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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투명한 서정과 긍정의 세계
공광규/ 시인
1.
최병근 시인은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애지》를 통해 등단했다. 그동안 시집 『바람의 지휘자』를 출간했고, 현재 청주시인협회에 적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그는 시집 앞 ‘시인의 말’에서 “따뜻한 항로라면 괜찮을 일이다/ 비판의 너울마저/ 쉬이 넘어야 하는 것이므로// 완전한 연소의 힘으로/ 하얗게 기화되어야 하므로”라고 하며, 자신의 시에 대한 지향점을 “따듯한 항로”에 두고 있다. 그리고 항로에서 만나는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는 열린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이번 시집 원고를 읽어가면서 시인의 시세계가 맑고 투명하고 명징하고 간결하다는 인상을 깊게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난삽하고 난해하고 애매한 시들이 횡행하는 시단에서 최병근은 의미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긴 시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자신의 시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나름대로 정형화한 진술방식은 생물과 무생물, 사람과 사물을 병치시키는 비유방식과 문명비판, 불교적 상상과 유희적 진술을 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시가 되는 화법, 시의 가장 기초적인 방법은 사물과 사건을 다른 사물과 사건으로 바꾸어 보여주는 것이다. 무생물이 생물, 생물이 무생물로, 아니면 서로 다른 종의 생물이거나 전혀 다른 사물로 바꾸어 놓으면 독자들이 의미전달 방식의 낯섦을 통해 서정적 충동을 일으키게 된다. 이것이 시 읽는 기쁨을 주고, 시적 마력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아마 독자들이 서정의 광휘에 휩싸이는 경험을 했다면, 이런 경험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이른 새벽 출근길 차창에
옹기종기 붙어 있는 빗방울
한 몸이 되었다가 흩어지고
간신히 움켜잡은
투명한 집착을 본다
내 안에 무늬 진 숱한 감정을 더듬는다
더는 놔둘 수 없어
한쪽에 접어둔 와이퍼를 켜자
좌우로 날개를 펼치며
맑은 손을 흔든다
- 「투명한 집착-와이퍼」 전문
잘 나가다 실패한 형님을 만났다
자네 풍선을 불다 터뜨려본 경험이 있는가
삶도 불다가 터진 풍선 같지
어느 정도 불면 잘 가지고 놀아야 해
- 「실패의 힘」 전문
비 오는 날 출근 길 차창에 옹기종기 붙어 있는 빗방울에서 “투명한 집착”을 발견한 후 “맑은 손”을 재발견하는 그는, 시를 통해 인생의 비의를 발견하기도 한다. 시 「실패의 힘」에서는 잘 살다가 실패한 형님을 통해서 “삶도 불다가 터진 풍선 같”다는 주인공의 말을 통해, 인생도 “어느 정도 불면 잘 가지고 놀아야”한다는, 과욕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들려준다. 시 「나무의 집」에서는 한 가지에 빼곡한 이파리를 달고 있는 “모양도 방향과 제 각각”인 벤자민 나무를 보며 다양한 인간 삶의 양태를 사유하고 암시한다.
너는 밤바다를 휘젓는
은빛 칼 한 자루다
저 찬란한 생의 나날
바다에 한번 누워보지도 못하고
아름다운 칼춤으로 생과 이별하는가
누군가의 코에 꿰이자
반듯한 한 자루 검으로 눕는다
- 「갈치」 전문
이렇게 최병근의 시는 바다를 소재로 한 시의 심상이 빛을 발한다. 갈치는 검은 밤바다를 휘젓던 은빛 칼이고, 살아있는 동안은 한 번도 눕지 않고 늘 칼날을 세우고 있었다고 한다. 죽어서야한 한 자루 검으로 누워 있는 것이다. 살아서는 몸을 세우고, 죽어서야 눕는 것이 갈치의 생물학적 특성이다. 그러나 시인이 갈치를 시로 쓴 것은 생물학적 특성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어떤 빛나는, 날카로운, 쉬지 않고 정진하는, 매진하는 정신을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시 「바다의 무덤」에서는 소금 채취하는 행위를 “염부는 바다의 뼛조각을 수습한다”고 하거나 소금을 “투명한 결정으로 말라 핀 꽃”으로 묘사한다. 묘사의 절정이다. 뿐만 아니라 “장곡사 나무 물고기/ 몇 백 년을 버텼는지/ 머리에서 꼬리까지 하얗게 세었다”(「목어의 울음」>)거나 “대웅전 뒤란 돌담에/ 간절히 손바닥을 대자/ 물에서 산으로 거슬러 올라와/ 나무가 된 물고기가”(「소리의 풍경」) 운다는 비유적 묘사가 일품인 시들을 면면이 만날 수 있다.
