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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성적인 서정이 승화된 상생의 시학
- 오인태론
권대근
문학박사, 명예철학박사
I. 들어가며
오인태 시의 출발점은 ‘공존’과 ‘상생’이라는 생태적 세계관을 축으로 한다. 이는 오 시인의 현실 인식과 작가정신의 발로다. 그는 언제나 시 작업을 통해 프로페셔널 안에 머물고자 몸부림치며 문명 속에서도 변하지 않으려는 선량한 시민으로 남으려 한다. 상실의 아픔으로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고뇌하며 잃어버린 공존을 위한 순수를 찾아 떠나고자 한다. 그리하여 ‘나’를 철저히 탐색하면서 개인을 초월하여 인간과 자연의 본질을 추구한다. 그의 시는 단순히 환경 파괴 문제를 소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구상에서 삶을 영위하는 올바른 방식이 과연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철학적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미적 감동과 시적 신뢰를 획득한다. 시인의 정직성과 성실성이 탁월한 그의 시적 상상력을 만나면, 어떤 사물도 속살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그의 시를 관통하고 있는 풍경의 이데아는 ‘공존’의 미학 속에서 하얀 살결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도시문명의 염증에 시달리는 삶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어서 감동을 준다.
한마디로 오인태 시의 특성은 식물성적인 서정이 승화된 상생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신은 죽었다”고 한 니체의 선언은 현대적 삶의 모습을 단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가공할 정도로 기계화되고 있는 현대문명에 대한 처절한 외침이 아닐 수 없다. 기계화된 문명 속에 사는 현대인은 기계와 닮아가고 있다. 시인 오인태는 편리를 좇아 쉽게 현대문명에 동화되려는 사람의 반대편에 서고자 한다. 이런 측면에서 그의 시는 우리가 재현해야 하고, 되찾아야 되는 당위성의 세계를 호명하는 시편들이기에 어떤 다른 시인의 시보다 문학적 호소력이 강하다. 뿐만 아니라 작가적 역할과 사명이 이념으로 구체화되지 않고 정서의 등가물로 형상화되고 있다는 데서 문학적 가치 또한 크다고 하겠다. 시집 <아버지의 집>에는 3부에 나누어 총 62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각 파트에는 시적 동류항으로 연계된 시편들이 한데 묶어져 시인의 시적 특성이 범주화되고 있기 때문에, 이 시집의 대표시 두 편을 뽑아내어 분석해 보면, 오인태의 시적 특성을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II. 펼치며
자아와 세계와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게 서정의 원리다. 그래서 서정 장르의 특성을 한마디로 ‘세계의 자아화’라 한다. 문학은 ‘자아’와 ‘세계’라는 두 층위간의 결합 양상에 따라 갈래가 생기지만, 시의 경우는 대체로 자아와 세계가 만남으로부터 생성된다. 오인태 시의 시적 가치는 그 만남의 반응이 미적 정서로 형상화된 데서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외부 세계의 충격에 대한 유기체의 반응이 인간의 존재 양식이라 할 때, 오 시인의 경우, 이 반응은 단순한 수동적이 아니라 그 외부 세계를 자기가 갖고 싶어 하는 세계로 변용시켜 자아와 세계가 동일성을 이루도록 하는 능동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시인의 마음은 수동적 기록자인 동시에 능동적 참여자인 것이다. 그래서 오인태의 시 세계는 환상적 세계요, 가정의 세계이며 좀더 낯익은 말로 표현하면 가능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오인태 시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은>은 존재의 ‘공생적 다원성’의 시작을 보인다. 즉 인간중심주의적 사유가 아닌 ‘새싹’, ‘새잎’, ‘올챙이’, ‘송사리’, ‘송아지’, ‘강아지’ 같은 연약한 것들의 생명적 네트워크 질서 속에서 존재의 의의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보인다. 물론 여기에는 낯설게 하기 기법과 이유충족률이란 논리적 사고 원리가 적용되었다. 시적 화자인 서정적 자아의 시각도 예사롭지 않지만 시의 언어 구조 또한 매우 논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어 단연 눈길을 끈다. 시도 하나의 유기체임을 전제할 때, 이 시는 유기체의 잘 짜인 구조가 통일성을 가져와 그 속에 내재된 질서가 하나의 리듬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아래 시는 두 개의 명제가 하나의 문장을 이루면서 앞의 진술은 상술의 지위를 갖고 뒤의 진술은 상술의 근거가 되는 전제의 지위를 가짐으로써 가장 설득력이 있는 논리구조로 취한다. 이로써 이 시는 주장하는 부분과 이유를 대는 부분이 적절히 교차하면서 긴장과 이완의 맛을 주는데, 이런 리듬감에 더하여 시각적 이미지 단위를 부각시키기 위해 동원된 ‘졸래졸래’ ‘올망졸망’ 등의 의태어가 적절하게 양념처럼 가미되어 현대시가 잃어버린 음악성을 되찾아내고 있어, 시의 맛을 배가한다. 오 시인은 일상인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데에 눈길을 두어 삶의 의미, 즉 사물의 진리를 추구하려 함으로써 시의 본질에 접근한다.
