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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1) 기도란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주님”
이번 호부터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를 연재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제4편 ‘그리스도인의 기도’ 중 제1부 ‘그리스도인의 삶과 기도’의 순서를 따르면서 기도란 무엇인지, 기도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독자들과 함께 공부하며 되새기고자 합니다.
우리는 기쁜 일이 생기면 누구와 나누고 싶어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가까운 친지들과 그 기쁨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래서 전화를 하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카톡과 밴드와 페이스북에도 올립니다. 수화기로 들리는 목소리에서, 받은 문자 메시지와 글과 영상에서, 사람들은 기쁨의 내용을 확인합니다. 무시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축하의 답신을 보냅니다. 그러면 기쁨이 배가됩니다.
반대로 답답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습니다. 억장이 무너지듯 슬프고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혼자서는 좀처럼 삭이기 힘든 그런 감정들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거나 분풀이를 해야 그나마 풀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노와 미움 같은 악감정은 쉽게 표출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한결 낫습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아무와도 나누지 않고 혼자서 간직하고 삭이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때도 사실은 혼자 간직하거나 삭인다는 표현이 정확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이 경우 흔히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대화한다고 하지요. 저는 가끔씩 제 이름(세례명)을 부르면서 이렇게 혼잣말을 하곤 합니다. ‘알폰소, 잘 했어! 그래, 그거야.’ 또는 ‘알폰소,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었어! ’ 물론 제가 정신분열증 환자가 아님을 전제하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한 가지 공통적인 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대화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대화를 통해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화가 없는 삶은 삭막합니다. 대화가 없는 삶은 어떤 면에서는 죽은 삶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화는 꼭 감정의 변화가 있을 때, 즉 기쁘거나 슬플 때, 또는 답답하고 화가 날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평소에도 늘 대화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뿐 아닙니다. 대화는 반드시 상대방이 옆에 있어야만, 보여야만 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과도, 심지어는 먼저 세상을 떠난 부모나 친지와도 대화를 나눕니다. 또 때로는 자기 홀로 있으면서도 대화를 필요로 합니다. 자기 안에 깊숙이 침잠해 있을 때도 자신과 내적인 대화를 합니다. 생각에 몰두하는 것도 자신과 하는 내적 대화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대화와 관련해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대화를 필요로 하지만, 대화의 상대는 살아 있든, 이미 세상을 떠났든 인격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반려동물의 시대여서 동물과도 대화를 나눈다고 하지만, 그 경우는 동물을 대화의 상대자로 의인화해서 곧 인격화해서 말하고 있을 따름이지 엄밀한 의미에서 대화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대화를 필요로 하는 존재인 사람이 언제, 어디서나 하고 싶을 때마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인격적 상대는 누구이겠습니까. 하느님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에 대해 우선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다.’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2) 기도란 무엇인가 - 성령께 마음을 여는 것
“답 알고 계신 주님께 겸손되이 청하라”
앞에서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화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쉽게 나누자면 건성으로 하는 대화가 있고 진솔하게 나누는 대화가 있습니다.
건성으로 하는 대화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또 대화하고 나서도 대화한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건성으로 하는 대화는 대화 자체에 몰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대화하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습니다. 그러면 대화가 끊어질 뿐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솔하게 나누는 대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솔한 대화는 울림을 줍니다. 마음을 열고 속내를 나누기 때문입니다. 진솔한 대화는 서로 통하게 합니다. 서로 배려하고 경청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열고 배려하고 경청하는 것은 공감의 통로입니다.
마음을 열고 배려하고 경청한다는 것은 또한 겸손한 자세를 의미합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진솔한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진솔한 대화는 비록 대화를 통해 얻고자 하는 바를 얻지 못한다더라도 대화 자체에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인 기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대화하려는 우리 마음의 진솔함과 겸손함을 필요로 합니다. ‘소화(小花) 데레사’라고도 하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저에게는 기도가 마음의 약동이며, 하늘을 바라보는 단순한 눈길”이라고 했습니다. 진솔함과 겸손함의 표현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이하 교리서)는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는 어떤 자세로 기도하는가? 우리의 교만과 우리 자신의 원의라는 고자세에서 하는가, 아니면 ‘깊은 구렁 속에서’ 뉘우치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는가? ” 교리서의 표현에 따르면 “겸손은 기도의 초석”입니다. “겸손은 기도의 선물을 무상으로 받기 위한 마음가짐”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인간, 겸손한 인간을 두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인간은 하느님께 비는 걸인”이라고 표현했나 봅니다.
