혁명에 조응하는 ‘유연하고 탄력적인 생산시스템과 고용시스템의 창출’로 그 중점이 바뀌어 졌다. 비록 그럴듯한 표현으로 포장을 하였지만, 그러나 이러한 애매한 규정이 한국적 상황에서 실행될 경우 어떠한 결과를 낳는지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다. 자유롭게 해고가 가능한 수많은 기간제와 임시직 등의 비정규직의 양산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앞으로 현대차 경영위기의 전개는 ‘광주형 일자리’의 변질을 위한 충분한 계기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점차 자신의 위기가 현실화할수록 현대차는, 그간의 암묵적인 ‘노사협약’을 깨고 자연퇴직 감소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정규직 감소비율의 속도를 높이려 할 것이며, 이를 위해 ‘광주형 일자리’를 이용하려 할 것이다. 물론 그 때가 되면 이미 군산형, 대구형, 구미형 등 수많은 아류들이 탄생되어 있을 수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현대차를 비롯한 한국 자동차산업 전체가, 이 같은 수많은 사실상의 비정규직들로 이루어진 ‘하청생산’ 체제로 변모되게 된다. 이미 미래차 경쟁에서 상당히 뒤쳐진 현대차로서는, 그 같은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는 방식을 통해 ‘일정 기간’ 이나마 독자생존의 숨결을 연장할 수도 있다. 결국 현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광주형 일자리의 귀결점은 한국 완성차 부문의 ‘독자생존’의 포기이다. 대다수 한국 자동차산업의 노동자를 비정규직화 한 토대 위에서 초국적 자본(국제 자동차메이저)의 하청기업화 내지는, 기껏해야 종속 파트너로의 전락이 그 종착역이라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이에 맞서는 길은 오직 ‘투쟁’ 밖에는 없다. 지금 ‘광주형 일자리’를 저지하는 투쟁을 통해 분명한 전선을 만들어 놓지 않고, 어물쩍 하니 ‘사회적 합의’니 뭐니 하며 끌려 다니다 보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 만큼 현대차를 비롯한 한국의 자동차산업 전반은 지금 벼랑 끝에 몰려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관계에 있어 아직 얼마간 진보적인 역할이 남아 있긴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노동자가 자신의 절실한 ‘계급이익’을 양보하는 명분이 될 수는 없다. 또한 이 같은 진보적 역할 역시 문재인 정부가 지금처럼 여전히 ‘한미동맹’의 신화 속에 갇혀 있는 한 그 한계는 명확하다. 현재의 북핵문제를 진척시키는 방법은 간단하다. ‘한미동맹’의 신화를 깨면 된다. 미군 철수를 약속한다면 북한은 반드시 핵을 포기할 것이다. 한국 정부는 그렇게 해서 미국을 압박해가야만 한다. 이렇게 되면 미국 역시 북핵 협상에 성실히 임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북핵 문제를 걸고넘어지는 이유는 ‘미군을 주둔시키기 위한 명분’을 얻기 위한 것이며, 또 그래야만 한미일 삼각동맹을 통해 전략적 경쟁상대인 중국을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 같은 ‘목적’을 지닌 미군 주둔에 대해 직접 위협을 가한다면, 그 ‘핑계거리’에 불과한 북핵에 대해서도 지금보다는 진지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지금 이렇게 나아가지 못하는 문재인 정부에 대해 노동자들이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다.
결국 노동자들이 반재벌 투쟁을 견결히 수행하고 미군 철수 요구를 들고 나올 경우, 지금 시들어가는 문정부의 ‘개혁성향’을 강화시켜줄 수 있다. 재벌과 친미 보수세력의 공세에 둘러 싸여 점점 동요하면서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문정부내 개혁파들은, 이로부터 새로운 강력한 지원세력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다가오는 현대차투쟁에 대해 한국의 다른 노동자들도 관심을 갖고 함께 동참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국 노동계급 전체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 모두의 투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동차산업은 반도체와 함께 한국경제를 떠받치는 양대 지주이며 그 파급효과가 대단하다. 또 여기서 한 번 결정된 관행은 전 산업에 전파되는 관례가 있다. 1998년 현대차 구조조정 투쟁이 그러하였는데, 그 투쟁은 전체 노사관계에 있어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그 이후 사내하청과 기간제를 통한 비정규직이 급속히 양산되었으며 전 산업과 업종으로 확대되었다.
