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와 정약용◎
풍운지회(風雲之會) : 다산과 정조대왕의 만남을
구름과 바람의 만남이라고 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실학사상(實學思想)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강진 유배지에서 18년 동안 귀양살이 하면서
자기를 모함한 몇 사람만 불편한 얘기를 조금 했을 뿐 국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언급도 원망도 하지 않았고
평생을 나라 걱정 백성 걱정
관료들의 부패 척결에 500여 권의 저술을 통해
정치,행정,법학,경제,지리,의학,공학 등을 아우르며 철저한
실학사상을 펼친 실천 철학인이다.
대 저작을 집필하시고 75세에 생을 마치신 선생을 그리며 몇 자 적어봅니다.
성호 이익 선생의 유고집을 읽고 실학에 꿈을 키운 다산 정약용 선생
250주년을 맞이하여 유네스코 2012년에 세계기념 인물로 네 사람을
선정하였는데 한국 최초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등재됐습니다.
1)루소 2)헤르만헤세 3)드뷔시 4)다산 정약용
아직도 모르는 분이 있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선생의 탄생은
영조가 자식인 사도세자를 6월에 뒤주에 죽인 얼마 후 음력 6월 16일(양력 8월5)일에 아버지 하석 정재원(荷石 丁載遠)
어머니 해남 윤씨(海南 尹氏) 사이에서 출생했다. 어머니는 고산 윤선도 후손이다.
태어난 곳은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이다. 다산 정약용 나이 9세 때 어머니 해남윤씨
(海南 尹氏) 세상을 뜨고 말았다.
영조가 자식을 비참하게 죽인 현실을 보면서 관직을 내려놓고
너는 정치를 하지 마라 하고 농사나 지으라 하며 다산 아명을 귀농(歸農)이라고 지었습니다.
다산을 얘기하려면 정조를 얘기 안 할 수 없습니다.
조선시대에 전국에서 초시는 1,000명을 진사는 200명을 합격시켰는데
다산은 22세에 진사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갖추었지요.
초시만 합격하여도 대단한데 진사에 합격하면 가문에 영광이었습니다.
진사 합격자는 임금님께 인사를 드리는데 정조는 조선왕조에 최고의 대학자입니다. 다산 주관식 논문을 읽고 인재로 키워야 되겠다고 이미 생각을 하였습니다
정조와 처음 만남이 이루워젔지요. 딱 두 마디 너 이름이 무어냐? 네! 정약용입니다. 나이가 몇이냐? 22살입니다. 알았다.
이 첫 만남을 다산 기록에 풍운지회 (風雲之會) 구름과 바람의 만남이라고 하였다.
정조는 성균관 학생들에게 수시로 시험을 치렀는데
다산이 계속 일등을 하니 감탄하며 학생인 다산을 수시로 불러 국가정책에 대해
물어보고 하였는데 다산이 올린 정책 여러 개가 국정에 반영 되기도 하였다.
6년의 성균관 공부를 마치고 28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들어서면서 첫날 지은 詩가 있는데 공직자로서 공렴(公廉)이란 두 글자를 마음에 다짐을 하였습니다. 이 다짐은 평생 동안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33세에 암행어사로 경기북부 4개 고을을 암행 감찰하였는데 농촌 백성들의 황폐하고 비참한 생활과 관료들의 부패에 충격을 받고
이대로 두고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겠다 생각하며 결심을 합니다.
정조 아들 순조가 5살 되던 해 당시 30세인 다산에게
10년을 계획하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수원 화성 건축을 지시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설계를 하고 도르래 원리를 생각하며 "거중기"를 발명하여
11대를 투입 2년 4개월 만에 완공하니 정조가 감탄하였다.
그런데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이 너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10년만 더 살았어도 조선의 역사는 분명 바뀌었을 것이고 다산과 정조의
개혁 정책으로 유토피아 시대가 열리지 않았을까 사고(思考)해 본다.
다산의 유일한 배경인 정조가 서거하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며 노론이 정권을 집권하면서 생애 최대 위기를 맞는다. 신유사옥(辛酉邪獄) 천주교 탄압으로 40세에 유배형을 받는다.