최병근은 시에서 어머니와 아버지, 누님과 이모 등 가족과 친인척을 자주 호출한다. 가장 많이 시에 불려나온 어머니의 “표류하는 육신”은 거실 한편에 있는 “낡은 목선”이며, “나비바람에 날리는 쭉정이처럼/ 키질에 밀려 가벼워진 육신”이고, 양 손에 주름진 마디마디 실핏줄에 “강물의 시간을 품고 있”는 모래 언덕이다. 아버지는 “횃대에 오르지 못한” 수탉에 비유하고, 누님은 푸른 잎이 매달린 늘씬하고 싱싱한 오월의 미루나무로 비유한다.
3.
우리는 최병근의 시집에서 많은 수의 시들이 불교를 제재로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따뜻한 공양」 「목어의 물음」 「촛불」 「향」 「난전의 탑」 「직지사 금강송」 「극락」 「소리의 풍경」 「침묵하는 보시」 등의 시들이 그렇다. 시장 버스정류장 모퉁이 과일가게에서 ‘과일탑’을, 직지사 금강송에서 ‘금강의 얼굴’을 발견하는 그는 낯설지 않은 비유이긴 하지만, 자신의 몸을 태워 불을 밝히다 아무 자취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촛불의 현상을 자연스럽게 “성스러운 해탈”로 비유하고 있다.
제 한 몸 기꺼이 태워가는
저 찬연한 불꽃
그늘진 세상에 한줄기 빛을 던지는
무량한 춤사위다
제 몸을 낮추며 떨군
촛농 한 방울
자취 없이 사라진
저 성스러운 해탈
- 「촛불」 전문
장맛비 추적추적 내리던 날
울타리에 동부콩을 심었다
어머니가 내 나이였을 때쯤
내 젖은 마음 달래주시려
자주 해주시던 밀가루 빵
어느새 내가 그 나이가 되어
동부콩 밀가루 빵을 먹는 날
내가 벗어놓은 신발 속에
긴급히 대피한 청개구리 한 마리
요란하게 염불하고 있다
- 「극락」 전문
시 「촛불」은 의인화된 촛불이 자신의 몸을 태워 찬연한 불꽃을 이루고, 불꽃은 그늘진 세상에 빛을 던지는 “무량한 춤사위”와 같다. 촛불은 불이 사를수록 타게 되어 키가 낮아지며, 결국에는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 그것이 불교의 해탈과 다를 바 없다. 어두운 세상에 빛을 남기려고 타들어가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성스러운 행실은, 번뇌를 태워 번뇌 자체를 남기지 않는 촛불의 성질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시 「극락」은 장맛비가 오는 날이면 어머니가 자주 만들어 주시던 동부콩 밀가루 빵을, 화자가 나이 들어서 장맛비 오는 날 동부콩 밀가루 빵을 먹는 상황이다. 시인은 화자가 과거 어머니와 함께 했던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느끼는 심리의 지극한 마음상태를 진술하고 있다. 어머니는 화자가 어렸을 때 비가 오면 어린 마음이지만 자신의 젖은 마음을 동부콩 빵을 통해 달래주셨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이미 어머니 나이가 된 화자 자신, 다시 동부콩 밀가루 빵을 먹으면서, 다시 젖은 마음을 달래는 기억을 형상하고 있다.
과거 유년의 마음과 현재 중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심리적 정황이 여여 하니 이것이 극락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런데 화자가 벗어놓은 신발 속에 청개구리가 비를 피해 와서 요란하게 염불을 하고 있다니? 청개구리는 어머니의 환생일지, 아니면 어린 시절의 화자가 청개구리로 현신하여 성인이 된 화자 앞에 나타난 것인가? 아니면 아무런 비유나 상징이 없는 단순한 사건의 묘사인가? 아마 장맛비와 동부콩 빵과 청개구리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일 것이다.
시 「침묵하는 보시」에서는 상수리나무가 가을에 상수리 열매를 쏟아낸 후, 청설모와 다람쥐가 신이 나서 열매를 주워 모으고 있다. 청설모와 다람쥐의 모습을 상수리나무가 그윽한 눈길로 굽어보면서 좋아하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보시의 전형을 자연의 현상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시 「따뜻한 공양」은 한 때 뜨겁게 달아올랐던 밥솥이 고물상 한쪽 구석에 버려져 있는데, 그것을 ‘입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4.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일상을 단순하고 쉽게, 그러면서 의미 있게 구성하는 최병근의 시에서 우리는 문명비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런 시들은 상대적으로 서사성이 강한데, 이런 서사의 행간 아니면 다소 직접적인 언술로 시 속에 의미를 숨기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한다. 시 「굴삭기의 포크」 「모기 견인차」 「황홀한 죽음」 「세탁소 아저씨」 등의 시들이 그렇다. 주로 이들 시의 주제는 기계에 밀려나는 인간의 이야기를 하려는 데 있다.