가장 강력한 한국 노동계급의 마지막 정예부대가 존재한다는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현대차와 기아차 공장에는 각각 5만과 3만의 잘 조직된 조합원 대중과, 현장정파및 의식 있는 수많은 활동가들이 민주노조를 옹호하고 있다. 이들 한국 노동계급의 최정예부대가 무너지게 되면 우리 운동의 미래는 지금 보다 훨씬 암울해질 것이다. 비정규직들의 소규모 게릴라식 투쟁만이 존재하게 되는데, 그 같은 투쟁의 어려움은 지금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5년차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 4년차 구미 아사히글라스투쟁, 추위와 더위 속에 건강을 해칠 수밖에 없는 고공투쟁을 수행중인 전주택시와 파인텍 노동자들의 투쟁이 그것이다. 이러한 불리한 상황에 내몰리기 전에 자동차 정규직부대의 최후의 일전을 한국 전체 노동자들이 함께 ‘사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차 경영위기와 관련한 싸움에 있어 승패의 관건은 다음 두 가지이다. 하나는 현대차-기아차 자체 8만여 명의 내부 역량을 어떻게 충분하게 동원할 수 있는가이다. 지난 2009년 쌍용차 900여명 용사들의 ‘옥쇄파업’ 투쟁의 위력을 우리가 실감하였듯이, 결사항전으로 맞서는 대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은 대단한 위력을 지닌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그 규모에 있어 당시 쌍용차투쟁과는 비교가 되지 안 된다.
다른 하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연대의 실현 여부라 할 수 있다. 이점에서 볼 때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 역시도 비정규직 투쟁을 중시하고 지금부터라도 의식 전환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아직도 일부 정규직 활동가는 비정규직의 개별 분산적인 소규모 투쟁의 겉모습만 보면서, ‘전체로서의 비정규직 투쟁’이 갖는 중요성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대공장 정규직들은 자신들이 한번 일어나면 모든 문제가 ‘일거’에 해결될 거라는 생각이 강하다. 그러기에 굳이 이처럼 영향력이 미미한 소규모 투쟁에 대해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비정규직은 개별적으로는 소규모이지만 전체로서는 거대한 집단이다. 더군다나 자동차업종 내 수많은 부품회사 노동자들 상당수가 이 같은 비정규직 계열에 속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 사회의 비정규직들은 재벌체제의 모순의 심화와 4차 산업혁명의 전개에 따라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집단이다. 정규직 자신과 그 자식들 역시도 이후 대부분이 이 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비정규직들이 함께 투쟁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현대차 싸움의 규모와 역량은 훨씬 왜소해 질 수밖에 없다.
숫자적으로 그러할 뿐만 아니라, 사회여론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이들 비정규직들이 대공장 정규직투쟁에 ‘귀족노조’ 운운하면서 냉소를 보내는 한, 그 같은 분위기에서는 아무리 위력 있는 ‘대공장 총파업’도 제대로 조직될 리가 만무하다. 지금도 인터넷 사이트를 들여다보면 대기업노조와 관련된 기사 하단에는 반드시 수많은 냉소를 담는 댓글들이 눈에 뜨인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되돌려놓지 못하고서는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가 없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연대가 이루어진다면 이 같은 ‘귀족노조’ 운운하는 여론공세는 저절로 분쇄된다.
