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세기 거제시 일운면 지역의 민원 청원서 「등장(等狀)」4편 소개 ⑫>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지면에는 경남 거제시 일운면 지역의 민원 청원서 「등장(等狀)」 4편을 소개하겠다. 먼저 첫 번째 「경술년(庚戌) 1874년 3월 거제 외산저 거민등장(巨濟外山底等狀)」 또는 「경술년(庚戌) 항리등거민(項里等居民) 등장(等狀)」은 거제도 항리 마을에서 가까운 산 아래 동네(항리, 망치, 양화)의 거주민 등장(等狀)’이다. 산 아래(山底) 마을이라 하여 표고버섯을 공물로 내고 있는데, 또한 따로 어촌 마을이라고 하여 해산물(홍합)까지 바쳐야 하는 이중과세의 고통을 겪고 있으니 둘 중 하나는 면제(탈급)해 달라는 청원서다.
두 번째 「소동리 거주 정갑출(小洞里居丁甲出) 소지(所志)」는 지세포 진영 정갑출이 개인적으로 작성한 소지(所志)다. 앞서 소개했던 <항리(項里) 투장(偸葬) 사건을 다룬 1876년 「항리거민등장(項里居民等狀)」②>에서 이번 문건의 투장(偸葬) 사건을 자세히 소개한 바가 있다. 지세포 수군진영 소속의 정갑출(丁甲出)이 15리나 떨어진 항리 동네에다 부모님의 묘를 썼다. 이에 항리 주민들이 마을의 풍수지리(맥을 끊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반대하며 관가에 고발(等狀)했다. 이에 정갑출이 이장(移葬)하겠다고 약속을 했으나 이행하지 않자 다시 두 번째 등장(等狀)을 청구해, 관사(官司)에서 이장(移葬)을 강제토록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즈음 1차 「항리거민등장(項里居民等狀)」이 접수되던 시기에 정갑출이 개인적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지(所志)를 작성해 관청에 올리려 했으나 이미 항리 마을의 「2차 등장(等狀)」이 접수되고 관청의 판결이 내려졌기에, 이번 정갑출의 문건은 사용처가 사라짐으로 인해, 항리에서 이 문건을 따로 받아서 마을 문건들과 함께 보관해 온 것으로, 사건의 가해자인 정갑출(丁甲出) 개인이 자신의 입장에서 작성한 청원서다.
세 번째 「계축년(癸丑) 1853년 1월 항리거민인등장(項里居民人等狀)」 또는 「계축년 항리거민인등장(項里居民人等狀)」은 항리 주민들이 관아에 제출한 소지(所志, 청원서)로, 마을의 공동 수익원인 상선 중개권을 개인이 독점하는 것을 막아 달라는 등장(等狀)이다. 포구의 중개권 수익을 '마을 공동 기금'으로 관리하여 마을에서 사용하는 공전(公錢)을 확보해 마을 공동체의 경제적 자립을 추구하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인다.
네 번째 「기유년(己酉) 1849년 3월 항리망치양화등이장(項里望峙楊花等里狀) 등장(等狀)」 또는 「기유년 항리망치양화등이장(項里望峙楊花等里狀)」은 거제시 일운면 항리, 망치, 양화 주민들이 관청에 제출한 소지(所志, 청원서)다. 송전(松田, 솔밭)의 '직목(直木, 곧은 나무)'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직목감관(直木監官)'이라는 직책을 신설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두거나 부역을 시키며 괴롭히니 본디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이러한 신설 직책을 없애달라는 민원 청원서다.