걸인에게는 내놓을 게 없습니다. 걸인에게서 나오는 것은 청하는 것뿐입니다. 그 청함을 받아들인다면 그 걸인에게 무상의 선물을 준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래서 인간의 겸손한 청함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 무상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하느님의 뜻,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찾고 청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시며 준비해 놓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청하기를 갈망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교리서는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목마름과 우리 목마름의 만남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을 열고 겸손하게 청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전문가들은 ‘성령께 마음을 열기 전에는 기도를 시작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을 열어 주시도록 성령께 청하는 것이 기도의 시작일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기도는 ‘성령께 마음을 열어 주시기를 청하며 겸손하게 낮추는 것’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559~2661항 참조).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3) 기도란 무엇인가 - 계약이자 친교
기도, 진심으로 하느님과 친교 맺기
어떤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보통 그 사람의 자세를 보면 압니다. 이는 기도의 경우에도 해당합니다. 사람의 자세를 보면 비록 소리 내어 기도를 바치지 않더라도 저 사람이 기도하고 있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짐작이 언제나 맞는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 경건하게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도가 아니라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반대로 기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표정이나 몸짓인데도 실제로는 간절하게 기도하는 경우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어떤 기도이든 간에 기도는 마음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입니다.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해도,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기도가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저마다 체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아침 출근길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묵주기도를 바치곤 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묵주를 꺼내 들었습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지만, 마음이 동하질 않더군요. 성모송 몇 번 바치다가 결국은 중단하고 말았지요.
그래서 교리서에서도 “기도를 드리는 표현 수단이 어떠한 것이든… 마음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가 봅니다(2562항). 물론 기도가 솟아나오는 곳을 가리킬 때 성경에서는 때로는 영혼이나 혹은 정신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마음이라고 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은 무엇일까요? “마음은 내가 존재하고 내가 머무는 거처”입니다. ‘내 마음 나도 몰라’라는 말처럼, 마음은 다른 사람들의 이성으로는 물론 우리 자신의 이성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우리의 숨겨진 중심”입니다. 기도하려면 이성(생각)의 결단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마음의 결단이 있어야, 곧 마음이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결단을 내리는 자리”이고 “우리가 삶이나 죽음을 선택하는 곳”이며 “진리의 자리”이며 “계약이 체결되는 자리”입니다(2562항).
우리 자신도 알 수 없는 이 마음을 살피고 감지하실 수 있는 분은 바로 하느님의 성령이십니다. 마음은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은 이 만남이 성사됨을 의미합니다. 만남이 성사된다는 것은 계약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 관계”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도는 “하느님의 행위이며 인간의 행위입니다”(2564항). 우리는 기도할 때에 하느님을 찾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찾기 이전에 이미 하느님께서는 우리 앞에 와 계시고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마음을 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 때 계약이 체결됩니다. 지난 호에서 ‘기도란 성령께 마음을 여는 것’이라고 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하지만 기도에서 이루어지는 만남과 계약은 단순히 약속한 것을 주고받는 계약이 아닙니다. 기도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인간의 마음이 온전히 결합되는 바로 그것”,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입니다.
그래서 기도 생활이란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 면전에서 지내는 것이며, 그분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할까요? 교리서는 “언제나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2565항). 곧 죽음을 딛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죄에 죽고 새사람이 되어 우리 안에 성령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에 힘입어 우리 마음을 여는 것, 그것이 기도의 시작입니다. 기도 생활은 성령과 함께 호흡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4) 창조와 기도
신비로운 만남으로 끊임없이 부르신다
미움과 증오는 파괴하지만 사랑은 창조합니다. 우리는 일상의 체험을 통해서 이를 확인합니다. 명장(名匠)은 자신이 혼신을 다해 만든 작품 하나하나에 가득한 애정을 담습니다. 하물며 사랑 자체이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을 바라보시는 심경은 어떠하겠습니까? 구약성경 창세기 1장에서 ‘보시니 좋았다’는 표현은 괜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더욱이 당신 모습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시고는 ‘참으로 좋았다’고 하시는 하느님이시니 인간에 대한 그 사랑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창조주 하느님이 인간을 보시는 그 마음은 마치 어머니가 품에 안은 갓난아기를 바라보는 마음에 비길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부족한 비유이지만 말입니다. 그 갓난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느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요놈이 젖 먹을 때가 됐는데’ 하면, 아기는 배가 고프다고 울음을 터뜨립니다. 아기를 보는 어머니의 마음도 이러한데, 할 수 없는 것이 없고 모르는 것이 없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의 작품인 인간을 향한 마음은 더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당신을 찾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느님을 찾게 돼 있는 존재입니다. 비록 “죄 때문에, 하느님과 비슷함을 잃어버린 뒤에도, 인간은 자신의 창조주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존재하도록 부르시는 분께 대한 갈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566항).
