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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요한복음 4장 25-27절
4:25 λέγει αὐτῷ ἡ γυνή οἶδα ὅτι Μεσσίας ἔρχεται ὁ λεγόμενος Χριστός ὅταν ἔλθῃ ἐκεῖνος ἀναγγελεῖ ἡμῖν ἅπαντα
4:26 λέγει αὐτῇ ὁ Ἰησοῦς ἐγώ εἰμι ὁ λαλῶν σοι
4:27 καὶ ἐπὶ τούτῳ ἦλθαν οἱ μαθηταὶ αὐτοῦ καὶ ἐθαύμαζον ὅτι μετὰ γυναικὸς ἐλάλει οὐδεὶς μέντοι εἶπεν τί ζητεῖς ἤ τί λαλεῖς μετ᾽ αὐτῆς
* 묵상할 내용:
"욕망의 다른 이름: 예수, 메시아, 그리스도" (1)
- 주님을 예수라 부르지 말라!
- 주님을 메시아라 하지 말라!
- 주님을 그리스도라 하지 말라!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예배와 관련해서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 정해진 예식에 따라 이루어지는 예배를 부정하시면서 지금 살고 있는 현장에서 당장 신의 명령을 받들면서 사는 예배를 실행하라(요 4:23-24)는 명령을 하신다. 그런데 이러한 명령에 대하여 여자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면 그가 알려줄 것이라고 대답한다.(요 4:25) 이것은 예배와 관련된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며 그러한 주님의 명령을 듣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응하는 여자에 대하여 주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그것은 너무나도 명확하다. 여자의 불복종에 대하여 주님은 분명하게 잘못을 지적하시며 다시 회개를 명령하셨을 것이다. 그것이 그 여자에 대한 주님의 돌봄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며 그것을 돌이키게 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따라서 그 여자의 잘못된 판단에 대해 그냥 넘어가실 이유가 없다. 혹 누군가 그런 상황에서 주님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지적하지 않은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며 방해했던 존재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존재에 소위 복음서라는 것을 기록했다고 여겨지는 제자와 제자 공동체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메시아가 무엇인가? 그리스도는 무엇인가? 어떤 존재이길래 사마리아 여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 그 여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그 존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메시아와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되고 있으며 현재 기독교인들과 종교인들 및 비종교인들이 갈망하는 것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인류 역사의 흐름과 직결되며 인간성 타락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반드시 구조와 문제점을 분석하고 방향을 새롭게 제시해야만 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주님은 이러한 문제를 당시에 분명히 지적하셨을 것이다.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을 것이다. 물론 제자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이해조차 못 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들 또한 이스라엘에 편승해서 신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잘못된 뿌듯함을 누리며 그로 인한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스라엘만의 주님이 아니며 신도 이스라엘만의 신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원하겠지만 주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시며 거부하셨다.
결국 이스라엘이 원하는 이스라엘만을 위한 메시아와 그리스도에 대한 상은 그것을 거부하는 주님을 십자가에서 처형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원하는 메시아와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욕심을 만족시켜줄 수 없었기 때문에 처형당하신 것이다. 따라서 메시아와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지금까지 주님께 붙여지며 사용된 것이라 그냥 계속 사용해도 된다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런 식의 반응은 주님의 뜻을 다시 처형하게 되고 신의 나라를 파괴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명칭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해 왔던 역사와 거리를 두고 매우 엄격하게 의미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 명칭을 계속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사람들을 사탄에게 바치는 꼴이 되는지 인식해야만 한다.
메시아는 어떤 존재를 말하는 것인가? 이 단어는 히브리어 동사 משׁח(mashaḥ)에서 왔다. 이 동사는 단순히 ‘기름을 바르다’라는 뜻과 함께 ‘일정한 지위에 오른 사람에게 의식을 거행하며 성유(聖油)를 발라주며 축성(祝聖)하다’를 의미한다. 수동태로 사용되면 ‘기름 부음을 받는다’를 뜻한다. 이 동사가 명사화된 것이 משיח(māšīaḥ)이며 신약시대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아람어화된 히브리어에서는 משיחא(m'šīḥā: 메시아로 음역)였다.