다시 봄이 오고
이렇게 숲이 눈부신 것은
파릇파릇 새잎이 눈뜨기 때문이지
저렇게 언덕이 듬직한 것은
쑥쑥 새싹들이 키 커가기 때문이지
다시 봄이 오고
이렇게 도랑물이 생기를 찾는 것은
갓 깨어난 올챙이 송사리들이
졸래졸래 물속에 놀고 있기 때문이지
저렇게 농삿집 뜨락이 따뜻한 것은
갓 태어난 송아지, 강아지들이
올망졸망 봄볕에 몸 부비고 있기 때문이지
다시 봄이 오고
이렇게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새잎 같은 너희들이 있기 때문이지
새싹 같은 너희들이 있기 때문이지
다시 오월이 찾아오고
이렇게 세상이 사랑스러운 것은
올챙이 같은, 송사리 같은 너희들이
송아지 같은, 강아지 같은 너희들이 있기 때문이지.
-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은> 전문
인용된 시는 세상을 보는 작가의 세계관을 드러낸 시다. 작가의 인식이 얼마나 생태적 합리성에 접맥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 시를 통해서 오인태 시의 특성을 대충 추측해 볼 수 있는데, 시어만 보더라도 하나하나가 심상의 확대를 가져올 구체어들로 연속되어 있다. 이는 상상력과 연상에 의해 감동을 창출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충만하다는 것이다. 삶의 중심에서 떨어져 있는 연약한 것들을 수차례 ‘너희들’로 호명함으로써 시인은 생태적 세계관으로 우리네 삶의 본질을 깊이 있게 포착하고자 한다. 사물에 대한 시인의 뜨거운 가슴을 느끼게 하는 이런 시가 70여 편의 시 중에서도 왜 평설에 제일 먼저 인용되느냐 하면, 시의 명구名句란 제 물상에 대한 강렬한 정서적 반응으로 빚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시는 인간 중심의 생각, 다시 말해 전통적 자연관으로는 어떤 것도 아름다울 수 없다는 역설의 메시지를 교만하고 오만해진 인간들에게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한다는 데서 인식 구조로서의 문학적 기능을 다하고 있다. 좋은 시가 낯설게 보기를 통해 새로운 인식을 형상화하는 것이라면, 오인태 시의 구성미학은 삶의 원형을 찾아 그것을 형상미학으로 재구성하는 데서 그 가치가 빛난다고 하겠다.
문학이란 미를 탐구하는 작업이다. 당연히 시 작업 또한 미를 구축하는 작업이어야 마땅하다. 그렇게 하려면 관념이나 정서가 양식화되어야 미적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위의 시를 보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에 대한 서정적 자아의 인식은 매우 주관적이다. 그렇지만 시인은 상징을 활용해 정서의 양식을 꾀함으로써 생태의 중요성이란 관념의 노출을 적절히 제어하고 있다. 시인은 새싹이 돋고 올챙이가 놀고 식물이 커가고 송아지나 강아지 같은 것들이 존재하기에 ‘세상이 사랑스럽고 아름답다’라고 인식한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은>에 등장하는 주요 소재들은 모두 삶의 한 복판에 떨어져 존재하는 것들이다. 이처럼 오인태는 대상과의 거리에서 진실한 삶의 표정을 읽는 것이다. 이 시에 있어서 주제의 발현은 세계 혹은 사물과의 만남에서 비롯하되 그 만남은 매우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인용시는 매우 개성적이다. 오인태만의 사물에 대한 특별한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그러나 범부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시인은 ‘seeing as’의 관점으로 포착하여 주관적 인식 세계로 변용시킴으로써,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성취하였기에 이 시는 훌륭한 서정시가 되는 것이다.
프롬은 인간의 가능성이 충분히 실현될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의 특성을 ‘형제와 같은 연대감을 지니고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사회’로 서술함으로써 애정의 본질을 말한 바 있다. 현대는 그런 애정이 필요한 사회다. 가슴에 문을 닫고 나와 나, 나와 식물, 나와 동물 사이에 벽을 높이는 단절의 공간에서 자기도취에 만족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현대인이라면 오인태는 가슴과 눈을 열어 자연이 보내는 발신음을 듣고자 자연 속에서 언제나 내포적 자아를 취한다. 여러 가지 형상으로 다가오는 사물을 직관하고, 정서적 반응을 보이며, 사물의 속살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시안을 가졌기에 그가 창조해낸 생산물은 결코 예사로울 수가 없다.
