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44: 16-34
유다가 가로되
모세는 유다가 그 형제들을 대표하여 자기들이 마땅히 요셉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할 때에 요셉은 은 잔이 발견된 자만 자기 종이 되리라고 한 사실과(16-17) 유다가 사연을 간절히 진술한 사실(18-34)을 기록합니다.
1. 본문 16절은 "유다가 가로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 입니다.
1) 야곱의 아들들은 자신들을 낮추어서 스스로 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모두 요셉에게 종이 되는 신분과 위치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배다른 베냐민에 경우는 그 처벌을 경감하여 주기를 간청합니다.
이것은 오직 간청일 뿐입니다. 이것은 처음에 그들이 동의하였던 것처럼 그가 처벌받게 되지는 않기를 마음 합하여 빌고 있는 것입니다.
2) 특별히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셨으니" 란 그들을 대표한 유다의 말입니다.
그들이 오래 전에 요셉에게 했던 악한 행동(37:18-28)을 생각하고 하는 말입니다.
지금 되어진 딱한 일이 그들의 오래 전에 "범한" 죄악에 대한 보응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일종의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42:21).
요셉이 그들을 시험한 목적이 여기서 이루어졌습니다.
2. 본문 17절은 "요셉이 가로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나의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 입니다.
요셉이 만일 베냐민만을 불러 들이고 다른 형제들은 돌려보냈다고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는 죄악의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의도는 단지 자기 형제들의 마음을 떠보는 것이고 그 마음을 한번 시험해 보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형제들이 베냐민의 안전을 돌보지 않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예상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위험을 제거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맏형 노릇을 하는 유다로 하여금 그들의 성실성을 토로하게 하여 요셉의 마음을 누그러뜨렸을 뿐만 아니라 요셉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그만 눈물을 쏟고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만들었습니다.
3. 본문 18-34절은
"(18)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가로되 내 주여 청컨대 종으로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고하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옵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19) 이전에 내 주께서 종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아비가 있느냐 아우가 있느냐 하시기에
(20) 우리가 내 주께 고하되 우리에게 아비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 노년에 얻은 아들 소년 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 어미의 끼친 것은 그뿐이므로 그 아비가 그를 사랑하나이 다 하였더니
(21) 주께서 또 종들에게 이르시되 그를 내게로 데리고 내려와서 나로 그를 목도하게 하라 하시기로
(22) 우리가 내 주께 말씀하기를 그 아이는 아비를 떠나지 못할지니 떠나면 아비가 죽겠나이다
(23) 주께서 또 주의 종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 말째 아우가 너희와 함께 내려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기로
(24) 우리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로 도로 올라가서 내 주의 말씀을 그에게 고하였나이다
(25) 그 후에 우리 아비가 다시 가서 곡물을 조금 사오라 하시기로
(26) 우리가 이르되 우리가 내려갈 수 없나이다 우리 말째 아우가 함께 하면 내려가려니와 말째 아우가 우리와 함께 함이 아니면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음이니이다
(27) 주의 종 우리 아비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 으나
(28) 하나는 내게서 나간 고로 내가 말하기를 정녕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 지 못하거늘
(29) 너희가 이도 내게서 취하여 가려한즉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30)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 돌 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31) 아비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비의 흰머리 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32) 주의 종이 내 아비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 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를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33)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 께 도로 올려보내소서
(34)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 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입니다.
유다는 먼저 간절한 마음으로 자기들의 일에 대해서 탄원할 수 있는 기회를 구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우선 지루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전제하고서 양해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자기들의 탄원에 대해서 혹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있더라도 참고 들어주기를 먼저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요셉이 애굽에서 받은 큰 영예에 대하여 말함으로서 자기들이 무례한 도당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 후에 그는 그들이 어떤 과정을 겪어서 그의 아버지를 떠나 애굽에 올 수 있었던가를 상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은 두 가지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슬픈 소식을 자기들의 아버지에게 가지고 가면 이 소식은 그에게 치명적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가 베냐민을 아버지께 데리고 갈 것을 개인적으로 서약하고 온 것을 말합니다. 그들의 아버지의 슬픔을 감안하면 베냐민을 아버지께로 데리고 가지 않는 일은 자식된 도리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므로 자기가 대신 베냐민의 처벌을 받고 영원히 종된 신분으로 남아서 조국에 돌아가지 않는 편이 늙은 아버지께 슬픈 소식을 안겨 주고 절망감을 맛보게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것을 토로합니다.