정규직은 지금부터라도 말뿐만이 아닌 실제 ‘행동’으로 비정규직과의 연대를 솔선수범하여야 한다. 비근한 예로, 울산과학대 농성장의 천막 지키는 문제가 있다. 학교 측의 야반 기습철거를 막기 위해 밤이 되면 최소한 2인 이상이 안에서 잠을 자야만 한다. 지금 평균연령 65세 이상의 노인들이 돌아가며 지키고 있는데, 인원이 부족하여 김덕상 위원장은 4년 채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있다. 그래도 부족해서 지역의 연대동지들이 개별적으로 동참하며 함께 지키고는 있지만 조직적 지원이 절실한 실정이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현장실천대’를 조직하여 몇 사람의 지원자를 순번을 정해서 보내준다면 이 같은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지금처럼 일상 시기에 기울이는 이러한 작은 노력은 이후 큰 싸움이 벌어졌을 때 그 몇 십 배의 보답으로 돌아올 것이다. 울산과학대(그 배후에는 현대중공업재벌이 있다!)는 정규직과의 이 같은 조직적 연대 움직임만 보더라도 지금 보다는 훨씬 성의 있는 모습으로 협상테이블에 나올 것이다. 정권이 바뀌고, 울산의 시장과 동구청장이 모두 여당인 더불어 민주당에 의해 장악되었지만, 정작 농성장 청소노동자들은 세상이 바뀐 것을 전혀 실감할 수 없을 만큼 사태 진전은 지지부진하다. 그것은 저들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연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약점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여전히 ‘시간 끌기’로 이쪽이 지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대공장 정규직들의 ‘조직적 동참’은 이 같은 상황을 빨리 종식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다. 그것은 저들의 기대가 허황된 것이며, 시간을 끌수록 전체 노동진영과 정규직 대군을 각성시키는 계기로 작용할 뿐임을 깨달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기왕에 말이 나온 김에 ‘현장실천대’에 대해 조금 더 언급하도록 하자. 그것은 단위사업장과 지역 두 차원에서 결성될 수 있다. 현 시기 노동운동의 최대 과제는 누가 뭐래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상호분리와 고립상태를 극복하고 통일적인 노동자계급 대오를 형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그 구체적인 실현 형태 또는 실천 형식으로서의 ‘현장실천대’ 사업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전략적 중요성을 들자면 이러하다.
지금 단사노조 중심의 한국 노동운동의 구조 속에서, 현장실천대는 현 민주노총 체계의 한계로 인한 비정규직과 정규직, 중소사업장과 대규모사업장 연대의 공백을 보완할 수 있는 유력한 형식이라고 본다. 그것은 1990년대 초 ‘전노협-지노협’ 체계에서 일찍이 간직했던 지역연대의 전통을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이기도 하다. 과거 단위노조와 활동가 단체들은 함께 전노협-지노협 체계로의 결합을 통해, 대공장과 중소공장, 투쟁력이 강한 사업장과 약한 사업장, 선진적 의식의 활동가와 일반 노조원의 상호침투를 이룰 수 있었으며, 당시 산별조직이 없는 조건에서 그 약점을 상당 정도 보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이 보존되어 발전하기보다, 지금의 민주노총 체계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일정 상실되고 약화된 감이 있다. 이후 개별 노조들은 사실상 단위사업장 차원으로 다시 갇히게 되었고, 그 위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라는 또 하나의 분열적 요소가 덧붙이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현재의 민주노총과 지역본부는 형식상으로는 산별과 업종 연합체인 상급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하부 사업장에 대해 특히 대공장 사업장에 대해 지도력이 취약하며, 동원력을 포함한 집행력이 크게 떨어지는 한계를 갖고 있다. 단사와 지역 차원에서 건설되는 현장실천대는, 이 경우 계급의식과 집행력 면에서 현 노조체계의 약점을 일정 보완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예컨대, 단위사업장 일반 노조원의 수준이나 그때그때의 정서에 제약받지 않고, 전체 계급이익과 노동운동의 요구에 따라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지원을 즉각 수행할 수 있다. 반대로 정규직 입장에서 본다면, 대공장 사업장 투쟁이 성공하기 위한 조건의 하나인 ‘우호적인 사회여론’의 조성을 위한 비정규직의 지지선언을 끌어 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현장실천대는 정규직 활동가와 비정규직 활동가로 함께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장실천대의 기동성 있고 선도적인 활동은 공식체계인 민주노총 조직이 움직일 수 있는 추진력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비유하자면 단위사업장 차원에서 전체 조합원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대의원과 상집 간부 등이 농성, 집회, 부분파업 등을 수행함으로써 차츰 전체 사업장의 동력을 이끌어 내는 것과 같다.