● 「경술년(庚戌) 1874년 3월 거제 외산저 등장(巨濟外山底等狀)」
이 문서는 ‘거제도 항리 마을에서 가까운 산 아래 동네(항리, 망치, 양화)의 거주민 등장(等狀)’으로, 조선시대 백성들이 관청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올린 '소지(所志)'라는 민원서다. 내용인즉, "우리는 바닷가에 살면서 산나물(표고버섯)과 해산물(홍합) 공물을 이중으로 부담하고 있으니, 제발 하나만 면제해달라"는 절박한 호소다. 마을 이름이 '산저(산 아래)'라고 해서 산의 특산물(표고버섯)을 내게 하고, 실제 사는 곳은 바다라 해서 해산물(홍합)까지 내게 하는 이중 과세 상황이다. '거듭 징수한다‘는 첩징(疊徵)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 문서는 조선 후기 공납제도의 모순을 잘 보여준다. 마을 이름이나 행정 구역의 명칭 때문에 실제 생산되지도 않는 물품을 공물로 바쳐야 했던 백성들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당시 백성들은 아예 안 내겠다는 것이 아니라 "둘 중 하나라도 빼달라"고 빌 정도로 절박한 처지였음을 알 수 있다.
1) **「경술년(庚戌) 1874년 3월 거제 외산저 거민등장(巨濟外山底等狀)」**
“다음의 민원은 원통하고 고통스러운 사정을 삼가 아뢰는 일입니다. 저희 마을 사람들이 사는 곳은 본래 고을의 외딴 바닷가 구석으로,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바다 해산물을 채취하며 살아갑니다. 산과는 멀리 떨어져 있고 바다로 막혀 있는데도, 예전부터 '산저동(山底洞, 산 아래 마을)'이라 불려 왔습니다. 일 년 내내 부과되는 각종 가구당 부역과 세금은 차치하더라도, 표고버섯(蔈古) 진상은 겨우 열 집 남짓한 마을에 생산되지도 않는 땅(백지)에서 세금을 거두니 백성들이 손쓸 방도가 없습니다. 여기에 또 해산물인 홍합(紅蛤) 진상까지 요구하여 바치는 것이 연례적인 표고버섯 진상보다 배나 많습니다. 바닷가에서 겨우 입에 풀칠하며 사는 백성들에게 이처럼 이중으로 세금을 거두는 것은 극도로 억울한 일입니다. 이 때문에 이전에 적의사(績衣使) 사또께 글을 올려 엄중한 판결(題音)을 받았으나, 아직 바로잡히지 않았으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이전의 소지(所志)들을 붙여 안찰사(按찰사, 관찰사)께 눈물로 호소하오니,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또 상세히 조사하시어, 산저동(山底洞)에 부과된 표고버섯 진상과 바닷가에서 거두는 홍합 진상 중 어느 한 쪽을 면제(탈급)해 주시어, 이중으로 거두는 일이 없도록 엄중히 판결하여 분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행해지는(결정되는) 바를 분부 내리고 명령하시어, 순찰사께서 처분을 바랍니다. 경술년(庚戌) 1874년 3월, 양화 이돈천, 망치 김천종, 항리 강주옹 등.”
[右謹陳所志冤痛事段矣 徒茅所居本邑僻在海隅環四面而居生者以海葉資生是乎 所遠於山隔於海不知前昔以山底洞稱云 一年之內各樣戶役所納姑捨是白遣蔈古 進上十餘茅白地徵稅則民無措手是白去乙 况又海物紅蛤 進上求請供上與各所年例納倍簁於蔈古進上是乎則以海口資生之氓疊之徵納極爲寃枉 故此由呈于 績衣使道是乎則 題音若是嚴載是乎矣 未得歸正豈不寃枉哉 緣由前呈粘連泣訴於明收按察之爲白去乎 伏几萬加 參啇敎是後矣 徒茅所納山底蔈古 進上與海物紅蛤 進上疊徵細細洞察是白遣山底蔈古 進上頉給是白去乃 海物紅蛤 進上頉給是白去乃 兩条中指一處分俾無疊徵之意嚴題 分付事 行下爲只爲 行下向敎是事 巡使道主 處分 庚戌 三月日. 楊花 李頓川, 望峙 金千宗, 項里 姜周翁 等]
[주1] 소지(所志) : 예전에, 청원(請願)이 있을 때에 관아(官衙)에 내던 서면(書面).