이렇듯이 인간은 하느님을 찾게 돼 있습니다만 사실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곧 인간을 “무(無)에서 유(有)로 불러내실” 때부터 먼저 인간을 부르십니다. 이렇게 창조와 함께 시작된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갈망과 또한 창조로 인간을 불러내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의 만남이 기도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창조주를 잊거나 또는 창조주의 면전에서 멀리 숨더라도, 자신의 주장을 좇거나 또는 자기를 버렸다고 하느님을 비난하더라도, 살아 계신 참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기도의 신비로운 만남으로 끊임없이 부르십니다”(2567항).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에서는 인간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이 사랑의 행위가 언제나 앞서는 것이고, 인간의 행위는 언제나 이 사랑에 대한 응답”(2567항)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인 기도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창조와 함께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 자체가 무에서 유로 불러내시는 하느님의 행위이고 인간의 존재 자체가 그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손오공이 아무리 애써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 인간의 존재가 그러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에게서 벗어나려고 부질없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하려는 열려 있는 자세입니다.
성경, 특별히 구약성경은 이렇게 인간을 부르시면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과 부르심에 응답하거나 때로는 응답을 회피하는 인간의 관계를 한 민족의 역사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교리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 점차 당신을 드러내시고 인간에게 차츰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심에 따라,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에게 하는 호소, 상호간에 맺어지는 계약이 되는 것이다. 말과 행위를 통하여 이 계약의 드라마는 마음속으로 파고든다. 이 드라마는 구원의 역사 전반에 걸쳐 펼쳐진다”(2567항).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5) 구약에 나타난 기도 - 너 어디 있느냐
하느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나
이제 「가톨릭 교회 교리서」를 따라 구약 성경에 나타난 기도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봅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이 만나는 것임을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의 첫 부르심은 타락한 첫 인간 아담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따 먹지 말라고 금하신 열매를 따 먹고 두려워 몸을 숨긴 아담을 하느님께서 부르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 그러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느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을 반영하지 못한 채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죄를 범합니다. 범죄한 인간에게 하느님의 부르심은 더 이상 자애로우신 아버지, ‘보시니 참 좋았다’ 하고 경탄하시는 창조주의 선한 부르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엄한 추궁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첫 인간 아담을 대하시는 모습이 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담 스스로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었을 때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우리 양심에 가책을 받아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너 어디 있느냐?” 하는 부르심은 단순히 어느 곳에 있느냐는 장소를 묻는 말씀이 아니라 존재론적 부르심, 달리 말하자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소명 혹은 사명에 관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너 어디 있느냐?”는 “너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물음과도 통합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아담은 이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렇게 변명합니다.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부끄러워 숨었습니다”(창세 3,10). 마치 잘못한 후 책임을 추궁당하면 우물쭈물하는 우리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합니다.
“너 어디 있느냐?” 하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정확하게 올바로 응답한 분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7).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 이것이 부르심이 겨냥하는 본래의 목표이고, 인간 응답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응답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서는 이렇게 언명합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기도에 대한 계시는, 인간의 타락과 그 속량 사이에서,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첫 자녀에게 탄식조로 ‘너 어디 있느냐?…어쩌다가 이런 일을 했느냐?’ 하는 질문과 외아들께서 세상에 오시면서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 하신 대답 사이에서 이루어진다”(2468항). 이것은 기도가 인간의 삶 속에서 인간을 부르시는 하느님과 그에 응답하는 인간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역사의 사건들 속에서 인간이 하느님과 맺게 되는 관계”인 것입니다(2468항).