결국 메시아는 종교적으로 기름을 바르는 의식을 통해 성스럽게 되거나 왕위에 오르는 존재를 의미한다.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그리스도 Χριστός(Khristós)인데 이 단어 또한 ‘기름을 바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χρίω(chrío)에서 왔다. 결국 Χριστός는 ‘기름을 바른 자’, ‘기름 부어짐을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구약에서 ‘메시아’, 신약에서 ‘그리스도’라고 사용된 단어는 기름을 바르는 예식을 통해 대제사장, 왕, 예언자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지도자로 세워졌던 사람들을 의미하는 단어였던 것이다.
구약에서는 계속되는 이방 민족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와야 하는 구원자로서의 왕을 세우는 행위, 신의 계시를 전달한다며 때론 이방 민족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고 이스라엘을 신의 백성으로 확증하며 이스라엘 중심적인 사고를 고착시켰던 예언자를 세우는 행위, 종교와 정치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상황 가운데 종교적 측면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대제사장을 세우는 행위에서 기름을 바르는 예식을 사용했다.
이러한 예식은 일반적인 사람을 신이 인정하는 거룩한 존재인 것처럼 만드는 것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는 공식적 행위였다. 이러한 존재들은 민족의 이익과 평안과 구원을 위해 움직여야 하는 존재였다. 그들은 이스라엘 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이스라엘에 도움이 되는 행위를 함으로써 각각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하는 바람을 이루어줄 수 있는 존재여야만 했다.
때론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을 선포하는 선지자로 보이더라도 그러한 심판의 내용도 결국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며 신의 유일한 민족으로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이어진다. 이는 신의 백성으로 여겨지지 않는 다른 민족에 대하여 선포되는 심판과 저주와는 구조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야만 하는 심각한 내용이 있다. 기름을 바르는 행위를 통해서 어떤 대상물이 성스러워지는 것이 가능한가? 특히 인간이 그런 예식을 통해 성스러워질 수 있는 것인가? 성스러운 존재와 성스럽지 않은 존재가 나누어진다는 말인가? 특정한 존재만이 성스러워서 그 존재는 성스러움을 향해 더 이상 나아갈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어떤 예식을 통해 인간이 성스러움을 소유하며 그러한 성스러운 상태가 지속될 수 있다는 말인가?
신의 형상(imago Dei)과 신과의 유사성(similitudo Dei)을 가진 존재는 모두 성스러움을 존재에 담아 성스러운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야 하는 성스러움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특별히 기름을 바름으로써 그 대상만을 성스럽게 만드는 것은 특정 존재를 높이는 것과 직결된다. 또한 소위 신의 일을 하는 사람을 기름 바르는 예식을 통해 성스러워졌다고 여기는 특정인에게만 제한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신의 명령을 받아 신의 일을 해야 한다는 대원칙과 인간 삶의 목표를 파괴하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한 대상과 존재에게 기름을 바르며 성스러운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행위는 모든 인간이 신의 다스림에만 복종하며 신의 명령만 따라야 하는 신의 나라를 파괴하는 적대적인 행위일 뿐이다. 결국 그렇게 기름을 바르는 예식은 신을 대적하는 사탄의 예식인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종교에서 행하고 있는 예식이 포함된다. 특정 대상물과 사람이 일반적인 대상이나 사람과는 구별된 소위 성스러움을 가진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이게 만드는 예식은 진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렇듯 성스러운 상태와 지위가 계속 유지되는 것처럼 확증해주고 지속성을 부여하는 모든 예식은 인간들에게 안정감을 부여하며 그런 존재들에게 복종하게 만드는 사탄의 예식일 뿐이다. 기독교에서 행하는 세례, 침례, 입교, 안수(목사, 사제, 장로, 권사, 집사), 헌당, 헌물, 사죄 선언, 임종 예배, 천국 환송 예배, 추도예배 등의 모든 예식이 다 여기에 속한다.
대상을 성스럽게 만드는 예식을 행하면서 사람들을 그 대상에 복종하게 하려는 시도들은 종교라는 이름을 덮어쓰며 정치적인 지배구조를 공고히 하면서 인류 역사에서 계속되었다. 구약의 역사도 여기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대표적 족장인 야곱은 돌에 기름을 붓고 성스럽게 만든다. 그리고 그곳을 신의 집이라고 칭한다.