[주2] 첩징(疊徵) : '거듭 징수함‘ 또는 ’겹쳐서 거둔다'는 뜻. 마을 이름이 '산저(산 아래)'라고 해서 산의 특산물(표고버섯)을 내게 하고, 실제 사는 곳은 바다라 해서 해산물(홍합)까지 내게 하는 이중 과세 상황이다.
[주3] 제음(題音) : 제사(題辭). 관청에서 민원을 접수한 뒤 그 아래에 적어주는 판결문.
[주4] 시백거을(是白去乙) : 이두어 이옵거늘. 이거늘. 시백거내(是白去乃) ~이옵거나
[주5] 참적교시후(參啇敎是後) : 참작하시어 교지(지시)를 내려주신 후에.
[주6] 백지징세(白地徵稅) : 표고버섯이 나지 않는 땅(백지)임에도 불구하고 세금을 내라고 강요하는 전형적인 관리들의 수탈을 의미함.
[주7] 탈급(頉給) : 세금이나 공물을 면제해 주는 것을 뜻함.
◉◉◉ 「소동리 거주 정갑출(小洞里居丁甲出) 소지(所志)」◉◉
앞서 소개했던 <항리(項里) 투장(偸葬) 사건을 다룬 1876년 「항리거민등장(項里居民等狀)」②>에서 이번 투장(偸葬) 사건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놓았다. 거제시 일운면 「1876년 항리거민등장(項里居民等狀)」은 항리(구조라) 주민들의 입장에서 상부에 청원한 소지(所志)이다. 그러나 이번 지면에 소개하는 「소동리 거주 정갑출(小洞里居丁甲出) 소지(所志)」는 사건의 가해자인 정갑출(丁甲出) 개인이 자신의 입장에서 작성한 청원서다. 이 문건에는 관사(官司)의 판결인 제사(題辭)가 없고 또한 청원서를 올리는 날짜와 서명(수결)이 없다는 점에서, 관아(官衙)에다 이 서면(書面)을 결국 접수 시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 청원서 접수 전에 관사(官司)의 판결이 완료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항리(項里) 마을의 주민들이 정갑출(丁甲出)의 불법 투장(偸葬) 문제 때문에 올린 「병자년(丙子年) 항리거민등장(項里居民等狀)」으로 인해 항리 주민의 1차 등장(等狀)이 접수되었다. 그러나 관부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정갑출(丁甲出)이 이장(移葬)을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항리 주민들이 2차 「항리거민등장(項里居民等狀)」까지 접수 시켰고, 다시 관사의 판결이 완료됨으로써 정갑출 역시 그 결과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되면서 사건이 마무리가 되었다. 어찌되었건 소동리에 거주하던 정갑출이 당시 15리 길이나 되는, 남의 동네인 항리 마을에 묘소를 쓴 것 자체가 잘못된 결정이었다. 그리고 이장(移葬)하겠다고 항리 주민에게 약속까지 해놓고 이행하지 않은 점은 정갑출의 잘못이 훨씬 큰 것으로 판단된다. 고로 관사의 판결(題辭)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 조선말기 1876년 당시, 항리(項里) 주민들이 병자년(丙子) 「항리거민등장(項里居民等狀)」을 1차, 2차, 두 차례나 걸쳐 청원했다. 내용인즉, 인근 지세포 마을의 세력자가 항리 마을의 중요한 지점에 몰래 무단으로, 불법 묏자리를 써서 장사를 지낸 ‘투장(偸葬) 사건’을 다루었다. 항의를 하자 처음에는 가해자 정갑출(丁甲出)이가 이장(移葬)하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기한이 지나도록 이행하지 않자, 이에 동민 17명이 연명으로, 이장이 나서서 호소하는 소장 등장(等狀)을 보내어, 조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관사(官司)에서는 주민들의 청원을 수락하여 이를 옮길 것을 명하고 있다.