앞으로 몇 회에 걸쳐서 이렇게 구약 성경에서 계시되는 기도를 구약의 주요 인물들의 기도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물론 구약 성경의 첫 장들(9장까지)에는 아벨이 맏배를 봉헌한 일(창세 4,4), 에노스가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간구한 일(창세 4,26), 노아가 번제물을 바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린 일(창세 8,20-9,17 참조) 등 기도와 관련된 내용들이 나옵니다. 하지만 구약 성경에서 기도가 계시된 것은 특히 성조 아브라함부터이기에 다음 호에는 아브라함의 기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되새겨봅니다
“너 어디 있느냐?” 오늘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이 부르심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는지요?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6) 구약에 나타난 기도 - 약속 · 믿음의 기도
외아들도 기꺼이 바치는 믿음
구약성경 창세기 12장은 하느님께서 믿음의 성조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고 창세기는 말합니다(12,1-4). 하느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따르며 순종한 것입니다. 교리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기로 결정하는 마음의 귀 기울임이 기도의 본질적인 요소이며, 말은 부수적인 요소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기도의 한 가지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말보다도 “먼저 행동으로 표현”되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행동으로 표현되는 기도는 아브라함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머무는 곳마다 주님을 위한 제단을 쌓는 데서도 드러납니다(창세 12,8; 13,4.8 참조).
아브라함이 말로써 표현하는 첫 기도는 나중에 나옵니다. “주 하느님,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는 자식 없이 살아가는 몸 …당신께서 자식을 주지 않으셔서, 제 집의 종이 저를 상속하게 되었습니다”(창세 15,2-3). 이 기도는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창세 12,2)고 하신 하느님의 약속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기에 그 약속을 하느님께 “상기시켜 드리는 은근한 탄식”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에게서조차도 처음에는 하느님의 약속에 대해, 달리 표현하면 하느님의 성실성에 대해 과연 믿어야 하느냐 하는 ‘믿음의 시련’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탄식 어린 기도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거듭 약속하시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습니다(창세 15,5-6). 이 약속은 이사악의 탄생으로 실현되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최대한 정화시키고자 엄청난 요구를 하십니다. 당신께서 약속으로 주신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창세 22,2 참조).
아브라함은 다시 행동으로 순종합니다. 나이 100세에 아들을 본 아브라함은 신약성경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히브 11,19). 이런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바쳤고, 그래서 마침내 믿는 이들의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믿음으로 외아들 이사악을 기꺼이 바치고자 한 아브라함은 어느 면에서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실 성부를”, 하느님 아버지를 “닮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인간에게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회복시켜 주며, 또한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강렬한 사랑에 참여하도록 해줍니다”(2573항).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인 야곱에게서 갱신하십니다.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며 이사악의 하느님인 주님이다.… 네 후손은 땅의 먼지처럼 많아지고… 땅의 모든 종족들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28,10-22).
이 야곱과 관련된 한 일화는 교회의 기도 전통에서 상징적 의미를 지닙니다. 형 에사우를 속여 형에게 돌아갈 장자권과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은 형의 복수를 피해 달아납니다. 세월이 흘러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야곱은 신비로운 어떤 분과 밤새도록 씨름을 합니다. 동이 틀 때가 되어 그분이 놓아달라고 애원했으나 야곱은 축복을 받기 전에는 놓아 주지 않겠다고 하지요. 그러자 그분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고쳐 부르면서 복을 빌어줍니다(창세 32,25-31).
이 일화를 두고 교리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회의 영적 전승은 이 이야기를 기도의 상징으로, 곧 신앙의 싸움과 끈기의 승리로 이해해 왔다”(2573항). 끈기 있게 바치는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7) 구약에 나타난 기도 - 모세, 중개자의 기도
백성을 위해 하느님께 정성껏 기도
기도에서 주도권을 취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고 했는데, 모세의 경우도 하느님께서 먼저 행동하십니다. 불타는 떨기 가운데서 하느님께서 먼저 모세를 부르시고 말씀을 건네시는 것입니다(탈출 3,1-10 참조). 하느님께서 당신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아느님 야곱의 하느님”(탈출 3,6)이라고 밝히시고 또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당신을 계시하시는 것은 당신이 살아 계시는 하느님임을 뜻합니다. 이렇게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어 생명을 주시고자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것은 이 구원 사업을 당신 혼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세를 구원 사업에 참여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인간의 의사를 무시하면서까지 하지도 않으십니다. 모세를 부르시는 하느님과 발뺌하려는 모세의 대화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은 오히려 모세에게 간청하시는 분처럼 나타납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느님과의 오랜 줄다리기를 하면서 마침내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게 됩니다(탈출 4장 참조).