상생이나 공존의 미학이 우리 삶에 필요하다는 논리적 접근은 소외나 단절이 현대 사회의 특성으로 파악되면서부터 줄곧 호명되어 왔던 이슈다. 오인태 시인 역시 시인으로서 사회적 책무를 저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인권이나 평화 그리고 통일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의식을 지향하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시인으로서의 진정성 확보를 위해서도 이런 현실 인식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이는 이 시집의 제목을 ‘아버지의 집’이라 명명한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이 시는 아버지와 시적 화자의 단절이 주는 비극적 상황이 심리적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화해의 구도로 응축되는 ‘공존’의 미학을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과거와 현재의 거리, 실감과 정서의 거리는 오인태 시의 미적 거리가 아닐 수 없다. 삶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삶을 응시하고, 삶을 직접적인 시의 대상으로 삼되 미적 경로라는 프리즘을 가지고 삶을 응시하는 오인태 시인의 미의식이야말로 바로 시를 쓸 때 기본으로 삼아야 할 자양분이 아닐 수 없다.
한때,
아버지는 목욕탕 보일러공이었다.
쉰 나이 넘어 논 팔고 집 팔아 이농을 하고
이 공장 저 공사판 떠돌다가
아버지는 예순 넘어 하필 남의 집 아궁이에
남은 생애의 집을 지었다.
나이보다 팽팽한 얼굴에 통통한 몸집의
목욕탕 주인 과부는
걸핏하면 그 위태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의 집을 흔들어댔지만,
그래도 이만한 데가 없다며
아버지는 한사코
부들부들 떨리던 부지깽이와
부삽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런 밤에 목욕탕 문간 옆 단칸 방,
아버지의 집에는 송진 타는 냄새가 끓어올랐다.
때로는 폐타이어 역한 냄새도 섞여
앙등을 하는 것이었는데,
교대를 졸업하고도 선생이 되지 못한 채
빌붙어 아버지의 청자 담배나 몰래
축내던 때, 나는 단 한 번도 그 집을
우리 집이라 부르지 않았다.
- <아버지의 집> 부분
이 시는 시집의 제목으로 놓인 시인데,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게 보인다. 그것은 적빈의 세월을 살아온 지난 시절의 고통과 한스러운 과거를 보일러 공으로 일했던 아버지의 처절한 삶을 통해 반추하는 내용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는 서술적 시 행 하나하나의 외적 진술이 상징과 비유를 담고 있기 때문에 미적 거리가 시적 긴장감을 준다. 이 시가 감동을 주는 것은 바로, 이 시 전체가 시인 자신의 삶을 관통하면서 시인의 내적 고통과 성장이 잘 의미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압축된 서사로서 시대의 밑그림을 그려내었는가 하면 풍경화 같은 작가의 심적 나상을 너무나 솔직하게 형상화하고 있기에 삶의 다양한 의미를 환기시켜 준다. 따라서 <아버지의 집>이 환기하는 아버지의 집과 목욕탕 주인 과부와의 신분적 차이로 인한 긴장이나 갈등이 ‘아버지의 집’에 그대로 투영된다. 이 시는 아버지의 집을 통하여 세대 간의 갈등과 유산계급과 무산 계급 간의 갈등을 상징으로 환기하면서, 그 갈등을 화해로 풀어내어야 한다는 시인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는 측면에서 시의 의미를 풍부하게 했다고 하겠다.
시인의 아버지가 자신을 낳았던 그 나이에 비로소 오 시인은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더불어 살아온 것들에 이마 맞대며 연민과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는 시인의 말에 나타난 관념이 구체어의 옷을 갈아입고 상징을 형성하면서 한 편의 ‘시’로 탄생된 것이다. 이 시가 주는 맛은 역접의 상황을 불러 올 ‘하얗게 사라질 줄 알았는데’ 또는 ‘새 집에 살고 있는데’ 이후 놓여야 하는 문장을 생략한 데서 나온다. 생략과 압축이 주는 긴장에서 이 시는 탄력성을 확보하고 있다. 시인은 부정했던 과거와의 내통을 시도하면서도 그런 타자와의 내통이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음을 내비친다. 이는 자신의 삶과 내통하는 데 있어서 고통스러워하는 시인의 입장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궁극적으로 표제시 <아버지의 집>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절’과 ‘소외’의 극복이다. 시인은 그 방법으로 ‘더불어 살아온 것들에 이마 맞대기’를 선택한다. 오 시인에게 있어서 연민은 ‘나이보다 팽팽한 얼굴에 통통한 몸집의 목욕탕 주인 과부’의 아버지에 대한 횡포에 대한 용서요, 감사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들부들 떨리던 부지깽이와 부삽’을 내리지 않고 돌아가실 때까지 주인 과부의 횡포에도 참고 보일러 공으로 살면서 가계를 책임졌던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일 것이다.
