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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63
아쉬움을 남긴 유다 지파 / 김진철 목사
어제 예고해드린 대로 앞으로 며칠간은 요단강 서편에서 땅을 분배하는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 관한 말씀들이 계속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본문들로부터 많은 지명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마 때로는 우리의 입으로 발음하기도 힘든 지명들도 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간을 통해서는 그 모든 지명들을 찾아보거나 그곳이 어디인지를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제가 부탁드린 대로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은 성서지도를 펼쳐놓고 여호수아서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각 지파별로 차지하게 된 땅의 경계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요단강 서쪽에서는 처음으로 땅을 분배받는 지파를 만나게 됩니다. 본문 1절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합니다.
"유다 자손의 지파가 그 가족대로 제비 뽑은 땅의 극남단은 에돔 지경에 이르고 또 남으로 신 광야까지라"
우리가 별 관심 없이 이 본문을 보면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말씀으로 생각되기 쉽습니다. 단지 요단강 서편에서 최초로 땅 분배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고요, 그 영광이 유다 지파에게로 돌아갔다는 사실만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유대의 전통으로 볼 때 이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 전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자의 권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민족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점은 우리 나라의 문화와 매우 유사합니다. 우리 나라 역시 '장남'에게 얼마나 많은 특권을 부여하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사실은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쌍둥이지만 태어난 순서에 따라 에서가 장남이요, 야곱은 차남입니다. 그런데 차남인 야곱은 어려서부터 '장자의 권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야곱에 비한다면 에서는 이미 자신이 장남이라는 사실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권리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 밖에 나갔다 들어온 에서는 매우 시장했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을 찾고 있는데 야곱이 팥죽 한 그릇을 들고 등장합니다. 그리고는 이 팥죽을 줄 테니 형은 나에게 장자의 축복을 팔라고 주문합니다. 이때 에서가 어떻게 합니까? 그저 장난치듯 장자의 축복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립니다. 이러한 일은 저들이 장성했을 때에 큰 사건으로 확대됩니다. 아버지 이삭이 장자의 축복을 동생인 야곱에게 하고 맙니다. 그후의 사건들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듯 '장자의 권리'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이러한 사실을 뒤집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 지파는 야곱의 네 번째 아들에 속하는 지파입니다. 즉 장자가 아니라는 말씀이에요. 그런데 요단강 서편에서 역사적인 땅 분배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장자를 재치고 네 번째 아들이 제일 먼저 땅을 분배받는 영광을 누리고 있습니다. 어떠한 연유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이것이 이 새벽 우리의 첫 번째 관심입니다. 우리가 그 이유를 찾아보려면 창세기 49장으로 가봐야 합니다. 창세기 49장 3절부터 5절의 말씀입니다(p. 78). 창세기 49장은 야곱이 임종하기 전에 열 두명의 자녀들에게 축복하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 앞머리에 속하는 3절부터 5절 말씀을 함께 봉독합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여기서 우리는 유다 앞에 있는 야곱의 세 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왜 그들이 장자의 권리를 유다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었는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첫 아들 르우벤을 보세요. 야곱은 분명 르우벤을 가리켜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탁월한 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르우벤에게는 결정적인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첩인 빌하와 동침한 죄입니다. 야곱은 이것을 언급하면서 이제는 더 이상 르우벤이 탁월한 자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르우벤은 장자의 권리, 장자의 축복을 잃어버린 자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권리는 당시의 풍습대로 하면 이제 둘째인 시므온의 몫이 됩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말씀을 보세요. 둘째인 시므온과 셋째인 레위는 '잔해하는 기계'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34장에 기록된 세겜에서의 사건을 가리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성의 거민들을 속임수를 써서 몰살시키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렇게 첫째부터 셋째 아들까지 모두가 장자의 축복을 받을 만한 자격을 상실했습니다. 그 결과 장자의 축복이 누구에게 부여되었습니까? 바로 유다입니다. 네 번째 아들인 유다가 형들을 대신해서 장자의 권리를 소유하는 영예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역시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릴 기회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복을 받아 누리는 삶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복에 대한 기대는 사람들에게 늘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그와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인 여호수아 15장 13절 이하를 보세요. 우리는 거기서 어제 말씀에서 만났던 갈렙을 다시금 만날 수 있습니다. 어제 우리가 상고한 대로 갈렙은 헤브론을 향한 자신의 비전을 이루었습니다. 그후 갈렙은 '드빌'로 올라갔습니다. 이때 갈렙은 드빌을 쳐서 취하는 자를 자신의 사위로 삼을 것을 약속합니다. 그 결과 옷니엘이 드빌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이로 인해 옷니엘이 갈렙의 딸 악사를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이때 악사가 어떻게 합니까? 본문 18절과 19절 말씀입니다.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비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그에게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가로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 땅으로 보내 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 샘과 아랫 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출가하게 된 악사가 친정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아버지인 갈렙에게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복'입니다. 여기서 악사 역시 '복에 대한 기대'를 가진 인생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역시 우리 인생들에게 이러한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복을 누리며 사는 진정한 행복자들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6장 14절 말씀은 이러한 하나님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분명 복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복의 내용은 요셉에게 복을 약속하시는 창세기 49장 25절과 26절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함께 봉독합니다.