모세가 하느님께 사명을 받는 이 사건에서 주목할 또 한 가지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으시는 이 대화를 통해 모세가 기도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회피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질문을 던지고 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런 대화를 통해 마침내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33,11)고 탈출기는 전하는데, 교리서는 이 대화가 전형적인 ‘관상 기도’라고 설명합니다. 관상기도란 나중에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간단히 ‘사랑으로 가득 차 하느님을 응시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세가 하느님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듯이 관상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또한 그가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의 겸손에 대해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민수 12,3)고 전합니다.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이 친밀함으로 모세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 소유로 삼으신 백성을 위해서 용기를 내어 항구하게 전구의 기도를 바칩니다. 아말렉 족과 싸움에서 이기도록(탈출 17,8-16) 전구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변절했을 때 백성을 위해 전구합니다(탈출 32,1─34,9 참조).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해내고 마침내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 되게 한 모세의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질 전구의 놀라운 표상이 된다”(2573항)고 교리서는 설명합니다. 그래서 모세의 기도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모세의 기도는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먼저 부르시는 것에 대한 응답”입니다. 2) 모세의 기도는 “유일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기도를 예시한다”는 것입니다(2593항).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8) 구약에 나타난 기도 - 다윗, 임금의 기도
백성들에게 기도의 모범된 다윗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친 이들은 주로 백성의 지도자들, 곧 왕과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교리서(2578~2580항) 는 임금의 기도에 대한 본보기로 다윗의 기도를 이야기합니다.
교리서는 다윗 임금의 기도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하느님 말씀에 따라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임금으로 세운 예언자 사무엘을 먼저 언급합니다.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에게서 주님 앞에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그리고 스승인 사제 엘리에게서는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마음이 쓰라려 흐느껴 울 정도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속마음을 털어놓는 기도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사무엘)을 주십니다. 그리고 한나는 기도하면서 주님께 약속한 대로 아들을 주님께 바칩니다(1사무 1장 참조). 사무엘은 이런 어머니에게서 어렸을 때부터 주님께 기도 바치는 법을 배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 말씀을 듣는 법은 사제 엘리에게서 배웁니다. 그것은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9) 하는 자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몇 가지 중요한 자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편의상 순서를 매기자면 기도는 ① 간절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간절함은 하늘을 울립니다. ② 속마음을 털어놓아야 합니다. 기도는 진솔해야 합니다. 또 진솔하지 않으면 간절함도 없습니다. 진솔하지 않은 기도를 간절하게 바친다는 것은 가식이고 위선입니다. ③ 마음을 열고 경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는 응답은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기꺼이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느님께서는 만사를 좋게 이끄신다는 확신과 신뢰가 전제돼 있습니다.
교리서는 다윗을 “누구보다도 하느님 마음에 드는 훌륭한 임금”(2579항)이라고 소개합니다. 다윗은 “백성을 위하여 또 백성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목자입니다. 지도자의 첫째 덕목은 자신이 아닌 백성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이는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누구보다도 하느님 마음에 드는 훌륭한 임금인 것은 그가 도덕적으로 더할 나위 없서가 아닙니다. 하느님 뜻을 따르는 순명과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참회 때문입니다.
그래서 임금인 다윗의 순명과 찬미와 참회는 또한 백성에게 기도의 모범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려는 자세,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놀라운 은총에 대한 찬미, 그리고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겸손하게 뉘우치는 마음, 우리의 삶 자체가 이러한 기도의 삶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 또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 기도의 집을 지어 바치겠다는 다윗의 뜻을 하느님께서는 물리치십니다. 그의 뜻은 아들 솔로몬이 현실로 만듭니다. 교리서는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면서 바친 기도(1열왕 8,10-61 참조)와 관련, 임금의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합니다.
왕은 겸손한 자세로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쳐들고 △ 자신과 온 백성을 위해 △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 △ 백성의 죄에 대한 용서와 매일의 필요를 위해 △ 백성의 마음이 온전히 주님을 향하도록 기도합니다.
지도자의 기도, 가장의 기도 역시 이런 기도이면 좋겠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9) 구약에 나타난 기도 - 엘리야, 예언자들과 마음의 회개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 주님께로 인도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기도하는 장소이자 기도를 가르치는 장소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서 기도를 바치고 예물을 봉헌했습니다. 성전 제사는 안식일과 매달 초하룻날과 정해진 축제일 등에만 바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바쳐졌습니다(에제 46,13 참조). 그래서 성전에서 이뤄지는 희생 제사, 저녁 제사, 향, 제사 음식 등은 모두 하느님의 거룩함과 영광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이 표징들은 또한 “기도하라는 호소이자 기도로 이끄는 길”(「가톨릭 교회 교리서」 2581항)이기도 합니다.