창세기 28:18-19 :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그런데 사실 그렇게 한다고 돌이 성스러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행동은 어떤 대상을 자신이 성스럽게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자기를 높이는 신성모독일 뿐이다. 온 우주가 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야곱은 알지 못했다. 온 우주도 신이 거하시기 모자란 공간임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66:1 :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러한 야곱의 행동과 평가에 대해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무지와 착각이 타락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라고 여겨지는 모세 또한 그의 조상 야곱과 마찬가지로 무지와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모든 행위를 마치 신의 명령인 것처럼 왜곡시키기까지 했다. 모세는 장막을 세우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성스럽게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날도 성스럽게 구별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장막과 제단과 기구들이 성스러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특정한 날이 성스러워지는 것도 아니다. 모든 날이 신 앞에서 신의 뜻을 행하는 성스러운 날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는 그것을 전혀 몰랐다. 모세의 신의 뜻에 대한 무지와 착각은 신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무지와 착각을 전염시키고 그것을 믿도록 타락시켰다.
민수기 7:1 :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끝내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또 그 모든 기구와 제단과 그 모든 기물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날에”
그 결과 이스라엘은 마치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처럼 특정 사람과 그 아들들에게 세습시키며 제사장 역할을 시키기 위해 기름을 붓고 마치 거룩한 사람인 것처럼 만들었다. 결국 그들은 신에 대해 제사하는 것처럼 하면서 자신의 소득을 늘려갔다.
출애굽기 28:41 : “너는 그것들로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 한 그의 아들들에게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여 그들이 제사장 직분을 내게 행하게 할지며”
출애굽기 40:15 : “그 아버지에게 기름을 부음 같이 그들에게도 부어서 그들이 내게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하라 그들이 기름 부음을 받았은즉 대대로 영영히 제사장이 되리라 하시매”
민수기 3:3 : “이는 아론의 아들들의 이름이며 그들은 기름 부음을 받고 거룩하게 구별되어 제사장 직분을 위임 받은 제사장들이라”
레위기 7:28-34 : “2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9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화목제물을 여호와께 드리려는 자는 그 화목제물 중에서 그의 예물을 여호와께 가져오되 30 여호와의 화제물은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가져올지니 곧 그 제물의 기름과 가슴을 가져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가슴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31 그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사를 것이며 가슴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릴 것이며 32 또 너희는 그 화목제물의 오른쪽 뒷다리를 제사장에게 주어 거제를 삼을지니 33 아론의 자손 중에서 화목제물의 피와 기름을 드리는 자는 그 오른쪽 뒷다리를 자기의 소득으로 삼을 것이니라 34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물 중에서 그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를 가져다가 제사장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주었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을 영원한 소득이니라”
레위기 10:12-15 : “12 모세가 아론과 그 남은 아들 엘르아살에게와 이다말에게 이르되 여호와께 드린 화제물 중 소제의 남은 것은 지극히 거룩하니 너희는 그것을 취하여 누룩을 넣지 말고 제단 곁에서 먹되 13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 네 소득과 네 아들들의 소득인즉 너희는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으라 내가 명령을 받았느니라 14 흔든 가슴과 들어올린 뒷다리는 너와 네 자녀가 너와 함께 정결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물 중에서 네 소득과 네 아들들의 소득으로 주신 것임이니라 15 그 들어올린 뒷다리와 흔든 가슴을 화제물의 기름과 함께 가져다가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대로 너와 네 자손의 영원한 소득이니라”
신명기 18:3-5 : “3 제사장이 백성에게서 받을 몫은 이러하니 곧 그 드리는 제물의 소나 양이나 그 앞다리와 두 볼과 위라 이것을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4 또 네가 처음 거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네가 처음 깎은 양털을 네가 그에게 줄 것이니 5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택하여 내시고 그와 그의 자손에게 항상 여호와의 이름으로 서서 섬기게 하셨음이니라”
이러한 이스라엘 제사장의 몫에 대한 보장은 다음과 같은 극악한 일까지 발생하게 만든다.