옷 수선도 잘하는 친절한 세탁소 김씨
얼룩진 옷 하나 둘 헹구고 지우다
숨겨진 근심의 흔적은 지우지 못했다
얼마 전 생겨난 24시 코인빨래방
무인 자판기가 공짜로 커피도 주고
동네 여인들이 숨겨 놓은
감정의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는 빨래터
처자식 학비와 생활비에 손목이 저리도록
구겨진 행적을 다림질하는 날
주름진 이맛살이 서러운지
스팀다리미가 하얗게 운다
배배 꼬인 옷걸이 너머 아슴아슴 이름표
꼬여 있는 옷걸이에 비닐을 씌우고
주름진 시간을 곱게 펴려는 듯
허리가 휘도록 주름을 잡고 있다
- 「세탁소 아저씨」 전문
위 시 「세탁소 아저씨」 주인공은 기계화에, 자동화 밀려 세탁소가 잘 되지 않으면서 “근심의 흔적을” 드리우고 있다. 이제는 옷 수선을 잘하고 친절한 것만으로는 사업이 되지 않는다. 전자정보기술이 발전하면서 산업의 모든 부문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화로 자동화와 비대면화가 상당이 이루어진 상황에서는 이전의 수공업적 아날로그적 노동은 빛이 바래고 점점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 이 시의 소재가 된 세탁소사업조차도 그렇다. 24시간 코인빨래방이 생겨나면서 주인공인 세탁소 아저씨의 생계는 걱정이 태산이다.
기계화에 자동화에 적응을 못해 기울어가는 세탁소. 사업의 성패와 무관하게 주인공은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되고 학비를 내야한다. 그래서 얼룩진 옷은 헹구고 손목이 저리도록 구겨진 옷을 다림질해야 한다. 이마에 주름진 나이가 되도록 오랫동안 해온 세탁업, 그러나 자동화에 밀려나야 하는 입장이어서 서러울 뿐이다. 결국 시인은 스팀다리미가 주인공을 대신해 하얗게 우는 것으로 감정을 객관화 한다.
현대 기계와 속도에 밀리고 받치고 죽음에 이르는 것은 사람뿐만 아니다. 하루살이 등 미물들도 몸이 부서진다. 시인은 이를 「황홀한 죽음」으로 형상한다. 고속도로에서 하루살이들은 하루도 다 채우지 못하고 고속으로 달리는 차량에 집단으로 달려들어 죽는다. 화자는 차창에 부딪혀 죽은 미물들의 흔적이 “다닥다닥 박힌 속도의 무늬”로 남아있다고 한다. 시 「모기 견인차」에서는 교통사고를 당한 차량을 기다리며 모여 있는 견인차들을 “먹잇감을 찾아/ 늦은 밤 교각 아래 웅크린 모기떼들”로 비유하고 있다.
「굴삭기의 포크」는 단단하게 굳어있는 시멘트를 깨는 무지막지한 기계의 폭력을 형상하고 있다. 굴삭기는 “먼지바람 부는 벼랑에서도/ 무엇이든지 먹어치울 수 있”는 막강한 폭력의 비유이다. 굴삭기는 “진화된 이빨을 이리저리 휘젓는”데, 자기의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대가리를 꽝꽝 박으며/ 틀니 이빨을 갈아 끼우고 드르렁 거린다// 야금야금 포악스러운 이빨을 세워/ 긁고 할퀴고 뭉개어 버리며/ 철근콘크리트 만찬을 즐긴다”고 진술한다. 문명의 포악성을 고발하고 있다.
5.
시에서 웃음은 우리가 잃어버린 주요한 진술방식 가운데 하나다. 최병근의 시는 재미있다. 현재 우리 시가 놓치고 있는 재미라는 부분을 그의 시편을 읽어가면서 틈틈이 발굴해 내는 재미가 여간 아니다. 문장이 곧 그 사람이라는 옛말을 떠 올리면, 아마 그의 성품 자체, 말 품새 자체가 재미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를 테면 「내 친구 이발사」 「스카이 댄서」 「짝짓기 비행」 「미꾸라지의 배후」 「수건의 배후」 같은 시의 유형들이다.