기도를 바칠 때는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외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때로는 외적인 형식이 더 진솔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해 주는 동인이나 자극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형식에 지나치게 얽매이다 보면 기도하는 참뜻을 놓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랬습니다. 외적인 예배만 중시한 채 진심 어린 마음의 기도를 소홀히 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교육과 회개”가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귀양살이(B.C. 587~538)를 전후해서 예언자들이 맡은 사명입니다.
교리서는 구약의 가장 대표적인 예언자인 엘리야의 기도 이야기를 통해 기도의 자세와 의미를 제시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하느님이시다”라는 의미를 지닌 엘리야라는 이름은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예고합니다. 엘리야는 카르멜 산에서 바알의 예언자들과 대결하면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주님, 이 백성이 당신이야말로 하느님이시며, 바로 당신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음을 알게 해주십시오”(1열왕 18,37). 이 기도에 응답하신 하느님께서는 불길을 내려보내 번제물과 장작과 도랑에 있는 물까지 핥아버리게 하십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하고 부르짖습니다(1열왕 18,38-39).
엘리야는 또 사렙타 마을에서 과부의 밀가루 단지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는 기적을 통해 과부에게 하느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르칩니다. 그뿐 아니라 간절한 기도를 통해 과부의 아들이 다시 살아나게 함으로써 과부의 믿음을 확고하게 합니다(1열왕 17,8-24 참조). 엘리야의 이런 기도의 모범이 야고보 사도에게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 5,16)라고 말하게 했을 것입니다.
나아가 엘리야는 모세처럼 하느님의 명에 따라 하느님의 산 호렙에 가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과 만나는 것, 이것이 기도의 본령입니다. 모세와 엘리야 같은 예언자들은 “하느님과 단둘이 있음으로써” 곧 기도에서 그들의 사명을 위한 빛과 힘을 얻습니다. 교리서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불충한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때로는 하느님과 따져보기도 하고 하느님께 탄식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역사의 주인이신 구세주 하느님의 개입을 열망하고 준비하는 중개의 기도이다”(2584항).
예언자들의 이러한 기도의 삶은 우리에게도 귀감이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삶에서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우리에게 할 일을 가르쳐 주고 용기와 힘을 줍니다. 때로는 원망하고 탄식할 수 있습니다. 진실하게 간절하게 아룁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겸허히 받아들입시다. 우리 삶이 바뀔 것입니다.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10) 시편, 회중의 기도 (「가톨릭 교회 교리서」 2585~2589항)
시편, 시공간 초월한 기도의 걸작
교리서는 구약 성경에 나타난 기도에 관한 마지막 부분으로 시편을 제시합니다(2585~2589항). 전체 150편으로 이뤄진 시편은 다섯 권을 모아 놓은 하나의 전집입니다. 각 권은 1-41편, 42-72편, 73-89편, 90-106편, 그리고 107-150편입니다. 이렇게 모아진 시편은 “구약 성경에 수록된 기도의 걸작”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큰 축제일에는 예루살렘에 모여, 그리고 안식일에는 각 동네에 있는 회당에 모여 기도를 바쳤습니다. 시편은 이 기도를 표현하며 풍요롭게 합니다. 이 시편 기도는 개인적이지만 또한 동시에 공동체적이기도 합니다. 시편 기도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거룩한 땅 곧 이스라엘 땅에서만 아니라 이스라엘 밖의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 곧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도 바칩니다. 그러나 시편 기도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만민을 다 포용합니다.
교리서는 시편 기도에 대해 “이 기도는 과거의 구원 사건들을 상기시키며, 역사의 종말에까지 미친다. 이 기도는 이미 실현된 하느님의 약속들을 상기시키며, 그 약속들을 결정적으로 실현하실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시편을 인용해 당신의 신원을 드러내실 뿐 아니라(마태 22,41-46 참조), 마지막 만찬을 드신 후에는 찬미가를 부르시고(마태 26,30 참조), 십자가 위에서도 시편을 바치며 부르짖으십니다(마태 26,30; 시편 22,2 참조). 그리고 숨을 거두실 때에도 시편을 바치십니다(루카 23,46; 시편 31,6 참조).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기도로 바치고 그분 안에서 완성된 시편은 교회가 드리는 기도의 핵심으로 머물러 있다”고 교리서는 밝힙니다.
시편은 또한 “그 안에서 하느님이 말씀이 인간의 기도가 되는 책”이라는 점에서 구약의 다른 책들과 구별됩니다. 다른 구약 성경의 “말씀들은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업적들을 선포하며 그 안에 포함된 신비들을 밝혀 주지만” 시편은 “시편 작가가 시를 지어 하느님께 노래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밝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의 일을 추진하시는 분도, 인간의 응답을 불러일으키시는 분도 같은 성령이시지요.