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할렐루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복의 목록입니다. 단지 이 땅에 속한 것만이 아닙니다. 단지 잘먹고 잘사는 것만이 복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잘되고 형통하는 것도 복은 복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우선적으로 받아야할 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복'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확고부동한 관계가 우선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복'입니다. 이 복이 있은 다음에 땅에 속한 복입니다. 이 순서를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순서가 뒤바뀌는 일은 결코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무튼 이와 같은 말씀들을 종합해 볼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복을 항상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기대는 르우벤에게도, 시므온에게도, 레위에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들을 보세요. 저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려고 하셨지만 저들은 그 복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에게는 이러한 안타까움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들여다보시면서 저 르우벤과 시므온, 레위 때문에 가지셨던 안타까움이 결코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받아 누리며, 또한 이 복들을 나누어주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응답하실 것을 믿습니다. 역대상 4장 10절에서 우리는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보세요. 우리는 여기서 '야베스'라고 하는 인물의 간절한 기도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야베스는 자신의 인생 길에 다른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선행되어야 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주실 복에 복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할렐루야! 이 사실을 기억하세요. 그리고 이 새벽에 꼭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야베스의 심정으로 기도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하는 것을 허락하시는" 체험과, 그것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오늘 유다 지파는 첫 번째로 가나안 땅을 분배받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때 유다 지파가 차지하게 된 땅은 크게 남부지역의 땅과 지중해에 있는 평지, 유다 산지와 유다 광야 등 네 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집니다. 네 개 지역내에 120여 개의 성읍과 그 주변 촌락들이 유다 지파의 땅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렇게 본문이 유다 지파의 성읍들을 일일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장자 지파의 자격으로 차지한 유다 지파의 기업이 얼마나 광활하고 비옥했는지를 증거하기 위함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니 유다 지파야 말로 복중의 복을 받은 지파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무엇인가 남달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러한 하나님의 기대와 우리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63절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합니다.
"예루살렘 거민 여부스 사람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오늘날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하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오늘의 말씀제목을 기억하게 됩니다. '아쉬움을 남긴 유다 지파' 이것이 오늘의 말씀제목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유다 지파가 누리게 된 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보았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는 유다 지파는 분명 남다른 무엇인가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남다른 것은 둘째치고 처음으로 가나안 땅을 분배받는 영광을 누리고도 한 가지 아쉬움을 남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가나안 땅의 거민들을 완전히 몰아내는 것임을 배워왔습니다. 그 이유도 말씀드렸지요? 그들은 매우 열성적인 우상숭배자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모세 시대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그 땅의 거민들을 반드시 내쫓아야 할 것을 역설하셨습니다. 따라서 가나안 땅 분배의 역사에서 선봉에 선 유다 지파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남다른 사명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에게 허락된 지경에서 가나안 땅의 거민들을 완전히 쫓아내는 일입니다. 이것이 유다 지파에게 맡겨진 으뜸 된 사명입니다. 그런데 이 일에서 유다 지파는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예루살렘의 거민인 여부스 사람들을 쫓아내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할 저들이 미적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후에 유다 지파에게 하나의 올무처럼 남았습니다. 본문에서도 '오늘까지', 그러니까 여호수아서가 기록될 때까지 여부스 족속들이 예루살렘의 안방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일은 다윗 시대에 가서야 해결됩니다. 사무엘하 5장 6절 이하에 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당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해서 머물렀던 수도는 '헤브론'이었습니다.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동안 국정을 보던 다윗은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웁니다. 이때 다윗이 천도하기로 결정한 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그 과정이 사무엘하 5장 6절과 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p. 470). 함께 봉독합니다.
"왕과 그 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거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이리로 들 어 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저희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더라"
다윗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은 시대는 주전 1,000년경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정복의 시대는 주전 1,400년대입니다. 그렇다면 무려 400년 동안 여부스 족속들은 유다 지파의 땅에서 제멋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쉬움을 남긴 유다 지파'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아쉬워하실 삶의 모습은 없습니까? 저는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혹 있으시다면 오늘 이 새벽이 그와 같은 삶의 모습을 과감히 내던지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주여, 우리 인생에 있어야 할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아쉬워하실 삶의 모습들이 물러가게 하옵소서." 이러한 우리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응답되는 이 새벽기도의 행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