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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재 목사
오늘은 교회력으로 마지막 주일입니다. 그래서 ‘영원주일’ 혹은 ‘왕이신 그리스도의 날’이라고도 합니다. 다음 주일부터 대림절(待臨節)이 시작되면서 교회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영원주일을 맞이하면서 역사의 처음과 끝이 되시는 영원하신 분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단순한 신앙고백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그 신앙이 갖는 깊이가 무엇인지를 고찰하면서 나 자신에게만 집중되었던 신앙의 눈을 들어 하느님이 이룩해 가시는 역사를 보며, 그 역사 속에서 오늘의 의미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처음과 나중 되신 주님
오늘 읽어 드린 이사야서 44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왕이신 주, 이스라엘의 속량자이신 만군의 주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시작이요, 마감이다. 나밖에 다른 신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 1장 8절에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하고 말씀하십니다”고 하였고, 17절에는 요한이 본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살아 있는 자다. 나는 한 번은 죽었으나, 보아라, 영원무궁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하셨고, 계시록 22장 13절에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이며, 처음과 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희랍어의 알파벳의 처음 글자와 맨 끝 글자입니다.
그러므로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할 때 그것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을 의미합니다.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라고 할 때, 그것은 어떤 일의 과정이나 그 기간의 전체적인 범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인의 사고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라고 선언하실 때, 멀리 있는 시작과 멀리 떨어진 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시작하셨고, 그 역사를 주장하시며 그 역사를 끝맺는 분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라는 표현과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를 통하여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는 로마서 11장 36절의 말씀을 통해서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역사의 근원이요, 종국(終局)이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사물들에 대해 시초와 종말을 부여하시는 분입니다.
성부 하느님께만이 아니라 성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성경은 같은 공식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면서 만물이 그를 통하여 생겨나게 하셨습니다. 말씀이신 그가 친히 육신을 입어 이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그 역사를 새롭게 하신 것입니다. 제2의 창조를 이룩하신 것입니다. 만물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는 지금 하느님 보좌 우편에 계시며 이제 다시 이 역사를 심판하시러 오실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시며, 시작과 끝이십니다. 그는 모든 역사를 시작하게 하셨으며, 그 역사를 새롭게 하셨고 그 역사의 종말을 가져오실 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알파와 오메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신앙을 고백할 때 그것이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역사의 주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첫째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의 주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역사란 말이 한 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성경은 그 어느 책보다도 역사와 깊이 관련된 책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역사의 시작과 끝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 전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이 역사의 주이심을 의미합니다. 그는 이 역사를 시작하게 하셨으며, 또한 인간의 죄악으로 이 역사가 멸망하게 되었을 때, 그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생명의 역사가 되게 하셨으며, 그리고 이 역사를 심판하심으로 종결짓고 영원으로 연결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에베소서 1장 말씀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이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 역사하셔서 그분을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셔서,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엡 1:20-22“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의 주이심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역사에 대한 관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역사 의식을 가졌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곧 그가 이룩해 가시는 역사에 대한 인식과 믿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역사 의식이란 무엇입니까?
역사의식이란 이 역사에 시작이 있으며, 그 목표가 있음을 알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고대 근동의 이스라엘 주변의 사람들은 전혀 이런 역사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시의 순환 속에서 거기에 순응하여 살뿐이지, 역사란 개념을 갖지 못했으며, 따라서 미래에 이루어질 어떤 목표에 대한 생각 같은 것이 없었으며, 과거와 미래와 차단된 오늘의 삶에 만족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은 역사에 대한 개념을 가졌고, 그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었으며, 그가 그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 역사에 목표를 두셨음을 믿었던 것입니다. 역사의식을 가졌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역사 의식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역사는 우연히 시작되어서 인간이 발전시킨 것이요, 역사의 미래도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과 그 행위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 역사의 밑바닥에 일관성 있게 흐르고 있는 역사의 원리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나온 과거의 역사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며, 미래의 역사에 대한 꿈을 지니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날과 같이 모든 것이 확실치 않은 불확실성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미래는 참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과거에 일어난 역사적 교훈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오늘에만 집착하면서 도덕적인 삶을 포기하고, 방종하고 무절제한 삶을 추구해 가는 것입니다. 역사 의식이 없는 지도자들은 과거의 잘못을 반성할 줄 모르며, 미래에 대하여 책임지려 하지 않습니다. 당장 눈앞에 이익만을 추구할 뿐이지 그것이 미래에 끼칠 영향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 의식의 결핍은 오늘 이 세계를 타락하게 만들고 이 사회를 어둡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이런 세계 속에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역사의 시작과 진행과 끝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으로 의미를 가지며, 새롭게 되고, 또 선하게 종결될 것을 바라보고 믿는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은 바로 이 역사의 일관성을 믿는 것입니다. 과거와 미래와 차단된 오늘의 역사가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되어진 것임을 알고 거기에 주어진 원리를 추구하고 그 원리를 따라 미래를 소망하는 생활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 속에 기록된 하느님의 뜻과 그 섭리를 살피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중시하고 그 말씀을 계속 연구하여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일관된 하느님의 뜻을 과거 역사 속에서 찾아내어 오늘의 우리의 삶에 적용해 나갈 때 우리의 삶은 결코 잘못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역사 속에 오셔서 이룩하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속의 원리를 부지런히 배우고 믿고 또 실천하려 합니다. 그것은 이 역사에 완전한 전환을 가져온 새로운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분명한 하느님의 뜻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역사의 의미를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나라를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 역사는 바로 하느님 나라의 역사로 발전할 것이며, 이 역사의 끝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완성될 것임을 우리에게 밝혀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미래에 대한 소망을 확고하게 가지고 그 미래를 오늘에 준비하는 생활을 이룩해 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 의식을 가진 우리의 믿음의 생활입니다.