사무엘상 2:15-16 : “15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16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지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모든 사람은 주님의 명령처럼 각자 삶 속에서 신의 명령을 이루며 신을 섬겨야 한다. 그것은 어떤 특정인이 대신할 내용도 아니고 기름 부음을 받은 존재만이 할 일이 아니다. 기름 부음을 통해 어떤 특정 대상을 신성화시키는 것 자체가 주님의 명령을 소멸시키는 것임을 잊으면 안 된다. 어떤 다른 것이 신께 드려지는 제물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신을 위해 모든 삶의 시간을 드려야 하는 제물이어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약에서 메시아, 그리스도에게 덧입힌 내용은 당시 로마의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을 가져오는 존재였다. 그들은 신의 뜻을 따르며 신의 나라를 이루는 것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신의 나라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단지 그런 신의 나라를 억압하고 있는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의 입장에서는 로마의 지배에서 세금으로 강탈당하는 것과 헤롯 성전을 짓기 위해 계속되고 있는 노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메시아,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그러한 갈망은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어 절박한 것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요구에 대해 주님은 거리를 두시며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하신다.
마태복음 6:25, 33 :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결국 그러한 사람들의 갈망은 그것을 이루어주지 않으면서 오히려 반대로 가는 주님의 메시지와 행동으로 인해 실망하고 주님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듯 주님에 대한 잘못된 무지와 착각이 주님을 처형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 중심에 주님에 관한 이름이 있다. 그것이 바로 ‘예수’라는 이름이다.
예수라는 이름 또한 히브리어 יהושוע(Jehoshua, 여호수아)의 축약형인 יושוע(Jeshua, 예슈아)를 헬라어식으로(Ἰησοῦς: iēsūs) 옮긴 것이다. 여호수아(Jehoshua)는 ‘야웨는 구원이시다’ 또는 ‘야웨는 부요하심이시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야웨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יהוה(JHVH/YHWH: Jahveh)와 구원을 의미하는 הושע(hoshea)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이름이다.
결국 예수라는 이름도 ‘구원자’라는 의미인 것이다. 주님의 이름에는 온통 ‘구원’에 대한 개인과 민족의 바람이 걸러지지 않은 채 뒤엉켜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신의 뜻을 이루며 신의 통치에 복종하겠다는 것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개인의 고통에서 벗어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것이며 이스라엘 민족 중심의 세계 지배를 위한 것일 뿐이다.
주님 당시뿐만 아니라 소위 제자 공동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초기 기독교 이후 지금까지 이러한 상은 바뀌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이 좋아하며 늘 설교 본문에서 주로 사용되는 바울의 글에는 그러한 왜곡을 진리처럼 당연시하는 처참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로마서 3:24-25 :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로마서 4:5 :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이 내용들은 요한복음 1:29에서 세례자 요한이 주님을 향해 표현했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기초로 세워진 망상이다. 주님을 제물로 삼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돌이키지도 않는 악한 자를 의롭게 만들어 버리는, 신의 공의를 파괴하는 악이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는 바로 앞에서 설명한 메시아이며 그리스도이다. 바울 또한 이스라엘인들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목사들의 축도에 주로 사용되는 고린도후서 13:13의 내용은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고린도후서 13:13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내용이 무엇인가? 주님을 예수 그리스도로 만들어버려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욕망을 받아내는 대상으로 삼아버리는 것이다. 주님을 죽여 그 몸에서 흐르는 피를 믿는다는 이유로 주님이 명령하신 일을 하지 않아도 천국으로 직행하는 ‘구원’을 받게 된다는 극악무도하고 참담한 내용을 ‘은혜’(χάρις)라고 말한다. 그것을 허락하는 것이 신의 사랑인가? 아니다. 그것은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대표되는 바알(Baal)을 숭배하는 자들이 받기를 원하는 것일 뿐이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실은 주님을 바알 취급하고 있는 것이 바울을 비롯한 제자들이라는 사실은 뭐라고 표현해도 그 참담함을 다 표현할 수 없다.
주님은 분명하게 신의 명령에 복종하며 사는 존재, 주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며 그 길을 가는 존재 이외에는 살아있는 존재가 아님을 명시하셨다.
마태복음 7:21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요한복음 14:6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런데도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바울을 말을 듣는다.