● 「소동리 거주 정갑출(小洞里居丁甲出) 소지(所志)」
이 문서는 「19세기 중엽 소동리(小洞里) 소지(所志)」 또는 「소동리 거주 정갑출(小洞里居丁甲出) 소지(所志)」이라고 명명된 청원서다. 조선시대에 한 주민이 관청에 제출한 '소지(所志)', 즉 억울함을 호소하는 민원 진정서다. 주요 내용은 부모님의 묘를 이장(移葬)하는 과정에서 항리 마을 사람들의 텃세와 방해로 인해 겪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처분을 기다리는 내용이다. 화자(정갑출)는 형제도 없고 일찍 부모를 여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다. 부모님의 묘를 '항리(項里)'라는 마을로 이장했는데, 그 마을 사람들이 풍수지리(맥을 끊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반대하며 관가에 고발했다. 정갑출이 말하길, "이미 그 자리에 마을 사람(노 씨 등)의 묘가 여러 개 있는데, 왜 나 같은 약자에게만 안 된다고 하느냐"며 이는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행위(강압)'라고 주장했다. 관청에서 이 억울함을 조사하여 부모님을 무사히 안장할 수 있게 해달라는 간곡한 개인의 청원이다.
이 문서는 조선 후기 무덤 자리를 둘러싸고 벌어진 문중 간 또는 개인 간의 분쟁인 '산송(山訟, 묘지에 관한 송사)'의 전형적인 사회상을 보여준다. 특히 자신의 마을 땅에 다른 마을 사람의 매장을 막는 마을 간의 대립과 갈등을 잘 나타내고 있다.
2) **「1876년 소동리 거주 정갑출(小洞里居丁甲出) 소지(所志)」
우러러 삼가 뜻한 바를 간절히 아뢰옵니다. 억울한 일에 대하여 말씀드리자면, 사람이 몹시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 반드시 부모를 부르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하물며 하늘을 이고 땅을 딛고 살면서 홀로 부모를 부르지 못한다면, 그 윤리를 해친 죄는 오직 죽어서 지하에 가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일입니다.
제 팔자가 기구하여 본래 형제도 없이 홀몸으로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부모님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간의 형편은 참으로 다 말하기 어렵습니다. 자식 된 도리로서 다행히 부모님의 유골을 안녕히 모실 곳을 얻어 불효의 죄를 씻고자, 지난달 좋은 날을 택해 '항리(項里)' 근처로 합장하여 이장하였습니다.
그런데 항리 마을 주민들이 말하기를, "그곳은 (풍수지리상) 후룡(後龍)의 입수맥(入首脈)이 이어지는 곳"이라며 시비를 걸어 소송까지 제기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저같이 고립무원하고 가난한 백성이 어찌 두렵고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대체로 법전에 실린 금장(禁葬, 묘를 쓰지 못하게 함)의 법은 마을 전체의 금기나 산을 보호하는 취지에서 일반적인 것이나, 그 멀고 가까움과 금지함은 세력이 강하고 약함에 따라 결정되곤 합니다.
유독 '항리' 주민들이 묘를 못 쓰게 하는 것은 특히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위압하는 것이니, 어찌 통탄스럽고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이 마을의 주맥을 논하자면 뒤로 성북산의 높은 봉우리가 있고, 오른쪽 마을 왼쪽의 입수맥 가지 한 곳은 그 마을 사람들의... (중략) ...산맥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 항리 마을 주민인 노(盧)씨 일가의 무덤이나 그 외 타인의 무덤이 이미 3~4곳이나 있습니다. 그전에는 아무 말도 없다가, 이제 저같이 쇠잔하고 약한 사람에게만 말을 지어내어 무고를 하니 억울함과 고통이 극에 달했습니다. 밝으신 정사(明政) 아래에 감히 호소하오니, 저의 전후 사정과 딱한 사정을 세세히 살피시어 한 번의 판결로 다시 살아날 길을 열어주시고 선처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右謹陳所志切切冤枉事段夫疾痛之極必呼 父母人常情也 至於矣 身戴天立地獨未兑呼父呼 傷倫之罪惟有死日地下之目亦不得暥是白如乎 矣身八字崎嶇本無兄弟單身二十前俱失父母其間境境實難盡伸是白乎矣矣身爲其人子之道幸得父母白骨安寧之地以兑不孝之罪去月良中移葬于項里近處合窆是白加尼同里居民謂以後龍入首一脉云云 至此擧狀之境孤單貧氓豈不悚悶乎 大抵禁葬之法照載大典而塚禁洞禁皆是一般遠近在於爲山禁止在於强弱至於項里之民禁葬一事特强以威弱豈不痛寃哉 此洞主脉論之後有城北山之高嵬矣……… 處則右洞左邊入首脉枝角一處渠洞之難…入首脉山有各枝故洞里盧民之塚其外他人……者至爲三四處是乎矣 前無一言半 ……於矣 身是其殘弱揑造處辭搆誣……… 以至寃極痛之情控訴無他緣由敢……… 明政之下爲白去乎萬加……… 後矣身前後情曲細細垂察一以……… 命一視之下 千萬積善處分事 …… 行下向敎是事]
[주1] 소지(所志) : 예전에, 청원(請願)이 있을 때에 관아(官衙)에 내던 서면(書面).