이런 역사의식을 갖지 못한 믿음은 진정한 믿음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복적인 신앙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하느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한 신앙으로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며,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역사의식이 없으면 하느님을 나의 행복에 이용하는 자가 됩니다. 하느님은 나를 복주는 분으로만 생각하지 내가 어떻게 하느님을 예배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제2세기는 이런 역사의식을 갖는 신앙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게 복 주는 자로만 보지 말고, 역사의 시작이신 ‘알파’요, 그 모든 역사를 새롭게 하시며 종결하시는 ‘오메가’로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떠야 하겠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보다 더 폭 넓은 은총의 세계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주 되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 그것은 곧 그가 이 역사의 생명의 주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살아 있는 자다. 나는 한 번은 죽었으나, 보아라, 영원무궁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 역사의 모든 죄와 죽음을 없애버리시고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받으셔서 죽음의 문을 열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역사를 덮어 씌웠던 죽음의 굴레를 벗기셨습니다. 그리고 이 역사에 새로운 생명의 바람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역사가 새롭게 재창조된 것입니다. 이 역사를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의 종말은 멸망이 아니오 구원이요, 죽음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오늘의 이 역사의 바탕은 사랑과 생명입니다. 오늘 이 역사의 원리는 빛과 생명입니다. 이제는 어떤 세력도 이러한 생명의 역사를 뒤엎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생명의 역사의 물길을 아무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알파와 오메가로 고백할 때 그 속에서 이루어진 이런 생명의 역사를 믿는 것입니다.
처음과 나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우리를 향하여 그는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려워 말라는 말씀 속에서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요한이 밧모섬에서 환상 가운데 뵈온 예수님의 모습은 빛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요한이 그를 뵈옵는 순간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오른손을 얹으시고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옛날에는 누구나 거룩하신 하느님을 뵈올 때 죽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느님을 직접 뵈옵는 일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깨끗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피로 우리를 성결케 하셨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하느님을 바라보며 직접 기도하고, 그의 영광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두려워 말라는 말씀은 이 시대를 지배하는 어떤 세력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시대는 박해가 있던 때입니다. 요한 자신은 밧모섬에 유배되어서 이 편지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박해받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용기를 주고 신앙을 지켜 박해를 극복해 가도록 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습니다. 바로 이 요한계시록에 네 번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 되신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주이시며, 이 역사에 새 생명을 불어넣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바라봄으로 오늘의 환난과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역사의 시작과 끝이 있음을 믿는다면 고난 당하는 오늘의 역사를 두려워 할 까닭이 없다는 것입니다. 멸망의 역사를 생명의 역사로 바꾸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어떤 고난의 역사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음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맡길 때,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모든 환난과 박해와 시험들은 능히 극복되며, 이 세상의 어떤 세력도 그들을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을 뒤덮었던 악의 세력은 반드시 망하고 여기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확신 속에서 바라 볼 때 우리는 사실 아무것도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고백할 때, 우리는 오늘의 우리의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영광과 승리의 날을 바라보며 나가겠다는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급변하며 요동치는 불안한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 없으시며, 이 역사의 처음과 나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안에만 변함 없
는 생명이 숨쉬고 있으며,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사랑이 깃들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역사,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롭게 되고 마침내 완성되는 역사를 바라봄으로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의 경륜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더욱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향한 우리의 신앙의 전진을 계속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 어떤 환난이나 시험이 닥쳐도 이런 역사 의식만 가진다면 좌절하지 아니하고 더욱 담대하게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알파와 오메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가 펼쳐 보이시는 생명의 역사 속에서 기쁨으로 오늘의 고난을 헤쳐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