단절과 소외라는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과 ‘용서’다. 이에 대한 시인의 의지는 <눈 오는 날엔>에 명징하게 나타나 있다. 시인은 ‘아버지의 집’을 받아들임으로써 피지배자와 지배자, 유산계급과 무산계급 간의 화해를 시도하고, 상생의 길을 모색할 정도로 인간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시의 마지막 행에 ‘도대체 내 가슴에 아궁이처럼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이 집은?’하며 강한 회의를 나타내는 부사 ‘도대체’와 이 시의 핵심어 ‘집’을 강조하여 그 끄트머리에 의문부호를 남긴다. 단절과 소외를 극복하는 과정에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을 솔직하게 드러내어 독자와의 공감대 형성을 꾀하는 것은 시적 신뢰를 얻기 위한 작가의 세심한 배려라 하겠다.
III. 나오며
오인태는 인간이 아닌 작은 식물이나 약한 동물 등에 눈길을 떼지 않는 생태적 합리성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의식 있는 시인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속에서 인간에 의해 핍박받고 살면서 무시당해 이미 주변화된 생물에 인격을 부여하는 데 인색함을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의인법의 삶을 산다. 자연의 생태적 특성을 인간 생활의 원리와 접합시키는 수법으로 시를 쓰는 그는 철저하게 구체어를 통해 상상력을 변용시키는 감동 미학을 구축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독자에게 맛이 있는 시를 선사해왔다.
남해 미조 촌놈횟집을 즐겨 찾는 서민이기에 그의 시적 질료들은 향토적이고 토속적이면서도 일상적인 것들이다. 작고 고개를 낮추고 사는 보잘것없는 것들이다. 그렇다고 주제가 거창하거나 수사가 화려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시를 읽고 있으면 큰 감동을 느끼게 되는 건 왜일까. 지극히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것에 눈길을 주고, 자기 것보다도 남의 것을 더 챙겨주는 배려심이 큰 때문일 것이다. 갈등과 반목보다도 상생과 공존을 지향하기 위해 사물을 생태적 세계관으로 호명하고, 그것들에 내포된 의미를 찾아 우리네 삶의 원리로 환치시켜내는 탁월한 능력도 한 원인이라 하겠다. 거대하고 거룩한 지구적인 것에서 크고 화려한 길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 시인은 지극히 볼품없는 약하고 일상적인 것에서 작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서민적 삶의 태도를 취하기에, 그의 시가 감동적으로 읽히는 것이리라. 제대로 시를 볼 줄 아는 독자들은 큰 것이 주는 압도감보다 작고 섬세한 것이 주는 소박한 감동에 더욱 매료되는 법이다. 이런 작은 것에 대한 배려나 찬양은 시의 미덕이다. 생활에 힘들어하는 이를 구원해야 할 작가적 사명이기도 하다. 현대시의 독자들이 타락된 시어에 지쳐 있을 때라 더욱 큰 감동으로 다가선다고 하겠다.
3부 70여 편에 담긴 오인태의 시선은 작고 여리고 애틋한 사물들에 대한 애정으로 물결친다. 주변에 널려 있는 사물들을 인격화시켜 존재 가치를 고양시키는 시적 작업이 전체 시를 관통하며 그림자 형상을 이루고 있는 것은 시인 스스로가 삶의 부피와 무게를 포용하겠다는 뜻이리라. 미처 깨닫지 못한 생의 원리를 발견하여 시로 승화시켰기에 독자들은 그의 시적 지향성에 신뢰를 보낸다. 오인태가 이런 독자의 신뢰를 오래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은 카페나 레스토랑 같은 고급스런 곳보다도 갯내음이 나는 어촌의 언덕길을 오르며 야생초에 눈길을 두고, ‘용서’를 소주잔에 담기 위해 촌놈횟집을 즐겨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시집 《아버지의 집》은 의인법의 삶을 지향하는 오인태 시인의 삶이 육화되어 있다고 하겠다. 시적 특성은 식물성적인 서정이 승화된 ‘공존의 미학 세계’라 하는 데에 이견을 없을 것 같다. 탁월한 상상력과 역설의 시학이 시 창작 방법론으로 작용하고 있기에, 그의 시 세계는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고, ‘되찾아야 할 것’을 되찾게 하는 ‘가능의 세계’를 충분히 열어 갈 수 있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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