이 같은 현장실천대의 존재는 향후 정규직과 비정규직 연대의 실현, 한국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을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장실천대는 단사와 지역 차원에서 건설되는데, 이들은 제 정파의 공동사업으로, 혹은 지역 공동사업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각 사업장 정파들과 선진 활동가들의 움직임은 지금 시기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들은 이 같은 모든 대중의 행동을 낳게 하는 최선두에 서 있으며, 현장실천대를 제일 먼저 앞장서 구체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한국 노동운동의 일대 사활을 결정짓게 될 운명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이들이 기존의 느슨한 관행에서 벗어나 사태의 절박함을 하루 빨리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근 울산에서는 노동운동의 전반적 위기 상황과 지역 및 사업장 내의 문제점을 극복코자 ‘현장기획토론회’가 조직되었다. 그리하여 지난해 10월초부터 11월 하순까지 5차례에 걸친 토론이 진행되었는데, 주제는 비정규직 문제, 재벌 문제, 중국 문제, 그리고 평화와 통일 등 현 시기 노동운동과 관련된 핵심 쟁점 4가지가 선정되었다. 필자가 다른 동지들과 함께 참여하면서 느낀 점은, 지금 현장활동가들의 상태는 우리 운동의 ‘과도기적’ 모습을 정확히 보여준다는 점이다. 우선 그들의 동기가 다양하였는데, 무슨 얘기하는지 한 번 들어보자는 사람에서부터, 다른 사업장 동지들과 친교를 맺기 위해 온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본다면 현재 민주노조운동이 부딪치고 있는 한계를 돌파할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 즉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위기의식이 많이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 참여자들의 행동이 그 같은 문제의식과 완전히 일치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새로운 혁신에 대한 기대를 가졌던 반면에, 다른 한편에선 지금까지 해오던 관성에 눌려 이 같은 전망을 찾기 위한 시간과 노력에 있어 과감한 투자를 하지 못하는 한계도 보였다. 일반적으로는 참석자들이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하였는데, 필자가 보기엔 그것은 그동안 이 같은 토론과 학습 문화가 비교적 소홀히 취급되어 온 결과라고 보인다. 그러나 처음의 의욕을 간직하고 앞으로도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술적인 문제들을 극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학습토론의 성과를 기초로 점차 ‘실천소조’로의 발전적인 전환을 꾀하여야 한다. 일회적인 학습과 토론만으로 끝나고 마는 것은 의미가 그리 크지 않으며, 이제부터는 기존의 토론회가 가졌던 한계가 극복되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노동운동과 사회상황에 대한 새로운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탄생하는 이 같은 실천소조는, 향후 ‘비정규직철폐, 재벌개혁,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새로운 노동운동을 선도할 씨앗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현재 자주성, 민주성, 연대성, 변혁성과 같은 상실되어 가고 있는 건강한 민주노조 정신을 되살림으로써 현 노조체계를 더욱 강력히 호위할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의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이끌 선봉부대로서 현장 내 기반 구축이라는 사명을 짊어져야 한다. 이들 새로운 세력을 기초로 할 때만이 앞서 언급한 ‘현장실천대’ 사업도, 그리고 과거 민주노동당을 뛰어 넘는 진정한 정치세력화도 가능하다.
이제 우리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해고와 비정규직과 산업재해가 남무 하는 자본의 천국을 향한 길이요, 다른 하나는 이러한 자본의 천국을 거부하는 노동해방의 새 세상을 만드는 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