시편의 표현들은 다양합니다. 시편은 찬미가, 탄식 기도나 감사, 개인이나 공동체의 간구, 왕의 노래 또는 순례의 노래, 이 밖에 지혜의 명상 등을 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 백성의 역사에서 하느님의 놀라우신 일과, 시편 작가가 인생살이에 체험한 인간적 상황들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편은 “신분이나 시대를 초월하여 누구든지 바칠 수 있는 진실한 기도”(2588항)입니다.
교리서는 또 시편들에는 일관된 특징들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것은 △ 기도의 소박함과 자발성 △ 피조물의 온갖 좋은 것을 통해 또 그것들과 함께 드러나는 하느님께 대한 갈망 △ 주님을 더 사랑함으로써 원수들과 유혹의 표징이 되는 믿는 이들의 처지 △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주님 뜻에 맡겨드리는 의탁의 자세 등으로 시편 전체에 일관되이 흐르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시편은 구약 성경에서 기도의 걸작을 이룹니다. 개인적 요소와 공동체적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는 시편은 이미 이루어진 하느님의 약속을 기념하며 메시아의 오심을 희망함으로써 역사의 모든 차원에까지 미칩니다. 그래서 시편은 교회가 드리는 기도의 근본적이고 불변하는 요소일 뿐 아니라 계층과 시대를 초월해 모든 이가 드리기에 적합한 기도입니다(2596~2597항).
기회가 될 때마다 시편 한 구절씩이라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11) 예수의 기도 - 때가 찼을 때 (「가톨릭 교회 교리서」 2598~2622항)
“아버지 당신 뜻대로 이뤄지게 하소서”
구약에 나타난 기도에 이어 이번 호부터는 교리서가 ‘때가 찼을 때’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고 있는 예수의 기도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살펴보는 것은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에게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가르쳐 주시는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또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어떻게 들어주시는지를 깨닫고자 함입니다.
예수의 기도 ① (2599~2604항)
예수님은 어떤 때에 기도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이행하는 결정적인 순간들을 앞두고 기도하십니다. 세례 때와 영광스러운 변모 때에는 아버지이신 성부께서 당신에 대해 증언해 주시기 전에 기도하십니다(루카 3,21-22 ; 9,28-36 참조). 또 수난을 통해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시기에 앞서 기도하십니다(루카 22,39-46 참조). 열두 사도를 선택하여 부르시기 전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 고백을 하기 전에도 기도하십니다(루카 6,12; 9,18-20 참조). 아버지 하느님께서 성취하라고 명하신 구원 활동을 펼치시기에 앞서 드린 예수님의 기도는 인간으로서 예수님이 지니신 뜻을 사랑이 충만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겸손과 신뢰로서 먼저 맡기는 기도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인간으로서 계획한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 뜻을 신뢰하며 그 뜻에 자신의 계획을 겸손하게 맡기는 기도입니다. 내가 계획한 일이 잘 이뤄지도록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내가 계획한 일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뤄지도록 맡겨 드리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밤에, 홀로, 산으로 가서 자주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물론 언제 어디서나 바칠 수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밤에, 홀로, 산으로 가서 기도하셨다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 뜻을 찾고 그 뜻에 자신의 뜻을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그만큼 기도의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범을 따라 우리도 기도할 때는 기도에 방해를 받지 않도록 자주 고요하고 외딴곳을 찾아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공생활 때 바친 기도 두 편의 내용이 잘 기록돼 있습니다. 하나는 마태오 복음 11장 25-27절에 나오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것에 먼저 감사를 드리며 “그렇습니다, 아버지!” 하고 감탄하십니다. 이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예수님이 마음 깊이 동의한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모든 기도는 성부의 ‘심오한 뜻’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동의로 집약됩니다(2603항).
다른 하나는 라자로를 다시 살린 사건과 관련해 나옵니다(요한 11,41-42). 여기서 예수님은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하고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이어서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고 덧붙입니다. 이 기도에는 △ 하느님 아버지께서 언제나 예수님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과 또한 △ 예수님께서도 끊임없이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고 계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감사로 시작하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어떻게 청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기도를 드릴 때는 기도를 통해서 청하는 선물보다 기도를 통해서 그 선물을 주시는 분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제사보다 잿밥’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평화신문, 2016년 8월 16일, 이창훈 기자]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12) 예수의 기도 - 때가 찼을 때 (「가톨릭 교회 교리서」 2598~2622항)
회개하고 믿고 행하여라
예수의 기도 ② (2605~2611항)
교리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님께서 바치는 기도의 심오함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붙잡히시기 전에 바치신 기도(‘아버지…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루카 22,42)뿐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을 통해서도, 기도하는 것과 당신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동일한 행동임을 보여 주신다”(2605항).