빨강 파랑 흰색 물감
빙글빙글 돌아가는 삼색 등 아래
이발사라 부르지 말고
예술사라 부르라던 내 친구
의자에 앉은 모델 형체를 잠시 살피다
바리바리 깡으로 불사르는 예술혼
직감적인 선의 흐름을 따라가며
짱구인 사람도 평평한 구도를 잡아 깎는다
때론 세파에 탈색된 머리카락에
아름다운 색조로 덧칠도 하고
침침하고 더부룩한 며늘 찾아
밝고 어둡게 명암을 살려 붓질을 한다
투블럭 기법이나 가르마 기법으로
별 초승달 등 다양한 문양을 새긴다
입점 작가 미용사의 하찮은 미소에 밀려
늘 가난한 조형예술사 내 친구
- 「내 친구 이발사」 전문
시 「내 친구 이발사」는 1연에서 이발사인 시의 주인공이 자신을 이발사가 아니라 예술사라고 불러달라는 것에서, 일의 성격상 거리가 먼 이발사와 예술사의 거리를 가깝게 충돌시키면서 웃음을 기대하게 한다. 의자에 앉은 손님은 모델이고 이발소의 주요 작업도구인 바리깡은 예술혼을 불사르는 붓 또는 도구로 비유된다. “짱구인 사람도 평평한 구도를 잡아 깎는다”는 이발 작업에 대한 묘사, 머리에 색조를 넣는 작업을 화가의 붓질로 비유하는 진술이 재미있다.
송풍기를 통해 바람으로 간판을 세우는 풍선광고, 에어광고 간판을 의인화한 「스카이 댄서」도 웃음을 준다. 시인은 신장개업한 가게 앞에 세워놓은 여성모양의 풍선광고 간판을 “머리 허파 쓸개 오장육부에/ 바람기만 가득한” 여자로 진술한다. ‘바람’이라는 동음이의어를 묘하게 미끄러뜨리면서 의미를 생성시킨다. 또 “아랫도리에 바람을 올려주면/ 언제라도 두 팔 번쩍 들고 일어서서/ 유연하게 관절을 꺾는 거리의 춤꾼이”라는 묘사를 통해 독자에게 미묘한 어감과 선정적 느낌을 준다. 화자의 말대로 바람으로 서 있는 광고판은 바람이 뼈다. 송풍기를 통해 바람이 들어가고 빠지면서 움직이는 모습이 허풍허풍 속살을 더듬는 것 같기도 하고 쿨럭쿨럭 공명을 일으키며 가라앉기도 한다.
「스카이 댄서」에서 보여주듯, 사람의 관심과 재미를 일으키는 소재 가운데 하나가 육체적, 성적 담화이다. 시 「짝짓기 비행」 같은 경우다. 곁눈과 홑눈을 수천 개 가진 잠자리가 두 눈을 가지고 있는 화자에게 신성한 행동, 즉 격렬한 짝짓기 하는 것을 들킨 것이다. 목백일홍 그늘에서 우는 매미는 “한여름 밤낮으로 구애하다/ 나무 아래로 툭 떨어져 나뒹”(「매미 기도원」)군다. 「수건의 배후」는 날짜가 찍혀있는 개업이나 회사 창립기념일, 칠순잔치들에서 나누어 주는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으면서 저마다의 이력을 추억하고 기억하는 시다.
「미꾸라지의 배후」는 주변 물을 흐리게 해서 자신을 위장하고 요리조리 잘 피하는, 처세술이 미꾸라지 같은 사람을 미꾸라지의 생물학적 특성에 비유하고 있다. 화자는 이런 처세술을 가진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비난하거나 복수하지 않는다. 시를 통해 유연한 방식으로 복수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솥에 두부와 미꾸라지를 집어넣고 끓이는 추어두부뚝배기 조리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6.
시집에 한정된 시들만 가지고 시인의 시세계와 방법을 유형화해서 살펴보았다. 최병근의 시집에 출현하는 대부분의 시들이 투명하고 맑은 심상을 유지하고 있어 독자의 마음을 청아하게 한다. 사물과 사건을 통해 인생의 비의를 제시하기도 하고, 시적 대상에서 심상을 건져 올려 아름답게 보여주거나 은유하기도 한다. 특히 바다를 제재로 한 시편들의 심상이 빛난다.
어머니를 반복하여 호출한 시들에서는 독자들이 늙어가는 인생의 면모를 들여다보고 공감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최병근의 시에 불교 제재 시들이 제법 많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사물과 사건을 불심으로 바라보는 시인은 목어처럼 풍경소리처럼 맑은 마음을 사물에 투영시키고 있다. 기술문명에 밀려나는 사람을 안타깝게 묘사하는 시들과 웃음을 발휘하는 시편 속에서는 재미와 웃음을 통해 세상을 긍정하고 낙천적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심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최병근은 사물에 대한 명징한 묘사를 통해 맑고 투명한 서정의 세계를 열어주는 우리 시단에서 보기 드문 시인이다. 이 시집은 좋은 토양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듯 내면의 세계가 아름다울 것만 같은, 그런 시인이 피워 올린 한편 한편의 “청아하고 맑은 풍경” 소리와 같은 시의 꽃다발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집을 가슴에 안고 맑고 투명한 서정의 풍경소리를 들어보길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