[주2] 소동리(小洞里) : 경남 거제시 일운면 소동리
[주3] 정갑출(丁甲出) : 지세포진(知世浦鎭)의 이방(吏房) 정갑출(丁甲出). 1876년 「병자년(丙子年) 항리거민등장(項里居民等狀)」은 투장(偸葬) 사건에 대한 항리(項里) 동민(洞民)들의 저항을 일으킨 주범(가해자)
[주4] 구무(搆誣) : 남을 해치기 위하여, 터무니 없는 사실을 그럴듯하게 거짓으로 꾸미어 만듦.
[주5] 행하향교시사(行下向敎是事) : ‘명령을 내려주시올 일’이란 뜻. 참고로 상급 관청이나 관원이 하급 관청이나 관원에게 내리는 명령·지시 사항을 행하(行下)라고 한다. 행하는 특히 이두(吏讀)가 사용된 청원 서류에 많이 사용된다.
● 「계축년(癸丑) 1853년 1월 항리거민인등장(項里居民人等狀)」
이 등장(等狀)은 조선시대 백성들이 관아에 제출한 소지(所志, 청원서)로, 마을의 공동 수익원인 상선 중개권을 개인이 독점하는 것을 막아 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이 문서는 19세기 거제도 어촌 공동체의 경제적 자립 노력을 보여준다. 당시 마을들은 왜선 접대나 과도한 세금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 포구의 중개권 수익을 '마을 공동 기금'으로 관리하려 했다. 이를 개인이 사유화하여 중간 착취하는 행위를 관의 힘을 빌려 막으려 했던 당시 백성들의 실질적인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사료다.
3) **「계축년(癸丑) 1853년 1월 항리거민인등장(項里居民人等狀)」**
“삼가 소지(所志)를 올리는 사유를 말씀드리자면, 저희가 사는 이곳은 본래 산을 등지고 바다를 임하고(背山臨海) 있을 뿐만 아니라, 대체로 마을 경계에 표류해 온 왜선을 차례대로 접대하느라 여러 가지 비용을 감당하느라 고통이 많습니다. 그 후로 각 고을의 장사 배들이 마을에 머물 때마다, 배 창고의 물건을 조금씩 얻어서, 마을 공동의 경비(洞代)로 충당하여 부족한 마을 살림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태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마을 안의 어떤 사람이 스스로 상선 주인(鬲販主人, 중개인)이라 자처하며, 중간에서 이익을 가로채 마을로 모여야 할 자금을 모두 독차지하고 마을에 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마을 안에서 소나무 재목을 금하는 것처럼(공동 관리하듯) 이를 엄격히 해야 함에도 그러하지 못하니, 이 사유를 모아 합심하여 호소합니다.