로마서 10:13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이 자신들의 욕망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은 늘 삶 속에 신의 공의와 명령을 실행해야만 하는 부담을 가지도록 만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싫어한다. 고민하지도 않고 버려버린다. 그리고 바울의 말에 열광한다. 그들은 바알 숭배자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예수라고 부르면서 바알을 향해 소원했던 욕망을 똑같이 내뱉으며 주님께 이루어달라고 요구한다.
예수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 되어버렸다. 아니 본래 그 이름은 욕망이었다. 이스라엘인들 각자의 욕망, 이스라엘 민족의 욕망을 이루어야만 하는 이름이었다. 예수교, 기독교,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욕망을 믿음이라고 칭해버렸다. 그 욕망을 가진 자들을 믿음 있다고 하며 세례를 주었으며 그들에게 천국을 보장해주었다. 예수교, 기독교, 그리스도교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욕망을 열심히 구하는 그것이 그들에게 믿음이며 진리인 것이다. 바알을 이용하듯 주님을 이용하며 욕망을 이루려는 종교 그것이 예수교, 기독교, 그리스도교이다. 결국 그것은 바알 종교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은 늘 그들의 욕망을 만족시키지 못했으며 그들이 원하는 구원자로서의 모습에서 벗어나기만 했다. 주님은 식민 지배하에 있는 그들을 위로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을 들추어내며 회개를 선포하셨다.
마태복음 4:17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당시 이미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로 활동하고 있으며 말 그대로 그리스도였던 대제사장들을 향해 주님은 독설을 쏟아부으셨다.(눅 20:9-19) 그들이 자리 잡고 활동하고 있는 본거지인 헤롯 성전을 뒤집어엎으셨다.
누가복음 19:45-47 : “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그래서 주님은 죽임을 당하셨다. 주님이 강도라고 판단하셨던 존재들은 단순히 성전에서 장사하고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헤롯 성전에서 장사할 수 있는 권한을 팔며 이익을 챙겼던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강도였던 것이다. 그들은 당시 기름 부음 받은 공식적 메시아와 그리스도로서 백성들 위에 군림했다. 주님은 바로 그런 메시아와 그리스도였던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에 의해 처형당하신 것이다. 이것은 주님이 다음과 같이 이미 말씀하셨던 내용이었다.
누가복음 20:9-15 : “9 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1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13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14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본문에서 사마리아 여자는 앞에서 설명한 메시아와 그리스도 명칭을 주님께 들이대며 그런 존재가 와야 말을 듣겠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요 4:25) 그렇다면 주님은 무엇이라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겠는가? 그 여자의 욕망이 가진 무지와 악을 드러내지 않으셨겠는가?
그런데 본문에서는 “내가 그라”(요 4:26)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라면 앞에서 설명한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주님이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그랬다면 주님은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을 식민 상태에서 해방시키며 이스라엘인들 각자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메시아로서 주님이 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인간의 욕심을 이루어주며 이스라엘이라는 특정한 민족 중심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메시아 그리스도가 결코 아니다. 또한 같은 의미의 구원을 내포한 예수일 수도 없는 것이다.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칭하며 이스라엘을 위한 메시아이길 기대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스스로 다윗의 자손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다.
마태복음 22:42-45 :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그런데도 마태복음 1:1에는 다음과 같이 못 박고 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주님의 말씀과 뜻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말을 버젓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1:21에는 주의 사자라는 존재가 예수의 이름이 가진 의미를 다음과 같이 명확히 하고 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결국 예수라는 이름도 이스라엘 민족에 종속된 메시아 그리스도와 같은 구조의 명칭이다. 개인의 욕망을 이루어주며 선민이라고 착각하는 특정 민족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의 이름이 예수인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복음서라는 책에서 걸러지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쓰이고 있다. 주님이 탐욕의 대상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신약이라는 책에 기록된 주님에 대한 명칭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욕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지 않았으며 끊임없이 정치적인 자리다툼에 여념이 없었다. 소위 마지막 만찬 속에서 전하신 처절한 주님의 말씀 후에도 제자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눅 22:24 :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그들은 주님을 자신들의 욕망을 이루어 줄 메시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들은 주님의 제자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욕망의 제자인 것이다. 비록 겉으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것처럼 보여도 그것의 목적은 자신들의 욕망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의 마지막 십자가 길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어떻게 보면 그들은 그런 존재들이었으며 주님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당연한 결과였다. 다시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는 일터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요한복음 21:2-3 :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그들이지만 사실 그들은 돌아갈 일터를 남기고 다시 일할 배도 남겨두고 주님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들의 욕망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고 더 이상 주님을 따르거나 지킬만한 효용가치가 사라진 것이다. 목숨을 내놓겠다고 말하더니 그런 말도 사실상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투자였을 뿐이었다.