1801년11월 하순 나주 율정점(栗亭店)에서 두 형제는 기약 없는 눈물의 생 이별을 한다.
둘째 형인 정약전은 흑산도 다산은 강진에 ... 강진에 도착한 다산은 먹지도 못하여 동문 밖 주막에 들려 주모한테 어려운 사정을 얘기하니 높은 양반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는 모르겠는데 죄가 미웁지 사람이 미웁겠소 하시면서
방이 하나 있는데 먹여주고 재워줄 테니 내 부탁을
들어줄래요 하니 말씀 해 보세요.
당신은 암행어사까지 하신 분이라 배움이 많을 것인데 우리 동네 아이들이
배우고 싶어도 선생님이 없어서 배울 수가 없소 공부를 가르쳐 주겠소?
다른 건 몰라도 그거라면 하겠소. 흔쾌히 허락하고 골방에서 생각한다.
그동안 정치한다고 책도 보지 못했는데 이제는 마음껏 책도 보고 글도 써야 되겠구나?
하늘이 내게 내린 좋은기회다 생각하며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
천 리 길을 가족과 헤어져 온 사람이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암행어사 시절 관료들의 부패에 고통받는 백성들의 황폐하고 비참한 현실을 보았고 강진 고을에도
홍안애명(鴻雁哀鳴) 의 슬픈 현실을 지켜 보면서 목민관들의 마음 자세가 이런 상태라면
나라가 망할 것이며 개혁을 하지 않으면 국가와 사회가 유지될 수 없음을 강조하며
어리고 순한 양들이 제 목소리를 다 낼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그리며
목민관이 지켜야 할 지침서 목민심서(牧民心書) 48권 16책 억울한 백성들이 없도록 하는
형옥에 관한 법정서 흠흠신서(欽欽新書) 30권 10책 정치 사회 경제 제도를 개혁하고
부국강병을 목표로 저술한 경세유표(經世遺表) 필사본 44권 15책 원래 제목은
방례초본(邦禮草本) "미완성작" 등등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고
모든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반드시 대안을
제시하여 실행하면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 하였다.
주자의 성리학적(性理學的) 해석과 관념의 문제점도 지적 실학적(實學的)으로
바꾸어 버리고 실천이 없는 철학과 사상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하였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보면 자식인 학연 학유 두 자식이
잘못될까 걱정하며 수없이 효제(孝悌)를 강조하고 우리 집안이 언젠가 폐족을 면하는
길은 책을 읽고 독서하는 것밖에 없다 하고 수없이 편지를 보낸다.
"짐승과 사람이 다른 점은 사람은 책을 읽을 줄 알고
짐승은 책을 읽을 줄 모른다" 강조도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벼슬을 했어도 재산이 없어 물려 줄 것이 없는데
야박하다고 서운해하지 마라. 내가 너희들에게 유산으로 부적 두 글자를 물려 줄 테니 항상 지니고 다녀라. 근검(勤儉) 이다.
이 두 글자는 평생토록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다. 그 후로 아버지 충고를 마음에 새겨 열심히 독서하여 둘째 아들 운포 정학유는 유명한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를 지었고 첫째 아들 정학연은 70세에 이르러 벼슬길에 오르면서 폐족을 면하고
청족(淸族) 으로 회복되었다. 고목에 꽃이 피었다.
손자 때는 도승지까지 벼슬을 하여 8대 옥당의 가문으로 이어졌다. 글을 쓰면서 느끼는 다산 선생의 감동적인 내용은 벼슬길에 들어서면서 첫날 공직자로써
마음 다짐한 공렴(公廉)을 평생 동안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고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자기를 모함한 몇 사람만 불편한 얘기를 조금 했을 뿐 국가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원망의 목소리는 내지 않고 어떻게 하면 나라가 잘 될까 걱정하며
"모든 과학의 원리는 수학에 근본이 있다" 하시며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교과서를 개편하여 백성들이 수학을 배워야 나라가 부흥된다고
주장하며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셨다.
- 받은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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