향후 만약 함부로 상업 주인을 자처하며 이권을 가로채는 자가 있다면, 이름을 지목하여 고발할 것이니 관아에서는 즉시 잡아다가 엄히 처벌(苛治)해 주십시오. 또한 상선 관리 주 업무는 마을에서 임명한 사람이 맡게 하여, 그 수익으로 마을 주민들의 공공 비용을 영구히 충당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천만번 간절히 바랍니다. 행해지는(결정되는) 바를 분부 내리고 명령하시어, 사또의 처분을 바랍니다. 계축년(癸丑) 1월.“ 이반리(李伴里) 외 26명(서명)
[右謹陳所志情由事段矣乃等所居之他素是背山臨海兺不喩 大抵矣 洞兩界漂迫(缺)倭船一次供接是乃置各條隨應頉多故自莻後各邑與販之船留泊於洞以船滄者處畧于哉分乞得以補洞代之下記萬分之一矣 意外洞中之人自作鬲販主人是北爲遣摸出中間作害洞中而都集洞洽之資是乎矣自洞內松才萬無禁 祈乙仍于如此 右由齊聲仰訴爲白去乎 日後式有挨作啇販主人者是去等 指名呈訴是乎則自 官敎即捉來苛治是乎旀般主人段洞中所任搪嘗以爲永久遵行下以補洞民各捉隨應之費千萬祝于行下爲白只爲 行下向敎是事 使道主 處分 癸丑一月日. 李伴里 外 二十六名(手決)]
[주1] 등장(等狀) : 여러 사람이 연명하여 관아에 무엇을 하소연하는 일
[주2] 소지(所志) : 백성이 관아에 올리는 가장 일반적인 민원 서류.
[주3] 배산임해(背山臨海) : 산을 등지고 바다에 임하다. 지형적 특성상 농사가 어려워 바다를 통한 상업 활동이 생계에 중요했음을 의미함.
[주4] 격판주인(鬲販主人) : 포구에 들어오는 상선과 상인 사이에서 물건을 중개하고 수수료를 받는 '객주'와 같은 역할임.
[주5] 동대(洞代) : 마을 전체가 공동으로 부담해야 하는 세금이나 각종 부역 비용을 말함.
[주6] 가치(苛治) : 법에 따라 엄격하고 가혹하게 다스려 처벌하는 것을 의미함.
[주7] 뿐불유(兺不喩) : 이두어 ~뿐 아니라. 뿐 아닌 것. 分叱不喩. 叱分不喩.
● 「기유년(己酉) 1849년 3월 항리망치양화등이장(項里望峙楊花等里狀) 등장(等狀)」
이 문서는 조선시대 거제시 일운면 주민들이 관청에 제출한 소지(所志, 청원서)의 초안으로 보인다. 신청인들이 거주하는 마을(지세포진영 관할의 송전 지역)에 있는 '직목(直木, 곧은 나무)'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감관(監官)을 차출하여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으니, 이 직무를 영구히 폐지해 달라는 청원이다. 원래 송전(松田, 솔밭)을 관리하는 감관(監官)만 있으면 되는데 곧은 나무(直木)를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새로운 직책(직목감관)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두거나 부역을 시키며 괴롭히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이 문건은 존재하지도 않던 '직목감관(直木監官)'이라는 직책을 없애달라는 민원 청원서다.
실제 왕조시대 거제도에는 보통 수군진영과 읍치 관청에서 임명된 감관과 색리, 산임(산림을 보호관리 하는 자) 등이 지역 내 산림을 맡아 관리했다. 이들은 산림 內, 버섯이나 나물, 야생 짐승까지 모두 자신의 재산인 양, 세금을 받으며 채취케 하여 주민들의 원성이 높았다고 기록으로 전해온다.