마가복음 14:30-31 : “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이런 제자들과 그들의 공동체는 복음서라는 책을 기록하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의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메시아와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과 민족의 욕망으로 인해 주님이 처참히 처형당하셨는데 아직도 그 명칭을 쓰면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그런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사마리아 여자의 말에 대해서도 걸러주는 아무런 장치를 마련하지 않는다. 후대의 사람들이 읽으면서 똑같은 욕망을 주님께 덧입힐 것이 뻔한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주님께서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시는 것처럼 기록했다.(요 4:26) 어떻게 이런 존재들을 제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주님을 처형하게 된 그 명칭을 그대로 쓰면서 위험성을 알리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방조하면서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 사탄의 제자이다. 주님을 더 이용하면서 자신들의 욕심을 이루라는 사탄의 명령에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소위 성서라는 책은 그래서 위험하다. 성서는 성서가 아니라 가장 세속적인 속서(俗書)가 되어버렸으며 사탄의 메시지와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악서(惡書)가 되어버렸다. 그 속에 남아있는 본질적인 성서는 흔적을 찾기 힘들어져 버렸다. 비록 남아있는 주님의 말씀도 앞뒤에 빼곡히 채워져 있는 속서와 악서의 가치관에 매몰되어버려 사람들은 그 책을 읽을수록 자신들의 욕심을 주님께 당당하게 구하게 되고 그것을 주님이 이루어 줄 것이라고 믿기만 한다. 그러면서 정작 주님이 명하신 신의 공의와 신의 나라를 삶의 현장에서 이루기 위한 삶은 살지 않는다. 단지 교회당이라는 곳에 헌신한다고 하면서 주님의 예배에 대한 직접적이고도 다급한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오히려 그 명령을 비웃는다.(요 4:23-24: https://cafe.daum.net/chun-mo/UDzY/317)
이것이 사마리아 여인이 하고 있는 반응이며(요 4:25) 그런 반응에 대해 주님이 어떻게 하셨을지 알지도 못하는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이라며 왜곡하고 있는 내용이다.(요 4:26)
제자들은 주님이 구하시는 것에 관심이 없다. 제자들이 돌아와서도 주님이 무엇을 필요로 하시는지, 혹 불편하신 것이 없으신지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요한복음 4:27 :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주님이 사마리아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 자체를 이상하게 여겼을 뿐 그 내용에는 관심이 없다. 제자들이라는 사람들은 늘 그런 식이다. 주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내용을 전하면서도 실제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내용이 없다. 단지 사람들이 놀라워했다는 식으로 책에 기록할 뿐이다. 결국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이다. 이해도 못 한 것이다. 관심조차 없는 것이다. 그 내용을 후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도대체 회당에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그 내용이 사라져버렸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마가복음 6:1-2 :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마태복음 13:54 :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누가복음 4:15 :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제자들은 사마리아 여자와 주님이 무슨 말씀을 나누시는 것인지 혹 불편하신 것은 없으신지 주님께 여쭈었어야만 한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을 하시고 계시는 것인지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 제자들은 묻지 않는다. 아니, 물을 필요가 없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할 수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 관심이 없음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목마르심과 요구와 명령에 아무도 관심이 없다. 사마리아 여자도 제자라는 사람들도 오직 자신들의 필요만을 주님께 구할 뿐이다. 이러한 몰지각함이 현대 기독교와 모든 종교와 전 세계에 차고 넘친다.
원하는 것을 받아내려고 주님을 부르지 말라. 주님을 메시아라고 하지 말라! 욕망으로 덧입혀진 이름인 예수라 부르지 말라! 그리스도라고도 부르지 말라! 주님께 구하지 말라! 단지 주님의 명령만을 지금 있는 현장에서 행하라!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