이렇게 그는 동생 대신 자기를 내놓음으로 막내 동생을 구하려고 자기 성실성을 증명합니다 (하타)라고 하는 히브리 말은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하는 말도 되고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자리에 선다 하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주석가는 '내가 아버지에게 죄를 범하였다' 또는 '내가 고발당하였다'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가 나에게 속았다고 생각할 것이므로 나는 죄인이 되었다' 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마지막 의견이 가장 적절한 것 같습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자기에게 맡겨준 책임을 성실히 이행하지 못했다는 질책과 불명예를 스스로 감당해 내려고 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4. 이제 유다가 간청했던 내용을 다시 간추리고 말씀을 맺습니다.
1) 이 부분에서는 요셉이 베냐민만 그의 종이 되고 다른 사람들은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일이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그들이 아버지 야곱을 죽을 지경으로 빠뜨리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야곱이 일찍이 베냐민만은 애굽에 보내지 아니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라헬에게서 난 자식 요셉을 잃은 후에 베냐민을 또 다시 잃을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이제 극히 간절한 말로 요셉에게 모든 사연을 진술하였습니다.
그 말 끝에 마침내 요셉은 "방성대곡" 하게 됩니다(45:2).
그리고 자기가 요셉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실토하게 되었습니다(45:3).
2) 과연 그렇다면 "유다"의 언변이 어떠했기에 요셉이 그렇게도 감동을 받았을까?
우리는 이제 유다의 언변에서 그 원인을 찾아보기로 하십시다.
(1) 유다가 자기 부친 야곱의 애지중지하는 말째 아들 베냐민에 대하여 여러번 언급한 것이 요셉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습니다.
유다는 이 부분(18-34)에 있어서 스물 두 차례나 베냐민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그것은 "아우" "소년" "그" "말째 아우" "이" "아이"란 말 등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요셉은 자기 동복(同腹)동생 베냐민을 생각만 해도 눈물 날 지경이었습니다.
(2) 유다가 자기 부친의 가련한 정지를 여러 차례 말하였으니 그것이 역시 요셉에게 비감(悲感)을 일으켰습니다.
예를 들면 "그 아이는 아비를 떠나지 못할지니 떠나면 아비가 죽겠나이다"(22절)
"아비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31절) 란 말들과 같은 것입니다.
(3) 유다의 눈물겨운 효도가 요셉의 마음을 극히 부드럽게 만들었습니다.
유다는 자기 부친에게 염려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그 부친의 실정을 일일이 말하였으며 또한 자기가 친히 그 아이를 대신하여 애굽에 머물겠다고 하였습니다(34절).
(4) 유다는 요셉의 형인데도 불구하고 피차간 서로 알지 못하는 실정 하에서 요셉 앞에서 극도로 낮아져 요셉을 "주"라고 하였습니다(18-19).
이와 같은 겸손은 하나님을 아는 요셉에게 비감을 일으킬 만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5) 요셉은 유다의 말 가운데서 자기 자신에 대한 관설을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그의 형은 죽고"(20절)
"주의 종 우리 아비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하는 내게서 나간고로 내가 말하기를 정녕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27-28) 이라고 한 말들입니다.
이런 말은 요셉으로 일찍이 당하였던 비극 때문에 역시 비감한 생각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6) 또 한가지 이 점에서 생각해야 될 것을 유다의 언변이 극도로 애처로운 성격을 띤 사실입니다.
그의 말은 마디마디 진실과 열정과 자세함과 또는 사랑으로 뜨거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부친과 동생을 사랑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물로 제공하였습니다.
(7)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유다와 요셉 사이에 함께 하시고 같은 하나님의 뜻을 품게 하시고 같은 교감을 갖게 하시고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시는데 있습니다. 요셉과 유다를 함께 쓰시는데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교회를 엮어 내시려는 하나님의 안목과 그분의 의지에 있습니다.
우리 생각은 늘 여기까지 발전해야만 합니다.
이와 같은 언변은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사용해야 할 적절한 말씀입니다.
유다의 언변은 실상 육적인 가족적 인연에 불타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 가족들과 관계는 가지면서도 역시 하나님과 육신의 아버지를 어느 정도 아는 자로서 의리(義理)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베냐민과 그는 이복(異腹)형제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베냐민을 위하여 대신 희생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부친이 요셉을 잃고 베냐민을 다른 아들들보다 뜨겁게 사랑함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 부친 심정을 받들었습니다.
자식들이 부모 마음을 알아 드리지 못하고 행할 때에 그 부모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부모는 자식들을 꼭 같이 사랑하는데 그들이 서로 싸우면 부모 마음이 괴롭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자식들은 서로 사랑합니다.
유다는 그의 아버지가 베냐민을 특별히 사랑하는 줄 알기 때문에 베냐민을 아꼈습니다.
이것은 의리(義理)에 속한 행동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대하여 이와 같이 행해야 됩니다.
이런 점에서 야곱의 가정은 실상 교회의 표상(表象)이라고 할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