4) **「기유년(己酉) 1849년 3월 항리망치양화등이장(項里望峙楊花等里狀) 등장(等狀)」**
삼가 소지(청원서)를 올립니다. 저희들이 사는 마을은 지세진(知世鎭) 송전(松田) 아래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곳은 모두 곧은 나무(直木)가 있는 곳입니다. (나무가 있는 곳이 마을에서) 혹은 20리, 혹은 15리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풍속이 험악하고 어질지 못하여, 이 '직목'을 핑계 삼아 몰래 재앙을 옮기려는(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계책을 세우고 '직목감관(直木監官)'을 차출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예부터 송전(소나무 밭)의 감관은 어느 동네나 마을을 막론하고 차정(差定, 임명)한다는 말을 들어보았어도, '직목감관'이라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직무를) 차출하여 매번 줄지어 침학(수탈)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사유로 감히 일제히 소리 높여 호소하오니, 사또께서는 이 사정을 살펴 주시어 이른바 '직목의 소임(직목임)'을 영구히 타파(폐지)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거의 망하게 된 백성들이 겨우나마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행해지는(결정되는) 바를 분부 내리고 명령하시어, 사또의 처분을 바랍니다. 기유년(己酉) 3월. 양화리 이임 이순천, 망치리 이임 김천종, 항리 이임 장오복.
[右謹陳所志矣段矣徒所居等里處在知世鎭松田下渾處俱是直木之在或二十里或十五里是在如中近來俗習無良稱此直木暗生嫁禍之計直木監官差出是乎所大念(缺)古松田之監官勿論某洞某里而差定未聞直木監官者也 而今夫差出每每侵列至於是乎 右由敢此齊聲仰訴爲去乎 使道諒此敎是所謂直木之任永爲草破使此幾亡之民庶可支保事 行下爲只爲 行下向敎是事 使道主 處分 己酉三月日. 楊花里里任 李順天, 望峙里里任 金千宗, 項里里任 張奥福]
[주1] 항리, 망치, 양화(項里望峙楊花) : 경남 거제시 일운면 행정리. 항리(구조라)는 구조라 해수욕장으로, 망치는 망치몽돌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임.
[주2] 지세진(知世鎭) : 거제시 지세포에 있던 수군진영(지세포 선창마을)
[주3] 가화(嫁禍) : 자신에게 닥친 재앙을 남에게 넘겨씌움. 화(禍)를 남에게 전가함.
[주4] 감관(監官) : 조선 시대, 각 관아나 궁방에서 금전이나 곡식의 출납을 맡아보거나 중앙 정부를 대신하여 특정 업무의 진행을 감독하고 관리하는 벼슬아치.
[주5] 송전(松田) : 조선 시대에는 전선(戰船) 제작 등을 위해 소나무 숲을 국가가 엄격히 관리했는데, 이를 송전이라 한다. 또한 이 지역엔 반송치(지세포) 선재(船材) 봉산(封山)이 있어 감관이 이를 관리했다.
[주6] 행하향교시사(行下向敎是事) : ‘명령을 내려주시올 일’이란 뜻. 참고로 상급 관청이나 관원이 하급 관청이나 관원에게 내리는 명령·지시 사항을 행하(行下)라고 한다. 행하는 특히 이두(吏讀)가 사용된 청원 서류에 많이 사용된다.
○ [조선시대 거제도 산림 관리] 조선시대 거제도에는 국유지 6개의 거제봉산(巨濟封山)이 있었다. 노자산 봉산, 가라산 선재 봉산, 구천동 선재 봉산, 반송치(지세포) 선재(船材) 봉산, 등산(登山, 남부면 망산) 선재 봉산, 산방산 선재 봉산(封山)을 지정하여 관리했다. 1800년 전후에 편찬한 '만기요람'에는 거제도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126개의 송전(松田, 솔밭)을 보유하여, 그 관리를 정부에서 엄중히 하도록 지시하였고, 산림을 보호 관리하는 ‘산임(山任)’이라는 관리까지 두었다.
조선시대 거제도의 산불 화재 기록이 여러 편 전해지고 있다. 특히 거제도는 봉산은 물론, 송전(松田)이 어느 지역보다 많아 그 관리를 정부에서 엄중히 하도록 지시하였고, 산림을 보호 관리하는 ‘산임(山任)’이라는 직책을 둔 자도 있었으며, 거제부사와 각 진영의 만호는 진영의 경계 내에 발생하는 화재의 책임을 지고 파직 당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기록을 소개하면, 1782년 정조 6년 산불로 인해, 거제부사, 지세포만호, 영등포만호, 율포권관, 가배량만호 등이 장형을 당하고 파직되었다.
