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한강 장편소설
*
너와 함께 보낸 그 긴 시간 동안, 그 어떤 질문과 대답, 어떤 인용과 암시와 논증보다 절실하게 너에게 건네고 싶었던 말은 어쩌면 정작 이런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어.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남루한 맥락에서 나는 플라톤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라고.
그 역시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라고.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는.
*
그 시절 내가 꿈꿨던 象상들이 유난히 선명하게 떠오르는 순간이었어.
아직 식지 않는 늦가을의 흙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눈송이들.
어질머리나게 피어오르는 이른 봄의 아지랑이.
고요하고 희미한 그 기척들.
믿어본 적 없는 神신의 파편들.
태어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이데아.
모든 존재의 뒤편에 물 위의 환한 그림자처럼 떠올라 있는,
모든 존재가 수천의 눈부신 꽃으로 피어나 세계를 싸안고 있는,
열 여섯 살의 내가 온 힘으로 붙들었던 華嚴화엄.
안경을 벗은 채 이 침대에 누워, 모호하게 저 허공을 올려다보면서 그 세계를 생각하고 있어.
눈을 부릅뜨고 그걸 들여다보고 있어.
*
하지만 그 시절의 너를 사로잡은 건 그런 것들이 아니었지.
물리적 실재와 시간.
無에서 뜨겁게 폭발하며 태어난 세계.
전진하기 전에 영원히 서성이고 있었던 시간의 씨앗.
그래. 시간.
보르헤스가 자신을 태우는 불이라고 불렀던 것.
그 수수께끼를. 한 순간 쏘아져 영원히 날아가는 화살을. 그 안에서 불붙은 채 소멸에 맞서는 생명을 너는 맨손으로 만지고 싶어했지.
마침내 더 학교를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갔지.
영원 다시 학생 따위는 도지 않겠다고 나에게, 네 지친 엄마에게 맹세했지.
코와 입술과 혀에 피어싱을 했던 네 친구들을 기억해.
그중 유난히 눈이 슬퍼 보였던 한 친구도.
볼륨을 높일수록 가슴을 찢게 서글프던 그들의 음악을 기억해.
넌 나에게 말했지.
병실의 벤젠 냄새 속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아름다움은 오지 강렬한 것, 생생한 힘이어야 한다고.
삶이란 게. 결코 견디는 이이 되어선 안 된다고.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 죄악이라고.
그러니까, 너에게 아름다운 건 붐비는 거리였지.
햇빛이 끓어 넘치는 트램 정류장었지.
세차게 뛰는 심장.
부풀어 오르는 허파.
아직 따듯한 입술.
그 입술을 누군가의 입술에 세차게 문지르는 거였지.
*
그 모든 뜨거움을 너는 잃었니.
너는 정말 죽었니.
생각에 잠긴 얼굴.
깊게 주름진 입가.
미소 띤 눈.
뻔한 대답을 하기 싫을 때마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던 습관.
네가 나를 처음으로 껴안았을 때, 그 몸짓에 어린, 간절한, 숨길 수 없는 욕망을 느꼈을 때, 소름 끼칠 만큼 명확하게 나는 깨달았던 것 같아.
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
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샅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
그 시절이 지나가기 전에 너를, 단 한 번이라도 으스러지게 마주 껴안았어야 했는데.
그것이 결코 나를 해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끝내 무너지지도, 죽지도 않았을 텐데.
*
한 사람이 눈 속에 엎드려 있다.
목구멍에 눈雪.
눈두덩에는 흙.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 사람이 그 앞에 멈춰 서 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
이마에
눈썹에
두 눈꺼풀에.
마치 시간이 나에게 입맞추는 것 같았어요.
입술과 입술이 만날 때마다 막막한 어둠이 고였어요.
영원히 흔적을 지우는 눈처럼 정적이 쌓였어요.
무릎까지, 허리까지, 얼굴까지 묵묵히 차올랐어요.
*
나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다.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이 조용히, 빠르게 뒤치럭거린다.
두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
금세 다시 말라버린 입술을 연다.
끈질기게, 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다.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