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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의 지혜와 예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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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드러난 현실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법인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안다는 것은
어지간한 지혜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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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기삼사 중 첫 번째 일화는 다음과 같다.
당나라 태종이 붉은빛,
자주빛, 흰빛의 세 가지
빛으로 그린
모란과 그 씨 석 되를
보내온 일이 있었다.
여왕은 그림의 꽃을 보고는
“이 꽃은 필경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씨를 뜰에
심도록 하였는데, 꽃이 피어 떨어질 때까지 과연
여왕의 말처럼 향기가 전혀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놀랍게 여겨 왕에게 아뢰었다.
“어떻게 모란꽃에 향기가 없을 것이란 것을 아셨습니까?”
왕이 대답하기를,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매
그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 임금이 나의 배우자 없음을
희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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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 나타난 지기는 초능력적인
예지라기보다는
선덕여왕의 세심한 관찰력과 뛰어난 분석적
판단력이다.
꽃에는 으레 벌과 나비가 따르기 마련인데
그 그림에는 벌과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았으니
향기가 없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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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일화 속에는 당태종과 선덕여왕의
수준 높은
지혜 대결이 펼쳐지고
있다.
당태종은 남편 없이 혼자 사는 여왕을 향기 없는
모란에 비유해 은근히 조롱하고, 당태종의 의도를
간파한 선덕여왕은 ‘향기로운 황제의 사찰’ 분황사를 설립하며
그의 공격에 한 수 높게 대응한다.
일찍이 남다른 지혜를 보여 준 선덕여왕은 왕이 된 지
5년째 되는
해에
개구리 울음을 듣고 적을 물리침으로써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한다.
경주 성진리 강가에 있던 영묘사라는 절의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3,4일 동안 울어댄 일이 있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이상히 여겨 왕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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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왕은 급히 각간이었던 알천, 필탄
등에게 명하여
정예병 2,000명을 뽑아서 속히 서쪽 교외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이 어딘지 찾아가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엄습하여 모두 죽이라고
하였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각 군사 1,000 명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가서 물었다.
부산(富山)이라는 산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고,
백제 군사 500 명이 와서 거기에 숨어 있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이고 또 뒤따라온 후속부대
1200 명도 모두 죽였다.
여러 신하들이 놀랍게 여겨 왕에게
아뢰었다.
“어떻게 개구리가 우는 것으로 변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 분황사 석탑 : 분황사도 선덕여왕 때 건립된 사찰이다. |
여근곡 안내판 |
왕이 대답하기를,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는 것은 병사의
형상이다.
옥문(玉門)이란 곧 여자의
음경(陰莖)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흰데 흰 빛은 서쪽을
뜻한다.
그러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또 남근(男根)이 여근(女根)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다.
백제의 군사가 신라의 여근곡에 숨어 있으므로 잡기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왕의 성스러움과 슬기로움에
탄복하였다.
선덕 여왕의 지혜로 신라는 백제군을 간단하게
무찔렀다.
신라로서는 크게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쉽게 적병을 무찌른
셈이다.
여근곡(女根谷)은 실제로 경주 근교 건천에 소재한 골짜기로
그 모양이 여성의 성기와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여근곡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선덕여왕은 여성의 성기를 지칭하는
옥문지(玉門池)의
‘옥문’과 여근곡(女根谷)의 ‘여근’을 연결시키고
‘성난 개구리’와 ‘백제군’을
연관시켰다.
여근곡 |
여기에 ‘여성=음=백색=서쪽’이라는 음양의
원리를 적용하여
적군의 위치를 정확히 지목해 낸다.
마지막으로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다.
”
라고 말한 부분은 이 일화의 압권이라 할 수
있다.
경주 황남대총 옆 황남리 고분 등에서 출토된 다양한 |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21세기에도 공적인 자리에서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1400년 전에 선덕여왕은
남자 신하들 앞에서 거침없이 풀이하고
있다.
여왕의 말을 들은 신하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오히려 신하들이 당황했을 법하다.
그러면서 선덕여왕의 지혜와 담대함에 경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경주 오봉산 여근곡(女根谷)~(100627) |
다음은 선덕여왕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던
삼사지기 중 마지막
일화다.
왕이 아무 병도 없는데 여러 신하들에게 일렀다.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
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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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하들이 그곳이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 남쪽이니라.”
그날이 되어 과연 왕이 붕(崩:왕이 죽음)하였고
여러 신하들은 왕을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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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하였다.
불경에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제야 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
[오봉산 여근곡]경주 오봉산(慶州 五峰山) |
자신의 죽음이 내일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새 구두를 맞출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라고
말한 소설가가
있다.
누구나 언젠가 죽는다는 것만큼 확실한 것도 없지만
그 언제가 언제인지만큼 불확실한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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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선덕여왕은
자신의 명(命)이 다할 때를 알고 세상을
떠났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묻힐 곳까지 알고
떠났다.
신하들은 평소부터 많은 지혜를 보여주긴 했지만,
자신의 죽을 날과 묻힐 곳까지 알고 떠나는
여왕이 놀랍기만 했을 것이다
경주 여근곡(女根谷) |
그러나 더 어리둥절한
것은
지상에 없는 장소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여왕은 알 듯 말 듯한 답을 남기고 떠났지만
32년 뒤 사천왕사의 건립으로 선덕여왕의
신비스러운
예견은 다시 한 번
적중한다.
신라를 부처님의 광명과 법음이 넘치는 불국토로
만들려 했던 선덕여왕의 깊은 바람이 도리천
무덤 속에 고이 담겨져 있다.
▲ 선덕여왕은 대규모 불사를 통해 신라사회의 통합을 이끌었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성군으로 인식되고 있다. 선덕여왕 때 첨성대, 황룡사, 분황사 등 대표적 불교유적들이 다수 만들어진다. 사진은 1916년 분황사 모전석탑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