무슨 뜻일까요?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게 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대로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도 그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루카 23,34)라는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함께 매달린 죄수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라고 하신 말씀대로 그 죄수는 그렇게 됩니다. 또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27) 하신 말씀대로 마리아는 어머니가 되고 요한은 아들이 됩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하고 말씀하실 때나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와 자기 증여는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교리서는 나아가 이렇게 웅장하게 설명합니다. “죄와 죽음의 노예가 된 인류가 지나온 모든 시대의 온갖 고뇌, 그리고 구원 역사에 나타나는 모든 청원과 전구는 강생하신 말씀의 이 ‘큰 소리’ 속에 합류된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는 이를 받아들이시고…당신 아드님을 부활시키심으로써 그것들을 모두 들어주신다. 이렇게 해서 창조와 구원의 경륜을 통해 기도의 드라마가 전개되고 완성된다”(2606항). 한 마디로 인류의 모든 청원과 전구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사건에서 완전히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그 자체가 기도하는 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좀더 분명하게 기도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기도하는 데에 먼저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마태 5,23-24 참조),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마태 5,44-45 참조), 기도할 때는 마음속으로부터 용서하고(마태 6,14-15 참조), 많은 말을 되풀이하지 말고 골방에서 기도하며(마태 6,7), 마음을 깨끗이 해 하늘나라를 구하는 것(마태 6,21.25,33 참조)이 필요합니다. 이런 회개는 우리를 온전히 하느님 아버지께 향하게 합니다.
이렇게 회개하는 마음을 지닐 때 우리는 또한 믿음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믿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해서 믿음의 기도가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회개, 믿음, 하느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기도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평화신문, 2016년 8월 21일, 이창훈 기자]
[위대한 신앙의 신비, 기도] (13) 예수의 기도 - 때가 찼을 때 (「가톨릭 교회 교리서」 2598~2622항)
끊임없이 겸손하게 믿음으로 청하라
예수의 기도 ③ (2612~2616항)
예수님께서 지상 생애에서 당신의 말씀과 활동으로 선포하신 중심은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은 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고 말씀하시면서 회개하고 믿음을 갖고 깨어 있으라고 호소하십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믿음으로 새사람이 된 그리스도 신자들은 기도하는 가운데 비천하게 사람이 되신 주님의 첫 번째 오심을 기억하고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희망하면서, “언제나 계시며, 오시는 주님”을 깨어 기다립니다. 이렇게 깨어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은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되려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에서는 기도에 관한 아주 중요한 예수님의 비유 세 가지를 전해 줍니다. 첫 번째 비유는 ‘끊임없이 간청하라’(11,5-8)는 비유와 그에 이은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씀(11,9-13)으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끊임없이 청하고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필요한 모든 것뿐 아니라 특히 “모든 선물을 가지고 계시는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1,13 참조; 2613항).
두 번째 비유는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18,1-8)로, 믿음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지치지 말고 늘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 끝에 하신 예수님 말씀을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세 번째 비유는 재판관의 비유에 이어오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18,9-14)로, 기도하는 사람의 겸손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는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라는 세리의 기도를 교회의 기도로 삼아, 미사 때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겸손하게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치실 뿐 아니라 당신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요청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4).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새로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5)이실 뿐 아니라 “나를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요한 14,6 참조)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교리서는 예수님의 기도와 관련해,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세 가지 차원을 잘 요약하고 있다고 소개합니다(2616항). 첫째,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사제로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로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십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하느님으로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동정 마리아의 기도(2617~2619항)
교리서는 예수님의 기도를 다루면서 마지막에 마리아의 기도에 대해 언급합니다. 아기를 낳으리라는 천사의 전갈에 처녀 마리아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자신의 전 존재를 바쳐 응답합니다.
여기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Fiat)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교리서는 마리아의 이 응답이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셨으니, 우리도 온전히 그분의 것이 되겠다”는 “그리스도인의 기도”(2617항)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마리아께서는 실제로 전 삶을 통해 주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하는 데 자신의 전 존재를 바치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불순종함으로써 세상에 죄와 죽음을 가져온 첫 여인 하와와 반대로 순종하는 새 하와로서 인류 구원의 협조자가 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